아아, 신이시여. 아직도 당신 앞에 무릎꿇고 조아리지 않고, 당신에게 경배하고 경외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 존재하건만. 어째서 이단을 살려두신단 말씀이옵니까. 가현은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멱살을 잡을 분위기로 실루엣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녀석. 자신이 모시는 그 존재가, 그리도 덧없고 품위 떨어지는 단어 하나로 정의될수 있는 존재란 말인가? 점차 고조되는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며 미소를 여전히 머금은 채 우유가 담긴 잔을 기울여 속을 식힌다. 재밌네. 과연 언제까지 저 모독적인 입을 놀릴수 있을지 재어볼까.
허나 그 뒤로 들려온 말들은 어쩌면 이 사람도 평범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지금껏 제 눈을 알아챈 것을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냈던 존재는 하 사감 뿐이다. 그렇다고 하 사감과 같은 류로 취급하기에는- 태초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끊임 없는 경외를 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거죠?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봐요?"
잔을 입에서 뗀 가현은 본격적으로 흥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생각은 버리고,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신께서 명하셨답니다. 눈을 가려줄테니 물건을 찾아보라고. 물건의 위치를 알고 나서도 그냥 놓아두신 것이라면- 분명 무슨 뜻이 담겨있지 않겠나요? 물건을 찾아 바쳐야만 하는 것이라던가."
여전히 물건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던 가현은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계속 가지고 있다가는 독이라고? 당신이 돌려줄 수도 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풀리지 않는 의문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딱. 딱. 딱. 딱. 제 걸음 소리 마냥 울리는 소리에 피식 웃는다. 다섯을 베고도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리도 보채는지! 하지만 오늘은 기껏해야 요괴 하나 베는 것 고작이다. 바란다 하여 무한히 선사해 줄 만큼 의지 없는 인간 아니었으니.
채근하는 검을 무시하며 안으로 들자 제 것과 달리 독한 향이 물씬 풍겨온다. 향의 근원은 한 담뱃대였고 그걸 든 남자가 아래에서 들은 형씨이겠거니. 누구인지 확인한 후에는 안을 휘 둘러본다. 야물딱지게 어질러놓은 방을 보고 휘익 휘파람 불었다. 누구냐는 물음에는 그제야 대답했다.
"내 말이오? 형씨 옘병 때려고치러 온 사람이오."
딱 봐도 정신이 온전치 못 해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 등짝을 후려치려고 한다. 검으로- 하려다가 봐줬다. 손바닥 쫙 펴서 힘차게 후려갈기고 깔깔 웃어제꼈을 것이다.
"갖고 싶은게 있으면 직접 만들든가 얌전히 기다리든가 해야지! 으이? 남으 사업장에서 이러는 거 아니올시다! 형씨!"
거센 손짓만큼 호쾌하게 떠들고 검 다시 허리에 꿰었다. 더 보채기 전에 요괴 잡으러 가야겠지만 방금 좀 걸리는 말을 들어서. 남자의 정신이 어떤가 낯빛 스윽 들여다보고 묻는다.
요란스럽기도 하지. 배달을 가야 한단 말도, 키가 정말로 크단 말도 한참 밑에서 들리니 이 조그마한 존재들이 여간 고생이 아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웅성웅성, 왁자지껄. 그 요란법석한 북새통에서 아회 불현듯 떠올린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존재들이 혈서는 어떻게 쓴 거지...? 하나를 희생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여럿 모였나...? 어찌 되었든 참 다급했겠구나.
"예, 돕겠습니다."
잠시 조용하더니만 그나마 귓가에 들리는 소리로 상황 이해가 간다. 땅신령이구나, 힘들 법도 하지.
천부의 인파 속에서 연은 간신히 빠져나와 TOLK TO TOLK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지친 몸을 출입문에 기대며 창밖을 건너다보면,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뒤덮여 있다. 천부가 이렇게 붐빌 것이라고 생각 못 했는데. 도착하고서 연은 전에 일을 도와주러 들렸던 카페를 찾으려다 저 인파 속에 섞여 버렸으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이었다. 돌아갈 때는 상황이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연은 카운터로 다가가 저번에 먹었던 크림 조각 케이크와, 새콤한 과일 맛 음료를 주문한다. 그때 한 번 맛을 보았던 것이 마음에 쏙 들었던지라. 들리면 한 번 더 찾아가야지 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찾아올 수 있었으니.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 그 기다리는 조차 즐거운 것이라. 다리 휘휘 흔들며 연은 케이크가 나오길 기다린다.
환장할 노릇이다. 인간이랜다. 게다가 코 꿰인 유일한 인간. 그런 인간이면서 어찌 이런 모독적인 말들을! 자신이 이루어내지 못한것에 대한 격한 질투심과 광신이 한데 섞여 형용할 수 없는 괴랄한 감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일단 꾹꾹 눌러 참았으나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자. 참자. 일단 참아야 뭘 더 알아갈 수 있을테니까. 빵을 입 안 가득 채워 넣으며 분을 삭인다. 코 꿰인 유일한 인간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번 하 사감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 존재와 연관이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마주하겠지. 자신의 가려진 시야를 알아차린 것은 그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럼 이 시야가 어째서 남아있는거죠? 이상한 일이예요. 어떤 부분이 아직 그 분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했길래.."
고개를 모로 갸웃 기울이던 가현은 그 말에 눈을 몇번 깜빡였다. 엿 먹이고 나온 집안이라. 지금 당장 가현의 상식 상으로는 떠오르는 집안이 하나 있기는 했다. 허나, 명확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일단 넘겨짚고.
"으음~ 찍혔을 리가요. 요즘 저희를 꽤 자주 찾아오시기는 한답니다."
입학식부터 시작해서, 지난번 수업까지. 일년에 몇번 볼까말까한 존재를 벌써 두번씩이나 본 것에 대한 의아함을 담아 말하며 가현은 그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헌데. 신 님과 관계가 있다고 하신다면.. 혹시 당신도 제사장 가문이었나요?"
여러 요청이 적힌 목록 위에 검지를 얹는다. 하나, 둘... 글씨를 다 읽을 때마다 한 칸씩 내려가던 손가락이 곧 마지막 요청에서 멈춘다. 총 다섯. 평범해 보이는 것부터 글씨에서부터 다급함이 느껴지는 것까지 그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어디로 가야 지루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이번에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가던 손가락이 네번째 요청에서 멈춘다. 붉은 글씨는 이걸 포함해서 2개지만, 선물가게보단 주술용품점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냥 깜빡한 것일수도 있구나. 응.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존엄한 존재 앞에서 제가 어떤 불만을 표할 수 있겠냐만은.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건만. 결국 자신 역시 잊혀질 뿐이구나. 제 왼쪽 눈 위로 손을 올려 매만지며, 조금 쓸쓸해 보이던 가현은 그새 태도를 고쳤다. 고작 이 정도로 꺾일 신념이었다면 지금껏 품고 살지 않았을 것. 분명 자신이 충족시키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겨 의심치 않았다.
"그.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시나요? 자주 방문하셔요?"
직접 물어봐주겠다는 말에 눈을 빛내며 또 질문을 한가득 늘어놓는다. 마음이 한없이 설레여오기 시작한다. 다시. 다시 또 그 무궁무진한 존엄성을.
"..... 당신에 대해 들은 적 있는것 같아요. 가문 어른들 사이에서. 으응, 당연히 신기하죠. 파문당했는데도 신 님에게 어여삐 여겨지시며 일상을 영위하고 계신 거잖아요?"
이쯤 되니 자신이 들었던 그 사람이 맞는게 확실해졌다. 해씨 가문의 파문된 아이. 그게 이 사람이었구나. 사실 신기하다기보단 질투심이 더 컸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가지지 못했는데. 그걸 이 사람은 이렇게나 당연히. 허나 그것을 쉬이 티내지 않으며. 임씨 가문 특유의 웃음 너머로 감추며, 가현은 빵을 마저 먹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빵 하나는 진짜 맛있는걸. 적당한 기공에 잘 구워진 겉과 촉촉한 속의 조화라니. 이것도 꽤 자주 먹을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