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런 날 있지 않나. 평소 잘 먹던 것도 못 먹겠고. 잘 하던 것도 영 손에 안 잡히고. 만사가 밍숭맹숭한 날.
제게는 오늘이 딱 그랬다. 아침부터 영- 상태가 좋질 않더라니. 저녁엔 방에 돌아와 옷 갈아입고 잠깐 눕자마자 까무룩 잠들었다. 잠결에 딱딱 대는 소리 들린 것 같으나 묘하게 둔감해진 귀가 적절히 소리를 걸러내어 한 숨 푹 자고 말았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창 밖은 깜깜 복도는 조용.
참 좋은 새벽이다. 그래. 시간을 제대로 조졌군.
"흐아-함."
어쨌거나 잠은 깼으니 일어나기로 했다. 비실비실 일어나서 세수 한 번 하니 새삼 배가 고파졌다. 아니. 술이 고파졌다. 원래라면 저녁에 나가 얼근하게 마시고 한 병 들고 와서 이 시간 쯤 마셨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못 했으니 당연히 마실 술도 없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다른 기숙사라면 모를까 적룡에는 술 나올 곳이 한 곳 있었으니까. 히히- 혼자 실없이 웃으면서 실내용 얇은 원피스 위에 적룡 두루마기만 슥 걸쳤다. 머리는 묶었지만 안경도 귀걸이도 벗어둔 채 곰방대도 없이 역린만 챙겨 들었다. 검의 늑대 조각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또 쫓아올 테니 같이 가자. 아이고. 팔자에도 없는 애완검을 들였어. 내가."
킬킬킬... 혼잣말에 또 웃고 방을 나선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물론 기숙사 전체가 적막하다. 잘 시간이 다 이렇지. 빈 복도를 홀로 걸으니 꼭 귀신이라도 된 것 같다만. 오늘은 누구 놀리러 갈 생각도 안 든다. 계속 설렁설렁 걸어서 한 방으로 향했다. 적룡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술이 있는 곳. 물론 순순히 얻어마실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일단 시도나 해보자.
걷고 걸은 끝에 하 사감의 방 앞에 멈춰서 제법 얌전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두드리고 딱 3초 기다린 다음에 문 손잡이 잡아 잠겨있지 않았다면 열어재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문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윤하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금방 없어져버릴 가문에 명예란게 필요한지도 의문이었고 만일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산산조각 내버릴 뿐이었다. 그의 이름 가장 첫자 또한 그에겐 그저 증오의 대상일뿐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번에 다 털어버렸으니 가현 입장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가현의 말에 그는 묵묵히 자신의 밀크티만 홀짝일뿐이었다. 이해와 포용은 공존할 수 없다, 라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윤하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가 더욱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당사자의 입장에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가문이 몰락해버렸으니 남은 자들 입장에선 자신이 더욱 두려웠을테니 말이다.
"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 가끔은 두려웠거든. 시간이 점점 지나서 이 감정이 희석되고 이성이 좀 더 자리를 잡았을때 내가 이 사람들을 용서할까봐 말이야. "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좀 더 관대해질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가끔 착잡한 심정에 빠질때가 있었다. 특히나 가문에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도 조금은 남아있었기에 아이들의 얼굴을 볼때마다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자신이 저렇게 어릴때 당했던 짓들을 곱씹으며 버텨냈지만 나약해지는 자신을 볼때마다 몰려오는 자괴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 네 말을 들으니 그럴 필요는 없겠네.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 "
다시금 아이스크림으로 스푼을 가져간 그는 스푼에 반쯤 차도록 아이스크림을 퍼서 입안에 넣고선 단맛을 음미했다. 깔끔한 단맛이 입안에 퍼지고 그 시원함이 머리를 자극해 복잡해지던 생각을 조금은 풀어둘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는 잠깐 멈췄던 말을 이었다.
" 내가 나약해질 것 같으면 꼭 다시 말해줬으면 좋겠어. "
물론 그럴 일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니까. 그렇게 다시 빨대로 밀크티를 크게 한번 쪽 빨아들이니 가현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는 빨대를 입에 문채 고개를 끄덕이고선 웃으며 덧붙였다.
" 나까지 스무명. "
해맑은 웃음. 천진난만함이라고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웃음 속에는 자신의 몸을 흐르는 피조차 용서하지 못한다는 감정 또한 느껴졌다. 아예 자신의 가문이 존재했던 흔적을 없애버리려는 그는 자신마저 그 흔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슬픈 목소리에 눈썹의 각도가 느슨하게 꺾여 여덟 팔 자를 그린다. 한때는 이 목소리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갖은 재롱을 부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위로하곤 했는데, 이제는 어조에서 거짓임을 너무나도 쉽게 알게 되는구나. 입안이 써야 하는데 어째서 오늘은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런 상념에도 잠기지 말자.
"그분께서 형님께 말씀은 전해드렸답니까? 형님을 언급하시길래 말을 전해달라 하였는데."
나긋한 목소리로 되묻고는, 시선을 마주하듯이 고개를 들어 당신을 쳐다봤다. 감긴 눈이라고 한들 당신을 볼 수 있다는 듯. 방금 전에 했던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내가 말을 전해달라 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정도의 존재인가, 아니라면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만일 말을 전했다 쳐도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그 자체로도…."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가족에게 값어치를 따지는 것은 어렵다는 듯 말을 천천히 줄인다. "존경스러운 분이지요." 손의 떨림이 멈추면 몸이 떨릴까 걱정이 되었건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는 모양이다.
''어찌 이 아우가 어리석지 아니하겠습니까. 10년 전 일찍이 졸업하신 형님에 비견하면 영민하다 하기엔 모자라지요."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왜 당연하게 내 입맛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 무슨 낯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한 짓이 있잖아. 그때 당신도, 나도 죄를 씻을 수 있었을 텐데, 나를 그런 꼴로 만들고 결국엔 혼자 지긋지긋한 북부를 떠나서─
"아, 참으로……."
기쁩니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마치 어린 시절의 한때처럼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 이곳은 석류와 로젤 열매로 만든 차가 그리도 맛이 있다 히덥니다. 향도 뛰어나고, 맛도 일품이라지요."
천천히 아회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 앞으로 숙인다. 어찌 형님을 일어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난 아우가 가까이 다가가는 수밖에 없지요. 그때처럼 다가가면 되는 겝니다, 암. 피하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손 뻗어 양 뺨 부여잡으려 하더니, 고개 살짝 당기듯 하려 했을 것이다. 친근한 사이라는 듯.
"뜨겁게 마시거니와 색도 마침 붉은색입니다, 형님. 좋아하시잖아요? 붉은색."
정원이 아주 새빨갛던데 싫어할 리가 없지요……. 아회 감겼던 눈 뜨인다. 당신과 눈 온전히 마주하려 하며 서서히 호선 긋는다.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어찌나 좋은지 학당에 입학했더니 장인들이 선추도 홍옥으로 깎아주지 무업니까. 아우가 좋아하는 겁니다, 형님. 그러니 이 정도 무례는 봐주실 것이지요, 응?"
동생이잖아요. 호선 그은 눈 뒤로 나지막이 속삭인다. 둘째 부인 닮아서 어여쁜 것 빼곤 아무것도 없는 동생.
나즈막한 발소리 대신하듯 검 울어대는 소리 났다. 그런 검 달래듯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안 돼. 지금은 밥 없어.
하 사감의 방 앞. 문 두드리고 열려던 손 무색하게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열리자마자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하 사감- 보다 펄럭이는 하얀 가운 먼저 보인다. 거기까지면 놀라지 않았을 것인데. 대뜸 나온 말이 화 내는 목소리 아니라 어벙해졌다. 눈 크게 뜨고 입 벌어진 채 하 사감 빤히 보고 있으니 들어오란 듯 옆으로 비켜선다. 그것 보고 뭐랄까 홀린 것 마냥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고서야 퍼뜩 정신 차려 별 희안한 것 보는 눈으로 하 사감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싸돌아댕긴다고 화도 안 내고 왜 그러시오? 징그럽게."
이제 보니 하 사감 얼굴 좀 벌겋다. 술 마셨다고 저런 거 같진 않은데. 온화 자연스레 품에 안은 검 보았다. 이것 돌려주러 온 줄 알고 들떴나? 진짜인가? 묻는 말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돌려주긴. 어림도 없지. 한 팔로 역린 더 꼭 안고 한 손 들어 하 사감이 든 와인병 가리켰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얘는 어딜 가든 쫓아오니까 데려온 것 뿐이오. 거 술 좀 나눠주소! 저녁에 자느라 못 나갔단 말이네."
알콜 부족인지 다른 이유인지. 묘하게 투덜대는 말투로 말을 하곤 늦게서야 방 안을 둘러본다. 천천히 빙 둘러보는 것이 뭐가 있나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앉을 곳 찾는 거 같기도 한데. 술 얻어내는게 먼저인지 둘러본 끝에 와인병 보고 하 사람 얼굴 본다. 그것 빨리 내놓으라는 듯.
"변할 리 없는걸? 강하게 자리잡은 신념은 날이 가면 갈수록 커지는 법이며.. 타오르는 증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꺼지지 않으니까. 두려워할건 없다고 생각해."
첫 번째 대목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두 번째 대목에서는 하 사감님에게 들은 MA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제아무리 자신의 이성이 자리잡게 되더라도 그 이성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점차 세를 불리는 것이 신념이며 제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씻겨나가지 않을 인간들의 업보는 꾸준히 지속될 것이었으니. 시간이 흘러 희석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급하게 해치우려 할 필요 없어. 뭐든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어가봐~ 서두르다간 분명 중요한 것 한두개를 놓치고 그때 가서 후회하게 될걸?"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느낀것 중 하나는 빠르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빠르고 정확하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두가지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일에 있어서 급하게. 아마추어처럼 나서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공들여가며 가장 완벽하고 합리적인 결과를 찾는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 남학생의 복수에 있어서도 크게 다를건 없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없고 씻겨나가지 않을 원한을 품고 있다면 사람은 더욱 치밀해져야만 한다. 계산적으로. 그리고 이익을 따져가면서.
몽블랑을 한입 더 먹으려던 가현은- 그 말에 포크를 놓고 형용할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자. 이게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말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저 의도가 뭘까. 잡아달라고? 아니면 응원하라고? 자신은 끝내 저 남학생의 죽음으로 향하게 될 불순한 계획을 애원하며 막을 만큼 오지랖 넓고 선한 사람은 아니나, 그렇다고 제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길을 향하겠다고 이러고 있는걸 그냥 봐주고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벽을 때리는 꼴이 보고 싶은걸까? 그렇다면 기꺼이 보여줘야지. 다시금 가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금방이라도 벽을 향할 기세를 내뿜다가- 이윽고 멈춘다. 아까 우동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깍지를 끼고 가현은 히죽 웃는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대화를 끊어버릴 순 없지. 슬슬 재밌어지려고 하니까.
".... 아하하~ 참 곤란한 난제를 던져주는구나,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잘도 그 인원에 널 포함시키고 있네?"
비뚜름한 시선이 눈 앞의 남학생을 향한다. 하여튼 이래서 미친다니까. 그냥 좋게 좋게 예뻐해달라고 하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는걸까. 그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자신도 이렇게 골머리를 썩혀가면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과거부터 그런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포용심이 정점에 달한 이 시점에서 저런 이야기까지 들어버렸으니 여간 환장하는게 아니지 싶다. 우동집에서도 이야기를 시작할 적 그렇게 강조했건만 뭐가 아직 성에 안 차는걸까.
"내가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응? 붙잡을까, 아니면 방관할까, 그것도 싫다면 저학년때처럼 그만 하라고 벽을 때려버릴까. 이도저도 다 아니라면..."
영원히. 내 곁을 평생 떠나가지 못하도록 네 발목 묶어 우리 집 한켠에 고이 모셔둘까. 비틀린 미소가 입술을 타고 오른다. 자신의 집착을 그렇게나 갈망하고 있다면. 끝내 제 속 긁어가면서, 우동집에서 그렇게 어필했던것조차 끝내 몰라주고 자신을 무시한 채 마음대로 군다면. 네가 이야기한대로 나도 조금 내 마음대로 굴어도 괜찮잖아?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애정을 무시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저를 위해주는 모습이 비쳐지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자신 역시 별달리 할 수 있는게 없었지만. 제 사람을 향한 애정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것의 반대급부로, 관심이 식어버린다면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었다.
"자꾸 그렇게 재미 없게 군다면- 나도 그냥은 안 넘어가."
허나 지금은 그것과는 별개였기에, 끝내 뒤틀린 애정을 가리지 못한 채 여실없이 드러내며 가현은 웃었다. 집착의 끝을 보여줘야 그 갈증 해소할 수 있겠니. 그리 덧붙이고 나서야 포크를 들어 몽블랑을 한 입 먹을수 있었다.
무엇을 제대로 말하나 싶었더니만, 순수한 선의였다라!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파도치듯 움직인다. 토도도독, 한 번 더 물 흐르듯 부드러우나 단단한 소리를 내고 나서야 그는 생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사람을 선택하게끔, 본성을 드러내게끔 해서 가장 유용할 사람을 곁에 두게 한다라. 지극히 당신 다운 생각이고, 당신이 베푸는 선의이자 애정이겠지. 우스웠다. 나의 형님께서는 여전히 높은 곳, 제 앉아있는 곳을 기준으로 삼으니 진창 밑에서 구르던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고하신 행동을 보여주시는구나. 그것이 내게 있어 기만인 줄을 모르고. 아니, 몰라야지. 알고도 그랬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뺨을 할퀴고 물어뜯다 죽임 당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니.
"기실 그 부분에서 섭섭했습니다. 제 나이도 곧 약관이거니와, 아무 짓도 안 하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 무엇이라 불리었는지."
저는 여기에서도 유령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갖은 수모와 풍파로 인해 감정이라곤 잿더미가 되어버린 목소리로 덤덤히 읊조린다. 하고 싶었던 말을 눌러 담으며 다른 말을 꺼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 곁엔 아무도 없었으면 했는데 왜 기껏 채워둔 물 잔을 엎지르십니까?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드러내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드러낼 것이 다른 방향으로 있지 않은가.
잘 새겨들었다. 그래, 새겨듣기만 했다. 타인이 돌발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당신이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당신이 방금 전까지 누구의 동생이겠느냐 얘기하던 존재가, 새겨들을 것만 같던 존재가 대담히도 이런 사달 벌이니 어떤 생각을 할까. 역겹다? 죽여버리고 싶다? 쓸모가 없다? 이런 것이 내 동생이라니, 짜증이 날 지경이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형님께서 좋아하는 것은 저 또한 좋아하는 것인데 틀릴 리가 없어야지요."
어느 쪽이든 나랑 같은 생각을 하면 좋을 텐데. 내가 가진 생각을 내어줄 테니 그 머리를 비집고 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도끼를 가져와 그 속을 갈라내야만 볼 수 있을까. 그래, 어릴 적에 첫 요괴를 잡은 손도끼가 남아있을 터인데, 그걸 쓰면 좋을까. 태연하게 생각하던 아회의 눈은 새파란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시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뺨을 부여잡은 손가락 중 엄지가 더듬더듬 움직인다. 가면이 만져지자 아쉽다는 듯 해사하기 지었던 미소 애달파진다.
"다만 간만의 상봉이거늘, 아쉽습니다……."
나긋하게 부탁하는 것이 가면 한 번만 벗어달라는 것 같다.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설마 얼굴 더듬다 눈을 후벼파기라도 하겠나. 그럴 일은 없다.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 대신 느릿하게 한쪽 손 떼더니 손가락 까딱인다. 품 속에서 부적 둥실 떠오르며 두 냥 정도 감싸곤 날아간다. 주문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에 시간을 쓸 여력 따윈 없다는 듯, 그리하고 나서야 "눈치가 있다면 빠르게 내오겠지요."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심장 절반이 어쩌구 하는 말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온화 고개 작게 도리질 쳤다. 항상 혼내던가 화내던가 둘 중 하나인 사람, 아니, 사감이 사근사근하니 괴리감 엄청나다. 그래도 검 뽑아 승질 죽이게 할 일은 없어서 낫다. 지금은 귀찮거든.
"아-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고 계속 만족 시켜 주면서 먹이도 주면 된다 이 말이구려?"
역린이 주인을 따르는 조건들을 하나하나 역으로 나열하고 한 쪽 입꼬리 올렸다. 그깟 거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래. 뭐 별거냐. 쥐가 새끼치듯 늘어나는게 사람이요 사방 들끓는 것 요괴다. 제 죽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것 어려워서 그렇지.
방 안 둘러보니 제 방과 다를게 없다. 어질러졌다는 점이 말이다. 소파며 의자 있는 것 보고 다시 하 사감 보자 어이 없다며 새 술병 불러낸다. 불러냈으면 얼른 주던지. 히죽이면서 재밌었다느니 말하길래 친히 코 앞까지 다가가 직접 그 술병 가져오려 했다. 그러려고 손 뻗었다가 돌연 궤도 살짝 틀어 하 사감의 팔 위에 사뿐 얹는다. 그리고 천천히 느릿하게 쓸어내리려 하며 싱긋- 웃는 얼굴로 말한다.
"어째 혼자 있어도 혼자인 것 같지 않더라니. 다 보고 있으셨소?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소."
킥킥킥. 재밌다는 듯 우스워 죽겠다는 듯 실소 흘리고 하 사감의 팔에 슬그머니 제 팔 휘감으려 한다.
"같이 즐겼다면 나야 좋으나. 셈은 잘 못 된 듯 하오. 요괴는 서넛인가 베었고 인간만 여섯이었소."
그 주말 산에 풀어놓고 추격하여 잡았던 것은 모두 명실상부한 인간들이었다. 그들과 이전날 도륙했던 것 하나 더하면 여섯. 그리 말하고 하 사감 이끌어 소파로 향한다. 순순히 따라와서 소파에 앉아준다면? 건방지게도 그 무릎 위에 걸터앉아 감히 시선 똑바로 마주하려 했겠지. 한 손에 역린 늘어뜨리고. 한 팔 들어 하 사감 어깨에 두르려 하면서.
"보통 물건인 줄 알았으면 거기서 이것 갖겠다 하지도 않았을 거요. 보통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내 하나도 모를 것 분명하니. 차근히 얘기 좀 해주시구려. 무얼, 밤은 아직 한참 남았으이."
먼저 말을 꺼내주겠다면 저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잠은 진즉 다 잤고 밤은 아직 길다. 얘기할 시간은 차고 넘쳤다. 꾸밈 없는 얼굴에 해사한 웃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