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의를 끄는 그대 당최 누구인가? 그는 역으로 떠보기 위해 일부러 타인으로 착각한 듯 이야기를 꺼냈다. 어지간히 돌아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그 사람이요 흉내를 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을 때, 평온한 미소가 깨지지 않도록 일순 포갠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돋아난 핏줄을 뒤로 손가락 마디가 움찔 떨리며 새하얘진다. 아, 하필이면. 둘 중 하나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당신이다.
"아, 형님이셨군요. 그간, 무탈, 하셨는지요."
후배냐는 질문에는 이제야 당신이 누구인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흘려 넘기려 든다. 무릎 위로 손을 포개며 떨림을 억누르기 위하 무진 집중했다. 떨어서는 안 된다. 태연하게 굴어야만 했다. 일부러 함정을 파지 않았던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대화를 유도했는데, 여기서 꼬리를 말아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오늘은 무슨 배짱인지, 아니면 천운이 도왔는지 울음이 나올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가주님께서 여럿 신경을 써주시는 터라, 이전만큼 자주 앓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었다. 아니, 가문 내부에서도 아버지보다는 가주님이라 더 자주 불렀지. 여전히 그 명칭을 이어가며 덜덜 떨던 손에 마지막으로 힘준다. 뚝, 손가락 관절 옅게 꺾이는 소리를 뒤로 아회 고이 포갠 손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두며 머뭇거리다, 입 벌린다.
"형님을 부정해야 무에 쓰겠는지, 이 어리석은 아우가 늦게 깨달았을 뿐이렵니다."
여전히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말아 쥐자 그나마 떨림이 가신다. 형님, 신 아회는 잊을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 그때 제게 행했던……. 감정이 요동친다.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친다. 모두 꾹 눌러 담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오늘은 울거나 혼절하지 않을 기회가 왔다. 사랑스러운 아우를 바란다면 어울려주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때처럼 비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거울을 깨며 몇 번이고 다짐했지 않은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예. 여전히 좋아합니다."
가족임을 잊어버리는 것은 과한 처사라고. 종이를 슬쩍 옆으로 밀어내며, 아회 덤덤히도 읊조렸다. 다시금 다행을 거듭한다. 말을 더듬지 않다니, 참 다행이지.
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호랑이 가면을 쓴 이를 건너다보며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이 카페에 처음 들렸을 때 보았던 사람. 어깨에 얹고 있던 징그러운 뱀은 오늘은 없는 걸까. 기이한 문신을 가지고 있던 당신의 동료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의도로 말을 걸어오는 것일까. 주변을 살피던 연은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혼란스러워한다. 의문스럽다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다, 이어지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수상해 보였지만 케이크와 음료를 선물로 두고 갔으니 나빠보이진 않던 이. 학당을 졸업한 선배라, 후배일 자신에게 관심이 가는 것일지도 모르니. 고민하던 연은 어깨를 으쓱이나 잘 모르는 사람과 오래 대화를 섞고 싶지는 않았기에 경고하듯 말한다.
종종 그런 날 있지 않나. 평소 잘 먹던 것도 못 먹겠고. 잘 하던 것도 영 손에 안 잡히고. 만사가 밍숭맹숭한 날.
제게는 오늘이 딱 그랬다. 아침부터 영- 상태가 좋질 않더라니. 저녁엔 방에 돌아와 옷 갈아입고 잠깐 눕자마자 까무룩 잠들었다. 잠결에 딱딱 대는 소리 들린 것 같으나 묘하게 둔감해진 귀가 적절히 소리를 걸러내어 한 숨 푹 자고 말았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창 밖은 깜깜 복도는 조용.
참 좋은 새벽이다. 그래. 시간을 제대로 조졌군.
"흐아-함."
어쨌거나 잠은 깼으니 일어나기로 했다. 비실비실 일어나서 세수 한 번 하니 새삼 배가 고파졌다. 아니. 술이 고파졌다. 원래라면 저녁에 나가 얼근하게 마시고 한 병 들고 와서 이 시간 쯤 마셨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못 했으니 당연히 마실 술도 없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다른 기숙사라면 모를까 적룡에는 술 나올 곳이 한 곳 있었으니까. 히히- 혼자 실없이 웃으면서 실내용 얇은 원피스 위에 적룡 두루마기만 슥 걸쳤다. 머리는 묶었지만 안경도 귀걸이도 벗어둔 채 곰방대도 없이 역린만 챙겨 들었다. 검의 늑대 조각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또 쫓아올 테니 같이 가자. 아이고. 팔자에도 없는 애완검을 들였어. 내가."
킬킬킬... 혼잣말에 또 웃고 방을 나선다.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물론 기숙사 전체가 적막하다. 잘 시간이 다 이렇지. 빈 복도를 홀로 걸으니 꼭 귀신이라도 된 것 같다만. 오늘은 누구 놀리러 갈 생각도 안 든다. 계속 설렁설렁 걸어서 한 방으로 향했다. 적룡 기숙사에서 유일하게 술이 있는 곳. 물론 순순히 얻어마실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일단 시도나 해보자.
걷고 걸은 끝에 하 사감의 방 앞에 멈춰서 제법 얌전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두드리고 딱 3초 기다린 다음에 문 손잡이 잡아 잠겨있지 않았다면 열어재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문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윤하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금방 없어져버릴 가문에 명예란게 필요한지도 의문이었고 만일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산산조각 내버릴 뿐이었다. 그의 이름 가장 첫자 또한 그에겐 그저 증오의 대상일뿐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번에 다 털어버렸으니 가현 입장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가현의 말에 그는 묵묵히 자신의 밀크티만 홀짝일뿐이었다. 이해와 포용은 공존할 수 없다, 라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윤하는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해할 수 있다가 더욱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당사자의 입장에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가문이 몰락해버렸으니 남은 자들 입장에선 자신이 더욱 두려웠을테니 말이다.
"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 가끔은 두려웠거든. 시간이 점점 지나서 이 감정이 희석되고 이성이 좀 더 자리를 잡았을때 내가 이 사람들을 용서할까봐 말이야. "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좀 더 관대해질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가끔 착잡한 심정에 빠질때가 있었다. 특히나 가문에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도 조금은 남아있었기에 아이들의 얼굴을 볼때마다 자신이 하는 짓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자신이 저렇게 어릴때 당했던 짓들을 곱씹으며 버텨냈지만 나약해지는 자신을 볼때마다 몰려오는 자괴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 네 말을 들으니 그럴 필요는 없겠네.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 "
다시금 아이스크림으로 스푼을 가져간 그는 스푼에 반쯤 차도록 아이스크림을 퍼서 입안에 넣고선 단맛을 음미했다. 깔끔한 단맛이 입안에 퍼지고 그 시원함이 머리를 자극해 복잡해지던 생각을 조금은 풀어둘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는 잠깐 멈췄던 말을 이었다.
" 내가 나약해질 것 같으면 꼭 다시 말해줬으면 좋겠어. "
물론 그럴 일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니까. 그렇게 다시 빨대로 밀크티를 크게 한번 쪽 빨아들이니 가현의 질문이 들려왔다. 그는 빨대를 입에 문채 고개를 끄덕이고선 웃으며 덧붙였다.
" 나까지 스무명. "
해맑은 웃음. 천진난만함이라고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웃음 속에는 자신의 몸을 흐르는 피조차 용서하지 못한다는 감정 또한 느껴졌다. 아예 자신의 가문이 존재했던 흔적을 없애버리려는 그는 자신마저 그 흔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슬픈 목소리에 눈썹의 각도가 느슨하게 꺾여 여덟 팔 자를 그린다. 한때는 이 목소리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갖은 재롱을 부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위로하곤 했는데, 이제는 어조에서 거짓임을 너무나도 쉽게 알게 되는구나. 입안이 써야 하는데 어째서 오늘은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런 상념에도 잠기지 말자.
"그분께서 형님께 말씀은 전해드렸답니까? 형님을 언급하시길래 말을 전해달라 하였는데."
나긋한 목소리로 되묻고는, 시선을 마주하듯이 고개를 들어 당신을 쳐다봤다. 감긴 눈이라고 한들 당신을 볼 수 있다는 듯. 방금 전에 했던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내가 말을 전해달라 했는데 그 사람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정도의 존재인가, 아니라면 할 일이 있지 않은가, 만일 말을 전했다 쳐도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그 자체로도…."
값어치가 있다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가족에게 값어치를 따지는 것은 어렵다는 듯 말을 천천히 줄인다. "존경스러운 분이지요." 손의 떨림이 멈추면 몸이 떨릴까 걱정이 되었건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는 모양이다.
''어찌 이 아우가 어리석지 아니하겠습니까. 10년 전 일찍이 졸업하신 형님에 비견하면 영민하다 하기엔 모자라지요."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왜 당연하게 내 입맛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 무슨 낯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지? 한 짓이 있잖아. 그때 당신도, 나도 죄를 씻을 수 있었을 텐데, 나를 그런 꼴로 만들고 결국엔 혼자 지긋지긋한 북부를 떠나서─
"아, 참으로……."
기쁩니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마치 어린 시절의 한때처럼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마침 이곳은 석류와 로젤 열매로 만든 차가 그리도 맛이 있다 히덥니다. 향도 뛰어나고, 맛도 일품이라지요."
천천히 아회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 앞으로 숙인다. 어찌 형님을 일어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난 아우가 가까이 다가가는 수밖에 없지요. 그때처럼 다가가면 되는 겝니다, 암. 피하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손 뻗어 양 뺨 부여잡으려 하더니, 고개 살짝 당기듯 하려 했을 것이다. 친근한 사이라는 듯.
"뜨겁게 마시거니와 색도 마침 붉은색입니다, 형님. 좋아하시잖아요? 붉은색."
정원이 아주 새빨갛던데 싫어할 리가 없지요……. 아회 감겼던 눈 뜨인다. 당신과 눈 온전히 마주하려 하며 서서히 호선 긋는다.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어찌나 좋은지 학당에 입학했더니 장인들이 선추도 홍옥으로 깎아주지 무업니까. 아우가 좋아하는 겁니다, 형님. 그러니 이 정도 무례는 봐주실 것이지요, 응?"
동생이잖아요. 호선 그은 눈 뒤로 나지막이 속삭인다. 둘째 부인 닮아서 어여쁜 것 빼곤 아무것도 없는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