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이요..? 아하핫, 맙소사~ 니오. 우리 사귀는 사이로 보이나봐. 좀 더 가까이 붙어도 돼?"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가현의 장난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여학생의 답이 들리기도 전에 몸을 가까이 해 어깨에 제 뺨을 톡 기댔다. 허나 정말 사귀는 사이는 아니기에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게 자신이었으며, 제 애정과 사랑의 방식은 당신들의 평범한 방식과는 많이 다른 부류의 것이었으니. 만에하나 정말 연애하는 사이였다면 그냥 얌전히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미 거기부터 평범한 빵집 주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가현은 제 손등 냄새를 맡아보았다. 외출 전 바르고 나온 화장품의 잔향밖에는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거울을 볼 때도 제 보라색 눈동자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같은 제사장 가문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를수가 있나. 그리고 그 의문은 머지 않아 가라앉는다.
"네.....? 신 님께서요? 우셨다고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양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빵집 주인을 바라본다. 아마 입학식에 그 분이 난입하셨을 적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정말? 진짜로? 너무나도 예상 밖의 상황에 가현은 어안이 벙번해졌다.
남자의 행태는 갈수록 가관이었다! 여기까지 확인도 않고 따라오더니 이제는 하란다고 다 해? 웃고 싶은데 웃음을 참아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고문이 달리 있을까!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해. 조금만. 들은 것은 다 듣고 그 다음에-
왜 소리를 찾느냐 물으니 계속 듣고 싶다는 진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숨도 죽인 채 동굴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렇구려. 음. 거 때려도 말려도 안 될 거 같으니. 음. 음음."
저 혼자 고개 끄덕끄덕 하며 천천히 남자의 뒤를 쫓는다. 한 걸음. 딱! 또 한 걸음. 딱! 서로 박자 맞추며 조용히 검집에서 검을 뽑는다. 스으읍 숨 들이쉬고. 찰랑 안경 떨어져 가슴팍에 대롱거린다. 동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빛 등지고 서니, 드리운 음영에 붉은 안광 흐른다.
자. 밥 먹을 시간이다.
"흐히."
검 빼어들고 지체없이 달려 남자에게 검을 휘두른다.
시작은 발목. 힘줄을 잘라 도망치지 못 하게 하고. 다음은 무릎. 근육을 베어 일어서지 못 하게 하자. 그리고 허리. 뼈를 베어 반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손목을 잘라 무엇도 잡지 못 하게 팔뚝을 그어 기는 것도 온전치 못 하게 어깨를 찔러 무력하게 만들어 그 얼굴을 머리를 목을-
의문스럽게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분명하게 눈앞에 선 이가 카페 주인이 아님을 연은 안다. 눈을 깜빡이며, 제 손에 들린 물건을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던 연은 상대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목소리가 마치 잠으로 현혹하는 것 같으니. 연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 살짝 멀어지며 말한다.
니오는 받은 물은 한 번에 전부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하고 세 번에 나눠서 빈 컵을 만든 니오는 그제야 살겠다는 듯 파하~ 하고 기분 좋은 한 숨을 내쉬며 몇 번인가 더 숨을 고르고 옷 소매로 이마에 난 땀을 살짝 닦았다.
" 그렇게 사이좋아보이나요~ 그래도 언니야가 아깝다구요. "
항상 이런 식이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한 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전의 모든 나쁜 일들이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 번 좋은 인상이 남으면 이전에 칼로 위협당했던 것들이 잊혀진다는 이야기지. 니오는 머리를 살짝 기대고는 에헤헤~ 하고 웃어보일 뿐이었다.
" 에, 도술 느낌이 안 나는 학생? 그거 분명.. 신기하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데? "
건장한 목소리. 아회는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그때 형님과 같이 있던 사람이구나. 자신에 대해 전혀 연연하지 않던 그 인간. 어쩔까, 아회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본다. 형님이 계신 것 같지 않으니 이 자리에서 뒤엎어버릴까? 목숨을 걸고 싸워볼까? 아니, 아니다. 여기서 죽기 위해 학당에서 온 것이 아니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 사람, 제법 친절하니 형님께도 꼼짝 못하던 것 같던데.
"아, 또 뵙는군요. 잘못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회 사근사근 말 붙인다. 제 형의 기에 눌리듯 아무 말도 못 하고 더듬더듬 얘기하던 때와 판이하게 다르다. 어조는 많은 풍파에 시달렸는지 기운이 없고 삭막하지만, 제법 나긋한 편이었다. 여러모로 압도적인 공포를 가진 제 형님과는 다른 면모였다.
"공께서…… 땅신령 님들의 은인 되시는지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소포를 슬쩍 들어 보인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여러모로……. 덧붙이는 것은 의뭉스러운 말이었을 터다. 아직 소포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아회 이를 빌미로 살풋 지어 보인 미소 사이에서 은근히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한 차례 '식사'가 끝난 후. 조용해진 검과 가쁜 숨 몰아쉬는 제가 있었다. 동굴 안에 가득한 혈향이 달콤해서. 사방에 펼쳐져 흘러내리는 살점의 향연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고개 살짝 뒤로 젖히고 천천히 숨 쉬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제 목 한 번 감싸고 그대로 쓸어내렸다.
짧은 환희 만끽하고 검 휘둘러 묻은 피 털어낸다. 동굴 벽에 다시금 번지는 붉은 선 보며 히죽 웃었다. 깨끗해진 검 갈무리해 넣으며 하- 긴 한숨 내쉬었다.
이 여운. 이대로 흘려보내기에 너무 아쉬운데.
천천히 뒤로 물러나 동굴 밖으로 나간다. 일부러 평소보다 느긋히 걸으며 주변을 휘익 둘러보았다.
선물.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은 남자의 선물이다. 하지만 정말로? 상대의 겉모습에서 의심을 하는 자신의 못 된 버릇을 생각해도,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연은 들고 있는 물건을 쉽게 남자에게 건네주지 못하였을까. 정말로 주인일 수도 있지만, 만약 중간에서 물건을 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되어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배달부인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니. 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 하며 짐짓 놀란듯한 얼굴로 말한다.
"미안해. 물건을 잘 못 들고 왔어. 금방 돌아가서 다시 가져올 건데. 기다려 줄 수 있어?"
오늘은 무슨 날이라도 되는가? 항상 두려워하기만 하던 이 여학생이 자신에게 머리를 대어줌도 모자라, 사이 좋아 보이나봐 하며 친근하게 다가와줬다. 이런 거. 처음이야. 행복해. 기뻐...
"그렇게까지 아까운 사람은 아닌데 말야. 응?"
눈꼬리를 곱게 휘며 속삭이듯 말한 가현은 여학생의 머리를 한껏 쓰담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귀는 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있어 그만큼 소중한 사람은 맞았으니까. 아까 자신에게 내와줬던 빵을 하나 더 집으며 달콤함을 한껏 만끽했다.
"네에. 그렇게 강조하신다면 그렇게 믿을게요.."
재차 말하는 것에 가현은 체념하고 밉지 않게 투덜거리는 투로 답했다. 존엄한 존재에게 코까지 꿰인 사람인데다가 남들 이상으로 뛰어난 감을 가졌으면서 끝까지 평범한 빵집 주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 세상 누가 이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조금 안 평범한 빵집 주인이 되어줄순 없는걸까. 앞의 평범하다는 단어만 어떻게 하면 참 좋을텐데.
"..... 아하, 그. 그 존엄하신 존재께서.. 이 덧없는 소녀를.... 흐핫... 아하하하하핫...!"
뒤의 말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가현은 미친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런 중요한 말을 왜 이제서야! 신이시여, 존엄하신 존재이시여. 저만 아쉬움을 간직한 채 백일몽에서 나온줄만 알았는데, 당신이 저를 그렇게까지 어여삐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답니다. 아아ㅡ 당신과 저 사이. 그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전부 부숴버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저는 빼앗긴 게 아니랍니다. 저는 절대 누구에게도 빼앗겨지지 않을 사람이랍니다. 저는 그저ㅡ 당신 하나만을 바라보고 섬기며 당신의 곁에 한 걸음 더 나아갈 날을 바란 채 지금껏 이 덧없는 몸뚱아리 이끌고 짧은 명 부여쥐고 살아있을 뿐인데. 어찌 제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겠사옵니까. 아까 전, 조금 쓸쓸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로 가현은 지금의 황홀경을 한껏 만끽한다.
".... 아아,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이 시야만큼은. 제가 평생 가지고 살 순 없겠지요... 그 분께서 방문하실 적. 꼭 한번 여쭈어봐주시길 바래요. 그 전에 제가 이 시야가 지워지는 조건을 알게 되거나 만족시킨다면- 꼭 돌려드리겠노라고 다짐한 것까지..."
남자가 하는 말을 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깨비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며. 물로 갈 것이라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 인지. 연은 휘휘 고개를 젓는다. 물은 더 이상 싫어. 마음의 제일 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어떤 감정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아져 연은 깊게 숨을 고른다.
"말했잖아. 잘 못 들고 왔다고. 그리고... 정말 주인 맞아?"
의심스럽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연은 물건을 품에 꼭 안는다. 그리고서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