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땀을 닦고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다. 니오는 천천히 허리를 피고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했다.
" 하아... 하아.. 네. 하아.. 쿠즈노하 니오, 하아.. 라고 합니다.. "
숨이 턱 끝까지 올라차는 느낌. 아무리 체술에 자신이 있다고는 해도 그 긴 숲을 통째로 달려왔더니 이건 체력적으로 조금 무리였다. 소화시키겠다고 일부러 빙빙 돌아왔더니 숲을 통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지. 그것도 늦을 것 같아서 달려왔더니 이건 전속력으로 장애물 경주를 한 셈이었다.
" 아, 에? 아, 언니야! 우와- 여기서 다 만나네. 우연이야 운명이야? 아하하! "
니오는 가현을 보곤 조금 맑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야 지금은 별다른 위협도 위해도 없이 우연히 만난 상황이었으니까.
" 마실거.. 일단은 물! 물로 부탁드릴게요. 학당에서부터 숲을 지나서 막 뛰어왔더니 숨이 엄청 차가지고.. 폐가 터질 것 같아요. "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러온 사람이라던가 좋아보이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댈 이유가 없다. 니오는 자리에 앉아 먹고 싶은 만큼 빵을 고르란 말에 '우선은 1라운드~' 라고 흥얼거리며 적당한 녀석으로 두 어개를 집어들었다.
말하기 싫은 과거라는 말에 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에게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자신이 해주는 배려였다. 세상을 살며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픈 과거 앞에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것은 그저 더 캐묻지 않고 그럴 수 있다며 포용하는 것 뿐이었다.
손님이 더 왔다- 라는 말에 가현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낯빛에 화색을 띈다.
"어머나~ 너도 여기로 온거야? 이건 필히 운명일거라고 믿어~"
아아. 이 것을 우연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찾아온 여학생을 한껏 반기며 가현은 미소짓는다. 아. 웃어줬어. 기뻐.
"좀 천천히 오지 그랬어~? 맞다. 그보다. 제 시야가 가려졌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아무렇게나 놓여서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들 중에서도 위험한 것들이 있다니. 연은 잡동사니의 산을 바라본다. 따로 어딘가에 보관하지 않고, 저렇게 관리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물건에 대해서는 가게 주인인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생각하다 연은 초아를 본다. 자신과 같은 청룡 아이. 들고 있는 물건을 한 손으로 고쳐 품에 안아 들고서 빈 다른 손을 초아에게 흔들어 보이며 연은 생긋 웃어보인다.
"안녕. 배달 파이팅이야."
인사하며 응원의 말을 건네다, 작은 병을 받아 드는 것을 보고서 돌아선다. 자신의 목적지인 TOLK TO TOLK 카페 앞으로 향한다.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포목점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떠올려본다. 그냥 주고 오기만 하면 되는 거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다. 더미를 받아들며 힐끔 연을 본다. 우연히 고른 곳에서 같은 청룡의 사람을 만나니 괜스레 더 반갑게 느껴진다. 아쉽게도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저와는 목적지가 다른 듯하지만.
"당신도요! 잘 다녀와요."
따라서 양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곧 더미를 받아든다.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기울여 옆을 보기도 한다. 주술용품점이니 당연히 관련된 물품이겠지만, 정확히 무언지 아는 것이 아니기에 호기심이 생긴다. 궁금한 건 또 그저 안에 품어두기만 할 수 없는 성정인지라. 출발하기 전 남자를 향해 물어본다.
"커플이요..? 아하핫, 맙소사~ 니오. 우리 사귀는 사이로 보이나봐. 좀 더 가까이 붙어도 돼?"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가현의 장난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여학생의 답이 들리기도 전에 몸을 가까이 해 어깨에 제 뺨을 톡 기댔다. 허나 정말 사귀는 사이는 아니기에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다. 누군가와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게 자신이었으며, 제 애정과 사랑의 방식은 당신들의 평범한 방식과는 많이 다른 부류의 것이었으니. 만에하나 정말 연애하는 사이였다면 그냥 얌전히 앉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미 거기부터 평범한 빵집 주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가현은 제 손등 냄새를 맡아보았다. 외출 전 바르고 나온 화장품의 잔향밖에는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거울을 볼 때도 제 보라색 눈동자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같은 제사장 가문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를수가 있나. 그리고 그 의문은 머지 않아 가라앉는다.
"네.....? 신 님께서요? 우셨다고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양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빵집 주인을 바라본다. 아마 입학식에 그 분이 난입하셨을 적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정말? 진짜로? 너무나도 예상 밖의 상황에 가현은 어안이 벙번해졌다.
남자의 행태는 갈수록 가관이었다! 여기까지 확인도 않고 따라오더니 이제는 하란다고 다 해? 웃고 싶은데 웃음을 참아야 한다니. 세상에 이런 고문이 달리 있을까!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해. 조금만. 들은 것은 다 듣고 그 다음에-
왜 소리를 찾느냐 물으니 계속 듣고 싶다는 진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숨도 죽인 채 동굴로 들어가는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렇구려. 음. 거 때려도 말려도 안 될 거 같으니. 음. 음음."
저 혼자 고개 끄덕끄덕 하며 천천히 남자의 뒤를 쫓는다. 한 걸음. 딱! 또 한 걸음. 딱! 서로 박자 맞추며 조용히 검집에서 검을 뽑는다. 스으읍 숨 들이쉬고. 찰랑 안경 떨어져 가슴팍에 대롱거린다. 동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빛 등지고 서니, 드리운 음영에 붉은 안광 흐른다.
자. 밥 먹을 시간이다.
"흐히."
검 빼어들고 지체없이 달려 남자에게 검을 휘두른다.
시작은 발목. 힘줄을 잘라 도망치지 못 하게 하고. 다음은 무릎. 근육을 베어 일어서지 못 하게 하자. 그리고 허리. 뼈를 베어 반신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손목을 잘라 무엇도 잡지 못 하게 팔뚝을 그어 기는 것도 온전치 못 하게 어깨를 찔러 무력하게 만들어 그 얼굴을 머리를 목을-
의문스럽게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분명하게 눈앞에 선 이가 카페 주인이 아님을 연은 안다. 눈을 깜빡이며, 제 손에 들린 물건을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던 연은 상대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목소리가 마치 잠으로 현혹하는 것 같으니. 연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 살짝 멀어지며 말한다.
니오는 받은 물은 한 번에 전부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하고 세 번에 나눠서 빈 컵을 만든 니오는 그제야 살겠다는 듯 파하~ 하고 기분 좋은 한 숨을 내쉬며 몇 번인가 더 숨을 고르고 옷 소매로 이마에 난 땀을 살짝 닦았다.
" 그렇게 사이좋아보이나요~ 그래도 언니야가 아깝다구요. "
항상 이런 식이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한 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전의 모든 나쁜 일들이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한 번 좋은 인상이 남으면 이전에 칼로 위협당했던 것들이 잊혀진다는 이야기지. 니오는 머리를 살짝 기대고는 에헤헤~ 하고 웃어보일 뿐이었다.
" 에, 도술 느낌이 안 나는 학생? 그거 분명.. 신기하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데? "
건장한 목소리. 아회는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그때 형님과 같이 있던 사람이구나. 자신에 대해 전혀 연연하지 않던 그 인간. 어쩔까, 아회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본다. 형님이 계신 것 같지 않으니 이 자리에서 뒤엎어버릴까? 목숨을 걸고 싸워볼까? 아니, 아니다. 여기서 죽기 위해 학당에서 온 것이 아니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 사람, 제법 친절하니 형님께도 꼼짝 못하던 것 같던데.
"아, 또 뵙는군요. 잘못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회 사근사근 말 붙인다. 제 형의 기에 눌리듯 아무 말도 못 하고 더듬더듬 얘기하던 때와 판이하게 다르다. 어조는 많은 풍파에 시달렸는지 기운이 없고 삭막하지만, 제법 나긋한 편이었다. 여러모로 압도적인 공포를 가진 제 형님과는 다른 면모였다.
"공께서…… 땅신령 님들의 은인 되시는지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소포를 슬쩍 들어 보인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여러모로……. 덧붙이는 것은 의뭉스러운 말이었을 터다. 아직 소포를 주지 아니하였으니, 아회 이를 빌미로 살풋 지어 보인 미소 사이에서 은근히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한 차례 '식사'가 끝난 후. 조용해진 검과 가쁜 숨 몰아쉬는 제가 있었다. 동굴 안에 가득한 혈향이 달콤해서. 사방에 펼쳐져 흘러내리는 살점의 향연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고개 살짝 뒤로 젖히고 천천히 숨 쉬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제 목 한 번 감싸고 그대로 쓸어내렸다.
짧은 환희 만끽하고 검 휘둘러 묻은 피 털어낸다. 동굴 벽에 다시금 번지는 붉은 선 보며 히죽 웃었다. 깨끗해진 검 갈무리해 넣으며 하- 긴 한숨 내쉬었다.
이 여운. 이대로 흘려보내기에 너무 아쉬운데.
천천히 뒤로 물러나 동굴 밖으로 나간다. 일부러 평소보다 느긋히 걸으며 주변을 휘익 둘러보았다.
선물.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은 남자의 선물이다. 하지만 정말로? 상대의 겉모습에서 의심을 하는 자신의 못 된 버릇을 생각해도,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연은 들고 있는 물건을 쉽게 남자에게 건네주지 못하였을까. 정말로 주인일 수도 있지만, 만약 중간에서 물건을 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되어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배달부인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니. 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 하며 짐짓 놀란듯한 얼굴로 말한다.
"미안해. 물건을 잘 못 들고 왔어. 금방 돌아가서 다시 가져올 건데. 기다려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