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니 괜히 더 약이 오르는지 은찬은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맨 처음 내기를 권하고 지금 이 결과를 만든 것도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약이 오르는 것을 어쩌겠는가. 이런 내기 자체가 즐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약을 올리듯이 말하는 것은 역시 그에게 있어선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한편 간식 내기를 제안하자 그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능력이나 그녀의 능력이나. 어느 쪽이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자신은 가속을 이용하면 정말 순식간에 사서 가지고 올 수 있고 그녀 역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 정말로 빠르게 갔다올 수 있었다. 물론 능력을 마음대로 막 남용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럴 때는 상관없지 않겠는가. 계산을 마친 후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왼손을 들어올렸다.
"좋아. 지고서 후회하지 마. 이번엔 꼭 이길거니까. 물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 정말 순식간에 낸 것을 바꿔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밝히면서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애써 여유로운 척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가위바위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그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위..바위..보."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그는 이번엔 바위를 냈다. 그리고 현진을 바라보며 무엇을 냈을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이겼을지, 아니면 졌을지. 그건 이제 두고 볼 일이었다.
"당연하지, 나는 은찬이가 능력을 사용해서 비겁하게 내기에 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나도 정정당당하게 하고 있지."
무슨 소리냐면 현진이 가위를 내고 은찬이 주먹을 내었을 때, "내 가위는 주먹을 이기지!" 하고 악력으로 승리를 쟁취해 내는 폭력적인 수단을 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반에 다른 친구가 만화를 보여주며 실제로 이런거 할 수 있냐고 물어봤을 때 해봤던 일. 은찬이도 옆에 있었으니 보았을 것이다.
"..."
승부의 결과가 나왔다. 2연속 보자기로 더운 날에 은찬이는 부채질도 해주고 매점까지 가서 간식도 사 와야 한다! 우후후후, 하고 작게 웃던 현진은 힐끔 자신의 팔찌를 보았다. 마침 쉬는 시간 1분전인 49분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내가 그렇게 신뢰를 사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언제 한 번 훅 능력으로 빠르게 바꿔치기를 해볼까? 알아채나. 못 알아채나."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반칙이며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반대로 그건 현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적어도 그 정도 신뢰는 자신에게도 있었기에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문제는 가위바위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바위. 그리고 현진은 보. 와. 내가 또 졌잖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자신과 그녀의 손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당황하나 그는 비겁하게 회피를 시도하진 않았다.
"아, 알았어. 초코우유 말이지? 참고로 난 이런 것으로 도망 안 가! 걱정 마. 따블? 아니. 여기서 또 질 가능성이 너무 높잖아. 그러니까 굳이 모험을 하진 않겠어. 원래 내기나 도박이나 적당한 수준으로 끝내야 더 재밌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는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설 준비를 했다.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서 가속을 하면 그렇게 오래 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물론 고르고 계산을 하는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고, 다른 이들에게 부딪치지 않아야 하니까 제대로 활용하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라면야.
"초코우유 하나면 돼? 지금이라면 나도 이것저것 살 거라서 하나 정도는 더 사줄 수 있는데. 원래 이렇게 평화로울 때 많이 먹고 맛있는 거 즐기고 그래야 하는 법인 거 알지?"
말 그대로 현실을 즐기라는 느낌의 어투. 그건 은찬이 자주 보이는 행통페턴이자 사고방식 중 하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세 번 연속 똑같은 것으로 질리 없잖아. 내가 또 똑같은 것을 낼리가 없는데."
오히려 보자기 또 내주면 고맙지. 난 가위 낼거거든. 싹둑싹둑.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그는 오른손으로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는 시늉을 했다. 물론 이렇게 하고서 심리전을 걸다가 또 바위를 내고 또 보자기에 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건 그것대로 나름대로 재밌는 사태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에 한 번 살짝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튼 아무 빵이나 하나만 부탁해보겠다는 말에 은찬은 에이.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올려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콕콕 찌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 빵이라는 것이 제일 어려운데. 이번에는 시간도 없으니 그냥 해주겠지만 다음에는 확실하게 하기야.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신경 쓰면 살아가기 힘들걸. 나는 신경 안 쓰려고. 그런 것은."
제 왼손에 있는 팔찌를 가만히 바라보나 딱히 뭔가 울리거나 할 징조는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장은 평화로운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일단 갔다오겠다는 말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선 후에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약 5분 정도 지났을까. 크림빵과 초코우유. 그리고 자신이 먹을 소보로와 탄산음료. 이렇게 4개를 사 온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뭘 하고 있었다면 기다려줬을 것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면 옆자리에 앉으면서 빵과 우유를 줬을 것이다.
"정말 빠르게 움직이는데는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단 말이야. 싸우기 위한 힘이라는 것이 조금 서걸프지만."
"하지만 나의 다음 수가 과연 보자기일까? 말만 이렇게 해서 네가 무엇을 내도록 할지 유도하는 중이라는 의심은 하지 않는 거야?"
그럴 전혀 마음은 없었지만! 오른손으로 가위를 내는 은찬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을 쫙 펼쳐서 넣어보려고 하고는 입으로 내 보자기는 가위를 이긴다. 라고 외쳐본다.
"알았어~ 그리고 징크스잖아. 담당관님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재수 없다고 투덜거리실 거야."
은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앞 친구의 등을 콕 콕 찔러보았다. 가위바위보... 보자기로 3번 이겨야 해.... 은찬이 도착할 때에 보이는 것은 뿌듯한 얼굴로 팔짱 낀 체 미소 짓고 있는 염현진. 무려 7번 연속으로 가위바위보의 승리를 쟁취했다. 게임이었으면 이거 업적 달성된다구.
"고마워 고마워~ 있지 너 갔다 온 사이에 가위바위보 해봤는데 보자기로만 일곱번 이겼다? 숫자가 좋게 떨어져서 이제 더는 안 할 거지만~"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고는 빵을 뜯고 크게 물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게 입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좋았다.
"그 부분은 이능각성자의 의무니까... 그래도 가속 능력 부럽다고 생각해, 열심히 단련하면 시간을 멈추거나 거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열심히 단련하면 힘이 더 세질 뿐이니까 로망? 같은 게 부족하다고 생각해. 모기도 안 물리고 더위나 추위도 안 타는건 실용적이라 좋지만."
"이런 시간까지도 의심하고 머리 계속 굴려봐야 좋을 거 없잖아. 난 평화로울 때는 즐겁게 지내야한다는 주의거든. 그렇게 해서 또 지면 어쩔 수 없는거지."
가위바위보는 어떻게 보면 심리싸움이기도 했다. 운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운과 더불어 심리전을 걸면 그만큼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위바위보 아니겠는가. 설사 지금 저것이 현진의 심리전이고 자신에게 거는 일종의 심리전일수도 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는 듯, 재밌지 않겠냐는 듯. 그는 태연하게 넘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담당관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는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지 않으면서 웃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한편 매점에 갔다가 돌아오니 들려오는 것은 보자기로만 일곱 번을 이겼다는 현진의 목소리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런 표정 그 자체였다. 한 사람이 일곱번이나 보자기를 내는데 다른 것을 낼 생각을 아예 안 한단 말이야? 그건 그서대로 정말로 놀랍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온전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대단하네. 지금도 나랑 해서 보자기로 또 이기는 거 아니야? 그럼 8연승인데. 물론 알다시피 그렇게 되면 난 죽어도 바위는 안 낼거지만 말이야. 아무튼... 확실히 의무긴 하니까. 대체 그 괴물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는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니까. 지금도 어떻게 밀어붙인다기보다는 현상유지 정도이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 땅들이 모두 우리 인류가 살고 있던 땅이었고 거기서 살아갔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그때는 이런 괴물들도 없었고 이런 팔찌하는 이도 없었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팔찌를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가 시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는 시간을 가만히 도리도리 저었다.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거라면 모를까. 시간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할걸.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나는 역시 네 능력이 더 부러운데. 하긴, 이렇게 가면 서로서로 부럽다는 말의 연속일테니까 의미는 없겠다. 하하하. 그래도 부러운 것은 사실이니까. 뭔가 힘 엄청 세져보고 싶고 그렇기도 하거든. 무엇보다 모기도 안 물리고 더위도, 추위도 크게 안 타는 거. 되게 부러운 가잖아. 아. 혹시 감각이 없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거니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힘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닐테니까.
"...아. 오늘은 출동하는 일 없으면 좋겠다. 진짜. 얼마전에 오락실에 새로운 게임기기 하나 들어왔다는데 그거 하면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어."
/원래 쓰다보면 다 그런 것 아니겠어? ㅋㅋㅋㅋㅋ 맞아. 사실 나도 그런 느낌이 있어. 애들 앞에선 나름 친절하고 잘해주려고 하는데 애들 없을 때는 막 담배 피고 아..퇴근하고 싶다. 이런 위험한 곳 빨리 그만두고 싶다! 이런 느낌으로 중얼거리는 아저씨. 딱 그렇게 잡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름은...뭐, 굳이 그냥 나올 필요 없이 그냥 담당관으로 통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은 해!
"그걸 알아내면 노벨상도 받을 수 있을걸? 그러게... 수업시간에도 배웠지만 참 좋았을 것 같아. 사람도 훨씬 덜 다치고."
자연스럽게 창 밖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최전선의 풍경은 이다지도 조용한데, 매일 어딘가에서 괴생명체가 나오고 사람이 싸우다 다치고 죽는다. 사람 하나 추가된다고 지금의 판세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밀려오는 생각에 현진이는 고개를 털래털래 흔들며 그것을 떨쳐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 운동자의 시점에서 시간이 멈추고 그것보다 빨라지면 과거로 갈 수 있는거 아니었어? 아닌가? 우후후, 맞아, 부러움 잔치로 안 넘어가게 여기서 끊어야겠다. 감각은 있어! 문제는 잠꼬대할 때 물건 부숴먹기 쉽다는 거지..."
몽유병이라도 생긴다면 끔찍할 것이다.
"나도.... 출동 영원히 안 하고 싶다...."
책상에 엎드려서 소소한 바람을 고백해보다가 게임센터로 가고 싶다는 말에 힐끔 상대를 올려다본다.
현진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하자 은찬의 시선 역시 창밖으로 향했다. 이 평화로운 시간이 마치 거짓말인것처럼 당장 내일 자신이나 그녀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그게 정말로 이상한 것인지도 스스로는 알 길이 없었다. 물론 과거에는 이렇게 학생이 싸우는 일 없이 그냥 다들 평화롭게 입시만 생각하고 공부만 하는 세상이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이렇게 팔찌를 차는 이도 없고 능력을 쓰는 이들 자체가 없다고는 하는데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능력자들의 수는 상당히 적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들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더더욱.
"과학적으로 가자면 가능하긴 할걸? 그런데 적어도 난 불가능하고 과거로 가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아. 그래도 과거로 가면 정말로 그런 풍경이었는지 구경하고 싶긴 하네! 물론 돌아올 방법이 없으니까... 난리나려나? 그렇게 되면?"
전사된 것처럼 취급되고 싶진 않고 탈주한 것처럼 취급받고 싶지도 않으니까 역시 안할래. 그렇게 이야기하며 은찬은 키득거렸다. 잠꼬대할때 물건을 부숴먹기 쉽다는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으나 그 또한 꽤 장난끼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그는 빵을 한 입 먹으면서 탄산 음료도 한 모금 마셨다. 청량하면서도 빵 특유의 맛이 일품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마음에 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게임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그는 두 손으로 권총 쏘는 자세를 취하면서 빵, 빵. 소리를 냈다. 이어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는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슈팅 게임. 이번에 하나 들어왔다고 해서 말이야. 역시 이런 게임을 안 할 순 없잖아. 이래보여도 총이라면 자신 있는데. 역시 게임을 하면서 몸도 풀고 그래야지!"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관심을 보인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제안했다.
"그럼 그 나이 먹고 다시 고등학교를 다니고 출동하라는 거잖아. 와. 현진이. 너 은근히 잔인한다?!"
경악하는 오버 리액션을 보이면서 은찬은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고 방금 그 말도 웃자고 하는 소리인 것을 알기에 그의 분위기가 딱히 심각하게 바뀐다거나 진지하게 항의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재밌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면서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다가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과거로 간다고 한다면 혼자 가진 않고 너도 데려갈거야. 너도 그 평화로운 세상을 한번쯤 보고 싶잖아. 아닌가? 나만 그런가?"
사실 자신이 죽기 전에 그런 세상이 정말로 오긴 할까. 애초에 이 최전선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긴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뭔가를 생각하듯, 아주 잠시 그의 표정이 아련한 색으로 물들었지만 특별히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이내 탄산음료를 그 상태에서 다시 천천히 마시면서 그는 웃음소리를 키득키득 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협력모드가 있으면 있었지. 결투모드 같은 것은 없을걸? 그리고 나도 너랑은 팔씨름이나 그런 게임은 안할 거니까 충분히 마음 이해해."
일방적으로 불공평하고 유리한 게임은 해봐야 재미가 없었다. 비슷비슷해야 어느 정도 재미가 있는 법이었고 그의 취향에도 맞았다. 한편, 기도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 역시 덩달아 기도를 했다. 오늘은 출동 없이 그냥 무사히 집에 가게 해주세요. 밤에 푹 자게 해주세요. 그래도 얼마전에 출동했었으니까 당분간은 또 없을 거라고 믿을게요. 남쪽에서 북쪽으로 막 치고 올라오는 이는 없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렇게 많은 것을 빌며 그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래도 출동은 없지만 수업은 이어지겠지? 슬슬 수업 들을 준비나 하자."
쉬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래봐야 10분. 그나마도 매점에 갔다 온다고 5분이나 썼으니 남은 시간은 5분 정도였다. 슬슬 종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주도 그랬구나! 나 역시도 이것저것 막 떠오르고 그랬어! 아무튼 은찬이에게서 그런 면이 느껴졌다면 다행이야! 은찬이는 아예 안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요구할 것은 분명하게 요구하고 원하는 것도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그렇거든. 딱히 돌려서 말하기보단 말이야. 사실 이건 은찬이의 비설 아닌 비설과도 관련이 있는 거지만 그건 언젠가 밝혀지는 걸루!
맞아. 둘이서 갑자기 평화로운 현대로 떨어지는 그런 것도 되게 재밌을 것 같아. 괴생명체가 나와야하는데 나오질 않아서 당황하고 여긴 분명히 괴생명체들이 점령한 지역이라서 폐허였는데 여기서는 막 사람이 우글우글하고 번화가이고! ㅋㅋㅋㅋㅋ
맞아. 전투나 전문교육, 훈련. 이런 것도 당연히 해야지! 어쨌건 전투도 있는 그런 일댈 배경이니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천천히 하나하나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간단하게 쓰러뜨리는 줄 알았는데 위기상황이 벌어지는.. 이를테면 단체스레의 진행 버전 느낌으로 말이야. 그렇게 임무도 수행하고.. 위험해져보기도 하고, 숙적 같은 이도 만나고 그래보고 싶어!
비설이 언제 나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제 막 시작했으니 언젠간 나오지 않겠어? 현진이의 비설도 알고 싶어지니까 천천히 파악해봐야겠어!
ㅋㅋㅋㅋㅋㅋㅋ 현진이는 가족이 있지만 은찬이는 가족이 없으니까 오히려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도 괜히 돌아가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뭔가 살짝 복합적인 느낌으로 말이야!
매번 그런 느낌보다는 그냥 한번씩? 이제 일상을 하다가 한번씩 조금 뭔가 나오는 것도 좋겠지. 라는 느낌에서.. 이를테면 커다란 메머드형 괴생명체가 밀고 오고 있어서 단체로 레이드를 뛰러 간다거나, 혹은 괴생명체와 관련된 뭔가가 나와서 현진이와 은찬이의 숙적이 되어서 메인빌런처럼 나올지도 모르고..아무튼 그런 것은 생각 중이야! 인간이랑 똑같이 생긴 괴생명체도 괜찮지! 그리고.. 능력자들과의 싸움도 재밌을 것 같고!
나른한 오후의 교실. 여름의 기세가 슬슬 생활 전반에 여파를 미치기 시작했으나 예산이 빠듯한 학교는 교무실에도 에어컨을 틀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교실 천장에 설치된 선풍이 몇 대가 작동음을 내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이에 자력으로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무리지어 서로 부채질을 하는 광경도, 손에 들 수 있는 무선 선풍기를 쓰는 광경도, 책상 위의 그나마 온도가 낮은 부분에 얼굴이나 팔을 올려서 더위를 식히려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가위바위보 보자기 7연승의 염현진은 더위에 시달리는 자신의 파트너 은찬에게 교과서로 부채질을 해 주고 있던 상황.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강렬한 사이렌소리가 울리자 그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중앙통제된 방송용 스피커에서 짧은 잡음이 들리다 큰 소리로 내정된 음원을 발송했다.
- 실제 상황, IPU에서 이계 침식 경보를 발령했습니다. 교내의 전 인원은 신속히 대피소로 대피해 주십시오.
그리고 은찬과 현진의 손목에 있던 팔찌 또한, 진동과 경보음을 내며 그 디스플레이로 출동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최전방의 드물지 않은 일상, 학생들은 서로 짜증스럽거나 두려워하거나 유머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충격에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부로 나가 강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진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빠르게 창문을 열고는 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실의 위치는 3층, 담당관은 혹시라도 모르니 계단을 통해 이동하는 것을 권하였지만 뛰어나가는 편이 빠름을 둘 모두 알고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 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어디서 등장하는지,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위협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어도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이도 있었다. 처참하게 잡아먹히거나, 혹은 그냥 죽임만 당한다거나. 어느 쪽이건 평화와는 거리가 완전히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동안 평화로웠던 나날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사이렌소리와 함께 울리는 대피명령.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니었다. 괴생명체가 나타났다는 신호. 최전선인 이곳에선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괜히 최전선이겠는가. 언제 싸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그럴 때를 대비해서 여기저기에 대피소를 마련했고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해서 이런 상황이 되면 최대한 빠르게 대피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각성 능력자들 중 몇 명이 출동해서 사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바로 이곳에 정착해 있었다.
자신의 왼팔에 차고 있는 팔찌가 진동하며 경보음을 내는 것에 은찬은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조용하나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것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친구들 중 일부가 조심하라는 인사를 했고 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갈까. 오늘도 최대한 다치지 말고 잘 해결해보자."
자신과 현진은 파트너 사이. 즉 임무 상황에서 한 팀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선 팀원이 조금 더 많은 곳도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해당사항은 아니었다. 자신과 그녀. 이렇게 둘이서 한 팀이었으며 손발을 맞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 날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기에 ㅡ물론 그렇다고 엄청 긴 것은 또 아니었다.ㅡ 익숙하게 은찬은 현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닌 그녀를 바라보며 은찬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분위기를 살짝 가볍게 하려는 듯, 농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늘 느끼는데 말이야. 이럴 때는 바로 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워프 장치 같은 거 있으면 좋겠다 싶지 않아?"
그녀가 뛰어내리면 자신 역시 창문에서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현진의 능력이 있으면 자신 역시 여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고 착지하면 자신이 그녀의 손을 잡은 상태에서 가속으로 달려나가면 금방 갈 수 있을테니 이럴 때는 정말 편하다고 생각하며 은찬은 창문 너머의 저 풍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앗. ㅋㅋㅋㅋㅋㅋ 그 부분은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혹시 또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일단 저렇게 써뒀다는 느낌이야. 현진이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다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결국 그렇게 잡아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거든. 하지만 아니면.. 내 설레발이니까. (시선회피)
그 부분은 확실히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보관하고 있다는 설정이 좋을 것 같아! 그래도 학교 생활하는데 그런 장비를 가지고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은 조금 어색할 것 같고.. 그래서 일단 나는 어딘가에 보관을 하고 있고 상황이 발생하면 보관 장소에서 챙긴 후에 현장으로 가서 싸운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직 그 부분은 서술하지 않았고 나와 현진주의 의견이 동일하니까 그렇게 가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팔찌 정도면 오버 테크놀로지 느낌일텐데 그렇게 설정해도 좋을 것 같아! 딱 자신의 락커는 자신의 팔찌로만 열 수 있게 해서 보안도 철저하게 되도록!
일단 기본적으로는 무기와 통신장비가 있어야할테고 몸을 지킬 수 있는 방호복 같은 것은 있어야겠지! 역시! 그 이외에는.. 더 필요한 건 없지 않을까?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임무에 따라서 관리관이 따로 지급을 해준다거나. 이를테면 화재 상황 속에서 싸워야해서 산소가 부족할 수 있으면 관리관이 산소마스크를 따로 지급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어느 정도 유연성이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거든!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은 "다치지 않고" 부분이 아닌, "잘 해결해 보자"는 말에 한 대답이었지만 굳이 꼬집어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다치는 것은 아프고 싫은 일이지만 전위에 나서는 역할의 특성상 간단한 생채기부터, 상처의 분류에 속하는 모든 상처들을 입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거 좋다. 아이언맨 슈트 처럼 장비도 날아와서 자동으로 장착되고."
훈련 출동 시에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장비 보관소로 가서, 장비를 입고 다시 출동 장소까지 이동하는 일이었으니... 동료 각성자 중에서는 스쿠터나 사륜 바이크를 지급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가 담당관님의 잔소리를 들은 녀석도 있으니 다분히 공감 가는 이야기였다. 실없는 말과 생각에 가볍게 입꼬리를 웃은 다음, 자신의 파트너를 가볍게 들어 올려 양팔 사이에 안았다. -공주님 안기로도 잘 알려진 자세인 듯 하다- 그리고는 창가에 사뿐하게 올라가, "하나 둘 셋"하고 언질을 준 다음 힘을 조절해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짧은 시간 동안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면 운동장 한가운데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둘이 착지하였고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파트너를 지면으로 내려주었다.
"브리핑 들어봐서 안 될 것 같으면 도망쳐 버릴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어 농담임을 확인시켜 준 다음 장비 보관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미리 상주하고 있던 각성자들, 학교 안에서 부랴부랴 뛰어오는 이들, 이미 준비가 다 끝나서 정문 쪽으로 뛰어나가는 이들까지.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금 손을 내밀고 뛸 준비를 한다.
"아. 그건 나도 그래. 이 팔찌만 해도 꽤 오버 테크놀러지일텐데 왜 그런 것은 없는걸까. 에너지 문제려나."
아이언맨 슈트는 아주 간단해보이지만 사실 과학력의 정수라고 불리지 않던가. 특히 에너지라던가. 물론 이 팔찌도 엄청난 과학력이 동원되어서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에너지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렇다면 이 팔찌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다음에 한 번 제대로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한편 자신을 가볍게 들어올린 후에 양팔 사이에 안는 모습. 즉 공주님 안기 자세를 시전하고 뛰어내리자 그는 그녀의 몸을 꽉 잡고 눈을 살짝 감았다. 괜찮을거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떨어지는 감각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진동이 느껴지고 나서야 그는 눈을 뜰 수 있었고 이내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아. 가끔은 네 능력이 부러울 때도 있었는데 이것도 포함해서. 누군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고 뛰어내리는 것도 은근히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나는 뛰어내리면 착지는 커녕 다리가 부러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니까. ...그건 그렇다고 쳐도 안 부끄럽냐. 넌."
나는 이거 꽤 부끄럽더라. 괜히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반대편 손으로 제 얼굴을 살며시 부채질을 했다.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기 힘든 일이었다. 어쨌건 이성에게 안겨서 뛰어내리는 거니까. 아무튼 손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을 바고 이내 그는 그 손을 잡았다.
"그것도 괜찮겠는데? 평생 술래잡기를 해야겠지만 말이야. 내 능력으로도 도망치기 힘들거라는데. 그러니까 그런 일 없게.. 작은 녀석이길 빌자!"
큰 녀석보다는 작은 녀석들이 좋아. 바로 해치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웃음소리를 내면서 이야기를 하며 그는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살폈다. 수를 보면 어쩌면 작은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쓴 표정을 짓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서 단번에 보관소 쪽으로 가속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꽤나 날카로웠다. 정말로 빠르게 속도를 올려 달린 후, 멈추니 어느새 보관소 앞이었다. 시간으로 치자면 5~10초 정도의 사이. 이내 손을 놓으면서 그는 보관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더 빨리 착용하고 챙기는지 가볍게 내기해볼까? 물론 공평하게 능력은 쓰지 않을게."
뭐라고 답을 하건 그는 자신의 장비가 보관되어있는 로커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내기를 하건, 하지 않건 빨리 챙겨서 출동을 해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부끄러워 하는 은찬의 모습에 싱글벙글 웃으며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는 현진이. 친구들이 가끔 더울 때나 심심하거나 빠르게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종종 안아서 이렇게 내려주기도 했으니 부끄러운가에 대한 생각은 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꽤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반대의 상황을 상정해 보면 이쪽도 꽤 낯 뜨거워 질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으앗?!"
자신의 손을 잡고 달리는 타이밍을 예상하지 못 해서 자연스레 비명을 지르다, 한 두 걸음 안에 페이스를 잡고 보폭을 늘려 힘차게 땅을 박찼다. 나도 이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너의 모습이 부러웠다고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하교길에 아이스크림으로 하자."
내기가 들어온다면 판돈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도 자신의 로커 쪽을 향하여 걸었다. 보관함 내부를 어떻게 정리했었는지, 어떻게 착용해야 빠를지 정도를 생각해 보다가 자신의 파트너도, 스스로도 로커 앞에 서면 눈을 마주친 다음 빠르게 잠금을 해제하고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조끼형 방검복을 옷걸이에서 빼와 빠르게 걸치는 동시에 자신의 실내화를 벗는다. 안쪽에 모셔둔 전투화를 신고 끈을 단단히 조인 다음, 방검복 파우치 안에 들어있는 통신용 골전도 헤드셋을 차고 방패와 철퇴를 꺼내 들면 출동 준비는 끝났다. 착, 하고 로커의 문을 닫으면 보이는 풍경은....
"사실 작전 다 끝나면 하교 시간은 훌쩍 지나갈 것 같지만... 아무튼 아이스크림 말이지? 콜!"
아이스크림 정도면 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이기면 이기는대로 뭘 요구해볼까. 요즘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일단은 준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현진과 나누는 자잘한 대화는 정말로 좋아했고 그 중간중간에 장난을 치는 것도 꽤 재밌었지만 지금은 실제상황이 발생했으니까.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하고 그도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왼손에 차고 있는 팔찌를 이용해서 잠금을 해제한 후, 조끼형 방검복을 빼서 걸치고 신발을 벗어 전투화로 갈아신으면서 그는 끈을 조이고 다시 한 번 매듭을 묶었다. 그 모든 것을 순간적인 가속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으나 지금은 내기 중이었기에 그는 정정당당하게 임하겠다는 마음으로 정말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뒤이어 로커 안에서 권총이 들어있는 권총집 두 개를 꺼낸 후, 자신의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통신용 헤드셋을 꺼내 착용한 후, 그는 소음이 없는지, 통신이 잘 되는지의 여부를 확인했다. 뒤이어 로커의 문을 닫고 나서 약 1~2초 정도 후에 근처에서 문이 닫는 소리가 또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이 이긴 모양이었다.
"오. 럭키! 아이스크림은 잘 얻어먹을게. 와. 전에 가위바위보로 진 것을 이렇게 만회하네."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집을 괜히 손으로 툭툭 건들면서 그는 보관실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무렵, 다른 이들도 하나둘 출동 준비를 마쳤는지 자신의 옆을 지나 나가고, 혹은 이제 막 도착한 이들도 있었다. 이어 은찬은 헤드셋을 이용해서 자신과 현진의 관리관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이어 들려오는 것은 피곤함에 찌들어있는 사회인의 목소리였다. 40대 정도 되는 남성의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익숙한 것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마 그녀에게도 들렸을 그 내용은 번화가이기도 한 15번 도로 부근에 늑대형 괴생명체들이 대거적으로 나타나서 날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늑대형 괴생명체. 온 몸이 검붉은 색이며 이빨과 발톱으로 콘크리트도 부숴버릴 정도로 상당히 강한 공격력을 가진 것은 물론이며 때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하고 위협을 가하기에 절대 쉬운 이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방심하다가 역으로 물리거나 잡아먹힐 수도 있는 위험한 이들이었다.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지다니! 가위바위보 였다면 이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브리핑 내용을 들어본다. 15번 도로에 나타난 늑대형 괴생명체 무리. 그 수도 많다, 정도 외에는 정확한 정보가 넘어오질 않는다. 발생 직후이니 아직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각성자들이 너무 부족해. 상황실에 사고 가속이나, 인지 능력 계열 이능각성자가 있었더라면 정확한 수와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었을 텐데... 최전방이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작은 희망고 단위에는 배치가 되질 않는다.
"조심해."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까다로움에 동감했다. 쉬운 괴수가 어디 있겠냐만 이번에는 여러 악재가 겹쳤다. 민간인이 어디 있을지 모르는 도심지 번화가, 매복하기 쉬운 환경...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늑대형 괴생명체 특성 상, 기습에 당하면 죽는다고 봐야 하는게 옳다. 팩 리더가 죽거나 무력화 되면 소극적인 모습으로 변한다는 특성도 있지만, 그건 먼저 발견하거나 단체로 이동중일 때의 모습을 발견한게 아니라면 노리기 힘들다. 여러 사유로 힘든 전투가 예상되자 현진은 감았던 눈을 뜨고, 오른손에 방패와 메이스를 쥔 다음 왼 손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에는 "가자"라고 말 하지 않았다. 잡은 순간 상대가 달려 나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건 다 끝난 후에 생각해볼게. 지금은 승리한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말이야. 하핫."
일부러 약을 조금 올리려는 듯, 그는 노골적으로 여유롭다 못해 씨익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 정도가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기도 했고, 정말로 화나게 하거나 삐지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무튼 방금 들었던 정보를 곱씹으면서 그는 현진에게서 들려오는 조심하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인 서울에서는 괴생명체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갖 장비를 다 동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에 수도 밖의 이런 최전선에서는 크게 지원되지 않는 것이었다. 공간의 일그러짐을 가라앉히는 기술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애버릴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설치하기엔 그 수가 상당히 부족했고 예산 역시 상당히 부족했다. 결국 그 빈틈을 매꾸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었고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숨을 약하게 쉬었다.
"뭐, 그래도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
딱히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은찬은 현진이 자신의 손을 잡자 바로 단번에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이번엔 조금 전에 능력을 썼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상당히 강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고 주변의 풍경이 정말로 빠르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을 것이다.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현진의 손을 쥐고 있는 은찬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약 4분 정도 지났을까. 현장 근처에 도착하고서 은찬은 능력을 해체했다. 현장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멈춘 것은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마음의 준비이건, 작전 준비이건. 현장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그 어떤 것도 상의할 수 없었고 뭔가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은찬은 현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 늑대 녀석들. 정말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멀리 떨어지지 말고 붙은 상태에서 대응하는 것은 어떨까? 조금 확인해야 할 범위가 많아지겠지만.. 각각 등 뒤를 맡기고 앞뒤로 체크하면서 작전에 돌입하면 적어도 갑자기 기습당해서 죽을 확률은 적어질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