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능력자 학생들의 체육시간은 다른 학생들과는 독립되어서 진행되고는 했다. 사실 각성 능력자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만큼 다른 이들보다 신체능력이 훨씬 뛰어나거나 혹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수준인 경우가 상당히 많았으며 그런 이들을 평범한 학생들과 같은 수준으로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교육계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그들은 따로 떨어져서 수업을 듣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만점 처리를 하고 넘어가는 일도 많았다. 은찬의 경우는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냥 시험을 쳐야 할 때가 되면 적당히 실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은찬이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달리기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그가 체육시간에 제대로 참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무리 자신이 평범하게 뛰었다고 하더라도 은근슬쩍 능력을 썼으니 반칙이라고 주장해버리면 할말이 없어지기에. 자신이 안 썼다고 증명을 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체육복을 입긴 했으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은찬은 아이들이 열심히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 부럽다. 나도 같이 뛰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지만 차마 저 안에 끼진 못하고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체육시간은 현진이 참여할 수 없는 수업이다. 이능각성자도 각성능력별로 신체능력에 차이는 있겠으나, 단순무식하게 <신체능력강화>라는 이능을 개화한 현진은 이런 교육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다. 이능 각성 이전에는 피구같은거, 재미있게 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현진은 이러한 제재 없이도 자발적으로 열외를 희망했을 것이다. 가장 큰 걱정은 혹여나 능력에 의해 상대가 다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직접적인 신체능력이 서로 닿는 부분이라면 더욱.
"달리는 것이 좋으니까. 뭔가 되게 기분 좋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쟤들과 달리면 반칙을 쓴다고 난리가 나겠지만."
그것 때문에 단체 계주도 불공평해질 수 있다고 못 나가게 하는걸. 능력 안 쓰면 그만인데. 괜히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그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체육시간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뛰는 거라면 얼마든지 뛸 수 있었으나 정작 모두가 활동하는 체육 시간에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정말 불만인 탓이었다. 이렇게 구경만 해야한다니. 괜히 다리가 간지러운지 그는 두 발을 앞뒤로 약하게 흔들었다.
"그냥 우리들도 능력을 아예 안 쓴다는 조건 하에 같이 하게 해주면 좋을텐데. 넌 안 그래?"
현진은 어떨까. 이런 불만이 있는 것은 자기 뿐인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물론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은찬은 딱히 반박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현진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니까.
"이렇게 된 이상, 오늘 차원종이 나타나지 않으면 운동장이나 신나게 돌아야겠어. 능력 없이 말이야. 그러다보면 열외 안 당하고 같이 뛸 수 있는 날도 있지 않으려나."
이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 괜히 제자리에서 달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어디까지나 팔과 다리만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말 그대로 제자리 뛰기였기에 앞으로 나아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 뭐,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그건. 그리고 확실히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면 골치 아프기도 하고."
조금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였으나 그럼에도 어느 정도 공감은 한다는 듯이 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평범하게 했는데 상대가 능력을 썼다고 우기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썼다가 상대가 휘말려서 다치기라도 하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현진의 경우는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이내 납득했다.
"끝나고 나서? 방과 후에? 바로 집 갈 거 아니면 얼마든지."
파트너 사이라고 해서 항상 붙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에게도 친구가 있고, 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있었다. 자신이야 오늘은 딱히 일정이 없으니 상관없었으나 그녀라고 항상 일정이 비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녀가 딱히 일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승낙했다.
"참고로 능력을 사용하는 나에게 이긴다면 소원 하나를 들어줄 수도 있긴 한데 말이야. 도전해볼래? 해볼래?"
살짝 도발적인 표정과 목소리를 내면서 그는 키득키득 웃어보였다. 물론 진심으로 약을 올리기보단 평소에 보이는 작은 장난에 불과했다.
"나? 나는 그냥 스위치 같은 느낌인데. 능력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빠르게 달리는 그런 느낌이야. 아무래도 이건 사람마다 조금 다르긴 하니까."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는 듯이 그는 태연하게 이야기를 했다. 즉, 지금 달리는 것도 정말 평범하게 달릴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능력자라고 해서 항상 상시 능력이 발동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런 이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은 껐다 켰다를 반복할 수 있는 능력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현진은 어떨까? 너는 어떻냐는 듯이 물끄러미 은찬은 현진을 바라봤다.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방과 후에 네가 일정이 없으면 나는 오케이야."
딱히 같이 뛰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하나 그 와중에 자신에게 이기기 위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현진의 모습에 은찬은 웃음을 약하게 터트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이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신이 정말 제대로 능력을 써서 달리면 따라잡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텐데.
"에이. 그걸 왜 이리 고민을 해. 애초에 진지하게 하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정말로 능력을 쓰고 달리면 네가 능력을 쓰고 팔씨름을 하는 것처럼 이기기 힘들어.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그런데 그렇게 고민할 정도로 빌고 싶은 소원이 있어? 그렇게 물어보면서 그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말로 표현하기도 애매하고.... 나는 디지털 볼륨 믹서 같은 ...? 느낌이야. 꺼졌는지 켜졌는지 잘 모르겠고."
이전에 언급한 근육을 쓰는 감각이다, 라는 표현 또한 어느 각성자의 인터뷰에서 따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기이한 능력이고, 사회에 등장한지 오래 되지도 않아 정확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우후후, 나 요즘 약속 없어. 한가해."
바쁠 때도 물론 있었지만, 적어도 이번 주는 약속도 없다. 차원종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집에서 밥 해먹고, 운동하고, 쇼핑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
"그렇긴 하지. 출발과 동시에 상대를 붙잡는다, 바닥의 모래먼지를 일으킨다 따위만 생각 나더라. 둘 더 택도 없겠지... 소원? 소원 미리 생각해둔 내용은 없지만 그런거 두근두근거리잖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어느 때에도 쓸 수 있고. 저축해두는 기분으로... 왜? 은찬이도 뭐 빌고 싶은 소원 있어?"
이상하게 바쁠땐 조용하다가 꼭 한가해서 쉬는 날만 되면 경보가 울린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은찬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전만 해도 기껏 놀러가려고 계획을 다 짜고 막 나가려고 했는데 차원종 등장 경보가 울려버려서 일정을 다 망쳤던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을 하는 은찬의 눈빛은 상당히 죽어있었다. 정말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는 듯이.
아무튼 그녀가 생각한 방식. 이를테면 모래먼지를 일으킨다 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은찬은 현진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무서운데! 모래먼지가 일어날 정도면 바람이 거세게 분다는건데 그 바람 내에서는 빨리 달리기도 힘들단 말이야. 그렇게까지 이기고 싶었어?! 물론 소원은 두근두근거리는 거 인정하긴 하는데!"
생각보다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은찬은 몸을 괜히 장난스럽게 파르르 떨다가 이내 키득키득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하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느 때에도 쓸 수 있다는 법은 없는데? 난 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안 쓰면 삭제할건데? 내가 빌고 싶은 소원? 글쎄에. 이를테면... 현진이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받아간다...라던가. 괜찮지 않나? 이를테면...
이어 은찬은 현진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미소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허나 말 끝 부분은 잇지 않았다. 마치 거기까지만 말하겠다는 듯이.
얼마 되지 않은 사건의 기억을 떠올린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차원종이 나오는 데에는 자원이 소비되는 것 같다. 잔고가 뭉텅이로 빠진 지금이라면 한동안 투자하기 힘들겠지.
"우후후, 발로 땅을 밟거나 하면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니면 결승선 뒤에서 은찬이를 붙잡고 저지시킨 다음 결승선을 통과하고 풀어주는 방법도 있었고...."
팔짤을 끼고 과장된 행동을 하는 은찬을 보며 현진은 쿡쿡 웃었다. 그래, 두근두근 소원권을 위해서라면 이정도는 노력해야 한다. 편법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대결이니까!
"................."
은찬이 다가오는 만큼 현진의 몸도 그만큼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앉아 있는 자세이니만큼 그렇게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은 한뼘 마저도 안 되었다. 천천히 은찬의 얼굴이 다가오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눈 앞에서 커지기 시작하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현진의 얼굴이 점 점 더 빨갛게 익어간다.
확실히 붙잡혀버리면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없을테니 그건 그것대로 상당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진심으로 빠르게 달릴 수밖에 없나 생각을 하나 애초에 내기에 능력이 들어가게 되면 그 시점부터 더 이상 페어한 경기가 아니었다. 그런 경기에 내기를 걸어봐야 재미가 있을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이내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역시 내기건 뭐건 공평하게, 그리고 재밌게 해야 재밌는 법이었다.
아무튼 긴장한 현진의 얼굴이 붉게 익어가자 은찬은 그쯤에서 다가가는 것을 딱 멈추었다. 이어 피식 웃으면서 끊어졌던 말을 이어나갔다.
"....현진이의 잠만보 인형이라던가!"
그거 뭔가 방에 장식해두고 싶기도 했거든. 물론 반 정도는 농담.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은찬은 키득키득 웃어보였다. 이내 장난이었다는 듯 태연하게 그녀의 옆에 앉으면서 그는 저 앞에서 장애물경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괜히 부럽다는 듯 두 발을 앞뒤로 살살 흔들었다.
"그래도 역시 부럽다. 진짜. 이럴 땐 능력이 또 거추장스럽단 말이야. 하기사 꼭 달리기로만 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선 능력자인 내가 참아야겠지."
"글쎄. 내가 가져가면 그냥 방에 장식하고 그대로 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잠만보 인형을 위해서라도 그런 것을 소원으로 빌면 안되겠네."
꿈에 잠만보가 나타나서 나를 뭉개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서 그는 키득키득 웃어보였다. 물론 그것은 꿈일 뿐이지만 꿈 속이라고 하더라도 나타나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면 엄청 무서울 것 같으니까. 현진이에게 돌려줘. 라는 말까지 한다먼 더더욱. 역시 자신은 편한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이야기를 한 은찬은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대신에 차원종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걸. 그것까지 부러워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막상 싸우라고 하면 다들 무서워서 못 싸울 것 같은데. 사실은 나도 처음엔 엄청 무서웠거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전에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마치 너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듯이. 물론 은찬은 딱히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싱긋 웃었다.
"그래도 요즘이야 워낙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가 있어서 무섭진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1:1로 싸우라고 하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아. 그 괴물들은."
은찬이 입에 담은 이상한 걱정 탓일까, 화끈거리던 얼굴도 조금 나아진듯 하여 상대를 퉁명스럽게 쏘아보며 묻는다. 입술이 댓 발 튀어나온 것은 그저 상대의 장난에 당하여 억울하다기엔 조금 더 복잡한 감정들이 엮여 있었으나, 스스로 그것을 구분하여 보기좋게 정리할 의지따위는 없었으므로 앞으로도 그 원흉은 복잡하다 외에는 적합한 설명이 없을 것이다.
"보통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때는 거기까지 생각을 뻗지 않는 법인걸. 왜 고등학생이면 생기부에 수능에 신경쓸게 너무 많아지잖아. 한 번의 선택이 진로에 돌이킬수 없는 영향을 남길지도 모르니까 괜찮아 보이는 선택지를 내세워서 본심은 한 발 뒤로 빼는 경우도 있고."
어째서인지 그녀와 은찬이 아닌 학생들의 대변인이 되어 말을 하다가,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후후, 고마워. 나도 은찬이 같은 파트너가 있어서 참 좋아. 다른 애들은 서로 싸워서 카운셀링도 받는다면서?"
부부상담을 조금만 개조한 녀석이라 들었는데, 그걸 듣는다고 사이가 나아질련지는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보통은 뭔 짓거리냐고 지금처럼 짜증어린 목소리만 듣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은찬은 키득키득 웃었다. 물론 이런 장난이 상당히 짓궂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칠 수 있다면 치고 싶은 것이 장난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물론 선은 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상대의 입장에선 어떠려나. 아무튼 잠시 어깨를 으쓱하면서 태연하게 키득키득 웃던 웃음소리를 그는 천천히 줄였다.
"뭐, 그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역시 이 길이 쉽다고는 못하겠는걸. 나도 솔직히 혜택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예 없었다면 굳이 이 일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뭐,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이유도 있고 해서 차원종을 직접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돈이 반, 그리고 복수가 반. 그에 대해서는 조금 복잡하다는 듯이 그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도 중요한 동기였기에 결국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그는 아. 소리를 내면서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뭐, 어쨌건 파트너끼리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부부상담이나 그런 것과 크게 차이는 없지 않을까? 일단 부부도 오래 같이 보내고 함께 생활하고 그러니 말이야. 그러니까 근본은 비슷할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딱히 그런 것은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말이야. 아. 그거. 알지. 알지.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데 팔찌가 조용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안심하고 그런단 말이야."
어쨌건 팔찌가 울려야 호출되는 것이고 항상 차원종 관련으로만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것은 아니니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겠다고 이야기하며 은찬은 이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는 너희 가족이 반대하거나 하지 않았어? 이 일 하는 거. 나는... 가족이 없긴 하지만 너는 아닐 거 아니야."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현진은 제 몸을 오뚝이처럼 앞 뒤로 흔들었다. 듣고 싶었던 답이 따로 았었던 것인지는 그녀도 모르겠으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못 한다는 특성이 이렇게 신체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혜택도 좋긴 하지...."
아직까지 생각이나 감정 따위에 잠겨있는지, 피상적으로 보이는 답변을 해주며 몸을 계속 흔들흔들 움직였다. 그러다 친구를 옆에 두고 자기가 꺼낸 이야기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팔다리를 쭉 펼치며 기지개를 편다. 으으으- 소리와 함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비슷한가? 나는 상당히 달라서 부부클리닉을 파트너 단위에 적용하는게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예를 들면 부부는 서로 선택하는거고 파트너는 IPU에서 정해주는거잖아. 관계의 시작점부터 다른걸. 아, 물론 서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신뢰나 친밀도를 쌓아가는게 필수적이긴 하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상대의 업무 스타일이 정말 안 맞는 경우도 있을거고, 3명이 파트너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관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조잘조잘 이야기하다가, 팔찌가 조용하면 안심한다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도 앰뷸런스 소리만 들어도 팔찌부터 확인하게 된다며, 자다가 깨서 밤 잠 설친 기억이 있음을 언급한다.
뭐지?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보이는데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에 은찬은 빤히 현진을 바라보긴 했으나 굳이 뭔가를 더 말하진 않았다. 자신이 다른 이에게도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 불만인 것인지. 아니면 이런 장난을 친다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인지. 하지만 이 정도는 가끔 장난스럽게 다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일축하며 그는 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튼 파트너와 부부의 차이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는 현진의 말에 은찬은 팔짱을 가만히 끼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3명이 파트너를 하는 곳도 있고 4명이 하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인원이 부족하니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관계의 시작점이 다르다는 말에는 호가실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뭐, 대체로 맞는 말이긴 한데 부부도 가끔은 누군가가 정해줘서 되는 경우도 있잖아? 정말로 적은 거지만. 그리고 어찌되었건... 함께 행동하고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긴 하니까. 뭐,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있는 거 아니겠어?"
그 부분은 어쩌면 어린 시절, 부모를 잃어서 조금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는 와중 어색하게 웃으면서 잘 설득했다고 하는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어 괜히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트러블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도 충분히 이해해. 나도 딱히 이 일과 연이 없던 친구가 갑자기 이 일을 하겠다고 상담하면 가능하면 하지 말라고 할 것 같거든. 그런데 자식에게는 어디 다르겠어? ...솔직히 나도 가능하면 내 자식이 혹시나 능력자가 되어서 이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바로 찬성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조금은 씁쓸한 소리를 하던 그는 이내 두 손으로 제 뺨을 강하게 톡톡 치다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말이야. 차원종을 모두 몰아내거나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다음 세대에선 이런 괴물들과 싸우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은찬의 합리적인 추측에 대하여 답을 내려 보자면 둘중에는 전자에 가까울 테니만 현진의 입으로 그러한 답이 나올 일은 요원하니 결국 그가 이 사실을 알 방법은 없을 것이다. 아아, 안타까워라.
"아, 있긴 하구나 그런 경우...? 만화에서나 보던 일이라 생각하지도 못 했는데 말이야."
생각이 재미있는 쪽으로 빠지자 평소에 보던 드라마인 사랑의 차원종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천천히 눈을 굴리다가 저번에 추천해준 드라마 봤어? 하고 운을 띄워보았다.
"우후후, 사실 엄청 싸우기는 했어. 예전에는 성격도 지금이랑 달랐어서 걱정도 엄청 하셨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키득 키득 웃으며 대답을 하다가 미래의 이야기를 하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그러네, 연애 결혼 출산까지 살아 있는것 부터가 걱정이네. 조금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현진의 머리 속에서 같은 걱정이 재현된다. 지금 당장은 없지만 과연 그 고민까지 우리가 생존해서 도달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걸 해낸다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이 든다면 말이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 만큼 더 암울한 미래를 상정할 필요는 없고."
아주 살짝 한 약속 같은 무언가였지만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지금 봐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같이 보자는 말이 있었는데 그래도 혼자서 봐버리거나 하면 조금 애매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는 아직 보지 않았다. 물론 놀러올 때 본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있다보면 한번 초대를 할 수도 있을테니까.
"그래? 그럼 예전의 너는 어떤 이였는데?"
지금과 성격이 달랐다는 그 말에 은찬은 궁금하다는 듯이 그렇게 물어봤다. 물론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역시 잊지 않았다. 자신이야 딱히 옛날의 일을 숨기거나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상대도 그렇다는 법은 없었으니까. 허나 그래도 궁금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가볍게 묻는 정도로만 끝을 내면서 그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 자신의 물음에 대한 깊은 그녀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암울한 미래를 상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네 말대로야. 하핫. 정말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 나도 모르게. ...진짜 안 좋은 습관이긴 한데 말이야! 이래서 가급적이면 즐겁게,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살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 역시 외국의 유명한 테마파크 가고 싶다!"
그렇게 괜히 큰 소리를 외쳐보기도 하면서 그는 뒤이어 차원종 나오지 좀 마!! 라는 큰 목소리도 이었다. 주변 학생들 중 일부가 자신 쪽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지만 딱히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어른이 되면 휴가를 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그래서 길게 길게 장기 휴가를 빼서 테마파크나 다녀와야겠어. 역시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
그러면 싸우다가 잘못되어도 아쉬움은 조금 덜지 않겠어? 그렇게 제 가치관을 살짝 내밀면서 그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