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아찔한 피비린내를 지울 수 없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기만 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죽음이든, 의미 없는 죽음이든. 사람의 형상을 닮은 범을 찔러 죽이며.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과 같은 희열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익숙한 희열이었다. 이미 자신은, 많은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힌 채 미소짓지 않았는가.
어린 가현은 가문 내에서도 유독 별난 존재였다.
제사장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된 제 오라버니들 대신 제사장의 후보에 앉혀지게 될 것이라는 이유 하나로 제대로 된 사랑도. 제대로 된 애정도. 그 무엇도 받지 못한 채 컸건만, 그 모든 것을 마치 제 숙명이라도 되는 양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항상 그 나른한 웃음을 낯짝에서 지우는 일이 없었다.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어린 가현은 제 눈 앞까지 다가온 시린 칼날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으며, 제사장이 되고 산제물을 바칠 때에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제 손으로 직접 죽여야만 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없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은 가문원들과, 당주인 아버지의 감시 및 시행 하에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가현은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받아내었다. 눈 앞으로 시린 칼날이 들이닥칠 적이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라보았으며, 제가 아끼는 애완동물을 해할 때에는 그 어떤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것보다, 이것들 중 하나를 이겨내지 못해 끝내 쓸모 없는 실패작 취급을 받는 것이 가현에게는 더더욱 어려웠고, 버티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예쁨받고 싶다고. 잘 했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다고. 한 없이 바래 왔으나,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평가 뿐이었다. 칼날이 들이닥칠 때 조금이나마 주춤하지 않았던가. 애완동물을 해할 때 망설이지 않았던가. 아주 미세한 오차마저도 임씨 가문에서는 용납되는 일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잔혹하고, 더욱 강경하게. 고통과 슬픔이라는 어둠마저 옅어지게 만들 만큼 자신이라는 존재가 강인해야만 했다는 것을 어린 가현은 금방 알아채고, 변화하며, 결국 정말로 그들이 바라는 것 하나하나 흠 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운명이었으니, 스스로 나침반의 바늘을 비틀어버려 옳은 길을 버린 셈이다.
그렇게 차근차근 인정받을 무렵. 마지막으로 왕을 알현하러 갔을 때, 가현은 울부짖는 어린 혈육들 사이에서 끝까지 고개를 조아리고 그 어떤 불필요한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방계 직계 할 것 없이 MA를 알현한 제 혈육들이 미치고, 공포에 휩싸여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끌려나가 그 장소에 끝내 저 혼자만 남게 될 적에도 가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이 때부터 왕에게 매료된 것일지도 모르지. 어린 가현이 왕을 알현하기 전, 그 장소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던 풍경은 그토록 잔혹하고 냉정하던 가문원들 모두가 MA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 벌레만도 못 한 존재로 보이게끔 고개를 조아리고, 그저 경외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던 풍경이었으니까. 이 존재라면. 자신이 지금껏 느꼈던 고통과 두려움을 전부 감수하고서라도 모실 만한 존재라고 느꼈다.
끝내 남아있던 마지막 인간성조차 어둠에 잠식되는 순간을. 모두가 반겼다. 가문원들도. 가현 자신도.
가문원들에게는 순종적인 장기말이 되었고, 그 장기말은 제 신념 하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던가. 그 어떠한 의문도. 반발심도. 저항심도 품지 아니한 채로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짓밟았다. 제 부모가 산제물을 바칠 적이 되면 항상 따라나가 곁을 지켰다.
인간의 급소는 생각보다 여러 곳이었다. 그 곳을 제 부모가 찍어내릴 때마다 새빨간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고, 가려진 얼굴 너머로 유심히 그 꼴을 지켜보며 그 소리를 속에 담았다. 저길 찌르면 어떻게 되고, 또 다른 곳을 찌르면 어떻게 되는지.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비명이 제일 간결하며 잡음이 없는지. 마지막에는, 어떤 모습이 신에게 있어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일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은- 그 마지막마저도 고운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 그 절대적인 존재가 자신을 좀 더 어여삐 여길 것이기에.
그렇게 지켜보기만 하던 자신이 처음으로 산제물을 바칠 적.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오빠라고 부르며 아련한 울림을 담은 채 따르던 그 사람을 제 손으로 찔러죽이며. 가린 얼굴 너머의 가현은, 웃고 있었나. 당신도 기쁠 거야. 신에게 바쳐지는 과정을 내가 수행해주니까. 당신을 예뻐하던 그 사람이 끝내 당신을 그 존엄성을 품은 존재의 곁으로 보내줬잖아?
그러니까, 오빠도 웃어야지. 행복하게.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찢는다. 뼈를 부수고 속을 헤지는다. 칼 끝이 떨린다. 미세한 떨림. 피의 선율. 그 모든 과정은, 신을 위한 합주일 뿐일지어니.
저는 당신에게 인간성을 바치고. 인간이라는 덧 없는 존재로써의 삶을 포기한 채- 오직 이단을 벌하며 만족을 채워 줄 칼날으로써의 삶을 약속하겠나이다. 어린 가현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환희에 가득 찬 웃음을. 황홀경에 잠긴 광소를. 더더욱 짙게 머금으며, 제 혈육들을 바쳤다.
. . .
피를 취해 축복을. 꽃을 찢어 영원을.
종언을 고하는 손짓으로 저물어간 못다 핀 꽃은 몇 송이째인가.
깊은 밤이 끌어온 먹구름에 덮인 세상 속에서 빛을 갈망하며 저물어간 꽃은. 시듦에 의미가 있는가.
>>614 아니 세상에 어디 구린 게 있는 가문이란 건 떡밥 줏어먹고 알았는데 이 정도의 가문이었다니 :ㅁ...... 산제물, 살인, 칼이 목에 들이밀어지는 실험?! 경찰 불러 경찰! 처음엔 버려지고 쓸모 없는 취급 당하는 게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다가 MA님 알현하고 NA교에 입성........ 소중한 것들까지 제 손으로 죽였는데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 많은 생각이 들게해요 🤦🏻♀️ 제목도 희생인데 이게 가현이 손에 죽은 이들을 뜻하는건지 가현이의 심리적인 무언가들을 말하는건지 🥹🥹🥹마지막에 그 무엇에도 의미를 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는 말에서 정신이 버티기 위해 도는 걸 선택해버린 것은 아닌지
>>620 사실 나도 짜고나서 이건 너프 좀 먹지 않을까 싶었는데 통과돼서 놀랐어 ㅋㅋㅋㅋㅋ 하 이런 무리수 설정이라도 오케이 콜 해준 캡틴에게 그저 무한한 감사를.. 그래도 이번 독백으로 이게 모지 싶었던 건 대부분 메꿀 수 있으니 안심이라며(나쁨) 제목은 사실 전자를 노렸어! 근데 후자의 의미도 맞네...? (이제 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지 히히
그가 온화 하는 말들 잠자코 들어주었던 것처럼 저 역시 그랬다. 머그잔 들고 간간히 마셔가면서 이윽고 도령 웃으며 괜찮다고 할 때까지. 웃음기마저 싹 거두고 다소곳하고 얌전한 것이 되려 소름 끼친다.
하나의 목소리 조용해진 후엔 얼마간의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찻집의 안쪽에서 들리는 물소리. 창 밖의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 희미한 바람 소리. 그것들의 소리의 전부였다. 영겁과 같은 수 분이 지나 겨우 그 탁자 위에 새로운 소리 돋았다. 달각. 빈 머그잔 내려놓는 소리. 그건 침묵의 끝을 알리는 신호라. 이제는 빈 손을 포개 제 무릎 위에 올린 온화, 그 입을 열었다.
"그래. 도령의 의중은 긴-하게도 잘 알겠소. 사람은 각자 태생 다르고 육신과 혼도 가지가지이니. 음. 그런 생각 할 수도 있지. 그 생각 입 밖으로 낼 권리 또한 당연한 것. 그것에 내 감정 드러낼 이유 하등 없지. 그렇고 말고."
마치 그가 한 말들을 그대로 납득한 듯이 고개 주억거리며 말하는 모습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직전의 태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에 생기는 이질감 있다. 줄곧 그 응시하던 붉은 눈이 아래로 깔려 그에게 향하지 않고. 목소리 쾌활함 그대로이나 말투에 경박함 없다. 적잖이 비뚤어졌던 자세 또한 올바르다. 순식간에 달라진 태도는 마치-
"그럼 나는 마실 것 다 마셨고 먹을 것 다 먹었으니 먼저 일어나겠소. 값은 이미 치렀으니 여유로이 즐기시게."
일방적으로 자리를 끝내는 말을 내린 온화 그 즉시 일어섰다. 일어서 그에게 고개를 숙인 뒤 옆으로 비켜나 뚜벅뚜벅 걸어간다. 탁자를 지나 그의 옆, 바로 옆을 지날 때까지도 붉은 눈은 오로지 앞만 보았다. 큰 보폭으로 성큰 걸어가 곧 출입구에 다다랐으니. 이변이 없다면 붉은 두루마기는 즉시 찻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치지 않을 방향으로 걸어갔겠지.
놀래킨 것에 고개 돌린게 반응- 이라면 반응이라 할 만 하긴 하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상대가 아회이지 않나. 그래- 기척 느끼고 고개라도 돌려준 것이 어디냐. 그 온화가 그리 생각할 만큼 많은 장난 걸었었고. 그만큼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와 고분고분 말 들어줄 온화 아니었지만.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몸 더욱 단단히 옭아매고 찰싹 들러붙어 치근대고. 연이어 그러니 기어코 아회 입에서 앓는 소리 새었다. 필시 세상 말세야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간에 기묘한 침묵 있었다. 본래 말도 반응도 한 박자 느린 것이 아회라 그 정도 침묵은 별 것 아닐 것이나 어쩐지 감이 아니라 하는 듯 했다.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버리자. 제게 할 말이면 어련히 알아서 할 사람이니.
"히히히히! 고작 요걸로 세상 말세요? 순진한 오라비야. 내 노는 것 보면 아주 까무러치것소."
제 목소리 꾸며낸 것은 참더니 허리 쥔 것은 못 참겠는지 쭉정이 날아가는 듯한 소리 내길래 한껏 놀려준다. 또 움직이길래 팔 굳은 것 마냥 단단히 하고 있으니 금방 포기한다. 때리던가 꼬집던가 하면 풀어줄 지도 모르는데 그러질 않는단 말이네. 눈깔 뒤집히면 정도를 잃을 만치 불타면서. 제 장난은 그럴 가치도 없나보다. 에이 서운타. 파르르 떠는 몸 괜히 더 그러안고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제 뺨 찰싹 붙인다. 그만큼 고개 숙인 탓에 한데 모아 묶은 새빨간 머리가 아회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다. 제 이런 행동들이 수일마저 뒷걸음질 치게 할 거라 하길래 잠깐 생각해보니 어라, 정말로 그럴 것 같아 푸흐흐 웃었다. 실없이 웃던 온화 눈동자가 그 다음 물음에 살짝 내리감겼다.
"음- 무 오라비. 그거 아는가? 내는 백리 밖에서도 무 오라비 살내음이라면 귀신 같이 잡아낼 수 있다오. 헌데 그 살내음이 오라비 방 아닌 곳에서 나니 무얼 하나 궁금치 않겠나. 하여 이리 왔다 이거요."
실실 웃음 섞인 말에 당연히도 장난기 다분하다. 노골적으로 굴어 그렇게 보이려는 것 같기도 했을까? 그런 의문 들 틈조차 주지 않을 듯이 온화 다시금 뺨 문대고 손 닿은 허리 만지작댄다. 한 차례 장난 친 후엔 그리 소곤댔다.
"그래서 말이오. 오라비. 내 여 오기 전에 잠깐 천부 지나왔는데. 때마침 김 모락모락 나는 찜통 여는 시간이었지 않나. 그 하얗고 뽀얀 김이 어찌나 군침이 돌던지. 그 찜통 안에 무엇 있었을지 궁금하지 않소? 오라비가 순순히 무릎에 앉아준다면야 그것 무엇이었는지 내 가르쳐주지 못 할 것도 없으이."
제가 아는 아회라면 아마 십중팔구 거절 못 할 얘기를 삭 흘려놓고서. 조용히 입 다물고 대답 기다린다. 이럴 땐 또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 얄밉기 그지없을 터였다.
약 3년의 시간 동안 변함 일절 없으니, 그 시간 동안 철이라도 들까 싶었건만 웬걸? 얄미움만 더 늘었다. 한 번이라도 고분고분 말 들어주는 일 없으니, 아회 입장에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일을 겪어놓고도 이렇게 구니, 아무래도 자신이 괜히 신경을 썼던 건 아닐까. 아회 상대에게 무슨 일 있었는지 알지 못하니 그리 퉁치고 넘어가버린 터였다.
"……내 거기까진 알고 싶지 않소."
답이 여전히 느렸다. 말을 고르고 고르기라도 하는지, 당신이 얘기를 하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고야 만다. 그 세상만사 달관한 건지, 아니면 반응할 기력도 없는 건지 모를 어조와 더불어 행동도 영 미적지근하다. 누군가는 벗어나기 위해 장난으로라도 팔을 찰싹 치든지, 아니면 살짝 꼬집기라도 할 터인데 그런 기미라곤 일절 보이지 않고 흐느적대기만 하니, 그래. 불탈 때가 아니라면 기어다니는 개미가 더 강할 듯싶은, 종잇장 체력을 가진 인간이다. 적룡 기숙사의 사람답다기엔 영 미덥지 않은 태도라 그 뜻이겠다. 그나마 행동 보이는 것이라면 당신의 팔 슬쩍 붙잡고 낑낑, 벗어나려 몸 앞으로 기울고자 하는 것뿐인데 그마저도 당신이 목덜미에 뺨 붙이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듯 잠시 목에 힘 들어가더니만, 결국 제 자신에게도 지고 말았는지 한숨 푹 쉬었다.
"낭자 그리도 기민하니 내 어디 맘 편히 갈 수가 없겠구려……."
나의 움직일 자유는 어디로 갔는지, 내 살 내음은 당최 또 무엇인지, 이 인간은 대체 왜 이러는지 의문 가질까 싶으면 또 목덜미를 문대는 뺨이요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에, 허리 만지작거리기까지 하니 어떻게든 손길이라도 피해보고자 앓는 소리 내며 몸 움츠린다. 아이고, 내 이런 종잇장 몸으로 도망칠 수도 없으니 세상 서럽다.
"……."
잠깐의 침묵. 입을 꾹 다문 아회는 속으로 여럿 갈등하는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서러운 수준을 넘어섰다. 안 그래도 어디선가 희미한 분내 넘어 좋은 내음 나더니만 이것이었나, 이런 것에 넘어가면 버릇이 더 안 좋아지는데, 거기다 남은 존엄성도 박살이 나는데, 그렇지만 천부로 자주 나가지 않는 자신에게 있어 벽난로 간식을 제하면 따끈한 주전부리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않은가. 속내에서 여럿 의견을 나누다가도, 아회는 결국 느릿하게 입 벌린다. 하아…. 짧은 한숨 먼저 푹 쉬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자비라도 베풀어 부디 자존심만큼은 지켜주시오… 소인 곧 약관이니."
입학식 당일 당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아회의 눈썹이 쓱 내려간다. 내 곧 20살이 다 되어가는데 어찌 전교생 보는 앞에서 무릎에 앉을 수 있었는지, 그때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알기나 할까! …모르겠지. 알고도 그랬으면 이번에 자비 베풀어 달라 요청한 것도 묵살되는 건가? 아회 다시금 흐느적, 바둥바둥, 열심히 품에서 나가보고자 몸 뻗는다. 에잉, 이놈의 종이 몸뚱이……!
북부는 영원한 겨울이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호수는 반질반질 얼어있고, 바다는 엄두도 낼 수 없으며, 산에는 그런 환경에 적응한 요괴가 득실득실했다. 가끔 요괴가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니, 무씨 집안에서는 사냥꾼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간혹 몇 사람이 나가 소탕을 하는 등의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 아회가 처음으로 요괴를 잡는 날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그 척박한 설산을 밟을 수는 없을 테니, 어미 요괴 죽이고 홀로 남은 작고 연약한 새끼 요괴를 가문에 데려와 처리하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아회에게 있어선 의미가 깊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명한 일이거니와 사용인이나 방문하는 객이 아닌, 온전히 '무 씨' 성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가문에서 그 사건이 있고도 유령 소리를 들었는데, 무 씨라고 당당히 공인되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있으니, 오늘 아회는 평소보다 더 억세게 당기듯 머리를 빗겨주는 사용인의 손길에도 기대에 가득 찬 눈을 하며 웃을 수 있었다.
"나 참, 그렇게 좋아요?" "응." "그렇구나. 뭐, 지금을 즐겨두세요."
아회는 동글동글, 보석을 빼닮은 것 같은 눈망울로 거울 너머 사용인을 쳐다봤다. 다른 것은 청초한 미인이던 어머니를 많이 닮았지만, 눈동자만큼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한때 화련의 자식이 사실 가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 거란 헛소문이 돌았지만, 아회의 눈동자를 본 이후로는 그 소문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사용인은 그런 눈이 거울 너머로도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아무렴, 첫째 도련님은 눈을 감고 계시니 영 모르겠고, 가주님은 그 위압감에 눌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고, 요 작은 아이는…… 그래,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눈망울이었다. 음울하고 슬픔을 끌어안은 빛이 서렸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운 눈. 무 씨 집안에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난 뒤부터 자신이 괴롭힌다는 것도 짜증이 나 그만두게 만드는 저 빌어먹을 눈 때문인지, 사용인은 한마디를 더 붙일 수밖에 없었다.
"각오한 것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라잖아요." "그렇구나……." "자, 머리도 다 빗었어요. 웬일로 머리를 묶어달라 하지 않았는진 몰라도." "……고 싶어서…." "응? 뭐라고요?"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나가요, 이제 좀 쉬게!"
사용인의 툴툴거림을 뒤로 아회는 몸을 일으켰다. 한 바퀴를 빙그르 도는 자그마한 몸을 비추는 거울에는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새하얗고 정갈한 옷을 걸친 자신이 있었다. 허름한 옷이 아닌 건 가주님 덕분이다. 가계 도술을 배우기 위한 수업을 듣기 시작한 이후부터 가주는 아회의 처우를 조금씩 개선해 주기 시작했으니까.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는 충분히 오랜 나날 동안 기다렸던 작은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다. 눈을 오래 마주칠 수 있고, 아회라고 이름 불리는 것. 그간 아회에게 있어서 가주님이 아버지인 건 알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늘 고개를 조아려야만 하기에 볼 수 없거니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과거와는 거리가 약간이나마 있단 뜻이다. 하물며 제가 가장 의지하는 형님께서도 남몰래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좋아하는 우리 형님. 아회는 그런 형님을 닮고 싶은 나머지 머리를 풀어달라 했는데,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형님께서도 요괴를 잡아본 적이 있을까? 다음에는 꼭 물어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때 얘기를 해달라고 해야지. 과람한 욕심인 건 알지만, 아회는 아직 충년이 가까워가고, 따라서 조금은 욕심을 내어 보고 싶단 마음이 덜컥 치솟을 나이였으니.
오늘은 누구도 귀찮게 만들지 않고 열심히 해내야지. 꼭 해내고 말 거야. 어린 아회의 다짐은 그로부터 불과 한 시진도 안 되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으, 흐으, 흐……."
아회는 숨을 헐떡였다. 각오한 것과 현실은 달랐다. 방계를 비롯한 무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눈 가득 쌓인 마당에 나앉은 아회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발붙일 적에도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따갑고, 차갑고, 아팠다. 누구도 이 순간을 돕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사냥감이니 아무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홀로 해내야만 한다고 가주님, 아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참 처절한 사투였다. 작달만한 몸을 가진 데다 병약했고, 요괴는 새끼라고 해도 요괴였다. 저 앙칼진 것이 발톱을 내지를 때 어찌나 두려웠는지! 도술 배우지 못했기에 무구라도 주잡시고 작은 손도끼 받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비명횡사했을 것이다. 도끼를 휘둘러본 적도 없는 작은 손으로 도망치고, 휘두르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를 수십 번. 아회는 결국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치는 것에 성공했고, 지금은 벌벌 떨며 자신 앞에 축 늘어진 요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주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아회에게 내리 꽂혔다.
"아회야, 무엇 하느냐. 어서 끝내지 않고." "그, 그, 그것이."
덜, 덜덜, 덜덜덜……. 몸의 떨림이 그치질 않는다. 힘도 없는 작고 연약한 새끼 요괴를 잡는 것도 이 몸으로는 힘들었는데, 끝내는 것도 내 몫이라고? 그래야만 하는 거야? 요괴는 알아듣기 힘든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눈밭은 피로 흥건히 젖어가고 있었다. 아회는 주변 눈치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작은 손도끼를 집어 올렸다. 고민하듯 떨리는 손과 눈동자는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을 직시하고, 비현실적인 도피를 바라듯 흐려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죽음이란 걸 개념으로만 배웠다지만 본능은 알고 있었다. 이미 이대로 내버려 둬도 저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왜 끝내야 하는 거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대체 왜, 왜 무기를 들라고 하는 거지?
"으, 아으."
이성과 비이성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될 거야. 이 요괴는 죽을 거야. 자비를 베풀어주자. 그렇지만 멈추면 안 돼, 알잖아, 가주님이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본보기를 보여야만 해. 난 아직 약하잖아, 사용인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잖아, 하물며 가문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안 돼! 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무가의 일원이 되고 싶어…… 이건 하나의 시험이잖아…… 받아들여! 아니지, 내가 바라는 건 괴롭힘의 중단도, 무가의 일원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해져. 솔직해져. 네 욕심에. 아아, 어머니, 죄송합니다─
마침내 눈동자에 들어찬 건 확신이었다. 홀린 듯이 자그마한, 무딘 날의 손도끼 자루를 잡은 아회는 요괴를 향해 설설 기어갔다. 무릎발로 기어가, 새끼라고 해도 커다란 덩치를 가진 것 위에 올라타듯 하더니 한 손으로는 아직 맥 뛰고 뜨거운 몸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요괴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망설이지 않듯 쉼 없이 팔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콱, 퍽, 푸욱, 콱, 콱, 콱, 즈북, 철벅, 촥, 촤악, 촥…….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문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아까 친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합격선이오만……." "가주님, 어떻게 하면─" "내버려 둬 보거라."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피비린내는 짙어져만 갔다. 팔을 더 쓰기 힘든지 한 손으로 쥐던 도끼를 양손으로, 마침내 몰아쉬는 뽀얀 숨과 함께 내려둘 적엔.
"……."
요괴는 형체도 없었다. 가문 사람들은 어째서 아이가 멈췄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너덜너덜해질 것도 없었으니까. 그 위에 올라탄 조그마한 녀석이, 피와 뭉개진 살로 범벅이 된 도끼와 요괴였던 너덜너덜한 핏덩이를 오가는 어른들의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몇 가문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로 불안한 눈치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모습을 보던 녀석의 입과 눈매가 설설 휘었다. 고이 눈을 접어 웃는 모습에 속닥거리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붉게 물든 긴 머리카락은 핏물이 뚝뚝 흐르고, 조그마한 몸에 퍽 어울리던 흰 비단옷은 원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핏덩이와 색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라 잘못 보면 두 존재가 서로 이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팔을 들기도 버거운지, 어깨가 벌벌 떨린다. 그 때문에 이마부터 턱까지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는 주제에, 물 찬 제비처럼 호선을 긋는 눈이란. 그런 아이를 유일하게 마주하는 것은 턱을 쓸며 흥미로운 듯 아회를 보던 무씨 집안의 가주였다.
"옳지, 잘 하였다. 어여쁘기도 하지." "……." "북부에서 사냥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구나."
끌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의 눈이 휘자 주변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곤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교육, 특히 사냥에 관해선 가주의 칭찬은 드문 것이었으니 주위에서 제각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 칭찬은 누구의 것이었더라? 그래, 무려 무 가의 천재라 불리는 첫째 도련님이다. 그런 칭찬을 사생아에게 쓴다는 것은…….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조그마한 핏덩이에게 몰렸다. 정확히는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아이의 밑에 깔린 끔찍한 고깃덩이로, 그 아래의 흥건한 피 물든 눈밭으로.
"요괴란 말이다. 자신이 이 혹독한 설산에서 살아남은 주인인 것이라 믿는단다. 그래서 늘 기고만장하지. 자신의 영역이라며 신명 나게 날뛰며 다른 요괴를 짓밟으며, 상대를 따지지 아니하려 든다만…… 기실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주는 자리에서 일어서 아회를 향해 다가갔다. 조그마한 몸을 덥석 집어 피가 묻든 말든 개의치 않으며 품에 안아 들자, 많은 사람들이 기함했으나 그는 놀랄 만큼 여유로웠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두어 가닥 넘겨줄 적엔 어린 아회의 눈이 온전히 드러났다.
"놈들도 감정이란 것이 있고, 감정을 안다면 이질감이라는 것을 알 지능도 있으니 말이다. 이질감을 심어주면 결국 공포로 이어지는 법. 제아무리 설산을 헤집는 존재라 해도 공포 앞에서는 꼬리를 말고 목을 내어줄 녀석들이니, 보거라."
가주는 그간 제사장을 호위하느라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으로 고깃덩이를 가리켰다.
"전장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북부다. 이질감을 통한 공포를 주는 범주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너는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아주 잘 아는구나, 장하다, 장해."
예쁘기도 하지. 그 목소리가 제 아들을 사랑하기보다는 길들인 짐승 새끼 어여쁘다 하는 어조에 가까웠으나 아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굴려 모인 인파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도 무씨 집안사람이라는 듯, 제 어미 유일하게 닮지 않은, 가주를 빼닮은 눈으로.
"보아라, MA 님께서 내게 좋은 아들을 둘이나 주셨으니 정녕 무 씨 집안이 용서받은 것이 맞단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하지 않더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눈이 가문원에게 선포하는 가주를 향했을 적, 가주는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한 팔에 안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몸을 가볍게 들썩였다. 녀석, 욕심도 많긴.
"네 찾는 사람 여기엔 없다. 찾으려면 학당에 가야 할 터인데. 그래, 지금이라도 돌아오라 전령을 보내주랴?" "……ㅇ, 아뇨, 형님은 바쁘실 텐데…." "이 어여쁜 것. 너도 무 씨 집안사람이로구나. 그래, 잔치라도 열어야겠어."
가주는 아회를 보며 마냥 어여쁘다는 듯 뺨을 간지럽혔고, 자리를 떠나듯 발걸음 돌렸다. 가문 사람들 모두 눈치 보다 제각기 자리 떠나고, 살덩이를 치우기 위해 몰려든 사용인은 피 낭자한 현장에서 일방적으로 흥미 쏟던 가주와 요괴였던 것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려 하며 언젠가 당도할 이질적인 공포를 지우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