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특유의 물내음에는 곧 여름이 다가온다는 듯 여름 습내를 같이 머금고 있고, 풀숲을 헤치는 바람에는 약간의 물기가 묵직하게 실려온다. 어느덧 여름이 다가오려는 모양이구나, 아회 여름이 익숙하지 못해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어째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여름이 제법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이마저도 짧은 감상이겠지, 언젠가 보았던 아지랑이처럼 쉬이 사라질 감상. 아회 고개를 내릴 적, 당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호수만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 호수를 보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면 뒷모습이라 부적을 태우려는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
부적이 타들어가다 멈추었단 점이다. 어째 짐승소리 난 듯싶기도 하고. 사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뒤를 휙 돌아본 아회는 펄럭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때에서야 제대로 반응할 수 있었는지, 긴 손톱 곧게 뻗어난 손으로 당신이 끌어안은 팔 더듬거려 잡았다. 매캐한 남령초 내음, 그리고…… 분내? 웬 분내? 제 알기로 분 바르고 다니던 여인은 아닌데. 의문 들었으나 쉬이 얘기할 수는 없는지, 덤덤히 고저 없는 어조로 물을뿐이다.
"또 류 낭자로군, 오늘도 본인의 위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게요……?"
그리고 오늘도 흐느적, 힘 없이 빠져나가기 위해 바둥거리려 들었다. 제 나이가 이제 곧 약관이 다 되어가는데 어찌 인형처럼 품에 안길 수 있나. 사람 품에 안길 나이는 훨씬 지났는데……. 이 낭자는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오늘도 인간이 다 그렇지 보다는 인간은 원래 이런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이 머리를 무수히 스쳐 지나간다.
칼 끝으로 고동이 전해진다. 바닥이 새빨간 피로 점점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고동이 멎을 때까지, 가현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날 생각이 없었다. 짜릿하고 황홀한 기분. 그 황홀경에 휩싸여, 움직임이 멎고 나서도 팔에 들어간 힘을 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느낌을 제사장이 된다면 꽤 많이 느끼게 되겠지. 그때는 지금 이상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으음~ 이걸로 한 건 해결이야?"
한참 지나고, 칼을 요괴의 목에서 빼낸 가현은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 은은한 미소를 걸친 채 제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학생의 뒤에 숨어있던 남학생을 보며 가현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수줍음만 많은 줄 알았는데, 겁도 많았구나.
"응. 수업의 성과는 확실하게 보여드려야 도사님께서도 만족하실 테니까... 당연히 가져가야지?"
평소 느끼던 것과 다른 부류의 황홀경이 휩쓸고 가니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아. 하지만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지금 이 타이밍을 잡아 찾아본다면, 어쩌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으, 내가 좀 늦는다 싶으면 먼저 가 있어도 좋아~ 간만에 실력 발휘를 좀 했더니 몸에 힘이 빠지네.."
오호라. 저거구나? 저 쪽으로 가서 파 보려던 가현은 일단 현재 상황을 조금 직시하기로 했다. 이 애들을 먼저 보낸다고 해도, 여기에 요괴 사냥을 하러 온 것은 자신들만이 아닐 터. 뭐 하냐고 물어보면 둘러대기 적당한 말이 없었다. 쳇. 아쉬워라. 이걸 위해 여기까지 왔건만.
"..."
그래도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 기회가 오기 전까지, 존엄한 존재가 친히 가려준 이 눈을 좀 더 써 보고 싶지 않느냐고 한다면, 당연히 써보고 싶다는 쪽에 가깝기도 했으니까. 장소를 기억해두었으니 왜곡된 시선을 한껏 즐기고 난 다음 느긋하게 가지러 오면 그만이다. 서두를 필요 없겠지. 그렇다면.
"좋아~ 그 대신, 나도 가져가야 할걸? 아까 힘좀 썼더니 지친단 말이야~"
가현은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며 남학생에게 제 몸을 기대었다. 한바탕 감정을 쏟아냈더니 몸이 지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업어줘. 업어. 업어달라. 그런 뜻이 한껏 담긴 눈빛으로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가현은 방긋 웃고서 남학생에게 업히... 려다가 잠깐 멈췄다. 아니. 잠시만. 근데 아까 이 아이 등에 뭐가 있었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가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이거, 그냥 업혀도 되려나. 말을 또 번복해야 하나. 한참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어떻게 할 지 고민하던 일단 업히기로 마음을 굳혔다.
느닷없이 달려들 때에 무언가 탄 내 맡았다. 제가 든 곰방대에서 나는 것 아니었다. 뭔가 태우고 있었나? 확인은 나중이어도 될 것이다. 지금은 이 담담한 무말랭이 놀려야지.
"에잉. 내 아주 살금살금 왔구만. 놀라는 소리 하나 없으니 재미없으이."
소리는 커녕 어깨 들썩임 한 번 없는 아회 반응에 짐짓 흥 떨어진 듯 중얼거린다. 허나 말만 그러할 뿐 놓아주지 않았다. 항상 그랬지 않은가. 위신이 어쩌구 하든 흐느적 벗어나려 하든 그럴 수록 온화 두 팔은 슬금슬금 힘을 주기만 한다. 그것만 할까. 어깨에 턱 올려 버르장머리 없게 기대선 킥킥 웃어대었다.
"그리 말한들 내 들은 적 없음을 오라비도 알지 않소. 헌데 새삼 성씨를 부르고 그러오? 전번 수업 때만 해도 화 낭자야 하고 다정히 불러주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선 긋고 그러면 내 많이 섭해-"
그렇게 다정하게 부른 적 없지만 능청스럽게 주절대는 것 보라. 히죽 웃는 눈이 저도 그런 적 없음 다 알고 있는 눈치다. 다 알면서 일부러 아회 목덜미에 제 얼굴 치대며 이이잉- 섭한 소리 낸다. 이것 앞에서는 나이고 남녀고 따질 것이 못 되나 보다. 성가실 정도로 치근대다 인형이 아니니 놓아달라 하면 슬금 고개 들고 눈 두어번 깜박인다. 고개 조금 더 드나 싶더니 제법 귓가 가까운 곳에서 중얼대는 말 있었다.
그 류 온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로.
"인형이 아니니 이리 가까이 하는 것이랍니다. 무 오라버니. 소녀, 딱딱한 인형 안는 취미는 없사와요."
천상 망나니가 나긋하게 구니 역으로 소름 쭈뼛하지 않았을까. 그걸 노린 것일지는 모르나 흐히히 웃는 것이 놀리려 했음은 자명해 보인다. 웃는 것만 있을까. 팔 하나 아래로 내리나 싶더니 손으로 아회 허리께 슬금 쥐었다 놓는다. 떨쳐질새라 냉큼 다시 두르곤 재차 턱 걸쳤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