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때는, 그랬다. 아직은 소리 내어 울 줄 알았지. 아프다 무섭다 말로 할 줄 알았다. 울면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언니 와서 저를 달래주었다.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그들의 품에 숨으면 전부 사라졌다. 허나 숨을 수 없는 순간 있음을 알아버렸다. 그 후론 모든 것이 그저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 되어버렸다.
왜 그러냐니. 그러는 너야말로 왜 거기 있는 건데.
엎드린 바닥은 금방이라도 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편해질까. 문득 입학식이 떠올랐다. 창제신의 장난질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겨우 존재가 드러난 도령 있었다. 저도 그렇게 되는 걸까. 여기서 돌아가지 않고 사라지면 그대로 사라질까. 그게 낫지 않을까? 제가 깨끗이 사라지면... 차라리 그러는게...
문득 손이 아파 눈을 떴다. 바닥을 긁다 벗겨진 손톱 몇이 뿌리만 겨우 달려있었다. 통증은 되려 이성을 끌어와 머릿속이 싸해진다. 이대로, 라니. 갈 때 가더라도 발악을 하고 가자 다짐하지 않았나. 겨우 다리에 힘 주어 일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본다. 저 애처로운 뒷모습 한발짝 앞까지 다가간다. 숨 쉬는 것 힘들고 눈 앞 흐리지만 주먹 한 번 꾹 쥐면 버틸 만 해진다. 꿋꿋이 버티고 서서 뒷통수 내려다보며- 굳은 입술 열어 떨리는 목소리 내었다.
"어이하여, 저를... 예로 부르셨습니까."
뒤늦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먼저이지 않았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거니 싶어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숨 좀 진정되면 소매로 얼굴 슥 닦아내고.
적에 붉은 머리 학생이 있었니…… 라고? 반응을 듣자 하니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분명 당신이 나와 낭자를 오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리하여서─ 못 박듯이 혼자 거기 있지 말란 말에 아회 자신의 눈을 덮어 가린다.
"……아닌데."
내가 진짜, 혼자였나……? 진실로 내가. 아냐, 있었는데, 있었다고. ……있던 사람 하나 없어진다고 언젠 신경이나 썼나? 애초에 바깥 인간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지? 고작 면식 한번 있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다. 아회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욱신거리던 눈을 짓누르듯 하다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났다.
"……."
그때처럼 신의 장난이라면 자신이 개입할 수 없다. 기다림이 능사다. 상관을 꺼야만 한다. 신경을 써서는 아니된다. 어차피 관여할 수 없는…….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지만, 그 무엇도 변하는 건 없었다. 시선은 그대로였으나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가현조차도 그 의미를 모를 침묵에 잠깐 머뭇이게 되었다.
"... 왕이시여. 소녀에게 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이런 것은 또 처음이다. 제 입을 오물거리던 가현은 기어코 한 마디 꺼내고야 마는 것이다. 행여 자신의 주접이 존엄한 존재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 많이 슬플지도 모르겠다. 아아.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옵소서. 덧 없는 독백으로나마 제 불안함을 덮으며, 가현은 차마 앞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음..."
소녀. 그렇게 지켜봐주신다면 조금 부끄럽사옵니다. 침묵 속에서 가벼이 신음하며 다시 독백하고, 살짝 시선을 올려 뼛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았다. 감히 당신의 존엄성을 직접 두 눈에 담는 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참. 제 얼굴도 가려야만 하는데.
들어보니 대화 내용은 쓸데없는 것이라 그는 관심을 끄고 쉬는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허나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법. 그는 어디선가 불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떠들고 있는 남학생들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는 그 웃음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아. 내게 실망하셨겠지. 이제 죽을거야. 죽고 말거야. 심기를 거슬렀어. 해선 안 될 일을 하고야 말았잖아.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한다. 두려움일까. 죽기 전에 마주하는 그 광경이, 자신이 곁에서 모시지 못해 안달난 존재의 눈이라는 것이 그저 기쁠 뿐일까. 일단 제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
가현은, 그대로 머리를 꾹 조아렸다. 땅에 제 이마가 쓸려 생채기가 나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힘껏 고개를 조아려 제 모독스러운 짓에 대해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그때의 백일몽처럼 이 환상이 끝났다는 오판을 저지른 것이 원인이겠지. 이래선 안 되는데. 완벽해야만 하는데. 하지만. 잠깐이나마 마주한 눈은 영원토록 제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해서는 안될 일. 배덕감이 가져오는 그 짜릿하면서도 달콤한 기억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소녀. 어찌 당신의 명에 거역할 수 있겠사옵니까."
"저의 잘못을. 사하여 주실 것은 바라지 않으나... 당신의 명이라면 그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이옵니다."
부디. 원하시는 만큼 기꺼이 어울려 드릴테니. 그 것을 찾는 과정에서, 제 몸뚱아리 부수어지고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원하시는 대로 찾도록 해 드릴테니. 부디 소녀를 쳐내지만 말아주시옵소서. 제가 바라는 일일 뿐이옵니다. 제가 원한 미래일 뿐이옵니다. 그 미래가 부수어진다면, 저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가현은 그저 부탁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예. 기꺼이 하겠사옵니다."
당신의 말은 무조건 옳고, 자신은 그저 그 존엄성 앞에서 무한한 공감만을 표할 것이니. 천천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다. 가릴테니까 찾아 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