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은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남학생을 따라 들어갔다. 이야. 이렇게 또 타인의 기숙사 방에 초청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절로 의식하게 되는 달달한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음. 방에다가 향수라도 뿌리는 걸까? 창문을 열어 놨으니 그건 아닌것 같다. 뭘 엎질렀나 하던 찰나 가현은 기어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프흐흐... 너 엄청 귀여운 건 알고 있니? 배가 많이 고팠었구나~?"
맙소사. 이 무해함은 도대체 뭘까. 지금 모습만 보자면 도무지 남학생이 그 유명한 송씨 가문원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과 동갑내기라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낯을 엄청나게 가려서 자신을 먼저 불렀으면서 눈을 질끈 감고 있지를 않나. 그냥 좀 구워먹을 수 있는거 그렇게까지 얼굴을 붉혀가며 한껏 부끄럽다는 티를 내지를 않나.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고 포용해줄 수 있는 범위였지만 알면 알수록 조금 더 놀려주고. 괴롭히고. 삐지게 해 보고 싶을 만큼 귀엽게 보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눠준다면 나야 고맙지~ 입이 심심할때 먹을 간식거리는 언제나 환영이야~"
가현은 남학생이 가리키는 대로 얌전히 소파로 나아갔다. 처음 말한대로 사감님을 찾던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대화를 나눠보는것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어차피 사감님들이 이 남학생을 피한다면 결국 자신과 같이 찾으러 간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건 없을 것이었다.
이윽고 가현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폐하가 누굴 지칭하는 말인지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몸을 내어준다는 이야기도 무슨 말인지 감이 잡혔다. 그러면 이 남학생은 그릇으로써 아주 적합한 인물일 터. 신의 그릇. 절대적인 존재의 그릇이기 때문에, 사감님들마저 겁을 집어먹고 피하는 것이겠지. 가현의 눈이 호기심을 담기 시작한다. 하지만, 순수한 호기심만 담은 건 아니었다. 마지막에 간택받는 것은 오직 자신이어야만 하는데. 어째서. 이 남학생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역시 제사장들의 수장 가문은 타고난 혈통 자체가 다른걸까? 절대적인 존재가 이끌릴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이 남학생에게 있는 걸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아내야만 한다. 알아내서. 자신이 닮을 수 있는 부분만큼은 최대한 닮아가고 앞지를 수 있는 부분들은 따라잡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격차를 벌려주겠다. 그런 어두운 생각들을 품은 채 가현은 미소지었다.
"그렇구나. 이래저래 난감하겠는걸. 사감님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더라도 바로바로 못 풀고. 힘들었겠다~"
일단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친해지고 가까워져서 자신에게 필요한 걸 알아낸다는 목적 이전에 흑룡으로써 이 가여운 남학생의 고민거리를 이대로 그냥 넘어가고 모른 척 한다면 가현이 아니다. 가현은 남학생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심한 듯 머리를 몇번 쓸어주었다. 아까 전부터 쓰다듬어보고 싶기는 했기 때문에 사소한 사심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도와줄 생각이었으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되겠다 하는 건 머릿속에 대강 그려져있던 상태였지만, 일단 사심 채우는 것에 열중하기로 한 가현은 일부러 앓는소리를 내며 한참 남학생을 쓰다듬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
"으으으음- 어쩌나-.... 아. 좋아. 그러면 내가 너 대신 사감님들께 네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물어보고, 알아낸 다음 들려줄게~ 어때?"
사감님들께서 나를 피해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가현은 그렇게 덧붙이며 남학생의 머리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거둔다.
이렇게 난감할 수가. 센스가 좋다는 건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지만. 낙법 취하려다 도사의 행동에 잠시 멈칫한다. 흙먼지의 매캐함이 자욱하고, 아회 비틀거리며 일어설 적, 휴식과 대련 재개에 한숨 돌리듯 고개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배려에 대한 짧은 감사를 뒤로 몸을 풀었으니, 슬슬 막아볼 준비도 해야겠지. 아회 흙먼지를 털어내듯 손 들어 툭툭 몸 가볍게 치듯 털려다 2차 습격에 무방비하게 당해버리고 만다.
"히잉이……. 낭자, 놓아주시오……."
드디어 반응했다. 움찔 떠는 것이 놀란 것이 틀림없다지만 히잉이, 큰 소리도 아니고 바람 빠지듯 기운 일절 없는 소리다. ……앙탈도 아니고 이 무말랭이 어찌하면 좋을까. 힘 다 쏟았다는 양 축 늘어진 채로 주변 소리에 몸 맡기기로 했다. ……그래, 기실... 지쳤으니까...
덥석 붙으니 아회 놀라며 내는 소리 있었다. 역시 이렇게 놀란 반응 나와야 재미지지. 놓아달란 말에도 딴청을 피우며 주변이나 보려 했다. 가까이에 수일이 있다면 불러서 머리나 다시 묶어달라 하려고 했는데.
"어......?"
없다. 아무도 없다.
갑자기 전부 사라진 이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 어디 갔지? 사실 졸았나? 졸아서 저만 두고 모두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거야? 그런 거야? 오라비. 도령. 정말 아무도 없-
주변 살피다 숨이 턱 막혔다. 아무도 없지는 않았으나 저것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작달막한 키, 단정히 빗어내려진 갈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 어릴 적 자주 입던 옷.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자신.
어디선가 다닥다닥 울리는 소리 있다. 제 이빨 부딪히는 소리다. 떨림을 막으려 이를 악물었다가 입술이 깨물렸다. 하지만 아픔도 몰랐다. 단지 이를 악물었다가 바닥 가라앉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무릎이 꺾였다. 덜컥 몸 내려지고서야 깨달았다. 제 숨이 거의 단말마처럼 헐떡이고 있음을.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이 바닥에 삼켜지리라. 그러나 몸은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시야 흔들림이 눈이 떨려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더듬더듬 손으로 바닥을 긁어 이미 꺼진 곳에서 벗어나려 한다. 긁는 소리 사이 뜯기는 소리 있었다. 어떻게 해도 가라앉는 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저 눈을 감고 부복하려 한다.
원래 이쯤 되면 호탕하게 웃으며 무 오라비, 그리 소리 낼 줄도 아셨소? 누가 들으면 토끼인 알겠소!라고 재잘재잘, 얄미운 어조로 떠들 터인데. 아회 작게 "낭자?" 되물어 보려다 더듬더듬 손 내려 제 허리 끌어안았을 팔 있을 부분 더듬다 굳어버린다.
없다.
일순 등골이 오싹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내 분명 낭자를 피해 도망쳐 혼자 이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어째서 낭자를……. 심장이 뛴다. 아회 고개를 든다. 따사로운 햇살이 뺨을 간지럽히고, 도사의 목소리는 경쾌롭게 울린다. 평화로움이 지천에 깔렸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찔함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웃음에 멀미가 인다. 누군가의 행복함에 속이 뒤집힌다…… 여름은 아직 오지도 않았건만 어찌하여 나는 일찍이도 여름병 앓는가.
아회 천천히 허리 더듬던 손 들어 입가 더듬는다. 내 환각 보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아니야,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였는데, 어째서……. 아회 코 끝을 위로 하게끔, 고개를 위로 올린다. 잔향. 그 아스라한 담배 내음이 내 코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 냄새를.
"쫓지 못할 리가 없는데."
진실로 내가, 기어이 미쳤단 말인가. 기어이……? 너무 늦게 미친 것 아닌가. 아니지, 그걸 이제야 깨달았나, 아니, 아니지. 아닌가? 손가락이 지팡이 손잡이 두들긴다. 이후 혀 기묘하게 차는 소리를 두 번. 지팡이 짚으며 우아한 걸음으로 도사 있을 곳으로 향하더니만, 깊이 고개 숙이며 인사하고는 묻는다.
찻잔에 금이 가고, 예리한 모서리는 가현의 고운 손에 생채기를 내었다. 제 손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만,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니?
"아아.. 항상. 소녀, 채 준비도 하기 전에 찾아와주시다니..."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리우면서도 한 없이 매서운 중압감이 제 목을 찍어누르는 듯 했다. 보고 싶었으나 봐서는 안 될 것. 황홀하지만 그 황홀경 너머 본질이 알려오는 순수한 불쾌함. 그 모든 것들의 뒤틀린 합주에 가현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항상 그랬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있었다.
"감히 이 장소에서- 당신을 알현하옵니다. 왕이시여."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눈 앞의 백골이 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묘한 기쁨에 휩쓸린 가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저 웃음을 이렇게나마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쉬워. 하지만 자신은 절대 왕과 동등해질 수 없는 존재. 동등해져선 안 되는 존재일 뿐이다.
"...... 다시 이렇게 뵐 수 있게 될 줄이야.. 꿈만 같아서... 그저. 그 무한한 존엄성에 비하면 한 없이 보잘것 없는 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