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석 붙으니 아회 놀라며 내는 소리 있었다. 역시 이렇게 놀란 반응 나와야 재미지지. 놓아달란 말에도 딴청을 피우며 주변이나 보려 했다. 가까이에 수일이 있다면 불러서 머리나 다시 묶어달라 하려고 했는데.
"어......?"
없다. 아무도 없다.
갑자기 전부 사라진 이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 어디 갔지? 사실 졸았나? 졸아서 저만 두고 모두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거야? 그런 거야? 오라비. 도령. 정말 아무도 없-
주변 살피다 숨이 턱 막혔다. 아무도 없지는 않았으나 저것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작달막한 키, 단정히 빗어내려진 갈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 어릴 적 자주 입던 옷.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자신.
어디선가 다닥다닥 울리는 소리 있다. 제 이빨 부딪히는 소리다. 떨림을 막으려 이를 악물었다가 입술이 깨물렸다. 하지만 아픔도 몰랐다. 단지 이를 악물었다가 바닥 가라앉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무릎이 꺾였다. 덜컥 몸 내려지고서야 깨달았다. 제 숨이 거의 단말마처럼 헐떡이고 있음을.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이 바닥에 삼켜지리라. 그러나 몸은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시야 흔들림이 눈이 떨려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더듬더듬 손으로 바닥을 긁어 이미 꺼진 곳에서 벗어나려 한다. 긁는 소리 사이 뜯기는 소리 있었다. 어떻게 해도 가라앉는 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저 눈을 감고 부복하려 한다.
원래 이쯤 되면 호탕하게 웃으며 무 오라비, 그리 소리 낼 줄도 아셨소? 누가 들으면 토끼인 알겠소!라고 재잘재잘, 얄미운 어조로 떠들 터인데. 아회 작게 "낭자?" 되물어 보려다 더듬더듬 손 내려 제 허리 끌어안았을 팔 있을 부분 더듬다 굳어버린다.
없다.
일순 등골이 오싹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아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내 분명 낭자를 피해 도망쳐 혼자 이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어째서 낭자를……. 심장이 뛴다. 아회 고개를 든다. 따사로운 햇살이 뺨을 간지럽히고, 도사의 목소리는 경쾌롭게 울린다. 평화로움이 지천에 깔렸으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찔함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웃음에 멀미가 인다. 누군가의 행복함에 속이 뒤집힌다…… 여름은 아직 오지도 않았건만 어찌하여 나는 일찍이도 여름병 앓는가.
아회 천천히 허리 더듬던 손 들어 입가 더듬는다. 내 환각 보는 것이 분명하다. 아니다. 아니야,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였는데, 어째서……. 아회 코 끝을 위로 하게끔, 고개를 위로 올린다. 잔향. 그 아스라한 담배 내음이 내 코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 냄새를.
"쫓지 못할 리가 없는데."
진실로 내가, 기어이 미쳤단 말인가. 기어이……? 너무 늦게 미친 것 아닌가. 아니지, 그걸 이제야 깨달았나, 아니, 아니지. 아닌가? 손가락이 지팡이 손잡이 두들긴다. 이후 혀 기묘하게 차는 소리를 두 번. 지팡이 짚으며 우아한 걸음으로 도사 있을 곳으로 향하더니만, 깊이 고개 숙이며 인사하고는 묻는다.
찻잔에 금이 가고, 예리한 모서리는 가현의 고운 손에 생채기를 내었다. 제 손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만,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니?
"아아.. 항상. 소녀, 채 준비도 하기 전에 찾아와주시다니..."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리우면서도 한 없이 매서운 중압감이 제 목을 찍어누르는 듯 했다. 보고 싶었으나 봐서는 안 될 것. 황홀하지만 그 황홀경 너머 본질이 알려오는 순수한 불쾌함. 그 모든 것들의 뒤틀린 합주에 가현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항상 그랬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있었다.
"감히 이 장소에서- 당신을 알현하옵니다. 왕이시여."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눈 앞의 백골이 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묘한 기쁨에 휩쓸린 가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아. 저 웃음을 이렇게나마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쉬워. 하지만 자신은 절대 왕과 동등해질 수 없는 존재. 동등해져선 안 되는 존재일 뿐이다.
"...... 다시 이렇게 뵐 수 있게 될 줄이야.. 꿈만 같아서... 그저. 그 무한한 존엄성에 비하면 한 없이 보잘것 없는 몸이지만..."
저 때는, 그랬다. 아직은 소리 내어 울 줄 알았지. 아프다 무섭다 말로 할 줄 알았다. 울면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언니 와서 저를 달래주었다.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그들의 품에 숨으면 전부 사라졌다. 허나 숨을 수 없는 순간 있음을 알아버렸다. 그 후론 모든 것이 그저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 되어버렸다.
왜 그러냐니. 그러는 너야말로 왜 거기 있는 건데.
엎드린 바닥은 금방이라도 저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편해질까. 문득 입학식이 떠올랐다. 창제신의 장난질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겨우 존재가 드러난 도령 있었다. 저도 그렇게 되는 걸까. 여기서 돌아가지 않고 사라지면 그대로 사라질까. 그게 낫지 않을까? 제가 깨끗이 사라지면... 차라리 그러는게...
문득 손이 아파 눈을 떴다. 바닥을 긁다 벗겨진 손톱 몇이 뿌리만 겨우 달려있었다. 통증은 되려 이성을 끌어와 머릿속이 싸해진다. 이대로, 라니. 갈 때 가더라도 발악을 하고 가자 다짐하지 않았나. 겨우 다리에 힘 주어 일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본다. 저 애처로운 뒷모습 한발짝 앞까지 다가간다. 숨 쉬는 것 힘들고 눈 앞 흐리지만 주먹 한 번 꾹 쥐면 버틸 만 해진다. 꿋꿋이 버티고 서서 뒷통수 내려다보며- 굳은 입술 열어 떨리는 목소리 내었다.
"어이하여, 저를... 예로 부르셨습니까."
뒤늦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먼저이지 않았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거니 싶어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숨 좀 진정되면 소매로 얼굴 슥 닦아내고.
적에 붉은 머리 학생이 있었니…… 라고? 반응을 듣자 하니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분명 당신이 나와 낭자를 오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리하여서─ 못 박듯이 혼자 거기 있지 말란 말에 아회 자신의 눈을 덮어 가린다.
"……아닌데."
내가 진짜, 혼자였나……? 진실로 내가. 아냐, 있었는데, 있었다고. ……있던 사람 하나 없어진다고 언젠 신경이나 썼나? 애초에 바깥 인간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지? 고작 면식 한번 있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다. 아회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욱신거리던 눈을 짓누르듯 하다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났다.
"……."
그때처럼 신의 장난이라면 자신이 개입할 수 없다. 기다림이 능사다. 상관을 꺼야만 한다. 신경을 써서는 아니된다. 어차피 관여할 수 없는…….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지만, 그 무엇도 변하는 건 없었다. 시선은 그대로였으나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가현조차도 그 의미를 모를 침묵에 잠깐 머뭇이게 되었다.
"... 왕이시여. 소녀에게 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이런 것은 또 처음이다. 제 입을 오물거리던 가현은 기어코 한 마디 꺼내고야 마는 것이다. 행여 자신의 주접이 존엄한 존재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했을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 많이 슬플지도 모르겠다. 아아.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옵소서. 덧 없는 독백으로나마 제 불안함을 덮으며, 가현은 차마 앞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음..."
소녀. 그렇게 지켜봐주신다면 조금 부끄럽사옵니다. 침묵 속에서 가벼이 신음하며 다시 독백하고, 살짝 시선을 올려 뼛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았다. 감히 당신의 존엄성을 직접 두 눈에 담는 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참. 제 얼굴도 가려야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