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향상심에 불타오르는 가현은 교수님의 대답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려는 듯 경청하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덧없는 피조물이 만들어 낸 감정임에도 그 깊이며 뜻이며 무궁무진하니, 흥미를 안 가질래야 안 가질수가 없었다. 가현 자신도 결국에는 그 덧없는 피조물 중 하나였기도 하고.
"아아, 역시 사랑이라는 건 달고도 부드러워.."
요점은, 가현이 그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한 뜻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현의 방식은 정상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많이 고장나 있었다.
"버티지 못하는것도 하나의 사랑 아닐까요. 목을 옭죄여 오는 고통.. 선명하게 뿌려지는 빨간 잎.. 정말이지..."
사랑 아닐까요- 이후의 이야기는 자신에게도 안 들릴만큼 웅얼거리는 부류의 것이었지만. 자. 이제 제웅을 만들어보자.
방금은 놀라 움찔대더니 이젠 또 굳었다. 밀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면서 당황은 하나. 온화는 흘깃 시선을 주고 입꼬리를 휘어올렸다. 당황한 이를 달래는 말 대신 능청스럽게 토닥이는 손길만 있었다.
듣자하니 유유는 뜀박질을 잘 한단다. 아, 방금 그림도 그랬지. 그럼 무조건 선방은 다리다. 무릎 되는 관절부터 노래면 될런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제 두루마기 한 번 슥 들여다본다. 붉은 선추 달린 붉은 부채는 허리춤에 있었으니. 꺼내어 한 손에 들고 섰다. 그제야 제 품에 끌어들인 이에게 한 마디 툭 했다.
가현은 마냥 요상하다는 듯 영문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도 백일몽의 편린일까. 자신이 그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만큼 아둔하고 상황파악이 느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잘못된 부분이 하나 정도는 있겠지.
... 생각을 비우고 다시 채워넣는다. 머릿속을 자욱하게 채운 안개를 걷어내고, 자신의 이미지성을 뚜렷이 각인시킨다. 가끔 이렇게 엉뚱한 면이 있는것도 자신의 모습 일부분이니 이런 상황에서는 되려 얼타는 게 이상하겠지. 묘한 자아성찰을 마치고 나서야 가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건 원래 남이 말하기 전에 먼저 보답하는게 예의라고 배웠어. 내가 지켜본 가족들은 늘 그랬으니까~"
실제로 임씨 가문원들은 남들에게는 꽤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편이었다. 물건에 돈을 더 얹어주거나,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들어주거나. 간혹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만한 일이라면 두팔 걷고 가장 먼저 도와주기 위해 뛰어들기도 했고.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먼저 보고 익혔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거잖아? 나는 빚지고는 못 살아. 여기 말고도 저쪽 가게도 과자 종류가 꽤 많아. 양으로 따지면 그 가게인데, 질으로 따지면 여기가 좀 더 좋은 편~"
제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갚는 방법이 조금 미숙한 편이기도 하기에 더더욱 난데없이 그렇게 국수를 비우고 튀어나왔을 수도 있겠다. 인간미라는 것을 겉치레로 배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가끔 하고는 했다. 하여튼 가현은 저도 여기서 먹을걸 좀 사려는 양 또 이것저것 한가득 사기 시작한다. 기숙사 돌아가서 차 한잔에 곁들여 먹기에는 딱 좋은 것들과 지금 돌아다니면서 당장 먹을 과자들을 집던 가현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었다.
"... 그런 거야? 여기는 보는 눈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왕이면 좀 조용한 장소가 낫지 않겠니. 이번에도 가현은 저항 없이 안겨왔다. 만약 지금 이 손길이 절대적인 존재의 손길이었다면 가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여학생의 의도를 해석하는 가현의 머릿속은 조금 이상한 곳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지금껏 자신이 이해한 개념으로는 그렇고 그런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모든 말은 여러 갈래의 해석이 존재하는 법.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가현 자신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 그것 아니던가.
언젠가는 신과 가까워지는 것. 그릇으로 쓰겠다 하면 그 존엄함을 온전히 전부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작고 모자란 그릇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며, 모든 것이 질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 제물로 바쳐지라 하실 적이면 제 심장 깊숙이 차갑고 예리한 날붙이를 꽂아넣을수 있었다. 자꾸 자신을 원한다고 이 여학생이 이야기하는 것은 저를 그런 용도로 이용하겠다는 것일까. 이 여학생은 MA와 동등해지는 것을 꿈꾸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근데 그걸 그 분께서 마냥 지켜보고만 계실지는 모르겠어. 내가 몸을 바칠 상대는.. 오직 그 분 뿐이니까."
또 다시 해석을 개떡같이 하는 것은 가현의 4차원적 성격이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꽤나 단호한 투로, 여학생의 말과는 다른 뜻을 담은채로 뒷말이 이어졌다만 아직 가현은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방금 막 산 과자를 입에 또 한가득 우겨넣기도 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자, 가현은 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