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것들이 너무 많은 곳이다. 니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을 파악하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 분위기 엄청 잡던 두 명은 친절하다는 말과 자기도 거기 졸업생이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섰다. 옷 값은 제대로 두고 가겠다는 말에 니오는 말이라도 해줘야하나 싶어 음음,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세뇌… 세뇌…. 고장난 듯 고개를 숙인 채 머릿속으로 한 단어만을 되뇌이던 눈이 제 빛을 찾고 그녀가 움직이는 양 따라갔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그녀의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욕이 돋지는 않았으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면 그녀가 무안할 거 같아 가장 가까운 매대에 있는 빵 하나를 아무거나 집어 품에 안았다.
조용히 목례를 하고 그렇게 나가려다가 멈칫, 뒤를 돌아서서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말은 마치 그분에게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려요…. 정체가 무엇이냐 물으면, 무어라 답해주시렵니까?"
평소답지 않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못 하고 있었다. 기억해주고. 있어? 기억했어. 봐. 날 기억해. 나도 기억해. 너도 기억해. 그저 당신이 기뻐하는것이 기뻐. 날 기억하고 있는게 미치도록 좋아서 기뻐. 당신이 기쁘다면 나도 기뻤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는 일은 없어. 당신이 당신의 친구들을 전부 죽이고 미쳐버리고 나서도. 그저 한결같이. 내 흥미를 좀 더. 좀 더 이끌어줘. 이렇게 곁에서 계속. 나랑 같이 그 분을 제외하면 그저 엉망진창일 뿐인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함께 춤추지 않을래.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구? 아는 사이? 아니라면..
속에서 감도는 그 모든 감정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둘은 자리를 떠났다. 잠깐동안 가현의 시선이 남성 쪽으로 옮겨갔던 것 같기도. 그 눈빛이 한 없이 싸늘했을 것 같기도 했다. 둘이 나가자, 자신도 둘을 따라 문 앞까지 나선다. 돈은 두 아이들이 전해주겠지. 충동적인 감정이었으며 그 감정을 제어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게 나니까.
"....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자? 그 때는- 내가 언니를 어떻게든 잡아둘거니까."
여자 쪽을 향하여 이야기하며, 가현은 그저 웃었다. 지금은 맛보기였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일거야. 그때가 된다면 이 메마르고 덧없는 삶에서 내게 재미를 한껏 안겨주지 않을래?
떠나는 날은 밤이었다. 이전부터 챙길 것들 챙기고 준비도 서둘렀건만 하나씩 빼먹는 것이 빠지질 않아서 낮 시간 내내 짐을 다시 챙기고 준비만 잔뜩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 시간 동안 누구를 만나서 특별히 인사를 나눈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좋았던 기억이 그리 많지도 않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를 잔뜩 들었으니까.
떠나는 시간이 세 시간 남았을 때 그래도 지금까지 평생 살던 곳이니까 한 시간 정도는 주변을 산책하며 보냈다. 두 시간이 남았을 때는 둘째 언니를 찾아갔다. '우리 막내 왔니.' 하는 말을 들으면 광견병 걸린 여우같던 니오도 금세 풀어진 얼굴에 발그랗게 홍조를 띄곤 '응, 언니야.' 하고 말하며 그 품에 폭 안기는 것을 꽤나 좋아했다. 몇 번 옛날 이야기를 꺼내고 몇 번 앞으로 있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둘째 언니는 항상 니오에게 좋은 말만을 해주었다. 주변의 누가 뭐라고 하던 니오는 언니의 자랑스러운 막내라는 이야기라던가, 모두가 한다고 너도 꼭 이걸 잘해야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던가,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기에 즐거운 것이 아니겠니 같은 이야기들.
" 언니야, 다들 니오가 괴물이라고 했잖아. 니오는 괴물이야? " " 우리 막내야. 남들 하는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는 한 귀로 흘릴 줄도 알아야 한단다. " " 하지만 오라버니도, 언니들도 다 니오를 괴물이라고해.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는 니오때문에 힘들대. 가주님은 니오때문에- " " 그만그만. 누가 뭐래도 막내는 우리 막내란다. 원래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을 보면 무서워해. 그것이 좋은것인지 나쁜것인지도 모르고 일단 두려워하고 말아. 다들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일 뿐이야. 아직 사람들이 우리 막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우리 막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몰라서 그러는거야. " " 응. 언니야, 좋아. " " 언니도 우리 막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단다. 막내야. 이거 받아. 먼 길 떠나는 막내한테 주는 선물이야. 힘든 일이 있으면 이 목걸이를 봐줘. 언니 대신에 이 목걸이를 차고 있는거야. 항상 같이 있을게 막내야. " " 응. 고마워 언니야. 사랑해. "
30분이 남았을 때 니오는 갈 채비를 마치고 대문으로 향했다. 밤이 꽤 깊어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추고있었다. 벚꽃이 드리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3월에서 4월경이었나보다. 니오는 가방을 메고 고개를 들어 달을 한 번 보고 벚꽃을 한 번 보았다. 뒤를 돌지 않고 앞으로 가야할 길 만을 보았다. 그래도 막내딸 가는 길이라고 부모님과 제 형제자매들이 갈 길을 배웅한답시고 나온 꼴이 퍽 우스웠다. 뒤에서는 괴물이라고 수근댔으면서. 폭탄 취급했으면서. 어쩌다 이런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으면서.
" 잘 다녀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
머리를 반묶음으로 묶은, 키가 꽤 큰 흰 머리의 남자는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했다.
" 엿이나 쳐드쇼. "
니오는 뒤를 돌아 첫 째 오빠에게 무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 야! 너 오라버니한테 말하는 꼴이..! "
넷째 언니였다. 흰 머리가 길게 길러져 예쁘게 정돈된 것이 자랑이었고 누가 봐도 청순하다는 느낌을 잔뜩 주는 넷째 언니가 니오의 어깨를 잡았다. 니오는 그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가족에게도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마냥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치워, 뒤지기 싫으면. 언니고 지랄이고 죽여버리기전에 함부로 손 대지마. "
그 말에 한 차례 쭈그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쿠즈노하라고 한다면 폭력이나 파괴와는 거리가 굉장히 먼 신선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어려워하고 불같이 화를내면 싸움을 싫어하는 탓에 먼저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 그래. 니오. 잘 가렴. 아버지는 네가.. " " 자랑스럽다는 말은 하지마세요. 거짓말은 싫어하니까. 근데 진짜 궁금하네. 아버지가 진짜 날 자랑스러워 하실지. 가주님도 날 자랑스러워 할까요? "
어린아이라고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한 마디를 하곤 다시 뒤를 돌아 가려던 차에 특히나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던 셋 째 오빠가 다가와서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곤 한 마디를 보탰다.
" 쿠즈노하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 니오. 누가뭐라도 넌 쿠즈노하 니오야. 언제든 이 곳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 " 지랄하네. 알 게 뭐냐, 어차피 난 버려졌는데. 아까 언니한테 한 말 못들었어? 뒤지기 싫으면 손 치우쇼,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너부터 물어죽이려니까 "
또 다시 눈을 무섭게 뜨고 으르렁댄 니오는 '진짜 간다'는 말과 함께 뒤를 돌지 않고 걸어가려 했다. 그리고 또 타박타박 하고 조금 빠르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욕지거리를 할려고 뒤를 돌았던 찰나에 따스하게 안아주는 둘째 언니의 눈을 보았다. 그제서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은 사람이 좋았고 사실은 더 잘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버려졌는데.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막내야, 우리 귀여운 막내야.' 하고 말해주는 목소리와 앞길을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목소리 그리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에 니오는 이미 흘러버린 눈물을 억지로 막으려는듯 자신을 안아주는 둘째 언니의 어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간을 있다가 '이제 정말 갈게 언니야.' 하고 말하곤 몸을 일으켜 다시 걸어갔다. 그 자리가 그리워서 두 번, 세 번은 더 뒤를 돌았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난 성선설이나 성악설 따위는 믿지 않아.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 " 문자 그대로야. 성선설이나 성악설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세상에 날 때부터 선하거나 악한 사람이 어디있겠니.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 " " 음. 근데 그게 지금 갑자기 왜..? " " 그런데 폭력의 재능과 함께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믿지. 쟤를 봐라. 쟤가 그 증거다. "
첫째 오빠와 넷째 언니의 대화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둘 만의 대화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후일담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