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찾아오는 고요를 누린다. 눈앞의 산해진미보다 이 잠깐의 잠을 더 음미하고 싶은 것이었으니. 그렇게 부드럽게 잠에 빠져들었을까. 잠깐 눈이 뜨이면 연은 갑자기 변해버린 풍경을 마주한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파도치는 풀들, 초록의 땅 위로 자기 머리보다 큰 호박들이 자라고 있다. 분명 꿈일 거라 되뇌지만 어딘가 모호하다. 그에 연은 짜증을 느끼다가, 아무도 주변에 없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허나 또 그 두려움도 금방 사라져버리니. 꿈에서 자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하며 눈을 감는다.
니오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멱살을 잡았다. 이대로 몇 대 때려주면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주먹을 꽉 쥐고 얼굴에 주먹을 꽂을까 하다가 혹시 이빨이 빠지면 곤란할테니 테이블에 깔려있던 손수건을 집어 돌돌 말아 이빨에 물려준뒤 주먹을 꽂으려는 찰나에 폭파주문을 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러다 다 뒤지... 아니, 죽으면요? 신의 장난이니 뭐니해도 진짜 죽어버리면 어떡해요. 살인자가 되긴 싫은데. "
니오는 잡았던 멱살을 툭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리곤 아~ 모르겠다~ 하고 말하며 지팡이를 다시 집어들었다.
" 뭐가 어찌되던 다 교수님 책임입니다. 난 몰라요. 봄바르다! "
아무래도 사람에게 대놓고 쏠 순 없겠는지 한 쪽 손으로는 한쪽 귀를 꾹 눌러 막고 벽에 대고 주문을 날렸다.
갑자기 나타난 호박밭도 이상하지만. 거기서 대뜸 등을 보이고 서서 숫자를 세는 아이도 적잖게 의심스럽다. 게다가 더하는 수도 아니고 빼는 수라니. 이건 뭐 숨바꼭질도 아니고-
응?
숨바꼭질. 그 생각을 딱 떠올린 온화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헌데 허허벌판 호박밭에 숨을 곳이 있을까. 아쉬운대로 호박 몇 개 늘어놓고 쌓아서 낮은 담마냥 만들어 그 뒤에 드러누웠다. 딱 봐도 나 여기 숨었소 하는 꼴이지만 어쩌겠나. 모로 누워 팔로 머리를 받친 온화는 아이가 숫자 세는 소리가 아직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청력에 온 집중을 가했다. 뱀 특유의 고고한 움직임은 들리지 않는다. 질량 가진 물체가 넝쿨은 커녕 흙에도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서늘한 바람 소리 뿐. 신은 저에게 모습을 비칠 의향이 없다는 것으로 판단되면 눈을 조심히 뜬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감겨져 있어 나른한 눈을 비비적 거리더니, 그 곳으로 발걸음을 조용히 옮겨본다. 자신이 세상에서 동떨어져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신의 뜻이니, 여기에 떨어진 이유를 찾아야만 온전히 그를 알현하는 것이다. 저 울음소리의 근원에 다가가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중생은 그리 생각하고 있다. 부디 자신의 운명이 옳은 곳으로 향하길. 다만 옳지 못하더라도 그것 또한 뜻이 있으렸다.
니오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차라리 이런 쪽이 적성에 맞다. 적룡에 들어온 것도, 이 지랄맞은 성격에도, 날 때 부터 이단아처럼 괴물 소리를 들으며 자란 것은 이런 주술이나 마법이 손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 난 이후에는 그 위력에 감탄하며 '죽이는데...!' 하고 눈을 빛냈다. 위력이 감쇄되지 않은 것은 이 지팡이 덕이렷다. 눈치봐서 받아갈 수 있으면 받아갈 생각 한 가득이었다.
" 고치는데는 재능 없는데요- "
곡옥의 쿠즈노하라면 무너진 것을 바로세우고 부서진 것을 고치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주로 연마하는 가문이었으나 이단아로 태어난 괴물같은 막내딸은 그런 것엔 재능이 없었다. 전혀. 그렇지만, 해보라고 하니까 해보자면.
천천히 숫자가 0까지 거슬러 내려갑니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 찾는다!! '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 어디 숨었니! '
당신의 바로 지척에서 아이의 발소리가 들립니다.
[>숨을 내쉰다] [>숨을 참는다] [>신을 죽여]
>>68
당신이 점점 다가갈수록 비릿한 냄새가 짙어집니다. 검붉은 광경이 두 눈에 담기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그것'이.
안개와도 같은, 뱀과도 같은 그것이 히죽 웃으며 시체를 발로 툭 차며 놀다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너, 여기 인간이 아니구나?
그것이 소름끼치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습니다. 공기가 따갑게 느껴집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신을 죽여] [>신을 죽여] [>신을 죽여]
>>69
용을 닮은 네 발 달린 짐승이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목 놓아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 용은 점점 모습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것이 인간의 시체를 갖고 놀며 재미있다는 것처럼 깔깔깔 웃고 있습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점점 강해집니다. 당장에라도 당신을 태울 것만 같습니다. 열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수많은 운석이 떨어지고 땅이 불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흰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성 같은 남성이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습니다.
유언은?
감히 두 눈으로 그것의 얼굴을 담지 마라. 그것의 그릇 또한 그것이니.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태고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조아린다] [>유언을 말한다] [>신을 죽여]
>>72
그것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가 이내 환히 웃었습니다. 총명한 선택입니다. 그것의 기분이 매우 좋아보입니다.
무구한 아이의 모습이 웃기 시작하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솜털이 삐쭉 섰다. 입매를 가린 오른팔에 힘이 빠진 듯 느리게 내려갔다. 일순 멍한 얼굴. 어? 하는 찰나. 묵은 즉시 뒤돌아 뜀박질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본능만이 남아 뛰었다. 뛰다보면 멈췄던 생각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죽을 거 같았다. 허나 제 죽음은 이렇게 이루어져서는 안되었다. 그 날 이후 결심한, 단 하나의 삶의 목적을 이렇게 무너지데 둘 순 없다. 소맷자락 안에 넣어둔 부채는 이미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불에 타? 지금 '회차'?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이 그것을 알현했다는 것에 대하여 예를 표하고 있던 가현은 잡아끄는 손길에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이끌렸다. 그런 와중에도 제 모습을 가려야겠다 싶었는지 얼굴 위에 얹은 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퍽 재미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아... 어찌하여 소녀를. 그저 덧없는 미물일 뿐인데.."
가린 얼굴 너머의 가현은, 미소짓고 있는가? 그저 이 순간이 꿈만 같았으나, 꿈결이 아니라는 것이 자신을 더없이 황홀하게끔 만드는 듯 하였다. 어찌 죄스러운 자신을 한껏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모자라, 유흥에 함께할 기회를 쥐어주신단 말입니까. 역시 자신이 택한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인지하게 된다.
"당신께서 허가하신다면, 소녀. 당신의 유흥에 친히 함께하며. 당신만을 위해 이 덧없음을 찢어 내리겠나이다. 친애하고, 경외하고, 존경하는 신이시여. 우후훗.."
차라리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여기서 평생을 지내더라도 좋아.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취할 수만 있더라면- 내 못할것 무엇 있겠는가. 가현은 발걸음을 옮기며, 적당히 숨을 장소를 골랐다. 그러는 와중에도 드넓이 펼쳐진 호박밭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일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잘만 고치는데 왜 그러냐나니, 도와주겠다고 하는 말. 그 말에 니오는 살짝 경직하곤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선지 옛 기억이 떠올랐다.모두가 괴물이라느니, 이단아라느니 할 때 항상 연습을 도와주던 둘 째 언니의 말이 항상 이런식이었으니까.
' 막내야, 우리 막내야. 잘 하고 있어. 언니가 도와줄게. 우리 막내는 할 수 있어. '
니오는 작게 '언니야-'하고 중얼거리곤 지팡이를 꼭 쥐었다. 이제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 갈 때 가더라도 긴 시간이 지난 후일 것이다. 그 때 돌아가서 자기도 이런 주술을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끝까지 믿어주던 둘 째 언니의 그 따스한 온정에 보답하고 싶기 때문일까.
귀를 간질이는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 무거우나 한편으로 흥겨운 것 같기도 한 음악소리. 아 갈채하라, 기억에 남은 이 음악소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연은 감았던 눈을 떠낸다. 이제 이것이 평온한 꿈이 아닌 악몽임을 안다. 허나 악몽도 결국 불쾌한 꿈에 불과한 것이니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머리는 아는 것이지만, 마음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파도처럼 몰려오는 거대한 두려움에 연은 바로 뒤를 돌아 멀리멀리 도망치려 한다.
아주 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성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향 사람들의 얼굴은 일순 녹아내리더니 다른 이들로 변했다. 성율은 그렇게 썩은 이빨처럼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다, 또 다시 정신이 이상해져 덜컥 겁이 나는 것이었다. 과거의 기억과 현실이 뒤섞여 버린 탓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 걸지도 모르지.
그 자리에서 성율은 등을 돌려 마구 뛰었다. 자신은 해야하는 일이 있다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비겁한 변명을 하며 도망치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