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설마, 설마. 얼마 뛰지도 않았지만 벌써 헛숨을 들이킨 묵은 부정하고 싶은 가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지금, 저, 꼬마 아이가─. 뒷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생각조차 숨 죽여야 할 것 같았던 탓이다. 원래도 체력이 그닥 좋지 못했던 묵이었다.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부채를 다시 쥐었다. 고뇌에 빠진다. 그러나 계속 뛰기 시작한다. [도망쳐]
할퀴어지고 물어뜯길 각오로 한 공격이였는데, 별 탈 없이 짐승은 움직임을 멈췄다. 죽이지 못한걸 보니 아직 수행이 부족한듯 하던가, 이전에 하던 생각은 도통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존재 이유, 부모, 그의 세상과 이 우주를 그리는 모든 것. 본능적인 두려움이 몸을 감싸 안는 것에 입가에 미소가 스며든다. 짐승이 인간의 형태로 변질된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이 변한게 아니라 소멸한 것이였어도 그는 눈치를 못 챘을 것이다. 왕을 앞에 두고 어찌 돌덩이에 눈을 주겠는가.
시선은 바닥으로 꽂은 채, 숨이 아직 붙어있어 온기가 느껴지는 인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여전히 뛰는 손목의 맥박은 그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구덩이 쪽으로 잡아 끌어 인간을 밀어 넣었다. 그것이 전부 끝나고서야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채로, 회답을 해 온다.
밝은 목소리는 귓가를 후벼파고 뇟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두려움. 절망. 공포감. 그 모든것이 내제된 그 목소리를 가현은 그저 한껏 만끽하며, 받아들인다. 그래. 그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그저 당신만이 즐거울 수 있다면.. 저가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소리가 들리면, 가현은 다시 눈을 감고 제 본낯을 가렸다. 자연스럽고 몸에 익은 그 행동은 자신의 가문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던 예의범절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재미를 느낄수만 있다면. 저의 덧없음으로, 쾌락을 즐길수만 있다면...'
이 소녀. 못 할게 무엇 있겠나이까. 인간이 정한 죄악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이까. 말 없이 속으로 되아리고 그것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가현은 더더욱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길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런 덧없는 행동마저 칭찬하실 만큼- 당신은 자애로우시며. 동시에 무자비하시니.
짧은 순간. 온화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친다. 그저 연례행사를 즐기러 나와 이게 무슨 일인가. 내 아회를 괴롭힌 벌을 받는 겐가? 그렇다면 본인에게 받아야지 왜 별것이 다 --인가. 겉으로 안 그런 듯 해도, 결국 온화도 적룡이다. 붉은 머리, 게다가 붉은 눈은 쉬이 불타올랐다.
대뜸 뒤집힌 얼굴이 보였을 때. 그것은 터졌다.
"어이쿠 깜짝이야!"
온화는 웃으며 어떻게 죽여줄까 따위를 말하는 얼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리를 차올렸다. 정확히 무릎으로 얼굴을 가격하려 했다. 저게 누구인지 알 바인가? 성가신 것은 눈 앞에서 치워버려야지.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운에 도망치나, 결국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 돌듯 빙빙 돌고만 있는 것인데. 정신없이 달리다 무언가에 발에 걸리면 연은 넘어질 뻔하다 간신히 멈춰 선다. 악몽이이니까. 꿈이니까. 죽어도 꿈 속에서 죽는 거니. 더 두려워 하지 않고, 아니 포기하는 마음으로 뒤돌아서며 다가오는 것을 마주하려 한다.
순간 모든게 침잠하고, 몇 남은 행동의 갈래 중에 정해진 길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율의 공황에 빠진 얼굴, 눈물 뚝뚝 떨어지던 얼굴이 순간 잠잠해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무얼 해야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결국은 하나의 길로 향하는 돌림길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까닭이다.
자신처럼 아둔한 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모르겠으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예의를 갖춰야겠다 싶어 무릎 꿇고 높은 분 배알하듯 몸을 조아렸다.
"신님, 신님."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이자, 이마가 풀숲에 닿았다.
"저는 배운 것이 없고 아는 바도 없는 무지렁이인데, 신님께 도움 드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제사장 곁에서 몸종 노릇을 해왔다고 자신에게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설마 높으신 분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도 안해봤으니. 이 상황이 성율에게는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아, 비린내가 짙어진다. 검붉은 광경이 눈에 담길 듯하면서도, 마침내 마주한 것에 아회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인간이라기엔 그것이라 불러야 하며, 그것이라기엔 뱀과도 같고, 뱀이라기엔 위대하다 느껴야 할 것이.
시체를 발로 툭 치는 모습과 함께 소름 끼치는 미소를 마주하자 가슴이 방망이질 친다. 심장이 어떤 의미로 뛰는지 모르겠다. 공포? 환희? 그것도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감정? 아회 그 상황에서 한 가지 사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싶었다.
이 생각을 들게끔 유혹하는 자 당최 무엇인가, 과거의 망령인가? 선조의 죄악인가? 알 수 없다, 알 도리가 없다.
단지 한 걸음, 두 걸음 매료된 듯 다가가다 손 뻗으니. 그 모습 마치 범과 같다. 아니면 진짜 범이었나? 모르겠다, 인간은 알 도리 없다, 이곳은 있어서는 아니될 일만 가득하니 알 도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