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이란 무엇인고. 그것은 살아서 벗어나지 못 하는 굴레요 죽어서도 얽어드는 것이니. 보거라. 네 걸어온 모든 자욱이 업이로다.
꿈 속의 누군가 말했다. 그 말에 돌아보았지만 발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뒤엣길 전부, 아득하게 저 멀리, 눈이 닿는 저 머나먼 선까지 전부 새빨갰으니까.
"...ㅇ... ㄴ이..." "ㅎ... 화ㅇ..." "류 온 화!!!"
어느 아침, 기물들이 너저분하게 널린 한 방에서 대뜸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을 방이 울리도록 쩌렁쩌렁하게 내지른 이는 키가 팔 척은 훌쩍 넘는 장신의 사내였다. 그 옆에는 서로 꼭 닮은 열댓살 아이 둘이 방금의 고함에 질색팔색한 얼굴을 하고 귀를 막고 있었다. 사내는 아이들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찌푸린 얼굴로 앞을 내려다보았는데, 거기엔 그 방의 주인이 쓰는 침상이 있었다. 어른 둘은 족히 누울 드넓은 침상 한 가운데, 대 자로 누운 이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는 중이었다. 시선 만으로 뚫을 듯이 보는 걸로는 모자랐는지 기어코 고성 한 번 더 터지긴 했다.
"이 칠칠맞은 것아. 해가 중천이다, 중천이여! 언제까지 처뒹굴거냐! 안 일어나!?"
사내의 고함은 방 문을 넘어 너른 복도까지 우렁차게 울렸고 양 옆의 아이들은 재차 시끄럽다며 귀를 더 꾹 막고 투덜대었다. 그러나, 그러나! 침상에 누운 이는 미동도 없었다. 산발인 붉은 머리를 더 산발로 펼쳐놓고서, 배며 허벅지며 죄다 내놓고 누워 사내의 심기를 긁듯 배를 벅벅 긁었다. 그 작태에 사내가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귀를 막은 아이들은 서로를 보며 키득댔다. 하! 결심한 듯한 소리가 사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사내의 우악스런 손이 침상의 이불을 콱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차례 돌풍이 방 안에 휘몰아쳤다.
우당탕!
"...아이고야... 거 사람 잡겠네... 잡겠어..." "자업자득이다. 그러길래 누가 여태 처자라했냐?"
이불을 빼냄과 동시에 침상에서 사람 몸뚱이 하나가 바닥으로 굴렀다. 그로 인해 더더욱 칠칠맞은 모습이 된 이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대자,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머리부터 바닥에 대고 거꾸로 누운 이의 옆에서 아이들도 재잘댔다.
"맞아- 이번은 화 누이가 잘못했어." "화 언니가 잘못한거야- 그치-"
얄미우나 미워할 수 없는 목소리들에 드러누운 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제 더는 잘 수 없다 여겼는지, 느릿느릿- 엉망으로 구겨진 몸을 추슬러 침상에 걸터앉았다. 앉아서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덜 깬 모습을 보이는 이, 온화를 보고 사내, 수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큰 처자 앉은 꼴 좀 봐라. 네가 사내놈이냐. 달린 것도 없으면서 다리를 뭣하러 그리 놓고 앉어?" "내가 달린 것이 없긴 무어가 없소. 여 있지 않으오. 보소."
자세에 대한 수일의 타박에 온화는 지지 않고 대꾸하며 슬쩍 제 몸을 손으로 쥐었다. 할려면 옷이나 제대로 추스르고 하지, 대뜸 손부터 대니 쥐인 것 옷보다 살이 더 많다. 그 얼척 없는 행동에 수일은 그냥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됐다. 됐어. 가서 씻고 정신이나 차리고 와라. 나는 먼저 내실로 가있을란다." "으하아암... 내실? 거는 왜 가오? 응?"
왜냐고 물어도 수일은 대답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온화의 방을 나갔다. 멀뚱하게 앉아있는 온화에게 대답을 해준 것은 남은 아이들, 온령과 일령이었다. 두 아이는 서슴없이 온화의 품에 안겨들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화 언니도 차암. 오늘 아버님이 다 모이라고 했었잖아요. 또 까먹은 거에요?" "다같이 모여서 밥이나 먹자 했었는데. 화 누이가 또 안 와서 깨우러 왔잖아요." "아- 그게 오늘이었냐?" ""응!""
허허... 이것 참. 온화가 곤란하단 듯이 머리를 긁적이자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는 얼굴들을 아프지 않게 살살 잡아 흔들어주고, 숨 한 번 푹 내쉰 온화가 햇빛 쨍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해가 이리 좋은데 한잠 더 취하질 못 한다니. 이 어찌 아쉽지 않을꼬." "오늘은 안 오면 담배 압수한댔어요. 화 언니." "몰래 술 마시는 것도 안 봐준다고, 아버님이 전하라 했어요. 화 누이." "에잉. 치사한 어르신 같으니. 가면 되잖느냐. 가면."
누가 그네들 아버지 아니랄까봐, 진작부터 수를 쓴 말들에 온화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목 떨어뜨릴 듯 깊게 숙였다 들곤, 무릎에 앉혔던 쌍둥이를 내려보내며 온화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적당히 채비하고 갈 터니, 너희는 먼저 가 있거라." "네에. 가자. 령아." "응. 령아야."
먼저 가라는 말에 온령과 일령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온화의 방을 나갔다. 종이 잘 바른 장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히고, 비로소 혼자 남은 온화는 슬그머니 침상을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다시 눕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나, 앞서 들은 엄포를 떠올리곤 에휴! 한숨만 푹 쉬었다.
"가자. 그래."
다시 방 문이 열리고 닫히자 빈 방에는 햇살과 온기만 조용히 떠돌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 약 한 시간 후, 단장을 마친 온화가 느긋한 걸음으로 저택의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간다. 드넓은 집 안, 그 중에서도 안쪽에 있어 내실이라 불리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단장이라곤 하나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소매가 없는 상의, 일자로 똑 떨어지는 바지, 그 위에 붉은 연과 검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수놓여있는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한량마냥 설렁설렁 걸으니 실내임에도 옷자락 쉴 틈이 없다. 게다가 묶지 않은 머리는 어찌나 부산스러운지. 방향을 틀거나 복도를 꺾을 때마다 화르륵 일어나고 가라앉기를 수 번 반복하더라. 끝에 도착한 내실의 문을 기운차게 열었을 때도 머리카락과 두루마기가 일제히 날개마냥 펼쳐지는 진풍경을 만들어냈으니. 덜컥 들이닥친 온화의 모습을 보고 방 안에서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왔소!" "아이고. 집안 최고 난봉꾼이 이제야 왔구나. 어째 매번 기대를 저버리질 않어." "그럴 줄 알고 미리 부른 것 아닙니까. 아버지. 어서오너라. 화야. 네 자리에 앉으렴." "어허. 알긴 누가 알았다 그러더냐. 향이 조용히 있거라." "엥, 내 늦은게 아니었소? 어쩐지 더 자고 싶더라니!"
내실이라 불리는 넓은 방 안에는 여럿이 앉을 수 있는 상이 있어 그 주위에 온화의 남매들과 아버지, 어머니들이 이미 자리해있었다. 그 중 제일 마지막이면서 가장 기세 좋게 들어오는 온화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아버지 온일이다. 이제 오냐며 타박을 주는 온일의 말에 다 알고 시간 맞춰 미리 수일과 쌍둥이를 보내지 않았냐며 말을 얹는 이는 일향이다. 둘의 대화에서, 자신이 늦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온화가 더 못 잤음을 아쉬워하자 지켜보던 다른 이들이 웃는다. 같이 씨익 웃은 온화가 빈 자리, 곧 제 자리에 가서 앉자 한 자리 건너에 있던 여자아이가 냉큼 일어나 쪼르르 다가왔다.
"화 언니, 언니야! 언니 머리 내가 묶어도 돼? 내가 묶을래. 응? 응?" "예 누이가 그럴 줄 알고 내 머리 이대로 왔지. 이쁘게 묶어주련?" "응! 나 언니 머리 묶어주려구 제일 예쁜 머리끈 갖고 왔어!"
온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뻐서 방방 뛰는 이 아이는 예온이다. 곱게 입은 옷 주머니에서 알록달록한 머리끈과 빗을 꺼내는 예온을 보고, 온화가 의자에서 몸을 비틀어 머리를 만지기 쉽게 내어주었다. 예온의 손과 빗이 온화의 길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고 모아 열심히 모양을 내는 사이, 너른 상 위로 조금 늦은 오찬이 차려진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한 상 그득히 차려놓고 나가면 예온이 다 됐다! 라며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다. 작은 아이가 어찌나 손재주가 좋은지, 옆 한쪽을 시원하게 넘겨 땋고, 뒤에서 하나로 모아 묶어서 늘어뜨리는 것으로 난장판이던 온화의 머리카락이 멋들어지게 정돈되었다. 모양 뿐일까. 붉은 머리 드문드문 섞인 화려한 머리끈이 온화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옆에서 수일이 작은 손거울을 꺼내 주길래 그것으로 묶은 모양을 보고, 온화가 예온을 보며 웃어주었다.
"역시 머리는 예 누이가 해주는 것이 제일이네. 아구 잘 했다." "에헤헤헤. 화 언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려 그려. 이제 가서 앉자. 밥 식겠다."
온화는 예온에게 잘 했다는 칭찬과 함께 볼을 아프지 않게 조물거려주고 자리에 되돌려보냈다. 땋은 머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예온이 제 자리로 가서 앉으면, 온화도 비틀었던 몸을 바로 하고, 모두 조금씩 자세를 고쳐 앉는다. 모두 조용히 분주하게 몸가짐을 정돈하고나면 가주이자 아버지, 온일이 숟가락을 드는 것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오래도 기다렸다. 자, 먹자." "예, 어르신." "네, 아버지."
다같이 모여서 갖는 식사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길었다. 다들 예의를 갖추는 선에서 조곤조곤 말을 나누며 수저를 움직이다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간만에 이만한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인 만큼, 서로 모르던, 몰랐던 얘기들을 하다보니 조금 긴 시간도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 중 가장 화두에 올랐던 얘기는 단연 제일 큰 오라비인 일향의 성인식이었다. 이제 다른 남매들과 달리 목에 띠가 없는 일향을 보고 온화가 한마디 툭 던졌다.
"일향 오라비는 좋겠소. 나도 어서 이거 끊고 싶은데 말이오. 아버지, 어떻게 안 되오?" "안 된다고 몇 번을 답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여즉 투덜대면 평생 그대로 묶어버릴 것이야." "아니 아니, 그것만은 봐주시오! 그랬다간 정말 갑갑해 쓰러질 지 모르오. 어휴. 상상만으로도 싫소. ...그런데 정말로 어찌 안 되오?" "뭐? 아이고야."
으름장을 듣고도 같은 소리를 하는 온화에 온일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에 온화가 웃고, 다른 가족들도 웃거나 고개를 흔들거나 한다. 옆에서 수일이 그것도 못 참냐며 무어라 하거나, 일향이 조금만 참으라며 다독이거나, 어린 예온과 온령, 일령은 저들만의 얘기로 재잘재잘 분주하다. 그렇게 잠시 가지각색이 되었다가도 누가 무언가 말을 꺼내면 그리로 몰린다. 그런 시간 끝에 하나둘 수저를 내려놓고 식사를 마치면 재차 사람들이 들어와 상 위를 치웠다. 빈 그릇이며 식기들을 다 거두어 상 위를 말끔히 닦아낸 자리에 다섯 개의 사발이 다시금 올려지니. 이는 일향을 제외한 다섯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것 다 마신 후엔 나가서 놀다 오거라. 내 용돈은 넉넉히 주마."
온일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발을 들었다. 약인지 무엇인지, 붉은 것이 찰랑이는 사발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두 모금 마신다. 다섯 아이가 모두 사발을 비우고 내려놓으면, 그것을 확인한 온일이 잘 했다, 라는 한 마디로 식사 자리는 파장을 맞이했다.
우다다닥-
어린 세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왁자지껄 떠들며 먼저 나가고 그 뒤를 수일과 온화가 느긋히 따랐다. 내실엔 아직 아버지와 일향 등등이 남아있었지만 그저 고개 까딱이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올 때에는 홀로 느긋히 걸었던 복도를 나갈 적엔 수일과 둘이 걸어가며, 그 사이에서도 짧은 대화 오갔다.
"넌 올해는 제발 좀 얌전히 지내라. 몸뚱이도 머리도 클 만큼 커서 왜 그러고 다니는거냐." "아 이 정도면 얌전한 축이오. 내 뭐 허구헌날 월담을 하더이까. 사람을 죽일 듯이 잡길 하더이까. 적룡 치곤 얌전하지. 암, 그럼." "비유를 해도 참 숭한 것만 헌다. 나 참." "으히히히."
나름대로 도란도란 말을 주고 받던 중, 앞서 나갔던 아이들이 되돌아와 이들에게 매달렸다. 예온은 수일에게, 온령과 일령은 온화에게 매달려 어린 새들처럼 재잘댔다.
"화 언니! 같이 저잣거리 가요! 언니가 가면 과자집 아재가 후하게 준단 말이에요!" "맞아요. 화 누이랑 가야 많이 줘요. 그래야 수 선배 것도 많이 받을 수 있어요." "수 선배, 아, 수 아씨 말이냐?" "네에! 오랜만이니까 선물-" "수 선배는 좋은 사람이니까- 선물 줄 거에요." "아이구, 그래 그래. 같이 가자. 나도 무 도령 줄 것 좀 사야겠다." "나도! 나도 동기들이랑 먹을 거!" "그럼 같이 가야지. 예 누이도 친구 줄 겐가?" "친구랑! 친구 아닌 사람도 줄 거야! 우리 다같이 먹는 거 좋아!" "알았다 알았어. 자, 나가자!" "와아!"
한바탕 떠든 아이들은 다시 우다다 복도를 뛰어나갔다. 옆에서 묵묵히 보고만 있던 수일이 이제 갔냐- 하듯 한숨을 푹 쉬자, 온화가 킬킬대며 수일의 등을 팡 후려쳤다.
"악! 야 임마 류온화!" "으히히히. 거 동생들 기도 하나 못 받아주면 어쩌오. 응? 그래가지고 밤에 남자 구실 하것소?" "저, 저저저 말본새 봐라! 너 너 임마 거기 안 서!" "으하하하!"
아이들이 뛰어간 복도를 이제는 온화가 뛰고, 그 뒤를 수일이 쫓으며 다시금 시끄러워진다. 또다시 일어난 소란스러움은 제법 멀어졌음에도 내실까지 전해졌으나, 그를 들은 온일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기만 하였다.
속독 안되는 묵주는 이제야 다 읽었소이다...... 아니 이 단란하고 귀엽고 폭닥폭닥한 가족은 뭐야! 🥹🥹🥹 그리고 속속히 숨어있는 검은 띠 떡밥에... 붉은 액체 ? 무얼 마시는 거죠 😵 화목해보이는 걸 보니 안 좋은 건.... 아니겠지? 👀 그리고 수 가문이라니 묵이 맞죠 묵이! 관계 맺은 거 이렇게 독백에 써 먹어주시다니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지금 눈물로 한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온화야, 이 묵주 너에게 인생베팅할게. (묵주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