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번에 코웃음 친 미야나기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먼저 그런 뉘앙스로 말한 건 본인이었으면서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제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말에 도리어 기뻐하자 미간을 좁혀 흘기려다 말고 아예 축 늘어져버렸다. 회색 마루 위에 몸을 기댄 그녀는 지쳐 보였다. 작품을 중단한 후로 거의 처음 쉬는 거니 그럴 만도 했다. 물······ 가지러 가야 하는데 토슈즈 벗을 힘조차 안 남았다. 그러니까, 발소리조차 없이 순식간에 제 앞까지 다가온 걸 보고 이제는 놀랄 기력도 없다. 잡힌 어깨가 손길대로 속절없이 마구 흔들렸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새에 신비한 램프라도 문질렀었나? 그다지 보답 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게 웬 봉변이람! 당황한 미야나기가 처량하게 항변했다.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정말 없는데요!”
물론 그녀 역시 터무니없는 소원 하나쯤은 당연히 숨기고 있다. 그건 곧 있을 여름 축제에서 흘려 보낼 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일방성과 익명성을 충족하는 신화적 존재 혹은 허상에게나 털어놓고 싶은 거다. 상호 소통이 가능한 실체로서의 신은 아무래도 좀 겸연쩍다! 그게 같은 학교 동급생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지금 모습으로는 역시 신처럼 안 느껴지기도 하고······. 애초에 신이 들어주는 소원같은 게 유효할 리도 없다. 그따위 형편 좋은 구원이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은 한숨을 내쉰 미야나기는 난감한 얼굴로 애먼 주위를 괜히 둘러봤다. 정처 없이 떠도는 시선이 문득 벽 저편에 걸어둔 푸른 의상까지 가닿자 냉큼 멈춰 섰다. ······지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다.
“그럼, 다음 번에 또 만난다면 그때는 하얀 데이지를 한 송이 가져다 주세요. 이 정도는 괜찮죠?”
미야나기가 가뿐하게 미소지었다.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 부탁하기에 적당한 소원이다. 다만 들어주는 입장에서는 허무할 수도 있겠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보다야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이뤄주는 쪽이 더 보람 있을 테니까. 고개를 비스듬 기울인 미야나기가 천천히 고민했다. “음······ 반대로 제가 해드릴 일은 없을까요? 뭐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하등 인간 따위가 과연 신을 위해 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나마 인간—글쎄 적어도 고등학생 중에서는— 치고는 그런대로 쓸 만한 편이겠지만 말이다. 마음 먹으면 웬만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의탁할 소원이 없기도 했다. 물질과 혈통이 전부인 사회라 안타깝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익숙한 물건들이 손에 닿아요. 언제나 들고 다니는 수첩과 반창고입니다. 반창고를 꺼내려고 한 거였지만, 손가락 끝에 수첩이 걸리니까 그 사이에 있는 스티커도 꺼냈어요. 싸우지 않았다고 하니까 클로버 스티커를 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칭찬 스티커라고 생각하면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때도 줬었으니까, 이번에는 벌써 두번째 주는 스티커니까 안 부끄럽다고 생각해보려고 해요.
“다... 다음에는 바보 졸업하세요.”
다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다치지 마세요’ 라는 말이 분명 ‘다음에는 바보 졸업하세요’ 라는 말보다 더 짧은데 굳이 길게 말해버리고 맙니다. 이래서야는 반창고를 줘도, 스티커를 줘도, 와타누키 씨가 받고 싶은 기분일 리가 없는데도요. 그래도 스티커랑 반창고 두어 개는 잘 내밀었습니다...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을 뿐이지만요.
“...빨간 것도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는 말조차도 더듬었으니까, 분명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서 크게 넘어져버렸다거나,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인 줄 알고서 불렀다거나 했을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귀도 조금 빨간 것 같은걸요. 전 귀가 빨개지면 가리고 싶어져서 알려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고 보니 모른 척을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해요.
“네, ............”
아저씨를 뭐라고 불러야하는 걸까요......... 같은 학교 학생 신분으로 계시니까 아저씨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단순히 아는 사이도, 사람도 아닙니다. 신이라는 걸 말할 수도 없고, 고심하고, 고심 끝에 적당한 호칭을 생각해내요.
“.........친한 후배랑요. 와타누키 씨는 누구랑 갔어요?”
친하다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친하다고 생각해요. 친하지 않다고 해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알고 지낸 시간만 제 나이만큼인걸요. 그리고 질문도 무사히 하나 이었어요.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어렵지만 잘 해나가고 있다고 되뇌기로 합니다.
"글쎄. 가장 강해야 가장 깊을지도." 빛이 세면 그림자도 세게 지는 느낌일까. 같은 생각으로 가볍게 말한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모을 때에도 공평할 순 없었음" 인간이 선호하는 것을 향하는 편이고. 다만 그게 소수였을수도 있었나? 미카의 행동이나. 말을 듣고는...
"음. 그건 무리." "...조금 고리타분한 말인데." "내일의 와타군보단 덜 선호할 수밖에 없음...은 100%가 되면 똑같아지니까 언젠가는..일지도 모르는..건가?" 이 말은 좀 글렀나..? 같은 고민을 합니다. 그야 이 말 한 사람 되게 편력이.. 있는 편 아니었나? 자기가 뭔 말을 한거지. 갑자기 좀.. 부끄러워졌던걸지도.
내밀어진 스티커와 반창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슬쩍 가져간다 칭찬 스티커라도 받는 거 같아서 애 취급 당하는 거 같지만 싫진 않다 자꾸 이런 걸 주니까 바보 졸업하기 싫은데 같은 유치한 생각도 든다 그러다 이어진 말엔 말없이 고개를 돌려서 책상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대기만 한다 부끄러워하는걸 들켜버려서 더 부끄러워졌달까
"...아무튼 비밀이야."
겨우 내뱉은 몇 마디 그러다가 다시금 고개를 제곳에 둔 미카는 어쩐지 심통난 표정을 짓고 있다 친한 후배랑 갔다는 말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되묻는 말에 멈칫한다
"그냥... 친구랑."
그래도 이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지나치게 짧고 성의없는 대답이긴 하지만
"...연애물에선 이런 거 말하는 거 맞지 않음..?" "근데 나는 말하기 힘드네.." 부끄러움 그자체인것같아 이지만 계속 기억하겠다는 말엔 에.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진짜 잊어줄거라고 기대했던 건가. 뭐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순진한 면도 있긴 하다니.
"...귀엽지 않아." 귀엽다하는 거랑은 다른데. 같은 생각을 하며 약간 눈을 피합니다. 동공이 좀 움찔거리는 것 같지만. 고개를 돌리면 꾹 찌르는 것과 타이밍이 맞아, 조금 더 깊이 찔리는 감각이 느껴져 얼굴이 조금.. 달아오릅니다.
"...나는 느리다고 생각." 대신 오래 갈지도? 라고 말하긴 하지만 확신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라고 붙이는 걸 보면 말이지요.
스티커를 가져가면, 주려고 내민 거긴 하지만 정말 가져가주어서 우물쭈물거리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친한 사이가 아니면, 클로버라도 받은게 아니면 주지 않는 걸요. 그래야만 주는 스티커니까 친구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타누키 씨한테 준 스티커가 많아지면 그때는 많이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언젠가 졸업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요.
“졸업하면 3개 줄게요.”
조금은 장난스러운 말입니다. 눈을 도륵 굴리다가 조금 웃음지어요. 눈웃음도 어색하지만 살짝 찡긋거린다는 느낌이 맞을 거라고 믿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는 것보다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네, 비밀.”
많이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비밀이라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이미 늦어버린 지도 모릅니다. 어쩐지 심통난 것 같은 표정에 어쩔 줄 모르게 돼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힘내고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고민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뿐만이 비밀인게 아니라 마츠리에 관한 모든게 비밀이라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빨갛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ㄴ거일듯." 음. 그래서 와타군이 나를 귀엽다고 생각할수도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면 그나마 나을지도~
"...괜찮으면 다행임." 느릿하게 깨달아간다고 해도 의외로 빠르게 될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자신이 꽤 좋아하고 있다는 걸 많이 알려주고 싶진 않은것. 부끄럽잖아.. 같은 생각이 들다가.
"커피 만들어옴" 벌떡 일어나서는 주방으로 향합니다. 커피커피커피. 무슨 커피를 좋아할지 모르니 대충 캡슐커피 하나를 까서 넣고 작동을 합니다. 사실 주방의 싱크대에 머리를 박으면 좀 머리가 식혀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고.. 얌전히 자신의 몫인 물과 커피머신에서 나온 커피를 쟁반에 담아 가져오려 합니다.
"짠." 놀랍게도 이 커피머신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을듯.(*청소는 하고 있었으니 청결은 걱정마라!)
곧 내어지는 커피 한잔 따뜻한 걸 마시는데 오히려 얼굴이 식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리 차분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런데도 또 짓궂은 마음이 생기는 건 왜일까
"저기... 있잖아."
커피를 홀짝이다 말고 슬며시 운을 뗀다
"키리나즈메 씨는 왜 내가 좋아?"
그리고 무덤덤하게 던져지는 질문 실은 단순히 짓궂은 생각이 들어 그런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이유를 듣고 싶다는 마음도 있을까 깊은 곳에 내재된 불안감은 떨쳐낼 수 힘든 것이라 제가 정말로 타인의 호감을 받을 만한 인간상인가 계속 고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물며 신의 입장에서는 한낱 스쳐지나가는 인간에 불과할진대
"...얼버무리기 금지야."
빠져나갈 구멍도 완전히 틀어막고(?) 정작 자기가 먼저 말해놓고서 머쓱한지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키기만 한다
하얀 프릴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치마는 너무나 고운 재질이었다. 검은 빛과 하얀 색이 적절하게 배합된 메이드 복을 치아키는 입고 있었다. 나름 공부와 연구를 했는지 인사를 할 때 치맛자락을 잡고 살며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딱 전통과 격식이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학생회의 멤버 몇 몇과 흥미를 가지고 온 이들 몇몇이 모여서 만든 집사&메이드 카페. 물론 학생회장이 직접 이런 일을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겠는가. 올해가 지나면 가미즈나제를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마지막인만큼 유종의 미를 확실하게 거두고 학생회장도 손수 나서는 그런 축제로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치아키의 마음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 무녀복을 입은 적은 있으나, 이 나이를 먹고 이런 옷을 입을 일은 없었기에 조금 어색한 것이 컸다. 물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부끄럽다. 와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색함이었을까. 이걸 이렇게 입는 것이 맞나?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닌가? 검은색 스타킹을 이 정도까지 올리면 되는 것일까. 그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치아키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스코틀랜드에선 남자도 치마를 입는다고 ㅡ물론 그 이름이 치마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ㅡ 했으니 다시 한 번 더 부끄러운 것은 없다고 치아키는 생각했다. 이 또한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괜히 다리를 살짝 의식하다가 앞을 바라봤다.
"모에모에 뀬이요? 에이. 그런 것은 전문 메이드카페에 가셔야죠."
그런 것을 장난스럽게 요구하는 이에겐 차이카 역시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메이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가 있었다는 것 같기도 한데. 자신이 잘못 기억하는 것일까. 만약 있다면 미리 배워두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자신의 하얀색 머리 장식을 정리했다.
"그래도 원한다면~ 음식아! 맛있어져라! 모에모에 뀬!"
이어 그는 별 부끄러움 없이 손하트를 만들어서 그렇게 행동을 취했다. 아마 가미즈나제가 다 끝나면 웃음거리가 되고 한동안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허나 아무렴 어떨까. 그저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일부러 밝게 웃어보이면서 샤랄라스러운 걸음을 유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흑역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의 이야기지.'
일단 지금은 지금을 즐기자.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막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손님을 환한 미소로 다시 맞이했다. 물론 전문 프로 메이드 카페의 메이드처럼 행동할 순 없었으나 적어도 아마추어 메이드치고는 나름 잘하는 것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두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