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는 그렇게 인간의 감정들에 예민하다거나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기에 진상이었던 아저씨가 괴롭힘(?)을 당해서 울든 말든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린은 꽤나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힘으로 꽉 안은 탓에 남성은 힘을 쓰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힘이 다 빠진 채로 경찰에 인계되었다. 나머지는 경찰이 사기 피해를 더 일어나지 않게끔 설득하고 얼른 딸의 위치와 안전을 확인해주겠지 하는 생각이다.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하는 모습에 린이 자신을 알아보았나 생각했지만 영 그런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역시 자신이 소개를 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한쪽만 상대를 알고 있는 것은 역시 조금 불쾌하지 않겠는가.
"네에...... 뭐........ 린 씨 덕에 큰 소란 없이 잘 끝난 것 같습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한다. 표정은 솔직한 티벳 여우 표정이었지만. 이름을 상즈케해서 부른 것은 한국인들은 딱히 이름을 부르는 것에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 때문이고 성만 부르는 것을 낯설어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유명인이시라 처음 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통성명 하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하시모토 케이입니다. 수호 씨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수호라는 이는 한국 한 마을의 장승 신이다. 200여넌 전에 업무상으로 만나 친해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촌향도 현상 및 인구감소로 인해 지키던 마을이 사라져 세계 유람을 하며 제 2의 은퇴 후의 삶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토아와 같이 가기로 한 한식 집도 수호 덕분에 알게 되었다나 뭐라나.
아무리 먼 곳이라 하여도, 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같이 가줄 수 있는 것인데. 다시 명백히 거부하는 네 반응에 미유키는 더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그저 네가 비에 젖지 않게 조심하며, 먼저 앞서가지 않게 너와 보폭을 맞추려 노력할 뿐이다. 그러다 제 배려를 눈치챈 것인지, 네가 우산대를 밀면 미유키는 널 바라보고 놀란 얼굴이 된다. 그러다 이어 들려오는 말에 아까보다 더욱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더듬으며 말하는 그 말이 짐짓, 다르다 느껴져서 그럴까. 정말로 싫어 그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너와 함께 걷는 이제, 그런 너의 모난듯한 말이 날아와도, 제 마음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미유키는 자신에게 붙는 너를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아이 취급하기 싫어도,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을까. 미유키는 작게 웃음소리를 낸다. 그리고 다시 말없이 걷다 보면, 우산에 내려앉는 세찬 빗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침묵을 메우고 있을까. 어색해지는 기운에 미유키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배님이 놀란 표정을 지어서, 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깜빡거립니다. 우산대를 너무 힘주어 밀었던걸까요? 아니면 갑자기 우산이 움직여서 놀랐는지도 몰라요.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우산을 기울이지 말라고 먼저 말할 걸 그랬나봐요. 그래도 다시 웃으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조금은 더 가까이 붙어 서있으니까, 굳이 제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애초부터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선배님은 많이 상냥하셔서 신경쓰이는게 분명해요. 선배님의 키에 맞춰 높게 들려있는 우산을 바라보았다가, 팔이 아플 것 같아서 걸음을 조금 재촉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선배님의 발걸음에 맞춰야하니까 그러지는 못 하고 마음만 조급합니다.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선배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토이가와 선배님이에요. 처음 만난 사이에는 자기소개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저도 선배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까 똑같이 이름을 소개합니다. 알려주기 싫거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산 없는 사람에게 쉽게 우산을 내어줄 수 있는 착하고 좋은 선배님이니까요. 문제가 있다면 제 쪽입니다. 스몰 토크, 혹은 아이스 브레이킹이라고 하는 행위들을 해낼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고민하다가요, 선배님을 따라합니다. 조금 입꼬리를 올렸어요. 자연스럽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웃는게 이상할까 걱정은 되지만, 선배님이 먼저 웃었으니까, 저번에 분명 웃어도 아무일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니 순전히 제 필요에 의한 말이 떠올라요.
“몇 반이에요?”
선배님이 절 편의점에 데려다준 후 바로 가버리시면 답례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반을 물어봅니다. 개학 후에 반으로 찾아갈 수 있을테니까요. 3학년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는 조금 무섭지만... 답례는 해야하니까요. 그런데 말하고보니 왠지, 선배님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단 느낌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관심 있어서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1교시에 본의 아닌 도강을 했단 걸 선생님께 들키지 않은 것만 해도 요행이었다. 희게 물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인상도 아니었으므로, 요이카는 빨리 교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혹시나 들켰다간, 선생님에게 이런 꾸중이나 저런 핀잔, 혹은 선배들 사이에서 「1학년 아냐?」 하는 많은 관심을 받을지도 모르고, 이들이 요이카를 둥글게 에워싸서 「와아, 후배다. 신기해.」 이러면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팔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면⋯.
우르르릉 쾅! 콰쾅! 푸콰아앙!
⋯이다! 아마도. 요이카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서둘러 의자를 밀어넣었다. 인간들이 폭풍우나 번개나 상어 토네이도에 휘말리는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신, 식물과 화분에 둘러싸여 있으면 적어도 그런 일은 대체로 예방할 수 있다. 식물은, 먼저 해코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이카는 원예부에 들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 요이카는, 아침나절 내내 엎드려 자고 있던 소년이 한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꽃에 관심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늘었구나 하고.
“언제든지 환영해.” 신입부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부원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강권한다면 요이카가 직접 막으러 나설 것이다. “⋯ 나무가 곤란해하는 거 본 적 있어?”
키구치 요이카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비록 지나친 자애심 때문에, 인간이 초자연적인 무언가의 존재를 눈치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적을 베푸는 성격이긴 했지만(그래서 많이 혼났지만), 그건 수백 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권능으로는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재앙을 억제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렇다면 요이카가 실수로 신의 권능을 드러내서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는 가능성은⋯. 「없다」라고 요이카는 단정했다. 멍한 와중에 언행에 실수한 게 아닌 이상, 기억을 되찾은 이래로 신다운 모습을 내보일 여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신인가? 조금이라도 강력한 신이라면, 요이카같이 신령도 원령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귀신의 본래 정체쯤이야 금방 꿰뚫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후보군에 문제가 생긴다. 요이카가 알거나 교류하고 있는 신으로 한정하면 용의자가 지나치게 적었다. 하루노하나히메한테는 한 차례 공양을 올린 적이 있고, 가미즈나고교에서는 끽해야 같은 반의 남궁 정도일까. 한편 요이카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신까지도 포함하면 수사망이 터무니없이 넓어지고 만다. 하다못해 길거리의 돌멩이도 신령일 수 있는 마당에.
마지막 한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우연의 일치」. 이 경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기로 했으나, 세상에 연기(緣起)라는 것이 있고 기우(奇遇)라는 것이 있다시피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요이카가 은행나무의 신령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둘째치고, 누가 어떤 이유로 이 머리꽂이를 선물한 게 된다는 말인가?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짚이는 것은 없다. 원한과 도전장, 약속과 증표, 우정과 문안, 아니면⋯. 아니, 아니, 아니. 이 가능성은 완전히 접어 두기로 하자. 더 생각하다가는 마음이 술렁일지도 모르기에. 그렇게, 요이카는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이미 손은 짧은 뒷머리를 묶었으니까⋯.
노란 은행잎이 반짝이는 꽃비녀가 작은 꼬리 같은 똬리를 파고들었다. 왜인지 조금, 아주 조금, 요이카는 자신도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역시 조금 마음이 술렁인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머리꽂이를 빼고 가슴에 품어 심호흡했다.
우리 사이를 맴도는 이 어색하고 견고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미유키였을까. 제 이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는 화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게 항상 같은 것은 아니었으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 네가 닫혀 있던 문을 열며, 기대하고 있던 답과 함께, 기대에 없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보여주자, 미유키는 고개를 네 쪽으로 돌려 바라보며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자신에게 처음 보인 웃음,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그 웃음이 이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 잊지 않게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을까. 돌아오는 대답에 미유키는 너와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반을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인지. 예상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만.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고민하다가 미유키는 네 물음에 답한다.
"B 반이에요. 혹시 선배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요?"
덧붙인 네 말에 미유키의 얼굴엔 미소의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놀러 찾아오는 건 괜찮지만. 보답하려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후배님의 그 미소를 본 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만약 그래서 반을 물어본 것이라면, 이미 그 미소로 하여금 제게 보답을 해준 것인데. 더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