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저물고 더위는 유령처럼 남아서 산비탈 아래를 떠돌았다. 곧장 서풍이 그 따뜻함을 씻어 버리고 남쪽으로 멀리 멀리 여행해 가면, 활엽수들은 마른 잎사귀를 그 편에 실어 보낼 것이다. 이렇게 해야 겨우내 가지 위에 쌓일 눈의 무게를 견딜 수 있고, 저 바다 너머로 소식을 전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면, 평생을 가지에 의탁해 온 잎들은 살아 온 세계를 통째로 버리는 것과 동일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 모진 일이다. 인간에게는 지구를 떠나가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고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신엽이었을 때부터 줄곧 초록색이었던 나뭇잎들은, 붉게, 노랗게, 검게 혹은 갈색으로 스스로를 물들인다. 인간들은 「엽록체」니 뭐니 하는 접근방식으로 식물을 바라보니까 당연히 그 뜻을 알 수 없겠지만 키구치 요이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다름아닌 나뭇잎의 반항기다.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는 강에서 도로 흘러나온 실개천이 도랑을 타고 모여든 웅덩이가 있었다. 가미즈나의 강가에는 전답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데 용수로를 따라 산책하듯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이미 이곳에는 여럿이 모여들어서 빨갛게 변한 단풍을 올려다보고 있고, 개중에는 작은 단풍잎과 자기 손바닥을 맞대어 보는 어린 아기도 보인다. ‘마을에서 3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이런 장소가⋯.’ 보통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큰길을 따라 10분만에 도착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요이카는 벼 이삭이 흔들거리는 강가 논두렁길을 빙 둘러서 걸어오느라 앞섶이 온통 억새꽃으로 범벅이 되었고 2시간 50분을 허비했다.
「억새꽃의 꽃말은 『은퇴』.」 원예부장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떠올랐다. 요이카는 웅덩이 앞에 쭈그려앉았다. 고요한 웅덩이 주위로는 온전히 익은 부들의 꽃이삭이 반쯤 열려서, 갓털을 매단 종자가 삐져나와 있었다.
미약하게 남은 신통력과 하얀 띠 부적의 힘으로 몸을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끝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이 다가온다는 점만큼은 여실히 느꼈다. 가을이니까. 「미련은 없다」고 수십 번 기도했지만 세상은 내버려두고 가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잠시 숨 돌릴 요량으로 가방에서 「소켄비차」 병을 꺼내 뚜껑을 따려는데, 손등에 무언가가 왁 날아붙어서 요이카는 등줄기를 움찔했다. 그러자 고요하던 물웅덩이가 벌벌 떨리더니 매서운 바람이 머리 위에서 비가 내리듯 쏟아졌고, 연못 둘레로 웃자라 있던 부들 이삭이 모조리 터져서 하카타의 공장지대 굴뚝처럼 솜털이 마구 솟구쳤다. 주위에서 웅덩이로 단풍잎이 빨려들어 왔다. 수면이 단풍으로 뒤덮였다.
손등에 붙은 것은, “개⋯ 구⋯ 리⋯.” 였다.
북풍이라도 끌어다 올 기세로 난동부리는 마음 속의 원념들을, 요이카는 억지로 진정시켰다. 개구리는 놀라서 요이카의 손등을 꽉 움켜쥔 채로 굳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어렴풋이 미소지으면서 개구리가 붙은 손을 눈앞으로 가까이 데려왔다. 청개구리는 가을을 맞아서 잿빛이었다. “놀랐잖아. 당신은 어디서 왔어?” 개구리는 대답이 없다. 풀꽃과 마찬가지다. 연못에 뛰어들고 싶은 눈치다. 수선화처럼. 요이카는 문득 어린애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개구리에게도 꽃말이 있을까? 개구리가 식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봄에는 파랬다가 가을에는 갈색으로 변하니 나뭇잎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
「『되돌아가다』지. 『カエル』니까.」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면 중생들이 미워할 거야, 당신. 것도 지금보다 더.」 「아니야, 아니야. 겨울 개구리 본 적 있어? 동면할 때쯤이면 회색으로 변했다가 봄이 되면 녹색으로 되돌아온다구, 경칩 즈음에. 그러니까 『되돌아가다』야.」 「궤변이네.」 이 문답은 키구치 요이카가 도끼날에 베이기 이전 어느 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다. 정말 그럴까? 웅덩이 속에 개구리를 내려놓아 주면서 요이카는 물었다. “개구리야,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서늘한 물빛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개굴, 개굴.” 요이카는 그 말을 따라하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웅덩이에는 가을 정취가 흠뻑 내려앉아 있는데 뜬금없게도 봄 하이쿠가 생각나서였다. 오래 전 이가우에노 근처에서 집어든 한 선집(選集)에 실려 있던,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개구리는 연못 속으로 헤엄쳐 사라졌다.
지금껏 이 신님이 이렇게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간만에 한 방 먹인 기분이 들어 즐거울 법도 한데 그보다 미야나기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 그녀는 회견을 억지로 끝내는 인터뷰이처럼 말을 끊어냈다. “열심히 하는 게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어요.” 포스터를 쥐어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입부 시도는 영 그른 듯했다. 생전 처음 듣는 얼빠진 소리나 내질 않나, 심지어는 제 발로 도로 나가버리겠다고 하지를 않나! 미야나기는 허겁지겁 팔을 길게 뻗어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이건 범죄도 금기도 아닌데. 듣고 나서 말 바꾸면 없어 보인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는 미야나기의 눈빛이 마치 ‘없어 보여!’라고 있는 힘껏 외치는 듯했다. ······이 버르장머리 진짜 실화인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천 년 묵은 신 앞에서 상당히 싸가지가 없다. 그만큼 미야나기는 최선을 다해 그를 붙잡고 싶었다. 빈번히 말하지만 프로들조차 어려워하는 풀업을 처음부터 척척 해내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정리하자면 본인이 잘할 생각은 안 하고 남한테 숟가락 얹을 기회만 엿보고 있다. 그녀가 손을 꼭 모아쥐고 최대한 간절한 얼굴로 빌었다.
“이래 봬도 고향에서는 제가 좀······ 그, 아무튼 이런 말을 아무한테나 함부로 하는 줄 아세요? 분명 10년 안에 수석 무용수도 될 수 있을 거예요.”
막상 본인을 소개하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여태까지는 먼저 알아 주거나 몰라도 되거나—대체로 둘 중 하나였기에 직접 설명할 일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명함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였다. 어떻게든 설득할 궁리를 찾기 위해 미야나기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이래저래 자꾸 깜빡하게 되는데, 인간이 아니라 부나 명예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을 것 같다! 여자라면 토슈즈 로망 심어 주기 딱인데 그건 안 되고. 발레를 본 적도 없다 했으니 그 자체에 대한 애착 역시 없을 테다. ······앗! 가만. 본 적이 없어? 미야나기가 금세 두 눈을 또렷이 빛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면 발레를 직접 한 번 봐 보시는 건 어떠세요?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요. 근데 이 동네에 발레 공연이 올라 왔었나······.”
잠깐 눈 사이를 좁히며 생각에 잠긴 그녀가 곧 한 마디 볼멘소리를 덧붙였다. “ ······에에잇! 이래서 칸사이가 안 된다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관서를 향한 관동인의 쓸데없는 라이벌 의식성 발언이었다. 그게 딱히 관서 지방의 문제는 아닐 텐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방학이 끝나고, 여름도 끝나가고, 가을과 개학이 찾아왔습니다. 하복 대신에 춘추복을 입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물기는 날아가고 선선함이 실려옵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교실이 한적해요. 방학의 여운이 남아서 점심시간 동안 운동장에 나가있는 지도 모릅니다. 교살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보다가요, 와타누키 씨를 발견했습니다. 버릇처럼 바로 시선을 돌렸다가, 지난번애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좋은 친구라면 방학이 끝나고 만난 교실에서 모른 척을 하진 않을 겁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건 해도 될 거예요. ...아마도요. 가까이 다가가서, 심호흡 한 번 후에 입을 엽니다.
“안녕하세요, 와타누키 씨.”
친구 사이에 허리 숙여서 인사하진 않을 거예요.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굳어버린 팔을 뻣뻣하게라도 들어올려서 손을 흔듭니다. 손인사가 부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인사는 어떻게든 해냈으니 그 다음은 안부를 묻을 차례입니다.
“......ㅂ, 방학동안 잘 지냈어요?”
............연습하고 있으니까요, 웃어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살짝 입매에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말을 더듬어버리기까지 했어요. 웃으면서 상냥하게 질문을 건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만 하는 것 같던데 다들 대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