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이 지고 있는 저녁. 긴 여름 해가 지나고 가을이 되니 점점 해가 짧아졌다. 그만큼 서늘한 날씨가 케이는 기꺼웠다. 무더운 여름은 너무 싫었으니까. 여름 방학 동안 야행성 생활을 즐기며 퍼질러지며 놀았는데 다시금 학교에 다니며 낮에 깨어있고 밤에 잠을 자야하는 시간이 돌아오니 영 피곤해서 힘들었다. 마치 시차 적응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녁 놀이 지고 있는데도 하교를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한적한 교정 구석에 만들어진 돌탑에 돌을 쌓고 있었다. 이제 졸업을 하고 나면 이곳에 종종 나타나 학생들의 쓰다듬을 받던 흑여우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이 돌무더기도 이내 그저 왜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만 남긴채 비바람에 흩어지게 되겠지.
2년간 정들었던 학교도 이제 두 계절만 지나면 떠나야 하니 조금은 섭섭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대학 생활도 열심히 즐기고 신계로 돌아가야겠지. 그러던 중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전에 만났던 붉은 머리의 소년이다.
“안녕. 와타누키 후배님. 여우를 보러 왔어요?”
싱긋 웃는 모습이 왠지 기분 좋아 보인다면 맞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니. 그것은 케이가 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부름을 외면하는 신은 없지 않겠는가.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찾아오듯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미카는 오늘 하루종일 책상에 엎드려서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었다 무더운 날씨도 풀렸건만 어쩐지 더욱 기운이 없다 어쩌면 그냥, 개학이 귀찮아서 그런 걸지도 오늘 정규 수업이 전부 끝났지만서도 여전히 미카는 책상에 엎드려있을 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학교를 빠져나오니 노을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발걸음을 옮겨 향한 곳은 학교의 뒷편 저번에 까만 여우를 보았던 장소였음이 뒤늦게 생각난다 그곳에는 선객이 있었는데 어떤 안경 선배였다 친근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것이 저번에 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 기억을 이리저리 뒤져본 끝에 겨우 생각해낼 수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냥 온 거긴 한데..."
미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멈춰선다
"...여우 지금 없어?"
그리고 그렇게 물어보는 목소리에 묘한 실망이 담겨있다 여우 보는 게 목적은 아니었지만 없다고 하면 아쉬울 거 같아서다
왠지 여우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소년을 보면서 케이는 웃음을 참았다. 왠지 웃으면 소년이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거나 툴툴거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우 신이 어디있냐 묻는 모습은 마치 신이 있는 것을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 학교에는 신들이 많은 편이니까 물론 이 소년 또한 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여우신은 이 주변에서 후배님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여기가 여우신에게 공양하는 공간이니까, 하는 말과 함께 돌탑과 그 앞의 판판한 바위를 가리킨다. 이전에 미카의 사과 조각과 10엔을 공양했던 공간이다.
“와타누키 후배님은 이전에 공양을 했었으니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탑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원을 빌거나 공양하는 사람은 극히 드믈다. 제대로 된 신사도 아닌 이런 탑에 소원을 비는 이들이ㅡ종종 있긴 했다ㅡ 많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내 말이 가라앉았던 네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릴 만큼 당혹스러웠던 걸까. 그러면 미유키는 무구한 얼굴로 고개만 슬쩍 기울이고, 따라 눈만 깜빡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네 말에 미유키는 다시금 입매를 당겨 웃는다. 우연이라. 하지만 우연이 우연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인연이 된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 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제 눈에 들어온 것처럼. 네가 선배들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을지. 미유키는 네 물음에 어깨를 으쓱인다.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 학생이니 그러면 안 되는데, 게을러지게 되네요."
학생으로서의 본분이라는 것이 있으니 열심히 하였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떠날 텐데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모범생일지도 모르는 네게 선배로써 나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들까. 미유키는 네 반응을 살핀다. 그리고 너와 이렇게 대화하며 걷다 보면 편의점 앞인지라. 들어가는 문 앞에 선 미유키는 널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는다.
귀 엽 다 여우가 제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고개를 움직인 건지는 몰라도 만약 정말 여우신이 맞다면 신 주제에 꽤 경박한(?) 느낌이다 제 손을 핥아대고 사람 앞에서 배까지 벌렁 까뒤집고 아무튼 미카는 좀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복슬복슬한 배털을 만지작댄다 보들보들
"아까 그 선배는 어디 갔을까?"
한껏 느슨해진 표정으로 여우를 만지다가 문득 궁금해진 듯 혼잣말한다 안경 선배도 여우에 관심이 은근 있어보였는데 아니면 그 선배가 이 여우라던가...? 합리적 의심(?)
알기 쉽지는 않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퍼뜩 고개가 돌아가서 사에를 바라본다. 쓸데없이 엉뚱한 데 보지 말라며 교정당한지 아직 1분도 안 지났는데 말이다. 그러다가도 또 수작 부렸다는 사실을 들켜버리니 고개 돌린 적 없는 척 다시 앞만 보며 시치미를 뗀다. "내 수강생로서의 열의 넘치는 시선을 착각한 게 아닐까?" 알기 쉬운지는 몰라도 단순한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도 변명은 꽤 그럴싸하다. 진작에 편히 앉았던 그는 인사하는 듯한 그 동작을 멀뚱히 바라보다 뒤늦게서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발레도 이런 예절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 금방 끝나 버린 수업이지만 배운 입장인데 저도 따라해야 할까 고민이 짧게 들었다. 하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모양이니 마저 가만히 앉아있기로 한다. 그나저나 두 번밖에 안 되는 짧은 만남 이래 사에가 이렇게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방금 전에도 똑같이 생각하긴 했다─. 이번에도 그는 반짝반짝하던 기세가 왜인지 한풀 꺾여서는, "어어, 글쎄……." 비교적 침착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고개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티를 내었다. 당연한 사실을 갑자기 설명하려면 으레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생각을 안 해 둬서 말이다. 그는 잠시 그러다 답을 내놓았다.
"대충… 살인청부, 사업 비리, 성적조작, 시간이동, 부활, 영생, 뭐 그런 범죄나 일반적으로 금기시 될 일만 아니라면?"
예시를 들어가며 손가락이 차례로 하나씩 접혔다. 설마하니 사에가 예시로 든 것들을 정말로 부탁할까 싶기도 하지만 약관 항목이 괜히 길어진 게 아니니까. 이제는 다시 씩씩함을 되찾은 낯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급하게 덧붙였다.
"……아, 여기서 나가달라거나 저리 가라는 소원은 안 들어줄 거다?"
본인이 평소에 남들 귀찮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족 덧붙이면 오히려 더 초라해 보이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