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려버렸어요. 대화할 때 상대방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평범하게 대화하는 거라면 힘내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쳤다고 확인하면 대화를 하는 것도 많이 버거워요! 눈 맞추는 걸 의식없이 잘 하다가도 의식하게 되는 순간 부끄럽단 생각만 들게 됩니다. 벽 같은 걸 치고 대화하고 싶어져요.
“그럼 잡으라고 왜 말했겠어요? 웃지 마세요.”
민망합니다! 출석부를 잡고서 가는게 이상하단 건 압니다. 하지만 정말로 잡을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옷을 잡으면 주름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직접 손이라던지 손목이라던지 잡아서 끌고가면 우악스럽기만 합니다. 분명 쿠로사와 씨는 이런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하고 웃고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바라볼 수 없습니다. 굳이 쪽팔림을 배로 느끼고 싶지 않아요.........
“맹세도 못 하는데 당연히 못 믿습니다. 거짓말쟁이에요.”
슬쩍 건네었던 출석부를 바라보아 확인합니다. 이쪽은 제가, 저쪽은 쿠로사와 씨이자 니노미야 씨가 쥐고 있어요. 그럼 발을 뗍니다. 쿠로사와 씨 쪽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요. 교무실까지 가는 길이 한 3초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교무실까지 가는 동안 아무 일이 없이 도착해서, B반 출석부를 쿠로사와 씨에게 맡기고 바로 제 반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요.
안녕하세요,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봄기운이 만연해진 날씨에 지금 클로버를 찾는 중입니다. 정확히는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어요. 클로버는 원래 세잎이지만 돌연변이로 네잎짜리 클로버가 있고 행운의 상징으로 유명합니다. 다들 하교하고 조용해진 시간대인데도 학교 뒤쪽 화단에 자리를 잡은 채 바쁜 이유예요. 쭈그려 앉아서 열심히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습니다. 전 네잎 클로버보다 세잎 클로버를 더 좋아하지만요, 특별하게 생각되는 건 네잎 클로버니까요.
‘적어도 다섯 개는.........’
늘 갖고 다니는 수첩을 뒷면부터 펼쳐 놓았어요. 클로버를 찾으면 깨끗한 페이지 사이 사이에 끼워 놓아야 하니까요. 적어도 다섯개, 운이 좋다면 일곱개는 모으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 요즘 운이 나쁜 것 같거든요. 학교에서 했던 이벤트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점수를 모아야 하는 이벤트에서 점수를 모을 수가 없었어요. 운이 나쁘단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폭탄만 몇 번을 보았는지, 겨우 모은 2점이라는 작은 점수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마지막 한 번으로 얻은 점수는 5점이라 상품 교환은 생각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상품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요, 이렇게까지 약올림 당하고 싶진 않잖아요!
‘.........그때 못 쓴 운 지금 쓰게 해주세요.’
어느 신님에게 닿을지 모르는 소원을 빕니다. 클로버의 신이 있으면 좋겠어요. 네잎 클로버가 있는 곳을 바로바로 찾아주시겠죠.
학생회실에 앉아있던 치아키는 모두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임원에게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학생회라고 해서 매번 바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후에야 조금 바빠지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얼마전에 커다란 이벤트도 하나 성공적으로 마친만큼 ㅡ물론 폭탄 세례를 받은 학생들이 항의를 해서 쩔쩔맨 것은 있었다.ㅡ 당장은 학생회도 휴식기였다. 치아키 역시 서류 작업을 마무리짓고 마지막으로 학교를 한바퀴 돌다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학생회실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잠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와중 우연히 그는 학교 뒤에 있는 화단으로 향했다. 하루노하나 마츠리만큼 화려한 꽃은 없겠지만 소소하게 꽃이나 식물을 구경하긴 딱 좋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끔 꽃이 자라나면 그것을 무단으로 꺾거나 훼손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끔은 순찰을 돌 필요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보통 선도부 담당이긴 했으나 가끔은 학생회장인 자신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 이렇게 모범적인 학생회장 없다니까. 스스로 자뻑을 속으로 하면서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어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화단에 쭈그러 앉아서 뭔가를 뒤적이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치아키는 피식 웃었고 정말로 소리없이 살금살금 다가갔다. 물론 약간의 인기척은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살금살금 다가간 그는 그녀의 뒤에서 굵은 목소리를 내면서 놀래키려고 했다.
네개, 혹은 여섯개입니다. 아직 하나 밖에 못 찾았는데 찾을 수 있을까 싶어졌어요. 해가 다 떨어지고서야 집에 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봄기운이 만연하단 건 여름도 곧 찾아온단 뜻이고, 여름은 해가 제일 긴 계절이니까요. 눈을 바로 뜨고 찾아보기로 해요. 눈이 금방 피곤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하고, 봄 햇살이 따뜻하고, 제가 네잎클로버를 찾는 손길에 클로버들끼리 스치는 소리만 들려요. 멀찍이서 부활동을 하는 학생들 소리도 울리는 것 같고, 그리고...
’선생님, 아니, 후배 양이라고 부른다면 선배님일텐데!‘
웬 호통 소리도요.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졌지만요, 쭈그려 앉아있다가 넘어진 거니 단순히 주저앉은 수준입니다. 그래서 아프진 않지만 놀라기는 엄청 놀랐어요! 갑자기 심장이 떨어진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화단을 어지럽혔다니요, 어지럽히진 않았으니까 억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클로버를 하나 꺾었습니다. 훼손이에요. 혼나는 걸까요? 꽃이 아니라고 꺾어도 된다고 생각한게 잘못이었는지도 몰라요. 꽤나 난감해져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해요. 일어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 이놈할 짓 안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해야했는데 이상한 말부터 튀어나가요. 학생회장 선배님이라는 걸 아니까 변명부터 해버린 거에요. 이놈할 짓 안 하기는요, 했는데도요! 꺾인 클로버 하나가 지금 수첩 사이에 있으니까요.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었던 손을 슬쩍 움직여서 수첩으로 향합니다. 들키면 뺏길 지도 몰라요.
주저앉아버리는 하네의 모습에 치아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너무 놀라게 했나? 하지만 크게 넘어지진 않았으니 다치진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며 치아키는 하네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화단 쪽을 바라봤다. 일단 전체적으로 어지럽혀지거나 한 모습은 없었다. 특별히 꺾인 꽃도 없어보이고. 화단을 건들진 않은 것일까. 아니면 건들려고 하는데 자신이 나타난 것일까. 모든 것은 이 후배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치아키는 잡고 일어서라는 듯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글쎄. 하지만 아무리 봐도 후배 양은 쭈그러앉아서 화단을 건드리고 있었는걸.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이놈! 할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히는 나보다는 화단을 관리하는 그런 학생 쪽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꽃을 건들거나 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넘길 확률이 커보이지만 말이야."
다시 한 번 눈으로 화단을 가볍게 훑어낸 치아키는 별로 어지럽혀진 부분은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연히 그럼 이 후배는 쭈그러앉아서 뭘 하고 있었나?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물어볼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그녀를 바라보며, 정확히는 수첩으로 손을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말이야. 후배 양은 지금 뭘 하고 있어? 말하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걸렸으니 그냥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찌되었건 학생회장이니 말이야. 적어도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거든. 나도."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뻔뻔하게 웃어보이면서 치아키는 슬며시 수첩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단. 그리고 수첩. 이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점수 얻기에 그리도 혈안이 되었던 것이 무색하게, 이벤트가 끝난 이후 그는 그 일들을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도 어슬렁거리며 심심풀이할 일을 찾던 중 지나가던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뒤늦게 상품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상품을 교환하러 가는 길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몇 점이더라. 261점? 아, 아깝다. 50점 한 번만 더 나왔으면 300점인데. 가미즈나랜드에 특별한 미련까지는 없지만 딱 애매하게 못 얻으니까 무척이나 신경쓰인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끝난 일이니 결과를 바꿀 수도 없고. 탐나는 것도 없으니 별 수 없이 적당한 것들로 고르기로 했다.
초월자는 태연하게 가면을 쓰고 다시 유쾌한 연극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순간 멸망할 미물에 불과하니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면 대신 유리로 된 엉성한 탈을 쥐고서 가까스로 얼굴에 가져다 댈 뿐이다. 미야나기는 온 힘을 쥐어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안을 꾸며냈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마 라틴어였던 것 같다. 그 말마따나 이 땅 위의 발 닿는 도처마다 압도적 권능의 흔적은 지긋지긋하리만치 깊숙이 남아있었다. 신이라면 아주 이골이 난다! 평생을 그 전능한 존재에게 매달려 강박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진짜 졸업만 하면 이 나라 당장 떠서 절대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안 돌아올 거야 두고 봐라 젠장······. 그나마 신은 살벌했던 태도를 감춰 넣어두고, 이제 죽은 새를 손바닥 위에 올리는 양 조심스레 굴었으니 바짝 올라간 어깨에 힘이 빠졌다. 긴장을 풀라는 말에도 열심히 고개를 여럿 끄덕인다. ······과연 그게 참은 거라면 실성은 대체 어떻다는 건지 두렵기는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가슴을 짓눌러 목 죄던 위압감도 안개 걷히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다음 짧게 부서지는 손벽. 초월자는 다시 완연한 인간을 흉내내고 있었다.
“지, 질문······. 네, 네! 질문이요. 어, 그러니까. 그게.”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이 신님을 무사히 모셔다드리고 얼른 사라져버리고 싶다! ‘하느님을 만나면 어떤 걸 물어볼 거야?‘ 하는 의미 없는 논쟁도 까맣게 잊어 기억나지 않는다. 왜 하필 자신에게 친히 본모습을 드러냈냐는 의문? ······알고 싶지 않은 섬뜩한 대답을 들어버릴까 봐 불안하다. 질문 대신 신에게 빌 소원에 대한 되도 않는 토론의 답변—소원 백 개 들어주세요—밖에 생각 안 나니 환장할 노릇이다. 하지만 이 이상 질문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눈까지 뭇별처럼 반짝여대며 기대하는데 부응하지 않으면 죽을 거다! 그녀는 억지로 질문을 하나 생각한다.
“신께 미움받은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간신히 떠올려낸 것 치고 매우 실용적인 질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뒷산에 검은 여우가 나타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참이었으니까. 어. 근데 이제 미움 산 신이 둘이 됐네. 맙소사. 미야나기는 일순 죽고 싶어진다.
손입니다. 손이 제 앞에 내밀어져 있어요. 잠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 하고 깜빡거리며 손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달아요. 제가 지금 넘어져있기는 하니까 아마도 잡고 일어나라고 내밀어주신 것 같습니다. 화단을 어지럽히고 있단 오해만 안 받았으면 바로 이해했을 거에요. 꺾은 꽃이라던지 클로버를 내놓으라는 줄로만 알았다고요. 하지만 이해했어도요, 방금까지 클로버를 찾겠다고 화단을 뒤적거리고 있던 손입니다. 깨끗할 리가 없어요. 넘어지면서 바닥도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잡지 못 합니다.
“더러워요. 안 됩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아예 엉망진창인 손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겸사 다른 손은 수첩을 쥐었어요. 네잎 클로버가 떨어지지 않게 잘 쥡니다. 가방에 넣어야 해요. 가방을 계속 메고 있을 걸 그랬습니다. 자연스럽게 수첩을 가방에 넣고, 가방을 둘러멘 다음에 자리를 비키면 완벽해요. 가방 쪽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권력남용.”
별 거 아니란 듯이 넘길 확률이 클 것 같다고 얘기해주셔서 안심했는데, 아니었어요. 무얼 하고 있는 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알려주면 혼날 것 같은데, 수첩도 이미 들켰어요! 수첩까지 통째로 빼앗기면 안 됩니다. 클로버 스티커들이 이 수첩에 있는걸요! 수첩을 더 꼬옥 쥡니다. 혼자서, 스스로, 칭찬 스티커를 모으고 있단 걸 들키면 정말 학교에 다닐 수 없어요.
“...........................QR 코드 찾고 있었어요.”
이벤트가 끝난 건 압니다. 하지만 변명이 마뜩찮았어요. 수첩은, 점수 계산용이었던 걸로 합니다. ...학생회장 선배님을 바라볼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