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 특히나 수학 시간은 너무 지루한 것 같아. 국어나 영어 시간은 글 읽는 재미라도 있는데..."
사야카는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안즈는 아랑곳 않고 조잘거렸다. 저 대답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증명 아니겠나! 안즈에게는 사야카의 태도가 어떻든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특히 수학쌤은 재미없는 것 같단 말야... 정말 수업만 딱 하시잖아! 다른 선생님들은 재밌는 이야기도 좀 하고 하시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졸릴 수밖에 없는 거라구! 당당하게 말한다. 실로 엄청난 자기합리화다. 하여튼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 말하려던 안즈는 무언가를 보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헉, 필기 진짜 잘했다...!"
그래, 사야카의 교과서다. 안즈는 사야카의 필기와 자신의 것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5교시 수학 시간에 저렇게나 필기를 잘 할 수 있지? 5교시 수업은 자라고 있는 게 아니었단 말야? 아니, 원래 저게 맞는 거긴 하지만... 복잡한 얼굴을 하던 안즈는 결국 한탄과 감탄을 동시에 내뱉었다.
당신의 말에 여학생은 약간 놀란 듯 보였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헉, 큰일이겠다! 지갑에는 중요한 게 많이 들어있잖아...!!"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기억을 되새겨보자. 내가 지나온 길에서 지갑을 봤나? 못 본 것 같은데? 어떤 분실물이라도 봤다면 주워서 교무실이나 분실물 센터에 가져갔을 텐데, 최근에는 그런 적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갑이라곤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미안해진 안즈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안 만지겠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와타누키 씨의 손이 어디있는지 확인하려고 시선을 살짝 돌렸습니다. 다행히 얼굴로 올라가지 않았어요. 근데 무릎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습니다. 얼굴로 손을 올리고 싶어서, 상처를 만지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손을 못 쓰게 하면 나을지도 모릅니다. 와타누키 씨 손 위에 제 손을 올려서 덮으려고 합니다. 손이 두배 정도만 크면 아예 덮어서 다 가릴 수 있었을텐데요. 잡는게 아니라 덮는 정도는 실례가 아닐 거라고 믿어요. 뿌리치기 더 쉬우니까요, 그리고 아까처럼 손에 힘을 줄 생각도 없으니까요.
“만지고 싶어도 안 됩니다. 안 만진다고 했잖아요. 거짓말쟁이 바보 할 거에요?”
티 났는 지가 의문인 듯한 와타누키 씨의 목소리에 조금, 아니에요. 많이 당황했습니다. 티나지 않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걸까요? 당황해서 와타누키 씨를 바라보았다가, 실례라고 생각해서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와타누키 씨는 절대로 거짓말쟁이 바보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 거에요. 거짓말을 이렇게 못하는데요, 거짓말쟁이 바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애초에 바보는 아니고요.
“네. 속으면 바보고 속아주면 착한 거겠죠.”
다른 학교 애‘들’ 입니다. 적어도 두명 이상이요. 여러 명이서 한 명한테 시비 걸고서 싸웠다는 말이 됩니다. 너무합니다. 어쩌다가, 저번처럼 집에 안 들어가고서 있다가 시비가 걸린 건지, 무시한다거나 도망치면 안 됐냐든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지만 아마도 제일 중요한 건 이거일 거에요.
“...다른 곳은 안 다쳤어요?”
반창고를 붙일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상처만 상처는 아니니까요. 상처가 생길 수 있는 곳은 너무 많습니다. 정말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있을 수도 있고요.
문득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그녀는 잠깐 걸음을 멈춘 채 입가를 만지작대며 다시 기억 속에 잠겼다. “······아무도. 제가 알기로는.” 태어나 첫 숨 삼킬 적부터 금기를 강요받았다지만 정작 불미스러웠던 때 한 번 없었다는 건 어색하다. 용케 눈에 띌 만한 짓을 안 해서 무탈했다며 막연히 받아들였었는데. 곧이곧대로 순응할 뿐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제 와 어설피 걸리는 부스럼을 뒤돌아 살폈다. 어스레한 불빛 탓에 자꾸 길어지는 그림자를 발치에 두고 그녀는 골똘했다.
“멋대로 사람의 잣대를 들이미는 건 편협하죠.”
자신을 중점에 두고 상대적인 만물을 판단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또 있을까? 차라리 인간 아님을 앎으로써 쉽사리 타협할 수 있게 된 부분도 있다. 어울리지 않게 놀라는 모습을 보니 제 사고가 남달리 유연한 편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조언을 구할 호의에 가까운 기회까지 돌아왔으나, 막상 그녀는 선뜻 결단하지 못해 오래 망설여야 했다.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선택이 마냥 간단하지는 않았다. 고작 조언 듣는 데 결심까지 갈 문제인가 싶어 한심스러워도,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의식을 스스로 숨기고 죽여야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고개 젓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번져있었던 것 같다.
“아직은. 하지만 먼저 말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과 별개로 호명을 편하게 하라는 요구는 곤란했다. 무턱대고 야자 까라고 해봤자 어디 그게 쉽게 되나! 오십 살 손위만 넘어가도 아저씨는커녕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에는 달리 부를 말도 없으니 난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나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들자 등 뒤로 마른땀이 삐질삐질 맺혔다.
“그, 그게, 저 진짜로 천육백 살이실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해서! ······죄송해요.”
새하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바르작댔다. 아니, 그렇지만 겨우 저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정체를 밝히다니······. 너무 대책이 없어서 미야나기는 기가 막혔다. 독보적으로 비범스러운 게 아무래도 저 정도는 돼야 신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어쨌든 제 입으로 청소년이 아니라면 똑똑히 사과하겠다 말했으니 뱉은 말을 지켜야 할 테다. 결국 복학도 입학 유예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불경해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다! “말 안 해요.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말했다가는 사회적 평판을 잃을 거야. 뒷말은 식도 너머로 몰래 가라앉혔다.
“······아. 이 나라 개념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건 역시 다른 곳에서 오신 건가요?“
지금까지 던진 질문 중 가장 순수하게 호기심만 담아 물었다. 귀신은 물을 못 건넌다고 했는데. 물론 남의 동네 신이 뜬금없이 본인 동네—그것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 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백이나 이백도 아닌 사백이라면 어지간한 왕조의 역사와도 견줄 수 있는 오랜 시간이다. 그만한 과거의 일이 지금껏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현재의 후손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는 탓이라 짐작했기에 세습된 연좌를 기본으로 삼긴 했다만, 달리 생각한다면 여러 가짓수가 나올 수도 있겠다.이미 보복은 당시에 이루어졌으나 그 업이 자신들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한 일가가 지레 몸을 사린 결과 금기로 굳어져 지금껏 내려오는 경우일 수도 있겠고…… 선대의 잘못을 먼 훗날에 한꺼번에 이자 쳐 받아가겠다 하여 언제까지고 막연히 불안에 떨도록 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능성은 적지만 처음부터 벌 따윈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비량과는 달리 무척이나 너그럽고 아량 있는 신들도 더러 있으니 없을 법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 나도 모르겠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더 짐작할 만한 게 없네." 눈으로 보고 머리를 굴려 대었다지만 단편적인 정보 몇 가지만 주어진 상황에서는 불확실한 추리나 던져대고 말 수밖에 없다. 막혀버린 이상 더 흥미진진하게 들을 생각 없어졌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한 마디만 하자면 정명이 어느 곳으로 향하든 너는 네 하고 싶은 대로, 네 믿음 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개인적이고 사소한 감상이니까 새겨듣기까진 말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뿐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의 끝이 반드시 지복을 향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운명과 미래란 본디 무지함으로서 바로서는 개념이니 '미움'의 실체가 어느 쪽이든, 섣불리 엿들은 운명의 피상만을 쥐고 달려버리는 것보다야 이 편이 보다 현명할 수도 있겠지. 이야기가 끝났으니 그보다는 앞선 주제를 다시 꺼내와 화제를 슬쩍 돌린다.
"그래도 내 성격이 신의 보편적인 성향까지는 아니거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롭고 위엄 있기보단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신도 많아. …어쩌면 학교에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몇 명이라 치고 말 게 아니라 이미 반에 한둘씩 섞여 있을 정도로 상당히 많다! 당장 '린'이 속한 학급만 해도 그렇다. 사실에 가깝도록 말해주진 않은 것은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그새를 못 참고 스리슬쩍 다시 고개를 든 탓이다. "뭐, 그게 당연한 거니까 신경 안 써. 술 취했는데 게다가 이 얼굴이면 당연히 헛소리로 듣고도 남지." …거기에 더해 사실은 그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발언에 대한 보복이라 치기로 하자. 사에의 물음에, 이번에도 또 기다려 왔던 질문이다! 어쩐지 설명하면서 으스대는 듯한 행동거지도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뻔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자, 머리에 세계지도 떠올려 보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열도 바로 왼쪽 옆나라에서 왔어. 이 동네에 아는 친구도 있고,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보니까."
상처가 있는데 제가 못 보고 손을 올려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신경이 쓰이니까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움찔거린 건 놀라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파서였던 건가봐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싸운다고 하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 건 주먹질일테니까요, 그만큼 다치기 쉬운 것도 손이였텐데요. 알았다는 답을 들었고, 와타누키 씨도 이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니까 얼른 손을 떼기로 합니다. 상처가 있으면 큰일이에요. 덧나면 안 된다고 해놓고 제가 덧나게 만들어버릴 지도 몰라요.
“그게 뭐예요. 갓난아기도 자기 아픈 곳은 압니다.”
아니면 상처들이 생긴지 얼마 안 돼서 미처 살펴볼 틈이 없었던 걸까요? 얼굴은 길거리 유리창에 비추어만 보아도 상처들이 어디있는지 바로 보이니까요. 그래도 반창고나 거즈가 붙었다는 건 적어도 보건실에는 갔다왔을 거라고 믿습니다. 소독도 안 하고 약도 안 바르고 거즈랑 반창고만 붙여서 상처만 감춘 거라면 절대 안 돼요.
“이기지도 못하는데 왜 싸워요?”
그 다른 학교 학생들이 무슨 시비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무시할 수 있다면 무시하고 피하는 편이 낫습니다. 다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