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자신의 다소 무덤덤한 반응에도 익숙한듯 대응해주는 것은 분명 호재일 것이다. 여우신의 신통력으로 의중을 알아채는 것인지, 아니면 신에게 전달받은 진실을 고하는 종교인의 자세인 자신의 성향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전해지는 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과 메뚜기 구이, 튀김따위의 것을 동일선상에 묶는 것은 역시 괴짜처럼 여겨질만도 했는지 쿡쿡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그것에 반응하듯 휘둥그레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당혹보단 의문같은 가볍디 가벼운 수준이었을까?
하지만 본가쪽의 평상시 분위기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을 어귀 어딘가에선 도망다니는 메뚜기들을 잔뜩 잡아 히히덕거리며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즉석꼬치를 해먹는 코흘리개 아이들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그들만의 단순한 스포츠던, 정말 소박한 시골생활을 단적으로 즐기는 유희던간에.
"음... 말씀대로, 아직은 이르겠지요. 청춘이 소녀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여 저 또한 그리한줄 알았거늘, 어쩌면 그런 마음이 과하여서 조바심마저 든 것은 아닐지..."
그런 진심어린 농담을 하나 알고 있다. '첫 학교생활: 친구 100명 사귀기!'라던가? 세계일주급의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겠지만 꿈은 크게 가지라 했다. 제 섬기는 이도 현재에 감사하며 만족하되 미래는 보다 넖게 보는 것이라 일러주었지만...
어설프게 토끼를 흉내내듯 빚어진 외관의 아이스크림은 어느덧 작달만한 귀 한쌍을 모두 내어주고서 뽀얀 얼음층을 지나 산뜻한 과일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겉과 동일하면서도 언뜻 다른 색상을 속에 품는 간식류는 꽤 좋아하는 기호식품군이었다.
"그리 말씀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요."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호기롭게 친우를 거론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이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벅참이 다시금 아로새겨지는 기분이었다.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으나,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학교와 집을 오갔던 과거와 다르게, 비록 상대방은 제 섬기는 이와도 깊게 안면이 트인 관련인이라지만 공은 공, 사는 사였다.
그렇기에 이에 맞닿아 바스라졌던 아이스크림만큼 쪼개어져 푸스스 흩어지는 웃음이 가느다랗게 변한 시선과 함께했다.
"말씀대로, 어쩌면 친우란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닐테지요.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것을 모토로 삼는 결속, 비로소 깨닫는 타인과 자신의 유대감..."
미약하게나마 긴장감을 품고 있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역할도 거리낌없이 해낼수 있겠지만...
"그렇군요...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아무튼 '한식'스러운 것도 끌리더군요."
말은 생각나는게 없다 해도 본능은 솔직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이런 모순을 보면 가끔 신의 위용을 두른대도 자신 또한 천상 인간인게 확실할테지.
동지, 그래. 당신 역시도 자신과 비슷한 분량의 피로를 가지고, 비슷한 이유로 이 장소를 찾아왔을 것이라는 건 피곤해 보이는 당신의 모습과 하는 말로 확인 할 수 있었다. 눈가의 눈물 한 방울 살며시 닦아내며, 당신을 바라보던 미유키는 이어지는 행동에 조금 당황하면서, 얼떨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바닥을 구르는 이 신님의 여유로운 태도를 두고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있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인다. 제 본래 바라던 것과는 달랐지만 아예 자리를 뜨라고는 하지 못할 성정이기도 하니 미유키는 자신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 준 것으로 만족했다. 또 제 자리라 적어 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같은 피곤한 이에게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미유키는 그가 내준 자리로 천천히 다가가 조용히 몸을 굽히며 누웠을까. 등을 보이며 누워보는 듯하다가는, 불편한 것인지 잔디밭에 등을 붙이고 누워 나뭇잎을 통하며 스며드는 연초록 흐린 빛을 올려다본다. 그렇깊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다, 당신의 물음에 당신을 향하여 모로 눕고서, 그 감았던 눈꺼풀을 밀어 올리니. 무표정하게 노란색 눈동자가 빤히 당신을 응시한다.
탈리스만을 도둑맞은 바유는 끝내 물의 님프를 용서했을까? 구세프마저 미처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다 쓰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이라고 어디 신의 뜻을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녀보다야 영겁을 사는 이 고대의 존재가 더 잘 알 테였다. 단 두 마디 흘린 모호한 말로 곧장 답까지 이끌어내는 걸 보면 세월을 결코 허투루 보낸 건 아니다! 정곡을 찔린 미야나기가 어항 속에 빠뜨린 금붕어같이 뻐끔거렸다. “······400년 전이라고 했어요.” 제 일을 흥미 위주로 캐내는 건 진즉이 뻔했지만 아랑곳 않았다. 본디 인간이라는 게 신에게 있어서는 고작 파적거리일 뿐이니 응당한 일이다. 문득 어두운 가운데 한 줌 웃음기 없는 눈동자가 짧게 그녀를 훑었다. 어색하게 다른 곳으로 눈알을 굴리며 신경쓰지 않는 척했지만, 발끝까지 매섭게 내리꽂히는 푸른 시선에 흠칫 손등에 입술을 묻고 숨죽여야 했다. 다행히 찰나 만에 다시 연기처럼 훅 흩어졌지만. 그녀는 작게 한숨쉬었다.
“나쁘지 않았어요.”
5분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한 주제에 잘도 고개 저으며 나불댔다. 그도 그럴 게, 미야나기가 그를 나쁘게 평가했던 건 이제 와서 전부 의미 없게 됐지 않나. 청소년의 음주? 청소년이 아니다. 허세? 일말의 허세도 없었다. 기묘한 웃음? 인간 기준으로 공포스럽다뿐이지 악한 행동은 아니다! 단순히 이롭다고만 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은 남아있었으나 최소한 해치려 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럭저럭 침착해진 듯했다.
“사, 사에. 사에라고 불려요.”
기습적으로 질문 받은 탓에 무심코 뱉어 금세 후회했다. 자고로 신적인 존재에게 이름을 넘긴 인간 치고 인생이 잘 풀린 사례—희곡을 참 많이 읽었다—는 어디에도 없다. 하다못해 악마조차 신부에게 진명을 들켜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물론 통계적—희곡에서 말이다—으로 봤을 때 비인간과 엮여 잘 된 인간 자체가 영 드물기는 했다. 근데 내가 엮여버렸네. 맙소사······. 그러나 황송하게도 상대의 이름을 먼저 받아들었으니 예상 외로 과분한 대우다. 멍청해 보이기 딱 좋은 어설픈 발성으로 신의 이름을 입속에 감히 굴렸다. “아, 네애. 네, 비량 님.” 곧이어 미야나기가 약간 머뭇대며 넌지시 물었다.
“근데, 저······ 원래 이렇게······ 모습을 아무한테나 잘 보여주세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나요.“
처음, 질문을 기꺼이 허락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의문을 그제서야 던진다. 신이라는 게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도 대뜸 정체 전격 공개를 할 수 있는 거였던가. 그랬다면 예수는 이미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나돌아다녀야 했다.
청춘이 소녀를 두근거리게 한다라, 그러니까 그 뜻은 새롭게 시작한 고등학교 생활 때문에 들뜨고 긴장했다는 뜻이려나? 이런저런 말들을 고풍스러운 말투로 포장하더라도 그럼에도 고등학생인 것이었다. 토아의 이런 말투는 이나바 님의 옆에서, 신사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얻은 애늙은이 같은 말투일까.
게다가 친구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저 단어들도 얼마나 고풍스러운지. 오히려 케이보다 눈 앞에 있는 소녀가 더 신스러운 말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한 괴리가 조금 웃기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어지는 '한식'스러운 것이라는 건 케이도 차마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 몇 번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미소를 지어 감췄다.
"그래요. 내가 알고 있는 한식 전문점이 하나 있으니까. 다음에 같이 가볼까요?"
어느새 작은 아이스크림은 입 안으로 다 사라졌고, 케이는 토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미는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토아가 영 감을 잡지 못하면 웃으면서 작게 "휴대폰, 연락처 찍어줄게요." 하고 답을 알려주었을 것이었다.
바닥에 등 대고 올려다 보는 잎들이 이제는 제법 무성하게 자라 푸릇하다.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하게 밝으니 몸으로는 선기 느껴지건만 지금이 여름인가 하는 착각이 공연히 들어 온다. 아, 늦봄에도 이러는 판인데 여름에는 어찌 버틸까 싶다. 막상 그때가 온다면 어련히 잘 적응하겠거니 생각하기야 하는데……. 사람이나 신이나 몸 불편할 때 투정이 많아지는 것은 꼭 같다. 조금쯤 푸념 섞인 잡념이 이리저리 머릿속을 떠돌다 픽 사그라진다. 뭐 어쩌겠나. 걱정 반 흥미 반의 마음으로 그 부탁 받겠다고 즉답한 건 본인이고, 몇십 분만 지나면 그는 자신이 이런 신세타령하던 것 싹 잊어버리고 또 희희낙락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기분 상하기보다는 시시껄렁한 쇄담에나 열중하기로 한다. 그는 바닥에 착 붙어 있던 머리 들어올리고 옆을 보며 싱글싱글 웃는다.
"대충 그런 셈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그것과도 다소 다르다지만, 본인도 설명하기 귀찮을 때는 그렇게 퉁치는 편이다. 애당초 무어라고 분명하게 정의 내리지 못할 것들을 뭉뚱그려 모아놓은 것이 비량이니 그리 퉁치는 게 틀린 소리 아니기도 하고. 이야기는 어쩌저찌 수수께끼 알아맞히기처럼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꽤나 친절한 출제자인 모양이라, 그는 어렵지 않게 답을 도출할 수 있었다.
"아하, 부엉이?"
이어서 그는 다시금 몸 반 바퀴 굴려서 엎드리고는 팔로 상체만 얼핏 세운다. 피곤하다 하면서도 피로보다는 무료한 것을 더욱 싫어하는 신인 탓이다. 하니 그는 이러고 있더라도 괜찮겠지만 상대방은 어떨지 모르겠다.
"학교 다니려면 피곤할 텐데 너는 여기에 왜 왔어? 아, 내가 왜 왔는지는 이번에는 말 안 해 줄 거야. 너도 맞혀 봐."
꼭 다섯장, 혹은 일곱장을 찾는 이유가 있어요. 선물하려고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잎클로버를 찾아서 선물해도, 이런 풀같은 걸 선물이라고 하냐고 생각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대뜸 이유없는 선물을 주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세잎클로버가 더 좋습니다. 꽃도 하얀 클로버보단 붉은 클로버가 더 좋고요. 그렇다고 네잎클로버가 싫은 건 아니에요. 좋아함의 경중을 따지자면 세잎클로버가 좀 더 무겁다는 것 뿐입니다. 손바닥에 놓여있는 네잎클로버들을 보면 입꼬리가 간질거려서 힘을 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표정이 풀려버려요. 입술을 꼭 물어야 웃지 않을 수 있어요. 또 웃어버리기 전에 수첩에 클로버들을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소원은 신한테 비세요. 그리고 저 바보 아닙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졌습니다. 눈을 계속 피하지 않으려고 해봤는데 결국 피하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소원권을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 저한테 소원을 빌만한 게 있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다른 데에 재능이 있지도 않고, 평범하기만 합니다. 상품이라고 하면 무언가 혜택이 될만해야 하는데, 제가 무엇이든 빌 수 있는 소원권은 스티거 777장만큼의 가치가 아닌 것 같아요. 학생회라면야 학교에서 권력이 있는 거니 다릅니다. 급식을 제일 먼저 먹을 수도 있을 거에요. 쪽지 시험을 망쳐도 보충 수업을 안 듣게 해달라고 하면 그것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전 그런걸 해드릴 수 없어요. 1000장을 모아도요. 애초에 같은 스티커를 구해서 붙인 후에 찾아오면요, 제가 주지 않았단 걸 당연히 아니까 들어주지도 않을 겁니다.
“찾았어요.”
두개나 찾았습니다! 두개만 더 찾으면 일곱장이에요. 기분이 들뜬 티를 내지 않게 조심하는데 뭔가, 목소리도 표정도 풀린 것 같아요. 풀리지 않게 힘주고 있는데도요. 아까처럼 또 눈을 맞추려고 하면 숨어버릴 거에요. 제가 아니라 클로버를 보게, 찾아낸 네잎클로버 두개를 내밀어 보여드립니다. 그래도 학교를 둘러본다고 하시니까요, 아마 가시려는 것 같아요. 학생회장은 역시 바빠보입니다. 인사를 하는게 맞는 것 같아서 허리 숙여서 꾸벅 인사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쭈그려 앉아있는 중이라서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어색하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었어요. 엄청 짧게, 순간이요.
제 아무리 신직가문이라 하더라도 특유의 성격 탓에 진중할지언정 모나지 않다 단언할 수는 없었던 자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섬기는 이의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시련, 그로 인해 빚어지는 해프닝, 사적이며 지극히 가정적인 가족들과의 생활 외에 공적인 신사의 생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은 자신을 올곧은 아이로 성장하게는 했으나 그 외의 것들은 고향의 성향이 그러하듯 어딘가 한발 늦고 부족함이 있었으며 독단적인 돌파구를 찾아나섰기에 그 해결법 또한 완벽하다곤 할수 없었다.
그런 어딘가 모자란 부분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도 온전한 성장을 이룩하고자 찾아온 가미즈나 마을이라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변화가 되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길에 불만을 품지 않고 도리어 담대하게 나아갔던만큼 쉽게 주저앉을 생각 또한 없었단 것일까?
"아, 알고 계시는군요? 물론 의심이라던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답니다. ...조금은 의외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든 생각이지만 설마 어폐가 되는 부분이 있던건 아닐지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이웃나라라곤 하지만 본능이 추구할 정도로 그쪽에 호기심을 가지는 경우는 아마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그 수가 적긴 하겠지.
"그저 길을 일러주신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할진대... 동행하겠노라 하신다면 신을 섬기는 이로써 어찌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나름 진지해졌다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투를 뒤늦게 눈치챈지라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이미 무표정이라 가릴 것도 없는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오늘은 실언이 너무 잦은 것 같군요. 재회의 즐거움이 지나쳤던 나머지 추태를 보인 것은 아닐지 걱정이네요... 분명 주신님도 뒹굴며 꽁무니 빠지게 웃으시겠지요."
비록 상대방이 아무렇지 않다 여겨도, 예를 중시하는 자신에겐 적잖이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표정은 미묘하다는 점이 유머러스한 부분일까,
"아, 연락처인가요? 그럼 사양않고..."
처음엔 손을 내미는 그의 행동이 친구라는 의미에서, 혹은 호의를 내비치는 부분에서 행하는 악수를 생각했지만 본능처럼 손을 뻗기 전에 다행히도 휴대폰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가 있었다. 한번 정했다면 그 행동만큼은 빨랐기에 뒤적거릴 새도 없이 품에서, 그러면서도 공손하고 부드럽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하기사, 이게 '평범한' 교우관계일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책에 쓰여진 것에만 익숙해진 자신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놓여진 일상이란건 그렇게 딱딱한게 아닐텐데 말이다.
걸음은 꾸준히 이어졌음에도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 대화가 퍽 즐거웠던 비량이 장난을 친 탓인지, 그저 집이 멀리 있기에 갈 길이 많이 남은 것인지 분간하기엔 가로등 빛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그 정도면 대단한 전통인걸. 실제로 누가 화를 입은 적은 있어?" 그런 와중에도 재잘대는 그의 모습은 어둑한 데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니 기묘한 일이다.
"그걸 그렇게 평가하다니 신기하네. 신들 중에서도 내 성격 싫어하는 녀석들 많은데, 너한테 좋은 소리 듣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이 말은 껍데기만 요란한 공언이 아닌 진심이었다. 눈 동그랗게 뜨고는 의아하고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쉴새 없다시피 대답 빨리 하며 화제도 휙휙 꺼내오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그도 그럴 게, 그와 비슷한 부류가 아니고서야 가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좋아하거나 이해할 사람 없는 것이 당연했다. 어울린 시간이 길다면 경계를 풀기도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그가 그럭저럭 말 통하는 작자인 척하고자 구색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에의 반응은 단지 그를 종의 차이로서 쉽게 납득한 까닭일 수도 있겠다만……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게다가 무서워하는 면전에 대고 몇 번이나 웃어대는 모습 보았음에도 이런 말 하는 인물은 굉장히 드문 터라.
"기특하니까 하나 말해줄까. 네 업보에 관한 조언, 필요해? 알아서 오히려 좋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과한 참견 맞으니까 안 듣고 싶다면 거절해도 돼."
고개가 기울어지며 물어 오는 목소리가 은근하다. 만면에는 그린 듯이 가지런하고 서글서글한 미소가 서려 있다. 돼먹지 못한 귀신이 남의 불행을 재미 삼아 머리 굴려대는 이 상황은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이 신은 자기가 즐겁거나 재미있기만 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나 선물 퍼다 주는 성격이기에, 어쩌면 저 좋을대로 나불대는 말 중에 쓸모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말 하고서는 간만에 드문 소리 들었다는 양 웃음소리 크게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 정도로 존칭 안 해 줘도 돼! 날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는 애도 있는데 뭘. 대충 편한대로 불러." 원래 편하게 대하란다고 곧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 얼마 없다지만 그 사실을 신경쓰기엔 그의 관심은 이미 너무 먼 곳으로 떠나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다려 온 질문들이 2콤보! 그는 단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당당하고 환한 얼굴로 즉답했다.
"취해서 이미 할 말 못 할 말 너무 많이 해 버리기도 했고, 네가 천육백 살 맞다는 증거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길래? 내가 좀 유치해서 말이지. 나이에 발끈한 건 거의 진심이었을걸!"
그러고서는 돌연 뭐가 우스운지 저 혼자 깔깔 소리내어 웃는다. 이 양반 아직 술이 아직 덜 깼나……. 갑자기 남의 중대한 비밀 들어버린 쪽 마음고생이 어땠는지도 모르고 혼자서만 태평해서 얄밉다. 그 와중에 본인이 유치하다는 건 용케 알고 있었나 보다. 한참을 웃다가 싱글싱글 웃음기 남은 얼굴로 부연하기도 잊지 않았다.
"아, 물론 다수의 인간에게 밝히지 말 것, 신의 힘을 공공연하게 남용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지 말 것… 정도의 규칙은 있지. 그래도 적은 수라면 얼마든지 알려줘도 돼. 너, 그러니까 사에 양이 비밀 보장만 해 준다면야?"
비밀 보장 운운할 때쯤 되자 또다시 예의 그 뻔뻔하게 아양 부리는 표정이 나온다. 이 도깨비, 알기 쉬워서 도리어 지긋지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