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자면 저쪽이 더 고충 많아 보이는 얼굴이긴 하다만 아무튼. 그는 아직 모를 이야기였으나 몸에 굳어 버린 습성으로 고생깨나 한 상대와는 달리 그는 그간 밤에도 잘 잤다. 가리는 것 없는 단순한 성정이라 그런가, 불면할 적이면 폭음의 힘을 빌린 덕도 있는 것 같고. 여하간 느긋한 태도로 그 역시 상대방을 마주 관찰한다. 생각이라 해도 거창할 것 없이 저와 비슷한 정도라면 저쪽도 키가 참 크구만,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서도.
"아…… 그랬어?"
자신보다 먼저 이 자리를 써 온 쪽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확히는 아주 멀리 가지도 않고 조금 넉넉하게 떨어진 정도로 끝이었으니 내어주었다고 하는 말이 옳겠다. 어차피 나무는 넓으니 조금 옆으로 움직인다 해도 여유는 많았다. 아예 이 자리를 떠 버리라는 소리만 아니라면야 못 들어줄 것도 없고. 이유야 무엇이든 풀밭이 제 집 안방이라도 된다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니 이 신이 채신머리 어찌 보일지에 관해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는 건 분명했다.
"무슨 신이시기에 이 좋은 날에 그리 졸려 보이실까. 나는 밤에 나도는 귀신인데, 너는?"
한쪽 무릎 세우고 그 위에 다른 쪽 다리 턱 얹어 걸쳐둔다. 아, 하품 하는 모습 보자 이쪽도 덩달아 하품이 난다. 그러나 나른한 와중에도 친근한 척 들이대는 행태 어디 가는 것 아니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 촉촉이 매단 채로도, 이리저리 성기게 들뜨고 얽힌 나뭇가지 올려다보며 넌지시 묻는다.
실낱 같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휘청대던 걸음이 잠깐 머뭇거린다. 의미? 여태 그 짧은 단어가 지녔을 무게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금기를 강요당하니 요구대로 순종했을 뿐. 눈썹까지 좁혀가며 고민에 잠김에도 끝내 마땅한 함의를 찾지 못해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염려와는 달리 그녀에게 돌려준 건 뜻밖에도 정상적인 데다 친절한 답변이다. 또한 정석적인 바람에 종교가 없는 작자들—자신을 포함해서—까지 알 만한 답이라 새삼스레 알게 된 건 없었지만. 당연히 명석한 해결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도 아니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나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적당한 대답을 고르기 위해 미야나기는 다시 고민해야 했다.
“······어쩌면 둘 다.“
최선을 다해 심각한 체해도 한편으로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얼마 없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 안간힘 쓰다 말고 곧 자신 없는 투로 목소리를 뚝 떨어뜨렸으니까.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짊은 죄가 있다면 그건 아마 원죄겠죠.” 파편 같은 기억을 횡설수설 엮어 나가던 그녀는 이내 약간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와서 두려워했던 부지의 실체조차 막연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모두가 자신은 무지한 채 남길 바랐으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건 제 몸뚱이뿐이다. 그래서 거울만이 오로지 남겨진 골방에 그토록 오래 틀어박혀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어, 그, 혹시 신님은 어떤 분이신 건지······ 여쭤도 돼요?“
얼굴 위로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큰일이다. 질문을 하긴 했는데 자신도 아는 게 없으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할 말이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잽싸게 다른 질문을 생각해내 바치며 장막을 까맣게 휘둘러버렸다. 물론 정체를 듣고 까무러치지 않게 젖먹던 힘을 다해야 할 테였다. 뭐 카나리아의 신, 꽃사슴 신 같은 거면 좀 괜찮겠으나 역시 그럴 리는 없다······.
어쩌면, 이라는 말은 아무러해도 본인은 잘 모른다는 의미가 내포되지 않았나? 재밌는 말거리 삼지 않겠다 생각은 했다만 결심이라기에도 무엇한 그 다짐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는 마치 추리 게임이라도 하듯 골똘한 표정으로 그럴듯한 답안을 내놓고 있다.
"네가 모른다면 네가 직접 저지른 일은 아니거나, 그것이 죄인지도 몰랐던 때에 저지른 잘못이었거나. 전자라면 네 친지나 친인척, 혹은 선대가 저지른 일이려나?"
봉변 당한 장본인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혈연이나 가까운 인물들의 업에 덩달아 얽혀 연좌를 당하는 일은 꽤나 흔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속한 세상은 아직까지도 구시대적인 풍속이 조금쯤 남아 있기도 하고, 먼 과거의 원한이 지금껏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사례도 적잖이 있다. 무엇보다도, 구시대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원초적이라는 뜻이다. 이 방법이 죄 지은 자에게는 그 어떤 벌보다도 극적인 공포와 사무치는 교훈을 새겨주기에 신벌로서는 가장 확실한 수법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은근하게 남아 있던 미소마저 지워내고 사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빛이 다시금 일렁인다. 육신의 숨통을 꿰뚫고, 나아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 삽시에 꽂히다 사라졌다. 운명이며 팔자, 천수까지 훑었건만, 이렇게 깊이 보았음에도 걸리는 것이 없으니 무시무시한 벌을 받는 중은 아닌 듯한데 말이다. 이런 방면에 특화된 신격은 아니며 벌 내린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도 함부로 확언은 못 하고 의문만 가질 따름이다.
"으음, 이 나라엔 아마 없는 개념이라서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운데, 일단은 수호신이고 복을 부르는 귀신이야. 이래 봬도 꽤 이로운 신이다?"
아, 이 질문 기다려 왔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가위표 만든 손 턱에 척 가져다 대고는 한껏 뿌듯한 낯짝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귀신이라서 아까 본 것처럼 성격이 살짝 나쁘긴 하지만?" 이제 와 무해한 척 포장하기엔 늦다는 사실을 본인도 아는지 솔직한 답 금방 따라붙었지만. 그건 그렇고, 그동안은 주정이나 부린다고 신경쓰지 않았고, 술 깨고서는 다른 이야기 하느라 바빠 중요한 걸 잊고 있지 않았나! 그는 또 짐짓 활달한 소년인 양 명랑한 기색이 되었다. 그놈의 눈빛 참 시도 때도 없이 반짝거렸다 번뜩거렸다 왔다갔다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름을 모르니까 부르기가 곤란하네! 넌 이름이 뭐야?"
이름을 물었을 때는 제 이름도 들려주는 것이 예의인 법. 물어본 직후 곧바로 저 먼저 잽싸게 말문을 연다.
“아, 후배님께 통설명을 안 했군요. 위에서는 키츠, 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하시모토 케이. 호칭은 부르고 싶은 대로 편하게 부르세요.”
케이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정하기 전에 이나바 님을 뵙고 온 것이라 이 후배님도 따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겠거니 싶었다. 이나바 님이 키츠라던가 여우라던가 그런 식으로 불렀다면 지금의 인명이 어색할 수도 있겠거니 싶고. 아니면 그 옛날 만들었던 신명을 이나바 님은 기억하고 있으려나. 아마 아주 오래되어서 잊으셨을지도 모른다.
“이런, 낯선 타지에서 홀로 지낸다니.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저한테 연락해도 괜찮아요. 옛날에 이나바 님께 이런 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런 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저 또한 기꺼울 것 같으니.”
그렇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 때는 왜 그렇게 어렸었는지, 아무리 그래도 백여살 된 어린 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에 와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역시 어리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자신은 어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학생의 겉가죽을 하고 있다보니 조금 더 그러한 환경에 동화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예를 들면 벌레가 나온다거나 전등을 갈아야 한다거나...... 음, 생각해보니 토아 후배님이 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같아서 딱히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군요.”
흐음, 소리를 내며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토아는 똘똘한 인상이라 스스로 척척척 뭐든 잘 해낼 것 같은 인상일까. 이나바 님이 그렇게 아끼는 이유가 있을지도.
“토끼와 청포도... 미스매치인가요?”
어떤 부분이?
여우라서 잘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우와 신포도는 아는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케이는 겉포장지에 토끼가 그려진 청포도맛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냈다. 딱히 토아가 싫어하지 않았다면 이에 대해 계산을 하고 하나를 주었을 것이었고, 질색하는 느낌이었다면 토아가 원하는 다른 아이스크림을 골라 계산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