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끝난 5교시, 더군다나 수학 수업. 정말 졸기 딱 좋은 조건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창문가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 아래 있다 보면 몸도 마음도 노곤해진다. 거기에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어지는, 재미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수식 설명이 더해지면 수면실이 따로 없다. 안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수업을 따라가려 노력하긴 하는지 눈을 감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고는 있다. 하지만 고개가 자꾸만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잘 안되는 모양이다. 필기하려 잡았던 펜은 이제 의미불명인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그때다. 수업 듣기 싫은 학생들의 염원이 닿기라도 했는지 종소리가 학교를 뒤덮는다. 마치 낮잠-좀비 병에서 깨어나는 백신이라는 맞은 양, 학생들은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안즈도 마찬가지다. 비몽사몽인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흔든다. 그제야 정신이 났는지 눈동자가 또렷해진다. 시선은 자연스레 안즈의 책상 위로, 그러니까 교과서로 옮겨갔다.
"으악, 뭐야!! 또 졸면서 필기했잖아...!"
그래, 낙서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뒤덮인 교과서 말이다. 안즈는 머리를 붙잡고 그 의미불명의 글자들을 해독하고자 노려보았으나, 결국 포기하고 책을 덮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떡하겠어! 가벼운 자기합리화가 따라붙는다. 안즈는 허리를 폭 숙여 책상에 볼을 댔다. 눈동자는 제 옆에 앉은 사람을 향한 채다.
"어휴, 진짜 지루했다, 지루했어..."
그렇지 않아? 무언의 질문이 들려오는 것 같다. 안즈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듯 눈을 깜박거린다.
점심시간이다! 학교에 있는 시간 중, 음, 아니다. 정정한다. 학교의 정규 일과 중에서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점심 도시락을 다 해치운 안즈는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딱히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부실에 가서 춤 연습을 해도 좋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운동장을 산책해도 좋을 것 같고? 할 만한 일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데도 아직 못 골랐다는 이야기는, 썩 마음에 들어차는 선택지가 없다는 말도 되겠지. 그런 이유로 안즈는 교내를 떠돌고 있다.
"저기, 혹시 뭐라도 잃어버린 거야?"
그러니 무언가를 찾듯 복도를 떠도는 당신에게 말을 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할 일 없는 사람에게 당신은 꽤 흥미롭게 보였으니까.
위협은 보통 모두가 무방비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켜보는 내내,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을까. 뜬 눈으로 보내던 시간이 오래되며 버릇처럼 굳어 버렸으니 미유키는 인간의 몸으로 있는 지금에도 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시간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누워 보낼 뿐 잠은 거의 자지 못했으며, 잠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깊은 잠은 되지 못했기에, 낮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피로감에 짓눌리고는 했다. 그래서 잠깐 눈을 감으면 그대로 졸아버릴 듯, 달콤한 잠이 유혹할 때마다 미유키는 그 나무 그늘을 찾았다. 햇빛 아래는 따뜻했으나, 쟁글거리는 백색의 빛 무더기 아래에서는 눈을 감아도 빛이 보였기에 잠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조용한 곳에 숨어 잠을 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뒤뜰의 나무 아래는 제 고향이었던 우거진 숲의 키 큰 나무를 떠올리게도 하니, 잠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장소였을까.
"햇빛이, 너무 쨍해서요."
그렇지만 오늘은 다르다. 자신이 누우려던 그 자리에는 먼저 온 다른 이가 누워있다. 그에 미유키는 그를 살피듯 물끄레 바라본다. 몸을 쭉 뻗고 누운 그의 키는 커 보이니. 저와 비슷하거나, 저보다 커 보였을까. 그 점 말고도,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미유키는 자신과 같은 신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며 물음에 답하니 졸린듯한 목소리다.
"그리고 원래, 내 자리기도 하고요."
이어 미유키는 짧게 하품을 내쉬며 말하고서, 졸음에 멍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비킬 건지, 말건지 지켜보는 듯하다.
따지자면 저쪽이 더 고충 많아 보이는 얼굴이긴 하다만 아무튼. 그는 아직 모를 이야기였으나 몸에 굳어 버린 습성으로 고생깨나 한 상대와는 달리 그는 그간 밤에도 잘 잤다. 가리는 것 없는 단순한 성정이라 그런가, 불면할 적이면 폭음의 힘을 빌린 덕도 있는 것 같고. 여하간 느긋한 태도로 그 역시 상대방을 마주 관찰한다. 생각이라 해도 거창할 것 없이 저와 비슷한 정도라면 저쪽도 키가 참 크구만,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서도.
"아…… 그랬어?"
자신보다 먼저 이 자리를 써 온 쪽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는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정확히는 아주 멀리 가지도 않고 조금 넉넉하게 떨어진 정도로 끝이었으니 내어주었다고 하는 말이 옳겠다. 어차피 나무는 넓으니 조금 옆으로 움직인다 해도 여유는 많았다. 아예 이 자리를 떠 버리라는 소리만 아니라면야 못 들어줄 것도 없고. 이유야 무엇이든 풀밭이 제 집 안방이라도 된다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니니 이 신이 채신머리 어찌 보일지에 관해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는 건 분명했다.
"무슨 신이시기에 이 좋은 날에 그리 졸려 보이실까. 나는 밤에 나도는 귀신인데, 너는?"
한쪽 무릎 세우고 그 위에 다른 쪽 다리 턱 얹어 걸쳐둔다. 아, 하품 하는 모습 보자 이쪽도 덩달아 하품이 난다. 그러나 나른한 와중에도 친근한 척 들이대는 행태 어디 가는 것 아니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 촉촉이 매단 채로도, 이리저리 성기게 들뜨고 얽힌 나뭇가지 올려다보며 넌지시 묻는다.
실낱 같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휘청대던 걸음이 잠깐 머뭇거린다. 의미? 여태 그 짧은 단어가 지녔을 무게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금기를 강요당하니 요구대로 순종했을 뿐. 눈썹까지 좁혀가며 고민에 잠김에도 끝내 마땅한 함의를 찾지 못해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염려와는 달리 그녀에게 돌려준 건 뜻밖에도 정상적인 데다 친절한 답변이다. 또한 정석적인 바람에 종교가 없는 작자들—자신을 포함해서—까지 알 만한 답이라 새삼스레 알게 된 건 없었지만. 당연히 명석한 해결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도 아니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나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적당한 대답을 고르기 위해 미야나기는 다시 고민해야 했다.
“······어쩌면 둘 다.“
최선을 다해 심각한 체해도 한편으로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얼마 없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려 안간힘 쓰다 말고 곧 자신 없는 투로 목소리를 뚝 떨어뜨렸으니까.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짊은 죄가 있다면 그건 아마 원죄겠죠.” 파편 같은 기억을 횡설수설 엮어 나가던 그녀는 이내 약간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와서 두려워했던 부지의 실체조차 막연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모두가 자신은 무지한 채 남길 바랐으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건 제 몸뚱이뿐이다. 그래서 거울만이 오로지 남겨진 골방에 그토록 오래 틀어박혀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어, 그, 혹시 신님은 어떤 분이신 건지······ 여쭤도 돼요?“
얼굴 위로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큰일이다. 질문을 하긴 했는데 자신도 아는 게 없으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할 말이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잽싸게 다른 질문을 생각해내 바치며 장막을 까맣게 휘둘러버렸다. 물론 정체를 듣고 까무러치지 않게 젖먹던 힘을 다해야 할 테였다. 뭐 카나리아의 신, 꽃사슴 신 같은 거면 좀 괜찮겠으나 역시 그럴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