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듣느니만 못한 대답이다. 쓸데없는 소리나 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안 묻는 게 나을 뻔했군. 이 숙취해소제 효과가 있긴 한 거 맞아? 이거 완전 사기에 허위 광고 아니야. 사람이 술을 전혀 못 깨고 엉뚱한 말이나 하고 있는데! 미야나기는 황당한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무슨 동방삭이니? 제발 술 좀 깨라. 네가 천육백 살이면 나는 천육백한 살이다.”
천 살도 만 살도 삼천갑자도 아니고 천육백이라는 애매한 숫자는 또 뭐람. 보나마나 열여섯 살일 거다. 대충 제 나이에 성의 없는 0만 두 개 덩그러니 붙였을 게 뻔하다! 사실 이 모호한 숫자야말로 도리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반증이나 다름없을 테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 남자아이와 자신이 동년배라 확신한다. 기껏 준 초콜릿 우유는 이번에도 단숨에 말끔히 비워버렸다. 이렇게 잘 먹는데 이왕이면 홧김에 바리바리 사버린 나머지 자질구레한—아이스크림과 기타 등등— 것들도 좀 다 처리해줬으면 좋겠네······. 마음속 몰래 흉계를 사부작사부작 꾸미던 것을 잘 감추며 대답했다.
”갑자기 누가 엎어져서 죽는다 그러면, 보통은 다 도와주려고 할걸.“
직전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벌벌 떨던 주제에 이제는 뻔뻔하게 잘도 대꾸한다. 그야 그녀가 두려워 마지않던 험상궂은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무슨 강아지라도 된 양 돌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처음부터 도와줄 생각이었으니 저 부담스러운 시선은 그만 거두었으면 한다! 당연히 자신은 여러 의미에서 강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아이는 좀 불량스럽긴 해도 만취했으니 연약하다. 약자는 돕는 것이 강자의 도리인 법······. 하지만 취객의 행동이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니 방심할 수 없다. 마음이 바뀌어 딴소리하기 전에 얼른 등부터 떠밀며 그를 앞장 세우려 했다.
“부탁 안 해도 그러려고 했어. 많이 멀면 태워줄게. ······집이 어디인 줄은 기억하지?”
취한 사람 헛소리 딱 자르는 속 시원한 일갈이었지만, 현재 제정신이 아닌 그에겐 일종의 도전과 같은 발언이었다. 경로당에서도 연령으로 서열을 나누는 유교코리아의 어르신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들렸다. 그는 상대와는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리고 경악 어린 감탄을 했다. 저, 저, 새파랗게 어린,,, 꼬마 녀석이이,,,! 잠들어 있던 그의 꼰대 정신이 눈을 뜨려 한다!
"천육백하나도 나보다는 어려! 그, 무어냐, 나는 한 천육백하고도 몇십 살 쯤 된단 말이다! 난 증거 있는데 너는 있느냐?"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유치원생들도 이렇게는 안 싸울 텐데 이쯤 되면 유치하다 못해 추할 지경이다. 허공에 손가락 하나 척 들고 뭐라뭐라 더 말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어째 무시무시한 분위기보다는 쓸데없는 잔소리나 젊었을 적 얘기만 지겹게 해 대는 꼰대 같기만 하다. 한 귀로 듣고 흘려도 되겠다. 그러다가도 집 위치를 묻자 곧바로 우쭐해서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내 아무리 취생처럼 보인대도 그렇지 집까지 모를 멍텅구리로 보이느냐? 기억하고말고! 거어, 주소도 불러주랴? 경북 경주시 OO구…… 어. 젠장."
취해서도 술술 불 정도로 당연하게 기억하는 주소는 한국에 있었던 집 주소 뿐이다. 일본 주소는 아직 그 정도로 입에 붙지가 않았다. "헤헤." 집도 모르는 멍텅구리는 바보처럼 웃다 황급히 덧붙였다.
"오해는 금물이야! 주소는 몰라도 가는 알아!"
그는 사에가 무슨 말 하기도 전에 펄쩍 뛰면서 우다닥 앞서서 뛰어가려 들었다. 걸어다닐 때도 발 꼬여서 넘어졌던 양반이 조심성도 없다.
그림자 하나가 교정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눕는다. 학교에 더이상 볼 일이 없어진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림자 밟아가며 집으로 향하는데 한 사람만 물끄러미 그 뒷모습만 바라보다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뜬다. 물고기 뻐끔거리는 어항을 뒤로하고 작게 꾸며져있는 정원 하나 거치면 학교 뒤편에 외진 자리가 하나 난다. 짐승의 냄새가 난다며 찾아오는 이 흔치 않은 곳인데 오늘은 다른날과 달리 손님이 하나 있다. 짧지 않은 붉은 머리, 고개를 푹 숙이자 얼굴을 다 가린다. 시선의 끝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이 주변에 볼만한 것이 우리 안에 토끼 뿐이기 때문이다.
"저기요ㅡ 여기 토끼는 학교 소유라 잡아먹으면 큰일나요."
예의 없이 인기척 없이 다가간 것은 놈의 짓궂은 장난일까. 혹여나 뒤 돌면 앳된 얼굴의 신이 목소리만큼이나 성큼 다가와 한걸음 차이 두고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