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아쉬운건지, 아니면 아쉬운척 하는 것인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치아키는 반쯤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어 계피사탕을 다시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으면서 그는 자신이 한 물음에 대한 답에 귀를 기울였다. 대하기 어렵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나~ 라는 마인드로 괜히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으나 '원래 이런 애'라는 말에는 치아키는 이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원래 이런 애..라는 것은 무슨 의미야? 원래 성격이 조금 거리를 두고 벽을 친다는 그런 이야기?"
물론 그런 성격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고 자신도 딱히 그렇다고 해서 거리를 두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이..라는 표현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굳이 그렇게 캐물어보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그러다가 잠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른손을 책상에서 떼어내며 그에게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일단 그런 것은 그런 것으로 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조금은 편하게 느껴질까?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 3번째 권유가 남아있으니까 그거 하러 또 올지도 모르거든. 아. 물론 어디까지나 말 걸기 위한 명분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기."
거절해도 이쪽은 딱히 상관없다는 듯, 정말로 가볍게 이야기를 하면서 치아키는 이내 두 팔을 쭉 올려 기지개를 켜다가 미카를 바라보면서 다시 가볍게 말을 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난 무게감보다는 가벼운 느낌으로 있고 싶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참고용으로 묻는 거라고 생각해줘."
아참참... 지금까지 진단 답변이나 간략 서술로 간단하게 말했었는데 말 나온 김에 확실하게 풀자면!
이 아저씨... 누군가가 극도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등의, 공포와 긴장에서 유래된 부정적 감정을 마주하면 참을 수 없이 즐거워져. 좀 악취미적이지👀 그래서 평소에도 자잘하게 겁주거나 놀래키는 거 좋아하는 편이고... 그런데 이건 취향이라기보단 본능에 가까운 거라 즐거워하지 마!라고 해도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아. 그래도 요즘은 일코 중이라 티 안 내려고는 하는데? 지금은 티 내버렸네~🫠
"그렇다면 그 자체는 아니라는거네. 후배 군이 어떤 이인지는 조금 더 보고 판단해야겠는걸?"
자신은 저렇게 말하고 있으나 정작 저것도 애매모하게 대충 넘기는 것에 가깝다고 치아키는 판단했다. 마치 자신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듯이. 정말로 벽을 쌓고 거리를 두는 성향이라면 애초에 저렇게 애매모하게 이야기를 할 리도 없을테니까. 물론 자신의 추측이 항상 맞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 치아키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을 하며 반대편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안에서 포도맛 사탕을 꺼낸 후에 포장지를 까고 입에 쏙 집어넣었다.
"계속 보다 보면이라. 이거 참. 학생회장님도 굉장히 바쁜 몸인데 말이야. 아. 물론 지금 이렇게 보면 꽤 한가해보일수도 있는데 그건 또 아니거든. 나중에 또 일하러 가야해서 말이야. 하핫! 아무튼 오케이. 오케이. 자주 보자 이거지? 알았어. 그렇다면 정말로 마지막 3번째 권유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내야겠네."
계속 보다 보면 편해진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을 해보기로 하며, 그와 동시에 좀 더 많이 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치아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 그게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말인데. 와타누키 군은 물 좋아하니? 그러니까 물놀이! 스위밍!"
이어 치아키는 두 팔을 올려서 마치 수영을 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효과음으로 어푸, 어푸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소리를 멈추고 두 팔도 아래로 내리면서 키득키득 웃어보였다.
"별 건 아니고 수학여행을 여름에 가는데 약간의 리서치라는 느낌으로 말이야.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땡큐 베리 머치!"
여기까지 들어오는 길이 조금 다사다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참배를 하겠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제 남은 건 밖에서 부적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돌아가는,
. , ,
..도, 돌아가는 길에 학생회장님을 마주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자신하지?
머리가 커다란 놋쇠 종이 되어서 뎅, 하고 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넘어졌을 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것을 그랬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이제와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신사를 떠나기 위해서는 방금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아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쉬는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아니야, 혹시 찾아보면 샛길이나, 뒷문이나, 하다 못 해 동물이 드나드는 길 정도라도 있지 않을까?
담 밑에 뚫린 구멍 따위를 기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서는 거기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신사의 관계자로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 어쩌면 순찰이나 수상한 기미라도 살피러 왔다가 또 그런 모습을 발각당하면 정말로.. 정말로 거기에서 혀 깨물고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제서야 차라리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평범하게 정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래, 청소를 하고 있었던 것 같으니 청소도구를 정리하러 창고나 관리실같은 곳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조그마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사치 베르단디, 상상해, 상상하는 거야.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평온하게, 그냥 자연스러운 일반인 1같은 얼굴로,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이렇게나 거짓말처럼 또 다시 마주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이제는 부적 판매대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앉아 있기까지! 우아아악, 대번에 얼굴이 다시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아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친절한 얼굴로 부적이라도 보고 가라고 권유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 부, 부적, 오늘은 포기해? 말아? 포기해? 그치만 여기까지 왔는데(오늘의 흑역사 미터기를 보면 앞으로 당당히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딱딱히 굳은 로봇처럼 한참 삐걱거리던 몸을 돌려 향한 곳은.
얼른 마음에 드는 숙취해소제나 골라 넘기랬더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는 영 엉뚱한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걷는다. 미야나기는 그나마 뭘 하는지나 일단 좀 지켜보자며—그 자리에서 따질 만큼 간도 안 크다—가만히 묵인했다가는, 잠시 후 벌어지는 기막힌 상황을 목격하고 하얗게 경악해야만 했다.
”무, 무무, 무슨 짓이야. 너 신분증도 없잖아!“
황급히 냉장고의 문을 닫으며 그의 꽁무니를 뒤쫓아 내달렸다. 뻔뻔하게 카운터 앞에 서있을 비량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려 하는 그녀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두 뺨에는 머리카락까지 잔뜩 엉켜 달라붙어 있었을 테니 진이 죄 빠진 모습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보다, 이내 주섬주섬 술의 바코드를 찾으려 하는 직원에게 도끼눈을 치켜떠 무서운 얼굴로 단단히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절대 계산해주지 마세요. 이분 만 19세 안 됐습니다. 팔면 저 바로 경찰에 신고해요.“ 그 본인은 자신이 ‘학생이지만 고령이다’라는 희한한 착각에 빠져있는 것 같았지만, 얼뜨기가 아니고서야 과연 누가 그 말을 믿을까! 사기를 쳐도 좀 제발 믿을 만한 말로 사기를 쳐야 할 것이다.
“아니이- 이중에서 좋아하는 거 있냐고요. 좋아하는 ‘술’을 고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숙취해소제! 중에서만 골라야 한다니까요. 자, 봐요!“
그의 몸을 숙취해소제들이 줄줄이 나열된 곳을 향해 다시 빙글 돌려주려 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친절한 설명을 한 번 더 거듭한 끝에, —그녀는 결국 이 무뢰한의 행동을 절대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냥 내가 아무거나 후딱 고르고 말지. 하하하하······. 물론 마시는 건 자신이 아니니 어떤 역겨운 맛이 나든 제 아무런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시판 제품인데 다 그게 그거 아니야? 상표를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채 대충 잡히는 대로 세 병을 골라 거칠게 카운터에 내려두고는, 계산을 마치고서 뚜껑을 착실히 따다 우선 한 병을 그의 손에 꽉 쥐어주려 했다.
“빨리 술 깨서 집에 돌아가세요······. 몰골이 그래서 내일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어요.”
우와. 완전 긴장했나봐. 아까전의 그것 때문인가. 되게 멋졌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로봇처럼 몸을 돌리는 사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일단 부적을 보고 싶다고 하니 치아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열대에 있는 부적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켰다. 물론 부적 자체에 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봤쟈 아주 사소하고 작은 좋은 일이 가능하게 하는 정도? 물론 그것만으로도 일반적인 부적보다는 효과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과연 부적을 사는 이들이 그 정도로 만족을 할지. 그래도 일단 자신 쪽에선 팔면 되는 거니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좋아요. 좋아. 여기까지 왔는데 부적 하나 정도는 사야죠. 물론 꼭 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념으로? 하핫. 아무튼 여기는 인연의 신인 키즈나히메님을 모시는 신사. 그렇기에 아무래도 인연에 도움을 주는 그런 부적이 많아요. 이를테면 여기에 있는 이것은 좋아하는 이와 좋은 인연이 생길 수도 있는 부적. 이것은 가족과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부적. 그리고 이것은 친구와 좋은 인연이 생길 수도 있는 부적. 그 외에도 가지각색 많으니까 천천히 구경해봐요. 하지만..."
이어 치아키는 물이 담겨있는 컵을 살며시 권하면서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지금까지 보이던 가볍고 혹은 경박했던 모습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었다. 이내 진지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부가적인 설명을 이었다.
"결국 만들어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에요. 이 부적은 약간의 계기를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 끈을 묶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어야 해요. 신은 약간의 도움은 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도움은 잘 주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부적을 사는 것은 좋지만 부적만으로는 효과가 없고 자기 자신이 움직여야 신도 도와준다는 점은 잊지 말아주세요."
설명이 끝나자 그는 이어 다시 싱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보이더니 탁자 아래 쪽에 있는 상자에서 '키즈나히메'를 본따서 만든 작은 봉재인형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지금 부적을 사면 아이고!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키즈나히메님 인형도 서비스! 무려 부적+인형이 1+1 서비스!! 자. 무슨 부적 고르시겠어요?"
"무리는 아니야. 무리는. 애초에 난 무리라는 단어를 싫어해서 말이지. 무리하게 뭔가를 하거나 하진 않아. 그런 것보다는 가늘고 길게 사는 사람이니까 안심해도 좋아. 후배 군."
굵고 짧은 것보다는 가늘고 길게. 꼭 이름이 안 남아도 좋으니까 그냥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에 남게. 그리고 매사를 즐겁게. 자신의 좌우명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치아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편 제 물음에 물은 그다지라는 말에 치아키는 잠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케이. 그렇다고 막 바뀌거나 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참고하도록 할게! 아무튼 수학여행지? 아. 그거야 당연히 비밀이지. 알고 싶으면 학생회 들어오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하핫. 물론 이건 권유가 아니야. 그냥 학생회 멤버들 정도만 안다라는 이야기야.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기밀사항 중 하나라는 듯이 오른손으로 숫자 1을 표현하며 치아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조금만 힌트를 주는 것도 좋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나 그렇게 하면 알게 모르게 다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힌트조차도 주지 않으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끝내면 너무 심술궂다고 생각을 하며 치아키는 딱 정보 하나만 주기로 하며 입을 열었다.
"가미즈나는 인연의 땅이라고들 하지. 수학여행지는 물이 유명한 곳. 일단 여기까지만! 이 이상은 진짜 정보 유출이니 말이야. 아. 참고로 해외는 아니니까 우와! 우리 베네치아 가요? 이러면 곤란해. 학교 예산을 모두 써도 전교생이 다 베네치아에 갈 순 없어."
물론 교사에게 의견으로서 낼 순 있지만 바로 기각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며 치아키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물이 아니라도 볼 곳은 많다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괜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돌아다닐 곳은 많을테니까. 다만 모두의 기호를 맞춰줄 수 없다는 생각에 치아키는 아주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조금 더 능력이 있다면...이라고 생각을 반. 역시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 허나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학생회장이었고 저 후배를 위해서 많은 것을 맞춰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저 후배가 어느 정도 이해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러면 슬슬 시간도 시간이니 나는 가야겠어. 후배 군. 너무 늦게까지 있진 말고 제때 하교하기다!"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수위가 나타나서 잡아갈지도 몰라~ 그렇게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면서 쿡쿡 웃은 치아키는 이내 손을 흔들면서 밖을 향해 터벅터벅 나섰다. 당연히 가야 할 곳은 하나. 학생회실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수학여행 일정이나 다시 짜볼까. ...뭐,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이 자유행동이겠고..." "여름이 다가오면 슬슬 이것저것 또 준비를 해야겠네. 바쁘겠어. 올해 여름은."
그런 혼잣말을 남기면서 치아키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불만이거나 싫다는 느낌은 그의 표정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와아, 양주! 하얗게 질린 사에와는 달리 그는 참 해맑은 얼굴로 계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달려온 사에가 제지하자, 그냥 제지하다 못해 미성년자와 법적 처벌 운운하며 못까지 제대로 박아버리자 추욱 처져서는 얌전히 붙잡혀 돌아갔다.
"제에길, 합법적이고 문제 없는 방법이 있건만 시도도 못 하게 그리 막아버리면 쓰나아……."
신의 힘을 써서 속여넘기는 방법 같은 것도 있고, 외형을 조금 바꿔서 성년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하고 있으면 그런 수를 쓰지 못하게 된다. 술 들어간 와중에도 나름대로 빠릿하게 머리 굴려서 방금 그 짓 했던 모양이다. 과연 그는 빙글 돌아서 숙취해소제들과 눈이 마주치자, "에엥, 깨기 싫으니라…… 안 마시면 안 되겠느냐?" 울상이 돼서는 대번에 싫은 소리 한다. 무슨 약 먹기 싫다는 애도 아니고. 당연히 그는 내일 아침에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있으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나. 음주 특화 종족이라 고작 이 정도 마시는 정도로 골골거리진 않을 테니 그로서는 꽤 억울한 상황이다. 그러나 마비된 머리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착실하게 숙취해소제 한 병을 얌전히 들고, ……차마 마시지는 못하고 후다닥 편의점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정말이지 그 많은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건지 통 모르겠다. 따라나온다면 그대로 줄행랑 친 것도 아니고, 편의점 밖 문 바로 앞에서 팔짱 낀 채 기다리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잘한 짓 하나 없고 좋은 일 하는 사람 귀찮게만 한 주제에 제 쪽이 더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 와중에도 숙취해소제 버리지는 않고 잘 들고 있는 꼴이 퍽 우습다.
"왜 그리 훼방을 놓느냐? 나는 족히 연만(年滿)이야! 나이들었으니 마셔도 된대도? 계속 그리 군다면 내 아주 토라지는 수가 있어."
토라진다니, 어휘가 구질구질하지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협박 비슷한 발언이었다. 신에게 좋지 못한 인상이 박힌다는, 속되게 말해 찍힌다는 뜻이니까. 술 금지당한 일이 어지간히도 언짢았나 보다. 나 도깨비라고! 도깨비는 숙취해소제 안 마신다고! 으아아 빡쳐! ……하지만 이미 딴 병, 이것을 내내 들고 있기도 무엇하고, 그는 한국인의 토속을 다분히 닮은 신이었기에 멀쩡한 음식 버리기도 아까웠다. 결국 그는 흐느적거리며 길다란 탄식 빼고서 들고 있던 해소제를 눈 감고 한 번에 비워 버렸다.
"한 병만이다. 더 딸 생각 말거라."
진짜 삐졌나 보다. 잔뜩 찌그러든 얼굴로 남은 숙취해소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다는 양 노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