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서 몇 바퀴를 구른 것치곤 그의 몰골은 어디 하나 긁힌 데 없이 풀만 붙어서 말끔했다. 신이라는 족속들은 몹시도 불공평한 존재라,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고 벌레 많은 풀밭에 누워도 위생 걱정 없이 말짱할 수도 있다. 정작 그 당사자는 그것이 얼마나 이로운지도 모르고, 제게 도움 주려는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선곡을 바꾸고나 있다.
"Cause I know what you like boy─ You're my chemical hype boy…… 으응?"
그래도 눈만큼은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으니 가까이에 와서 건드리는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는 웬 여자아이가 나타나 제 눈앞에 얼쩡거리자 인상을 팍 쓰고 곰곰한 장고에 빠진다. 뭬냐, 그러니까 이 여자애 어딘가 낯이 익은데…… 알코올에 찌든 머리가 흐느적흐느적 열심히 회전을 하고. "아아─!" 그는 별안간 탄성을 외치며 벌떡, 단번에 몸 일으켜 아는 체를 했다. 손으로 옆을 짚지도 않고 배 힘만으로 벌떡 일어나는 게, 취객 치고는 몸은 쌩쌩하게 잘 움직여지는 모양이다. 지금껏 누워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일어날 마음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너 지난번 결투했던 그 아이로구나! 반갑구나, 반가워! …한데 학생이 학교에 안 있고 어인 일이냐?"
목소리가 조금 늘어지긴 해도 용케 발음이 멀쩡했다. 지나치게 멀쩡한 나머지 고등학생은 안 쓸 법한 말투가 된 데다, 얼마나 취했으면 멀쩡히 달 뜬 시간에 학교 가라는 소리를 할까 싶긴 하지만. 택시 불러줄까 하는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자기 할말만 하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부정 못 할 전형적인 취객의 행동거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한쪽 손을 흐느적 뻗어 사에의 어깨를 턱 붙잡으려 했다. 일순 바람과 함께 주취가 훅 끼친다. 이런저런 술의 온갖 냄새가 뒤섞여 어느 것을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향이었다.
"아차암… 것보다도 말이다. 내 널 보면 중히 할 말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아 그렇지, 설욕전이다!"
또 한 번 미간이 좁혀지며 찡그린 얻굴이 됐다가, 이윽고 펴져서는 싱글싱글 환하게도 웃는다. 어깨에 손 뻗지 않았던 남은 손이 돌연 휙, 빠르게 앞으로 내질러진다. 주먹질이라도 할까 싶을 속도다. 다행히 그것은 상대와 그 자신의 중간쯤 허공에 척 멈추어졌다. 술꾼의 의식은 어디로 튈지 종잡기 힘들기에 난감하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맨정신으로도 그런 신인데 취해서는 오죽할까. 요즘에는 위험하기보단 주변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쳐 망정이지, 아니었음 오늘 이미 큰일 여럿 치고도 남았다. 하여간에 주변인 난감하게 만들기에 심취한 그는 허공에 쥔 주먹 휙휙 흔들며 이렇게 주장했다.
어디 보자, 또 qr코드 있는 데가 어디 있어려나? 내가 우리 부실도 살펴봤었나? 음... 안 본 것 같은데. 그럼 생각난 김에 한 번 가봐야겠다! 이런 사고의 흐름을 거쳐 안즈는 방송댄스부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한 번 살펴볼까나! 아, 역시. 여기도 있네. 샅샅이 부실을 뒤진 끝에 코드를 발견한 안즈는 싱글생글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택시는커녕 구급대나 불러야 할 처지만은 면한 데에 안도해야 할까? 거리에 나뒹구는 소리를 요란히 동반했던 것과는 달리 희끄무레한 은빛 아래 그는 잘도 태평하다. 잔뜩 헝클어져 뒤집어쓴 잡풀과 허연 꽃잎이 아니었다면, 미처 고꾸러졌다는 사실조차 짐작 못 했을 것이 참 수상쩍으리만치 말짱한 모습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웬 영어 노래—평소에 K-POP을 좀 들었다면 좋을련만—까지 신나서 불러대고 있으니 그녀는 잠깐 제 선택을 후회해야 했다. 그냥 아는 척하지 말고 지나갈 걸······. 그러나 지금이라도 모르는 체 줄행랑 놓을까 싶었던 계책도 한순간이다. 자는 양 길가에 축 늘어져있다 말고 삽시에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놀란 숨을 작게 들이키며 얼른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서 이어지는 것은 뜬구름 잡는 주정의 언어다.
“······혹시 그쪽은 아직 하교를 안 했나요?“
하다하다 이 달밤에 학생이 학교에 안 있고 뭐하냐며, 저를 도리어 무뢰한 몰이하는 게 정말 적반하장이다! 게다가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투람. 지다이모노의 무사를 자처하는 이야기꾼이 무대 위에서나 쓸 법한 극적인 언투를 능청스레 쓰는 모습에 그녀는 혀를 내둘러야 했다. 아무래도 요즘 언어 교수법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 수강생이 저런 요상한 말투를 쓰고 있는데 왜 아무도 교정을 안 한 거지? 심지어 팔순 먹은 노인이 꼬마애 대하듯 하대까지 하는 투다! ······어느 돌팔이 어학원에서 수료한 건지 문득 그가 무척 걱정되는 순간이다. 제 혼자 얼굴을 찌푸렸다 폈다 하는 모습은 그녀의 눈속에 그저 험상궂게 비쳐 마른땀이 등 뒤로 차게 흐른다. 쇳내나는 밤바람에 섞여 부유하는 술내와, 동시에 어깨를 덥썩 잡는 손아귀에 미야나기는 지레 겁먹었다. “줄게요! 점수 줄게요! 그냥 제 거 다 드릴게요! 전부 가져도 돼요. 와아, 2, 22점이나 받을 수 있다, 되게 부럽다.” 움큼 쥔 손 앞에서 그녀는 제대로 울상이었다. 불량배한테 단단히 잘못 찍혀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신고라도 했다가는 바로 학교로 연락이 갈 테지. 아직까지 일본 사회에서 미성년자의 음주란······ 좀 적잖이 문제되는 일이지 않겠는가. 그녀는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겠노라 따가운 침을 혼자 삼켰다. 태평하게 가위바위보 따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미야나기는 조금 더 용기낼 필요가 있었다.
“지금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돌아가야 할걸요. 혹시 근처에 선생님들이라도 지나갔다간, 진짜로 망해요. 집에 혼자 갈 수는 있어요?“
제 어깨를 쥔 손아귀에 힘이나 들어갈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대로 부축하듯 일으켜 세우려 노력했다. 술에 쩐 취객을 돌봐준 적이나 있어야 알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혀 난감하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숙취해소제라도 먹여야 할까.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맺힌 것이 몽우리져 떨어지는 달빛인지 식은땀인지 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