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교교한 빛 흩뿌리니 하늘이 파아랗게 번쩍이는 듯하다. ……라고 말하기엔 오늘은 그믐이라 그저 침침할 뿐이다. 잔뜩 기대하며 하늘을 올려다 본 그는 쳇, 혀를 차며 창턱을 짚고 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달빛 운운하며 평소엔 없던 청승 찾는 까닭은 이제부터 할 행동의 마땅하고 정당한 사유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벚꽃이 만개한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채 다 떨어지지 못한 꽃잎들이 하늘에 날리고 있다. 꽃향기 여전히 만연하고 정경 고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니, 내리는 꽃눈이 검푸른 하늘에 아롱아롱 흩날려 달콤한 흥취를 그려낸다. 초저녁, 찬란한 봄날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맞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 같은 날에는 풍경 보며 마시는 술만한 즐거움이 달리 없는데 말이다……. 이러저러한 싸구려 물건부터 깊이 모시고 숨겨둔 명주의 이름들 줄줄이 머리에 떠오른다. 사실은 다 집어치우고 싸구려 맥주라도 좋으니 일단 술이나 퍼 마시고 싶다는 것이 본마음이다. 쓰읍, 그러니까 한 잔만 마시면 기분도 좋고 딱일 것 같은데.
……그래서 결국 못 참았다. 젠장, 입학해서 지금까지 오래 참았다. 이만하면 포상의 의미로 마셔줘도 된다! 따악 한 잔만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딱 한 잔! 맛만 볼 거라고! 술꾼이 하는 말은 믿어서 좋을 일 없다지만, 그는 진실로 혀에 술 닿기 전까지만 해도 한 잔만 마시고 깔끔하게 치우려 했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항이 둘 있었으니. 첫째는 중독성 행위를 오래 참다 다시 시작한 때가 가장 자제력을 잃기 쉬운 때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금주를 오래 안 했더라도 비량은 본래부터 참을성이 없는 신이라는 점이다. 생전 해 본 적 없었던 오랜 금주와 처음부터 쥐꼬리만했던 자제력이 합쳐져 그렇게 술내 나는 비극의 서막이 오르고 말았다.
"한 잔만 할 거래도? 양푼에 넣어서 마셔도 잔으로 치면 한 잔 아니냐…!" 중얼중얼, 기어이 터진 음주 욕구로 미쳐버린 도깨비는 합리화하면서 병 하나를 '한 잔'에 통째로 때려 부어넣고, 어라, 아직 안 취했는데 그럼 두 잔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두 병을 목구멍에 붓고, 세 병과 네 병 째를 섞고, 또 네 병이 다섯 병이 되고……. 그리하여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지금에 이르고 만다. 바로 잔뜩 상기되어서는 집구석에 못 박혀 있겠다며 밖으로 튀어나온 주정뱅이! 게다가 딱 봐도 탱탱하기 짝이 없는 외관으로 술냄새 풍기며 싸돌아다니고 있다! 제 모습이 객관적으로 어찌 비칠지 가늠할 정신머리도 없어진 상태다. 헤롱헤롱 들떠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실쭉거리며 이쪽저쪽 걸음도 요란하다. 그러다 기어이 제 발에 걸려 픽 쓰러지고 만다. 그는 중력과 관성에 저항하지 않고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 버렸다. 구를 만큼 굴러 회전이 멈추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을 위로 하자 절묘하게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눕게 되었다. 누운 김에 올려다 보는 밤하늘이며 밤 벚꽃이 차암 예쁘게도 보인다. 몸 더운 와중에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 시원하여 기분 좋으니 이대로 여기에 살까도 싶고…… 아아… 하늘에 별도 밝구먼. 별? 별…….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이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주둥이에 술 들어가니 평소에는 모르던 세상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는가 본데, 그도 여느 주정뱅이처럼 취한 채로는 퍽 감상적인 개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넘어진 김에 그 자리에 퍼질고 누운 평범한 취객밖에 못 된다.
"나를 묶고 가둔다면 뱃길 따라 이백리~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하아으아─"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웬 외국어로 이상한 노래까지 불러제끼고 있다! 잔디밭 위에 자리도 없이 맨몸으로 드러누워 뻗은, 술냄새 풀풀 풍기며 괴상한 노래 불러 대는 미성년자…… 이미 당장 신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최악의 상태다. 아무나 와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이 망측한 망신살을 막아줄 상식인이 필요하다!
쥐 한 마리 꿀떡 삼킨다는 걸 보아하니 자신과 같이 짐승형 신님이 아니실까 싶다. 놈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반응을 질질 끌었다. 식사가 즐겁지 않다는 건 아무래도 인간으로서 살아온 경험이 적고, 또 평소적에도 드물지 않게 짐승의 모습을 즐겨했다는 것일까. 이보다 더 가면 자칫 음침해질 수 있으니 놈 반듯한 웃음과 함께 적절한 반응을 해주더랬다.
"내 본능 역시 날 것을 먹는 식습관인지라 가끔은 핏물 뚝뚝 덜어지는 고기를 즐기기도 한답니다. 바사시(馬刺し)라고 하지요?"
언제 한 번 같이 가봐야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는 태도가 가볍고 자연스럽다. 원채 한량처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게 놈의 일과이니 약속 잡기 쉽다는 것도 한 몫했지만 미식하지 못하는 이 신에게 오지랖 한 번 부려보겠다는 마음도 없잖이 있었다. 바사시라! 값이야 나가겠다만야 놈은 어차피 돈 좀 버는 직업이 있다.
본래 지켜보는 것은 미유키의 일이고, 먹는 건 놈의 일인데 인간세상에 왔다고 상황이 이렇게 뒤바뀐다. 두 신의 성질이 비슷하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턱 소리나게 도시락을 닫은 놈이 관절에 기름칠한듯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꽃님께서 인간들 구경하는데 방해가 될테니 이 신놈은 이제 사라져볼랍니다."
하며 케이레이敬礼. 이것 참 공손한 작별이 아닐 수가 없다. 천천히 등을 돌려 떠나는 녀석의 등을 꽃잎들이 뒤따르니 흐드러짐 없어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다 사라지더랬다.
아~ 역시 풍요와 복을 부르는 도깨비님! 이런 일쯤은 힘 안 쓰고도 성공하죠? 점수가 대박이 났더니 자연히 어깨가 아주 백두대간만큼 높이 치솟는다. -30점이 두 번이나 나와서 온갖 기행을 해가며 점수를 복구했던 일은 이미 싹 잊은 모양이다.
"얘들아! 나 지금 뭔가 달라 보이지 않아? 그래, 꼭 50점을 연달아 맞아서 100점을 넘은 사람처럼 뭔가 신수가 훤하지 않아? 약간 점수 많은 사람의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지고? 점수 재벌?같지?" "네? 왜 그런 눈으로 보시죠? 내가 마침 50점을 얻어서 총점 105점이 된 운빨천재 남궁 린 씨인데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지?" "쿠로다 씨는 남아도는 점수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있어? 없구나…… 저런."
옛일 잊었다 못해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 자랑 늘어놓고 있다. 한동안 죽여 놓고 있었던 자신감 과잉 또 나왔다. 우쭐한 기세로 복도를 위풍당당하게 걷다 또 하나 발견!
전부 틀린 이름인 모양이에요! 맞는 이름이었더라면 니노미야 씨가 아무리 전학생이라고 해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단 반응을 보였을테니까요. 하지만 전혀 모르겠단 듯이 처음 들었단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입니다. 쿠로사와 씨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이름을 틀려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보내요. 그나저나, 이러다가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질 못 하면 어떡하나 고민해요. 쿠로사와 씨를 찾다가 오늘 하루가 다 가버리면 안 될텐데요! 심부름을 끝내야 합니다.
“쿠로사와.........”
일본의 인명은 조금 어렵습니다. 제 성씨만 보아도 한자의 나열은 작은 새가 논다는 뜻이지만, 소리내 읽기는 매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요. 매가 없어서 작은 새가 놀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 한자만 보고 읽으면 이름과는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어서, 쿠로사와라고 읽힐 것 같지 않은 이름도 그럴 수 있단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히라가나로 발음을 달아둡니다. 출석부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며 읽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쿠로사와 씨가 한 명 뿐인 건 둘째치고요, 니노미야 씨가 없습니다. 찾지 못했어요. 고개를 갸웃입니다. 전학생이라고 아직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걸까요? 그럼 여태 출석도 못 했을텐데요!
“...누구세요?”
눈 앞의 이 학생은 B반의 학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해요. 사람이 아닌 건 아닐까 하고요.
“학교에 외부인은 출입 금지입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은 많이 봤으니까요, 어떤 신이 그런 장난을 치는 중인지도 몰라요. 저한테만 보인다던지요. 조심조심 손가락을 뻗어봅니다. 니노미야 씨의 팔뚝 쯤을 콕 손가락으로 눌러 보려 합니다. 손가락이 투명하게 통과해버릴 지도 몰라요.
미야나기는 절대 밤늦은 시간에 밖을 나서는 법이 없다. 깊은 밤거리의 불확실한 치안도 고려했겠으나 우선 수업을 끝낸 후 바로 잠들 준비를 하는 게 학습되어 굳어져있었으며, 필요할 만한 것들은 차질이 없도록 항상 단단히 구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그녀는 어스름한 달빛이 차게 흐르는 길거리를 두 발로 딛고 위태롭게 서있다. 이제 막 넘어가려는 4월의 중순을 겨우 붙잡고, 남은 손으로 천천히 남은 봄바람의 흔적을 되짚는 희미한 계절이다. 다 저물어거는 벚나무에 간신히 매달린 채 힘없이 날리는 간헐적인 꽃잎들을 뒤로 하고서 그녀는 좀 창백하게 보였다. 때마침 운좋게 잠긴 그믐 덕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물론 시간을 아주 오래 끌 마음은 없다! 밤 그림자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는 걸 이내 다 마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고, 기껏 물렁하게 만들어놓은 장요근은 더더욱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얼른 돌아가서 몸을 마저 풀어놓지 않으면 오늘 루틴은 완벽하게 망쳐질 테지. 하지만 계획이란 것은 대체로 아무 소용이 없곤 하다. 어느 극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그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한 가지만이 확실할 뿐이다. ······이걸 참, 어떻게 해야 하나. 고요한 가운데 누군가가 참 요란히도 뒹구는 소리와, 이어서 귀를 찔러대는 웬 낯선 언어로 된 흥얼거림에 보통 때와 같았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겠으나 이건 예상치 못했다. 눈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하며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려 했던 미야나기는 실낱 같은 달빛 속에서 무언가를 파악하고서 잠깐 동안 연쇄적인 고민에 빠진다. 이 취객은 어쩐지 실루엣이 낯익군. 얼마 전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친절한 11점을 넘겨준 사람 같기도 하고. 어라, 목소리도 그렇고 역시 그 기인이 맞는 듯했다. 그럼 고등학생? 아하, 고등학생이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네! 미야나기는 손가락을 튕기며 반가워하다 말고, 순식간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고, 고등학생이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녀는 불량 학생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급히 발걸음을 돌리려 했으나, 그마저도 차마 얼마 가지 못해 멈칫거려야 했다. 같은 학교에 학생됨으로서 길거리에 누워있는 걸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일단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급한 대로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CPR이라도 실행하는 듯한 자세와 경건함이다.
“저기, 저기요. 여보세요. 괜찮아요? 정신 들어요?”
잠깐, 근데 이 사람 외국인인가? 영어로 말해야 되나! 그러나 멍청한 생각은 짧게 이어지다 말고 끊어진다. 그야 바로 며칠 전에 일본어로 대화했었지 않은가. 적어도 기본적인 회화 정도는 당연히 통할 거다. 코끝에 물씬 풍기는 알콜 냄새에, 어두운 달을 등지고서 그녀는 울상지었다.
넘어져서 몇 바퀴를 구른 것치곤 그의 몰골은 어디 하나 긁힌 데 없이 풀만 붙어서 말끔했다. 신이라는 족속들은 몹시도 불공평한 존재라,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고 벌레 많은 풀밭에 누워도 위생 걱정 없이 말짱할 수도 있다. 정작 그 당사자는 그것이 얼마나 이로운지도 모르고, 제게 도움 주려는 사람이 얼마나 심각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선곡을 바꾸고나 있다.
"Cause I know what you like boy─ You're my chemical hype boy…… 으응?"
그래도 눈만큼은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으니 가까이에 와서 건드리는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는 웬 여자아이가 나타나 제 눈앞에 얼쩡거리자 인상을 팍 쓰고 곰곰한 장고에 빠진다. 뭬냐, 그러니까 이 여자애 어딘가 낯이 익은데…… 알코올에 찌든 머리가 흐느적흐느적 열심히 회전을 하고. "아아─!" 그는 별안간 탄성을 외치며 벌떡, 단번에 몸 일으켜 아는 체를 했다. 손으로 옆을 짚지도 않고 배 힘만으로 벌떡 일어나는 게, 취객 치고는 몸은 쌩쌩하게 잘 움직여지는 모양이다. 지금껏 누워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일어날 마음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너 지난번 결투했던 그 아이로구나! 반갑구나, 반가워! …한데 학생이 학교에 안 있고 어인 일이냐?"
목소리가 조금 늘어지긴 해도 용케 발음이 멀쩡했다. 지나치게 멀쩡한 나머지 고등학생은 안 쓸 법한 말투가 된 데다, 얼마나 취했으면 멀쩡히 달 뜬 시간에 학교 가라는 소리를 할까 싶긴 하지만. 택시 불러줄까 하는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자기 할말만 하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부정 못 할 전형적인 취객의 행동거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한쪽 손을 흐느적 뻗어 사에의 어깨를 턱 붙잡으려 했다. 일순 바람과 함께 주취가 훅 끼친다. 이런저런 술의 온갖 냄새가 뒤섞여 어느 것을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향이었다.
"아차암… 것보다도 말이다. 내 널 보면 중히 할 말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아 그렇지, 설욕전이다!"
또 한 번 미간이 좁혀지며 찡그린 얻굴이 됐다가, 이윽고 펴져서는 싱글싱글 환하게도 웃는다. 어깨에 손 뻗지 않았던 남은 손이 돌연 휙, 빠르게 앞으로 내질러진다. 주먹질이라도 할까 싶을 속도다. 다행히 그것은 상대와 그 자신의 중간쯤 허공에 척 멈추어졌다. 술꾼의 의식은 어디로 튈지 종잡기 힘들기에 난감하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맨정신으로도 그런 신인데 취해서는 오죽할까. 요즘에는 위험하기보단 주변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쳐 망정이지, 아니었음 오늘 이미 큰일 여럿 치고도 남았다. 하여간에 주변인 난감하게 만들기에 심취한 그는 허공에 쥔 주먹 휙휙 흔들며 이렇게 주장했다.
어디 보자, 또 qr코드 있는 데가 어디 있어려나? 내가 우리 부실도 살펴봤었나? 음... 안 본 것 같은데. 그럼 생각난 김에 한 번 가봐야겠다! 이런 사고의 흐름을 거쳐 안즈는 방송댄스부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한 번 살펴볼까나! 아, 역시. 여기도 있네. 샅샅이 부실을 뒤진 끝에 코드를 발견한 안즈는 싱글생글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