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야박한 소리를. 확실히 하자면 이 자리에 먼저 있었던 쪽은 나다. 끝날 때까지 자리도 비켜 줬건만 오해하면 못 써요."
휙휙 휘젓던 팔 내려서 팔짱 끼고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 참 태연스럽다. 무어라고 더 떠들려던 것 하네가 모자 눌러 씌우자 "엑."하는 하찮은 소리 내면서 잠잠해졌다. 그는 머리 뒤로 손 돌려서 뒷고리를 풀고 제 머리 크기에 맞게 제대로 덮어쓰고는, 그사이 쪼그려 앉은 하네의 곁으로 가서 속닥였다.
"앉고 싶다면 차라리 의자에 앉거라. 불편한 신 신고 쪼그리면 발 아파."
나름대로는 진심에서 우러난 걱정으로 한 말이긴 한데, 말하자마자 곧바로 쓸데없는 장난질로 옮겨가니 이래서 무용지물이다. 후드 쓴 하네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우느냐? 울어?" 같은 소리를 하는데, 얄밉기 그지없다. 조언을 해 줄 거라면 애초에 걱정의 원인이 되지도 말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양반은 아는지 모르겠다. 통 연륜 묻어나지 못하는 머리로는 마주치자마자 왜 이렇게 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뿐. 요 몇년 간 부쩍 부끄럼이 많아졌으니 그것 때문이겠거니 하는 간단한 추측은 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부끄러운지는 영 모르겠다. 오히려 이러고 있는 게 더 눈에 띌 것 같은데 말이다……. 계속 이러고 있기도 무엇하니 일어나는 편이 나으리라. 그는 하네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재촉을 하기 시작했다.
"에잇, 계속 그러고 있으면 동네 떠나가게 큰 소리로 타카나시 선배님이라고 불러 주마."
아니, 협박일지도 모르겠다.
"아! 저기 마침 가미즈나 교복 입은 아이들이 지나가는구나. 너와는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다만, 3, 2, ……."
저런 식으로 나오면 제가 지는게 당연합니다. 이 마을에 먼저 살았던 건 저라고 대꾸하면, 누가 먼저 태어났냐까지 갈 게 뻔해요. 그러면 따질 것도 없이 제 패배에요! 아저씨보고 스토커라고 한 건 잘못이지만... 스토커는 커녕 일부러 한국에서 일본까지 와서 고등학생 노릇까지 하며 타지살이한다는 거 잘 알고 있고, 고마움도 언제나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부끄러운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안 그래도 저 아저씨는 제가 기억도 못 하는 어릴 적 일들도 다 갖고 놀리는데요!
“앉기 싫어요. 아저씨 옆은 더.”
아는 사이로 보였다가, 혹시라도 제 SNS를 알고 있는 학생이 아저씨가 이러고 있는 걸 발견하고 말을 걸면......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도 걱정과는 달리 학교에서 잘 지내시고 계시는 것 같으니까, 이상하게 제 SNS 팔로워가 많아서 괜히 얽히는 것보단 그렇지 않은게 나을 거에요. 아저씨라고 말하는 것도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줄이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제 또래인걸요.
“안 울거든요.”
이런 걸로 울 리가요! 놀리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울고 있는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얼굴은 언제나 안 보이게 가리게 찍거나 크롭하여 쇼핑몰에 올라가는데도 화장은 하게 되니까요, 화장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우는 모습을 보이는게 나아요! 우는 건 어릴 때 본 적 있을테니까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마스크를 썼어도, 후드를 썼어도 눈은 보이게 되니까요.
“앉을게요, 앉겠습니다!”
숫자도 셀 거면 10부터 세주면 좋았을텐데요! 3부터 숫자가 줄어드니 다급하게 쭈그려앉아있을 때가 아니라서 황급히 일어납니다. ...서둘러서 아저씨의 입을 막아버렸어요. 무례한 거 알아요! 아는데, 정말 소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급했습니다. 벤치 옆 자리에 앉아보지만 치마가 다리를 숨기지 못 하니까 불안하기만 해졌습니다. 치마를 잡아 끌어내려봤자에요. 목걸이라도 움켜쥡니다.
>>258 딸기를 쏙 빼먹었을 때라. 정말로 친한 사이라면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냥 웃어넘길 것 같고 만약 친하지 않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주머니에 들어있는 아주 붉은 계피 사탕을 꺼낸 후에 포장지를 까서 직접 입에 다섯개 정도 넣어주지 않을까 싶네요. 아예 초면인 경우는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이후로도 아는 척 하지 않을 것 같고요.
"그걸 이제 알았느냐? 자고로 말싸움은 늘 유치하고 더럽고 치사한 쪽이 이겨먹기 쉬운 법이다. 만고불변의 법칙이지."
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도리어 우쭐해졌다. 나이 천 몇백 먹어놓고서 계속 그렇게 살아왔다는 게 그닥 자랑스러워 할 얘기는 아닌데도……. 아무튼 수치를 모르는 그가 고작 스토커라는 말 들었다고 실망할 리 있나, 게다가 그것마저도 진심은 아니라는 사실 알고 있으니 뺀질거리는 낯짝은 전혀 금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말짱해도 본인이 자부한 것처럼 유치한 게 사실이라서 말이다. 그는 두 손으로 뺨 감싸며 가련한 체를 하기 시작했다. 한숨 푹 내쉬면서 중얼중얼 뭐라고 말을 꺼내는데.
"그렇게 나오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우야, 너 어렸을 적엔 너희 아버지가 말릴 정도로 아저씨한테 딱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내가 싫으니? 세월이 참 야속하지, 너는 이제 다 컸건만 나만 지난 세월 그리워하며 보내고 있구나…… 한갓된 허송이라. 늙은이는 죽어야지……."
장황하게 읊어대긴 하지만 또 추억 공격 아닌가. 게다가 엄연히 하네보다 한 살 어린 신분의 얼굴이다. 이 꼴로 그런 소리 해봤자 설득력 하나도 없는 건 물론이고, 말 마치자마자 선배라 외치겠다고 협박을 하니 죽을 생각은 전혀 없이 신생 즐기고 있는 게 뻔했다. 그는 입이 틀어막혀도 뭐가 좋은지 손으로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 없는 만세를 외치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가 곧 하네의 눈치를 살피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건네주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이건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서. 이윽고 손에 투명 마이크를 쥐고 하네에게 척 들어대며 번듯하게 웃어 보였다.
"자, 하면 이제는 대화를 좀 진전시켜 보자꾸나. 타카나시 양, 모델 일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하네와 헤어지고 난 이후 치아키는 다른 곳을 들리는 일 없이 바로 벚꽃나무 숲을 쭉 걸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분홍색 벚꽃잎을 가볍게 털어내다가 괜히 잡아서 입김을 불어서 후- 날려버리기도 하고. 가미즈나 토박이인만큼 어릴 때부터 매년 본 광경이었으나 볼 때마다 상당히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치아키는 생각했다. 아마도 하루노하나히메의 힘의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그는 그렇게 추측할 뿐이었다.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 세상에 신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을테니 그 힘을 의심할 이유가 그에겐 없었다. 필시 올해도 봄의 따스한 축복을 이 땅에 내렸겠지. 그렇기에 이렇게 벚꽃이 예쁘게 피었다가 지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분홍색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온 땅을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차후 청소하는 것이 조금 힘들지도 모르나 그것까지 자신이 신경 쓸 수는 없었기에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하며 치아키는 미소지었다.
"그래도 역시 이런 날에는 다른 이와 놀러다니는 것이 최고인데 말이야.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올까. 그때는 좀 더 여유롭게 놀 수 있는 이를 대충 불러서 말이야."
역시 그것이 조금 아쉽다는 듯 치아키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같이 꽃구경 한 번 더 하자고 졸라볼까 생각을 하며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섰다. 저편에 보이는 신사 때문이었다. 저 신사에 들어서기 전에 꽃이라도 하나 사서 들어가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하루노하나히메를 모시고 있는 신사에서 연 꽃을 파는 노점이 눈에 보였다. 치아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 노점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올해도 꽤 바쁘시네요. 아하하. 올해도 꽃 하나 살까 싶어서 왔는데." "아이자와 군이구나. 그쪽이야말로 노점 차려서 일하는 것 같던데 오늘은 쉬어?" "이제 할만큼 했으니까 쉬어야죠. 저도 슬슬 마츠리 좀 즐길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혼자인 것 같은데?" "아하하. 그렇게 아픈 곳 푹 찌르면 꽃 사기 싫어지는데."
노점 주인과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인지 서로서로 가볍게 장난을 치다가 치아키는 진열되어있는 꽃 중에서 푸른빛 수레국화를 작은 꽃다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며 지갑을 열어 체크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꽃다발? 하루노하나히메님에게 주는거니?" "가끔은 그렇게 줘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원래 꽃 한송이를 받는 것보다는 꽃다발을 받는 것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잖아요?" "후훗. 그래? 알았어. 그럼 예쁘게 만들어줄게."
카드로 결제를 마친 후, 노점 주인은 아주 예쁘게 수레국화들을 모아서 꽃다발을 만들었다. 푸른빛 꽃다발을 두 손으로 받으며 지갑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후 치아키는 미소를 지으면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다시 신사로 향했다. 근처에 있는 벚꽃빵을 파는 노점을 잠시 바라보지만 특별히 무슨 말을 하거나 하진 않으며 그는 그대로 신사 계단을 향해 천천히 위로 오르며 토리를 통과했다.
"그러면... 소원을 빌긴 빌어야하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는지 수많은 꽃들이 놓여있는 그 자리를 바라보며 치아키는 조심스럽게 푸른빛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이어 합장을 한 후, 가만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특별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올해 그가 빌 소원은 그저 '올 한 해가 가미즈나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한 해가 되길 바라고, 자신이 그 한 해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게 해주세요' 정도였으니까. 상당히 소박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주 큰 소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치아키가 학생회장이 될 때 내세운 프레이즈는 돌아봤을 때 즐거웠던 한 해였으니까. 그것을 지키고 싶다는 듯, 정말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소원을 빈 치아키는 일 분 정도가 지나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할머니가 조만간에 한 번 놀러오래요."
사정을 모르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을지도 모르는 그런 말을 남기며 치아키는 살며시 뒤로 돌아서서 신사 밖을 향해 걸었다. 꽃도 바치고 소원도 빌었겠다. 이제 남은 것은 적당히 마츠리를 즐기는 것 뿐이었다. 어딜 갈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으나 적당히 돌다보면 재밌는 것이나 즐거운 것이 반드시 있으리라. 고등학생으로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한 해동안 정말로 많은 추억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는 더욱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거 없으려나. 즐거운 거 없으려나. 혼자 노는 친구들 없으려나."
그런 혼잣말을 바람에 태우며 잔잔한 콧노래를 남기며 그는 그저 앞으로 걸었다. 목적지는 없으나 그럼에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시간 속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보이며.
>>277 ㅋㅋㅋㅋㅋㅋㅋ 아닛. 하지만 아플 때는 아프다고 하는 것이 맞다구요! 참는 것은 안 좋은 것이다! 아플땐 쉬는 것이 맞는 거예요! 오..노력이 0이라니. 그럴리가 없어요. 살면서 노력을 한 번도 안했을리가 없다구요!! 그러니까 노력도 한 5 정도 줍시다! 딱 평균으로! 그 와중에 미모 9..ㅋㅋㅋㅋㅋ 공식적으로 미남 맞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아닛. 케이블카에 갇혀서 오히려 엄청 좋아하잖아요! 인증샷이라니..ㅋㅋㅋㅋ 아. 귀여워...
>>283 치아키가 누군가를 만나서 논다...라. (고민중) 일상이 잡힌다면 그럴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 대충 상황을 보니 멀티를 하는 이들도 많고 이미 다른 이와 신나게 논 후인 분들도 많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일상을 한 주 통째로 쉬어버리는 바람에 캐릭터와 접점도 없고 그렇다보니..(눈물)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친구를 적당히 불러서 놀았습니다 루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