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정할게요. 챙기고나서의 상태를 보고한다는 것이었는데. 제가 잘 못 말했네요. 알겠어요. 보고는 안 할게요."
하야토의 성격상 그런 친구를 보면 단순히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부터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녀와 폭군이 공존하는 하야토는 그런 학생을 보면 바로 수녀모드의 하야토가 되기에 어떻게든 손해를 봐서라도 챙겨주니깐 말이야.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면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으니깐. 어쨋든 치아키의 말에 하야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치아키 선배는 사탕을 고르라고 했다. 빨간 사탕과 더 빨간 사탕. 하나는 분명 딸기맛이겠지. 빨간 사탕 두 개..나머지 하나는 체리맛이겠네. 계피맛 사탕은 상상도 하지 않은 하야토였다.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덜 빨간색이요."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조언. 관찰도 좋지만 같이 생활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수첩에 적어놓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하야토 이 녀석, 치아키가 공지를 시작했을 때부터 수첩에 손을 안 떼고 있었다. 겉표지를 보면 산 지가 얼마 안 된 수첩이지만 안은 벌써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치아키의 조언을 받아적다가 마지막 한 마디에 하야토는 내적인 당황을 했다. 얌전한 척 하는 질 나쁜 양아치...
N중의 N. 파워 N 하야토의 무한회로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치아키 선배가 벌써 내 과거를 다 알아낸 건가? 혹시 오토바이 때문에? 치아키 선배가 나를 떠보는 건가? 나 반장에서 짤릴 수도 있는 거야? 학교도 못 다니는 거 아니야? 혹시 치아키 선배는 영국에서 나를 추적하려고 심어둔 비밀 스파이? 혹시 교장선생님은 내 과거를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나 이미 입학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건가? 다시 전학가야 될려나?
..........
"동감합니다. 조언 감사드려요."
하야토에게는 매우 거센 역류. 하지만 거센 역류에게 강하게 맞서려고 하면 되려 본인의 중심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렇기에 역류에는 순류로 대응한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깐.
그대... 어디 매체에서나 들어봤을 말이다 신을 섬기는 사람은 말투까지 고풍스러워지는 건가? 편히 앉아도 괜찮다는 말에 미카는 그저 발가락을 꼼질댈 뿐이다 따로 자세를 고쳐앉거나 하진 않고 소녀는 저를 불러세운 이유가 딱히 없다고 한다 모호한 대답, 그리고 제 의중을 정확히 꿰뚫은 듯한 뒷말 미카의 시선이 마룻바닥에 내리꽂힌다
"그렇네...요."
중얼이던 미카가 어투를 빠르게 고친다 아무리 보아도 이 소녀는 또래처럼 보이건만 그 말투며 분위기며 존댓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야죠."
허나 어째선지 신사라는 장소이건만 불편함, 어색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카는 소녀가 손뻗는 것을 지켜보며 입을 다문다
빨간 맛은 딸기. 더 빨간 맛은 계피. 더 빨간 맛을 고르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느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탕을 마음대로 바꿔줄 수는 없었기에 치아키는 빨간 사탕. 즉 딸기맛 사탕을 아주 가볍게, 충분히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하야토에게 던졌다. 아마 그가 놓치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놓칠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입 안에 있는 포도맛 사탕을 천천히 녹이다가 꿀꺽 삼키면서 치아키는 입맛을 가볍게 다셨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사탕 하나가 더 끌리는 탓이었다. 하지만 굳이 또 꺼내진 않으며 그는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댔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인원을 선정할 땐 그런 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해. 기껏 도와달라고 했는데 양아치 학생을 뽑아버리면 보나마나 제대로 일도 안 할 거 아니야. 혹은 자신이 따돌림을 주도하면서도 모르는 척, 아예 없는 척 해버릴 수도 있겠고."
물론 하야토는 머릿속으로 정말로 깊게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나 치아키는 당연히 그 속을 모르고 그냥 가볍게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질 나쁜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오히려 은폐가 되는 일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었으나 상대방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눈꼽만큼도 전혀 모른채 치아키는 계속해서 하야토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아. 김에 하나만 더 물어볼까. 후배 군. 그러니까 이름 보니까 하야토라고 되어있는 것 같은데 성은 뭐야? 계속 후배 군. 후배 군. 부를 순 없잖아? 아무튼 우리 후배 군은 학교 생활에 대해서. 정확히는 반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물론 이 또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학생회장이 반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도로 묻는 가벼운 질문이었기에 그는 그저 싱글벙글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하야토는 더 빨간맛이 계피맛이라는 상상도 못 한 채로 딸기맛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딸기를 좋아하지만 딸기맛 음식은 안 좋아하는 하야토. 그래도 하야토의 인상에 좋게 인식된 사람이 베푸는 호의이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주는 물건이야 어찌 됐든간에 마음이 중요하니깐 말이야. 그러면서 본인은 좋아하는 친구에게 비싼 선물을 해주면서 말이다.
"아..그럴 수도 있겠네요. 몰랐어요."
하야토는 태연하게 수첩에 적는 척을 했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 식별하는지는 굳이 안 물어봤다. 하야토는 작년에 양아치들과 실컷 굴러왔기에, 그 녀석들의 느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거든.
하야토는 자신의 명찰을 보고는 "아" 하더니, 성을 곧바로 말했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더 길게 쓰인 영어이름도 있지만 밝히진 않았다. 여기는 일본이니깐 말이야.
"류세이요. 류세이 하야토."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반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음..세상에는 '알면서도 안 하는 사람'과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반장은 후자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태연하게 하야토를 류세이 군이라고 부르면서 치아키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뭔가 상당히 모범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자신의 앞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모범답안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제 물음의 답에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허나 들려오는 대답에 그는 가만히 고개글 갸웃했다. 그냥 반장 할만해? 어떤 것 같아? 식으로 질문을 한 것이 이렇게 돌아올 것은 생각도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은 답이지 않나 생각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반장 잘 할 수 있겠어? 힘들지 않아? 해보니까 어때? 그런 느낌으로 물었는데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걸?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아. 아무튼 알면서도 안 하는 사람과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라. 그게 너의 생각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그런 반장이 되어봐. 딱히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답은 없다고 생각해. 추상적이면 어때? 그게 류세이 군의 생각이면 그걸로 된 거지."
추상적이지 않았냐는 그 물음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어도 지금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기에 딱히 난해할 것도 없었다. 이어 치아키는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알면서 하다가 무리하는 사람'이 되진 않길 바랄게. 그런 것은 아무도 바라지 않거든.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그건 멋지거나 잘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신의 역량도 모르고 행동하는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지."
싱긋 웃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진 말고 적당히 넘기라고 치아키는 대답했다. 참으로 가볍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또르륵 하고 찻잔에 따라지는 녹색 액체가 맑다. 말차가 아니라 엽차인 모양이다. 아직 김이 느긋이 솟아오르는 따뜻한 잔이 잔받침에 놓여서, 모나카 담긴 쟁반과 함께 미카에게 내밀어진다. 딱히 격식도, 절차도 없는 조그만 다과회가 되었다. 미카가 모나카를 가져가길 기다려, 소녀 역시도 모나카를 하나 집어들고 한 입 베어먹고는 자기 찻잔을 들어 소리없이 마신다.
차향이라는 게 썩 기분나쁜 향은 아니지만, 역시 맛은 조금 떨떠름하다. 달달한 모나카가 있어 다행이다.
그렇네-요, 하고 존댓말로 고쳐말하는 미카의 모습을, 노아는 딱히 지적하지 않는다. 아니, 원래라면 가미즈나 고등학교 1학년이니 16살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맞추어 자기 나이를 알려주며 굳이 말을 높일 필요 없다고 정정해주는 것이 맞는데, 아직 인간의 세월에 익숙하질 않아서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을 까먹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래, 느긋이 쉬다 가거라.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나가는 길을 알려주마."
그러나 미카가 조금이라도 방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대청마루 건너편에 놓여있는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린 가미즈나 고교 교복과, 1학년생임을 나타내는 빨간 리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