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deserve someone who loves you with every single beat of his heart, someone who thinks about you constantly, someone who spends every minute of every day just wondering what you're doing, where you are, who you're with, and if you're OK." ("너는 그의 모든 심장박동수와 같이 너를 사랑하는 사람, 너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 너가 하루종일 무엇을 할까, 어디있을까, 누구랑 있을까, 괜찮을까 매일 매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해.") -러브 로지(Love, Rosie) 中-
시율의 팔을 풀어내려하는 예담이었지만 팔이 풀리지않자 잠시 당황하면서도 학생들을 향해 으름장 놓는것을 잊지않는다. 학생들이 사과를 하며 자리를 뜬 뒤에야 시율의 팔이 풀렸고 자꾸만 목구멍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목덜미를 긁적거리는 예담이었다.
"..이게 아주 틈만나면 동생취급이야."
자신을 말려준 시율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쑥쓰러운건지 괜히 툴툴거리며 말한다. 곧이어 오른손을 들었던 시율이 왼손으로 손을 바꾼 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예담은 계단을 오르는 시율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코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시율의 손을 빤히 쳐다본다.
"진시율 잠깐 멈춰봐."
계단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냈던 시율의 모습과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시율의 모습이 오버랩 된 예담이 시율을 멈춰세운다. 그러고는 빠른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코트 주머니 속 시율의 오른손을 빼내려한다.
// 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표현이긴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전혀 귀엽다고 느껴지지 않을거라구~
예담이 툴툴거리자 시율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언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저 성질이 조금이라도 죽지 않는 한, 시율은 언제까지고 예담을 지금처럼 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게 싫지 않았다. 계속 예담을 신경쓰며 귀찮은 역을 도맡는다고 해도 그게 예담이라면 괜찮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얼른 교실에 가자며 계단을 오르자 뒤에서도 따라 오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더 투덜대지 않고 순순히 오고 있군. 이대로 교실까지만 가면 좋겠는데, 그래 순순히 가면 이예담이 아니지. 대뜸 멈추라길래 다시 멈춰서 돌아보려니 그것보다 앞서 시율의 오른손이 코트 주머니에서 뽑혔다. 가볍게 주먹을 쥔 시율의 손은 투박한 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뭐 안 묻었다. 내 손."
예담에게 오른손을 내준 시율은 태연하게 말했다. 움직일 때마다 시큰거리지만 겉으로 보기에 아직 티는 안 날 것이다. 붓기도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거니까. 여기선 잠자코 넘기고 이따 몰래 양호실을 다녀올 심산이었다. 그래서 시율은 일부러 손을 더 쥐듯이 움직여 손 안에 뭔가 숨긴 것처럼 보이게 했다. 뭔가 숨겼다면 숨겼다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시율이 자신을 동생취급하는것이 썩그렇게 나쁜 기분이 드는것만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이렇게나마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예단에게 쑥쓰럽지만 간질거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왼손도 빼봐."
코트에서 뽑힌 시율의 투박한 손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예담은 시율이 뭐라 반박하기도전에 왼손을 마져 빼내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않은탓인지 왼손과 다름없이 붓기가 없는 오른손이었지만 뭔가가 이상한지 왼손목과 오른손목을 번갈아 보던 예담이 석연치않다는 표정으로 시율의 손목을 놓는다.
"이상한데..."
평소에는 남에게 관심이 없는 예담이었건만 이럴때만 촉이 발달하는건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곧 시율의 손목에 이상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건지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자신의 교실로 걸어간다.
"난 여기. 나없어도 등신처럼 있지말고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바로와서 말해."
주머니에 손을 꽂은채 턱짓으로 교실문을 가리킨다. 그 뒤에 말을 이으며 사악하게 웃는것은 아마 '내가 반 죽여줄게.'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리라.
예담이 오른손을 보는 동안, 그리고 왼손도 뽑아가서 양 손을 비교해보고 하는 동안, 시율은 평소와 같이 심드렁한 표정에 덤덤한 말투를 내며 이예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그래야 의심을 덜 살 테니까. 실컷 보고 싶은 대로 손을 내어주고 손목을 놔준 후에도 자연스럽게 움직여 다시 코트 주머니에 꽂았다.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담을 보고 이상할게 뭐가 있느냐고 한 마디 툭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겉으로는 태연히 굴었지만 예담이 의심을 푼 듯 교실로 걸어가는 걸 보고서야 알게 모르게 했던 긴장을 슬그머니 풀 수 있었다. 조그만게 가끔 눈치만 좋아서 곤란하다니까.
"너 없어도 나 괴롭히는 놈 없다. 너야말로 내가 수습 못 해주니까 성깔 좀 죽이고 있어."
아까도 그렇고, 툭 하면 성질부터 앞서가는 예담의 성격 생각하면 오히려 이 녀석이 걱정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그 생각에 피식 웃은 시율은 예담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오른손을 꺼내 예담의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렸다. 마치 얼굴을 만져주기라도 할 듯이 가까이 가던 손은 예상과 달리 얼굴 옆을 스쳐 예담이 입은 후드티의 후드로 슥 들어갔다. 후드 안에 부스럭대는 무언가를 몇 개 떨어뜨린 손은 뒤로 물러나며 고의인지 아닌지 예담의 뺨을 간지럽게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스침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 시율은 그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시율 자신의 반에 가야 했으니까.
"쉬는 시간 전까지 그거 몰래 먹으면서 얌전히 있어라. 이따 보자. 이예담."
시율이 돌아서기 무섭게 조례종이 울렸다. 이런. 첫 날부터 지각은 안 될 말이지. 시율은 특유의 큰 보폭으로 복도 끝까지 걸어가 자신의 반으로 향했다.
진시율을 괴롭히는건 나만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예담은 겁을 상실하고 시율을 괴롭히는 놈이 생긴다면 남은 학교생활을 후회로 보내게해주리라 다짐하며 사악하게 웃는다. 하지만 곧 하긴 이렇게 덩치크고 멀대같은놈을 건드리는 놈은 없겠다고 생각하던 예담은 피식 웃은 시율이 다가오자 뭐. 라고 하는듯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러던 예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는것은 순식간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내어진 시율의 오른손이 예담의 얼굴로 다가온 탓이었다. 순간 숨을 쉬는것도 잊으며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던 예담은 뒤쪽에서 들리는 후두둑 소리와 후드안에 뭔가가 톡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자 고개를 돌리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시율의 손이 제 뺨을 간지럽히며 스쳐지나가자 시율의 손길이 닿은 곳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들었다. 또다시 간질거리는 기분과 두근 하는 느낌이 든 예담이 화들짝 놀라며 손길이 닿은 뺨을 손바닥으로 북북 문지른다.
"...야 이게 뭐하는"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전에 몸을 돌려 교실로 가는 시율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본 예담이 미간에 주름을 구기며 손에 힘을 주어 더 북북 문질렀다. 멀어지는 시율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예담은 조례종이 울리자 교실문을 연다. 예담의 볼이 붉은 탓은 북북 문지른 탓이겠지만 손도대지않은 귓가가 어째서 붉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새학기 첫 날부터 그런 일이 생긴 것도 참 그런데, 예정에 없던 부상을 입은 오른손 때문에 시율은 뜻하지 않게 쉬는 시간마다 예담을 피해다녔다. 한 번은 선생님 심부름을 핑계 삼고, 또 한 번은 주번 핑계를 대고, 갖가지 이유를 대며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비웠다가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물론 정말로 심부름을 한 것도 있지만 몰래 양호실을 간 적도 있었다. 아무리 티가 안 난다고 해도 욱신대는 손목을 그대로 두면 뒤가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그마저도 예담에게 들킬까봐 파스도 안 바르고 보호대만 착용하는게 전부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바쁘게 다니다보니 아침부터 범상치 않던 하루가 흐르는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원래 새학기 첫 날은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기도 하다. 어느새 종례까지 마치고나자 시율은 긴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나가면서 핸드폰을 꺼내 톡 하나 날려둔다.
[나 중앙 입구로 간다]
전송 확인까지 하고 시율은 생각했다. 어찌어찌 학교는 끝났는데, 이 뒤는 어떡하나. 곧장 집에 간다 할지, 또 무슨 핑계를 댈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본관의 중앙 입구까지 느린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까진 느슨히 손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입구가 가까워질 땐 자연스럽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금 부은 손목과 보호대를 감추었다. 아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걸어나가 입구 주변에서 예담을 찾아본다.
예담은 심기가 불편했다. 오늘 급식메뉴가 별로인 탓도, 소개팅에 미친 애들이 같이 나가달라며 찡찡댄 탓도, 아침에 받은 사탕중 하나를 홀라당가져가서 까먹은 친구놈 탓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시율때문이었다. 쉬는시간에 찾아갈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대며 얼굴을 통 안보이더니 항상 함께먹던 점심마저 다른친구와 먹게했으니 시율이 왜이러는지 이유조차모르는 예담은 주위에 먹구름이 가득 껴있는 상태인것이다.
거슬리는 놈 하나만 나와라 바로 팬다. 이렇게 말하는듯이 살벌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서던 예담은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얼씨구? 하교는 같이 해주시려고?"
시율에게서 온 톡을 확인한 예담은 기가차서 헛웃음을 짓는다. 내내 피해다니더니 집은 또 같이 가시게? 화면을 노려보며 비아냥거린 예담이 답장을 보낸다.
[니혼자 가.]
단 네글자뿐인 답장이었지만 불편한 예담의 심기가 가득 들어나는 톡이었다. 그때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린 예담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소미새(소개팅에 미친 새X)와 눈이 마주친다. 뭐. 왜. 입으로 뻥긋거리는 예담에게 한달음에 다가온 소미새가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도 되는것처럼 "진짜 한번만.. 응? 아, 걔네가 너 데려와야 소개팅 하겠다고 했단말이야.. 예담아 진짜 부탁한다! 형님도 연애 좀 해보자 제발!" 이라고 말하자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던 예담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갈게. 대신 나 한마디도 안하고 있는다."
그말에 소미새가 황호성을 질렀고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사이 두사람은 어느덧 중앙 입구에 도착했다.
톡을 보내고 답장은 금방 왔다. 딱 네 글자인 짧은 답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짜증은 익히 알 만 하다. 그야 이 녀석이랑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혼자 간대도 어차피 집으로 갈 테니 저녁 지나서 기분 좀 풀어주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중앙 입구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던 시율의 시야에 방금 막 나오는 예담이 딱 비췄다. 그 옆의 누군가도.
"이예담."
시율은 상황을 지켜보거나 못 본 척 같은 건 해주지 않고 곧장 예담을 불렀다. 그리고 지나가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혼자 간다더니. 뭐 약속 있었어? 아님 방금 생겼나."
없었던 약속이 갑자기 생길 일은 아마 같이 나온 녀석과 관련 있을 것이다. 시율의 무심하고 서늘한 시선이 예담 옆 학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슥 훑는다. 백날 여소니 소개팅이니 시끄러운 놈 같은데. 아, 오늘 짜증의 표현을 여기로 하시겠다? 시율은 약속을 억지로 깨느니 끼어들어볼까 싶었다. 그래서 예담 옆 학생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첫 날이라고 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냐? 자리 남으면 나도 한 자리 껴줘라. 시간 남는데."
그렇게 말한 시율은 일부러 예담을 보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이 같이 가고 싶어서 말을 한 것처럼, 보이게끔.
근데 정말로 가서 아무말도 안할거냐며 시끄럽게 조잘거리는 소미새탓에 짜증이 몰려오려던 찰나 시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시구? 이제야 얼굴을 보네? 하는 고까운 생각이 들어 눈썹을 꿈틀거린 예담이 고개를 삐딱하게한다.
"아, 뭔상관인데. 귀찮게하지말고 꺼져."
날선 목소리와 말투는 평소 시율을 대할때와는 확연히 다른것이었다. 그런 예담의 모습에 소미새의 눈이 땡그랗게 변한다. 까칠하기로 소문난 예담이었지만 단 한명. 시율에게만큼은 이렇게까지 날선 반응을 보이지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한 자리 껴달라는 시율의 말에 소미새가 예담의 눈치를 한번 보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 한명 더 늘어나는건 상관없는데.. 우리 지금 소개팅하러 가는건데, 시율이 너는 이런거 관심없지않았었나..? "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야 장땡이었지만 옆에서 시율을 찢어져라 노려보고있는 예담을 보니 어지간히 뿔이났구나 싶은 소미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잔뜩 성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운 예담의 말에 시율은 눈길도 주지 않고 전혀 누그러들지 않은 말투로 응수했다. 물론 시율 자신이 짜증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냥 흘려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 간대놓고 왠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이 조금씩 시율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 약속이 알고보니 소개팅이었다는 사실 역시.
"아, 소개팅?"
그 말을 하는 순간에만 시선이 예담에게 향했다. 서늘한 시선 그대로, 스치듯 예담을 본 시율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뭐? 너나 조용히 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시율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말투에 놀란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어이없다는 감정이 먼저 든 예담이었다. 하지만 곧 시율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고 처음보는 시율의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소개팅에 가겠다는 말이 이어 들려오자 예담의 입에서 빠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난다.
"야, 나 안가."
소미새의 어깨에 팔을 두른 시율이 자신을 무시하기까지하자 짜증을 넘어 화가나기 시작한 예담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둘 사이에 껴서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아 당황하던 소미새는 처음보는 극대노한 예담의 모습에 놀라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더니 "ㅇ...야아, 그래도 너 데려간다고 말 다해놨는데 갑자기 이러면..." 하고 말한다.
예담답지않은 차분한 목소리에 등골에 소름이 돋는지 움찔거린 소미새가 무어라 말하기도전에 몸을 돌린 예담이 학교건물을 나선다. 함께 소개팅에 가기위해 모여있던 무리중한명이 인사를 하려했지만 엄동설한처럼 찬기운을 폴폴 풍기는 예담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는다. 그런 학생을 무시하고 지나친 예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집으로 향한다.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릴 수 있는지 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어떻게 해야 기분을 더 긁을 수 있는지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시율에게 예담이 그런 상대였다. 그러나 그걸 안다고 이렇게 이용한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시율도 날이 삐죽하게 섰다. 시작은 아마 아침의 넥타이부터였겠지만, 당장의 시율은 모르고 있었다.
시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짜증을 넘어 화가 난 듯한 예담이 기어코 안 가겠다 선언했다. 직전에 이 가는 소리가 들렸으니 예상한 결과기는 했다. 덕분에 예담을 구슬렸던 학생만 중간에서 난처하게 되었으나, 시율은 이때까지도 뻔뻔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예담을 보았다.
"그래. 가던가. 소개팅은 너 대신 내가 갈 테니까."
지나가다 마주친 학생들마저 식겁할 정도로 한기를 뿜어내는 예담이 가버려도 시율은 따라가지 않았다. 저 멀리 예담이 집 쪽으로 가는 걸 확인하고, 슬쩍 한 손으로 폰을 꺼내 누나 시현에게 톡을 보낸다. 20분 후에 전화 좀 해달라는 내용으로. 그래놓고 태연하게 소개팅 권유를 했던 학생을 보고 말했다.
"이예담 빈자리는 내가 채우면 되니까 소개팅 상관없지? 가자. 시간 아깝다."
20분 후엔 '어쩔 수 없는 가족의 일'로 빠지게 되겠지만, 그 말은 하지 않으며 재촉한다. 그래야 최소한 자리에 앉았다가 나올 수는 있으니까.
이런 상태가 되기전에 구슬려 달래주던 평소와 달리 무표정한 얼굴이 시율. 그런 시율을 본 예담의 냉기가 더 폭발해버리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율의 눈을 정확히 쳐다본 예담의 입에서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데없는 절교선언에 상황이 심상치않다고 생각한 소미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뭐가 어찌되었든 소개팅에 가겠다는 시율과 나머지 학생들을 두고 집으로 돌아온 예담은 부모님이 아직 퇴근을 하지않은탓에 고요한 집 속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옷도 갈아입지않고 곧장 침대에 눕더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다. 어릴적부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땐 죽은듯이 잠만자는 예담의 버릇이 도진탓이었다.
눈을 감으려던때에 친구들의 연락때문에 핸드폰의 진동이 계속울렸고 그게 거슬렸던 예담이 핸드폰의 전원까지 꺼버린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얍! 예담주도 갱신!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졌네.. 내 늦잠은 물건너가버리고만것이야..
예담이 간 후, 소개팅을 주선하려던 학생이나 같이 가려던 학생들이 앞다투어 예담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곧 전화마저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가 나와 다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아졌다. 시율은 조용히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예담이 폰을 꺼놨다는 건 집에 곧장 갔다는 의미다. 가서 또 이불 뒤집어쓰고 자고 있겠지. 아님 자려고 하던가. 가는 길에 간식거리나 좀 사서 들러야겠군. 그 녀석이 좋아하는 떡볶이 집이 오늘 여는 날이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귀로는 다른 학생들이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보니, 소개팅은 어찌어찌 할 모양이었다. 예담은 없지만 시율이 있으니까 여자애들도 납득하지 않겠냐면서. 시율은 어차피 빠질 생각이었으니 자리만 된다면 가겠다고 했고, 곧 학교 근처 카페에서 근처 학교 여학생들과 만났다. 아니나다를까 여학생들은 예담과는 다른 시율의 등장에 서로 꺄륵대며 자리에 앉았지만, 정확히 20분이 된 시점에서 시율은 누나 시현의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오늘 아버지가 모이라고 한 걸 깜빡했었어. 난 이만 가볼게. 다들 재밌게 놀아."
아쉬워하는 여자애들이나 당황해하는 남자애들을 그대로 둔 채 시율은 카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떡볶이 집에 들러 떡튀순 한 세트 사고, 디저트를 파는 카페에도 들러 초코케익과 생크림케익도 한 조각씩 샀다. 양 손에 먹을거리를 한 가득 들고 집에 도착한 시율은 자신의 집이 아닌 예담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의 도어락은 언젠가 들었던 번호를 누르니 열렸고 내부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곳이라, 예담의 방을 찾아 들어가는 것도 마치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방 찾아가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예담. 자냐?"
일단 방문 밖에서 가벼운 노크와 함께 불러보지만 대답이 들려올 리는 만무했다.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예담의 방으로 들어간 시율은 사 온 간식들을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딱 이예담 사이즈로 부풀어오른 이불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예담의 머리 쪽 이불을 슬슬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불러본다.
"이예담. 일어나. 너 좋아하는 거 사왔어. 저거 식기 전에 먹자. 담아."
언제 쌀쌀맞게 굴었냐는 듯, 시율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이불 위로 쓸어주는 손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