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라는 조직은 그렇게까지 특출난 조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벙커의 리더인 그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다. 그나마 최근 아발란치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웬 미친 조직이 있다며 유명해지기 시작한 정도일까. 애초에 그는 눈에 띄는 요소라곤 없었다. 겉모습이 특출난것도 아니고 외부에 알려진 대단한 업적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처음 벙커에 들어온 이들도 그의 모습을 못미덥게 봤고. 실제로 현재로서도 벙커는 조직으로서 안정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벙커가 유지가 되는 이유라면, 이것도 반대로 그의 존재 때문이다. 일단 벙커와 아발란치의 개개인의 전투력은 의외로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것은 아니다. 아발란치가 조금 더 우세한 정도일까. 그렇다면 최대의 문제는 유토의 존재이다. 그녀는 벙커에게 있어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왜 그래? 지쳤나?"
그렇기에 직접 보기전까지는 아무도 상상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그가 유토를 상대하는 광경따윈. 유토가 벙커의 잡졸 따위는 눈감고도 썰고 다닌다면, 아말도 똑같았다. 둘의 힘 자체는 호각으로 보였으나 싸우는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엔 유토마저 혀를 내둘렀다.
"이 새x.. 더럽게 재미없네." "너같은 꼬마를 괴롭히고 있는 내 입장도 생각해줬으면 하는데." "뭐 이 xxx??"
도발조차 무표정하게 하는 모습은 벙커쪽에서도, 아발란치 측에서도 어이없을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피해 받은 쪽인 우리가 본래 뒷세계에 속해있지 않은 인간들이었으니 호스트의 개입일 확률이 높다는 말인가. 납득이 되었다. 우리야 그다지 범죄와 연관될 일 적고 모친께선 그런 것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다만 권력과 명예를 얻으셨으니 내가 모를 일 한두 가지쯤 했을 수도 있겠지.
"여러 가지로요? 아-."
입을 열려던 살로메는 침묵하라는 손짓에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향한 곳은 창문, 저 사람들… 아발란치? 잠깐 방금 해외라고 한 거야? 살로메는 들여다보느라 굽힌 상반신은 조심스럽게 뒤로 내빼며 그를 돌아봤다. 무언가 깨달은 듯이 살짝 눈이 커진 채 굳었다.
"그거… 간부거나 의로 받은 게 간부일지도 모른다는 소리?"
말단도 아니고 설마 간부까지 얽혀있나, 이 사건에? 선셋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진저리가 나려고 했으나, 살로메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살짝 긴장한 기색은 서려있었다.
"그리고 그건… 간부랑 전투하겠다는 거…?"
리더의 마지막 문장으로 인해. 막상 전투를 한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인 떨림은 미세하게나마 새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증오는 만반이었으나 경험은 전무했다. 살로메는 입술을 살풋 짓눌렀다가 다물었다. 다짐이라도 한 양 입매가 단단했다.
애초에 이런 뒷세계에서 간부라는게 꼭 전투력으로 정해지는것이 아니다. 돈으로 생각해본다면. 선셋 가문 자체에 간부급이 있다고해도 이상할건 없을거라며 그는 답했다.
"뭐 간부 자체는 별거 아닐테지만."
물론 그것은 그의 기준에서의 이야기였다. 간부라한들 유토에 비할 정도는 아닐테니까. 유토를 상대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간부급 정도는 별거 아닐테지만.. 살로메나 다른 조직원들에겐 그렇지 않을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살로메의 반응을 보며 무심하게도 '쫄았냐' 라고 덧붙였다.
"음, 일단 정리는 해둬야겠군."
그러나 마침 점주가 위험해보였기에 그의 놀림은 중단되었고. 그는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 살로메에겐 천천히 들어오라고 하고나서 전투가 끝날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저 아발란치 조직원 둘이 그에게 사정없이 밟혔을 뿐이다. 여전히 아발란치에겐 자비가 없어보인다.
설렁대듯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그와 사뭇 달랐다. 그는 투덜거림이 익숙하기라도 한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피가 좀 많이 튀긴 했네, 도와줬어야 하나? 그 또한 마찬가지로 안경 쓴 얼굴을 가면 너머로 빤히 마주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마주해서 알겠지만 내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지, 자네처럼 청소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피 굳기 전에 미리 왔어야지.”
아니지. 애초에 일하는 게 다르잖아. 그에겐 마땅한 청소 도구가 없었다. 관 뚜껑을 닫으려던 찰나, 그가 고개를 잠시 돌려 시체를 쳐다봤다. 눈도 못 감고 죽은 시체, 남성, 시체, 남성.. 두 번 정도 훑고 아예 멈추는 걸 보니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의 침묵하는 특성 때문인지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야 대답이 나온다.
“그… 보통 사람은 이 정도면 죽소.”
가면 너머로도 노골적일 정도로 황당한 시선이 비쳤다. 아발란치 놈들은 이 정도에도 안 죽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뿐, 다음 번에 이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할 때 지저분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지, 어차피 뒷세계에서 서로 죽고 죽여가며 살면서 생긴 버릇인가? 자기가 있었던 자리를, 자신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 남기고 싶은 게 본능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편하고 좋겠어, 시체만 덜렁 들고 가면 되고."
쯧, 할 거면 시체까지 정리하고 가던가. 꼭 뒷정리할 걸 남겨놓는다고 투덜댄다. 대답이 또 한참 걸려 돌아오니 기다리는 동안 미간을 찡그리고 발을 탁탁 두드리듯 땅에 딛는다.
"그거야 모르는 거지, 어쨌건 확인은 해야 돼."
꺼내주지는 않겠다는 듯,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말에 꺼내주면 어디 덧나냐며 한소리 덧붙인 뒤 핏자국을 밟아가며 관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윽, 피냄새.
타이르듯 천천히 얘기했다. 비록 죽은 사람이 뒷세계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인 건 똑같았다. 어느 조직에 소속이 되어 새 가족이 생기고, 죽고 죽여도 흔적이 남아봤자 남겨진 사람들만 괴로울 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죽음은 숭고하고 그 이후의 길을 책임지는 것이 장의사와 청소부라고.
“그쪽 보기에 편해 보인다면 앞으로 시체가 있는 곳은 스스로 닦고 가겠소만, 겉치레로만 닦을 게요. 나머지는 알아서 하셔야지 않겠소.”
투덜거림과 달리 친절한 목소리였다. 이후 침묵과 황당한 대답이 오갔을 때, 그는 다시금 아발란치의 생존력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가 3년 하고도 반이나 벙커의 일원으로 아발란치를 맞닥뜨렸지만, 이상한 능력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내구성은 사람과 같았는데.
“그렇다면야.”
새빨간 발자국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그가 시체를 덮은 부드러운 재질의 천을 치우자 관 속에는 배가 텅 비고 눈을 뒤집어 까 죽은 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다시금 마주했지만, 피냄새나 시체의 끔찍함에도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덤덤하게 물었다.
푸념에 잠시 남성을 쳐다봤다. 기술을 배운다 쳐도 뒷세계에 소속된 이상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미간을 찌푸리자 생각이라도 읽힌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이 시체 주변을 닦겠단 말에 툴툴대기 시작하자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면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보다시피 전문성이 없어서… 그쪽이 전문적으로 해준다니 고맙구먼.”
남성이 전문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좋았는지 가면 속 미소가 오래갔다. 그래도 할 마음은 있구나. 조금만 더 북돋아주면 의욕 있게 하지 않을까 싶어 유도했다. 남성이 시체를 확인하고 천을 덮었을 때 그는 천의 구겨진 매무새를 정리하듯 조심스럽게 손으로 끄트머리를 쥐어 위로 당겼고, 마찬가지로 남성의 시선을 좇아 눈을 마주쳤다.
“오래 일하면 익숙해질게요.”
그는 처음부터 비위가 좋은 덕분에 이런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지만, 타인은 아닌 걸 알기에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그는 관 뚜껑을 덮으려다 멈추고 다시 내려둔다. 남성이 손을 짚은 것도 있지만, 물어보는 질문이 황당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소만.”
신경을 긁어 보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대화를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지금껏 살아온 결과 보통 이런 일이 있다 보면 심상찮은 뒷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