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떨어진 명부, 그걸 줍지 않고자 하는 당신. 명부를 떨어뜨리고자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가죽 자켓을 입은 여성은 손을 뻗어 그를 대신 주워주는 대신 자켓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를 택했다. 당신이 말을 잇기를 기다린다.
당신의 속이 어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 사람의 운명 알 수 있음이 사람의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기다린다. 그 정도의 시간은 감내해줄 수 있는 사이었다. 우리는.
"... 너무해요, 사수. 제가 평소에 뇌를 빼놓고 다니는 작자처럼 보였다는 말이에요?"
뭐, 부정할 수는 없다. 제 행실이 가벼움을 알기에 투정은 가볍게 끝낸다.
"고마워요. 역시 우리 사수님은 '우등생'이시라니까."
당신의 대답이 자신한테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 당신은 알까? 나의 월권 행위를, 중대한 실책의 가능성을 눈감아 넘어주겠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키던지. 손바닥에 났던 땀을 자켓 주머니에 두고 나온다. 아이가 죽는 그 날에 휴가라도 내어 나의 일처리를 모른 척 하라 덧붙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무사하겠지.
"......"
갈색 눈동자가 당신을 가만히 응시한다. 당신이 이런 질문을 한 까닭을 가늠하기 힘든 탓이다. 아니... 애초에,
"... 변명이 아니라 제가 진짜 진심으로 지금까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큰 결심하고 털어놓은 건데요?! 와, 진짜, 배신감! 지금까지 제가 한 말 안 믿고 계셨던 거죠! 그쵸!!"
충격받았다고 가짜로 우는 척을 한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노력이요, 그녀의 천성대로 한 행동이기도 하다. 훌쩍훌쩍, 눈물 닦는 시늉이 어느정도 끝났을까.
>>353 길다기에도, 짧다기에도 적절치 않을 만큼 미묘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당신의 사수는 다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감정의 흔적이 잦아든 눈으로 당신을 응시했다. 익숙한 표정, 여느 때 줄곧 보아 온 냉정한 선배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냉정한 얼굴에 드물게도, 어색하긴 해도 나름 공이 들어간 미소가 드러났다.
"고마워."
그 말, 내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려나.
두 걸음 정도, 그녀의 모습이 뒤로 물러났다. 그만큼 표정도 밤의 어둠에 가려 흐릿해졌다. 직전의 미소도, 사의도 사그라들고, 이윽고 어둠에 기대어 만든 평정으로 그녀는 다시 선배이자, 사수로서 경고의 말을 남겼다.
"그래도, 적당히 해줘. 위에서 감사 나오면 곤란해지니까. 지금까지 커버해준 적도 없지만, 위에서 직접 확인하는 건 더더욱 내가 손 못대."
보고한 적도, 아직 한번도 없었지만.
이윽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마천루의 빛에 간신히 드러나던 싸라기눈보다 창백한 얼굴도 머리칼에 가려졌다. 머리카락도, 코트도, 바지며 구두도, 이제는 정말 어둠의 일부인 것처럼 검은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신에게 보여진 그 검은 뒷모습은 어둠 속의 묘한 요철이었다. 무언의 감정이 담긴.
"눈 온다."
아까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겨울밤의 적막이 희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얀 겨울의 색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빛도 서서히 밤의 저편으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그녀는 천천히 육교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새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빛이 육교 바닥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 하얀 색 사이로 여전히, 당신의 발치에는 명부의 검은 표지가 아까와 같이 놓여 있었다.
아⎯특수진압반 녀석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볼펜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둔 채 걷는 자세가 불량하다. 불만의 대상으로 보이는 특수진압반,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세상에 초능력이란게 난 것부터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초능력이 세상에 나타났다. 초능력으로 좋은 일만 하면 참 좋을 일인데, 악용해서 범죄를 일으키는 놈들이 나타났다. 그럼 그 녀석들을 잡아넣겠다는 초능력자들도 나타날 것이다. 근데 일반 시민이라는 신분으로 날뛰게 두자니 이쪽도 저쪽도 골칫덩이라서,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고, 나쁜 놈들 잡는 놈들은 경찰이니까⎯특수진압반이라는 것이 생겼다. 한 마디로 초능력 쓰는 놈들만 잡는, 초능력 쓰는 경찰들이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한테 왜 불만이냐면야, 이 사람은 특수지원반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좀 얌전히 좀 합시다, 예? 초능력 쓰는 냥반들 화려한 거 알겠다만 뒷처리하다 죽겠다고요. (싸우는데는 하릴 도움 안되는 초능력이래도 치유는 치유. 쓸모는 넘쳤다.) 내가 병원을 차렸으면 지금 떼부자일걸, 쯧. (오늘도 현장에서 새빠지게 지원 나와 구르고 구른 탓에 피곤함에 찌든 모양이다. 그러다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매우 어색하게 눈길을 피하고 냉큼 바닥을 쳐다본다.) 아이쿠, 누가 길바닥에 쓰레기를! (어색하다.)
>>356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어색해하는 상대를 향해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머쓱하나마 넉살좋게 인사를 건넨 것은, 크고 둥글둥글한 체격을 가진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한갈리로 묶어내렸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곱슬머리는 곧 풀어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구겨지고 군데군데 올이 풀어진불편해보이는 제복 오른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특수진압반 반장 도라희 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애석하게도 상대의 푸념을 듣고 말았으나, 화를 낼 의향은 없는지, 여성, 도라희는 살갑지만 예의바른 투로 말했다.) 저희 뒤처리 해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다들 살살하고는 싶은데 적당히하다가 범죄자를 놓칠까봐 매번 신세지게 되네요. 저희도 부상자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밖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특수진압반 사무실로 와주시고요.
>>358 아, 예, 안녕하십니까. 특수지원반 선우 산입니다. (주울 것도 없는 길바닥을 보며 어색한 연기를 하는 건 그만두었다. 부러 딴청 피우러했던 게 오히려 더 머쓱함을 불러왔고, 뒷목을 쓸어내리며 멋쩍어하다가도 예를 갖춰 바른 인사를 한다. 짜증과 불만이 드러나던 목소리가 헛기침 한 번에 수그러들었다. 말투도 삭 바뀌었고. 상대의 차림을 보니 여태 궁시렁거렸던게 좀 낯부끄럽기도 하고. 누가 들을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다, 진짜로. 원래 보는 눈 듣는 귀 없을 때는 나랏님 욕도 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일선에서 제일 고생하시는 분들한테 못할 소리 했습니다. (입 발린 말이라거나 직위에 눌렸단들 할 말 없을 만큼, 본인도 제 태세 변환이 우스워서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 했다.) 도움……….…. (다시 길바닥을 빤 내려다보더니, 허리 숙여 보도블럭 사이 핀 꽃을 똑 꺾는다. 입바람으로 호 불어 먼지를 터는 듯 굴더니 곧장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핑 생기가 도는 것도 같고.) 도움은 제가 드려야할 거 같습니다만. (손을 내민 이는 멀뚱멀뚱 당신을 바라본다.)
>>360 아, 소개가 늦었네요. 특수진압반 반장 도라희라고 합니다. (그냥 지나갈 걸 그랬나? 피차 퇴근길일 텐데. 아니다, 꼴이 이래서 모른 체 했어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겠지. 저와 마주치기 전과는 달리 수그러든 태도로 인사하는 산을 보며, 자기소개로 화답했다.) 아이고, 오죽 고생스러우시면 그러셨겠습니까, 요즘 부상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인데요. 괘념치 마십쇼. (퇴근하는 사람 오래 붙잡아두면 안 되지. 나도 얼른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마눌님이랑 공주님한테 부비고 싶다구. 그런 상념과 함께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던 라희는, 다음 순간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아니, 저 사람. 흙 먹... 아니 꽃을 먹는다? 길가에 핀 걸? 요즘은 길가에 난 채소도 중금속 나온다고 안 뜯는데, 저거 먹어도 돼...?! ...아, 아니다. 저 양반 능력이 해독같은 건가보지 뭐. 부럽다, 우리 공주님이 쑥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 능력이 있으면 길가에 핀 쑥도 정화해서 갖다가 뭔가 맛있는 거 해서 바칠 수 있을 텐데. 뭐, 그냥 시장 들러서 쑥이나 쑥인절미를 사가도 되지만. 놀란 티가 역력했을 표정을 애써 수습하는데, 산이 뜻밖의 말을 건네며 손을 내밀어왔다. 도움? 내가? 여기서? ...아, 내 꼴이 상당히 부상자같겠구나. 퇴근했거나 퇴근중이실텐데도 성실하시네.) 아이고, 아닙니다.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치료는 확실히 받은 상태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퇴근 길이신 것 같은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요.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칼은 쓸 줄 아나?(고급스러운 재질의 흰 천 보따리에서 팔뚝보다 살짝 긴 길이의 단검을 한 자루 꺼내 당신에게 던져 준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사제는 구마 중에 날붙이를 만져서는 안되니까. 가지고 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쓰되, 휘두르지는 마. 축성된 물건이니까. (불안한 미소와 함께 혀를 날름거리고는, 이번에는 낡은 헝겊 주머니를 꺼낸다.)미안한 소리지만 이 근방은 소금이 귀한 곳이란 말이지. 이것밖에 못 구했으니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어. 중심원만 소금을 쓰고 외곽과 내부는 편법으로 할 수밖에.(주머니를 살짝 기울여 소금을 조금씩 뿌려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성흔은 아니지만, 내 피에 기름부음 좀 해주면 의식용으로는 쓸 수 있겠지. 이럴 때는 성유보다 성수가 신통한 법이지만, 물로는 오망성을 못 그으니까. 수상진을 사용할 여건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서 그 칼, 휘두르지 말라고 한 게 방금 전이기는 한데, (당신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는)살짝만 찔러 줄 수 있을까? 아주 얕게.
그, 그런 규칙이 있는 거군요! 죄송해요. 아직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온 게 없어서… (이어지는 자책. 허둥지둥하더니 단검을 꽉 붙들고서 요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불안한 미소를 발견한 뒤에서야 조금 움직인 듯 만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소금으로 그려지는 원의 시작과 끝을 동그란 눈으로 좇는다.)아무리 선생님이 편법으로 하셔도 제가 공들여 한 것보다는 훨씬 그 효능이 좋겠죠. 암요, 그렇고말고. 애초에 저 같은 건 왜 태어나서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도 따라오지 말 걸 그랬어. 죄송해요 선생님…………(중얼중얼중얼) 아! 네, 기름 부음. 네에. 알겠어요.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윽. 아프실 것 같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 아프게 해볼게요. 죄송해요…… (연신 무언가에 사죄하더니 덜덜 떨리는 단검이 상대방의 손바닥 앞에 도래한다.)아주 얕게. 아주 얕게. 아주 얕게…… (단검이 지나간 자리에 선명한 핏방울들이 일직선으로 터져 나온다. 긴장. 불안. 염려. 등으로 단검은 꽤 깊이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아, 아이고…
흡.(칼에 찔린 순간 짤게 숨을 들이쉬고는, 찡그린 표정 그대로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마룻바닥에 댄다.) 자책하는 것 치고는 솜씨가 좋은데. 날에 묻은 피는 닦지 말고 털어내게.(그대로 손을 움직여 소금의 원 안쪽에 피의 원과 문양을 그려낸다. 파상풍이 걱정되는지도 않는지.) 아, 그리고, 꼴에 꼰대짓 할 생각은 없지만 말해두겠는데, 마음 좀 편히 먹으라고.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문양이 완성되자, 손을 떼고 보따리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낸다.) 자기비하할 필요 없어. 불안한 건 알겠지만, 적어도 무지하거나 서툴러서 일을 망칠 거라는 걱정 따위는 전혀 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결국에는 이런 요식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야. 정말 핵심이 되는 의례였으면 편법으로 했을 리 없잖아. 그런데 그거 아나? 구마 예식을 하다 보면 이런 과정의 8할은 약식으로 넘기는 게 일상이란 말이지. (병 속의 기름을 피의 원진 위로 조금씩 흘려내며 마저 말한다.)요컨대, 중요한 순간에 가장 성패를 좌우하는 건 이런 준비절차보다도 나나 자네의 정신이라는 거야. 지금 하는 준비는 그저 부담을 보조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고. 그러니까 절차를 다 망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 걱정은 내려놓으라고. 영혼이 가장 준비되어 있어야 하니까.(그러고는 입술을 깨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이윽고, 기름을 다 따라낸 다음에서야 피 흐르는 손바닥을 지혈하기 시작하며 말한다.)거울을 하나 부탁했었는데, 마련해 왔나? 없으면 물동이를 대신 써야겠고. 용도는 알고 있지? (씨익 웃어 보이며)긴장도 풀 겸, 직접 해봐.
(상대방이 내는 음성 하나하나에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 날에 묻은 피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털어내는 것 성공!) ……선생님은 정말 잘 참으시는 것 같아요. 뭔가, 뭐랄까, 존경심이 막 샘솟고 그러네요…… (중얼중얼중얼중얼) 마, 마음을 편히! 넵! (등이 꼿꼿하게 펴지면서 탁하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기어들어 간다. 꼼질대는 손가락.)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위로되고…… 심장도 가라앉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중요한 건 영혼. 중요한 건 영혼.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보며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젠장!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만약 이번이 망한다면 십중팔구 기름기만 가득한 제 영혼 탓입니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마음속으로 가슴 100번 두들겼을까, 지혈하는 선생의 모습에 서글퍼진다.)거울은 여기 가져왔어요. (까먹지 않고 잘 챙겨온 본인에게 1초 뿌듯. 폭설이 내린 새하얀 머릿속은 답이 없다.)아…………… (삐걱대는 움직임) 네에, 거울이, 거울은 이렇게 하던 거였나…… (거울을 피로 된 원진 안에 둔다. 이게 아니면 어떡하지? 이제 막 선생이나 빨빨 따라다니는 초짜가, 그것도 걸핏하면 공황에 빠지는 초짜가 제대로 뭘 알겠는가. 파리해진 얼굴이 추운 듯이 떨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선생을 본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슬며시 손을 뻗어 놓여진 거울의 방향만을 약간 돌린다.)좋아, 잘했어. 빼는 것 치고는 이론에도 모자람은 없군. 이대로만 하자고. 어께 좀 펴고.(계속 격려해주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의 태도가 걸리는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러면, 일단은...... 준비 끝이군. 우리 신도분께서는 이 진 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2층에 계시니, 구마 예식을 행하면 '그것'만 여기(거울을 가리키며)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는 자네가 저거 들고 32교구에 전달하면 되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지?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게. 내가 잘 참는 것 같다고 그랬나?(갑자기, 대뜸 지혈된 손바닥을 당신을 향해 바짝 들이밀어 보인다. 말라붙은 피로 빨갛게 물든 손바닥이다.) 명심해. 몇시간 뒤면 뼈져리게 느낄 테지만, 물리적인 상해나 위협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악마는 자네가 가장 약할 때, 자네의 귀, 머리, 마음 속에서 일을 시작하는 법이지. 예식의 다른 모든 부분은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찌할 수 없어. 그런데도, 만약 정말로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말을 삼킨다.) ...일단은, 햇빛이 충분히 들 때까지 시간이 남았어.(진작에 박살내 둔 서쪽의 창문과 벽을 가리킨다.) 밥이나 좀 들면서 마음을 다스려 보자고.(하얀 보따리에서 제병과 포도주를 꺼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옛 선조들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다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쩌할 도리 없이 그것조차 의심스럽다. 여성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눈 앞의 남성을 침묵과 함께 응시한다. 저고리 품 안에 숨기고 있는 단도만이 그녀를 지켜줄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는 인간이라고도 호랑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비린 핏내음에 어질거리는 정신을 붙잡고 옅게 살랑거리는 흑호의 꼬리를 애써 무시하려 하며, 그녀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삼켜낸다.
"......그거, 어디서 나셨는지요."
그가 보여주는 갓끈 역시 그녀에게 거센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기저에 의심 어린 분노 역시 조금씩 스며드는 것 치고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간접적인 대답은 되었을 것이다.
(낯을 점령하고 있던 먹구름은 잘했어— 한 마디에 쓸려내려간다. 눈꼬리가 기분 좋게 곡선을 그린다. 헤헤. 천치들이나 할 법한 웃음도 흘리면서 다시금 상체를 바로 세운다.)감사해요… 거울은 맡겨만 주세요! (상대방보다 한 박자 느리게 천장을 쳐다보고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1시간 이어진 적은 드물다.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온다. 갑자기 나타난 빨간 손바닥이 그것들의 행군을 저지한다. 보고만 있어도 자신의 손바닥이 쓰린 것만 같아서 시선을 아래로 박았다.) 유약하고 연한 부분만을 노리는 악마들은 참, 이기적이네요…… 저는 정신도 남들보다 물렁거리고 운동 같은, 신체적인 부분도 서투르지만…… (상대방을 정결하게 바라본다.)신도님과 선생님…께 든든한 부분이 되어드리고 싶……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붕붕 내젓는다.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네, 네! 도중에 시장해지시면 안 되니까요. (뚝딱뚝딱 물과 휴지, 컵 따위를 꺼냈다. 보조자의 역할에서 흠잡을 만한 부분은 없었다. 뚝딱거리는 보조자는 대강의 차림을 마친 뒤에 짤막하게 기도했다. 눈을 무겁게 뜨고서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늘 그랬듯이, 신도님이 좀 걱정되긴 하네요.
잡아먹었다는 간단한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여성은 핏기가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충격에 휘청일 것 같은 두 다리를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붙들고 간신히 꼿꼿하게 서 있다. 실종된 것은 몇 달 전이었는데 이제서야 잡아먹었다니. 제가 반 시진이라도 더 빠르게 찾아내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의 손가락에 붙들려 위태로이 흔들거리는 갓끈마저 애처롭다. 그 이의 미소마저 피로 얼룩진 것 같다.
"믿는다고 하면 제게 돌려주시려는지요?"
여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놀라울 만치 조용하고 침착하다. 인간답지 않은 소리나 납작 누워 위협하는 흑호의 귀에도 변함 없이. 분명 공포심 역시 그 마음 속에는 있을테지만, 지금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읽기 힘들었다. 또다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닌 말을 꺼내는 것 조차 호랑이 영물이 아닌 그저 평범한 존재를 대하는 것과도 같은 태도다.
(회의에 찬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표정이 부드러워진다.)아주 좋은 말이군. 입은 대개 우리 몸에서 성령과 가장 먼 곳이라고 하지만, 자네 말에는 정말 필요한 언어가 있어. 지금 그 말을 잊지 마. 순수한 선의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니까.(몇십년이나 엑소시즘을 해왔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자신이고, 사람을 보는 감식안은 여전히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이 허점투성이 부제의 입에서, 오래 전 떠난 누군가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들었다는 것에 희망을 느끼며, 당신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접을 수 있었다.) (제병을 건넨다.)당장은 괜찮겠지만,(역시 염려하는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오늘을 넘기기는 힘들지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더군. 계획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게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겠지만, 자네가 말했듯이 유약하고 연한 부분만을 노리는 게 악마니까, 주께서 우리의 약함을 살피시길 바랄 뿐이야. (컵의 4분의 1 가량 포도주를 따라 건넨다.)마시게.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나는 아직도 예식 자체보다는 신도분을 사전 처치해 두는 게 가장 곤혹스럽단 말이지. 사람 구하기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주의 어린 양을 물리적으로 붙잡아다가 어디 묶어놓는 짓을 매번 해야 하니 원...(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
"돌려줄까?" 짓궂은 질문을 하면서 그 웃음기는 통 지워지질 않는다. 손에 위태로이 붙들린 갓끈은 작은 바람에도 떨어질듯 하다.
"걘 네가 무서운거 잊고도 나랑 실랑이할 정도로 소중히 한다는거 아니." 낮은 목소리 공기중에 울리는 것이 음산하다. 그의 초점이 여성의 얼굴에서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시선은 곧 종점에 닿고, 그곳은 그녀가 단도를 숨긴 품 부근이였다. 육안으로 보일리 없으니 신사답지 못한 우연일 수도 있겠다만, 그의 입꼬리 피식 당겨지는 꼬락서니 보아하면 글쎄.
"왜 그리 아껴." 되묻는 목소리는 차분하다. 여성더러 얘기 해보라는 듯, 쫑긋 세워진 귀는 그 안의 숨겨진 흰 솜털을 내보였다.
(온화한 듯한 상대방의 말이 줄글로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은 부드러운 깃털을 만지는 것과 유사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은 꼭 정제된 기도문 같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 공황 속에 놓여도 선생의 말 한 마디만 있다면 출구를 찾을 자신이 있다.) 신도님께도 선생님의 말씀과 제 말이 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왜 굳이 상대방을 선생님이라 칭할까?) 악마의 말이 들리고 있을까요…… (제병과 포도주를 건네받았다. 자세를 고쳐 앉은 뒤, 마른 입에 살과 피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의 악습은 가만히 있지 않고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리게 했다.)주여…… (중얼중얼중얼) 아까 신도님을 조심스레 묶는다고 묶었지만, 생채기가 난 것 같아 마음이 쓰여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알지만. (뚫려있는 서쪽을 바라봐서 해를 확인했다.)선생님, 선생님이 보시기에 오늘의 악마는 어떤가요? 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신도님의 얼굴만 봐도 이곳저곳이 가려운 것 같고, 괴로워서. (곧 구마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에 괜스레 손이 떨렸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기도문을 웅얼거린다.)싸우고 있을 거야. 우리를 대신해서. 말했듯이, 귀와 머리와 가슴에서 악마는 일을 시작하니까. 사람에게 들린 악령은 몸의 바깥으로 1할의 악의를 던지지만, 남은 9할은 유혹과 압박을 위해 쓴다고 하던가.(우울한 안색으로 주의 살을 받아들인다. 제병을 삼킨 뒤 이어 말한다.) 몸을 묶을 때 내 묵주를 두고 왔어. 임시방편이지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테지. 무슨 악마인지는, 잘 모르겠군. 예로부터 뭇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여러 악마들을 규명하고, 구분하려 들어 왔다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그 악마들도 모두 주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이고, 선의로서 주께서 임하시길 기다리는 우리는 악성보다는 선성을 보고 일해야 한다는 것 뿐.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조금씩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한다.)지금까지의 추이를 봐서는 아마도 몰록의 권속이 아닐까 싶군. 수준으로 보자면야, 대개 이 땅에 발 들이는 조잡한 악귀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는 듯 한데. 악마학은 미지의 영역이 많으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우리 신도님의 증세만 봐서는 그래.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음, 오늘만 세 번째, 아니, 네 번째로 말하는 건가?(조금 표정이 풀려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린다.) 정신이 꺾이지만 않으면 어떤 악마라도 자네에게 죄 주지 못하리라는 것. 교만하지 말고, 공포를 품지도 말고...(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린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음, 그런데, 좀처럼 석양이 들지 않는군. 몇 시지? 햇빛이 충분히 들어야...(쿵, 갑자기 천장에서 들려온 굉음에 사색이 돼서 벌떡 일어난다. 떨리기 시작한 손에서 멎었던 피가 다시 방울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전 구마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신도님도, 고통을 털고 웃으시면서 집으로…… (보기 힘든 긍정적인 말의 연속. 끝맺음을 못 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한 층 더 단단해지는 데에는 충분히 기여했다.)예전에는 왜 주께서 악도 빚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가끔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위에서 고전 중이신 신도님이 고성을 지르고 우시는 모습을 몇 번 봤어요. 그때마다 제 정신은…… 제 정신은 아직 미성숙한 거겠죠. (악령에 씐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주 잘 안다.)…몰록의 권속. (너무 빛바랜 시간.)32교구에 전달되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나중에는, 악마학을 좀 공부해보고 싶어지네요. (눈을 찡긋거리는 상대방을 보고 편안한 미소를 띤다. 이 역시 보기 힘들다.) 공포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고, 지식도 쌓고, 선생님한테 도움도 되고… (굉음과 동시에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천장을 쳐다보는 것 대신 한 일은, 흐르기 시작한 피를 마주하는 것.)…안 좋아요. 선생님, 이거 안 좋은 상황이에요! (물로써 자신의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거울이 있는 쪽을 보았다.)아…… 선생님. (주를 부르는 것 대신 선생을 부른다. 그려둔 진이 묘하게 뒤틀려 있고 거울은 금이 가 있다. 어디선가 비명까지 들려온다.)
(소리와 함께 막간의 안식도 깨진다. 왜 주는 악을 만드셨는지, 악마학을 배우고 싶은 이유는 무언지, 그런 마음을 추스리게 해 준 대화들이 대답할 새도 없이 모두 세상 바깥으로 끌려나가고, 아까와 같은 공간에 이제는 싸늘한 공포만이 있다.) 대체 무슨...(멀쩡한 쪽 손에 힘이 풀린 듯, 보따리를 놓쳐 떨어뜨리고 만다.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작은 회중시계는 침이 멋대로 돌아가고 있다.) (어질거림을 느끼는지, 피 흘리던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에 어둠이 덮히는 것만 같다. 손바닥에서는 붉은 피 대신 구더기가 기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염병. 분명 제대로 고정시켜 뒀어. 진 안에서 밖으로 힘을 뻗을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대체, 대체 무슨...(패닉이 온 듯 중얼거리다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다. 창백해진 표정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을 되뇌이다가, 문득 이마에서 손을 떼어낸다. 벌레가 들끓던 상처의 모습은 환상이었을까, 다시 보니 그저 피가 흐르고 있을 뿐다.) 미, 미안하군. 이럴 때가 아닌데. 말마따나...(약간 더듬거리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다가도,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쓸데없는 말을 끊어 버린다.) 일단은, 조치를...(말의 뒷부분이 흐릿하다. 당신에게 닿았어야 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이 닿지 않는다.)
(기능을 상실한 회중시계를 보고 있자니 시야가 이지러지는 것 같았다. 참으로 독한 악마구나!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좀먹히는 상황에서 정신을 붙들어 매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 잘하지 못해도, 일단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상대방의 창백한 얼굴에 입은 저절로 다물어졌다. 이마에 묻은 피. 우선 선생님의 손바닥 출혈을.) ……(부제는 상대방의 손바닥에도 물로 십자가를 한 번 긋더니 자신의 품에 있던 목재 십자가를 꺼내 쥐여 주었다. 짧은 기도를 마치고 상대방을 본다.) ……엄청 무섭네요. (가만히 있으면서 상대방의 잘려나간 지시를 기다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부제는 가져온 성수를 천장에 뿌렸다. 빈 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전한 굉음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목도와 산사나무를 한 손에 쥐고 고민하기를 수 초. 천장에서 검은색 진흙 같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죠. 선생님…… 당혹스러움에 잠겨있기도 잠시 선생의 머리 위로 꽤 큰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자 팔을 크게 휘둘러서 쳐낸다.) 신도님을 데리고 나와서…… 도, 도망가야 할까요…… (한 뼘 가깝게 상대방을 본다.)
...!(당신이 조치를 취한 순간 숨을 헐떡인다.) 고마, 고마워. 추태를 보였군. 구마 사제로서 후배를 보호는 못할 망정...(자책하며 떨어진 회중시계에 손을 뻗다가, 돌아가는 침을 다시 보고는 흠칫한다.) 도망은, 의미 없겠지. 아니, 도망가면 안돼. 영문 모를 일이지만, 이미 악마가 세상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보였어. 신도님께선 아마도 이미...(말을 삼킨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손 안의 십자가와 무사히 아문 상처를 망연히 보다가, 짧게 기도하고는 십자가를 당신에게 돌려준다.)이제 괜찮아. 1층은 아직 안전지대니까. 2층은 진작에 암실로 조성해 뒀다. 위험한 방식이지만, 2층을 악마에게 양보한 대가로 지금같은 사고 하에서도 당장은 놈의 영향력을 제한시킬 수 있어. (거칠게 발을 써서 중심원의 소금으로 찌그러진 진을 덮는다. 그러자 진흙도 떨어지지 않는다.)이 진은 층과 층을 잇는 통로였는데, 악마가 역이용했군. 여길 통해 우리에게 간섭했어. (한숨을 쉬며 보따리를 털어내서, 마지막으로 촛대를 꺼낸다.) 지금은 일단 내 판단에 따라 주겠나? 십자가는 품에 넣고 성경을. 수신호를 정하지. 서로의 목소리는 곡해될 수 있으니까. (무슨 수를 썼는지 초에 쉽게 불을 붙인다. 촛불 앞에 손을 비춰 보인다.)손동작으로 숫자를 알려주면, 그 페이지를 읽으면 돼. 이대로 2층으로...(다시 미련이 남은 눈으로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다, 못내 걸음을 뗀다.) 간다. 마음의 준비를 해둬.
(삼켜지는 말을 듣고 있자니 시야가 흐려졌다. 가엾은 영혼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고통에 어디까지 발버둥쳤을까. 이런 부류의 슬픔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 모양이다. 검은 소매에 눈물 자국이 남았다. 삿된 것들을 구축한다는 꿈 아래 사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애. 악마가 자신을 그렇게 볼까 덜컥 겁이 났지만 진흙이 멈추었기에, 그가 밝힌 촛불이 눈 안으로 들어왔기에, 눈물과 두려움은 말라갔다.)……네, 네! (성경을 급하게 꺼냈다. 상대방을 따라 층계를 밟으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회중시계가 눈에 밟혔다. 그의 미련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결국 흰 천을 회중시계 위로 덮어두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걸음이 멈춘 곳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생각보다 더한 농도에 눈을 껌뻑.)선생님…… 제 앞에 계시죠? (팔 휘적이다가 촛불 발견하고 안심하는 표정. 성경을 만지작거린다. 곧 시작해야 한다.)신호…… 주시면, 읽겠습니다.
(당신의 발걸음 앞으로 삐걱이는 널빤지의 비명과 함께 조용히 걸어나간다. 계단까지, 그리고 층계를 오르기 시작한다. 점점 어둠이 짙어질수록, 흐리멍텅해지는 정신머리를 애써 부여잡으려 하지만, 녹록지 않다. 그래서 조금 늦게 대답이 나온다.)그래. 앞에 있으니 잘 따라오라고. 읽을 때는 빛이 필요할 테니 더 가까이 붙는 게 좋아. 아마도 자네라면, 필요한 구절은 외우고 있을 듯 하지만서도. (이후로 약간,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어 묻는다.)이런 상황에 할 이야기는 아지만, 하나만 물어도 될까? 그, 요즘은 유달리 기억력이 나빠져서 말이야. 간혹은 구면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낮선 사람에게 익숙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어. 특히나 보통은 안 듣는 소리를 들으면 괜히... 그런 병리가 더 도드라진단 말이지. 흠.(마지막 몇 마디는 살짝 잠긴 목소리가 되더니, 헛기침다.) 별 뜻 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나? 싫은 건 아니지만, 부제...한테,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건 좀 낮설다고 해야 할지, 참...(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해묵은 옛 기억을 되짚는 듯 목소리는 회한에 차 있다. 어쩌면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서 광원 하나에 의지해 움직이고 있으니 겁이 하나둘씩 축적되기 시작했다. 몸을 가까이 움직이니 열이 좀 더 짙게 느껴졌다. 성경책을 훑으며 약식으로 조용히 웅얼거렸다. 걸림돌이 되기도 싫었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거룩한 대천사들과 천사들이여,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상대방이 질문을 던질 때까지 성경을 입에 올렸다. 이내 책을 덮고서는.) 아, 그,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보네요. 별 건 아니고…… 신부님, 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달싹이는 입술. 여전히 얘기하기 힘들다.) 너무 제 편의대로 했죠, 나중에 천, 천천히 바꿔볼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물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본다. 눈치가 엄청나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서 붕 뜬 느낌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뒤 이어지는 말.) 아, 회중시계? 제가 천을 덮어두고 오긴 했어요. 일반적인 천은 아니니까…… 다 끝난 뒤에 들고 가도 될 것 같아요. (갑작스레 떨어지는 자신감!) 아마, 아마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전방 주시한다.)
(당신이 여러 구절을 암송해 준 덕분인지 조금은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한다.)괜찮아. 바꾸지 않아도. 그냥 그 호칭은 조금... 익숙해서 말이다. 향수를 느끼게 하거든. 나도 내 은사를 그렇게 불렀으니까. (어느 새 계단을 다 올라선다. 2층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정말 촛불과 근처의 손 외에는 무엇 하나 당신 쪽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나, 말해둬야 할 게 있다. 미안하지만, 아까부터 하나, 자네를 속이고 있었어. 이론에 박식한 자네라면 이미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지금부터 할 예식에 있어서, 내가 자네에게 맡긴 역할은 사실 보조가 아니야. 사제의 역할이지.(흔들리는 촛불 앞에 손가락을 가져가, 약속했던 수신호를 취한다.) 미안하군. 역시 나는 구마사제로서 실격인 모양이야. 이럴 때 책임질 수 없어서야, 원.(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이상할 정도로 식어 있는 목소리다. 정말 당신의 '선생님'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일까, 어둠 너머로는 무엇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줬던 칼은 일단 내려놓지. 구마 사제는 예식 중에 날붙이를 잡아선 안되니까.
이거 봐봐! 이거 저번에 너가 말했던 거 맞지? (갱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 슬럼가 골목, 한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손에 들린 피묻은 휴대폰을 흔들어보인다. 통신력의 장악은 곧 권력. 휴대전화는 힘의 상징 그 자체다. 그러다 슥 주변을 둘러보고, 품 속에 숨긴 채로 당신과 자신만 볼 수 있게 슬쩍 꺼내놓는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신중하다.) 이것만 있으면 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며. 잘됐다!
여긴 어디일까요? 그리고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햇빛은 따듯하고, 울창한 숲이 기분좋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주변의 흙은 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마음에 드는 숲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곧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 생각을 그만두었습니다. 정체 모를 불안감과, 떠올려야 해~ 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지만... 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는것 보다, 주린 배를 채우는것이 먼저였습니다.
숲의 풀과 흙을 기분 좋게 밟으며 걷다 보니, 덤불에 무성하게 열린 빨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입에 넣어보니 새콤하면서도 달콤한게, 엄청나게 맛있었습니다! 앞으로 평생 이것만 먹고 살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어느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이번엔 목이 말랐습니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손을 물에 담가보니, 얼어버릴것처럼 차가웠습니다. 분명 따듯한 날씨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니,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봅니다. 차가움을 견디면서 손을 물에 담가, 떠 마시자 이번엔 갈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심심함이 몰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복잡한 여자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바로 저입니다! 심심함을 채우기 위해서 무작정 걸어봅니다.
미지에 맞서 모험을 나서는듯한 전율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저는 굉장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아주 좋아보이는 나뭇가지도 주웠고, 발로 흙을 밟을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와 향긋한 풀내음이 코를 간질이는게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 모험의 꽃인 보물만 발견하면 되는데... 아, 마침 저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오두막인걸까요? 조금은 겁이 났지만, 그래도 이 두려움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보물을 발견할 수 없을겁니다. 저는 도망치는 여자가 아닙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두막 안으로 돌격합니다!
...역시 돌격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봅니다. 누군가 사는 곳일까요? 가구들도 깨끗해 보입니다. 창가 쪽을 바라보자 예쁜 꽃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분명히 제 모험의 대미를 장식할 보물이 분명합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폴짝거려 보지만... 닿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고난과 역경일까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몇번이고 점프를 반복합니다. 반드시 저걸 갖고야 말것....
끼야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러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제 목덜미를 붙잡고 절 번쩍 들어올렸습니다! 아아, 저는 이렇게 죽고야 마는걸까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자, 무시무시한 수염 괴인이 있었습니다. 아마 거인족인게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만 울면서 오줌까지 지려버렸고(이것은 여러분과 저만의 비밀입니다...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간곡하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맛이 없을거라고, 놓아주면 엄청 맛있는 열매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멋대로 집에 와서 죄송하다고 저의 필살 사죄의 포즈 3연타를 공중에서 시전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덜덜 떨고있는데... 어라, 이 괴인 조금 곤란해 보이는 표정입니다. 아마 오줌을 지린 제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라, 식욕이 싹 가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저의 협상의 기술이 빛날때입니다.
놓아주지 않으면 싸버리겠다. 라고 당당하게 외쳐봅니다. 무엇을 쌀건지는 여러분께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소녀의 마음이 망가져버리는것조차 각오한, 필살의 표정으로 괴인을 노려보자... 괴인은 저를 어디론가 끌고갑니다. 자유? 자유의 몸이 되는걸까요? 라고 생각하는 차에, 풍덩, 하고 목욕탕에 던져집니다.
아아, 깨끗하게 하고 잡아먹힐 운명인가 보군요. 틈을 봐서 탈출해야 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차에, 또다시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저와 비슷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도 잡힌걸까요? 이것저것 물어봐야 겠습니다.
...아무래도 여기는 평범한 가정집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소녀가 괴인 수염거인의 딸이라는것은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전혀 닮지 않았는걸요! 키도 저와 비슷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입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납치해온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괴인 수염거인, 예의주시해야 할 대상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맛있는 밥도 주었고(그렇게 맛있는건 처음 먹어봤습니다.) 따듯한 잠자리까지 주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들것만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요? 으음...
고민하고 있으니 그 아이가 다가옵니다. 무서우니까 함께 자자고 하는군요. 저는 조금도 밤이 무섭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아직 어린애인게 틀림없습니다. 흐음, 그런데 이 아이는 제게 꽤 우호적이군요. 잘만 하면 저의 부하로 삼아줄 수 있겠습니다.
어젯밤엔 꽤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꽤 많이 친해졌습니다. 우리는 낮동안엔 즐겁게 달리기를 하거나, 숨바꼭질도 하고, 같이 모험도 떠났으며, 나무열매도 주워먹었고, 즐거운 인형놀이도 했습니다. 정말, 정말로 즐거운 순간이었습니다. 잘하면 저의 친구로 삼아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것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말하는건 역시, 제법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제게 용기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풀이 죽는것도 같지만, 풀이 죽어있다고 해서 달라지는건 없으니 오늘도 열심히, 전력으로 놀아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게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들은 굉장히 화가 나있었고, 저를 보자마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로 저를 베었고, 큰 망치로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뜨거운 불로 저를 태웠고, 차가운 얼음으로 절 찔렀습니다. 어째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새빨간 나무열매의 색깔과 똑같은, 새빨간 피가 흐릅니다. 손을 넣으면 얼어버릴것처럼 시린 강물처럼, 제 몸에서 흘러내립니다. 그녀들이 제 몸에 쇳덩어리를 채워, 더이상 움직일수가 없게 되었을때.
저는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아빠가 절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가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있는 모습을.
절 공격한 사람들은 저를 차가운 방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잔뜩 소리를 지르며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왜 사람들을 죽였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손가락이 사라졌습니다.
핑크와 살몬을 어떻게 한거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팔이 사라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기억을 잃어버렸냐는 말에 아마 그런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저질렀다는 악행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고 고문하고...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그건 내가 아니야. 난 숲에서 눈을 떴을 뿐인데 먼저 공격한건 너희잖아. 얼마나 아팠는데. 왜 너희 말은 진실로 취급하면서 내 말은 거짓말로 치부하는거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젠 차라리 아프지 않은게 더 어색할 정도가 되었고, 그들은 내 기억을 해석하기 위해 총력을 다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니까.
10년, 10년이나 걸렸어. 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왔는지 알기나 해? 처음엔 내가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과했잖아. 이미 충분하고도 남아서 넘칠만큼 속죄했잖아. 살려달라고 빌었어. 울면서 애원했어. 그러다 포기하기도 했고, 너희들이 원하는건 전부 받아줬어.
하지만 이젠 전부, 그 아무것도 상관없어. 설령 내가 저지른 악행이라고 하더라도 너희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이 없어지는건 아니잖아.
나는 모았던 힘을 터트렸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것을 불태웠고, 그녀들은 전부 내 이름이라고 여기는 이름을 증오스럽게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볼품없는 나는 내 마음도 볼품없다고 종종 생각했다. 사랑은 엄청 대단하고 특별하고 아름답다는데 내 사랑은 그렇지 않다. 짝사랑이라 그런가? 아닌데, 서브병이니 뭐니 하면서 짝사랑하는 서브남주 좋아하는 애들이 내 주변에 천지삐까린데. 그러니 내 문제다. 나는 여자주인공도, 서브여주도 아닌 엑스트라라서. 드라마였으면 뒷통수나 나왔을까 말까, 웹툰이었다면 눈코입도 없었을 거고, 소설이었다면 이름도 없었겠지. 그러다 현실을 보는 거다. 이런데에 마음 쏟고 고민할 시간이 어딨느냐고, 대학 안 갈건가. 공부나 해야지, 공부나. 나는 별 생각없이 요 근래 우리 학교에 잘만 놀러오는 고양이나 귀여워해주며 실실 웃었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꼈다. 고양이에게 신세 한탄, 손장난치면서 웃는 꼴. 꽤나 한심해보일 것 같아서 입을 합 다물었다. 아는 얼굴만 아니어라, 아니지, 아니다. 아는 얼굴이어라. 아니, 어느 쪽이 나은거야? 쪽팔려서 자퇴만 안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부처님알라신시바신마라탕탕후루떡볶이눈꽃빙수시여.
"야, 돼지고양이. 너 나 두고 바람 피우니?"
이러면 짝사랑 얘기는 얼추 고양이 이야기 같지 않나.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거야. 슬쩍 인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꼬나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그럼에도 지 혼자 고양이랑 쑥덕대면서 시시덕 거리는 걸 그냥 무시하라니. 자고로 대한민국 고쓰리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즐겁더랜다. 그러고보니 저 뒤통수 낯익은데, 쟤 나랑 같은 반이던가? 아닌가? 그럼 작년에 같은반?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여도 소녀의 인기척을 느낄수 있었을테다. 그녀는 당신이 고개를 돌리면 힐긋 내려보는 것 외엔 달리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이, 그녀의 얼굴에 늘어진 그림자와 조합해보면 꽤 험악해 보인다. 속내 알 수 없는 무표정인지라 더더욱. 조용히 입을 앙 다물고 있으니 새초롬한 미인 어디가고 깡패만 한 명 있는듯한 분위기다.
"어,"
당신의 독백에 멋대로 난입해 답을 달더니, 옆에 풀썩 주저앉고선 그 뚱뚱한 고양이를 한 손 가득 쓰담는다.
"난 이 누나가 더 조아~"
아까의 목소리에서 한 톤 더 올려 고양이의 속마음 독심술(아님)도 해준다. 그러는 표정 아까와 다를 것 없이 무뚝뚝한게 이질적이다... 고3은 다 이런거야.
situplay>1596845082>58 (Choi Choco라는 상호의, 2인 테이블이 2개나 있을까 싶은 자그마한 카페. 그래도 딴에는 무인주문기도 있고 칠판형 입간판도 있다. 입간판에는 커피콩 캐릭터가 초콜릿 모양의 건물 문을 열고 내다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주방 위생 모자로 머리카락을 꽁꽁 감춘, 2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 큐브형으로 자른 초코 케이크를 잔뜩 담은 접시를 든 채, 행인들을 부르고 있다. 나름 유니폼인지 여성의 까만 앞치마에는 입간판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개업했어요 초코 케이크 좀 드시고 가세요 시트는 커피 맛이에요~ (공짜 케이크임에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먹어본 사람들은 맛있다고 대답해준다. 이걸로 영업이 되길 바라며 눈이 마주치는 족족 말을 붙여본다.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에게도.) 안녕~ 케이크 한번 먹어볼래? (아이가 케이크를 사러 와주지는 않을듯하지만 혹시 알아? 맛있으면 부모님께 오자고 졸라줄지? 그러다 여성은 제 실수를 알아채고 멈칫했다. 어린이에게 커피가 들어간 케이크는 곤란하지.) 아차차!! 잠시만~ (매장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여성은 납작빨대에 가나슈를 살짝 묻혀서 아이에게 내민다.) 어린이는 초코만~
아, 제기랄. 손에 피 묻히는 거 싫어하시는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행차하셨대. (의자에 손목과 발목이 결박된 채,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얼굴을 돌려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는다. 항상 깔끔하게 넘겨올렸던 앞머리가 피로 엉겨붙은 채 눈을 가린 사이에서도, 당신을 향해 지어보이는 느슨한 눈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 보러 온 거면 물이나 주고 가. 왜 널 죽이려했는지 듣고싶은거면 가까이 오고.
1. 성규가 케이크를 이미 시식중이었던 상황으로 이어도 될까? 애기 NPC를 보니까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걸 할려면 성규가 이미 케이크를 먹고 있어야겠더라구:3 2. 1에 이어서, 애기 NPC도 내가 임의로 움직여도 괜찮을까? 곤란하면 편히 말해줘! 다른 방향으로 이어볼게X)
나도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파티장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새하얀 미니드레스가 이곳에 있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이질적으로 만든다. 당신의 상태를 살펴보듯 의자 주변과 당신을 눈으로 살핀다.) 그러게 잘 좀 하지. 내가 여기 오지 않도록. (상대를 약올리듯 얄미운 말투는 여전하다. 그러나 평소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는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당신의 웃음을 본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주하기를 포기한다. 짧은 침묵 뒤에 그녀는 입구 바깥에 선 사람에게 명령해 물이 담긴 유리잔 하나를 받아들고 당신에게 다가간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 꼴을 보니 마음이 좀 바뀌네. (당신의 앞에서 멈춰 선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썩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상처 받은 사람 같기도 하다.) 물, 주세요 해봐. 안 그럼... 내 손이 미끄러질 것 같네.
>>396 (후, 숨을 고른다. 얽히고 설킨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건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혈향 섞인 잔숨은 텁텁할 정도로 뜨겁다. 마주쳤던 눈을 피하는 너의 모습을 보고서, 느슨한 눈웃음은 지워지고 흉흉한 안광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잘 했으면 네 드레스는 붉게 물들었을거야. 그걸─ (잠잠하던 목소리가 순간 격앙되어, 그걸 숨기고자 묶인 팔목을 세게 흔들어 덜컹, 하고 의자가 고동친다.) ─내 눈으로 못 보게 된다는게 아쉬울 따름이고. (다가오는 당신을 향해 턱을 쳐든다. 뭐냐, 그 표정은. 조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한 일, 너가 느끼고 있는 것. 그 어긋난 맞물림의 결과가 이거냐?)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잖아. 이리와, 내가 의도한대로 연회장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원래대로라면 모든 걸 끝냈어야 했을 그 날처럼, 사랑을 속삭여줄 테니까. 그걸 바라고 있잖아?
(의자가 만든 소음 때문인지, 당신의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진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린다.) 저런... 미안하다고 해줘야 하려나? (주도권을 쥐기라도 한듯 당당하게 행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신의 이리와,라는 말에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자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선다. 울림이 끊어진 구두 소리가 퍽 애처롭다.) …내가 정말 그걸 원하는 것 같아?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끝이 붉다. 허를 찔린 사람처럼 한참 말이 없던 그녀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작게 들이쉰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네. 이 꼴로 나한테 그런 말이나 속삭여야 한다니. (당신의 앞,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그녀는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어디 한번 해봐. 사랑이든 저주든 마음껏. 혹시 알아? 내가 마음이 흔들려서 당신에게 물이 아니라 자유를 줄지도. (손에 든 물컵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당신을 보며 웃는다.)
(2인 테이블 중 하나에 앉은 거구의 남자가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는, 마침내 포크로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으려다, 쉴 세 없이 영업중인 사장과 그에게서 초코가 묻은 납작빨대를 받은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얌전히 빨대에 묻은 초콜릿을 빨아먹다, 맛있었는지 사장을 똘망똘망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언니! 케이크도 먹고 싶어요! 옆에 있던 아이의 부모님이 난처한 기색으로 아이를 달래보지만, 당연하게도 아이는 자기도 케이크를 먹고 싶다며 요지부동.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케이크를 한 조각 먹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이야, 맛있네! 특히 이 초코 크림이 최곤데! 빵도 맛있지만 어린이가 먹으면 머리가 띵~ 해서 아야~ 할지도 모르는 맛이야. 10년만 더 일찍 먹었으면 아야~ 했겠는데!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잘 울리는 목소리에 저음이지만 또박또박한 발음 때문인지, 호들갑스러운 태도 때문인지, 다행히도 아이의 시선은 곧장 남자에게도 집중되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아 하니 남자의 말에 설득당했다기보단, 어쩐지 괴인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부끄러워하거나 기가 죽기는 커녕 뻔뻔스럽게 연기(?)를 이어간다. 결국, 아이는 남자를 측은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사장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종알종알. 그러면 언니 초코 크림 쪼끔만 더 주세요, 맛있어요! 그제서야 남자는 안도한 듯 다시 케이크에 집중한다.)
// >>395 장문 소설체면 답텀이 느려지는데 괄호체는 금방 써지더라구 ㅋㅋㅋ 아이고 찾아봤었구나! 찾느라 고생했겠네, 개인적으로는 성규의 다양한 면모는 최사장님(상호명으로 성만 유추해봤어 ㅋㅋㅋ)이랑 돌리면서 좀 더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그리고 답변들 고마워! 캐조종이나 성규가 어떻게 느낄지를 고려해준 것도 고맙구 :D 아이손님 엔피씨를 보자마자 저 상황이 바로 떠올랐는데, 충분히 흥미로운 상황? 내지 대화를 틀 만한 계기가 되면 좋겠네X)
(하, 하, 하. 목에 들끓는 핏가래와 감정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제쪽으로 다가오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얼굴 근육이 진정되지 않아 어금니가 부러질 정도로 꽉 문다. 귓가를 때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야 그제서야 안심한다. 너가 내게서 무슨 말을 원하는 지, 내가 진정 들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너는 내가 이 꼴이 되고나서도 듣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구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젖혀지고, 시선은 당신의 웃는 얼굴, 그리고 물잔을 차례로 향한다. 그리고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만한 태도의 눈웃음을 지어보인다.) 자기야. (둘의 사이에서는 꽤 생소한 호칭이다.) 나를 잡느라 고생하신 분이 저 너머에 계신 걸 알아.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이쪽 모습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거울을 흘끗 돌아보았다가, 다시 상냥한 미소로 당신을 올려다보며 턱짓을 한다.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이.) 너 외에는 들려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맑은 웃음은 꼭 즐거운 아이 같건만, 그 속에는 누구를 향한지 모를 눌러 숨긴 슬픔이나 분노 따위가 가득하다.) 설마 듣고 싶기만 하려고. 내가 이런 사람인 거...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낯선 부름에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길을 잃고 흔들린다.) …그걸 알면 좀 더 착하게 굴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있지. (거울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차갑다. 그 때문인지 마지막 말은 언뜻 그를 향한 걱정 같기도 하다.) 이런. 얼마나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러실까? (당신의 말 한마디가, 그 웃음이. 그리고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시선 모두 잘 짜인 거미줄처럼 느껴진다. 이 이상 가까이 가면 서로 무슨 꼴을 보게 될지 눈에 뻔히 보이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이거 기대되는 걸. (당신이 내게 줄 무언가가 달콤한 독일지, 쓰디쓴 꿀일지, 그도 아니면 잘 벼려진 칼날일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거역할 수가 없지.) ... (느리게 당신에게 걸어간다. 날 선 구두소리가 그녀의 걸음에 맞춰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위태롭다.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의 발끝, 금방이라도 당신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말없이 당신을 내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