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715072> 자유 상황극 스레 4 :: 505

이름 없음

2022-12-31 16:48:08 - 2024-09-05 17:41:22

0 이름 없음 (kJ8MtbJ//I)

2022-12-31 (파란날) 16:48:08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455 이름 없음 (VL4bMq8c.U)

2023-12-13 (水) 02:33:43

>>454
(공격을 받는 순간 통증을 느낀 듯 눈썹이 짧게 찌푸려지더니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더니 끝내 눈을 내리 감았다가 뜬다.)
앞서 했던 훌륭한 기사라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 같으니 말이네.
(잠깐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연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네. 그대를 넘기 전까지 나는 아직 기사이며 그대는 내 후배이지. 이곳을 떠나도 분명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검을 잡게 되겠고, 또한 지금처럼 누군가의 뜻을 꺾으려 할 것이며, 다시금 무언가를 버리려 할 것이네. 허나 그때는 모든 것이 기사로서는 아닐 것이네. 검은 기사만이 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빠르게 몸을 물리지만 날카로운 예기가 지나간 자리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기며 옅게 피가 새어 나온다.)
목표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목표가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생길 것이네.
(한동안 검의 궤적에 머물던 시선이 자신의 상처로 향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당신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는다.)
...꼭 하나의 길만이 옳은 길은 아니야.

456 이름 없음 (eZWDJCrZ/E)

2023-12-13 (水) 09:21:42

>>455
하나의 길만이 옳은 길은 아니다......라, 뜻을 꺾지 말라는 말을 하던 사람의 말치고는, 볼품없을 따름입니다.(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사납게 휘둘러 주변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검을 거둬들인다.)
당신 말대로, 분명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기에 가장 위험하지 않겠습니까?(검을 수직으로 세워들고,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초월하기 위해 다 자란 이들은 할 수 없는 극단까지 치닫습니다. 지금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만은 인정하십시오. 분명,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헌장은 떠난 당신이 검을 든 것만으로도 배반이라고 하겠지만,(회의적인 투로 고개를 저어보인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기사의 배움 바깥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현재의 맥락에서 당신은 여전히... 내 목표입니다.
(비로소 안정적인 호흡으로 서서히 검을 내려 정확히 당신을 겨눈다. 다시는 빗나가지 않을 것처럼, 한 치윽 오차 없이 정중선을 겨냥하고 있다.)그것을 끝내시려거든, 단장님, 마지막입니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내가 당신의 팔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도 내 목을 가져간다는 마음으로 승부를 받으십시오.(자세를 고쳐잡는다, 공격적으로.) 검으로, 기사로서, 이 자리를 지나가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이후로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길을 걷던, 결단코 그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이건 결투입니다, 단장님.

457 이름 없음 (Vu36PzBWYE)

2023-12-13 (水) 15:49:07

>>456
그래. 부족한 자의 형편없는 말이지.
(당신에게 모순을 지적받자 부정하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말 끝에 뱉어지는 작은 숨이 탄식 같다.)
...과거 동료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하더군. 나 역시 기사가 아닌 삶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 앞으로의 일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니 그대처럼 더욱 이 순간에 집중해야겠지.
그리고.
(눈빛에 짧은 온기가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보며 매우 기뻐한다고 하던데, 나 역시 기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게. 지금껏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니 내게 그 결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대의 각오를, 그 뜻을 내게 증명해내게.
(줄곧 일자로 굳어있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그대의 목표를 넘어보도록.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사냥감에 집중하는 맹수처럼 짙고 고요해진다. 처음으로 조금의 여유도, 방심도, 직전의 미소도 없이 날 선 모습으로 검을 마주하고 자세를 잡는다.)
기사로서 검과 명예를 걸고 코덱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그대와의 결투에 조금의 거짓 없이 충실하며,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 나는 어느 방향이든 즐거우니까 공격 성공이나 캐릭터 부상 여부는 캐조종 걱정하지 말고 참치가 원하는 쪽으로 편하게 묘사해줘! :)

458 이름 없음 (OrJuJn3rw.)

2023-12-13 (水) 16:21:07

>>457
/일합승부, 이쪽의 패배로 가고 싶은데
그런데 단장님은 지금 검 꺼내들었나? 아니면 여전히 맨손이야?

459 이름 없음 (aXxbVYmqYw)

2023-12-13 (水) 16:50:33

>>458
/ 후배님...! (눈물 펑) 참치가 괜찮다면 나는 좋아...!
그러게... 일합승부가 잘 드러나려면 검을 꺼내들었다는 쪽이 더 좋을까? 만약 그렇다면 검을 들고 있다고 생각해줘! :)

460 이름 없음 (OrJuJn3rw.)

2023-12-13 (水) 17:14:10

>>457
(입술을 꽉 깨물고, 갈망하는 눈으로 당신의 검을 마주한다. 비로소 읍을 하며, 묵은 진실한 감정을 한 마디 말로 토해낸다.)...감사합니다.
모든 부모는 끝내 자식의 등을 보게 되겠지요. 나는 아직 부모가 아니기에, 모르겠습니다. 단장님은, 보이십니까?
제 다음 수가.(당신의 그림자를 보듯이, 옛날의 자기 자신을 보듯이, 당신에게 너무나 익숙할 준비자세를 드러낸다.)
기사로서 검과 명예를 걸고, 코덱스, 그리고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 결투에 전신전령으로, 코덱스에게 검을 받은 이래 당신께 받은 모든 것을 주리라고,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익숙한 방식으로 매듭짓겠군요. 언제나처럼의, 그 한 수로.
(비로소 자세를 순간 낮추고, 땅을 가볍게 박차며 칼을 횡으로 끌어당겨, 당신에게 배웠던 그 일격으로 쇄도한다. 목표는 좌견, 미묘하게 엇박을 노리는 교묘한 박자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얻어낸 검의 길이다.)

/이걸 단장님이 쓰러뜨렸다고 해줘.

461 이름 없음 (m.NRnGBJ/M)

2023-12-13 (水) 18:39:14

>>460
다음 수라...
(당신을 마주하며 감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길게 숨을 내쉰다.)
그대에게 충실하겠다 맹세했으니 솔직히 답하지. 보이네. 그러나 그대가 아닌 내 모습이 보이네. 내가 취할 자세와, 내가 선택할 다음 행동이.
(그리고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모든 걸음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갈 당신의 모습이 보였으나 말로 전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의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함께 잔잔히 미소 짓는다.)
그리 되겠지. 언제나 그렇듯 오늘 역시 잊을 수 없게 되겠군.
(마치 허공에 자리한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생경한 기분이 든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감각이 이런 것인가 이해하려 해본다. 순간 당신의 검과 자신의 검이 온전히 겹쳐 보이는 것 같은 환상을 본다.)
그대를 가르칠 수 있어 영광이었네.
(조금도 어긋남 없이 당신의 움직임에 반응해 곧바로 발을 뗀다. 미동 없던 검이 당신의 가슴께를 향해 날을 세워 파고든다. 살짝 기울어져 미묘한 대각선을 유지하는 검의 궤적,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방향, 어쩌면 영영 지워지지 않을 흉이 남을지도 모르는 날 선 깊이. 바람이 스치듯, 그러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듯 당신을 지나치며 쓸어간다.)

/ 이렇게 해도 될지 모르겠네...!! 참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462 이름 없음 (VtZcVFIMNw)

2023-12-13 (水) 19:59:02

>>461
(두 사람의 착지의 순간, 그러나 한쪽만이 허물어지듯이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셨습니다.(마지막 순간, 자신이 죽더라도 맞찔러야 했다. 그래서 상대의 팔만이라도 빼앗는 것, 이게 이 검식의 완성,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해서, 최후에 방어를 택해 정중선을 지켰기에, 살아남았다. 두 동강난 자신의 검은 그 미완성된 검식의 불명예스러운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은 상대가 손속에 자비를 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공격 중 패배를 예감하고 방향을 돌린 어중간한 방어로 막을 수 없는 절명수였을 터, 그런데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저 상대가 검을 늦춰 준 덕분이겠지.)
후, 흐윽...(선혈이 흘러내리는 흉부를 꼭 부여잡고 토혈한다.)이거 좋군요. 찰나로 결정되는, 흉통에 몸이 트이는 감각, 어째서일까요. 이래서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요, 검도, 당신도.
(조용히 토막난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여전히 당신에게 허물어진 등을 보여준 채로, 묻는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붙들고 늘어져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단장님, 떠나...시는, 이유.

463 이름 없음 (QxURgiKHzI)

2023-12-13 (水) 21:03:57

사용인의 아침은 일찍부터 바쁘다.

'오전 5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울리는 알람 시계를 뒤로하고, 몸가짐을 정돈한다. 그가 섬기는 주인이 기상하기까지, 세안 준비와 아침, 그 날의 의복을 준비해놓아야 한다.

원래라면 한 명의 사용인이 이리 많은 일을 떠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주인의 전속 시종이었고, 주인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봉사를 총괄하고 감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모든 밑준비를 끝내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그의 주인을 깨워야 할 때.

그를 깨운 것이 알람 시계였던 반면, 그의 주인을 깨우는 건 사용인 그래, 바로 그 자신이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신체의 접촉은 무례하지 않은 선으로. 이불 너머로 살짝 어깨를 건드리는 정도가 좋다. 이제부턴 하루종일 그의 주인을 따라다니며, 일정을 보좌해야 한다.

'어디보자...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주인에게 고할 첫 번째 일정을 떠올리며, 그는 주인의 기상을 기다렸다.

/세계관이 어떤지, 주인의 성별이 아가씨인지 도련님인지, '그'라고 썼지만 사용인의 성별이 집사인지 메이드인지도 받는 참치에게 맡긴다!

464 이름 없음 (00OZ665bkQ)

2023-12-13 (水) 22:21:49

>>462
배신자의 비겁한 도망이라 생각하게.
(자세를 고치며 검을 가볍게 털어낸 다음 갈무리한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잠시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강하게 주먹을 한 번 쥔다. 아주 찰나였지만 순간 느껴지던 섬뜩한 감각은 분명 팔을 잃을 것이라는 확신임이 분명하다. 맹세를 어기면서까지 검을 늦춘 이유라면... 그대의 검이 더 오래, 이곳을 넘어 더 멀리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에.)
돌아가면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네.
(손에서 힘을 풀고 당신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다 멈춰 선다. 마지막 긍지마저 버린 자가 과연 당신을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뒷모습이라도 담고 싶은 듯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당신의 등을 바라본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겠네.
(슬픔인지 한숨인지 모를 무거운 웃음기가 목소리에 섞인다. 나와 닮았으나 정 반대인 것도 같은 당신의 그 말과 태도. 앞으로 당신이 걸어갈 그 길, 당신의 검이 지켜낼 것들이. 싫어할 수가 없다. 아니, 이미 너무 마음에 들어버렸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더군. 인간도, 검도, 헌장도. 그 불완전함을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이 나였으면 했을 뿐이네.

465 이름 없음 (.vwLTjsmrY)

2023-12-14 (거의 끝나감) 15:38:37

>>464
하, 여전히 잘 모르겠네요. 여문 사람의 판단이리는 겁니까?(바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선다.) 저라면, 그런 이유로 코덱스를 등지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다시,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뒷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쓸쓸히 중얼거린다.)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패용한 검을 검집째로 풀어 들고, 씁쓸한 눈으로 내려본다.)단장님은, 관철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헌장이 말하는 바, 1조 그대로, 뜻을 꺾지 아니했고, 내 뜻은 꺾였습니다.(검을 옆으로 가볍게 던진다. 토막난 검이 다시 검집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널부러진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기사인 내가 더 이상 당신을 막을 명분은 없습니다. 코덱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를 부렸던 것도 나지만, 나 이상으로 철없이 굴 수 있는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더 남아있지 않군요.
(쓸쓸히, 당신을 두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코덱스의 건물 쪽을 향해.)앞으로는, 나 자신의 방식대로 해 나가겠습니다. 나름의 길을 쫓겠습니다.(마지막에서야 겨우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걸음 걸음마다, 흘러내린 피가 그를 따라 바닥에 선을 긋는다.)
즐거웠습니다. 단장님.

466 이름 없음 (LYNCZEHeeg)

2023-12-14 (거의 끝나감) 19:43:10

>>465
여문 사람보다는 미련한 자의 판단이라고 봐야 옳겠지. 그런 점은 닮지 않은 듯 하여 다행이군.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진심이 담긴 탓인지 끝맺는 말이 무겁다. 당신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미안함을 속으로 삼킨다. 묵묵히 당신이 하는 말을 들으며 조각난 채 바닥에 흩어진 검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더니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정리한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바닥에 기사의 검을 내려 놓으며 당신의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몸을 바로 세우며 다시금 곧은 자세로 선 다음, 코덱스의 건물과 당신의 등을 향해 기사의 예를 취한다. 나아가는 당신을 향한 축복과 응원, 감사와 속죄를 모두 한마디 말에 담는다.)
그대를 믿네.
(작게 미소 짓는다.)
—경.
(등을 돌리면 자신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님을 알기에 발걸음을 돌리기 직전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단장이자 기사로서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헌장의 마지막 조항을 잊지 말게.

/ 이렇게 막레가 되려나? 같이 돌릴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단장님의 말을 빌리자면 후배님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나는 돌리면서 즐거웠는데 참치도 돌리면서 즐거웠었으면 좋겠네 :) 이후로 후배님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진다!
단장님과 나랑 돌리느라 수고 많았어 참치! :)

467 이름 없음 (.vwLTjsmrY)

2023-12-14 (거의 끝나감) 21:31:43

>>466
/재밌었어, 단장님도 레더도 수고 많았어. 중간에 시험때문에 3일인가 말없이 잠수탔었는데 미안했어.
후배는, 처음에는 어쩌면 단장님처럼, 언젠가 때가 되면 마찬가지로 코덱스를 떠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의외로 마지막까지 기사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기 나름의 길인 거지.
단장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려나, 결국 떠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가려나, 물어봐도 되려나?

468 이름 없음 (rn8yKbi6NY)

2023-12-14 (거의 끝나감) 23:14:12

>>467
/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야! 참치도 수고 많았어 :) 안 그래도 3일 동안 참치가 많이 바쁜 것 같아서 나도 해야할 일들 처리하며 느긋하게 기다렸으니까 걱정 마!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미래라니 멋진 서사다... 특히 후배님의 기사라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아. 내가 마음대로 썼던 내용이긴 하지만, 헌장의 제1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어쩌면 후배님인 것 같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기사'라는 뜻을 꺾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후배님의 검은 부러졌지만 가는 길은 꺾이지 않았고, 단장님의 검은 온전히 남았지만 길의 방향이 꺾인 것처럼 보여서 더 감동적인 것같아.
당연히 물어봐도 되지! 오히려 단장님을 궁금해해 줘서 고마운걸!
단장님이 떠난 뒤 후배님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거라면, 아마 첫번째는 기쁨일 것 같아. 단장님도 자신의 선택이 최선보다는 차악이었다고 생각하긴 할 것 같아서 기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후배님의 모습에 무척 기뻐할 것 같네.
그리고 두 번째는 >>461 레스에서 나온 것처럼 후배님을 가르칠 수 있었던 일이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는 점일 것 같고! 단장님이라면 후배님이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기사가 될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잠시나마 자신이 후배님의 선배이자 스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 같아.
단장님이 살아가는 방향이라! 사실 세계관이나 떠난 이유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기는 해! 그래서 내가 혼자 생각하고 있던 이유로 보자면, 특정 사건을 코덱스가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정말로 움직여 버리면 코덱스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이 오게 될 상황이라 단장님이 기사직을 내려놓고 사건을 해결하러 떠났다.일 것 같아서, 사건을 해결한 다음 그 영향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노려지는 바람에 한동안 도망치고, 조용한 곳에 숨어 조용히 살아가는 일의 반복이지 않을까 생각했어. 중간중간 기사였을 시절처럼 남들도 돕고 하면서 말이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아마 용병처럼 살아가는 느낌이려나?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사건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성격도 지금이랑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렇게 용병처럼 생활하게 되면 나중에 후배님을 다시 만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려나? :)

그리고... 기쁘게 쓰고 보니 혼자 레스 길이가 너무 길어진 것 같네. 혹시 부담이 되었다면 미안해...

469 이름 없음 (qyoIcfoV7s)

2023-12-26 (FIRE!) 23:19:44

우편 왔습니다—! (옹달샘 자리잡은 파랑새 지저귀듯 맑은 알림. 울타리 너머로 들어서진 못하고 그 가에 세워진 우체통. 그것이 우편배달부인 나에게 그어진 금. 금을 밟지 않게 가방 가득 넣어온 우편을 차곡히 우체통 안에 밀어넣고, 몰래 따다온 꽃송이도 하나 얹어둔다. 늘 그래왔다. 이 집에 어떤 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 이후, 일부러 이 집에 배달올 때만 혹시라도 저 목소리에 고개를 내밀까 기대하며 크게 목청 올린다. 아디선가 꺾어온 들꽃 한 송이를 같이 넣어둔다. 영 만나지 못했지만 얼굴 맞대지 않아도 마음은 가닿으리.)

470 이름 없음 (nqisFcSks6)

2023-12-27 (水) 20:30:04

>>469 (큼직한 저택 앞에 선 우체부의 외침이 울린 지 얼마 후, 문이 열리더니 지팡이를 짚은 10대 중반 남짓한 소녀가 나왔다. 마른 체구에 창백한 피부, 부스스한 긴 밀빛 머리카락까지. 큰 병을 앓다 일어난 듯 핼쓱한 인상을 한 그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급히 우체통 앞으로 달음질 쳐 오더니, 우체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우체통에 기대어 두고는 급한 손놀림으로 우체통 안을 뒤적이다, 원하던 것을 발견했는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들고는 급히 열어본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면 갈 수록 지친 기색이 완연하던 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더니, 이내 온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번진 채 편지를 가슴에 품는다. 그러다 우체부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민망했는지 창백하던 낯이 발갛게 물든 채 헛기침한다.) 실례했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471 이름 없음 (KVt2mNRi.Y)

2023-12-28 (거의 끝나감) 22:36:59

세계를 위협하던 커다란 싸움이 마침내 끝이 났다. 세계를 위협하던 마의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을 따라 세계를 파멸로 이끌려던 이들 또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란 속에서 혼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던 이들은 완전히 해방되었고, 전 세계가 전란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였고, 여기저기에서 전란을 마친 이들을 영웅으로 부르며 칭송했다.

사내는 전란을 마친 파티에 속한 이였다. 평범하게 사냥을 하며 살아가던 18살인 사냥꾼이었으나, 전란의 불꽃이 제 마을을 덮쳤고, 눈앞에서 가족은 물론 친구, 이웃까지 모두 몰살당하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으며, 화살을 쏘며 마을과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으나 전혀 닿지 않았고 제 목숨마저 잃을 뻔 했었다.

허나, 그때 자신을 구해준 이들이 있었다. 여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와 그 사내를 따라서 함께 여행을 하고 있던 이들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며, 아직 죽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구출했다. 마을을 습격한 마의 세력은 전멸했으나, 이미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붉은 혈향이 그 땅에 번져 안타까운 비극을 알렸다.

사내는 그들에게 청해 여행에 동행했고, 마침내 마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서 가족과 친구, 이웃의 복수를 마칠수 있었다.

힘겨운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을, 제국의 황제는 크게 환영했으며 공을 치하하고, 많은 포상을 하사했으며 원하는 이에 한해서 황자와 황녀와의 혼인까지 추진했다. 그 혜택을 온전히 다 받은 이도 있었고,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사내는 고민 끝에 포상 대신, 잿더미가 되버린 자신의 마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황실의 지원을 부탁했다.

부귀영화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고향이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향을 다시 재건하고, 그곳에서 이전처럼 사냥을 하면서 소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내의 가장 큰 꿈인만큼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황가의 지원을 약속받은 그는 딱 하루, 제국의 수도에서 머무르며 동료들과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신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잿더미가 되었던 마을은 옛 모습을 되찾았고 마을을 재건한 사내는 예전에 살던 그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냥을 하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돕기도 하는 등. 사내의 삶은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와있었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었으며, 마을 중앙에 사내의 동상이 세워져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내는 그 동상을 제발 치워줬으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도 동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늘도 산에 들어가 위험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돌아온 사내는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가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눈이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기에 그게 누군지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며시 갸웃하던 사내는 그게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서성이고 있는 이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 누구신가요? 제 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말 그대로 세계를 구한 용사 일행이 있었고 사내는 그 용사 파티에 있었던 이야. 모든 전투를 끝내고 세계를 구한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와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마을을 재건하고 이전에 살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집 앞에 찾아왔다는 내용이야!
전 동료여도 상관없고, 황가에서 찾아온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맥커터나 뜬금없이 꼽주는 그런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472 이름 없음 (c4lIjBw8Uo)

2023-12-29 (불탄다..!) 07:15:53

>>471 용사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이는, 낮게 묶어 길게 늘어뜨린 긴 흑발과 어두운 피부, 석류석처럼 짙은 심홍색 눈동자와 선해보이는 이목구비를 지닌 청년으로, 용사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약사 게리였다. 남의 집 앞에 서서 뭐 하는 꼴이람, 이 좋은 휴일에. 그는 제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허나, 어쩌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마의 세력을 몰아낸 용사 중 하나이자, 전란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재건한 영웅이 마을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의 피해자 아닌 피해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원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중인데다, 피해자의 바로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상황전달을 맡게 되었으니. 체념하고 도로 어깨를 펴려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주인이자, 마을의 유명인사. 그였다. 게리는 곧바로 돌아서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들며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용사님 댁 근처에 사는 게리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새벽 즈음에 용사님의 동상의 머리가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붙잡았습니다만... 범인이 자신은 용사님께서 바라신 대로 해드린 것 뿐이니, 용사님께서 내리시는 처분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요. 그래서 촌장님께 용사님을 모셔오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만, 동행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전 동료도 황가에서 찾아온 누군가도 아닌 평범한 마을 이웃인데 괜찮을까나...:3c

473 이름 없음 (/XCKUS9u42)

2023-12-29 (불탄다..!) 09:10:51

>>472
"아. 게리씨로군요. 그런데... 네?"

새벽시간이라면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더라. 사내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히 오늘 사냥을 위해서 숲에 있는 오두막으로 이동해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었던가. 그러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후에, 조금 더 준비를 하다가 바로 또 사냥을 갔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마을에선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자신의 동상이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다니. 와. 그 동상의 목을 치는 이가 정말로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제 동상의 머리가 참수되었다는거죠? 딱히 누구의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것을 마음대로 말이에요."

솔직히 사내에게 있어서 그 동상은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물건이었다. 물론 용사로서 칭송받고 나름 유명해진 것은 좋긴 하지만,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라니.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상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보기 낯간지러워서 시선을 회피했던 것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힘겹게 지은 동상을 마음대로 참수하는 것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자신을 이유로 대서 버티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단 뭐가 되었건 가보는 것이 좋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범행...이겠죠? 일단? 그 범행 동기가 정말로 제가 그걸 원해서 했다는 것 뿐인가요? 2년 전에 끝난 전란을 일으킨 세력이라던가, 혹은 그 세력의 추종자라던가 그런 류일 가능성도 있나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처형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동상을 떠나서 그 세력의 일부가 아직 살아있고 꿈틀거리고 각지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단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 눈앞의 이가 그것을 알 수 있을지는 또 별개였지만.

/이건 또 생각도 못한 전개네. 하지만 괜찮아! 누구라도 상관없었으니까!

474 이름 없음 (XUOuNqiOQo)

2023-12-29 (불탄다..!) 15:22:51

>>473 "예, 용사님께서 몇번이고 철거를 희망하셨다는 그 물건 맞습니다. 마을에 있는 동상이랄 만한 것도 그것밖에 없었고요."

본인이 싫어하면 차라리 거대 동상 말고 미니 동상을 만들어서 팔아먹지. 아니, 애초에 동상일 필요가 있나? 공정과정에서 예산 잡아먹는데. 차라리 이 마을을 관광지라고 선전하면 그깟 동상 안 만들어도 관광객이 쇄도할텐데. 게다가 용사님께서 사냥꾼으로 전직하셨으니 용사님께서 납품하신 몬스터 부산물로 경매를 열어도 되고. 저 동상도 파손된 김에 역시 녹여서 미니 동상이 아니더라도 실용적으로 쓰면 안 되나? 아, 모르겠다. 대답해놓고는 그런 궁리에 빠져있던 중, 용사가 퍽 진지한 얼굴로 꺼낸 이야기에, 게리는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들을 한 순간 잊어버린 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과 그 추종자?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신 거지? 그 세력은 전원 사망해서 그림자도 안 비친 지 한참인데? 그러나 이내 황당함은 가시고 측은지심이 고개를 들었다. 범죄에 노출된 사람이나 전쟁을 치른 병사들은 열에 아홉 마음의 병을 얻어 매사에 민감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는데, 용사님이면 오죽할까. 우선은 안심시켜드리는 게 좋겠다.

"글쎄요, 범인은 마을에 사는 안나라는 열 네살 난 아이입니다. 용사님께서는 만나보신 적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제가 아는 그 아이는 용사님의 일대기를 각색한 동화책의 내용을 술술 외우고 다녔고, 최근에도 용사님께서 다니시는 사냥 코스를 성지순례하겠다고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산으로 들어가려 하는 통에... 제가 말리느라 애를 꽤나 먹었었습니다. 그 아이가 힘이 좋긴 해도 몬스터에게 포위당하기라도 하면 위험하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고작 동상이 아닌 용사님을 바로 노리지 않았을지요."

그렇게 차분히 제 의견을 밝힌 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나와 촌장님, 다른 어르신 분들은 마을 회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혹시 잠은 편히 주무시고 식사도 제 때 하시는지요? 용사님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면 돌아가서 재판을 내일로 미뤄주십사 청할 작정입니다."
/다행이다! 그럼 용사님이 가겠다고 하거나 다음날로 넘겨주면 마을회관 씬으로 넘어갈게!

475 이름 없음 (/XCKUS9u42)

2023-12-29 (불탄다..!) 17:01:37

>>474
"열...네살이요?"

고작 열 네살밖에 안 된 아이가 동상의 목을 잘라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아이인 것인가. 자신만 해도 그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 열 여덟때의 일이었다. 자신은 열 네살때 뭘 하고 있었더라. 기억을 더듬더듬 뒤집어보지만, 적어도 싸움이나 힘을 써야만 하는 무언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기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열 여섯이나 열 일곱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수고하셨어요. 산에 오른다고 해서 바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아무튼 혹시 모를 일이지요. 워낙 교활한 녀석들이고 그 뿌리가 엄청 깊었으니까요. 도발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녀석들을 완전히 쓸어버렸다고는 하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가 살아남아 또 뭔가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전쟁이 끝난지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 작자들에게 가족과 친구, 이웃을 잃었을 때의 기억이 남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니었다. 허나 적어도 지금 사안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컨디션은 괜찮아요. 바로 가볼게요. 그 작자들이 아니면 딱히 처벌을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왜 그랬는지 정도는 듣고 싶으니까요. 그 아이의 입으로 직접 말이에요."

정말로 그 정도의 일이라면 그냥 꾸중을 하는 것만으로 조용히 넘길 수도 있으나, 혹시 또 모를 일 아니겠는가. 자신은 불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는만큼, 역시 직접 만나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마을 회관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솔직히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ㅋㅋㅋㅋㅋ 정말로 맥커터나 진짜 뜬금없이 꼽주는 내용만 아니면 괜찮아! 이야기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오케이!

476 이름 없음 (AdHUI2XkIM)

2023-12-30 (파란날) 00:22:27

>>475
"예. 힘으로 부러뜨린 게 아니라 화염 마법으로 뜨겁게 달구어 녹인 뒤 절단했다는 모양입니다."

동상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걸 생각하면 체력도 지구력도 장난 아닌 것 같지만요... 라고 중얼거리며 게리는 볼을 긁적였다.

"아닙니다. 어른으로서 아이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을 막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안나가 반란 세력의 잔당의 사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아이가 어리긴 어려도 열 네살인데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안나가 대단히 서운해하겠는데. 안나의 동심을 지켜주긴 어렵겠군. 모델인 본인도 썩 달가워 않던 동상 하나 때문에 여러모로 말썽이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다, 용사가 마을 회관으로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자, 한시름 놓은 듯 손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용사님을 모시고 오기 전까지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으니 안나도 진술이 가능할 정도로는 진정됐을 겁니다."

게리는 한발 앞서 마을 회관으로 용사를 안내했다. 작고 아담한 집들을 지나, 마을 광장을 가로지르려니, 어쩔 수 없이 사건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위풍당당하게 선 목 없는 용사. 바닥에 처량히 나뒹구는 위엄있는 표정의 머리. 희생된 건 마을 주민 몇을 제외하고는 모델을 포함하여 아무도 반기지 않던 동상 하나뿐이었음에도 큰 사단이 벌어진 것에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게리는 차라리 시선을 돌리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회관으로 들어서자, 작은 원탁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일부 모여있었다. 왼 편에는 촌장을 비롯한 (동상 건설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일부는 애써 분을 삭이는 듯 험악한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오른편에는 입술이 잔뜩 나온 채 억울한 듯 올리브색 눈망울을 그렁거리는 양쪽으로 땋아내린 갈색머리의 어린 소녀와, 그 소녀를 보호하듯 옆에 선 소녀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여러분, 용사님 모셔왔습니다."

게리의 목소리에, 마을 회관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가장 먼저, 촌장이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용사님 오셨습니까. ...그, 오면서 보셨겠지만 용사님의 동상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다 이 맹랑한 꼬맹이가 저지른 짓입니다요!!"

마을 주민 중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자, 갈색 머리의 소녀가 질세라 빽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오셨으니까 용사님한테 들어봐요! 내가 잘 못했나, 안 했나!!"
"안나야, 엄마랑 소리 안 지르고 말하기로 약속했지?"
"그치만 저 어른들이 귓구멍이 막혔는지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
"아니, 이 녀석이 글쎄!!"

금세 험악해진 분위기에, 게리가 원탁을 탁탁 두드리며 나섰다.

"그만들 하세요. 용사님께서 안나에게 자세한 정황을 듣고 판단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고는 안나의 옆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조곤조곤 말했다. "안나야, 용사님은 이제 막 이번 일을 아셔서 안나가 왜 용사님의 동상을 망가뜨리려 했는지 잘 모르셔."
"...응."
"그러니까 어렵겠지만 안나가 화 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줘야 해. 할 수 있겠니?"

그러자, 여자아이 - 안나는 격해진 감정을 누르려는 듯 입술을 삐쭉거리다 이내 크게 숨을 들이 쉬고, 좀은 떨리지만 똑똑한 투로 대답했다.

"...화 안 내구, 잘 말할게. 촌장님이랑 어른들 안 끼어들면. "
"안 끼어드실거야. 만약에 끼어드시면, 엄마가 안나 이야기하게 두라고 이야기할게."
"오빠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제 어머니와 게리의 장담에 한시름 마음을 놓았는지, 안나는 소매로 얼굴을 훔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용사를 향해 똑바로 서서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저는 안나라고 합니다. ...어른들 말씀대로, 오늘 새벽에 용사님의 동상을 부순 건 저예요. ...저는, 제가 왜 용사님 동상을 부쉈냐면, ...동상, 용사님이 치워달라고 몇번이고 이야기하셨잖아요. 저... 엄마한테 들었고 직접 본 적도 있어요. 저는... 이해가 안됐어요. 어른들은 저 동상을 용사님을 위해 세웠다는데,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짓은 하면 안되잖아요. 어른들은 용사님이 치워달라는 데도 죽어도 안 치워주고... 그러니까 제가 치우려고 했어요. 목을 자른 건 위에서부터 조금씩 잘라서 내리려고 그런 거예요. 한꺼번에 크게 자르면 위험하니까... 무엇보다도, 용사님이 저 동상이 있는 게 좋으셨으면, 그래서 제가 치우려고 해서 화난 거면, 사과드릴게요. 제가 그런 건 어디까지나 용사님이 저 동상을 치우시길 바라서였으니까요. ...근데."

안나는 고개를 홱 돌려 촌장과 마을 어른들을 노려보며 다시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로 애써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

"제가 악마 들린 아이여서, 못된 사람이 시켜서, 용사님에게 나쁜 마음이 들어서 그랬다는 말은, 절대 인정 못해요. 왜냐면, 왜냐면... 싫다는 걸 강요하는 거야말로, 나쁜 거니까요!"

다시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을 마른 세수로 거칠게 닦아내며, 안나는 몇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 이내 다시 용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아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도 받아들이는 쪽은 어떨지 몰라서 쫄리지 뭐야 ㅋㅋ 그래도 이을만하겐 나온 것 같아 안심이네! 언제든 잇기 난감하면 편히 이야기해줘:>

477 이름 없음 (SYs8xy9.UQ)

2023-12-30 (파란날) 01:44:50

>>476
"저는 그 애가 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요."

그렇기에 혹시나 확인차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고작 열 네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열 네살 아이를 속여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의 말만 들으면 그런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고 사내는 판단했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가 저렇게까지 변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도중, 자신의 동상이 보이자 사내는 그 동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목만 잘려 땅에 구르고 있는 그 모습에 사내는 괜히 자신의 목을 손으로 잡고 난감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동상인데 저렇게 목이 뒹굴고 있으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사내는 애써 다른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목이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더더욱. 아예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으니 저 앞에 마을 회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회관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올리브색 눈망울을 가지고 있으며 양갈래 갈색머리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가 동상의 목을 잘라냈다는 그 아이겠지. 사내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와중,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와 사내는 촌장을 바라봤다.

"네. 전부 봤습니다. 아주 제대로 절단이 났더군요."

씁쓸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사내는 막 소리를 지르는 마을 주민과 여자아이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단 기가 상당히 센 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자리에서 겁먹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도발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더더욱. 자신은 저 나이때 어땠더라. 그렇게 잠시 생각하다 왜 그랬는지를 이야기하겠다는 말에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른 분들도 이 아이의 말에 끼어들지 말아주세요. 판단은 제가 듣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끼이면 반드시 이런저런 시끄러운 소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 소녀가 왜 그런 짓을 했냐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그 역시, 끼이지 말 것을 부탁한 후, 그는 살며시 무릎을 굽히고 소녀와 시선을 마주하려고 했다.

들려온 이유는 참으로 단순했다. 자신이 없애주길 바랬는데 없애질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누군가를 위하는데 그 사람이 싫어하는 짓은 하면 안된다는 말.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마냥 옳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동상은 개인의 것만은 아니었고, 지금은 이 마을의 것이었다. 마음은 이해가 되었으나 마냥 옳다고는 할 수 없는 그 행동을 들으며 사내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나야. 더 물어볼 것은 없어. 그것으로 충분해. 일단 신경써줘서 고마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동상을 없애려고 했다는 마음에 일단 사내는 감사를 표했다. 허나 이후에 나올 말은 약간의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동상의 목을 자르는 것은 옳은 행동은 아니야. 남을 위한다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되는 것은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위한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또 항상 옳은 것은 아니란다. 물론 난 저 동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저 동상은 일단 나를 생각해서 세운 것이고, 이제는 누구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이 마을의 물건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이를테면 안나도 안나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물이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없애려고 하면 기분이 상하겠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나눠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디 저 동상이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적어도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렇게 동상을 세우면서 관광 효과도 조금은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전란을 끝낸 용사의 동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이 넓은 땅에 분명히 존재할테니까. 저 동상은 처음에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세워진 것일수도 있으나, 이제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에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사내의 생각이었다.

"나도 안나가 악마가 들렸다거나, 못된 사람이 시켰다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안나는 순수하게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일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동상을 파괴하고 그러면 안되는 거야. 알았지? 앞으로는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일을 벌이지 말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좁히면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해. 오늘의 일을 교훈 삼아서 말이야."

절대로 자신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지, 사내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안나에게 작은 윙크도 보냈다. 이어 그는 다시 다리를 펼친 후에 촌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저는 이번 일에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 어린애가 한 행동이고, 이 아이도 나쁜 마음으로 한 행동은 아니니까요.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지. 어디 동상 하나 파괴했다고 처벌을 내리니 뭐니, 나쁜 마음이 들었니 뭐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고, 목이 잘린 동상이라. 일단 어쩔 수 없이 동상은 철거해야겠네요. 그 대신에, 차라리 저를 본따서 만든 기념품을 만든다던가 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그것도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동상보다는 나을 것 같거든요."

/고마워!! 너참치도 혹시 잇기 난감하거나 어려우면 얼마든지 얘기해줘!

478 이름 없음 (wigjKllzOg)

2023-12-30 (파란날) 11:48:52

>>477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말에 마음을 놓은 듯 빳빳하게 긴장했던 어깨에서 한결 힘을 빼던 안나는, 용사가 이어 길게 늘어놓는 훈계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점검하려는 듯 잠자코 경청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자신을 벌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안나는 고개를 조금씩 갸웃거리기 시작하더니, 그의 말이 끝날 때 쯤에는 억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용사님 말씀은, 제가 용사님 동상이 싫다는 이유로... 어른들한테 동상을 치우자고 이야기 안 하고, 멋대로 동상을 치우려고 한 게 잘못이란 거죠? ...용사님 말, 다 틀렸어요.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좁히라고요, 제가 어른들한테 용사님이 싫어하니까 동상은 내리고 다른 관광 요소를 만들자고 이야기 안 해봤을 것 같으세요? 용사님이 저 봤어요? 용사님이 저랑 이야기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용사님 동상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 처음엔 용사님 동상 세워진다고 들었을 때, 엄청 신났거든요? 진짜 용사님은 만나지 못해도 용사님 동상에 맨날 인사하러 가야지, 했거든요? 그런데도 용사님이 싫어하니까 제가 좋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용사님 의사 무시하는데 가만히 있기 싫어서 그랬던 건데... 그리고 제가, 어른들한테 결국은 허락 못 받았으니까 일방적으로 치운게 맞다 쳐요. 그런데 그럼 왜 안 돼요?"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어가자, 안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왼팔을 오른손으로 꽉 붙들었다가, 몇번이고 떨리는 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 어른들은, 촌장님은, 용사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억지로 동상 세우고 용사님이 치워 달라는데도 안 치웠는데, 왜 치우는 건 어른들 허락 받아야 해요? 그것도 당사자인 용사님도 아닌 어른들 허락을요. 용사님은 대체 저 동상이 싫으신 거예요, 좋으신 거예요? 오늘 새벽까지는 용사님이 저 동상을 치우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모르겠어요. 용사님을 본딴 기념품도 크기만 작지 동상이랑 비슷하잖아요. ...저한테 혼만 내시고 벌 안 받게 해주시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전 용사님이 말씀이 하나도 납득이 안 돼요. 그러니까, 벌 받으라면 받을게요. 원하시면 저 동상도 고쳐놓고요. 저 동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졌으니, 저 동상이 망가져서 싫은 사람이 있다면 망가뜨린 제가 고쳐놔야죠."

이래서 실제 용사님은 좋아하지 말라는 거구나...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안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의자에 풀썩 앉았다. 상황을 시켜보던 게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린 아이니까 심한 벌을 받겠냐만은...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는걸. 마침 용사님께서 관광상품 이야기도 꺼내셨고.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한 손을 들고 말했다.

"용사님께서 기념품 이야기를 하셔서 말입니다만, 미니 동상은 양산해서 상시 판매를 하든 귀족 나으리들을 타겟으로 호화롭게 한정수량을 제작하든 재료비와 공임비를 확보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용사님께서 묵으신 여관이나 용사님의 사냥코스 등을 관광지로 내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용사님께서 없어져도 괜찮은 물건 아무거나 몇개 주시면 경매에 부쳐도 불티나게 팔릴 텐데요."

479 이름 없음 (SYs8xy9.UQ)

2023-12-30 (파란날) 13:09:34

>>478
"싫어해. 하지만 싫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뭘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양보를 해야하기도 하고, 의견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자신 쪽에서도 최대한 양보를 하면서 방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저 동상은 이제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많이 겹쳐진 상태였다. 자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무작정 없앨 수 있는 것이 어디 말이 되겠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이 마을에서 단 한 명이라도 싫어한다면, 모두 없어져야 하는 것이 될텐데 그래서야 어떻게 사회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저 아이의 생각 또한 틀린 것이 아니기에 사내는 굳이 더 말을 하진 않았다.

"나에게 실망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역시 싫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뭘 할 순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런 짓이 당연해진다면, 이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이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니."

어려운 문제였으나 일개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이 설명하기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지는 잡혀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 다른 동료들이 있으면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주제가 바뀌는 것을 들으며 그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 부분은 마을 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해서 정해주세요. 다만... 사냥코스는 몬스터들이 나타나니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역시 기회가 기회니까 저 동상은 치워주세요. 어차피 저렇게 된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딱히 칭송받고자 그 전쟁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단지 이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가족이 죽고 친구들이 죽어서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뛰어든 것이었거든요."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저 이대로 당할수만은 없겠다 싶어 싸우러 간 존재였다. 특별히 현명한 것이 아니며,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누리는 이 일상을 되찾고 싶었고 그것을 되찾았으니 영웅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저 애매하고 낯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부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 생각을 강요할 순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 애에게는 벌을 주지 마시고요. 어찌되었건 원인은 저인 모양이니..."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던 사내는 팔짱을 가만히 끼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차후의 일은 다시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은 저 아이에 대한 것으로 모인 것이니 말이에요."

/좀 더 이 캐릭터가 머리가 좋고 현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오너부터가 머리가 완전 뛰어나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어렵다...어려워...

480 이름 없음 (YGDan1FWMs)

2023-12-30 (파란날) 14:08:19

어 뭐야! 내 고철 파이프랑, 네 피클 절임이랑 바꾸지 않을래? 왠지 들고다니면 기분 좋을 것 같아.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방호복 안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울리며 흘러나온다. 이미 괴물에게 다리를 다쳐 벽에 기대 앉아있는 당신에게 말하는 중이다. 문 밖에는 여전히 당신들을 찾는 괴물의 끔찍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 리설 컴퍼니 기반! 위험한 회사에 취직해 괴물이 가득한 행성에서 폐지줍기...ㅋㅋㅋㅋ 나사 빠진 친구인데 잇는 건 자유롭게!

481 이름 없음 (F4Z/q25tFY)

2023-12-30 (파란날) 21:04:54

>>479
용사에 말에, 안나는 무어라 대꾸를 하고 싶은 지 입을 달싹였지만, 이미 화제는 동상 대신 내세울 만한 관광상품으로 넘어갔기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어, 용사가 안나에게 벌을 주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후의 일은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제안하자, 당사자인 용사가 선처를 한 마당에 더는 처벌을 주장하기도 모양이 나빴다고 생각했는지, 촌장은 "그러시지요." 라고 동의를 표했고, 나머지 마을 주민들도 이의를 표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안나의 어머니도 안나의 어께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우리도 이만 집에 갈까?"
"응, 그 전에 용사님한테 한 말씀만 드릴래."
"목소리 안 높이고 드릴 거지?"
"응."

장담하듯 어머니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보인 안나는, 어머니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용사를 향해 바로 섰다. 억울함도 노기도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용사를 올려다보며, 안나는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꺼넸다.

"이야기는 다 끝났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세우는 건 마음대로 해도 되고, 철거는 그러면 안 되는 건지, 왜 그런지, 되고 안 되고를 정하는 기준이 있는지를 여쭤본 거예요. 제가 납득할 만한 답변은 용사님께 들을 수 없었으니, 다른 어른들께 여쭤보던가 할게요. 그리고, 전 용사님께서 동상을 철거하려던 걸 잘못했다고 지적하셔서가 아니라,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 주지는 못하시면서 잘못됐다고만 되풀이하시는 부분과, 제가 동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나 동상에 대해 어른들께 말씀을 드렸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으시고 단언하신 점에 실망한 거예요. 이 부분은 확실히 하고 싶어요."

"이 녀석, 용사님이 너그럽게 봐주신다는데 고맙습니다, 하지는 못할 망정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안나가 이야기하던 중에도 영 참기가 어려웠는지 내내 표정이 험악해져 있던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울컥한 듯 안나를 꾸짖자, 안나는 고개를 돌려 주민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맘에 안 드시면 벌 주시던가요 근데 용사님도 방금 동상 치우라셨는데 그 동상 부순걸로 벌 주시게요? "
"너 이녀석 말버릇이!!!"
"베에~"

혼을 내려는지 마을 주민이 성큼 다가오자, 안나는 눈밑 살을 당기고 도발적으로 혀를 쏙 내밀더니, 곧장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마을 회관을 나가버렸다. 당연하게도 마을 회관은 다시 성난 주민들이 노여워하는 소리로 가득 찼고, 안나의 어머니 역시 용사와 촌장, 마을 주민들에게 연신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더니, "안나, 너 거기 안 서!!"라고 외치며 다급히 마을 회관을 나섰다. "아, 왜애! 목소리는 안 높였잖아!" 라고 앙칼지게 외치는 안나의 목소리 뒤에 등짝이라도 맞았는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이 연이어 울리자, 촌장은 골이 아프다는 듯 머리를 싸쥐며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고, 그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다소곳이 서 있던 게리는, 헛기침을 하고는 용사의 곁에 다가서서 위로하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안나가 아직 어려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토론이 어렵긴 하지...<:3 용사님의 발언이 안나가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해. 내용이 이렇게 흘러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ㅎㅎ

482 이름 없음 (x3tEfTSqd6)

2023-12-31 (내일 월요일) 01:52:37

>>481
저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내는 그저 피식 웃었다. 무슨 특별한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건 저 애가 저렇게 생각한다면 저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 생각을 수정하거나 바꿀 순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억지로 수정하거나 고치거나 할 마음은 없었다. 용사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자신이 뭘 어찌하랴. 어린애를상대로 말싸움 하거나 할 마음 또한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말이 서투른 것도 있었으니까요."

어차피 더 따지지는 않을 생각이었고,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 아이의 표현을 빌려서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그렇게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을 해줬으면 했다만, 그것을 일일히 설명할 생각은 그에겐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제 일은 정리가 된 셈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후우 감았다.

"그러면 일단 저도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에 수도에 조금 갔다와야 할 일이 있어서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네요. 그러니까 그 기간때는 아마 사냥 의뢰라던가, 그런 것은 조금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양해를 바라겠습니다."

아직 촌장이 그곳에 있었으니 사내는 그렇게 보고하듯 이야기했다. 딱히 도망치거나 바람을 쐬러가는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나러 갈 참이었다. 수도에 남은 이들도 있었고, 그들 중에서 자신을 초대한 이가 있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어찌되었건 사내는 괜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옛 마을 분위기 그 자체는 아니었으나, 역시 평화가 돌아오긴 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럼 다들 푹 쉬십시오. 이만."

그렇게 말을 남기며 사내는 먼저 회관을 나가려고 했다. 아마 그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딱히 갈 곳은 없었고, 사냥을 마친 그때부터 집에 가서 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어쨌건 상황은 끝난 것 같기도 하니... 일단 막레 비슷하게 써봤어. 잇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더 이어도 괜찮아! 막레로 받는다면 수고했다는 인사도 남긴다! 참고로 전개가 저렇게 되었지만, 나는 재밌었다!

483 이름 없음 (rG5UNESbkI)

2023-12-31 (내일 월요일) 13:50:31

>>482 확실히 여기서 마무리하는게 좋겠네! 용사님이 수도에 가면 게리나 마을사람들하고는 거리상 소통이 어렵기도 하고 말이야. 어쨌든 나도 재밌었어! 용사주 수고 많았어~:3

484 이름 없음 (b7a23CR65E)

2024-01-30 (FIRE!) 05:10:08

"좋아하나 봐."

혼잣말처럼 무의식적으로 흘러나간 중얼거림을 주워담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지? 뒤늦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러 막아 보지만, 마주쳐버린 너의 시선을 되돌릴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에 켜진 앰뷸러스 불빛이 얼굴과 목덜미에까지 옮아 시뻘겋게 물들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아, 아, 홀로 떠올릴 수 있는 오만 욕을 자신에게 퍼부으며 자책하기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눌러보려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너로 채워지는 것이 기묘하다. 언제부터였더라? 스쳐지나간 옷깃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생각했을 때? 느즈막한 오후의 햇살을 덮어쓴 옆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찰싹 달라붙은 몸이 어린 시절 함께 뒹굴었던 기억 속의 너와는 달라서 놀란 마음이 들었을 때? 아니, 어느 하나가 계기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스며드는 중이었구나. 맘 속에서 끝을 모르고 부풀던 물풍선이 내뱉은 한 마디에 팡, 하고 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지 마."

미안. 어쨌든 지금은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늦게나마 시뻘게진 얼굴을 네가 못 보게 필사적으로 옷소매 안에 가리는 것 뿐이었다.


이 새벽에 포카포카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가지구.. 편하게 이어줘☺️~ 이을 맘이.. 든다면 말이지만...👀

485 이름 없음 (7tSUr.3eBY)

2024-02-01 (거의 끝나감) 00:20:30

>>484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냐면, 너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마비된 사로 인해 너와 함께 걷던 걸음걸이가 서서히 느려지고, 네가 나보다 먼저 멈춰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큰일이야. 내가 들은 말이, 그 말이 맞다면, 그것은, 그 의미는. 삐딱거리는 움직임으로 돌아서려다, 너에게서 돌아온 거절, 거부, ……혹은 쑥쓰러움으로 추측할 수 있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오자 급하게 제동을 건다.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는 더욱 고물 로보트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언제부터…….”

난, 언제부터였을까.
네 가느다란 속눈썹이 나의 목 부근에 멈춰서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을 때, 낮잠을 자던 너가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 보았을 때(귀여워서,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다.), 자전거 뒷좌석에 탄 네 체온이 몸에 닿은 곳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렇기에 언제부터냐고 물어본다면, 매순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 때마다 내가 느낀건, 유독 귀가 화륵 불타오르는 느낌과 함께 단지 한 문장의 감상 뿐이었다. '큰일났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가 없겠다. 하지만 답을 미룰 수는 없어. 얼굴을 쓸어내린다. 열을 내리기 위함이었지만, 역효과였다. 그럼에도 몸을 돌려 너를 본다. 얼굴을 가린 네가 보이자 손 끝이 저릿거려온다. 필시 심장박동이 너무 빠른 탓이다.

“…난 네 말이면 잘듣잖아. 그런데 이번 한번만…”

밤공기를 뚫고 지나가, 네게로 가는 길. 얼굴을 가린 옷소매를 저릿거리는 손가락 끝으로 붙잡고서, 서서히 내리려한다.

“얼굴 보여줘.”


#포카포카^♡^

486 이름 없음 (c/IXzoyfuM)

2024-02-02 (불탄다..!) 02:07:25

시원한 밤공기 스치던 뺨을 옷 소매로 가두니 달아오른 것이 식지 않아 순식간에 홧홧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시선을 내리깐 곳, 미처 꽉 채우지 못 한 빈틈 사이로 조금 삐걱거리는 너의 몸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쯤 오니 이제 몰아쳐오는 것은 후회다. 왜 이야기했을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왜 이전에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으면 더 정리된 생각과 마음으로 네 앞에 설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워져 곧 현기증이 이나 싶은데,

네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사실 어떤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해 얼빠진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라고? 뭐라고 했어? 설마 네 입에서 나온 대답이 혹여나 기대하던 것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뜩하게 무서워지기 시작한 연약한 마음이.

"그- 그런 게,"

아닌, 첫 물꼬는 어이없게 튀어나간 말 한 마디로, 그 다음엔 지금도 여실히 느껴지는 두 뺨의 뜨듯함으로,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한 마음을 또 부정하기는 싫은 마음에 입술을 물었을 때. 얼굴 보여줘. 아,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이 뛴다.

두근, 두근, 몸의 모든 힘이 심장 뛰는 데에라도 쓰여지는지. 단단히 막았다고 생각했던 두 팔은 애초에 그런 것도 아닌 것처럼 허무하게 내려가고야 말았다. 반사적으로 내리깔았던 눈을 서서히, 서서히, 들어올려서.....


...다시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쿵, 하고 첫 고동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다음 순간엔 이미 또 다른 말이 흘러나가고 말았다.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로 들릴 지 몰라도.

"........역시, 좋아하나 봐."



이런 달달한 답레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달다 달아,,,,, 이게 설탕이지...

487 이름 없음 (HPWfvtP00M)

2024-02-09 (불탄다..!) 00:22:01

눈을 뜨면, 당신은 높은 고층빌딩 난간에서 나를 마주한다.

*

" 정말 나인줄 몰랐어?"

순하게 내려 앉았던 옅은 회색의 눈, 여러번 탈색을 거듭한 것 같던 물빠진 장미색 머리칼. 채도라곤 찾을 수 없던 조각같은 여성의 얼굴에 그려진 입술이 물이 퍼지듯 붉어진다. 그녀는 가녀린 석고상 같은 허연 팔을 뻗어 너를 붙잡았다. 난간에 기댄 당신의 모습이 흡족한지 아직도 붉게 미소를 문 채다.

" 아니야, 너 똑똑하잖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래 보아 왔는데."

항상 사근사근 부드럽게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만큼이나 몽환적으로 들려온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구슬 같은 목소리다.

" 십 년이면 눈치챘어야지~."

어깨에도 채 닿지 않는 부드러운 머리칼은 지나치게 얇아 달빛이 깊이 스몄다. 빛나는 그것이 매서운 바람에 흩날려 마치 누가 강제로 쥐어 뜯은 은사 같다.

" 내 연극, 즐거웠지?"

너의 목덜미로 서늘한 감촉이 아찔하게 다가간다.

//갑자기 뱀파이어랑 혐관, 애증 같은 매운맛이 끌려서 막 쓰는 새벽글. 아무나 자유롭고 편하게 이어줘. 소꿉친구 컨셉이면 좋겠다.

488 이름 없음 (8a.ltQ89/w)

2024-02-10 (파란날) 00:36:01

>>487

나는, 정말 몰랐었나?

난간에서 마주하게 된 너는 평소와 같이 아름다웠다. 저 하얀색의 피부, 물빠진 장미색 머리, 옅은 회색의 눈....

" 하, 설마 했는데. 진짜로? "

다소 놀란 마음과는 다르게, 몸과 표정은 멋대로 움직였다. 비웃는 듯이 치켜 올라간 입꼬리 하며, 어이없는 것을 들었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턱 짚는 모습은... 내가 의도한게 아니다. 하지만 십 년 동안이나 연기를 지속한 그녀처럼, 이런 연기는 이미 내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 즐거웠냐고? 그래보여? 네 말대로 십 년이나 봐왔는데 속은 내 기분을 알기나 해? "

아, 이게 아니다. 겨우 이따위 말이나 뱉으려고 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널 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된다. 괜스레 밀어내고, 짜증내고. 그런 나에게, 오늘 네가 큰 폭탄을 떨어트렸다.

" ....뭐, 그래도. "

그래도, 다가오는 너를 피하지는 않았다. 단지 머리카락 끝자락부터 천천히 너의 얼굴을 구석구석 눈에 담아내고 나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 예쁜건 똑같네. "

네가 나의 목을 물려는 것에 맞추어, 너의 등을 감싸듯 안으려 했다.

//매운맛.... 은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지만... ^^... 아무튼 열심히 써봤어...!

489 이름 없음 (1jpUlUWXHY)

2024-02-10 (파란날) 23:01:01

>>488

나는 가만히 너의 연극을 지켜보았다. 그래, 너는 그런 연기를 탤했구나. 너의 주인공을 그렇게 해석했구나.

" 모르지, 난 속인 입장이니까."

쾌활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TV 속 이혼 재판을 마친 어느 여주인공이나, 코미디 드라마에서 가족들과 함께 깔깔 장난치는 모습처럼 과하고 또 행복해보였다. 죄책감이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그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더니 원래 연기하던 그 얌전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온다.

" ..너, 뭘 알고 이러는거야?"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나를 감싸는 너는 계산에 넣지 못했는데. 나는 잠시 땅을 응시하려했으나, 시꺼먼 그것은 하늘과도 같이 아득하게 깊어보일 뿐 분간이 되지 않았다. 위아래 구분없이 섞인 게 꼭 너와 나 같잖아.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목마름을 참을 수 없었다.

" 네 피 냄새를 사랑했어."

반짝, 회색눈이 빛을 내면 마법과도 같은 사랑의 속삭임이 네 귀을 간질거인다. 사랑, 달콤하지 않은가. 불타는 에로스의 화살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뜨거워지고 미친듯이 뛰더니 내 몸을 네게로 이끄는 그것. 그것이 너, 의 피였다. 나는 등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네게 내 무게를 실었다. 바람과도 같은 가벼움이 네게 느껴진다. 그리고 주사바늘에 찔리는 듯한 깊고 첨예한 통증이 네 목을 뚫고 지나간다.

" 하."

잠시 지긋하게 눌렀던 내 도톰한 입술을 떼면, 피가 입가에 흐르고, 나는 이성을 억누르며 붉은 것을 혀로 핥아댄다.

" 미치겠네 정말."

//이어줘서 너무 고마워! 매운맛 최고다.

490 이름 없음 (1jpUlUWXHY)

2024-02-10 (파란날) 23:10:41

근데 다시 보니까 나 왜케 오타 많지.. 모바일이라 ㅠ 자체 필터링 부탁해(굽신)

491 이름 없음 (hSnRf0AByI)

2024-02-12 (모두 수고..) 00:36:15

>>489

속인 입장이라는 말에 절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한 방 먹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어서였을까.

" 모르지, 난 속은 입장이니까. "

너에게 같은 말을 되돌려준다. 나는 몰라. 그야 네가 속였는걸? 아무것도 모르길 바란거 아니었나?

" ...... "

나의 피 냄새를 사랑했다는 말에, 나는 굳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기를 선택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들... 내가 죽은 뒤의 너에게 족쇄처럼 따라붙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너에게 기억되고 싶지만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는,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는것이 좋을 것 같으니.

그렇기에 목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을때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고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 ....? "

하지만 이내 다시 떨어진 감각에, 아주 잠시 얼빠진 표정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그 건조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을테다.

" 이제 내 차롄가? "

연극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배역에 과몰입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고 하던가.
지금의 내 상태를 굳이 표현하려 하자면, 그것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 너의 그 붉은 입술을 사랑해. "

부러 다른 부위가 아닌 입술을 말했다. 계속해서 봐왔던 것과는 달리, 방금 전 붉어졌던 그 입술을.
나는 새로운 너마저 사랑하게 되었으니.

목덜미의 상처는 아렸지만, 뜨거웠다.

//그 정도는 뇌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필터링 했다! >.0

492 이름 없음 (nNPqpOG0WM)

2024-02-14 (水) 01:01:47

>>491

" 참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 자기."

연인 사이에나 붙이는 애칭을 이럴 때에나 붙여본다. 밤하늘이 아득하고, 공기는 차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퍽 멀리 위로 올라와 있고,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자기, 하고. 꾹 신음을 밀어참은 그이의 심정을 그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태생이 사냥자였다. 먹잇감의 기분은 짐작도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슬프도록 얼이 빠진 그 얼굴 위로는 다시 건조한 미소가 쓰라리도록 피어났다. 그 건조함이 제 몸을 버석버석 갈라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사랑하면 곤란한데. 넌 곧 죽을 거라서."

너를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거칠게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널 난간 끝으로 밀친다. 곧 떨어질 거라 협박하는 살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애절함에, 그보다도 그 얼이 빠진 바보같음에 화가 치민다.

" 작별 키스 쯤이라면 해줄 수 있어. 나, 어려운 여자 아니야."

일부러 얄궂은 말만을 지나치게 골라내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트는 제 모습이 얼마나 악에 바쳐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하지만 그 전에. 조금만 더. 아직 배가 덜 차서 말이야. 넌, 내가 가장 공들인 사냥감이었어."

가냘픈 몸짓이 어느 발레단에 나오는 것처럼 부드럽고 사뿐히 네게로 내려앉는다. 그러나, 어느 발레의 발동작도 힘이 가득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지. 사뿐한 그 무게가, 점점 무겁게 널 짓누르고 옭아맨다. 네 목을 날카로운 손가락과 손날 손톱 하나하나로 잔인하게 짓이기고 상처내며 너의 상처를 벌리다간 그것에 내 입을 대고 계곡 물을 마셔 목을 축이는 어느 짐승처럼 달려들어 탐미할 것이다.

//필터링 기술 최고야. 고마워^-^

493 이름 없음 (EKeXPATXyc)

2024-02-21 (水) 17:21:04

>>492
" 그런 취향이었던가? "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먹잇감. 그래. 지금의 나는 고작 먹잇감에 불과하다. 단지 늑대에게 목을 물려있는 작은 토끼정도의 먹잇감이겠지. 하지만 그 토끼는, 자신이 먹힐 것이라는걸 알고서도 굶주린 늑대의 볼을 쓸어준다.
네 굶주림이 그만큼 컸던 것임을 알 것 같아서.

" 오히려 전혀 곤란하지 않지. "
"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다면야. "

다만 그것이 너에게 족쇄가 된다면 슬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 아니, 넌 어려운 여자야. "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너의 진심을 알아내기 힘들었고, 갖은 노력을 쏟아봤지만 사실 진심을 내비친 적이 있었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너는, 어려운 여자였다.

" 그건 영광인데. "
" 좀 더 공을 들여줬으면 좋았을걸. "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오래 볼 수 있었을까.
허탈하게 생각해보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방금 물렸던 곳을 손으로 헤집어내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 아, 흐으, 큭, "

끔찍한 고통이 몸 속을 파고든다. 벌어질대로 벌어진 상처는,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엉망진창이 되어 너의 입술만큼 붉은 피를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을 어떻게든 참아내려 이를 꽉 깨물고 있을 때, 너의 입술이 내 상처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 .....사레 들릴라. 천천히. "

고통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다시금 너를 감싸안고, 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이 피는, 과연 날 죽이기 위해 흐르는 피일까.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내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너를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조금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가져와봤어...!!!!

494 이름 없음 (or5nlqFQtY)

2024-02-28 (水) 23:24:25

세상이 망하고, 의지할 곳 없는 너와 나 같은 외톨이들은 이곳으로 끌려왔어. 엄밀히 따져 보안서류에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고, 수 많은 테스트를 거친 것은 우리의 의지가 맞긴 하지만. 이리보나 저리보나 우린 끌려온 게 맞았지. 분명 너도 동의할거야. 글쎄, 세상에 인연 하나 없이 덜렁 남겨진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이런 곳이라도 오면 적어도 하루는 더 먹을 수 있고 하루는 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처지란 세상이 망하기 전과 그닥 다를 게 없는 거 같아. 그런 의미에서 우린 행운인걸까?

더럽고 거칠던 네 더벅머리와 산발이 되어 엉킨 내 머리칼. 그저 텅 비고 공허한 네 눈과 악의와 저주로 가득찬 내 눈. 그 새하얀 방에서 처음 너를 마주했을 때 나는 네가 낯설지 않았어. 너는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 그래서 난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널 마음대로 불러댔어. 이 차가운 세상에 내가 입에 담을 이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어서. 미안,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네. 오늘은... 레몬으로 하자. 처음 널 본 날 네 머리색이 꼭 잘 익은 레몬색 같다고 생각했거든.

우리는 어찌보면 성공했고, 어찌보면 실패했어. 같이 한 시간이 어느정도인진 모르겠지만... 네가 한 뼘이나 크고, 내 머리도 그보다 훨씬 자라났으니 짧진 않았을거야. 버틸만큼 버텨준거지. 잘 해왔어. 그리고 축하해. 나보단 네가 좀 더 완성작이었나봐.

" 자, 이제 날 죽여. 레몬. "

세상이 망하기 시작한 날, 난 오히려 기뻐했어. 차라리 이렇게 다같이 죽어버리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꼭 비싼 술을 한가득 먹어치운 기분이었지. 사실, 난 싸구려 알코올 밖에 마셔본 적 없어서 비싼 술에 취한 기분은 몰라. 하지만 이는 그만큼, 그러니까 내가 결코 경험해본 적 없는 표현으로 설명할만큼, 그 어떤 때보다도 기쁘고 황홀했단 뜻이야. 오래 가진 않았어. 다같이 뒈지자니깐, 생각보다 사람들의 명줄은 길고 문명은 쉽게 무너지지 않더라고. 그러니까 너랑 내가 만나게 된 거겠지만.

" 너도 알잖아. "

셜리는 내게 정부가 '그들'에게 맞설 인간병기를 만들 계획이라 말해줬어. 멍청한 셜리. 우리가 아무리 못배워먹은 부랑자 자식들이라지만 그 병기가 우리란 걸 눈치 못챌 줄 알고? 그렇게나 많은 글자가 적힌 종이는 오랜만인지라, 금방 멀미가 나버려 대충 사인해버리긴 했지만말야, 우리가 사인한 그 서류 기억나? 그들은 친절히 설명해줬어. 우리는 단지... 군인들에게 새로 보급될 각성제의 안정성을 확인할 임상 테스트에 참여할 뿐이라고. 그러니 국가에서 책임지는 이 안전한 쉘터에서 스트레스 없이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야. 개소리지. 멍청한 셜리가 알려줬잖아. 셜리는 멍청하게 구는 내 모습에 조언하듯 한 마디를 더 던졌지. 이제 곧 '그것'들을 척결할 시간이 올거야. 망할, 우리의 안전한 이 쉘터도 곧 척결 당한단 이야기 아니겠어!

" 너를 위한 일이란 걸... "

그 놈들이 우리에게 놓던 주사 기억나지? 항상 신체 스캐너에 들어가기 전 놓던 그거 말야. 내가 보기에, 그건 '그것'들과 관련이 있어. 우리도 알아챘잖아. 우리의 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그래, '그것'과 비슷해지고 있었어.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면 어떤 코믹스의 슈퍼히어로와 같은 힘을 얻었다며 좋아했겠지. 젠장. 하지만 난 확신할 수 없어. 우리가 히어로일까? '그것'의 힘을 조금씩 수혈 받는 우리가 말야. 그것들과 섞인 우리는 뭐가 되는걸까?

" —피터와 소피아의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 곧 우리의 차례야. "

이 쉘터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너도 봤잖아. 어디 대륙에서 데려왔을지 모를 우리와 같은 10대 부랑아들. 어느 시점부터 하나둘 보이지 않고... 가끔은 우리 앞에서 돌연 죽어버리던 아이들. 몇몇은 실험이 끝나 사회로 돌아갔다고 했지. 아아, 멍청한 셜리!

"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마지막 기회야. "

'그것'의 힘을 과도히 주입하면 잠깐의 폭주 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더군. 우리는 몰랐지만말야,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보단 '그것'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나봐. 키가 한 뼘 크고 머리가 자라버린 우리는 이전의 어린 우리로 돌아갈 수 없는거야. 레몬, 그래도 난 나보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 알고 있겠지만, 난 병들어 죽어가고 있잖아. 그러니 지금 빨리 죽여. 그리고 넌 자유를 찾아. 어떻게든. "

미안해 레몬. 나도 모르게 널 사랑했었어. 자, 그러니까 어서 날 죽여. 아직 네게 웃어줄 수 있으니까 말야.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초능력 개발 생체 실험을 당하는 아이들로 상황극을 해보고 싶었다.....!

495 이름 없음 (/6JYJEKDgs)

2024-02-29 (거의 끝나감) 06:02:17

겨울이라는 계절에 있는 다양한 행동들을 좋아한다. 찬 몸을 데우기 위해 옷을 껴입거나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손을 잡는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추운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위해 서로를 끌어안는 그런 행동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그렇게 서로를 붙어있게 하는 마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내 겨울은 유독 차가운 기억들로 이뤄져 있었고 그랬던 나는 겨울을 지나기 위해 동물들이 그러했듯 몸을 웅크리는 것으로 겨울을 지나고자 했다. 추운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내게서 나는 온기가 떨어지지 않고, 대신 몸에 남아 나를 미온이 데워주곤 했다. 그렇게 나는 추위를 견뎌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혼 직후의 하늘은 새하얀 구름이 모든 것을 내려낸 듯 가볍게 흘러간다. 그 풍경 아래로는 내린 눈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이 옅은 눈의 흔적들이 쌓였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어내는 사람들, 작은 눈을 가지고 손으로 뽀드득뽀드득 소릴 내며 만지고 있는 아이들, 내린 눈에 넘어질까 조심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모습과 추위도 잊은 듯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발걸음을 옮기는 직장인으로 도로는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났다. 거기에, 너를 기다리는 나까지 하여 이곳은 가득 찬 듯했다.
괜스레 목에 찬 머플러를 더듬었다.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흔적이 꽤 보이는, 못생긴 머플러. 그 머플러를 손으로 더듬고 있으면 안정이 되는 느낌이 든다. 혼자서 추위를 기다리던 나에게 네가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선물해준 머플러를 나는 소중히 목에 두르곤 기다린다. 차가운 기억들로 가득했던 내게 어울리지 않을 만큼, 따뜻한 온기와 함께 괜스레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켜고, 발로 눈을 쓸어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널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나는 이 계절에 내가 느껴봤던 가장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머플러로 손을 감싼 채 추위에도 몸을 살짝 떨면서도 널 기다리고 있다.

496 이름 없음 (1xjGOyvUoc)

2024-04-26 (불탄다..!) 15:24:49

(여기였던가?. 접선 장소인 골목길에 도착하자 걸음이 멈춘다. 기억을 더듬어 확인하듯 두 눈동자가 바쁘게 주변을 훑는다. 확신이 섰는지 탐색이 끝나갈 즈음엔 골목길 벽에 몸을 기대고 선다. 사람도 없고, 그나마 들리는 건 가끔 날파리 날아다니는 소리뿐이자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리 자신이 버리는 패라고 해도 적의 소굴에 집어넣는, 그것도 모자라 '그 사람'과 어떻게든 가까워져 알게 된 정보들을 보고하라니 참 무모한 짓이다 싶다.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면서도 곁에 사람을 두려고 한다니.) —♪ (의미 없는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알게 된 게 없는데 뭘 보고해야 좋을까. 호감은 무슨. 그 흔하다는 호의조차 사지 못했는데 친구는 웬 말이고 동료는 더 웬 말일까. 그런 고민들을 하며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 어딘가의 스파이 캐!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시대나 배경이나 상대 인물은 상관 없어서 자유롭게 정해줘!

497 이름 없음 (0DPLlPJMGI)

2024-08-04 (내일 월요일) 23:55:02

(타닥, 타닥. 짙게 깔린 밤의 어둠을 밝혀주는 모닥불 위로 퍼지는 잔불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고찰에 잠겨있……다기보다는 자신 몫의 육포를 뜯어먹는 중이다. 모험을 해온지 어연 5년. 파티가 캠프에서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며 새벽에 까먹는 간식만큼 또 별미가 없더라지. 묘한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파티장인 내가 먹는다면 누가 막으랴. 친분있는 사이에서 짠 파티기에 탱커인 네가 해라 식으로 정해진 것이라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자리임은 알지만 대충 그런 당돌한 상상을 하며 불멍을 때리다, 뒷쪽 가까이서 들려온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 파티원으로 난입해주었으면 하는 바램 ㅋㅋㅋ 판타지모험...?

498 이름 없음 (aQT55.J1Ac)

2024-08-07 (水) 00:54:40

"곤란하네.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2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조용한 골목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년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소환된 이였다. 오랜 모험과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오래 살면서 나름 이 세계에 정도 들었고, 삶의 방식도 익숙해진데다가 고아원에 버려져서 쭉 고아로 지내온 탓에 딱히 원래 세계에서 그를 기다리는 가족은 없긴 했으나 그럼에도 원래 살던 세계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근처를 돌아보면 수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기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 분위기에 섞일 수 없었기에 그는 절로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담. 그런 혼잣말을 하며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나. 아니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 걱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이나 게임을 보면 꼭 이런 상황 속에서 황제는 뒷통수를 치기 바빴는데 이곳의 황제는 평생 쓸 수도 없을 돈을 포상으로 줄 것을 약속한 덕이었다.

"돈 걱정이 없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어쩔까. 파트너."

자신이 차고 있는 검을 괜히 뽑으면서 사내는 그 검에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만 검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답이 돌아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내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라노벨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소환된 이야! 싸움이 다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난감해하는 상황!
가급적 같이 모험을 떠난 파티원이었으면 좋겠어! 사내와 같이 소환된 이여도 괜찮고, 이세계의 사람인데 같이 모험을 떠난 이여도 괜찮아! 황자황녀엘프드워프인간 기타 등등 다 괜찮다! 맥커터만 아니면 오케이

499 이름 없음 (Juv8uOjtCw)

2024-09-03 (FIRE!) 11:13:41

(둥그렇다. 어두운 밤 환히 뜬 보름마냥 둥글기만 하다. 따뜻하고 말랑해보이는 두 뺨도, 놀라서 크게 뜨인 두 눈도 마냥 둥글어서 적대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눈동자는 영영 당신 모습을 비출 듯 하더니 한 번 깜빡거린다. 그러더니 샐쭉 입꼬리가 말려들어가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녕! (어깨에 걸쳐 몸을 가로질러 메고 있던 가방에서 부산스레 책을 한 권 꺼낸다. 몇 년이고 몇 번이고 다시 본 듯 낡아빠진 표지가 없던 향수도 불러 일으킬 것만 같다. 책장이 촤르르륵 넘어가다 멈춘다. 멈춰진 페이지를 당신이 잘 볼 수 있도록 펼쳐들고서, 목소리 크기를 낮추고 당신에게 소근거린다.) 나는 이 괴물을 찾고 있어. 너도 그래?

#인외를 찾아헤매는 중~ ㄹㅇ 인외가 나타나도 그냥 우연히 마주친 평범한 인간이어도 아무상관없당

500 이름 없음 (vDIeHui9do)

2024-09-03 (FIRE!) 15:53:41

>>499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산들산들,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위가 고요합니다. 어슴푸레한 어둠을 뒤로하고, 이 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던 사람이 당신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이 사람은 키가 퍽 크지만 중성적인 외양을 하고 있어 외양만으론 성별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동굴에서 만나기엔 치렁치렁한 옷차림입니다.)
반갑구나, 여행자여.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란다.
(상냥하고 온화한 남자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무해함이 통한 걸까요, 아니면 당신의 손에 들린 그 책에 흥미가 있는 걸까요. 당신이 펼쳐든 책에 그려진 그것은, 어떤 거대한 날개를 지닌 무언가입니다.)
멋진 책이구나. 어디서 얻었느냐?

501 이름 없음 (Juv8uOjtCw)

2024-09-03 (FIRE!) 19:50:16

>>500

(당신같은 옷차림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물을 찾다가는 분명 십분도 채 안되어 옷이 다 상할 것만 같다. 같은 목적을 지닌 친구라도 만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아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아주 살짝.) 친구 기다려? ...요? (여행자라는 호칭에 넓은 바다를 누비는 해적이라도 된 듯해 들뜬 목소리가 어색하게 맺어진다. 어둠 속 인영이 드러나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고개가 뒤로 꽤나 젖혀지는 탓이다. 무심코 친구를 기대하며 내뱉은 반말이 계속되어서 늦은 존댓말을 띄웠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하늘을 나는 섬도, 예쁘게 노래하는 인어도 보았대. (책 이야기에 들떠 금새 툭 반말이 나온다. 자각도 못하곤 당신에게 책을 잘 보여주려는 듯 팔을 쭉 뻗는다. 어둠이 무색하게 두 눈이 반짝거린다. 동경과 호기심, 설렘과 기대, 그런 것들을 가득 담아.) 나는 이 괴물의 이름이 궁금해. (이때만큼은 다시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가 낮아지며 소근거렸다.)

502 이름 없음 (lMhgkV8lB6)

2024-09-04 (水) 01:22:07

>>501

친구를 기다린다... 그 표현이 훨씬 더 시적이구나.
(당신이 건넨 말이 우연히도 마음에 들었던 듯, 키큰 사람은 환히 웃으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친구... 그렇게 부를 수 있었어. 내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이라면, 친구라고 불러도 좋겠지.
(그 사람은 당신이 내밀어오는 책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그 눈에는 호기심 또한 반짝이고 있지만, 그 눈에 어린 것은 호기심만이 아닙니다. 추억을 되짚어보는 그리움 또한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 살며시 손을 올려보려다, 당신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당신에게로 눈을 마주쳐옵니다. 새벽에 뜬 달을 떠오르게 하는 눈동자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마치 비밀 이야기를 나누자는 듯한 당신의 어조가 꽤 친밀하게 느껴졌던지, 그는 흡족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당신의 귓가에 입을 갖다대어 나직이 속삭입니다.)
이 괴물에겐... 남아있는 이름이 없단다. 잃어버렸지.
(그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덧붙입니다.)
어떠니, 네가 하나 지어주련?

503 이름 없음 (IP6MYCDHDs)

2024-09-04 (水) 20:48:25

>>502

(칭찬은 낯간지럽고, 환히 웃는 당신의 미소는 반가우니 마주 웃고 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더 새어나오고, 뺨은 밝다.) 자유? 여기 갇혔어요? (갇혔느냐 물은 건 이쪽이다만, 아무리 보아도 갇힌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고개가 또 기운다. 이번에는 확실히 갸웃거리듯 움직였다. 혹시 보이지 않는 곳에 당신이 묶여있기라도 한가 살펴보듯 당신 너머를 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당신의 책구경에 방해되지 않게 팔은 잘 뻗어야하니 관찰은 짧았다. 아니,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당신의 눈동자에 비출 제 모습이라도 찾는 듯 깜빡깜빡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이다. 불쾌하지는 않을테다.) 눈 되게 예쁘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곧 당신이 귓가에 속삭이자 비밀 이야기가 간지러워 까르륵 소리내어 웃어버린다. 그리고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내거는데, 달님같지도 별님같지도 않은 두 눈이 반짝거린다.) 어떻게 알아? 친구에요? 기다리는 친구가, (또 목소리 크기가 낮아진다.) 이 괴물이었어요?

504 이름 없음 (DDDVwLOg6Q)

2024-09-05 (거의 끝나감) 15:11:55

>>503

오, 그런 셈이지.
(그의 너머를 바라보면,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그저 바닥에 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둠 속으로 계속, 계속 뻗어있다. 어둠 속으로 뻗어갈수록 직물의 직조 구조가 기괴한 프랙탈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명백히, 그는 이 옷에 매여있다. 왠지 예전에 할아버지의 방에서 본 것 같은 무늬다. 뭔가를 한창 연구중이셨더랬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너야말로 예전에 만난 친구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걸.
(그는 손을 뻗어 책을 쓸어본다.)
이 책을 쓴 사람 말이다.
(자신의 할아버지보다는 한참 어려보이는, 명백히 할아버지의 나이보다 당신의 나이에 더 가까운 외양을 하고 있는 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파르스름한 눈동자에 담겨, 당신의 모습이 옅게 비친다. 그 뒤로 보이는, 마름모꼴의 동공.)
그건 아니란다. 이제는 끝난 시대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잔재일 뿐이니, 이름도 없어진 게지.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이 괴물을 찾는 거니?

505 이름 없음 (HiIqeDd3w6)

2024-09-05 (거의 끝나감) 17:41:22

>>504

(그런 셈이라는 대답은 퍽 이해하기 어려웠다. 갇혀있다기에는 이곳에는 쇠창살도 없고 문에 걸린 자물쇠도 없으니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곧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생경 처음 보는 풍경 속의 오래된 낯익음. 짧은 관찰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느껴진 그것은 뱃속에 자리 잡았다.) 앗, 아름답다? (당신의 말을 듣자니 순간 예쁘다는 말은 초면에 실례인가 싶었더라. 다른 단어도 떠올려둬야 할까 잠시 몰골하자면 당신의 말에 주의를 빼앗긴다. 책을 쓴 사람과, 당신의 옛친구와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말은 뱃속에 자리잡은 것이 움트게 했다. 당신의 손길이 스쳐간 책을 이제는 품에 안았다. 그러다 펼쳐서 보여주었던 그 페이지를 한 번 눈에 담았다 당신을 바라본다.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사이 새벽달을 닮았던 눈동자가 가깝다. 움튼 것이 꿈틀거리며 심장을 건드는 것 같다. 쿵쿵 두근거리는 박동이 어지럽다.) ...응. (움튼 것의 이름은 의심이었다. 그것을 뿌리뽑기 위한 질문.) 이미 찾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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