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계단을 올라 붉은색 토리를 지나면 이제는 주인이 없는지 낡은 신사가 하나 나왔다. 자신의 산책 루트에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이사 온 이 후, 매일 이 신사에 자연히 발을 들였다. 이 지역에 전학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은 그 낡은 신사가 무슨 신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허나 누군지 모르지만 아무튼 신을 모시는 곳이었으니 너무 방치되는 것도 조금 뭐하지 않나 싶어 어차피 이곳을 찍은 후에 다시 내려갔기 때문에 잠깐 시간을 내서 소년은 그 근방의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자라난 풀을 뽑는 등,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정리했다.
처음엔 그저 황폐하고 버려진 곳이었으나 이제는 그래도 길거리가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며 소년은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누가 시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오고가다가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 정리를 한 것 뿐이었기에 특별히 뭔가를 바라거나 하진 않았다. 딱히 세전을 넣거나 하는 일 없이 오늘도 그냥 주변을 둘러보고 지저분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만 하던 소년은 가만히 저 아랫경치를 조용히 구경했다. 마을의 일부가 작게 보일 정도로 높은 지대에 퍼져있는 그 맑은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소년은 기지개를 쭈욱 켰다.
"그래. 나름 운동도 되고 좋네."
괜히 의미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년은 가만히 경치 구경에 집중했다. 누군가가 오는 발소리조차 미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신사에 살고 있는 신이어도 좋고 소년의 친구여도 좋고 그냥 지나가던 이여도 상관없어! 편하게 이어줘! 하지만 난데없이 꼽주거나 참교육 서사는 조금 곤란하니 그렇게 이어지는 경우는 스루할게!
>>1 한계단 한계단 올라온 이는 갈색고수머리를 말끔히 위로 올려묶은, 이제 갓 20대에 접어든듯한 자그맣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성이었다. 상기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서도 숨을 할딱이고 앓는소리를 내는품이 계단오르기에는 익숙지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오자 여성은 무릎을 짚고 멈춰서서 숨을 고르더니 푸념조로 혼잣말을 했다. 들어본것도 같지만 알아듣지는 못하겠는것이 외국어같았다. 아마도 한국어? 그러면서도 웃는낯을 유지하던 여성은 이내 산사와 아랫경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서는 여기저기 겨냥해보는것으로 보아 사진찍기 좋은 위치를 잡으려는 눈치였다. 이 외딴 신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건지도 모르겠다.
핸드폰화면에 비치는 풍경을 보느라 주위를 살피는데 소홀했던걸까? 여성은 어느새 소년이 서있는 곳으로까지 움직였고 하마터면 소년에게 부딪칠뻔했다. 그제야 자기만 있는게 아님을 알아챘는지 여성은 깜짝놀란 얼굴이 되어서는 소년을 보다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무래도 외국인이다보니 실례를 저질렀을까봐 긴장한 눈치였다.
누군가와 부딪칠뻔한 감각에 소년은 살짝 놀라 몸을 옆으로 피했다. 깜짝 놀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누군지 모를 여성을 바라보며, 정확히는 처음 보는 여성을 바라보며 소년은 여성이 고개를 숙인 것처럼 자신 역시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오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누군가가 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의 눈이 자연히 여성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전화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을 찍으려는 것인지. 아무튼 자신이 있는 이 위치에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소년은 살며시 옆으로 비키면서 여성에게 이야기했다.
"사진 찍으려고 올라오셨나요? 확실히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긴 하니까요."
여행객인가. 아니면 마을 사람인데 자신이 미처 모르는 걸까.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년은 경치 사진을 찍을 거면 얼마든지 찍으라는 듯이 저 아래로 보이는 마을 풍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물론 그렇게 달아도 괜찮아! 다만 일본배경으로 한 것이 맞고... 만약 한국어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서로 의사소통은 안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일단 소년은 한국어는 못한다..라는 설정이야.
어, 야! (익숙하고 낯익는 목소리가 널 불렀고, 목소리에 맞춰 시야를 겨냥하면 반갑게 웃으며 손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 봐라, 예쁘지. (새해랍시고, 신정이랍시고 무슨 일이 있는지 한복을 차려입은 모양새다. 풍성하게 뻗어내린 한복 치마가 혹시라도 제 발에 밟힐까, 인사하던 손과는 달리 치마를 꼭 움켜쥐고 있는 손이 야무지다.) 세배하면 용돈 주나? (키키 웃으며 개구지게 너스레를 떤다.)
>>4 어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친구가 한복을 입고서 인사하고 있었다. 별뜻없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러네. 어디 가냐? 잘 다녀와라. (그러고 넘기려다 용돈 운운하는 농담에 피식 웃는다.) 용돈은 어른들께 받고. 새해 복~ (친구의 용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뒤돌아 손을 흔든다.)
>>3 소년의 말에 여성은 점점 미묘한얼굴이 되었다. 아래를 가리키는 태도나 친절한 어조덕에 자기를 나무라는것이 아님은 느낀듯하지만 어리둥절한것도 같고 난감해하는것도 같은 표정이었다. 한동안 어쩔줄모르던 여성은 이윽고 핸드폰액정을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억양도 발음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문을 열었다.
"見てください。"
그러고서 보란듯이 내민 핸드폰의 액정에는 아마도 한국어로 추정되는 문장과 그 문장을 번역한것으로 보이는 일본어 문장이 함께 적혀있었다. 통역앱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여성이 하고자하는 말이 제대로 통역되었을지는 원어민 혹은 그수준으로 일어에 능통한 사람이나 알겠지만 외국인이 동원할수있는 수단은 그정도가 최선일것이다.
'제가 일본어를 전혀 못해서 뭐라고 하시는지 못 알아듣겠어요 죄송합니다 私は日本語が全然できなくて何とおっしゃってるのか聞き取れません。ごめんなさい。'
>>6 어. 여성 쪽에서도 전혀 못하는 상황이로구나. 정말로 미안해. 이렇게 되면 아마 서로 의사소통 자체가 힘들 것 같고 뭔가 더 이어가기가 조금 힘들 것 같아. ;ㅁ; 이어준 것은 고맙긴 한데 이런 상황이 된다면 조금 이어가기 힘들 것 같네. 정말 베리베리쏘리야. ㅠㅠㅠㅠㅠㅠ
>>1 한발짝 내딛기도 버거운듯 비척거리는 발 소리는, 점점 소년을 향해 가까워졌다. 그 불안정한 걸음이 한발 한발 가까워질 수록, 싱그럽기도 비릿하기도 한 향이 점차 짙어졌다. 이윽고, 한 소녀가 소년의 뒤편에 다가와 섰다. 옛 일본 사람처럼 새하얀 유카타를 입고, 길게 기른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어내린, 작고 가녀린 체구의 소녀였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 그려진 이목구비는 단아하고 선한 인상을 풍겼으나,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는 수심이 그득 어려있었고 까만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촉촉했지만, 생기 없이 퀭했다. 소년의 뒤편에 서서 머뭇거리던 소녀가 바싹 마른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씀 좀 여쭙겠어요... 혹시, 이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신사를 벌초하신 분은, 당신이신가요..."
>>1 한발짝 내딛기도 버거운듯 비척거리는 발 소리는, 점점 소년을 향해 가까워졌다. 그 불안정한 걸음이 한발 한발 가까워질 수록, 싱그럽기도 비릿하기도 한 향이 점차 짙어졌다. 이윽고, 한 소녀가 소년의 뒤편에 다가와 섰다. 옛 일본 사람처럼 새하얀 유카타를 입고, 길게 기른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어내린, 작고 가녀린 체구의 소녀였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 그려진 이목구비는 단아하고 선한 인상을 풍겼으나,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는 수심이 그득 어려있었고 까만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촉촉했지만, 생기 없이 퀭했다. 소년의 뒤편에 서서 머뭇거리던 소녀가 바싹 마른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3 맑은 공기를 가득 마시며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경치를 구경하는 도중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로 돌아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소녀가 한 명 서 있었다. 새하얀 유카타를 입고 묶어내린 긴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은 순간 두 눈이 동그랗게 뜨고 두 눈을 깜빡였다. 단정한 인상을 지니긴 했으나 얼굴이 퀭하고 창백한 느낌을 주고 있어 혹시 어디 아픈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 탓이었다. 우선 들려온 물음에 소년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벌초..라고 해야할진 모르겠지만 너무 지저분하고 버려진 것 같아서 청소하고 오고 가면서 정리한 것은 제가 맞긴 해요. 아. 혹시 하면 안되는 거였나요?"
소유하고 있고 관리하고 있는 이가 있었기에 자신이 멋대로 정리하거나 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살짝 긴장어린 표정을 짓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소녀에게 물었다.
>>14 순간적으로 소년은 이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뭘 어쨌단 말인가. 어버이와 친우들을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 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 광경에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소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시들고 싶었다는 말에 더더욱. 혹시 이 사람.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생각을 하며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제가 이곳을 청소하고 정돈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러니까 어버이와 친우들이 문제가 될 정도로?"
끊어버린 자신의 뿌리라던가. 그런 말을 하는 모습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긴 했으나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끄응 소리를 내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소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저기. 제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나요? 그러니까 저를 탓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시는데... 일단 여기를 정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풀비린내. 그리고 서늘하고 습한 공기. 갑자기 뭔가가 변한 것 같다고 느끼긴 했으나 그 상황의 변화의 원인을 소년이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말하는 내용을 보아 자신이 이곳을 정리하고 청소를 한 것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에 소년은 그렇게 확인을 하려고 했다.
>>16 영문을 모르겠다며 당황하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내리깐 눈에서 눈물을 떨구면서도, 한층 차분해졌으나 동시에 조금 전 보다도 가늘어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인간의 아이여, 나는... 당신이 그 손으로 뽑아낸 풀들의 자식이요, 친우입니다... 나는 살아남았으나... 나의 어버이와 친우의 생을 거두어간 그대의 얼굴이라도 보고자... 그 이유라도 듣고자, 나의 뿌리를 끊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부질 없군요..."
땅을 짚은 소녀의 가느다란 팔이 한차례 떨리더니, 그녀는 쓰러지듯 땅에 누웠다. 앉아있는 것조차도 힘에 부치는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가쁜 숨이 섞여 색색거렸고, 작은 몸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가, 우리를 내버려둔다 한들... 우리가 자라나면, 다른 인간이 우리를 정리하겠지요... 나의 청만으로, 당신의 변화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섭리인 겁니다... 지금은, 그저... 내세에서... 모두를 만나고 싶습니다... 단 한번, 마지막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던 소녀는,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고, 동시에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뿌리채 뽑힌 채로 시들어버린 덜 자란 풀잎 한 포기 뿐이었다.
/짜잔 막레야! 나는 이 설정에 흥미가 있어서 열심히 써봤는데 너참치한텐 어땠는지 모르겠네. 짧으나마 재밌었길 바라. 잇게 해줘서 고마웠어!
절망의 순간이 끝났고 희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세계를 파멸시키려고 했던 존재는 세계를 구하고자 모여든 용기있는 젊은이들의 손에 무너졌고 세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 세계의 수많은 종족들이 모두 하나되어 평화를 기뻐했고 다시는 어둠과 절망이 찾아오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종족간에 서로 협력을 하고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자는 조약이 맺어졌다. 이 평화가 오래갈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평화를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수많은 이들이 세계를 파멸시키려고 했던 존재에 맞서 싸웠으나 그 중 최선봉에 섰던 이들은 영웅으로 인정받고 수많은 사람들의 감사를 받으며 존경의 눈빛을 받았다. 제국에선 그들의 공을 인정하고 수고를 치하했다. 앞으로의 여생을 고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황제의 약속이 있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그에 동의했다.
"다 좋긴 한데 이제 나는 어쩔까 고민되네."
사내는 원래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던 이였다. 이른바 몬스터나 짐승을 사냥하고 그에 대한 부속물을 팔면서 살아가던 젊은 사냥꾼이었다. 허나 세계를 파멸시키려고 했던 존재가 이끌던 세력에 의해 마을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를 모두 멸해버리고 이 세계를 무로 돌려버리고자 한 그들의 야망을 당시 죽을 뻔 했던 자신을 구해준 이들에게 듣고 그 야망을 막고자, 그리고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복수를 하고자 합류했고 이 세상을 구한 후, 영웅으로 추대받은 것은 좋았으나 문제는 이제 뭘 하느냐였다.
물론 황가의 말이 있었으니 원한다면 이 수도에서 살아가는 길도 있었고 사내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하면 고생하는 일 없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을테니까. 허나 그럼에도 이곳의 시끌벅적하고 북적북적한 분위기는 영 익숙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내가 살았던 고향은 사람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사내는 그런 분위기가 조금 더 취향이었다.
"너는 어쩔거야? 이제 더 싸울 일도 없고, 그냥 말 그대로 평화잖아."
자신과 같이 싸운 동료 중 한 명. 우연히 지금 이 위치에서 만난 제 동료를 바라보며 사내는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간단하게 용사 일행이 있었고 세계를 구했고 다 끝이 났고 파티원 중 한명이었던 사내가 앞으로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동료 중 한 명에게 말을 건 그런 장면이야.
#동료 중 한 명이 누군지는 자유롭게 설정해도 괜찮아! 하다 못해 황가의 사람이라도 괜찮고 파티를 이끌었던 리더여도 괜찮아. 사내와 유독 친했던 존재라도 얼마든지 괜찮아.
#다만 서로 티키타카가 가능한, 핑퐁이 가능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싶어. 어쨌건 같이 목숨 걸고 싸운 동료니까 말이야.
>>19 한때 세계는 무겁고 어두운 절망의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모든 부정한 것들로 이루어진 존재는 무자비하게 지상을 유린했다. 너무나 강대한 존재 앞에 모든 것이 미약했기에 다시는 저 구름이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떤 구름이라도 빛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으니. 희망이라는 이름의 빛을 짊어진 이들로 인해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가장 앞서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른 이들을 세상은 영웅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제국의 황제는 일생 써도 부족할 재물과 그들의 영예를 두고 두고 기리는 것을 약속했다. 비록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충분히 자격 있는 이들이었다. 그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나? 나는,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말야."
거리 곳곳마다 기쁨의 노래가 연이어 흐르는 와중에 파티원이었던 그가 물어왔다. 그녀는 이제 어떡할 거냐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딱히 생각해두지 않았다고.
"직업적 의무를 위해 신전에 곧이 곧대로 돌아가는게 제일 편하겠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으네."
그녀는 파티에서 유일하고 유능한 마법사이자 성직자였다. 다소곳하고 여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긴 여정 동안 후방을 든든히 지켜주고 때로는 앞서 공격을 하기도 하는 당찬 성격이었다. 성직자 특유의 고지식함도 없어 덕분에 파티원들과는 두루두루 친했고 이 사내와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21 (내가 얼마나 잤더라?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감과 열기에 잠을 깨니,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이 켜져있었다. 눈을 부비고서 홀드를 해제하니 모르는 번호로 메세지가 와있었다. 확인해보니, 무슨 능력자 배틀물에서 주인공이 받을 법한 내용이었다. 스팸인가보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번호를 꾹 눌러 수신차단을 걸고 번호를 지운 뒤, 배게에 얼굴 묻었다. 피곤해죽겠다. 더 자자.)
딱히 생각해 본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하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짠 것 같았기에 사내는 제 동료의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나 의외인 것은 신관직을 내려놓고 속세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아직은 고민단계인 것 같았으나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보다 훨씬 더 앞을 생각하는 것 같아 사내는 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이미 다 불타고 남은 마을터만 있을테니 거기로 돌아갈 순 없잖아?"
물론 그곳에서 통나무 집 하나를 만들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봐야 대체 뭘 하겠는가. 죽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수습되어 공동묘지에 묻혔기 때문에 무덤을 보러 간다는 핑계거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가벼운 어투로 얘기했다.
"이대로 이 수도에서 살지, 아니면 원래 내가 살던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찾아가서 앞으로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사냥꾼 일을 하면서 다시 살지. 영 답이 안 나와. 그래서 참고겸 너에게 물었던 거야. 너를 포함해서 다른 이들은 어떨까 했거든. 아. 대충 들어보니 리더는 이 수도에서 이 제국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 같더라. 하긴 워낙 정의감이 뛰어나야 말이지."
자신이 포함되어있던 파티를 이끌던 리더를 떠올리며 그 자라면 확실히 그러고도 남는다고 스스로 납득하며 사내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정말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너도 나도, 다른 이들도 어떻게 또 잘 살아남은 것 같네. 고생했어. 근데 정말로 신관직을 내려놓고 살아도 되는거야? 그러니까 그 일을 하면서 쭉 살았잖아. 아니. 하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하던 일이 익숙한 법이잖아?"
>>32 앞으로 어떡할거냔 물음을 받은 그는 여러모로 고민 중인 대답을 내놓았다. 불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정착하자니 갈 곳도 마땅치 않고, 참 복잡한 고민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니 얘기하는 말투는 가벼워도 속은 그렇지 않겠거니 그녀는 생각했다.
"네 사정이면 고민 될 만 하지. 속 참 복잡하겠어. 음? 아 그래? 리더 답네. 그 정의감 아니었으면 나도 이 파티 안 들어왔을텐데 말야."
파티의 리더였던 이의 얘기가 나오길래 그녀도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라면 그럴 법 하다. 그러지 않는게 이상하고. 그렇게 정의감이 차고 넘치는 인간이 아니었으면 그녀가 전장에 나가겠노라 나서는 일도 없었을 거고 말이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다 끝난 뒤라니. 시간 정말 빠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그녀는 옆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되돌렸다.
"으음? 그치. 네 말도 맞긴 한데, 나는 하고 싶어서 신관을 했던 건 아니라서. 그래서 별 미련이 없나 봐. 그리고 말이지."
그의 말투처럼 가볍게, 혹은 무언가 내려놓은 것처럼 허하게 말을 하던 그녀가 목소리를 줄이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금 가까워진 정도가 아니라 귓속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그리고 정말로 발돋움을 하고 그에게만 들리게 소곤소곤 말했다.
"신전엔 워낙 머리 굳은 어르신들이 많아서, 돌아가면 영웅이랍시고 엄청나게 부려먹힐게 뻔하거든!"
신관이 하기에는 불경하지만, 여정 동안 보였던 그녀의 성격으로는 잘 맞는 말이었다. 얼른 말하고 옆으로 물러나서 쿡쿡 웃는 행동도 말이다.
"그리고 품위니 뭐니 얼마나 귀찮게 하는데! 너는 상상이나 돼? 내가 그 금과 보석으로 반짝반짝하는 성의를 입고 신관좌에 얌전히 앉아서 하루 종일 신도들 기도 들어주고 있는 모습이? 어우. 난 상상도 하기 싫다. 못 참지 못 참아."
"그 사정은 처음 듣는 것 같네. 리더가 파티를 이끌었기에 여기에 들어온거야? 나는 리더가 구해준 것도 있고, 마을의 복수를 위해서 같이 다닌 거지만. 역시 리더가 영향력이나 사람 이끄는 뭔가가 있긴 하다니까."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카리스마나 영향력이 있어야 그런 위험한 싸움에 동참하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내는 생각했다. 이를테면 자신 같은 이가 같이 세계를 구해보자! 라고 말한다고 한들 과연 몇이나 따라오겠는가. 어림도 없지. 없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키득키득 소리를 내며 웃었다. 딱히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역시 리더에 비하면 자신은 살짝 스펙이 아래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아무튼 제 동료가 자신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자 사내는 절로 응? 하는 표정과 생각을 하며 귓속말에 집중했다.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사내는 절로 우와 하는 표정과 생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곳이라면 아무래도 그런 어르신들이 많기야 하겠지만 보통 이렇게 이야기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딱히 부정하거나 할 생각은 사내에겐 없었다. 그럴 수 있지. 있고 말고.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런 신관 하나 있어도 이상할 거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들으면서 대체 넌 어쩌다가 신관을 하게 되었는지 절로 궁금해졌어. 아무리 생각해도 적성 안 맞는 거 아니야? 아니. 하지만 그래도 적성이 아예 안 맞으면 시작도 하기 힘들었을텐데. 하긴,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나도 처음에 사냥꾼 일 할 때 허탕만 치면서 참 이게 맞나 싶었을 때도 많았고."
지금이야 나름 실력이 있고 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할 수 있었으나 초기의 자신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 흔하고 약한 슬라임 하나 사냥을 제대로 못해서 도망쳤던 과거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지. 괜히 키득키득 웃으면서 사내는 두 손으로 깍지를 낀 후 제 뒷통수에 대며 하늘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좋건 싫건 조만간에 다 헤어지게 되겠네. 나야 좀 더 생각을 해보려고 여기에 며칠 있긴 할 거지만 말이야. 마침 황가에서 당분간은 지금 쓰는 숙소를 마음껏 써도 좋다고 했으니 이용할 것은 이용해야지. 너는 조만간에 여길 떠날거야? 아니면 며칠 더 있을 거야?"
>>34 "음. 그러니까 리더가 신전에 와서 동료를 구하면서 하는 말을 듣고 아, 이 녀석은 터무니없는 용사형 인간이구나, 싶더라고. 그런데 그 뒤를 따라가보는게 지겨운 신전보다 낫겠다 싶더라. 저렇게까지 말하는 인간이 뭘 해낼지 궁금해지잖아. 리더가 구하는 조건에 맞는게 나 밖에 없기도 했어."
당시 신전에서 가장 실력이 출중한 건 그녀였으니 자연스럽게 발탁될 일이었지만 지명되기 전에 자원했었다. 더는 누군가의 떠밀림에 뭔가를 하고 싶지 않기도 했었다. 그 때의 생각이 지금에 이르러서 신관직을 내려놓는단 선택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녀가 남몰래 속삭인 말에 잔소리 한두마디쯤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그러려니 넘겼나보다. 대신 왜 그녀가 신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던가 말하더니 혼자 중얼중얼 떠든다. 그런 그를 지그시 보던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투덜거렸다.
"야. 궁금한 걸 묻던지 네 얘기를 하던지 하나만 말을 해. 혼자 이랬다 저랬다 뭐래는 거야? 나 확 가버린다?"
이 이상 말상대를 해주지 않고 가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으며 말하던 그녀. 그러다가도 그녀는 언제 떠날 거냐는 물음에 그를 따라하듯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나도 당분간은 있어야 해. 신전에서 제적하려면 여기 수도에서 해야 하고, 프리 모험가로 등록이라도 하려면 길드 본부가 있는 곳에서 하는게 편하잖아. 듣자하니 대륙 곳곳엔 아직 잔재가 남은 곳도 있다고 하니까. 그거 치우는 일이나 하고 다녀도 밥벌이는 되지 않겠어? 그러다 좋은 곳 찾으면 정착하면 되고."
꼭 당장 정착지를 찾을 필요가 있냐는 투로 말한 그녀는 잠시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뭉글뭉글 흐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별 의미 없는 듯이 툭 말했다.
"앞으로 뭐 할지 말고, 하고 싶은 건 없어? 이제 의미 없이 죽을 만큼 위험할 일도 없잖아."
투덜거리는 제 동료의 목소리에 사내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역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났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장난스럽게, 그 와중에 또 가볍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사내는 정말로 물어볼까 살짝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되었건 그녀도 당분간은 여기에 있는다고 하니 바로 헤어지거나 얼굴이 안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확실한 것은 제 동료는 신관을 그만둘 것이 확실해보였다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저렇게 이것저것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특히나 더. 신전에서 과연 무슨 말들이 오갈지 궁금해졌지만 자신이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내는 괜히 아쉬운 표정을 무언으로 지었다.
"하고 싶은거라. 이전에는 먹고 살고 마을을 몬스터에게서 지키기 위해서 사냥을 했고 그러다가 마을 사람들의 복수를 해야겠다 싶어서 싸움에 끼어들었고 그렇다보니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네. 와. 나도 참 너무 바로 앞만 보고 살았다 싶어."
이거 안 좋은 버릇이라는데. 키득키득 웃으면서 사내는 살짝 근처 벽으로 걸어간 후에 조심스럽게 기대면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상을 둘러보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야! 뭔가 이전에는 싸우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닌다고 제대로 구경도 못했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뭔가 편안하게 관광도 가능할 것 같고 말이야. 아. 이러다가 어디 좋은 길드에 소속되어서 길드장을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이 있을지, 현실성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그런 말들만 괜히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사내는 눈을 감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36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의 대꾸에 그녀도 익숙한 듯 어련하겠냐고 똑같이 투덜투덜 했다. 파티를 맺고 같이 지낸 시간이 하루이틀도 아니었으니까 파티원들과 이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 곧 추억으로만 남을 옛 일이기도 하고. 아무튼 더 물으면 본인 얘기나 해줄까 했는데, 따로 질문이 없는 걸 보면 저것도 그냥 해본 소리였나 보다. 참 나. 그럴 거면 말로 꺼내지나 말지. 그녀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째려보다가 그가 자리를 옮기자 따라서 몸을 돌렸다.
"앞만 보고 사는게 뭐 어때서. 이제부터라도 사방 돌아보면서 살면 되지."
그녀는 벽으로 가지 않고 그를 마주보는 방향에 서서 스스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나쁘건 아니건 지금 잘 되었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어찌 보면 속 편한 소리를 참 가볍게도 말했다. 그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둘러보거나 관광을 한다거나 얘기를 하자 그거 괜찮네, 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 봐. 그렇게 할게 많은데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넌 아무튼 평소에도 그렇고 전투 때도 그렇고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실전에서 너 케어해주느라 진 빠진 날이 절반 이상일 걸!"
어휴! 요란한 소리 내며 고개를 또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그녀의 말엔 그를 탓하거나 진심으로 나무라는 투는 없었다. 그녀가 그를 케어했던 만큼 그도 파티의 한 명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는 걸 잘 아니까.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 같은 거랄까. 그저 가볍게, 지난 날을 돌아보듯 얘기하던 그녀가 잠시 말을 주저했다.
"그...을쎄다. 어쩌면 아예 없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그가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에 마주치는 날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한 후에 아리송하고 의미심장하게 그녀가 대꾸했다. 대꾸하고 볼을 긁적인다. 시선도 아래로 내리고 무슨 생각인가 골몰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말을 툭 던졌다.
"너어... 혼자는 외로울 지도 모르니까, 같이 가줄 수도 있는데? 돌아다니는 거? 아 싫음 됐고!"
물었으면 대답할 틈이라도 줘야 할 텐데, 틈도 안 주고 싫음 말라며 다다닥 쏘아붙이더니 홱 돌아서 등을 보였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그냥 돌아서서 그 앞을 보고 있는 것처럼.
>>31 참치야, 내 캐릭터의 여건을 고려해서 노선을 변경해주려고 해줘서 고맙고 이렇게 말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이어가기 어려울 것 같아. 답변 듣고 답레를 써보려고 했는데, 평범한 겁보인 내 캐릭터가 어떻게 전문가들도 힘을 못 쓰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되는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더라구ㅠㅠ 배틀물 캐릭터의 서포트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구... 그래서 못할 것 같아 미안ㅠㅠ 다른 좋은 상대 구하길 바래ㅜㅜㅜ
"와. 이건 좀 억울하네? 내가 활약한 것도 많고 다른 파티원들 구해준 적도 많았거든? 숲을 이동하거나 할 때 바로바로 파악해서 알려준 것이 누구인데 이래."
당연하나 이 항변 또한 진심으로 화가 나서 항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파티원들끼리 가볍게 할 수 있는, 정말로 가벼운 티격태격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기에 가볍게 투닥거릴 수 있는 무언가. 그 분위기는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도 크게 변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키득키득 웃었다.
"어디 갈 줄 모르니까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거 아니야? 세상이 넓다고 해도 무한대로 펼쳐진 것도 아니니까. 못 만나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거기까지인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모험을 같이 하고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동료라고 해도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었다. 당장 리더만 해도 다른 길로 걸어가려고 하고 다른 파티원들도 이제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나고 다른 길을 걷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같이 있을 수 있는 이도 있겠지. 나중에 소식이나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와중 제 동료의 뭔가 쏘아붙이는 목소리와 행동에 사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같이 돌아다니자고? 나야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 좋긴 하니까 상관없어. 아. 하지만 나, 맨 처음은 고향이 있었던 곳으로 갈 거야. 물론 가도 아무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다 끝났으니 보고는 할까 싶어서. 물론 묘지가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보고를 하려면 거기가 제일 낫지 않을까 싶어."
모두를 죽여버린 그 녀석들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복수를 갚는데 성공했다. 그 보고만큼은 확실히 하고 싶었기에 적어도 그곳에는 꼭 한 번 가보긴 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사내는 쭉 기지개를 켰다.
"그렇다면 네가 대충 신전에서의 일이 다 정리되면 그때 얘기해줘. 나는 늘 쓰는 그 숙소에서 신세를 좀 지고 다른 멤버들도 만나고, 리더하고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볼까 싶거든. 같이 다닐 거면 네가 정리할 때까진 기다려줄게."
해가 뉘엿거리기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마 곧 있으면 불꽃이라도 잔뜩 터뜨린 뒤 파할 것이다. 값싸지만 제법 맛있는 냄새를 풍겨대는 음식 노점들과, 장난감이나 뽑기 상품따위를 들고 뛰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흥겨운 분위기를 더해가며 축제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그러나 아무리 즐거운 축제라 해도 소란스러운 곳에 오래도록 있으면 기가 빨리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여기, 신사 근처 수풀에 웅크려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그랬다. 화려한 축제 등불 밑에 물들어 다른 이들과 함께 즐거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소담스런 축제의 불빛더미를 관찰하는 게 좋다. 이따금씩 작은 거리를 손 안에 담아내면 꼭 마을과 닮은 작은 미니어처를 만들어낸 것만 같기도 했다.
게다가 불꽃놀이도 여기서 보는 게 훨씬 더 잘 보인단 말이야. 아니, 그런데..
"아우, 모기! 가려워 죽겠네 진짜!"
...이렇게, 감상에 젖을 만 하면 그것들을 엉망진창으로 깨부숴버리는 모기 몇 마리를 호들갑으로 쫓아내기를 벌써 수십 분 째. 간지러운 곳을 찰싹 때리거나 벅벅 긁거나 하며 종종 신사로 통하는 계단 아래쪽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무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꼭 놀래키고야 만다. 올해는 또 당하기만 하지 않으리라! 마음 속으로 굳은 결의를 다지며 조용히 웅크려 계단 아래쪽을 살폈다. 거기에 인영이 가물거릴 때까지.
>>41 언제 어디서 마주칠 지 모른다는 건, 달리 표현하자면 다신 마주치지 못 할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륙은 넒고 각자 어디로 향할지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는 그게 싫었던 것 같다. 리더도, 다른 파티원들도, 모두 뿔뿔히 흩어져가는게 싫었던 것 같다고. 위대한 업적으로 영웅이라 불리고 많은 재물을 얻은들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너, 네가 상관없다고 분명히 말 했다? 네가 대답한 거야?"
홱 돌아섰던 그녀는 그의 대답에 슬그머니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그가 그러라 했으니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말라고.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만족스러워 보일 법도 한데, 불만이 남았는지 입을 삐죽 내밀고 혼자 궁시렁댄다. 워낙 작은 소리라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깐이기도 했고. 곧 표정을 누그러뜨린 그녀가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말했다.
"먼저 갈 곳이 있다면 거기부터 가는게 나을 테지. 어딜 가든 갈 곳은 다 갈 테고. 음. 그럼 당장 내일 신전에 가서 대신관이랑 담판 짓고 나와야겠네. 영감탱이 말발 이기려면 애 좀 먹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대신관을 서슴없이 영감탱이라 칭하며 에휴,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 당기려 하면서 처음과 같이 쾌활하게 떠들었다.
"앞으로 뭐할지도 정했으니까 가서 술이나 마시자. 남들 다 축배 드는데 우리만 빠지는게 말이 돼? 잔말 말고 빨리 따라와! 리더 녀석 어디서 마시는지 알고 있으니까 거기 끼자구!"
파티 중에 포상 제일 많이 받은게 리더 아니냐고, 다 떠나기 전에 실컷 얻어먹고 가자고 말하며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려 했을 것이다.
혼자 다니는 여행길보다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외로운 법이 없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에는 역시 아는 이가 좋았다. 그게 그녀이건 다른 이건. 적어도 이렇게 되면 당분간 심심하진 않겠다는 식으로 사내는 정말로 가볍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응. 역시 누군가와 같이 다니는 것이 좋았다. 이런 티격태격하는 분위기도 그에게 있어선 이제는 언제나처럼 있었던 일상에 가까웠으니까.
"내일 바로?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아? 당장 내일 전쟁터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내일 아침 세상이 멸명하는 것도 아니잖아? 천천히 해도 돼. 천천히. 아. 물론 빠르게 결판을 내겠다면 그건 네 자유긴 한데. 아무튼 잘되길 바랄게."
뭔가 꽤 힘들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는 저 신관이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잘 할 수 있겠거니 생각을 하며 사내는 사내 나름대로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어디로 갈지를 고민했다. 역시 맨 처음은 불에 타서 이제는 없어진 자신의 마을이었다. 그 다음에는... 물이 정말로 많아서 물의 도시라고 불리던 그곳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계획을 짰다. 이후에는 같이 다닐 이가 또 생기면 다 같이 이야기를 해서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제 동료의 움직임에 맞춰 앞으로 걸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 다 같이 함께 얻어낸 평화인데 먹을 건 먹어야지. 이 축제 분위기가 얼마나 갈진 알 수 없으니 말이야. 그럼 안내 부탁할게. 난 리더가 지금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으니까. 제국 귀족 분들과 같이 있으려나?"
어찌되었건 모두를 이끈 것은 리더였고 자연히 혼담이나 그런 것들이 오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을 구한 영웅쯤 되는 이 중에서도 제일 인정받은 이인데. 어떻게든 자신의 혈연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들이 많겠지. 아. 그럼 너무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할 필요는 있겠네. 그렇게 혼자만의 결론을 내리며 사내는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다 정리되면 그땐 또 잘 부탁해. 이번엔 느긋하게 세상을 보고 싶으니까 급하게 가진 말자고. 알았지?"
에르네스트 산은 왕국의 수도 북쪽을 감싼 산이다. 만년설이 쌓일 만큼 높지는 않으나 수풀이 빽빽하고 비탈이 험준한 것으로 유명하며, 언제부턴가 용이 서식지로 삼았다는 전설도 돌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무꾼이나 사냥꾼도 어지간해선 이 산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데, 몸에 딱 붙는 가죽옷으로 인해 언뜻 가냘프게까지 느껴지는 체형이 두드러지는 여성이 거의 본인의 몸통만 한 등짐을 멘 채 기암괴석으로 가파른 산마루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순금같은 광택이 감도는 머리칼도 무슨 거치적거리는 물건 치우듯 잔머리 하나 없게 한껏 올려 묶은 채다. 그런데 바위의 돌출된 부분을 잡거나 딛는 팔다리의 동작에는 제법 힘이 실렸다. 보기와는 달리 근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던 여성은 무언가를 잡지 않고도 발 딛고 설 수 있는, 두 발 딛고 선 곰도 자그맣게 보일 것 같은 커다란 동굴의 입구에 오르자마자 진이 다 빠졌다는 듯 무릎을 짚고 헥헥거렸다.
“아고, 나 죽네!”
무심결에 튀어나온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을까? 여성은 제 입을 틀어막더니 한동안 새파란 눈망울을 굴려 가며 주위를 살폈다. 좀 전의 음성은 다행히 메아리로 돌아올 만큼 멀리 퍼지지는 않아 주변은 고요했다. 산 밑에 비해 세찬 바람이 나뭇잎을 훑는 소리나 아마도 새소리로 추정되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만 이따금 울릴 뿐이었다. 그러자 여성은 안심한 듯 마른세수로 땀을 닦아내고는 등짐을 풀었다. 그러더니 등짐에 든, 풀이며 나뭇가지며 잔돌 따위가 뒤섞인 진흙을 꺼내서는 가죽옷은 물론 하얀 피부까지 흙투성이가 되도록 치덕치덕 발랐다.
여성이 이러는 까닭은 이 동굴이 용의 서식지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용에게 들킬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낮추기 위해 진흙으로 체취를 가리려 한 것이다. 그 뒤 여성은 제 몸을 숨길 데를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입구 왼편의, 토끼 귀를 맞붙여 놓은 듯한 형태의 바위 뒤에 숨었다. 이 정도면 용이 오갈 때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여기에 정말 용이 살까? 여성은 심장 고동 소리가 새어나갈까 겁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44 "아니! 문제 없어. 그냥 확인한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말 바꿀 일은 없겠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수락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수락은 수락이니까 나중에 말 바꾸지 말라고 그녀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거듭 확인하고 할 필요는 없지만,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공동의 목표를 이룩하고도 아직 같이 있을 시간이 있다는 것이.
"아, 쉽게 말하긴 했는데, 신관 제적이 말처럼 쉬운게 아니거든. 등급에 따라서 절차도 가지각색이고, 이래뵈도 높은 급이라 순순히 놔주지 않으려고 할 테니 말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래도 오늘밤은 기절할 때까지 마실 생각이지만!"
제적 절차는 빠를수록 좋으니 당장 달려가서 대신관들을 닥달하는게 제일 좋음이 분명하나, 아직 들뜬 분위기가 식지 않은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이런 분위기를 즐길까. 한차례 축제 분위기가 식으면 일상을 되돌리기 위해 분주해질테니 말이다. 그녀의 잡아당김을 따라 그가 걷기 시작해 그녀도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어쩌다보니 팔은 잡은 채로 조금은 종종거리는 걸음을 내딛으며 옆에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숙소 근처에 큰 술집이 있는데 거기 밤새 잡아놓고 술판 벌인댔어. 귀족은 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걔가 언제 높으신 분들이랑 술잔 기울이는 거 봤어? 있어도 신경도 안 쓸 걸?"
그를 만나기 전에 전해들은 리더의 소식을 알려주며 그 술집을 향해 길을 나아간다. 굳이 그 술집이 아니어도 여기저기서 즐겁게 떠드는 소리 들려오는 거리를 걷다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힐끔 보고 피식 웃은 그녀가 대답했다.
"나도 여유와 한가로움이 뭔지 아는 사람이거든? 대륙 구석구석 다 돌아다니면서 보고 다닐 거니까, 나중에 너무 느긋하다고 투덜대지나 마! 아, 여행 중에는 생각 좀 덜 하고!"
다니는 내내 잔소리 하는 건 사양이라며 깔깔거린다. 말이 이렇지 진짜 잔소리를 할 건 아니고 물론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떠들다보니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가장 시끄러운 술집이 보이고, 그녀는 저기라고 어서 가자고 그를 재차 잡아 끌었을 것이다.
몇 년씩이나 걸리는 것이라면 조금 힘들지도 모르나 그래도 몇 달 정도까진 그도 이곳에서 기다려줄 수 있었다. 사실 황가의 약속이나 지금 자신들에게 있는 명예나 대접을 보면 몇 년을 있어도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계속 숙소에서 그렇게 지내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겠으나 눈치가 보이는 것은 그가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쫓아내진 않을 거 아니야. 귀족 분들이 어디 가만 두겠어? 당장이라도 내 가족 만들겠다고 자기 자식들을 데려다가 접점 만들어보려고 안달일 것 같은데."
딱히 편견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사내의 목소리는 비꼬는 투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이라도 만약 동생이 있다고 한다면 리더에게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냐고 물어봤을테니까. 자신은? 딱히 생각이 없었다. 생사를 같이 해서 그런지 그런 것보다는 역시 동료 의식이 좀 더 컸으니까. 이내 들려오는 제 동료의 목소리에 사내는 피식 웃었다.
"성향이 이런 것을 어쩌겠냐. 조금은 봐줘라. 그 정도는."
시끄러운 술집. 그곳을 바라보며 사내는 잠깐만이라는 말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건물들이 보이며, 수많은 활기가 바로 그 곳에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풍경을 자신이 만들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이내 피식 웃으면서 신관에게 이야기했다.
"됐어. 가자. 오늘은 실컷 마시자."
#상황상 막레 비슷한 느낌으로 써봤어. #이후에는 아마 사내가 신관이 일을 다 치러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숙소에서 지내고 일을 다 처리하면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싶네. #돌리면서 재밌었어!
>>21 야망이라. (발을 동동 구르며 한참 피던 담배를 끊고 들어가려던 무렵, 패딩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보았다. 웃기네, 배틀이라니. 게임 홍보 같은건가? 아니면 티비 프로그램? 담배와 더불어 나쁜 버릇 중 하나인, 쓸 데 없는 곳에 정신을 쏟아버리는 버릇이 발동되어 한참동안이나 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네, 라고 보내면 되는건가?) '넨ㄴ' (추워서 오타났다.)
[발할라 프로파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전뇌공간인 '발할라'에서 아바타로서 배틀할 수 있게 됩니다. 발할라에서는 정신력이 곧 아바타의 '강함'을 결정합니다.] [발할라의 '챔피언'이 되면 반드시 '소원 하나'를 들어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아바타의 초기 설정을 도와드릴 P, 프로파일러 입니다.] [아바타 설정을 위한 문답에는 5분이 소요됩니다. 진행을 원치 않으시면, 지금 당장 기기에서 어플리케이션을 제거해 주십시오.]
>>51 응? 으응? (바보같은 목소리를 흘린다. '넌 말야, 좀 경각심이 필요해. 어디 가서 사기나 안당하면 다행이지.' 라고 질린 듯이 말하던 전 애인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정말 경각심이 부족한건가. 멍하니 리부팅 되어, 실행되는 어플리케이션을 지켜본다.) 발할라? 탈룰라 같은 건가. (교육을 포기한 자의 혼잣말은 같이 새어나온 뿌연 김과 같이 덧없다. 왠지 지금 안에 들어가면 애들한테 호구냐고 욕 먹을 것 같은데. 바깥은 춥고. 잠깐 고민하다 5분만 더 버티잔 생각에 메세지만 보내본다.) '혹시 사기에염? 저돈없어요ㅜ.ㅜ'
>>53 이 아저씨 자기 할 말만 하네. (상대방의 성별 조차 모르지만, 괜히 무시 당하는 거 같아 입술이 댓발 나왔다. 그러나 이어서 출력된 메세지를 보고는 눈을 깜빡인다. 한참 불평하던 것도, 수상하게 느껴진다는 직감 조차도 호기심은 이기지 못한다. 이내 품에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서 메세지를 전송한다.) '오페라핑크. 완전 쨍해염.' '쌈박질 잘해염><' '머리가 나빠염ㅜ' (그리고 손가락이 잠깐 멈칫했다. 원하는 거라. 으음. 곰곰히 생각하며 휴대폰 화면만을 노려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지폐 모양 성인업소 찌라시를 발견한다. 이거다.) '지폐에 제 얼굴 실리는 거염~~~' (히히 웃고는 아바타명이란 말에 옛날부터 쓰던 닉네임을 보낸다.) '리치는맛있어'
어느 뒷골목, 네온사인이 가득하고 식당 후드로부터 퍼지는 음식 냄새와 화장실의 오물 냄새같은 것들이 섞여있는 골목의 입구.
그곳에서 등을 기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광나는 검은 가죽 자켓에 후드점퍼,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어 옆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행인들 중 몇몇이 그와 눈을 마주친다. 그들은 그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일부만이 다리의 툭 튀어나온 기계같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평소라면 이렇게 나와있진 않을 터였다. 원래 그는 뒤에서 암약하는 존재였다. 기실, 이 광대한 네트에서 그가 닿지 못하는 곳은 없었고, 득하지 못하는 정보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 (이자 사장)의 부탁으로 여기 오게 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
그가 듣기로는 무슨 물건을 받기로 되어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 녀석의 친구일 지도. 동업자이거나, 고객일 수도 있겠지.' 남자의 동료는 탐정이다. 그 탐정은 유난히 괴팍한 성정 탓에, 그에게 의뢰를 맡기는 고객들은 터무니없거나, 괴상한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잦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도덕적인 일은 그쪽에서 거절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의도가 선하다면 아무리 불법적인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용감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위대하신 양반은 왜 사무실도 변변찮은 곳에 얻어서는.'
여하간, 지금은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드를 벗었다. 갈색의 살짝 곱슬거리는 산발이 제멋대로 헝클어져있었다. 남자의 푸른 두 눈은 어딘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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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는맛있어 님, 아바타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상세 커스터마이징은 발할라 내의 인터페이스, 혹은 상점에서 가능합니다.] [도움말이 필요하면 발할라 인터페이스에서 P를 찾아주십시오. / P 역시 커스터마이징 가능. 초기 P는 입력된 데이터만 출력. ] [세상이란 전장터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들에게 영광을]
(오페라핑크색 머리와 눈동자를 한 당신의 아바타가 핸드폰 화면에 보인다. Lv1.리치는맛있어/격투타입 이라는 정보도 표시된다. 그리고 주변 세상이 사이버 공간으로 변한다. 패딩도 온데간데 없고, 담배도 사라진다. 주변에 자리하는 것은 끝없는 푸른색의 데이터 회로가 깔린 평원이다.)
>>56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담배를 입에 물려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닫곤 고개를 든다. 그리곤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마지막으로 제 손을 내려다본다.) 이, 이게 무슨... (데이터의 평원. 그곳에 홀로 서서 제 쨍한 색의 머리카락을 긁적거린다.) 내 담배 어디갔지. (머리는 안좋지만, 잔머리 하나 만큼은 좋다 했었지. 도움말 어쩌고 했던 것이 떠올라 양손으로 확성기 모양을 만들어보인다.) P 씨~ 제 담배 어디 갔나요~ 대답해주세요~
>>57 (당신이 P를 호출하자 P가 당신의 앞에 나타난다.하얀색 외피에, 이목구비만 달려있는 아무런 특징없는 모습. 그것은 흡사 신생아 같기도, 노인같기도 한 모습이다.) 어서오십시오. 리치는맛있어님. 당신은 현재 발할라에 접속해있습니다. 즉, 현실의 아이템은 이곳에서 소지하실 수 없습니다. (P의 손가락이 당신의 빈 입술을 가리킨다.) 현실에서 당신의 신체는 '기절' 혹은 '수면' 상태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할라 프로파일을 플레이하는 당신의 정신과, 현실에 있는 신체의 링크가 약해져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58 우와! 못...생겼어. 미안합니다. (당황하면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지라, 일단 질러놓고 제대로 허리 숙여 사과를 한다. 그러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 점점 표정이 경악하는 얼굴로 바뀌어간다.) 잠만, 그럼 나 지금 눈 내리고 영하인 바깥에서 쓰러져있는거!? 헐, 나 죽은 거 아냐? (P와 말없이 수 초간 응시한다. 그리고 이내 쭉 기지개를 켠다.) 에이, 뭐 괜찮겠지. 친구집 앞이니까 알아서 챙겨줄걸. 그쳐? (P와 팔짱을 끼려한다.) 근데 여기 어디에여? 뭐하는 곳이구여?
>>59 (P의 얼굴에는 눈썹이 없었다. 그러나 P는 당신의 발언의 눈썹- 이라고 할만한 이마근육을 치켜올렸다 내렸다.) 원하신다면 바라는 외형, 성별, 스타일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합니다. (P는 사과하는 당신을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접속경과간이 궁금하시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P는 당신이 팔짱을 끼도록 내버려두었다.) 이곳은 조작기능을 익히고, 각종 설정이 가능한 연습장입니다. 선호하시는 배경이나 분위기가 있으십니까? 연습장의 스킨을 바꿔드리겠습니다.
>>60 커스터마이징이여? 흠. 괜찮! 제가 정이 들면 되죠. (빡빡이~. 당신의 맨들한 머리를 슬쩍 문질러본다.) 편한 모습으로 계세여. (자기 머리색은 맘에 드는 지 자기 머리카락을 슬쩍 띄웠다 놓는다.) 근데 뭘 조작하고 뭘 연습하는데여? 죄송...저 머리가 나빠서 이런 거 잘 못하거든요. 근데 P씨는 몇 살이에여? 전 고2에염. 자퇴하긴했는데. (헤헤, 웃고는) 저 근데 왜 여기있는 건데여?
>>61 ... (당신이 빡빡이라고 하자 P의 머리에서 순간 머리카락이 솟아난다. 검은색 장단발에 머리안쪽은 청록색인 투톤 시크릿 헤어다.) 고등학교 2학년, 말입니까? (당신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턱에 수염을 커스터마이징 한다.) 형이라고 불러라. 이 편이 낫겠지? (P는 리치는맛있어,의 연령대와 상황을 고려해 스스로를 서른 전후의 남성으로 커스터마이징을 세팅한다.) 말투도 이 편이 나을거고. 우선 좀 움직여봐. 운동장에서 국민체조 해본 적 없어?
>>62 어... (당신의 모습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곤 어색하고 뻣뻣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대체 뭔 상황이에여, 이거. 그보다 커스터마이징에 개인적인 감정이 좀 실리신 거 같은데...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이 웃다가 고갤 갸웃거린다.) P 형, 저 국민체조 삽고수에요! (그래도 금방 적응했는지, 혼자서 쭉쭉 허리를 피고 다리를 피고 한다.) 근데 왜 제 질문에 다 대답 안해주세여? 저 형이랑 싸워야해여?
>>63 좀 더 유저친화적인 외형을 취하는거지. (P의 눈색이 변했다가 당신과 같은 오페라핑크 색으로 고정된다.) 못생긴건,싫다며? (P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가에 악랄한 미소가 떠오른다. P가 에단 호X, 톰 X루즈 수준의 미형 커스터마이징을 취하면서 리치는맛있어, 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옳지. 잘한다. 잘하긴 하네. (당신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P의 안구에 이진수 숫자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발할라와 동조율이 높군. 너 멘탈 쎄다는 소리 자주 들어? (P는 스스로의 턱을 매만지다가 씩 웃는다.) 원래 기본이동 익히는것만 해도 동조율 약하면 반나절은 걸려. 그렇게 원하면 바로 싸워볼까?
>>64 아니, 형! 그건 반칙이져! 왜 혼자만 잘생겨진담!? (어이 없다는 듯이 헛, 참, 하면서도 킥킥 웃는다.) 제가 형들한테 깍듯히 대해서 다행인줄 아세여. 아, 그렇다고 아저씨 취향인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마시구. 전 여자 좋아해여~. (온 몸을 휘적휘적 돌려보니, 뼈가 내는 소리와 진동마저 진짜 같다.) 랄랄라가 뭔데여? 어, 저 멘탈 약한데? 영화 보면 자주 울어여. (제자리 조깅을 하면서, 거친 행동을 취하기 위해 몸을 살짝 덥힌다.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본능적으로 캐치했기 때문일까.) 엥? 진짜여? 에이, 제가 형이랑 왜 싸워여~. (서글서글 웃으면서 다가가다가, 대뜸 당신의 손목깃을 붙잡아 당겨 무릎으로 얼굴을 가격하려한다.)
>>65 아 뭐야, 그럼 말을 하지. 근육미소녀로 커스터마이징 했을텐데. (시시껄렁한 농조로 말하면서도 당신이 몸을 푸는 모습을 초 단위로 분석한다.) 발할라. 북유럽 신화 몰라? (P는 리치는맛있어,에게 설명하는 눈높이를 생각보다 많이... 낮춰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약점이라더니.) 감수성이랑 멘탈강도는 다른 문제고. (느긋하게 말하다가, 손목깃이 붙잡히면 당신의 손을 주먹쥐어 받치고 반대편 손으로 팔을 눌러 밀며 물러난다.) 다시.
>>66 건강미는 저도 좋아하는데, 그런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여? (공격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지만, 반응은 꽤나 심심하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지는 리치는맛있어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것이겠지.) 이거 안당해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 치던데. 형도 좀 치시나봐여? (그대로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다리 근육을 풀더니, 재빨리 달려나가며 마운트를 걸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제가 그거 알면 자퇴 했겠냐구여! (그러나 태클 포지션은 페이크. 자세를 크게 낮춰 태클 변환해 당신의 다리를 걸려한다.)
>>68 (AI라는 소리를 듣고 침묵한다.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을 것이다. 또 입술이 댓발 나왔다.) 에...에이아이라도 사람이에여! 너무 낙담하지 마세여! (진짜 뭔지 모르는 지, 위로를 한다. 그리고 태클이 걸리자 환희의 미소를 지어보이다, 당신이 순식간에 자세를 다잡자 아까보단 놀란 듯이 보인다. 저런 게 되는 거였어? 하는 표정. 당신이 날린 라이트훅을 코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도 반은 운, 반은 본능이었으리라.) 와, P형 뭐하는 사람이에여? 좀 쫄리는데? 아저씨 나이 먹고 저 같은 학생 상대로 이럼 미성년자 폭력이에여! 글고 제 삶은 제가 살고싶은 대로 살 거에여! (이번엔 격투로 들어선다. 가장 먼저 날리는 것은 방금 전, 당신이 시도한 라이트훅이다.)
>>69 (당신의 침묵에는 침묵으로 응한다. P는 그런 존재다. 유저를 비추는 거울이다. 모든 P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모든 P는 동일하지 않다. 최소한 커스터마이징과 자기학습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다른 P들과 구별된다. 그 존재 자체가 유저를 향한 프로파일링이다. 위로가 필요한 건 너잖냐, 리치는맛있어의 P는 생각한다. 자신의 라이트훅이 빗나가자 P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원석을 발견했을 때의 뿌듯한 표정이다.) 뭐, 대충 야쿠자 였던걸로 칠까? 그게 더 몰입되겠어?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 여기기에 앞엣말은 건성으로 대꾸한다. 제 삶은 제가 살고 잎은대로 살 거에여. 그 말은 심층기억장치에 저장한다. 당신의 라이트훅을 날리자 머리를 숙이고 가드를 올린다. 상체와 하체 역시 머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고, 물흐르듯 몸을 틀어 피한다.) 이게 위빙이라는거야. 본능도 좋지만 이론도 배워.
>>70 야쿠자라니, ...오겡끼데스까! (당신이 마치 꾸물텅거리는 액체가 된 것 마냥 공격을 피하자, 그 뒤로도 주먹을 몇 번 날린다. 파워는 그렇다쳐도 꽤 날렵한 주먹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끗 차이로 자꾸 빗나가자 점점 열이 받기 시작한다. 계속 여유롭던 얼굴에 하, 하고 청소년기 특유의 잔악한 미소가 비져나온다.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장점은 멘탈이라고 했던가. 다시금 머리를 쓸어넘기고, 차갑게 식힌다.)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당신이 맞받아치지 않고 피하기만 하자, 훅에 이어 피할 수 없는 궤도로 라이트 백블로우를 날린다. 다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동작이 지나치게 크다.) 이론은 졸려서 다메!
>>71 하이, 겡끼데스요. (당신의 주먹이 날아오는 궤도를 분석하며 한 끗차이로 피한다. 처음에는 피하기 빠듯했으나, 당신의 머리에 열이 오를수록 조금씩 주먹이 빗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애는 애구나 싶었다. 당신이 머리를 쓸어넘기자 시선을 마주한다.) こちらこそ。 (순식간에 들어오는 백블로우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팔을 올려 안면을 방어한다. 그리곤 당신이 큰 동작을 수습하려 할 때 당신의 허리를 당겨 안는다.) 괜찮은 시도였어. (당신의 머리를 툭툭 쓸어주고 놓아준다.) 시뮬레이션 데이터는 충분히 쌓였다. 이쯤에서 연습은 종료할까.
>>72 ...한국말로 하세여! (이정도면 당신의 입에서 나온 연타는 백발적중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혀가며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가드에 막히자 울분을 담아 짧게 소리를 지른다. 방금 전 연타에서 힘을 뺀 탓에 숨을 몰아쉬며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린다. 왠지 마음에 안드는 얼굴이다.) ...왜여? P형, 쫄? 저 아직 안쓰러졌는데여? (히히 웃으며 다시금 자세를 잡는다.) 애초에 뭘 위한 연습인데여? 저, 누구랑 싸워야해여? 왜여?
갑자기 놀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아직 중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년은 이제야 겨우 마음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가고 싶지 않았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아직 자신은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이며 그래봐야 중학생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가야만 하는 것이 바뀌거나 할 리가 없었다.
마지막. 정말로 딱 마지막 아이와의 인사를 남겨두고 그 소년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위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쪽지를 문틈에 살짝 끼워둔 것은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가 참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살짝 회피성 행동일지도 모르나 그것이 소년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발소리가 조용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꽤 친한 사이인 친구를 불렀기에 절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소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삼 일 뒤에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테니 크게 할 이야기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긴장되는 것은 소년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왔어?"
발소리가 멈출 쯤에 소년은 살며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며 그 앞에 있을 제 친구를 바라봤다. 애써 미소지으며.
/한국 배경도 좋고 일본 배경도 좋아. 그냥 말 그대로 삼 일 뒤에 이사를 가는 소년이 친구들을 불러서 작별인사를 하고 정리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제 마지막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그런 느낌이야. 맥 브레이커는 사절이야.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는 자유롭게 설정해도 좋아. 남성인지 여성인지의 여부는 정말로 자유! 그냥 편하게 이어줘도 좋지만 맥 브레이커나 참교육 서사 같은 것은 진짜 사절이야.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흐릿한 눈을 비비고 보니 주위는 어두웠다. 꿈자리가 사나웠나보다. 호연은 어느새 산발이 된 긴 곱슬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고, 잠옷소매 자락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 어휴...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진저리를 쳤다. 컨디션을 망칠 정도로 끔찍한 꿈은 아니었다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꿈이었다. 배우자를 만나기 전, 대학시절로 돌아간 걸로 모자라 이상한 존재가 찝적거리는 꿈이라니. 재수 없어라. 애매한 시간대긴 해도 깨서 다행이다. 오늘은 늦잠자도 괜찮은 날이니까. 옆에서 자던 배우자의 품으로 다시 파고들려 눕는데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깼으려나? 호연은 눈을 들어 조심스레 배우자의 얼굴을 살폈다.)
//현대한국 배경이고, 배우자랑 한 침대에서 자다가 악몽을 꿔서 깬 상황이야. 결혼한 사이이고 금슬도 좋지만 스킨십은 최대 포옹까지만 한다는 설정이야. 이어준다면 성별은 상관없고, 조신하고 다정다감한데다 배우자에게 일편단심이고 존댓말 쓰는 순정파 캐릭터였으면 좋겠어.
>>81 (품이 허전한 느낌에 눈이 뜨였다. 아직 깜깜했지만 반려자가 일어나 앉은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바로 맑아졌다. 설마 여태 잠을 못 이뤘을까? 아니라면 자다 깼을까? 어느 쪽이든 염려스러웠으나 사내는 짐짓 모른 척 눈 감았다. 자기가 깬 걸 들키면 그렇지 않아도 편안한 상태는 아닐 반려자를 신경 쓰이게 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품이 반려자가 파고드는 포근하고 따스한 감촉으로 가득 찼다. 가까워진 숨결에 새삼 간질간질하고 들뜨는 것을 숨기고자 숨을 고르는데 얼굴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들켰나? 사내는 아이가 몰래 장난치다 들켰을 때처럼 겸연쩍은 기색으로 눈을 떴다.) 괜찮아요? 못 잔 것 같은데..
우리 여우들은 특별한 여우라서, 열다섯번째 생일이 지나면 재주를 넘어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더라—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가족, 친구, 옆 여우굴 갓난쟁이 아기 여우도 입을 모아서 같은 말을 한다.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공중에서 세바퀴 휘리릭 돌아내면 된다, 마법처럼 말이다. 그러니 어린 여우가 열이면 열 모두가 열다섯번째 생일만 기다렸다.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자리잡고 숨어사는 여우들이 얼마나 동경스러운지, 이 작은 여우도 그랬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재주를 넘어도 매번 넘어지며 실패하기만 한 탓에 마음이 꺽인지는 오래였다. 작은 여우는 오늘로 열여덟번째 생일을 맞았고, 친구들은 전부 산 아래로, 숲을 떠나서 인간 아이들의 학교에 다니는 지라 못 본지도 오래 됐다. 몇 남지도 않은 여우들 중에서 반은 인간 세상으로 떠나고, 반은 여우로 남기를 택하는데 그 중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지 않아서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남고 싶어서 남은 것이 아니니까 이 작은 여우 느끼기에는 생일날 동터오는 순간이 얄궂기만 했다. 때문에 무작정 마을을 떠나버렸다. 인간들 사는 세상을 멀찍이라서도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아우우...."
인간들은 잘 올려다보지도 않을 높다란 담벼락 위에서 유유하고도 조용히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작은 여우에게 죄가 있다면데 인간들 먹다 남긴 것이나 파먹는다는 길고양이가 그렇게 사나운지를 몰랐고 인간 세상의 탈 것들이 저렇게 요란스럽고 시끄러운지도 몰랐을 뿐이다. 길고양이에게 쫓기다 빠앙—하고 울리는 소리에 놀라서 넘어졌더니 앞발이 아니라 손이 보였을 뿐이다. 담벼락 위가 아니라 그 아래였을 뿐이다. 이렇게 어이없게 인간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겸사, 웬 인간 하나를 깔아뭉개고 있을 줄도.
"ㅁㅜ머뭐야?!"
아마 그 쪽이 하고 싶은 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여우도 적잖이 놀라고 당황해서 따질 경황이 없었다.
#이 재주넘는 여우 일족(?)말고는 평범한 현대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맥커터는 쓰루할게요~
>>82 (낌세를 눈치챈 건, 도로 누워 남편의 품에 파고들고서부터였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숨결도, 가까이 느껴지는 심장박동도, 푹 잠들었을 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짓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수상해서 빤히 쳐다보니,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번지다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역시 깨어있었구나. 멋쩍어하는 얼굴이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깨어있던 것이 들키자마자 제 걱정부터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호연은 한 손으로 제 남편의 볼을 조심스레 감싸고 살살 쓰다듬었다.) 자다가 깬 거예요, 좀 기분 나쁜 꿈을 꿔서요. 갑자기 일어나 있어서 놀랐죠? 깨워서 미안해요. (오밤중에 깨우고 걱정끼친 게 미안한 것은 진심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깨어있는 남편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확실히 지금이 현실이구나 싶어서.)
// 달릴 줄도 몰랐던데다가 기대 이상인데 스루할리가! 내가 바랐던 조신다정 순정파 그 자체에다 귀엽기까지 해서 엄청 만족했어. 오히려 이어줘서 고마워! 아참, 호연이는 여캐야! 호칭은 편한대로 해주면 좋을것 같아ㅋㅋ
동족들이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다른 동족들이 잠이나 유희에 취해 있는동안, 이 별종의 용은 칩거를 한 채 유희도 나가지 아니하고 수많은 것들을 연구했다. 그 범위는 비단 마법이나 검술에 국한되지 아니하였고, 의학, 문학, 군사학 등 모든 곳에 손을 뻗어갔다. 동족들이 보석을 긁어모으는 댜신 그는 수많은 서가들을 꾸며내었고, 이내 이름마저 알기 귀찮은 이 산 전역에 자신이 드나들 입구 하나만을 제외한채 거대한 크레이들-요람-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내오던 이 흑색의 거룡은 그저 계속해서 연구와 독서만을 해올 뿐이었다. 그렇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펴들 무렵, 그가 서가의 관리자 겸 이 산의 접근한 대상을 확인하기 위해 풀어둔 바람의 정령들이 그의 귓가로 다가와 속삭여 오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 블랑님, 블랑누아르님! 누가 동굴 입구로 왔어! "..... 지나가는 인간이지 않겠느냐. 놔두려무나." -하지만, 하지만! 입구에 직접적으로 다가선건 이번이 처음인걸!!
다른 용들이라면 버르장머리 없는 하급정령들에게 화를 낼법도 하건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손을 튕기자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때 마침 여인이 무언가를 하는 행동을 바라보며 천천히 저번 책 구매때 사왔던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잠시간 지켜보자 여인은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짐에서 위장 도구를 꺼내 자신에게 덧대기 시작하였다. 보통 저리 행동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러는 행상인이나 사냥감으로부터 경계심을 늦추기 위한 모험가나 사냥꾼, 혹은 도망자의 신분이 아닌 이상은 저리 행동할리가 없었다.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저러면 안들킨다는 보장으로 저러는건 아니겠지?"
갑자기 미친듯이 흥미가 동하였다. 연구자의 시선으로 보았을때, 과연 저런 준비가 용에겐 크게 소용이 없다는것을 알리면 어떤 느낌일까, 그의 입가로 자그마한 장난기 어린 미소가 스쳐지나가고,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킨뒤 천천히 인간의 모습에서 거대한 용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동족들로 하여금, 별종 이전의 다른 별명이었던, 돌연변이라는 호칭을 듣게 만든 영장류의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팔을 가진 거룡의 모습이 점차적으로 입구로 향하였다. 시선을 돌리자, 토끼귀의 형상을 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보니 이 바위를 기점으로 경계를 설정했던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들이 그리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거룡은 천천히 거대한 팔을 뻗으며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 1천년간 이곳에 온 인간이 없었거늘, 여인이여. 이 곳에 무슨일로 왔는가? 그대들이 찾는 진귀한 물건 따윈, 존재치 아니하거늘.]
//용의 모습은 이러한 형상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무기나 그런건 안 들고 있어요!!
>>87 진흙을 묻히고 바위 뒤에 숨는 것만으로 용의 서식지에 접근해도 안전하리라고 기대할 만큼 여성이 어리석지는 않았다. 여성의 허리춤에는 맞서 싸우기 위한 검도 있었고, 달아나야 할 때 연막이 피어오르도록 해 줄 마법 시약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거대한 용과 마주하자 여성은 꼼짝하지 못했다. 낭패감이나 공포를 채 인지하기도 전에 끝없이 타오르는 홍염 같기도 하고 만물을 집어삼키는 어둠 같기도 한 위용에 압도되고 만 것이다.
혼이 다 빠졌던 여성이 늦게나마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대에 몇 번이고 메아리칠 만큼 쩌렁쩌렁한 용의 목소리, 정확히는 용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인간의 언어 덕분이었다. 종족이 아예 다른데 말이 통한다? 여성은 오른팔은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용에게로 허리를 숙이면서 왼팔을 굽혀 가슴께까지 올렸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인사를 용에게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인간의 언어를 아는 존재라면 인간의 예법도 잘 알 것 같았다.
"실례했습니다. 용족의 생태와 습성을 확인하고 싶어 왔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관찰만 하려고 했는데..."
여성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인상을 구겼다. 흙에 가려지지 않았다면 하얀 피부가 붉게 상기된 것이 역력히 드러났을 것이다. 말이 좋아 관찰이지 훔쳐보기 아닌가. 세상에 자기가 모르는 사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당하는 걸 유쾌해할 생명체가 어디 있을까. 들키지 않았다면 전혀 떠올리지 못했을 문제이건만 들키고 나니 실책도 이런 실책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여성은 파란 두 눈을 질끈 감고 무릎 꿇었다.
"불쾌하셨다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지의 용은 붉은색에 가까운데 답레에는 흑색의 거룡이라고 쓰여 있어서 여성 눈에 보이는 용의 색은 애매하게 서술했습니다
자신에게 예를 차리는 여인의 모습에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턱을 쓰다듬는 태도는 인간 남성이 고민하는 모습, 그것과도 너무나 유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특유의 용이 주는 위압감과 더불어 그 거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박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와 별개로 용은 오히려 그 말에 납득을 해버린 면이 적잖았다. 실제로도 인간 연구가들은 자신들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지 못하였으면서 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마 이 눈앞의 여인도 그러지 않을까란 생각에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천천히 꼬리를 탁, 탁 움직이며 가벼운 생각에 잠겼으나, 여인의 말에 고민을 끝낸 듯 그가 꼬리의 움직임을 멈추며 상대를 직시한다. 자세히 본다면, 그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는것도 눈치 챌수 있겠지.
[납득 했다. 아,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네. 아쉽게도 그런 걸 별로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 말이야. 오히려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거나, 양손으로 고기를 뜯어먹는, 인간들 말로는 털털한걸 좋아한다고 하는거 같은데, 맞나?]
마치 형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태도에 그는 속으로 너털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별종인 자기에 비해, 다른 동족들은 사소한 것에 쉽사리 화를 내었고 이상하게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온건한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속을 알수 없는건 인간이건 드래곤이건 매 한가지라고 생각하며 그가 천천히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 상태면 이야기도 하기 어렵겠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따뜻한 물을 준비해주겠네. 나 또한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활하니, 부족함은 없을 것이야. 간만에 들른 지적 생명체니 무례는 내 감안하도록 하지.]
>>86 (잠은 이미 다 깬 줄 알았는데 반려자의 손이 볼에 닿자 새삼 정신이 번쩍 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감상은 싹 가라앉았다. 꿈자리가 사나웠구나. 식은땀을 흘리진 않았을까? 사내는 반려자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역시 미미하지만 물기가 느껴졌다. 그런데도 자신이 깬 걸 더 염려하는 반려자가 안쓰러워 사내는 제 볼을 어루만지는 반려자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미안하긴요. 호연 씨가 못 자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잤으면 그게 더 속상한걸요. 많이 힘든 꿈이었어요?
ㅤAn astronaut. 케시 라일리는 한결같이 일관된 답을 내놓았다. 프리 스쿨에서 미들 스쿨까지만 해도 '멋진' 꿈이라는 수식어가 붙게끔 한 단어는 이제 곤란한 낯을 띄우게 만드는 지경이 됐다. 구십 퍼센트 다크 카카오 초콜릿이라도 먹은 것처럼 씁쓸함이 혀 위를 맴돌아서 케시 라일리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말았다. 물론 선생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야, 명확한 발음으로 우주비행사니 뭐니 했지만 그걸 위해 그 무엇도 일궈낸 것이 없었다. 실상 노력한 것도 그럴 의욕도 없었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기실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심지어 클럽은 밴드부였고. 다만 우주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광활한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 지구의 땅에서는 고작 점 하나에 그치지만 저기에 닿는다면 추락하는 별의 꼬리만큼이나 화려하게 소실되어 뭣보다 찬란한 마침표을 찍을 수 있을 테니까. 엘리멘터리 스쿨에 다닐 적만 해도 막연히 우주에 대한 환상과 만화적 몽상들로 펼쳤던 꿈은 이제 상당히 변모하였고 꽤나 구체적이 됐다.
ㅤ탁, 케시 라일리는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와도 같은 분위기의 교무실을 벗어났다. 반기는 것은 적막. 오후 다섯시가 넘은 학교 내부는 교복 한자락도 보이지 않았고 주황색 햇볕이 고요한 걸음으로 침범하기 시작할 뿐이었다. 동시에 목을 덮는 케시 라일리의 검은 곱슬머리에까지 손을 뻗었다.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농구하는 남자애들 소리가 들렸다. 캐비닛이 있는 곳에서는 여자애들이 짐을 가지러 들어왔는지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소리도 들려왔다. 거뭇한 눈가 사이로 탁한 푸른 눈이 무심하게 돌아갔다. 눈꼬리가 내려간 여우 눈매는 무표정하니 그 얼굴이 퍽 나른하고 서느랬다. 퍼런 핏줄이 보일 만치 창백한 피부에 기다랗고 마른 몸, 새카만 머리칼은 어둑한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목덜미를 덮은 곱슬한 머리는 메탈 록을 연주하는 음악가처럼 보이게 했다-생김새는 청순한 편에 속한 것과는 별개로-. 정작 그는 재즈나 소프트 록 쪽을 좋아했지만 말이다. 이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지.
ㅤ케시 라일리는 느릿하게 밴드부 부실로 향했다. 크지 않고 아늑한 규모이나 장비들은 꽤 갖추어져 있었다. 이중 가장 아끼는 것이라면 단연코 자신의 베이스 기타. 그것을 들어 올려 어깨에 멘 채 학교 뒤뜰로 갔다. 부원이 아무도 없는 부실에서 연주하기에는 외로웠고, 마침 답답하니 바람 쐬며 기타 줄이나 치고 싶었던 탓이다.
ㅤ서쪽에서 미풍이 불었다. 감싸는 온화한 바람을 느끼며,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깐 케시 라일리는 뒤뜰의 선객인 당신을 바라봤다. 드문 상황을 마주해서인지 삼초 즈음 그러고 있었을까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고 그 옆에 툭 앉아 가볍게 연주를 시작했다. 두곡 정도를 마치고는 당신을 돌아보지 않은 채 묻는다.
ㅤ"보통 사람들은 잘 안 오는데, 왜 왔어."
ㅤ여긴 외로운 사람들이나 오는 곳인데.
/ 마지막 문장-여긴 외로운 사람들 어쩌구-은 입 밖으로 꺼낸 거 아니에요, 혹시나 해서. 배경은 현대 미국 하이 스쿨, 학년은 시니어. 만 나이 18, 한국 나이로 치면 열아홉. 밴드부 보컬리스트이자 베이스 기타리스트, 썰 스레 기타리스트 참치 맞아요 혹시 파쿠리..? 그런 의심 생길까봐 미리! ;>
뒤뜰의 선객은 작은 체구의 사람이었다. 그가 쪼그려 앉아있었기에 더 그리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자리한 무언가, 곤충이나 들꽃 따위를 관찰하고 있는 양 웅크리고 있었으니. 그는 들려오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들어올려 당신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끊어내듯 눈을 내리깐다. 구태여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혹은 원래부터 타인을 대하는 것이 익숙치 않은 사람처럼. 어느 쪽이든 간에 그에게 있어 당신의 방문이 영 달갑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웃기다면 웃긴 일이다. 떠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먼저 피할 이유가 없어서, 그도 아니면 당신의 연주를 떠나기 싫어서. 분명 무슨 생각이 있어 그랬음은 틀림없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물음이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두 곡이 끝나자 그제야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일으키고 옷가지를 툭툭 털던 그는, 자신을 향한 말에 당신을 돌아보았다. 조금은 당황스런 낯이다. 아마 제게 관심이 향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두어번 눈을 깜박일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동의의 표시로 작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확실히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이런 구석자리보다는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할 테다. 멋쩍은 몸짓으로 목가를 매만지다, 툭 내뱉듯 뒤늦은 답을 한다.
"그러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서 할게요."
당신의 단어를 그대로 빌린 말이다. 그는 제대로 된 답변이라 하기에 애매한 것을 던져 두고 또 툭, 질문을 내뱉는다.
"그러는 그쪽은요?"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본다. 저무는 햇살이 머물 곳을 찾아 헤매다 그에 찾아들어, 미약한 금빛을 내며 반짝인다.
>>90 (수줍어하다가도 꿈자리가 나빴다는 말에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며, 호연은 조금 머쓱해졌다. 걱정 끼쳤구나. 가위눌린 것도 아니고 내용이 기분 나빴던 정돈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에 눈이 살살 감겼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면서도, 이대로 털어놓고 꿈에서 힘들었다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진짜 버릇 나빠지겠네. 그래도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으면 해서 남편의 볼을 달래듯 살살 매만지려니, 갑자기 손등이 포근해졌다. 남편의 손이었다. 제 손을 다 덮을 만큼 큼직하면서도 깨지기 쉬운 것이라도 만지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 간지러워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는데도, 평소보다 작아진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 하긴 나라도 그럴 것 같긴 해요. 여보가 나쁜 꿈 꿔서 잘 못 자면요. ...그게, 터무니 없는데 되게 기분 나쁜 꿈이었어요.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간 꿈인 거 있죠. 그것도 여보랑 만나기 전이었어요. 그리고 전공도 회화과로 되어있는 거 있죠, 난 피아노 전공인데. (호연은 억울한 일을 일러바치는 아이처럼 투덜거리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기다가 얼떨결에 강의 들어갔더니, 교수는 이해하기 어렵게 처음부터 못알아먹겠는 전문용어 남발해가면서 가르치면서 잘 못 따라가니까 엄청 뭐라고 하고. 나 신입생 때 제일 골치 아팠던 강의에서도 그런 짓은 안 했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끝날 시간 다 되니까 저는 남으라는 거예요, 할 말이 있다고.
//아, 맞다!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사내 이름 설정한 거 있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ㅤ두 곡은 평화롭고 장난스럽게 연주됐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이 가볍게 줄을 툭툭 튕기며 본격적인 공연 전 애피타이저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낮고 경쾌한 음은 선선한 바람을 타고 흘러나갔고, 처음 만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르고 채워나갔다.
ㅤ점차 저녁노을이 짙어지는 시각, 연주가 끝나자 일어난 당신을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좇았다. 엉덩이는 여전히 바닥에 붙인 상태였다. 따라갈 명분도 없거니와 애초에 늘어트린 장비들을 치우려면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귀찮기도 했고. 아마 이게 가장 큰 이유.
ㅤ이곳은 외로운 사람들이 오는 곳, 자신은 늘 여기에서 음악과 함께 새로운 만남을 갖곤 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당신은 동의했다. 물론 외롭다가 아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하지만 케시 라일리에게 보통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은 외로운 사람을 의미했다. 통상의 범주를 넘어선 고독, 그리하여 비정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공백을 채우는 이들. ㅤ그런 이들.
ㅤ그래서 그 사고방식에 의거해, 케시 라일리는 답했다. 심드렁해 보이나, 어쩌면 초연하고 또 아득한 낯으로.
ㅤ"우주에 가고 싶어서."
ㅤ어떤 우주든 상관없다. 무료한 궤적을 그리며 흐르는 내 인생의 마지막 궤적을 화려하게 장식할, 아주 강렬하고 화려한 그런. 너무 아득한 목적지라 닿기도 전에 폭죽처럼 빛이 되어 사라질. 아무튼 그런, 그런 강렬한 감정. 감정의 폭발과 소실.
ㅤ"내 인생에 빛이 든다면 폭죽이었으면 좋겠어. 가장 크게, 가장 찬란하게, 가장 강렬하나 빠르게. 무료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
ㅤ듣는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케시 라일리는 그래서 유명했다. 밴드 클럽의 보컬리스트, 뱀파이어 같은 창백한 외형보다, 베이스보다 더 베이스 같은 긁어내는 목소리보다, 조금 이상한 시니어로. 미식축구 클럽 따위보다야 덜했지만 은근히 인기가 있는 밴드 클럽인데. 한편으로는 '그 자식 대화가 안돼, 완전 너드야!' 라는 소문이 거의 사실 취급 받으며 조용히 떠돌았다.
ㅤ햇살이 잉걸불처럼 덮쳐오기 시작했다. 세상이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케시 라일리의 흑발과 올블랙 패션 위로도. 달빛 아래에서 빛나던 그는 도리어 햇살 아래서 빛을 잃고 존재감을 잃었다. 희미하게. 역광에 가려진 케시 라일리는 웃는지 무표정한지 모를 투로 말했다.
ㅤ"가봤니? 우주 말이야. 가보지 않은 자들과 아닌 자들은 비슷한 양상을 띄거든. 터트리기 전의 폭죽과 터지고 재가 된 것들이 보기에는 퍽 비슷하지. 그렇지만 속은 몹시 달라, 몹시 다르단다……."
>>89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면, 두 눈을 다 감고 꿇지 않았다면, 여성은 용이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턱을 쓰는 모습이나 인간이 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린 모습을 목도하고 용족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며 전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기에 여성의 온 신경은 용의 꼬리가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에 쏠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되풀이될수록 잡념 역시 늘어났다. 한입에 삼켜지거나 단숨에 짜부라져도 찍소리조차 못낼 무방비 상태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자고 꿇어앉았을까? 연막 시약을 써서 달아나기라도 해 보지. 뒤늦게 후회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도 갖고 싶었다. 저 압도적인 존재가 살의를 품었다면 이럴 새도 없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고. 그러지 않고 말을 건 것은 죽일 생각은 없어서일 테니 섣불리 자극하는 것보단 이 편이 낫다고. 무릎을 꿇기 전에 고민했어야 할 것들을 뒤늦게 곱씹자니 속이 새카맣게 타는 듯했다.
그랬기에 납득했다는 답이 돌아왔는데도 여성은 한동안 그 음성이 지닌 의미를 인지하지 못했다. 인간식 표현으로는 털털한 성품이라는 용의 자기 소개(?)도 귓속에 꽂히지 못하고 흘러갔다. 그러다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겠다는 말까지 나오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여성은 압도적인 위용을 지닌 흑룡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알아챘다. 꼭 사람이 미소 지을 때 같은데? 용도 사람처럼 웃나? 그런 기록은 본 적이 없다. 용에 관한 기록 중에 용을 직접 보고 남긴 것은 드문 모양이긴 하나, 기록에 전혀 없는 모습을 목격할 줄은 몰랐다.
어리둥절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 불가해한 말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낸다? 왜? 용의 입장에서 인간은 먹잇감이거나 아무튼 하찮은 존재 아니었나? 상상도 못 한 정보를 접한 탓일까.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겠는데도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저, 감사합니다만... 인간으로 변신해서 지내신다고요? 그러실 이유가 있습니까? 혹시 다른 용족도 그러나요?"
>>93 (반려자의 체온이 미미하게 오르는 듯해 손을 뗄까 주저하던 찰나 수줍은 듯한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순간 정효의-사내의 이름이다.-는 반려자의 체온을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화끈 익고 말았다. '여보'라는 호칭에는 이 실감 안 나는 관계로 인한 설렘과 동요를 부추기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얼빠진 채 있어도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반려자가 자다 깬 원인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꿈은 얼토당토 않은 내용이었으나 그의 숙면에 방해가 된 이상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도중에 입을 삐죽거릴 만큼 마음 놓고 털어놔 주는 그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말이다.) 황당했겠어요, 난데없이 미술 강의에 교수도 별로였다니. 그래서 그 교수가 뭐라던가요?
여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그는 여인이 내뱉은 한마디에 바로 답변을 던졌다. 사실 지금의 한마디는, 그에게 있어서 의외의 이야기였다. 실제로도 전설이라고 치부되는 이야기들 속엔 여러가지 용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이 구전을 다시 서술한 것이건, 아니면 옛날 기록을 다시 해독하여 그려낸 것이건 용에 관련된 사료나 서적은 여러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들 또한 그러한 자료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용들의 기본 수명은 단명종들의 잣대로 두기에는 너무나도 길지, 그렇기에 그들의 성격은 그대들 노인들보다도 괴팍하고 사납기 그지 없어. 솔직히 어찌보면 애늙은이들이나 다름 없는 셈이지.]
같은 용이지만 동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자니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이쯤되면 여인도 알수 있으리라, 그가 묘사되어지는 용, 즉 드래곤들과 전혀 다른 모습임을 말이다. 날개가 크지 않은 대신 몸통이 뱀의 그것과도 비슷하였고, 보통 2족 보행의 짧은 팔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통나무 하나는 우습게 부숴버릴 듯한, 인간의 것을 닮은 팔..... 마치 다른 드래곤들과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의문이 채 가라 앉기도 전, 그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조용한, 지혜가 깃든 음성이 여인의 귀를 기품있게 자극시켜 온다.
[그러면서도 단명종들의 그 치열한 삶을 부러워하는 것인지 몰라도 자신들의 유희로서 인간들 속에 섞여들어가 자기들 만의 즐거움을 누린다네. 물론 나도 그렇게는 가능하지만.... 오히려 내가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지. 그것은 자네가 씻고, 내 거처 안을 소개 하며 이야기 하겠네.] - 블랑님, 블랑님! 도마뱀—샐러맨더—이랑 돌고래—운디네—가 물 준비 다 됐대!! [마침 물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군.]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 그와 동시에 언제 나타났을지 모를 갑옷을 입은 여기사 두명이 그녀의 곁에 공손히 시립한다. 하지만 눈썰미가 좋은 그녀라면 단박에 알수 있으리라, 그것이 다름아닌 마법으로 탄생한 인공 생명체, 리빙 아머(Living Armor)들임을 말이다.
[이 둘을 따라 내 거처 안쪽으로 들어가게, 가장 큰 공동—그가 용일때의 잠자리—를 거쳐 들어가 그들의 인도를 받으면 충분히 씻을수 있는 욕탕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야. 씻고 나오면 그들 중 하나에게 이야기 하게나. 아마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줄 것일세.]
//괜찮아요!! 저도 자는 시간이 1시 쯤이다보니.... 더 같이 이어주지 못해 미안해요!! 천천히 이으면서 하세요!! 일어나자마자 답변 드릴테니까요!!
참고로 드래곤의 레어는 자신의 몸으로 대서고를 지키기 위해 레어 밑에 한참 깊숙한 곳으로 대서고를 지어놨어요!! 리빙아머를 따라 움직이면 대서고로 올수 있으니까 편한대로 묘사해주세요! 드래곤이 마중하러 가줄수도 있고 직접 올수도 있어요!! 장서량은...... 어떤 도서관보다도 많다고 생각하시면 편할꺼에요!!
>>98 사료가 없냐는, 의외라는 듯한 반문에 여성은 말문이 막혔다. 사료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을? 여성은 용에 대해 검증된 정보를 얻고자 관련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려던 시절을 떠올렸다. 어떤 기록에는 용이 사슴 같은 뿔을 단 거대한 뱀 같은 형상인데 발도 있대고, 어떤 기록에는 용한테 무슨 거북이 등딱지 같은 게 달렸대고, 어떤 기록에는 용이 박쥐 같은 날개를 단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겼다는 식이라 볼수록 답은 안 나오고 머리만 터질 지경이었다. 용의 생김새든 식성이든 성향이든, 하다 못해 용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야 말겠다고 이 첩첩산중까지 왔던 것도 그 때문 아닌가. 그때만 해도 이렇게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진짜, 여러모로 초자연적인 체험이다. 꿈은 아닌가 몰라. 그러나 흙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제 체취며, 조곤조곤한 용의 음성이며, 급히 꿇느라 타박상이 생긴 듯한 무릎의 욱신거림은 모조리 생생했다. 혹시나 하고 제 볼을 쳐 봐도 따끔한 데에다 그 충격에 물기 빠진 흙이 바스러지는 감각도 또렷했다. 그러니까 용의 수명에 관한 저 설명도 굳이 확인할 필요 없는 사실이란 의미겠지. 하기야 용은 여성더러 간만에 들른 지적 생명체라고 했고, 그 간만이란 게 천 년이었다. 인간의 천 년을 오랜만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그렇게 오래 살면 어떤 느낌이지?
그 의문에 대한 답처럼 흑룡의 동족 비판이 이어졌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여성은 입을 다물었다. 용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그건 참말이었나 보다. 하기야 용한테 인간처럼 사회를 이루는 습성이 있었다면 인간은 애저녁에 멸종되거나 용에게 가축처럼 사육되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까? 개체로는 하찮지만 뭉치면 강한 인간과 신처럼 느껴질 만큼 압도적이지만 뭉치지는 않는 용이라, 세상을 이루는 섭리가 공평하다면 공평한 셈이다.
그렇게 상상에 잠길 여유가 생겨서일까? 그제야 마냥 압도적인 심연처럼만 보이던 흑룡의 외견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백년 묵은 나무보다 더 굵은 몸통은 뱀의 하반신 같고, 산봉우리도 대번에 바스러뜨릴 법한 앞발은 인간의 손과 비슷했다. 심지어 발가락까지도 인간의 손가락처럼 발달한 모양새라 저걸 발이라고 부르는 건 어폐가 있어 보일 지경이었다. 두상이 악어나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걸 제외하면 용이라기보다는 신화 속 생명체인 메두사와 더 닮았는데, 아무튼 여성의 기억이 맞다면 저런 용을 묘사한 기록은 없었다. 혹시 고서에서 용의 모습을 천차만별로 기록한 게 확실히 보질 못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용이 제각기 다르게 생겨서였을까? 그렇다면 인간이 '용'이라고 통칭하는 존재들이 실상은 전혀 다른 종인 건 아닐까? 아니지. 이 흑룡부터가 그 통칭을 사용하고 있으니 같은 종족이긴 하다는 건데... 그런데도 생김새부터 이렇게 제각각이면 앞으로의 연구가 까마득하겠구나.
막막해할 쯤 용들이 인간처럼 수명이 짧은(아마도 그런 동시에 언어를 구사할 만큼 지성이 있는) 종과 부대끼면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흑룡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왕 재미를 추구하는 김에 자기들에 관한 기록도 좀 남겨 주지. 하다 못해 일기라도 쓰든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흑룡이 물이 준비되었다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좀 전까지만 해도 기척조차 없었던 기사가 둘이나 나타났다. 마법적 소양은 부족해서 시약에나 의존하는 여성이었지만 그들에게 깃든 마력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명체를 손가락만 튕겨서 만들어? 용의 마력에 비하면 인간들 사이에서 내로라 하는 마법사의 마력은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기록도 사실이었나 보다. 저런 존재를 두고 연막 시약 따위를 썼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니 새삼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편으로는 이런 존재에게서 무슨 귀빈 같은 예우를 받는 상황이 얼떨떨하기도 했다. 꿈은 아닌데 너무 비현실적이야... 그러다 보니 용이 격식 차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도 잊고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마법 기사들을 따라 커다란 굴을 지나자 김만 맞고 있어도 훈훈해지는, 왕족 귀족이나 되어야 이용 가능한 온천 같은 욕탕이 나타났다. 이쯤 되니 감탄도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탕에 들어가자니 마법 기사들이 신경 쓰였다. 생명체가 아닐지라도 보는 눈은 보는 눈이라 그 앞에서 벌거벗기는 아무래도 거북했다. 결국 여성은 옷을 입은 채로 탕에 들어가서는 그 안에서 옷을 벗었다. 여벌로 준비한 옷은 없는지라 어차피 입었던 옷을 세탁해야 하니 겸사겸사였다. 그렇게 가죽 표면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탕에 내건 뒤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씻었다. 몇 번을 헹궈도 그대로일 것 같던 흙모래도 어느새 떨어져 나와 탕 바닥에 싹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니 미리 걸어 두었던 가죽옷은 좀 축축해도 그럭저럭 입을 만은 한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도 역시 마법 기사들의 시선은 신경 쓰여서 여성은 수건을 몸에 둘둘 말고 나와서는 탕 뒤에 숨어 옷을 다 입은 뒤에야 마법 기사에게 안내를 청했다. 그러자 마법 기사들은 여성이 눈치를 봤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묵묵히 앞장서 갔다. 마법 기사들에게서 나는 은은한 빛이 아니었다면 코앞도 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지만 내리막길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에르네스트 산의 바닥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에르네스트 산의 속이 실은 비어 있었을 줄이야. 혹시 다른 용의 서식지도 이럴까? 흑룡에게 묻고 싶어졌으나, 그 마음은 어둠의 끝에 이르기 무섭게 의식 저 아래에 묻혀 버렸다. 이전까지의 어둠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환한 그곳은 책이 빽빽이 꽂힌 책장이 끝 모르게 이어져 있었다. 이 세계가 생긴 이후 만들어진 책을 모조리 모아 놓은 보고(寶庫) 같았다.
//어쩌다 보니 대사가 1도 없네요 용님이 반응할 여지가 부족하지는 않을지 저어됩니다8ㅁ8...
대서고에 들어서는 거룡의 몸이 점차적으로 작아져간다. 하얀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 변하였음에도 2m에 달하는 장신은 인간의 기준으로도 매우 큰 거체였으나 차분하게 정돈된 단발과 더불어 아까전 거친 인상과는 다른, 부드럽고 인자한 느낌의 미형의 외관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덜어내는데 한몫 하고 있었다. 태산마저 휘어잡을 기세의 근육은 온데간데 없이 하라져 한마리의 표범을 보는 듯한 날카롭고도 날렵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단촐한 복장임에도 하나의 예술 조긱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일단은 손님은 씻고 있고, 아까전에 요리과정을 입력해둔 리빙아머들에게 일단은 요리 준비를 해놨으니 걱정 없겠지."
그가 손짓을 한번 하자 대서고 한가운데 놓여져 있던, 각종 서적과 흩어져 있던 연구자료들이 바람에 흩날려 순식간에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사실 이렇게 하면 종이가 망가질 우려도 있고, 또 순서가 뒤죽박죽 되어 다음번에 머리가 아프다는 문제가 있지만 지금은 꽤 급한 상황이기도 하니 하루 정도는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말끔해진 대서고 메인테아블 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댜.
"대화 나눌 공간 문제 없음, 음식 준비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거 같고, 씻으러 들어갔으니 이제는 큰 문제가...."
그렇게 혼자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그의 머릿속으로 빤짝 스치고 지나가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말이 씻으러 가라고 한거였지 복장도 상당히 더러웠던 상황, 아무리 그녀가 말끔히 씻어냈다 하더라도 그 증기 한복판에서 말린다면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인 즉, 주인 본인이 객인 여인에게 여벌의 옷을 빌려줘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멍청이를 보았나." - 와~ 블랑님 멍청이야~? - 블랑님은 멍청이~
그렇게 옆에서 재잘대는 정령들의 머리에 마나 담신 딱밤을 날린채 그는 이미 어쩔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지어보였고, 뒤이어 리빙아머들이 나르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메인 테이블에 털썩 주저 앉은뒤 가만히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대략 20장쯤 넘겼을때였을까, 대서고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고, 문 너머로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에 그가 인자하게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가볍게 벌리고는 자부심 반, 자긍심 반이 섞인 목소리로 입들 열었다.
"요람(Cradle)에 어서오게, 어때, 생각보다 굉장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이 신경쓰지 못한 부분를 고쳐내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캐스팅을 마친 흑룡은 옷이 마를수 있게 건조(Dry)와 혹시나 모를 이물질을 제거해주기 위한 정화(Purification)을 걸어주고는 테이블에 놓여진 수많은 음식들을 권하며 입을 열었다.
"입에 어느 음식이 맞을지 몰라 아무렇게나 준비했다네. 부디 즐겨줬으면 좋겠네만."
//훌륭한 서술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많은것을 표현해주는 법이랍니다! 저야말로 곧 또 어디 가는지라..... 계속 답변이 질질 끌리는게 ㅠ
>>97 (갑작스레 손바닥 안의 온도가 훅 올랐다. 올려다보니 눈에 띄게 발갛게 익은 얼굴이나,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퍽 선명히 보여 웃음이 났다. 저렇게 제 사소한 행동에도 설레고 동요하는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니, 그가 동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제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동요하면서도 제 투덜거림에 정신을 차리고 경청해주니, 놀리는 건 지금은 자제해 두자. 가까스로 장난기를 누르려니, 남편, 효의가 맞장구를 치며 물어왔다. 그 교수가 뭐라더냐고. 호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러바치는 투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나보고 20년동안 기다렸다느니, 자기가 언제 찾아오나 시험한 거냐느니 영문모를 소리를 하면서 화를 내는 거예요. 거기다 막 자기가 뱀신이라면서 수천년 동안 멀쩡했던 비늘이 나를 기다리다 다 바스러지는 줄 알았다느니 뭐니 하는데, 헛소리하는 것도 무서웠지만 교수라는 작자가 막 입학한 신입생한테 찝적거리는 거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싶어서 도망가려다가 깼어요. ...말하고보니 좀 무섭기도 했네요, 그 꿈. (호연은 남편의 품에 숨어들듯 얼굴을 묻었다가, 이내 꿈 속에서 느낀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깨고 난 직후엔 어이없던 게 좀 더 크긴 했어요. 비늘이 바스라졌으면 지가 관리를 잘 하던가 동물병원에 가지 왜 나한테...
>>101 (정효의는 속풀이하듯 재잘대는 반려자의 말에 귀 기울였다. 말투나 분위기상 반려자가 많이 힘들지는 않았던 듯해 마음이 놓이는 가운데, 판타지 픽션에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얘기가 이어졌다. 전생의 인연이라거나 하는 꿈이었을까? 그런 것치고는 20년이라니 좀 짧은 느낌인데. 모 영화처럼 20년 만에 재회했다는 설정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둘 다 인간이라 그럴 테고, 뱀신이든 뭐든 신이라면 20년을 길게 느낄 것 같지는 않.. 싱거운 상념에 정효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꿈인데 뭐 얼마나 아귀가 맞을까? 그딴 것보다 꿈을 되새기다 질린 듯한 반려자가 걱정이었다. 정효의는 제 품에 파고드는 반려자를 감싸안으며 그 뒷머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꿈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나 봐요. (다독이다 문득 불안해졌다. 혹시 비슷하게 불쾌한 일을 겪은 건 아니겠지?) 혹시 요즘 집적거리는 사람이 있었나요?
/귀엽다고 해 주니 고맙긴 한데 수줍사는 참아 줘ㅎ 그나저나 개꿈일 텐데 묘하게 웃기네 수천 년 살면서도 멀쩡했던 비늘이 20년 사이에 바스라졌다면 노화가 진행된 거일지도..?
>>100 수많은 책에 눈이 돌아갔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귀에 익은, 부드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 앞에는 흑룡이 아니라, 족히 2m는 되겠는데도 오히려 날렵해 보이는 체격과는 대조적으로 인상이 서글서글한 인간이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하마터면 그 괴리에 얼이 나갈 뻔했지만, 흑룡이 평소엔 인간의 모습으로 지낸다고 일러줬던 게 떠올라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끄덕여 이곳에 감탄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테이블에 놓인 책이 인간에게 알맞은 크기인 게 눈에 띄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도 인간이 볼 법한 크기이긴 마찬가지였다. 흑룡은 책을 읽기 위해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요람이라면 지극히 사적인 공간 같은데.
주위를 다시 살피려는 찰나 축축하던 몸과 옷이 보송해졌다. 흑룡이 마법을 걸어 준 모양이었다. 대단하다, 마법. 나도 좀 배워 둘걸. 하나 마나인 후회였다. 용씩이나 되니까 이런 사소한 데에도 마력을 소모하지, 여성은 배웠다 해도 무리였을 테니까. 더구나 마법을 못 익힌 걸 계속 아쉬워하기엔 그가 가리키는 음식이, 거기에서 나는 향이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다.
-꼬륵
낯이 뜨거워졌다. 암벽을 타고 용에게 죽을까 봐 긴장했다고는 하나 배꼽시계가 이토록 요란할 줄이야. 그 와중에도 속이 허하고 입엔 군침이 도니 더 민망했다. 차마 테이블 앞에 앉지 못하고 부질없이 배를 가렸다가 멈칫했다. 흑룡이 영역 침범이며 훔쳐보기 시도를 양해해 주겠다고는 했으나 이런 대접은 아무래도 과분하다. 가장 내밀한 공간까지 안내해 준 것도 모자라 만찬이라니. 나중에 잡아먹으려고 사육하는 거라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물론 흑룡은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고, 자신을 굳이 사육하느니 지금 내놓은 음식을 먹는 게 더 효율적일 테니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제 말을 믿어서라면 그건 그거대로 놀랄 노 자다. 흑룡 입장에선 자신을 신용할 만한 근거가 없을 테니까. 에라, 모르겠다. 여성은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듯 두 손으로 제 볼을 후려쳤다. 그러고 심호흡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후의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저는 용님께 불편을 끼쳤지 보탬이 된 건 없는데요..."
//저도 늦었습니다8ㅁ8 인간 모습일 때 용님의 머리칼색, 눈동자색, 피부색이 궁금하네요 용님이 읽고 있던 책이 어떤 책인지랑 여성이 제목을 알아볼 수 있게 인간의 언어로 쓰였는지도요
그는 떠돌이에 가까운 사람이다. 타인과 무리지어 어울리는 일이 익숙치 않다. 그리고 어울리는 일이 많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소문에 어둡지는 않다. 오히려, 떠도는 소문에 상당히 해박한 편이 속했다. 당연한 일이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조연을 의식하는 주연을 본 적이 있는가? 하물며 배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연 중 하나는? 그러니 그가 부유하는 소문을 잘 잡아채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아는 것도.
케시 라일리: 뱀파이어를 닮은 밴드 클럽의 보컬리스트이자 베이스 기타리스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괴짜.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답변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는 당신을 휘감고 있던 소문을 떠올렸다. 평소 소문을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신빙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치 당신의 언어는 독특했다. 여러모로 시에 가까운 구석이 있었다. 시는 대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한 번에 깊은 의미를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런 이유로 그는 당신의 말을 해독하기를 관두었다. 대신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말로 옮겼다. 시를 읽으며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마음에 와닿는 것만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도 많으므로, 그리고 그런 감상 역시 무의미하지는 않으므로 이런 방식의 대화 역시 당신에게 닿기는 할 것이라 생각하여.
"멋지네요."
물론 당신의 표정을 보자면 또 모를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득한 것이 꼭 당신이 입에 담은 우주와 닮아 보여서, 당신이 저와 여기에 있는 것이 맞나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노을빛에 눈을 잠시 찡그리던 그는 곧 시선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저는 따지자면 겁쟁이라, 당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거든요. 강렬한 건 사람을 사로잡는 화려함이 있지만…그래도 무섭지 않아요? 그렇게 빠르게 사그라든다는 점에서."
물론 그 점을 매력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요. 짧게 덧붙인다. 여전히 시선은 당신을 향한 채다. 조금은 집요하다.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 사이에서 굳이 색 없는 것을 눈에 담고자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뇨. 사실 갈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안 갔을 것 같기도 하고요. 말했다시피 겁쟁이라서요,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편이 안심돼요."
그는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혹은 그저 무의미함 행동일 수도 있으나- 땅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나즉하나 무게감 없는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그러면 당신은요? 아직은 전자인가요, 터뜨리기 전의?"
/답레가 늦어서 죄송해요. 제가 손이 빠른 편은 아니라 계속 이 정도 템포일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검정색 머리카락 아래로 적황색의 눈동자가 여인을 응시한다. 아까전까지 거대한 봇짐을 매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여린 몸에 그에 어울리는 금발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전의 흙투성이가 무색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씻겨놓고 보니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탄탄한 근육과 용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구빛 피부가 횐히 비추는 요람의 불빛에 비춰지며 부드러운 미소에 색감을 더해간다. 블랑느와르(Blancnoir), 흑룡에 걸맞지 않은 이름이 지금에서야 빛을 발하는 건 절대로 착각이 아닐 것이리라. 그 순간 여인의 날카롭고도 당연한 질문이 흑룡에게 날아든다. 그 신중함에 그는 만족스러운 듯 당연함이 섞인 말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당연히 의문을 가질만 하지. 다른 종족, 거기에 인간들을 우습게 보는 용족이 갑작스레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했다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 앉은뒤 손가락을 튕겼고, 어느새 상석 바로 옆에 있는 귀빈석에 해당하는 위치의 의자가 자리를 잡는다. 그가 재차 손가락을 튕기자 레드와인이 병채 떠올라 유리잔을 채웠고, 용은 재차 자리를 권하는 듯 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자신이 가리킨 곳이 여인의 자리가 맞다는 듯이 말이다.
"신중함이란 매우 중요한 것일세.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왜? 가 아닌 왜 안돼? 라는 시선으로 봐야하는 것 처럼 말이지. 하지만 그 의심도 적당한 선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면에서 그대가 떠올린 의문은 정말로 당연한 것이고."
탁자위에 올려둔 책이 시선으로 들어온다. 식사 직전, 즉 여인이 들어오기 전이기에 미처 치우지 못했던 책, 그것은 이미 멸망한 어느 제국의 역사서였다. 대륙 공용어로 발매 되어지긴 하였으나 지금은 대다수가 소실되어 사라진, 구할 수 없다고 알려진 몇권 안되는 책이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개의치 않는듯 천천히 책 위에 손을 올려둔 뒤 천천히 레드와인을 한모금 들이켰다. 이로서 식사가 시작 되었고, 여인이 식사를 해도 된다는 간접적인 의사를 더한 것이리라.
"자네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우연일수도 있네, 내 가고일들은 어제 저녘부터 내일 아침까지 재조정에 들어갔고, 지금 지세가 많이 약해져서 이 산에 쳐두었던 결계가 근 몇년간 약해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경우라면 그것은 전부 운명인 셈이지. 그러니까 나는 그 운명에 따른 손님을 대접할 의무가 있는 셈이고."
용이 싱긋 웃어보인다. 대답으로 부족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해보인다.
"그리고 그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두지, 탐구심과 그 학습에 대한 열망, 후배에 대한 선배의 배려라고 덧붙여서 들어도 된다네."
이 도시라고도, 깡촌이라고도 못할 애매모호한 지역으로 전근, 아니 좌천되어 버린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한창 프로젝트의 주역이니 뭐니 떠받들어 줄 때는 언제고, 자기 라인 손절치니까 바로 권력을 썼는지 뭘 어쨌는지,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며 사람을 이런 데로 보내버렸다. 아랫사람 입장에서 짤리지 않으려면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그저 동네 슈퍼에서 라면을 비롯한 먹거리와 술을 사서 터덜터덜 다 떨어진 슬리퍼를 끌고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남한테 깔려서 더러운 건 도맡아 다 하고, 너덜너덜해진...
"...어휴. 내 인생이 그렇지 뭐."
그런 아무도 듣지 못할 신세한탄이나 하던 중에, 이 소리가 듣기 싫었던 하늘의 천벌인지 뭔지 몰라도 사무직의 연약한 척추를 무겁게 짓누르는 위협에 그만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아이고, 허리야! 하는 비명조차 채 외치지 못하고서 얼이 빠진 채 들여오는 의문에 마주 의문으로 답했다.
>>102 (품에 파고들자마자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달래듯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남아있던 불쾌감과 두려움이 씻기듯 사라졌다. 안기자마자 괜찮아졌긴 하지만 더 어리광 부리고 싶네. 남편의 허리 쯤에 팔을 두르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자상하게 위로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하기사, 느닷없이 대학 신입생 시절로 되돌아가고 느닷없이 회화과인 것부터가 말도 안되긴 했어요. 신이네 비늘이네 하는 건 물론이고... (그래도 효의 씨랑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도 서러웠다고 칭얼거릴까, 하고 잠시 고민했으나, 다음 순간 그 고민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실제로 집적거려 온 사람이 있냐며 남편이 걱정해왔기 때문이었다.) 에이, 전혀요. 주변 사람들 내가 팔불출인거 모르는 사람 없는걸요. ...아, 그러고보니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언제 뮤지컬 보고 엄청 치를 떨었잖아요. 그거 영화 원작도 있다길래 친구랑 같이 봤거든요. 뮤지컬화했다가 시간제한 때문에 스토리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니까 원작은 다를 수도 있다고. 근데 똑같더라구요. 거기에 제자가 죽은 전여친의 환생이라고 무작정 자길 기억해내라고 대쉬하는 교사가 나오는데, 아마 그게 기억에 안좋게 남아서 비슷하게 꿈에 나왔나봐요. (내가 진짜로 위험한 상황일까봐 걱정했구나.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을 놓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호연은 남편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노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럴싸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꿈스럽게 이거저거 섞어찌개해서 구성해봤는데 웃기다니 다행이네! 모티브 중에 번점도 있어서 답레에도 반영해봤어ㅋㅋㅋ 옛날 컨텐츠긴 하지만
ㅤ속눈썹 사이에 탁한 푸른 눈이 과거를 헤매기 시작했다. 가시덩굴처럼 얼기설기 엉켜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의 근원지를 찾아 되돌아가다 보면 심연 같은 수풀, 과거의 숲. 한때 자신도 폭죽이었던 적이 있었다. 우주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러나 그 구형 안에서였기에 또 머나먼 목표를 두었기에 눈부셨던.
ㅤ케시 라일리의 꿈. …마르커스 라일리의 꿈.
ㅤ돌아가신 아버지, 마르커스 라일리는 말 그대로 우주비행사 훈련생이었다. 고된 중력 적응 훈련을 하면서 곧은 치열을 보이며 반짝이는 웃음을 선보였던 아버지. 케시 라일리와는 그 분위기가 딴판으로, 마치 두 부자는 낮과 밤 같았다. 허나 케시 라일리도 태양만큼은 아니더라도 달만큼은 빛내던 때 있었으니. 그의 꼬리를 따라가듯 자신도 우주비행을 꿈꿨을 때였다. 다만 그 꿈은 별의 추락처럼 찰나라, 그는 실제 우주비행을 앞두고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고 케시 라일리는 그의 생이 꼭 별똥별 내지는 폭죽 같다고 생각했다. 삶의 궤적은 그의 노력만큼이나 빛났으나 밤이 찾아오자 숨어드는 태양처럼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찌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케시 라일리는 그래서, 그래서 그 별의 꼬리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궤적을 그리며… 결국 터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겠지만 그 무엇보다 환하게. 누구도 잊지 못하게. 마르커스 라일리를 대신하여.
ㅤ아버지…….
ㅤ과거의 숲을 헤매다 순식간에 빠져나온 푸른 눈이 땅 위를 딛고 있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 가시덩굴이 얽혀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이것도, 우주를 향하면 끊어질 것에 그치지 않는 족쇄다. 그리고 다시 위로. 케시 라일리는 여전히 환상 속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당신을 응시했다.
ㅤ"태양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생명이 있듯이 그런 거지.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거야……. 아니면 태양에 눈이 멀어버렸던가."
ㅤ후일 따위, 내 생명이 다하면 끝이니.
ㅤ노을빛처럼 찔러오는 시선을 나른히 마주한 채였다. 케시 라일리는 자신과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듯한 당신과의 이야기가 썩 괜찮고 호기심이 동했는지 얼굴 낱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정은 그다지 그렇게 보이지 않고 멍한 얼굴이었대도. 늘상 무기력해 보이는 눈과 달리 저도 모르게 속내를 찾아헤매는 빛이었다.
ㅤ"한 번쯤은 시도해 볼 법해. 살면서 남다른 발자국 정도는 남겨봐야 하지 않겠니."
ㅤ미풍처럼 가벼운 청유. 그러고선 저가 들고 있던 기타에 시선을 옮겼다. 남다른 발자국……. 자신이 한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ㅤ우주비행사의 꿈은 예전에 떠나보냈다. 마르커스 라일리가 세상을 등진 것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관둬야 했다.
ㅤ"이미 재투성이. 터지고 말았지……. 이제 새로운 폭죽을 터트릴 차례야…."
ㅤ케시 라일리는 이제 마르커스 라일리의 꼬리를 따라가는 것에서 발을 돌려 새로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ㅤ"터질 듯한 음악, 포효하는 비명, 팽창하는 감정의 고조- 이게 우주를 향하는 폭죽이 아니면 무엇이겠니."
>>107 (꿈이 터무니없다고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반려자는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늦지 않게 깨서 다행이다. 반려자가 울적하고 불안한 기분으로 밤을 지새는 것은 상상하기도 서러웠으므로. 그렇게 마음 놓을 때, 반려자가 허무맹랑한 꿈을 꾼 원인을 되짚기 시작했다. 일전에 본 뮤지컬과 그 뮤지컬의 원작인 영화가 원인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듣기에도 이상한 내용이긴 했다.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현재 상황이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길 알아봐 주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결혼도 하고 이혼은 마다하던 파렴치한 인물의 서사였다. 더 어이없는 것은 사별한 이와 동시대에 재회하는 기적을 겪고도 고작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결말이었다. 동시대에 같은 종으로 환생한다는 보장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 그 안일한 서사의 여파로 고약한 꿈을 꾸었구나. 반려자를 어떻게 위로할지 궁리하는데, 등을 쓸어내리는 상냥한 손길이 느껴졌다. 오히려 내 걱정을 해 줄 줄이야. 뭉클해진 나머지 반려자를 꼭 그러안았다.) 나쁜 일은 없었다니 다행이에요. 이제 잘까요? 안 자면 낮에 힘들잖아요. (내일이 휴일이라도 밤에 잠을 설쳐 낮밤이 바뀌면 좋을 게 없다. 그래서 정효의는 아기를 재우느라 토닥거리는 사람처럼 반려자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대강 아는 영화고 치를 떨었다는 거 보니 정효의한테도 얘기했을 거 같아서 반영해서 이어 봤어~ 뮤지컬로도 나왔을 줄은 몰랐네;
(기운 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다 슬쩍 고개를 들고 보니, 점차 걱정으로 물들었던 남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번지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오밤중에 식겁하게 해서 미안할 뻔 했는데. 그래도 제 걱정은 덜 했으면 해서 등을 살살 문지르자니, 그가 더욱 힘주어 호연을 끌어안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듯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팔의 감촉에, 따뜻한 품에서 느껴지는 힘찬 심장박동에, 한없이 편안하면서도 어쩐지 다시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라, 괜히 남편의 잠옷자락을 손으로 쥐고서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안긴 게 드문일은 아닌데도, 새삼스럽게 설렜다. 그러고 있으려니, 남편이 안 자면 낮에 힘들 테니 이제 자자며,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다독여왔다. 내가 깨웠으니까 내가 재우려고 했는데. 그래도 얌전히 자는 편이 안심되려나.) 그래야겠어요. 내일 휴일이긴 하지만 모레는 일정 있으니까... 그래도 효의 씨가 달래준 덕에 이번엔 꿈 안 꾸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다보니, 마음이 푹 놓인 나머지 하품이 나왔다. 하품을 뱉고 보니, 졸음이 눈꺼풀에 무겁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효의 씨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간 상황이라서 더 무서웠다는 대신 해볼만한 말이 생각났다. 호연은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반쯤 잠꼬대같은 투로 웅얼거렸다.) 고마워요, 달래줘서... 그리고 나랑 결혼해준 것도요. (갑작스러웠으려나? 그 전에 무슨 뜻인지 잘 들렸으려나? 그런 생각을 떠올릴 새도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효의 엄청 시원하게 잘 깐다ㅋㅋㅋ 나는 뮤지컬로 처음 알았는데 보면서 공감했던 내용이라 속이 다 시원했어XD 호연이한테 말랑하고 스윗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갭모에다ㅋㅋㅋ 쓰다 보니 마무리 느낌으로 나왔네. 이걸 막레 삼아줘도, 막레를 달아줘도 좋을 것 같아! 조건 되게 까다롭게 내걸었는데도 충분히 스윗하고 공감능력 좋고 귀여운 배우자 캐로 이어줘서 고마워XD 덕분에 즐거웠어!
>>105 석양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아무리 부드러운 표정에 여느 신사 이상으로 점잖은 태도를 보인대도 상대는 용이다. 물론 마주하자마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끝 모를 암흑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라곤 검디검은 머리칼뿐이지만, 지금 흑룡은 다른 데서 봤다면 체격까지 조각 같은 것이 보기 드물게 호쾌한 인상의 미남이라고 감탄했을 외양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리 긴장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할 태세를 갖춰 봤자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뭘 하든 끝장일 테니.
떨림을 억누르고자 발뒤꿈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무는데, 당연한 의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선선한 어조가 어쩐지 격려처럼 느껴져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흑룡의 말이 상념을 불러왔다. 인간을 우습게 보는 용족이라, 흑룡이 앞서 일러 준 내용과 종합하면 인간 사회에 섞여 지내는 걸 즐기는 용도 있고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용도 있는 모양이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면서도 인간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는 인간 구경은 즐기는 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개체마다 다르다는 건데, 거기 생각이 미치자 그간 애매모호한 서술투성이라고 여겨 왔던 용에 관한 서적들이 실상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인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일었다. 용을 직접 보면서 확인한 정보만 기록해 보자고 왔는데, 그게 앞선 연구자들이 이미 해낸 작업의 되풀이에 불과하다면?
목숨이 언제 오락가락할지 모르는 마당에 사치스러운 걱정이라고 속으로 자조할 때, 흑룡이 마치 한평생 연구에 매진해 온 학자 같은 발언을 하면서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성이 앉기 편하게 에스코트라도 할 것처럼 의자가 움직이고 와인이 저절로 따라지는 기현상은 이제 놀랍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을 목도하며 덤덤한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왜 안 돼?'라는 저 자신감은 불가능한 게 없다시피 한 용이라 생기는 걸까? 그래도 맞는 말이긴 하다. 기존의 자료와 별반 다를 게 없더라도 역시 자료는 더 있는 게 낫다. 자료가 누적될수록 참고할 가치를 지닌 자료가 생길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내가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거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거인이 딛고 올라갈 디딤돌의 일부는 될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흑룡이 권한 자리에 앉고 보니, 그가 읽던 책이 눈에 확 뜨였다. 카다로스 제국사? 초대 황제가 무려 이 페레스 대륙의 6할을 정복하고 세웠다는, 그러나 몇 년 못 가 황태자가 백주대낮에 친동생에게 살해당하는 홍역을 치렀다는 제국. 이후 형을 살해한 황자가 황위를 계승하고 폐태자의 비를 황후로 삼았는데, 그 대에 제국이 거짓말처럼 분열되어 멸망했다던가? 건국부터 멸망까지가 워낙 극적인 대제국이라 대략적인 내용이야 들어 봤지만, 그 역사를 상세히 담은 책을 보기는 처음이다. 하기야 왕가의 서고에도 있을까 말까인 희귀 서적인데 일개 연구원인 여성이 접할 수 있을 리가. 그 대제국이 순식간에 몰락할 때 과연 무슨 일들이 터졌을까? 제 연구 분야와 무관한, 순전히 호사가스러운 호기심이 솟았지만, 그보다야 흑룡의 말을 듣는 게 우선이었다. 살고 봐야지.
그 사이 흑룡은 투명하게 검붉은 와인을 너무나도 인간처럼, 인간 중에서도 특히나 우아한 귀족처럼 마시더니, 여성이 흑룡의 동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설명했다. 요컨대 그가 말한 것 중 하나라도 어그러졌다면 가고일에게 이미 죽었거나 흑룡의 동굴에 이르지 못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나 본데 그래도 운명이라니? 그런 타령은 오래도록 사신 어르신들이나 할 줄 알았는데. 그랬기에 흑룡의 미소가 보기에도 설레게 매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앞섰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운명에 따르네 어쩌네 할 줄이야. 아니면 뭐 운명론자가 될 만한 계기라도 있었나? 인간 어르신이 살아 온 세월의 수십 배 이상을 거치다 보면 저 엄청난 능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기구한 일도 겪게 될까?
그러나 그 의문은 흑룡의 다음 말에 납작 뭉개졌다. 눈빛?? 아니 아무리 압도적인 힘이 있어도 그렇지, 이종족이 하는 말을 의심조차 안 해? 너무 무방비한 거 아냐? 답답했지만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저 용이 그래도 될 만큼 강한 건 둘째 치고 이 상황에 무방비하다고 지적하는 건 나를 의심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무덤 파는 짓이다. 관두자. 그러나 얼마 못 가 여성은 눈앞의 와인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술기운으로 무모해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목구멍부터 뱃속까지 이어지는 통로가 타는 듯 후끈해지더니 이내 알딸딸한 기운이 올랐다.
"저, 익히 아시겠지만, 인간은 연기라는 것도 합니다. 제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면 어쩌시게요? 진귀한 물건은 없다고 하셨지만 당장 그 책부터가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귀중품이고, 인간들 사이엔 용의 피를 뒤집어쓰면 불로불사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용님이 아무리 강해도 무방비 상태일 때도 있을 거 아닙니까?"
제 지껄임을 들을수록 우스웠다. 이거야말로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꼴이네. 듣는 고양이는 가소롭겠다. 쥐가 어떤 심정인지 알면 더... 가만, 그러고 보니 용은 마법을 쓸 줄 알잖아. 그러면...
"...혹시 독심술도 하십니까?"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궁금해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서술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거의 지나가는 내용으로 드문드문 넣은 여성의 외모 설정을 기억하고 계시는 거에도 놀랐고요 그렇게 공들여 주신 보람이 있는 답레여야 할 텐데요
"천천히, 천천히. 숨 넘어가겠네, 그려. 자, 천천히 하나씩 이야기 해보는 것으로 하나씩 풀어가보도록 하지. 그 또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단숨에 와인잔을 비운채 자신의 존재 마저 무시하고 따지고 드는 듯한 여인의 태도에 기꺼운 듯이 그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와인잔을 비워낸다. 급하게 비워내는 여인의 반주라도 맞추듯, 천천히 마시는 듯하면서도 순식간에 비워낸 술잔 너머로 여인의 금발이 아름답게 찰랑거린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듯 이번에 잔을 채워내는 것은 차가운 냉수였고, 어느샌가 테이블 위에서 조금식 음식을 뜯어먹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던 그는, 이내 그 시선을 여인에게 돌리며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나이 차이는 얼마 안나는 서로의 모습이었으나, 분위기만으로 따지자면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노인과 소녀의 모습과도 비슷하였다.
"그대가 걱정하는 바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네. 나 또한 생명체고 이 대지 위를 살아가는 존재들 중 하나이니까. 그저 이 거대한 땅 위에서 숨을 쉬고 같이 걸어가는 존재들 중 하나인 것이니까 말이지. 나또한 칼을 찌르면 죽을수 있고, 무슨 연유로 죽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 순간 그가 잠시간 허공을 응시한다. 지금 그가 모두 이룩해낸 것은 정말, 아주 정말 작디 작은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여인을 응시한채 미세하게, 자세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채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맞네, 우리 종족 또한 불사의 존재는 아니지, 나이를 먹음으로서 강해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해진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국 그 육신의 한계를 맞이하고 또 쇠해가는 존재인 것이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순간이었네. 정말 찰나지간으로, 자그마한 생각이 들은 것은 말일세."
그가 물을 들이킨다. 마치 먼 옛날을 바라보는 것 마냥 말이다. 그의 나이 2천살, 7백의 나이부터 시작되어온 작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고, 이 요람 계획은 앞으로도 그가 죽을때까지 이어질 보고였다. 과연 그가 이 모든 것을 생각없이 진행한 것일까, 결단코 아니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어쩌면 그 스스로가 말한대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질대로 겹쳐진 이 필연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톱니바퀴를 지금 끼워넣는 행위를 말이다. 이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누군가 말한 것 마냥 후대에, 그 조차도 모를 후대에 만들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끝이 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에겐, 모든 종들에겐 끝이 있는 법이지. 그렇기에 나는 생각했다네, 과연 최후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인물들에게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은채 남게 된다면? 당장 관조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우리 용족들도 갈수록 줄어들어가고 있는 판국에, 과연 그들을 이끌어줄 누군가가 없게 된다면? 이 요람은 그 걱정으로부터 시작되어진 것이지."
자신의 연구는 거기서부터 출발하였다. 인간들을 비롯해 아종족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던 존재들은 다름아닌 인간들 본인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하나, 그 과정에서 남겨두고 남겨진 기록들은 전부 구술되고 전해져 내려가 이렇게 책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녀가 말한대로 자신은 지금 유희를 즐긴지 너무나도 오래되어, 정령들을 이용해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이 요람을 구축하는 것 외엔, 각종 사료들을 통한 연구를 통해 다듬어진 날카로운 직관만이 그의 무기가 된지 오래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돌아가도록 하지, 의외지만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네.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것, 나는 그것을 인간들이 이룩해낸 업적을 통해 믿고 있다네. 도중도중 유희중인 우리 동족들의 행동이 개입 되어진 적이 없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그대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해낸 것이야.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을 나는 그릇되게 보지 않는다네, 그것을 올바르게 이끌어낸다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된 답을 찾아 낼 것이니까. 이 요람은, 세운건 나겠지만 채운 것은 그대들이라네."
인간 찬가, 인간을 긍정하는 말이 장명종의 대표자인 용으로부터 나왔다.
"자, 또 궁금한 것이 있는가? 이 또한 대답이 모자른다면 다른 답변을 해주겠네만."
//4시간동안 잠시 다른데에 붙잡혀 있었다는게 많이 슬프군요 흑흑..... 저야말로 부디 만족할만한 답레여야 할텐데요!!
그렇습니다. 블랑쿤은 정말로 단순하게 아주 자그마한 기우 하나 때문에 이 요람이라는 대 공사를 한겁니다(?)
>>112 미친 짓이었다, 내 생사여탈을 쥔 존재에게 내가 당신이 지닌 것을 탐해 당신을 속였을지도 모른다고 지껄인 건. 쌩초면인 이종족이 하는 소릴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순진함이 깝깝해서 그 미친 짓을 했다. 기왕 미칠 거 화끈하게 돌아 보자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먹고서. 그런데, 그 결과가... 너털웃음이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겠다면서?
기운이 쭉 빠졌다. 골이 지끈거리는 게 술 때문인지 저 태평한 용 때문인지 헷갈렸다. 동족이든 이종족이든 속내를 다 꿰뚫어볼 수 있거나 아예 불사신이면 모르겠는데 듣자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냐고?! 하지만 따지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좀 전까지 기운을 북돋아 주던 술기운이 이제는 온 몸을 짓눌러 흑룡이 준비해 준 냉수조차 마실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술 안 먹을래. 지켜질지 불확실한 다짐과 함께 숨을 쌕쌕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고열이라도 난 사람(하얀 얼굴이 벌겋게 익을 만큼 술기운에 열이 오르긴 했다.)처럼 몽롱해진 와중에 전혀 생각도 못한, 맨 정신에 친지에게서 들었다면 뭔 소리냐며 웃어넘겼을지도 모를 말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모든 생명체가 사멸해 가는 시기가 온다?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다. 여성에게는 인류의 존속이 해가 뜨면 지는 것처럼 당연했다. 설령 언젠간 멸종하리라고 판단한 적이 있었더라도, 이내 잊어버렸을 것이다.
다만 흐리멍덩한 정신에도 용족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똑똑히 새겨졌다. 용의 수명이 수천 년이라면 사망하는 용은 드물 텐데, 그런데도 용족이 줄어들고 있다면 새로 태어나는 용이나 성체가 되기까지 성장하는 용이 극소수라는 의미겠지. 이를 수치화하면 유의미한 연구가 되겠다. 까마득히 먼 미래의 생명체를 위해 방대한 지식의 보고를 준비했다는 용의 고백을 듣고서도 떠올리는 게 고작 당장의 연구 과제라니. 역시나 인간은 수천 년을 살아온 (그러면서 생명체의 등장과 멸종을 숱하게 지켜봤을) 용과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나 보다.
그대로 잠들 뻔한 순간, 무언가 뇌리에 번뜩였다. 이 요람을 채운 건 인간들이라는 흑룡의 말마따나 이곳에 있는 책은 인간의 언어로 쓰였고, 그 내용 역시 인간 사회에 특화된 지식들 같았다. 그런즉 인간이 아닌 종족에게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가령 군사학은 (여성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군사학에 관한 책도 이곳에 있었다.) 용을 비롯해 다수의 군사를 지휘할 일이 없는 종족에게는 익히나 마나다. 만약 이 흑룡이 대비하려는 미래에 인간이 멸종하고 없다면? 이곳은 무의미한 공간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여성은 안간힘을 써서 엄지손톱으로 손가락을 찍어 눌렀다. 아직 눈이 뻑뻑하고 눈꺼풀도 무거웠지만 좀은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인간 말고, 지성 있는 다른 생물..을 위한 책도 있습니까? ...말씀하신 마지막..에 살아남는 종이..인류가 아닐지도 모르잖습니까... 수명만 해도.. 용족이 더 긴데..."
정신이 들긴 한 걸까? 잠꼬대인지 웅얼거림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꿈 속인지도.
//사적인 공간일 줄 알았는데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대비하는 공간이었네요 그런 빅피챠 그릴 줄 모르는 연구원 씨는 용구 감소에 더 주목했다가 술주정 2탄 시전 (._.)...
잠꼬대와 비슷한 옹알이에 박장태소를 터트리며 그가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린다. 여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내 사과 하나를 부여잡고 오독오독 씹어 먹는 운디네 한마리를 불러다가 여인에게 찬물을 직접 먹여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만 운디네도 지금 당장 먹고 있던 사과를 마저 먹고 싶다는 눈치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잠깐동안 용을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준뒤 천천히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여인의 말에 답변을 재차 하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네. 요람이 괜히 요람이 아닌 셈이지, 지식의 요람은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네, 나 또한 1300년이라는 기간동안 마구잡이로 생각한 것임은 아니니까,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도 아마 이 작업은 계속 될 것이지."
여인의 옹알이에 가까운 행동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아무것도 안먹고 그렇게 빈속에 술을 마시면 속 버린다네, 아름다운 얼굴 다 망가지겠어, 가벼운 농을 곁들인 용의 한마디에 정령들이 까르르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매우 크게 썰어 한입에 넣어버린뒤 잠시간 우물거리다가 이내 그것을 꿀떡-넘겨버리고는 가만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니야. 하지만 수는 많을 수록 좋지, 이토록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대들 역사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니까. 나는 그대가 말하는 마지막이 오지 않길 바라는 존재 중 하나일세.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노망난 늙은이의 미친 짓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정도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를 대비하는 것은, 어쩌면 생명체 그 자체를 아끼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헛된 지식은 없다, 종족은 비슷하면서 전부 다 다르니까, 여인의 말대로 어떠한 정보는 그들에게 있어서 필요가 없을 테고, 어떠한 종족은 그 크기가 달라 결국 하나를 취하더라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각자가 쌓아 올린 정보들은 각각의 존재들에게 전해져 다시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고, 또 남겨진 자들에게는 앞서나간 이들이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 아니라면 무엇을 후회하고 고찰했는지 그것을 남기고자 하는 행동임을. 그리고 그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간 종족은 바로 인간들임을 말이다.
"여인이여,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해 망설이지 말게나, 수명이 길다는 것은 먼 미래를 그리는 도중 함정에 빠질수 있고, 수명이 짧다고 해서 먼 미래를 그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쌓아 나가게, 성벽의 외피를 만드는 것은 거대한 돌이나, 성벽의 안을 채우는 것은 자그마하고 버려지는 돌들이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대화를 나눈다면 결코 내가 생각한 최악의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사과를 다먹은 운디네 한 마리가 쫄래쫄래 여인을 따라가 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물을 직접 먹이는 것보다는 냉기가 그녀의 몸을 식혀주길 바라는, 꼬마정령의 배려일지도 모르리라.
>>114-115 수마(睡魔)에 잠식되다시피 한 정신을 깨운 것은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여전히 골이 지끈거리고 사지가 무지근하고 눈도 감길 것 같았지만, 의식은 한결 또렷해진 기분이었다. 여성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머리를 파르르 흔들고는 흑룡의 말에 집중했다. 인간 외의 지성체를 위한 책도 있다니 용의 책은 어떨지 궁금했다. 용이 문자로 기록을 남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문자는 사회를 이루고 안면이 전혀 없는 상대와도 (의도했든 아니든)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종이나 사용할 줄 알았는데, 용도 문자를 쓰는구나. 어떤 형태일까? 인간들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접하는 순간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전해져 오는 일종의 울림은 아닐까? 어떤 문자든 확인해서 소개할 수 있다면 엄청나겠는데.
그러나 들뜬 마음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흑룡이 무려 1,300년간 요람을 가꾸어 왔고 남은 평생도 그럴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1,300년이라니 인간이 세운 국가가 몇 번(카다로스 제국처럼 2대 만에 망하고 마는 나라도 적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십수 번 이상)은 바뀌었을 세월이다. 그처럼 공들인 공간인데 남은 평생이면, 그 평생이 인간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세월일지라도, 그 뒤는? 흑룡이 말한,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까지 이곳이 온전하려면 누군가는 관리를 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이 흑룡보다 나중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에게 뒷일을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무난한 존재는 역시 자손일 텐데, 인간 식으로 표현하자면 가업(家業)이 되는 셈일까? 그런데 용은 일가를 어떻게 이룬다? 짝짓기를 한 둘이 동거하면서 자식들을 낳고 키우려나, 인간들처럼?
제대로 물으려고 자세를 고쳐 앉는데 농담조의 걱정에 술기운만은 아닌 열기가 얼굴로 몰렸다. 아름답다니 농담조라도 전혀 뜻밖이었다. 미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지는 않지만, 착실해 보이고 호감 가는 인상이라며 연구원이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덕도 많이 봤지만, 그건 인간들 사이에선데. 만약 용의 미적 기준이 인간과 비슷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랄 노 자다. 용과 인간은 생김새가 전혀 다르니까. 아,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보기 드문 미남형으로 변신했을 정도면 인간의 미적 기준쯤은 익히 알고도 남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납득은 됐지만 낯이 홧홧한 게 가시지는 않았다. 한 가지 위안(?) 삼자면 고기를 썰어 먹는 흑룡이 유쾌해 보인다는 것 정도? 어쨌거나 확실한 건, 술은 마실 게 못 된다.
여성이 머쓱해하는 사이 흑룡은 말을 이어 갔다. 원치는 않지만 자신의 우려가 기어이 현실이 되고 만다면, 최대한 다양한 종에게 이곳의 지식이 전해지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흑룡이 생판 처음 보는 이종족에게 굳이 이곳을 소개해 준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면 책을 천년만년 모아 봤자 누구도 써먹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낯선 이가 하는 소릴 곧이곧대로 믿고 경계를 푸는 게 너무 대책 없다는 점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럼 아예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어떠려나? 모르긴 해도 이곳이 알려지면 학자들은 뼈를 묻을 작정으로 앞다투어 오지 싶은데.
그 제안을 해 보려다 노망난 늙은이라는 표현에 그만 아연해졌다. 여길 준비한 기간만 1,300년에 성체가 되기까지 걸렸을 세월까지 합하면 인간 기준으로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이긴 한데...이 흑룡은 용족 기준으로도 꽤나 고령인 모양이다. 인간의 20년이 하루살이에게는 억겁이나 다름없겠지만, 인간은 하루살이와 시간 감각이 다르기에 20살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늙은이라 칭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용의 평균적인 기대 수명은 어느 정도일까? 원래는 이런 동물학적 정보나 조사하러 왔던 건데 어쩌다 보니 천 년도 넘게 진행 중인 대사업 사연까지 듣고 있네. 인생 참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이 읽힌 걸까? (흑룡이 독심술을 쓸 줄 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못 쓴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흑룡이 당장의 사소한 일에 매진해도 좋다는 듯한 말을 덧붙였다. 거인을 위한 디딤돌의 일부라도 되어 보자는 다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원래 목적했던, 용의 생태와 습성 조사. 용족의 특성이라고 일반화할 수 있는 특징은 별로 없는 듯해 다른 개체도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그 용이 이 흑룡처럼 점잖고 순진할 리는 없으니 그땐 정말 조심해야겠지만) 선호하는 서식지, 사냥 방법, 먹이의 종류와 양, 계절의 변화에 따른 활동, 짝짓기 시기나 방법, 유년기 생활, 성체가 되기까지 걸리는 세월 같은 걸 낱낱이 확인하고 싶었다.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내가 알고 싶고, 어느 날 누군가는 알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음을 다잡은 김에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내쫓고자 손톱으로 손가락을 찍어 누르는데 너무나도 낙관적인 말이 들려왔다. 다른 종족끼리 서로 의지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당장 용만 해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개체가 적지 않은 모양이고, 인간 중에도 용을 두려워하거나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아니, 그런 종족 인식 이전에 언어가 통하나? 인간의 언어를 아는 용은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지만, 용의 언어를 안다는 인간은 듣도 보도 못 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교류를 어떻게 해? 타 종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서 서로의 언어도 익히게끔 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여성으로선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흑룡의 곁에 있던, 영적인 존재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개체가 여성의 정수리-풀어헤친 금발 위-로 올라왔다. 그 돌발 상황을 얼떨떨해하기도 전에 정신을 몽롱하게 하던 열기가 식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술을 깨게 해 주려고 온 거구나. 여성은 파란 눈망울을 들어 작은 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마움을 표하고자 고개를 까딱였다가 화들짝하며 얼른 영을 받쳤다. 인사하려다 떨어뜨릴 뻔했네. 그래도 술기운은 확실히 가라앉았다. 그에 힘입어 들은 얘기를 차근차근 정리하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남은 평생 여기를 가꾸시겠다 하셨는데, 그 뒤에는 어찌 됩니까? 누구 다른 이에게 맡기실 예정이십니까? 또 이곳이 훗날 쓰이길 바라시고 이종족이 서로 교류하기도 바라신다면, 앞으로 연구자들에게 이곳을 홍보하시거나 용의 언어를 인간에게 가르치실 생각도 있으십니까?"
//내적 TMI가 많은 연구원 씨입니다 겉만 곱상하지 그냥 너드예요ㅋ 그리고 용님이 투머치토커라기보다 제가 용님의 대사에 그때그때 반응하는 서술을 잘 못 써서 막판에 몰아넣는 탓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수충이 무슨 뜻인가요?
작은 여우는 드디어 인간으로 둔갑한 사실을 기뻐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너야말로 뭐냐나, 낯선 인간에게 정체를 들켰다면 인간 세상에 녹아들어 살고 있는 동족들도 숲 속에 남은 동족들도 모두의 안전이 흔들린다. 작은 여우는 일단 이 사람을 계속 깔아뭉개고 있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일어났다. 한 1초 정도 일어났다가, 영 인간으로 둔갑할 일은 없을 줄 알고서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간은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땅을 디딘다는 사실이 스쳐가듯 떠올랐지만 이미 넘어지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미 깔아뭉개버린 사람의 위로 한 번 더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인간들의 길바닥이 너무 딱딱하고 거칠어서 푹신한 흙바닥과 나뭇잎들이 그리워졌다. 아야—외치고 싶은 소리를 욱여넣고 아마도 아직 바닥에 엎어져있을 사람을 바라봤다.
"내, 내가 뭐 같은데?!"
작은 여우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를 마음 속으로 꾹 빌었다. 초조하고 당황스러운 이 경험에 대한 인상을 표정 위에 다 드러나 오늘이 새로운 최악의 생일이라 느꼈다.
"남은 평생을 모두 마무리 지은뒤 차원의 틈 사이에 가둬둘까 하네, 트리거의 경우는 종의 멸절 상태 여부를 체크해서 위치 포인트를 정해둔디면 분명 연자가 와서 찾아가겠지. 관리의 경우....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연구다만, 나의 인격을 복제해서 골렘이나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내어 이곳에 남겨둔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낙관적이고도 무덤덤하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최후 너머를 이야기 하는 모습은 마치 최후를 바라보고 있는 현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젊고 곱상한 외모와 더불어, 용이었던 때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대조되는 그 심유한 모습은 마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인지 은근 슬쩍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낸 모습은 마치 동급생의 그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자네, 아까 내가 독심술이라도 쓰는건 아닌지, 라고 물어보지 않았나?"
글쎄? 과연 어떨까? 내가 지금 여기서 독심술을 쓴다고 이야기를 해봤자 믿어버릴거 같다만, 그래서야 재미없지 않을까. 그는 속으로 어떻게 해야 이 순진하지만 경계심 많은 소동물을 골려먹을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속안으로 그의 버릇 마냥 턱을 슬슬 쓸으며 천천히 책 한권을 다시 가벼운 마력 사용을 통해 책을 가지고 가볍게 장난을 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용에게 독심술은 없다네. 하지만 자네와 내가 살아온 세월의 차이가 얼마인가? 즉 연륜으로 하여금 자네가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거네. 그리고 말이지."
그가 아주 짖궃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선다. 마치 동급생 여자아이에게 다가서는 남자학생 마냥 그가 거리를 좁혀온다. 그러나 일정 이상을 다가서지 않는 것은, 그저 지금 이 눈앞의 여성에게 최소한의 배려라는 것을 베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녀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몰라도, 결국 이 또한 그가 그녀에게 종의 차이로서의 존중을 던지는 것이리라.
"자네가 생각보다 표정을 읽기 쉬운것도 있네. 생명체의 표정은 정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도 인간이 그 으뜸이지만은 그대는 정말로 많은 것를 알려주고 있다네. 허나 반면으로 안타깝기도 하지. 그대가 아까 한 말을 기억하는가?"
아까전부터 했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자,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온다. 그제서야 상대도 기억나지 않을까.
—인간은 연기라는 것도 합니다. 제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면 어쩌시게요?
"자네, 역으로 내가 묻겠네. 용은 연기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가 생각보다 매력적이라는 것도 좀 알아야한다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인채 가만히 여인을 응시한다. 사실 그가 책을 수집하면서 여러가지 경우의 모습을 봐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기준으로 지금 이 눈앞의 여인은 생각보다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진실이라는 미끼를 이용해, 지금 눈앞의 여인에게 장난을 치고자 하는 것이리라.
//말그대로 묘수에 미친 놈이란 뜻 정도로만 알고 계심 됩니다!!
어차피 거의 속어라서.... 좋은 뜻은 아닌고로.... 그리고 금발 미녀 너드..... 씁 취향인ㄷ....(읍읍)
짤막한 물음이 던져졌다.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인지, 조금은 몽롱한 어조다. 태양을 동경해 아버지의 경고마저 등지고 날아올랐던 이카로스. 밀랍이 녹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혹은 맹목적인 감정에 휩싸여 두려움을 잊은 자.
"사람은 애정하는 것을 닮게 된다더니, 이런 부분에서마저 그 말이 맞나 보네요."
맹목은 그 자신을 불사른다. 그 자신을 태워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태양과도 같다. 그런 폭발적인 에너지는 사람을 섬뜩하리만치 두렵게 하거나, 매혹해 열광하게 한다. 때로는 상반된 두 감정 모두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나 어쨌건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저 자신은 결코 걸을 일 없는 길이며 써내려갈 일 없는 서사이니.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러기에 저는 지나치게-"
불현듯 그는 말을 멈춘다. 언어를 잃은 사람처럼 입술만 잠시 달싹이다 만다.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얕은 숨소리만이 허공을 떠돈다. 집요했던 시선은 생각에 잠겨 초점을 잃었다. 그는 습관처럼 건조한 입술을 잘근대다가, 혀로 그 위를 한 번 쓴다.
"따분한 인간이거든요. 아마 두려움을 미뤄두더라도 갈 방법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거예요."
흘러나온 것은 느릿느릿한 목소리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 와 같은 사실을 전달하듯 단조롭다. 그 끝에 그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는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상당히 낭만적인 표현이네요."
우주를 향하는, 팽창, 폭죽과 비명. 단어를 잠시 곱씹던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내내 무감하던 얼굴에 약간의 즐거움이 번진다. 당신의 말로부터 떠오른 심상이 퍽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주선 역시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팽창이나 폭발, 고조된 감정으로 인한 비명 따위의…당신이 입에 담은 것과 유사한. 그는 문득 떠오른 제 생각을 그대로 말로 옮겼다.
"그러면 당신은 우주선의 선장쯤 되는 걸까요? 아니면 항해사?"
곧이어 그는 지나치게 날 것의 생각을 전했다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역시도 지나치게 짧았고, 제대로 된 설명이라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우주를 향해 이끈다는 점에서요."
마치 승객을 미지의 우주로 이끄는 우주선의 선장과도 같이, 당신은 관객을 저와 함께 우주로 이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이 우주 속을 유영하자며 끌어들인다 할 수 있지 않나.
ㅤ이카로스, 이카로스로구나. 당신의 말이 마음에 들은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 밑으로 기타의 매끈하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다음 곡의 제목은 이카로스가 좋겠다. 케시 라일리는 순식간에 남들 모르게 곡을 지어냈다. 테마는 아마… 우주, 그리고 태양.
ㅤ사색에 빠졌던 케시 라일리는 잇따라 들려오는 말에 의문 가득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닮았다는 거니, 태양과?
ㅤ"그거 참 이상한 말이구나……."
ㅤ질타하는 듯한 문장이나 표정만큼은 요상하게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기본 베이스인 무표정, 차가운 입매가 아주 살짝이나마 올라간 것으로 썩 온화한 낯짝으로 변모했다. 그 말은 꼭 자신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던 까닭이었다.
ㅤ케시 라일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목을 덮는 기장의 흑발이 사르륵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것인지 움찔거리던 입술은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다물었다. 참으로 겁 많은 아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조소를 머금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일렁였다.
ㅤ 돌이켜보면, 제 주변에는 불꽃같은 녀석들만 가득했다. 전부 자신과 닮은 녀석들이라 꽂힌 하나에 온몸 불사르는 부나방 같은 것들이었다. 케시 라일리는 제 인생에서 드문 유형의 당신이 퍽 생소했고 제 궤적을 한번 밟아봤으면 했다. 그래서 케시 라일리는 담담한 목소리로 묻고 마는 것이다. 그렇담. ㅤ 그렇다면.
ㅤ"내 우주선에 타보겠니─"
ㅤ ─상당히 거친 운행이겠지만, 폭발의 마지막 불씨까지 함께해줄 테니.
ㅤ케시 라일리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 건넸다. ㅤ케시 라일리가 속한 밴드부의 공연 티켓이었다.
>>119 흑룡은 아득한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여성의 질문에 답했다.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면서도 기품이 엿보이는 미려한 용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인간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모습을 참 기막히게도 구현했다. (앞으로 인간 중에 외모가 유달리 빼어난 이를 보면 혹시 용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될 것 같다.) 나도 계속 연구하면 용의 미적 기준을 잘 알게 될까? 아무튼 용은 이곳을 누구에게 맡길 의향이나 이종족 간 교류를 주도할 계획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론상의 연구라면 호문클루스나 골렘 같은 건 구현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건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 치고는 허술한 것 같아 일순 당황했으나, 터무니없게도 동질감 비슷한 게 드는 것도 같았다. 100년도 살기 힘든 인간이나 수천 년을 사는 용이나 사후를 완벽하게 대비하기는 어렵나 보다고.
그런데 돌연 흑룡이 표정을 바꾸어 여성이 술을 들이키고 했던, 독심술도 하냐는 질문을 되짚었다. 실체를 모르고서는 여성의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 영락없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무색하게 그는 연륜의 차이를 언급했다.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가 성인 눈에 어느 정도 보이는 것과 비슷할까? 어쨌거나 고양이 걱정인 쥐 같은 속내도 알아챘다면... 여성은 흑룡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려다 제 머리 위의 영을 의식해 멈칫했다. 민망하다. 쪽팔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흑룡이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히 거리를 좁혀 섰다.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칼에 손이 갔다.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자제했겠으나, 맹수를 넘어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와 가까워지자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만 생존 본능이 앞서 버린 것이다. 그 두려움을 헤아리고 있었던 걸까? 흑룡은 어느 시점에 딱 멈추더니 여성의 표정이 읽기 쉽단다. 여성은 등줄기에 솟았던 땀이 식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마른침을 넘겼다. 칼자루에 닿은 손은 아직 떨림이 주체가 안 됐다. 지금 표정 가관이겠네.
제풀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데, 흑룡이 또다시 여성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더니 거꾸로 용은 연기를 안 하겠냐고 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흑룡이 지적한 대로 반대의 가능성은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용은 인간을 속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간들과 섞여 놀겠다고 인간인 척하는 용이면 모를까,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인간과 마주한 용이, 뭣하러?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더 불가해했다. 매력적이라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용이 인간을 속일 가능성과는 무슨 상관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미간만 구겨질 따름이었다.
//연구원은(는) 혼란에 빠졌다! 고로 대사가 없습니다 (._.)... 용 으르신이 연세에 비해 짓궂으시네요 ㅎㅎ
"뭐 같기는! 아이고, 허리야... 이 한밤중에 뜬금없이 행인 허리 위로 떨어지는 사람이면 요괴나 도둑밖에 더 되겠냐?"
사람 위에 넘어져 놓고 자기가 뭐 같냐고 묻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잠깐. 뭘로 보이냐고? 이제보니 내 안경이 떨어질 때 충격으로 벗겨졌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경 좀 자주자주 바꿀 걸 그랬다. 낡아서 그런지 자꾸 안경테가 흘러내리니 일이 이렇게 되지. 어찌되었든 맨눈으로 보았을 때 저 실루엣은 확실히 사람이다.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아마 눈코입은 있을거고, 두 발에 두 다리 형상 비슷한게 보이는 것을 보니 분명 사람이다. 뭐 머리 위에 이런저런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 처럼 귀나 꼬리나 뿔 같은 이상한 게 달려 있는지 아니면 뭐 달걀귀신인지는 아프기도 하고 자세히 볼 겨를도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일단 보이는대로 봤을 때 결국 사람의 실루엣인 것은 확실했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요괴 같은게 어딨어? 밤이슬 맞고 다니는 도둑이나... 아니면...
...아니면. 어쩌면.
"너... 솔직히 말해봐. 진짜 도둑이냐? 아니면... 그, 포기하려고 한거야?"
요즘같은 때에 마음이 꺾이는 이들 또한 수도 없이 많다. 어쩌면 여기 있는 이 사람도 그랬을 가능 성이 있다. 한 때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결정을 내릴 뻔 한 사람으로서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으로, 차라리 전자인 쪽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경찰에만 맡기면 되니까.
책에서 읽은대로라면, 지금 이 여인은 분명히 반응이 재밌는 쪽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발이 넓지 않은 그로서는 이러한 모습을 관측 하는 것 자체로도 상당히 연구심을 자극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칼을 뽑으려고 하는 순간, 솔직히 한번쯤은 휘둘러도 너그러이 용서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인은 분명히 자신에게 꽤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꽤 오랫만에 만난 다른 인물, 그것도 충분히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상대가 자신과 말이 통하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면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인은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 편협되지 않으면서 충분히 경계심을 가지고 만물을 바라보는 태도는 매우 훌륭하기 그지 없었고, 외적으로도 ─여인 본인은 정말 인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미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자신하고 문답을 자연스레 문답을 주고 받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그녀를 매우 높이 평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구기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고민하고 있군.'
나쁘지 않다, 의중을 파악할 수 없으니 계속 고민하게 되고 수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안전하게 나서는 것만으로 분명히 반은 먹고 들어가고, 수성이야 말로 공성전의 기본이니까, 생각을 나누고 대화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면 마찬가지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지금 그녀의 대처는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공세에 나서야지 적에게서 승기를 잡을수 있는 법인데 그 부분이 아쉬운 것은 어째서일까? 그리고 그에 반해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사랑, 즉 첫눈에 반했다 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 아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딱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성적인 의미로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다른 의미의 소유욕, 인간을 뛰어넘은 훌륭한 마음가짐, 만약 그녀에게 길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히 훌륭한 재목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속으로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래, 솔직히 인간들에게 넘겨주긴 너무나도 아까운 재목이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하핫!! 장난이 너무 심했군, 그래도 내가 말한 것 중에 9할은 전부 진심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그리고 눈앞에 놓인 음식을 두고 인상을 굳히는 것도 좋지 않은 법일세. 그러니 천천히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걸로 하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음식은 솔직한 심정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리빙아머에게 술식을 새겼을때 차라리 모래를 요리해도 이것보다는 맛있겠다 느꼈었는데 몇년간의 수정을 걸치고 지금까지도 개량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정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흡족한 생각을 하던 와중, 그는 마침내 자신의 최고의 걸작, 요람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랬다, 여인의 말대로였다. 이 곳은 어디까지나 용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곳, 과연 타종족인 그녀의 시선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그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전의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매우 진지한 태도였다.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음식 먹으면서 대답해도 되니까 천천히 대답해주게나."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떨어졌다.
"자네, 이 요람을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가 보는 시점으로 뭐든 말해주게, 좋은 점, 나쁜 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면 뭐든 좋네. 바난도 비방도 전부 수용하지. 절대 화는 내지 않겠네."
//많이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장난기만 남는다 카더라요.... 그리고 사실 지금 용님이 보는 여인에 대한 모습은 훌륭한 대학원ㅅ.... 아, 아닙니다
>>124 난제를 접한 열등생처럼 끙끙대던 중 문득 흑룡의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눈에 눈길이 갔다. 물감 같은 인공적인 수단으로는 절대 구현하지 못할 것 같은, 석양의 그윽하면서도 선연한 빛을 오롯이 담은 듯한 눈동자가 흰자와 보기 좋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용을 마주보기는 두렵거니와 너무 빤히 보는 건 결례 같아 자중하려 해도 그 의지에 반(反)해 끌려들고 마는, 그래서 스스로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불안해지는 그런 눈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말려는 찰나, 흑룡의 눈에서 어쩐지 익숙한 빛이 비쳤다. 용이 변신한 모습이니 진짜 인간과 비슷할지 미지수이지만, 저 반짝임은 여성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찾았거나, 한창 연구에 몰두할 때 드러나는 총기와 비슷했다. 설마 이 용이 날 관찰해서 인간을 연구하려는 건가? 그래서 매력적이라고 한 거고? 또다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인간이 용을 속이는 건 당연시해도 용이 인간을 속이는 건 상상도 못했던 것처럼) 용을 연구하는 인간이 있는 건 당연시했으면서 용이 인간을 연구하려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바보네, 나.
실소가 나오면서도 안심이 됐다. 흑룡이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젓는 모습도 연구로 머리가 복잡해진 연구원처럼 보여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가치가 있으면 죽이지야 않겠지. (본능적인 공포로 칼을 뽑을 뻔하긴 했지만 여성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했다뿐 이미 흑룡이 살의를 품을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못 먹는 술을 마셔 가며 군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에게든 용에게든 받기만 하는 건 경우가 아니다. 무례를 용서해 준 데다 욕탕을 빌려 주고 만찬까지 베풀어 준 걸 다 갚기는 어렵겠지만,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내어 주는 게 도리일 거다. 그러니 흑룡이 인간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적극 협조하자. 그러면서 용의 생태와 습성에 대해 들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 결론짓고 흑룡의 저의를 확인하려는데, 그가 파안대소하며 장난이었단다. 맥 빠지는 결말이다. 지금 제 표정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해 보일 것 같다는 민망함은 덤이었다. 그런데 또 9할은 진심이라니 더 혼란스럽다. 결국 여성은 식사를 마저 하자며 자리로 돌아간 흑룡에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9할이 진심이고 나머지 1할은 연기라는 겁니까? 그럼 어떤 말씀이 9할이고 어떤 말씀이 1할입니까? 전 인간을 연구하고 싶으시면 협조하겠다고 말씀드리려던 참인데요.."
투덜거리면서도 우스웠다. 내가 이런 걸 따져 물어도 되는 입장이던가? 맥 빠진 건 내 사정이고, 자기 얘기를 할 의무 같은 거 저 용한텐 없는데. 몰라. 내키면 말씀하시겠지. 체념하고 흑룡이 말한 대로 식사나 하려는데 한참 긴장하고 기가 빨렸던 여파일까? 아까 배꼽시계가 요란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입맛이 없었다. 뱃속도 빈 건지 찬 건지 모르겠다. 테이블만 톡톡 건드리던 중 제 머리 위의 영이 사과를 앙증맞게 먹던 것이 떠올라, 사과를 집어 제 머리 위에 있는 영에게 권하듯 들어 보였다.
그때, 흑룡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표정도 어조도 아까까지와는 딴판으로, 진중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요람이 온 생애를 바친 사업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보다. 세기의 연기자라도 저런 눈빛을 연기해 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저 간절함이 과연 내 말로 충족이 될까?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쥐어짜려다 마른세수를 하고 숨을 골랐다.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가 천 년이 넘도록 고심해서 이룩한 공간이다. 잠깐 봤을 뿐인 내가 뭐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가. 큰 차이 없을 테니 솔직하게나 말하자.
"글쎄요... 인간 말고 다른 지성체의 서적도 필요하겠다 생각했는데 애초에 그렇게 준비하신 것 같고, 훗날 살아남은 이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홍보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이미 적절한 때에 이곳을 발견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다니 홍보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려하시는 마지막을 막는 데에 이종족 간 교류와 협력이 중요하다면, 우선 종족 간 언어 장벽을 낮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용님도 인간의 언어를 아시니 저 같은 인간의 말도 들어 주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또 타 종족에 대한 선입견을 줄일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종족이 섞여 지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말하다 보니 이건 서고가 아니라 학교가 필요하다는 소리 같네. 용과 인간이 함께 다니는 학교라니, 목숨 안 걸고는 못 다니겠는데? 말을 꺼낸 당사자면서 편견 잔뜩인 게 부끄러워 여성은 제 머리칼을 검지로 배배 꼬면서 덧붙였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또 뭐가 있을까? 흑룡의 말을 되짚다 보니 흑룡이 이론상의 연구라고 밝혔던 골렘과 호문클루스가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흑룡의 장난(?)에 허를 찔린 것도 생각났다. 인간 입장만 고려해서 반대 경우는 상상도 못했는데... 가만, 이 용이 걱정하는 최후가 예상보다 빨리 오면 어떻게 되지?
"그 외에는 말씀하신 골렘과 호문클루스가 완성 가능한 것인지, 완성을 못 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했습니다만...지금은 다른 걸 여쭙고 싶습니다. 만약 용님이 대비하시려는 그 마지막이, 용님 생전에 닥쳐 버리면 여긴 어떻게 됩니까?"
//별 말씀을요 그간 엄청 빨리 이어 주신 거죠~ 똘똘한 원생을 지도학생 삼고 싶어 하는 교수님 같기는 합니다 용님이:) 연구원 씨가 과연 똘똘한 원생일지는 모릅니다만ㅎㅎ 그나저나 연구원 씨 말이 많아졌네요 메타적으로는 용님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해 사투라도 벌이려나 궁금합니다ㅋㅋ
억울함이 욱 하고 올라온 작은 여우는 답답함이 사무쳤다. 우리 여우 일족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또 어딨겠느냐—는 말을 듣고 자란 탓에 어이가 없어졌다. 요괴같이 삿되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고, 도둑같이 좀스럽고 얍삽한 존재도 아니었다. 인간 세상 속 여우는 요사스럽고 야비하게 그려져서인지 더 억울한 듯 했다.
"사과해! 실례잖아!"
그런 탓에 작은 여우는 자신이 먼저 사과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니 뻔뻔하게도 사과를 요구하며 소리지를 수 있었다. 작은 여우는 씩씩거리고 싶은 걸 참고 저에게 실례를 저지른 인간을 노려보다가, 문득 시야 속에서 안경을 발견했다. 주인은 아마도...
"도둑 아니라니, ㅇ어? 어떻게 알았어?"
무례하긴 하지만 사람을, 아니 여우를 잘 꿰뚫어보는 이 인간의 것 같다. 작은 여우는 인간의 약점으로 잡을 생각으로 안경을 슬쩍 주워왔다. 부러뜨린다고 협박하고 도망가야지—이게 계획이었다.
"하하하!! 그대들은 그대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연구해왔는지 모르는군, 걱정 말게!! 자료는 충분하고 사료도 많이 봐왔으니 내 자네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을것이야! 하하하하하!! 아, 미안하네. 자네의 말은 허를 찌르지 못한 듯 허를 찔러서 나를 충분히 재밌게 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근 100년간 이렇게 재밌는 대화는 없을 것이야!!"
용의 진심어린 말투였다. 별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연구에만 매진하다 보니 누군가를 만날 기회 자체가 적었다. 그렇기에 오랫만에 손님 대접을 융숭하게 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의 견해를 듣고 나누며 공유하는 것 만큼 정말 재밌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닐지 잠깐 동안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윗자리는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조금은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였다. 어쩔수 없다, 만약에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나 공손히 대한다면 상대가 그만큼 자신을 어려워 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니까 딱 이정도 선이 매우 적당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손에 깍지를 끼고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종족 간의 언어 장벽, 실제로도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맹점이었다. 생각을 안할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이 곳에 호문클루스나 사념이 깃든 골렘을 만든다면 문제는 없을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용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완벽하게 그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서야 이 공간은 열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에 따라 달라진 언어는 또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이며, 만에 하나 다른 이종족이 적인줄 알고 공격을 한다면..... 여인의 의견이 타당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는게 정확하군, 내 기준에서만 보던 문제를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말이야. 그대가 생각한 바가 옳다고 느껴지네. 내가 호문클루스를 제작하면서, 다른 종족들을 넣는 것으로 그것을 대안해보겠네."
일석이조였다. 여인이 생각하는 것을 읽은 바는 아니지만, 오히려 용은 그 안에서 꽤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교육, 말 그대로 이 지식들을 활용할 수 있게 교육을 하는 것, 누구나 배울수 있고 누구나 가르침 받을수 있는 이 공간을, 후세인들이 익히고 배울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그 순간 그는 그의 시선이 여인을 향한다. 생각보다 매우 유능하고 생각보다 훨씬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지 못한 이 여인을 자신의 측으로 끌어 들인다, 생각보다 괜찮지 아니한가? 요람의 총책임자의 비서, 즉 인간들 사이에서 교수와 조교의 역할과 비슷한 느낌으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은 뒤 여인의 질문에, 별 문제 아니라는 교수 마냥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호문클루스니, 골렘이니 그런건 완성이 어려운게 아닐세. 제작을 하고, 인격을 부여 하는 것,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지."
하지만 용의 걱정은 거기서 더 나아간 문제였다.
"자, 잘 생각해보자고. 나를 복제한 호문클루스에 내 인격을 최대한 복제해서 넣었네. 활동 시점은 내가 죽고난뒤 깨어나는 것으로 설정해두면 되니까. 정말 뛰어나게 복제를 해서, 99퍼센트에 가까운 내가 태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게 진짜 내가 생각한 결과를 가져다 줄까? 우리가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나 완전히 똑같이 생활하더라도 결국 차이점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지. 1퍼센트의 차이는 크네, 그 1퍼센트의 다름이, 요람의 결말을 어떻게 맺을지가 나는 조금 두려울 뿐이야."
그리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여인을 향한다. 재차 와인을 한잔 따라주며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머금은채 입을 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대가 점점 마음에 드는군, 아,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니까 걱정말게나. 내가 마음에 든다는 것은, 그대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즉 학술적인 의미로서 마음에 든다는 의미니까, 그러니까.... 이 곳에서 일해볼 생각 없는가? 그대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겠네."
//용의 조교수 제의!! 무려 제일 첫빠따라 교직으로 따지자면 다음에 들어올 아이들보다 제일 짬밥이 높아지는 거라고요?!
죄송합니다 흑흑 최근 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 답레가 가네요..... 메타 발언이라고 말한다면 만약 진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온다면 용들의 규율─현세에 너무 간섭하기 금지─을 어기고 전면개입할껍니다. 진짜 있는대로 개입해가지고 최대한 틀어막은 뒤 죗값을 단단히 받을꺼에요. 별종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강한 편이니까요.
//용도 지켜야 하는 룰이 있었군요 그렇게 되면 자기희생적 결말의 슈퍼히어로물 비슷하게 되겠네요:) 용님이 능력도 그렇고 인간 친화적인 성향도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신 같다는 느낌입니다ㅎㅎ 그리고 충분히 빠르신데요 묻힌 줄 알았던 거 따박따박 이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어제 못 이었는데... 그 연구원 씨 머리에 자리 잡은 운디네가 사과를 받아먹었을까요 배부르다고 마다했을까요? 제 캐가 아닌지라 임의로 서술해 버리면 결례일 것 같아서요.
이렇게 둘이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이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자그마한 소녀는 잠시간 눈을 끔뻑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화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느새 자신의 품안에 사과를 건네주는 여인의 모습에 사과를 받아든 뒤, 눈을 가볍게 끔뻑이여 그녀를 응시한다.
—꺄아!
그와 동시에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사과를 팔 아래로 끌듯이 내린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한 물의 정령은 싱그러이 웃으며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문 뒤 다시 저편으로 자리를 잡고는, 여인이 준 사과를 진수성찬인 마냥 입안 가득 넣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던 용의 시선에는, 상당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대, 이런쪽으로 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만, 정령들은 함부로 남들이 주는 물건에 대해 경계심이 강한데.... 뭐 따로 적성에 관련된 검사 같은 거 받은게 있는가?"
//메타 발언 추가 : 실제로 서양의 드래곤보다는 동양의 용과 북유럽신화의 요르문간드의 성향이 강할꺼에요. 중립선의 영향은 동양의 용, 동족과 사이가 별로 안좋은데에 대한 이유는 그런 신(즉 드래곤)들에게 이골이 난 요르문간드의 성향을 보면 돨꺼에요
>>127 >>129-130 어지간히도 즐거운지 그야말로 폭소를 하는 용을 보며 여성은 제 추측이 터무니없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하기야 사학을 살피면 어지간한 인간 군상 다 확인할 수 있고, 의학을 살피면 인간의 몸이 용과 얼마나 다른지도 파악이 될 것이며, 인간의 생활 양식도 인간 사회에서 한 몇 년(그 정도야 용에겐 짧은 시간이겠지.) 지내 보면 웬만큼은 가늠되겠다. 굳이 인간 개체 하나 두고 볼 필요가 없네. 머쓱함에 애꿎은 머리칼을 쥐었다 꼬았다 했다. 결국 뭐가 참말이었고 뭐가 연기였는지는 알 수 없게 됐네. 다시 물을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사람 속도 깊디 깊은 물속보다 알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하물며 용의 속이 몇 마디 듣는다고 알아질까? 일단 재밌다는 건 진심 같으니 사서 골치 썩지 말자.
그런데 여성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끄집어내자 흑룡은 앞서 껄껄거리던 게 무색하게 진지해졌다. 번득이는 눈빛이며 집중한 표정이며 깍지를 낀 손이 경견하게까지 느껴졌다. 내로라 하는 학자들의 연구회에서도 저렇게까지 경청하는 이는 못 봤다(그런 자리에선 잔심부름이나 맡는 게 고작이긴 했지만). 이윽고 흑룡은 호문클루스를 다양한 종족으로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매진한 분야이고 그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다른 의견에 귀기울이기 어렵고 용에게 인간은 여러모로 부족한 존재일 텐데, 무려 천 년 이상 온 노력을 기울인 일에서 저토록 유연한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과 그 일이 완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겸허함의 균형, 그것도 (물리적인 강함이나 마력 못지않은) 저 용의 저력 아닐까?
그때 흑룡이 선이 뚜렷하면서도 섬세한 눈매의, 석양빛 눈동자가 두드러지는 눈으로 여성을 주시했다. 뜨끔했다. 감히 평가하고 앉았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흑룡이 독심술은 못한다고 답하긴 했지만, 앞서 한 말 중 진짜는 9할이라고도 했으니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감한데도 눈을 떼지는 못하겠다. 잘생기고 고운 사람이 구경하기 좋긴 하지만 이 정도로 앞뒤 못 가린 적은 없는데. 심지어 진짜 사람도 아니고 변신한 용인데! 저 눈에 진짜 시선을 붙드는 마력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나마 다행인 건, 이어지는 말이 여성의 잡념과는 아예 무관한 내용이었다는 거다. 호문클루스와 골렘의 완성은 쉽단다. 진짜? 그게?! 인간들에게는 신의 영역을 범하는 무모한 짓으로 여겨질(실제로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했나? 어쩐지 골이 띵해져 여성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기야 손 한 번 튕기면 마법 기사들도 뚝딱인 용한테는 쉽겠네. 내로라 하는 성직자들이 갖은 노력을 쏟고도 존재를 제대로 입증하지는 못한 절대신보다 이 용을 신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잡념을 털듯이 머리를 두들겼다. 이런 신성 모독적인 발상, 어디서 들켰다간 화형당하기 딱 좋다.
그래도 흑룡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는 와닿았다. 신이 아닌가 싶은 능력을 지녔어도 미래까지는 모르나 보다. (하긴 미래를 알았다면 이곳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부터 이미 알고 있겠다.) 그렇다면 설령 흑룡이 언급한 1퍼센트의 차이조차 없이 완전히 똑같은 존재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존재가 훗날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을 거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비슷하긴 해도 다른 점도 적지 않듯이, 미래의 용이 현재와는 다른 성향을 지닐 가능성도 0은 아닐 테니까. 자신이 관여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어서 생기는 불확실성을 우려하는구나. 혹시 지금 만들어서 흑룡이 바라는 바를 꾸준히 주입시키면 좀 나을까? 잠시 궁리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이건 미래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 말을 얹어서는 안 될 영역 같았다.
머릿속을 갈무리하는데 잔에 다시 와인이 찼다. 순수한 호의가 담겼음은 알고도 남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영을 의식하고는 주제 파악을 하기로 했다. 술은... 인제 안 먹을래. 아니, 못 먹는다. 아무리 암벽 등반을 하고 빈속에 원샷을 했어도 그렇지, 와인 한 잔에 맛이 갈 정도면 아예 마시질 말아야 되는 거다. 그때 흑룡의 눈매가 부드럽게 실그러지며 그 마성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 눈을 가리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질 찰나, 그 난처함이 거짓말처럼 날아가는 제안이 이어졌다. 잘못 들었나? 애초에 종이 다르니 마음에 든다는 게 연심(戀心)과 무관하다는 거야 굳이 언급하는 게 더 어색할 정도로 명백하겠지만, 요람에 대한 여성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해 준 것도 알겠다지만, 일? 여기서?! 내가?!?
얼떨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용은 노동력을 얻기 위해 금전을 지불하는 일 아닌가. 용이 인간한테 금전을 지불하겠다고 한 건가, 지금? 아니, 그 이전에 미래를 모르는 것 빼고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심부름꾼도 내키는 대로 만들 수 있으면서 고용? 솔직히 여성에게는 나쁠 게 없다시피 한 제안이었다. 원래는 사비를 들여 용의 생태와 습성을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도리어 돈을 벌면서 용을 관찰할 수 있다? 게다가 용이 구축 중인 사상 최대의 대서고도 기록할 만한 가치는 차고 넘치고, 잘하면 용들의 문자까지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다로스 제국사>를 필사해 두면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실 서고에도 있을까 말까인 책의 내용을 외워서 썼다고 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여성이 얻을 수 있는 건 한가득인 데에 비해 흑룡이 얻을 수 있는 건 불투명해 보였다. 심지어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도 감이 안 온다. 그러면 돈을(혹은 용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보석을) 받겠대도 시원찮을 텐데 도리어 돈을 주겠다고? 눈앞의 잔이 그대로 차 있지 않았다면 여성은 또 술을 마셔 버렸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데 작은 영이 환호성과 함께 사과를 답삭 안았다. 이어 영은 고맙다는 듯 여성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여성의 주변을 뱅뱅 돌더니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도 같고 놀란 것도 같은 기분으로 여성은 영이 입맞춤한 자리를 어루만졌다. 다 같이 먹던 거 건네만 준 건데, 낯가림이 없구나. 그런데 흑룡이 도리어 놀랐다는 듯이 정령은 남이 주는 물건을 꺼린다며 적성 검사 같은 걸 받아 봤냔다. 그런 것도 있었나? 곰곰 생각해 보니 마법 재능을 지닌 학생들은 영적인 능력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고 들은 것도 같다. 그러나 마법에는 자질이 없다시피 한 여성에게는 완전히 딴 세상 얘기였다.
"아니요. 영을 직접 본 것도 오늘이 처음입니다. 원래 이 테이블에 있던 사과라 경계를 덜한 거 아닐까요?"
어쨌거나, 제 몸만 한 사과를 맹렬히 먹는 영은 깜찍했다. 술 깨워 줄 때도 귀엽더니. 용은 다른 개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들어서 용의 거처는 적적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여긴 인간들의 가정 못지않게 따뜻한 분위기다. 그 덕에 긴장이 풀린 걸까? 상상 밖의 제안에 어떻게 답할지도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심부름꾼이라면 용님이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고, 대화 상대라면 인간 사회만 뒤져도 저보다 빼어난 사람이 숱하니까요. 그래도 제게는 좋은 기회라 거절할 염치까지는 솔직히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1달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의향이시라면 그때 다시 제안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이에 맡기시는 일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카다로스 제국사>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려는지는 몰라도 1달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겠지. 결국엔 후자여서 흑룡의 마음이 바뀌더라도 그 사이 흑룡과 용족에 관한 정보를 얻고 <카다로스 제국사> 필사본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성과가 될 거다. 원래도 1달은 이 산에 머물 예정이었으니 일정도 문제없다. 흑룡이 받아들여 줘야 가능한 얘기지만. 여성은 흑룡을 응시하며 답을 기다렸다.
//쓰다 보니 길어지고 늦어지고 난리네요8ㅁ8 읽다 기 빨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_.)... 맛있는 밥과 왕족 안 부러운 온천욕이 보장된 평생 직장이라,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는 졌어요XO 쪼꼬미 운디네 >>114에서도 커엽더니 귀염뽀짝한 데가 있네요:) 그런데 남기신 테마곡은 제가 못 찾았습니다8ㅁ8...제목 알려 주시면 검색해서 들어 볼게요!
"고작 그 정도가지고 정령들이 이정도로 친밀감을 가지는건 극히 드문일이야. 그대들 인간 말로는, '0퍼센트에 수렴한다.'라고 할 수 있지. 모든 일에는 항상 원인과 결과가 있다지? 그대는 한번 정확히 자신에 대해 직관 하는 것이 좋을거 같다고 생각한다만...."
그가 버릇마냥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재차 열었다. 확실히 희귀했다. 자신 또한 정령왕들과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종족을 생각한다면 아주 어려운 일만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지 않은가, 실제로 다른 피가 섞였다고 하기에는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자신이 직접 세부 조사를 해보면 된다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사안을 개인의 허락 없이는 진행하고 싶지 않은게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어린 물의 정령을 따라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각종 정령들이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한없이 맑은 눈들이 그녀를 경계심없이 바라보고 어느새 쫄래쫄래 다가와 그녀를 올려다 보기 시작한다. 조그마한 난쟁이 같은 노움, 작은 새끼 도마뱀 같은 샐러맨더, 운디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지 장난기 가득한 실프, 그 외에 각종 여러 종류의 정령들이 어느새인가 그녀의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대가족같은 모습에, 그는 신기함 반, 인자함 반이 담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말이 고용이지, 동업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네. 물론 금전 뿐만이 아닌 여러가지 방면으로 지원을 예상중이니.... 일단은 자네의 제안에 수락을 더하며 이것을 넘겨주지."
그가 천천히 고서를 내밈과 동시에 자그마한 명판 하나를 책 위에 올려두었다. 백금의 판 위로 금으로 하나하나 새겨둔 여러가지 마법진들은 한눈에 봐도 고급지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어느새 식사를 어느정도 끝마쳤다는 것일까, 용은 어느새 여성형 갑주의 리빙아머가 따라주는 홍차를 한모금 마시며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긋한 내음, 속 안으로 퍼지는 따스한 기운,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차를 매번 마시는구나 싶다. 인간의 문화 따위 배워봤자 어디 쓰냐는 것이 동족들의 입버릇이었지만, 그 인간 문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은 다름아닌 우리 용족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린뒤 한모금 들이키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책 한권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그건 요람의 출입증이자, 허가증이라고 해두겠네."
그가 조용히 한쪽는만 반개한채 그녀를 장난스레 바라본다. 사실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저 슬슬 자신도 나가봐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질 수 있으니 이 요람의 부관리자겸 지금 그대로 진행하던 연구를 계속 하면서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의견을 내고 피드백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은 다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인물이 해도 된다고는 하지만, 역으로 그녀가 자신의 마음에 들었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즉 다른 인물들이었다면 진즉에 축객령을 냈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그녀가 자신의 가능성을 얼마나 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내기해도 좋네. 그대가,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게 빠를지, 아니면 내가 의견을 철회하는 것이 빠를지 말일세. 역으로 나도 하나 제안하겠네. 1달 뒤, 내가 그대에게 제안하러 오겠네. 그 때 그 명판을 나에게 건넬지, 아니면 그대가 가질지 정하는 것이야."
속으로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안을 수락하기를,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이 요람을 책임질 제 1 사서겸 관리인이 되기를 말이다. 그녀는 그녀 본인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당장 정령들에게 저렇게 사랑받는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그녀의 가치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그녀 자신은 그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당장 용이 바라본 그녀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돼지들 어금니에 겨우 간당간당하게 걸려진 '흑진주 반지'였다. 주인도 제대로 없는 물건이라면 그 가치를 아는 존재가 써야됨이 바람직하지 아니한가.
"어떤가? 수락해보겠나?" ─언니, 여기서 지내는거야? ─큐르르.... ─같이 더 노는거지?
그의 질문과 동시에 정령들의 소란스러움이 배가된다. 사실 그로서는 가볍게 말리고 싶었지만, 저렇게 정령들이 신나하는 것도 볼만한 장면이었으니 가만히 놔두는 걸로 답변을 기다리며, 리빙아머에게 조용히 그녀의 와인잔을 치우고 우유를 넣은 홍차에 각설탕 몇개를 같이 대접해 주라는 명령을 내린뒤 그 따스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특전 : 아가씨도 호문클루스로 여기 박?제 된다고요? 참고로 말이 대학원생이지 원하는 연구 마음대로 해도 되고, 성과 안나온다고 난리도 피우지 않습니다! 써놓고 보니 저도 부럽네요 젠장 그렇게 운디네를 비롯한 각종 정령들에게 관심받게된 아가씨올씨다.... 정령 얼라들의 야단법석 공격!! 효과는 읍읍 여담으로 곡은 james paget의 possibilities입니다, 휴식 시간 끝나서 올라가는 것만 보고 껐더니 결국은 안올라 갔나 보네요 ㅂㄷㅂㄷ 혹시 모르니 한번 더 링크로 올려봅니다! 추가로 tiberian son의 the devil's spear도 포함되요! 전자는 그가 탐구하고 명상하는 분위기라면, 후자는 연구하면서 그가 인간들에게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간찬가가 극도로 표현된 거라 보시면 됩니다!
>>132 흑룡은 정령에 대한 여성의 추측을 부정하며 여성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길 권했지만, 도무지 건덕지가 없었다. 마법 재능이 없는 건 확실했고,(있었다면 하늘을 날아서 통학하거나 한겨울의 빙판길을 녹이는 식으로 쏠쏠히 써먹었을 텐데. 오늘도 암벽을 타는 대신 마법을 쓰지 않았을까?)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영적 존재라고는 못 봤다. 그렇다고 가문에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일화조차 전혀 없었다. 흑룡의 말마따나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나, 규명해 내지 못한 원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여기 오기 전엔 정령 비슷한 존재도 본 적이 없고, 저희 집안도 대대로 농장을 일구어 왔을 뿐 정령과는 접점이 없어서요." 그래도 단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는 못한 듯 여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곱슬곱슬한 금발을 꼬았다 폈다 하며 덧붙였다. "제가 매사 진지하게 반응하니까 어린아이나 동물이 잘 따르는 것 같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제더라? 점심으로 흰 빵을 먹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오기에 조금 떼어 줬더니, 그 고양이가 동료들을 떼로 데려와 그 빵을 통째로 내주고 만 적이 있었다. 그러고 돌아가나 했는데 또다시 찾아오는 통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가며 먹을 거 없다고 떽떽거렸었지. 그때 동기가 넌 무슨 고양이를 사람처럼 납득시키려고 하냐고 웃어 젖히고는 그런 말을 했었다. 정말로 짐작 가는 게 없다 보니 꺼내 본 소리지만, 이런 게 과연 정령과도 상관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온갖 정령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여성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평생 볼 정령을 오늘 다 보는 거 같네. 저쪽도 인간을 직접 보긴 처음인 걸까? 궁금증이 이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니 눈 둘 데를 모르겠다. 여성은 발개져 가는 얼굴을 두 손으로 반나마 가리고는 파란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그때 흑룡이 다시금 귀가 의심스러워지는 소릴 꺼냈다. 동업?? 내가 기적적으로 일을 잘해서 여기 평생 머문다 해도, 용에게 그 시간은 아주 잠깐 아닌가?
"..저, 아시겠지만, 인간은 백 년도 살기 힘듭니다. 그런데 동업이라니요? 여길 평생 관리하실 거 아닙니까?"
'저만큼만 사시고 마실 거 아니잖아요?!'라는 소리까지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수천 년을 사는 용에겐 악담도 그런 악담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진짜 무슨 생각이지? 일그러진 표정에 드러났을 심정이 흑룡에게 읽힐까 봐 여성은 두 손으로 온 얼굴을 가렸다. 그리하여 눈에 뵈는 게 없어지자 (불가해한 상황은 그대로지만)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근차근 머리가 굴러갔다. 아까 용이 여러 종족의 호문클루스를 만들겠다고 했으니, 아마 인간형도 만들겠지? 혹시 그걸 날 본따서 만들려는 걸까?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흑룡의 목적이라면 확실히 그도 얻는 게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왕 인간형을 만든다면 굳이 자신을 본뜰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인간 중엔, 아니 인간 전체까지 갈 것도 없이 연구원 동기들만 보아도 자신보다 훨씬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한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왕립 연구원인 만큼 여성도 자신의 지성이 여느 인간보다 낫다는 자부심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흑룡이 만들 호문클루스는, 모르긴 해도 요람을 안내하는 인간형 대표 비슷한 존재일 것 같았기에, 보다 유능한 인간을 본따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얼굴까지 가렸으면 아마 모르려나?) 흑룡은 책은 물론 요람의 출입증까지 주겠다는 소리까지 태연스레 했다. 미치겠네.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고 보니, <카다로스 제국사> 위에 한눈에도 신비스러워 보이는 문양을 금으로 새겨 놓은 백금판이 놓여 있었다. 철판 깔고 받아도 될지 재고해 보라고 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흑룡은 어쩐지 즐겁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자신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라며 출입증을 돌려줄지 말지는 1달 뒤에 정해 보라고 제안했다. 1%의 차이로 인한 불확실성도 불안해하던 용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건 어째서일까?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정령들이 제각기 여기서 지낼 거냐고(인간의 언어로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었지만) 물어 왔다. 신기하기도 하지, 초면이고 잘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여 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기대에 찬 눈들을 보고 있자니 까짓거 한번 해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1달이니까. 별로면 관두겠지. 인간의 평생도 용에겐 잠깐인데 1달쯤이야, 시간 낭비랄 것도 없을 거다. 무엇보다,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다. 여성은 마법 기사가 잔을 치우고 차를 내오는 동안 잠자코 있다가, 기사가 물러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흑룡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1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특전 때문에 오히려 더 망설인 소심이 연구원 씨였네요ㅎㅎ 그랬다가 정령들의 폭발적인 호응에 대범(??)해졌습니다ㅋㅋ 막레 분위기인데 이대로 마무리해도 어울릴 것 같고, 내키시면 용님의 반응으로 마무리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링크해 주신 노래 좋네요 오늘 종일 들었습니다:) 멜로디가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라 용님한테 잘 어울리는 곡 같습니다 the devil's spear라는 곡도 뭐랄까 끝없이 비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용님이 인간들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했고요 용님을 보다 보니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줘서 벌 받았다는 프로메테우스가 생각났는데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개입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알려 주셔서 더 그런 듯합니다ㅎ) 그래서 메타적으로 또 궁금해진 게, 요람을 통해 용족 고유의 지식이 타 종족에게 전해질 경우 용님이 무슨 불이익을 받게 되는 건 아닌가요?
여인의 당연스러운 반응에 그는 결국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연구자 특유의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깊게 고민에 잠긴 듯한 그의 모습에서는 마치 세상 만물을 뒤지겠다는 듯한 강렬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고 그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지식이 흘러들어가고 다시 흘러나가며 여러가지를 톱니바퀴 짜맞추듯 흘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첫 톱니바퀴를 끼우려던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 손님 대접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상념에서 순식간에 벗어나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그녀에게 건넨 출입증을 보았다.
"뭐 여러가지로 마법처리를 해놓아서, 그거 아마 그대밖에 못쓸걸세, 혹여나 남에게 강제로 양도하거나 도둑을 맞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녀에게 말을 덧붙인다. 애시당초 여러가지를 떠져본다면 아마 그녀보다도 더 나은 선택지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감이, 그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이번 결정이 아마 이번 요람 계획의 가장 큰 첫 단추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한 직감은 전혀 틀리지 않아왔고 지금까지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중 하나였다. 정령들의 행동도 그의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정령들은 본디 마음이 깨끗한 이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저렇게 친근한건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령들의 시선 만큼은 자신의 그것보다도 맑고 투명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이 아이들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앞으로 요람을 책임질 한 팔을 자신의 곁에 두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 결정이야 말로 분명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찻잔을 기울였고,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여인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기에 응한 것으로 알겠네, 자네가 이기면 이번 제안을 없던 것으로 하고 내가 이기면 자네는 이 요람에서 지내는 것이네."
아마 여인은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딱히 인간세상에서 지내는 일을 제한한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있어서 좋은 조건만 내세운 셈이니까, 물론 그라고 해서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니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 하면서 그는 정령들의 환호를 받는 여인의 모습에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제 1 서고 관리자 겸 수석 비서, 오늘부터 견습 1달간 잘 부탁하겠네."
그 빙긋 웃어보인 미소 속에서 장난기와 절대 지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보인 것은 절대로 착각이 아닐 것이리라.
//그래서 마무리 지어드렸습니다!! 메타 발언으로 질문을 답변 드리자면 위에서 성향중에 요르문간드로 답변이 가능합니다. 애시당초 그런 구조를 제대로 들은 기억도 없거니와 만에 하나 누가 그거가지고 태클을 건다면 아마 아주 당당하게 '몰?루 내가 왜 그거 들어줘야 함? 지식은 나눠서 커지라고 있는거지 스투마냥 뭉뚱그려놓고 끓여 먹으라고 있는거 아님.'이라고 답변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애시당초 그런거 신경 안썼으면 요람도 안 만들었을꺼고 만들더라도 이렇게 대책없이 크게 만들지 않았을거 같습니다!! 괜히 머리 복잡하게 해드렸던건 아닐지 걱정 반인데요! 재밌으셨나요? 재밌으셨어야 할텐데!! 8□8
//마무리 레스와 답변 감사합니다! 세상에 개입하면 벌을 받지만 지식을 유출한다고 벌을 받지는 않는 거군요 인간들한테 불 줬다가 간 뜯겼다는 프로메테우스와는 확실히 다르네요ㅎ 묻힌 줄 알았는데 이어져서 기뻤고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글 쓰는 게 느려서 칼답까지는 못 드렸습니다만 답텀 나름 준수하지 않았나요?ㅋ 답텀은 그짓말을 하지 않습니다ㅎㅎ 그런 의미에서 용님 오너님도 즐겨 주신 거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즐참치하시길!!
뭐,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흘끔 살펴본 당신의 얼굴에는 선명하진 않더라도 분명 미소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자리해 있었다. 제 말의 어디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일까?
당신의 제안에 그는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마치,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는 거죠?'하고 묻듯이 당신과 밴드부 공연 티켓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흡사 태양이 역행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사람 같다. 어쩌면 당연하다. 우주에 가본 적 없으며, 가볼 계획조차 없다 이야기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해 봤자 몇 분이나 지났겠지. 그런데 당신은 그에 대고, 그렇다면 저를 따라 우주에 한 번 와보라 손 내밀고 있었다. 황당무계한 소릴 하고 있었다. 골치가 아플 정도다. 그는 당신과 티켓을 한 번 더 번갈아 본다. 흘러 내려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생각한다.
…더 골치 아픈 사실은, 그 황당한 말에 제가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게, 내가 당신은 태양을 닮았다고 말했잖아. 그는 속으로 한탄하듯 독백한다. 스스로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것도, 사람을 매혹하고 마는 것도 태양을 닮았다니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네요."
그리고 난 그래서 당신같은 싫어.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는 사람처럼 그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글쎄요, 그러니까…"
목소리 끝이 흐려진다. 영 자신감 없는 사람처럼 그는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을 혀로 축인 후에야 말을 이어 한다.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역시 겁부터 덜컥 나는데 말이에요."
그는 옅게 미소 지었다. 애써 긴장을 풀려 하는 사람처럼 조금은 경직되어 있다. 그래, 당신 같은 사람은 역시 싫다. 옆에 있으면 속절없이 휘말리게 되고 마니까. 폭풍 옆의 나비처럼 어느새 휩쓸리게 되고 말아서.
"뭐, 음, 그래도 한 번쯤이라면…싶기도 하네요. 무섭긴 매한가지지만요. 탑승자 대신 참여-관찰자 정도의 위치는 안 되냐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싫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신이 건넨 티켓을 건네받았다. 잠시 티켓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던 그는 한마디를 더한다.
"역시 따진다면 당신은 선장이 맞는 것 같아요. 이런 식의 제안을 건네는 건 아무래도 선장의 몫이잖아요?"
겁난다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경쾌한 목소리다.
/먼저 답레가 정말 늦어버려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번 구정 전후로 일이 많아 바빴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늦는다고 글이라도 하나 남겨놓을 걸 그랬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37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답이 늦어 죄송해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죄송한 말이지만, 상황극은 여기서 종료해도 될까요? 🥲 물론 핑퐁하면서 정말 다음이 기대되고 즐거웠지만.... 현생에 쥐어짜인 머리가 굳어서인지 더이상 아이디어도 생각나지 않고 또 간단하게 캐릭터를 짜다 보니 더 나올 것이 없다 판단 되어서요 🥹
한 발 앞으로 내딛자, 거친 바람이 일거에 잦아들었다. 내내 등반을 방해하던 폭설은 바람이 사라지자 포근한 함박눈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었다. 그 고요한 무풍지대 안으로, 좁지만 평탄한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험준한 등반로를 무색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무수한 등반자들의 시신을 품에 묻은 대륙 최고봉의 정상이 이렇게도 평범하고 안온한 모습이라는 아이러니가 지친 여행자를 조금은 허탈하게 만든 모양이다.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은 그녀는, 그대로 앉아서 거친 산행에 너덜너덜해진 코트를 갈무리하며 조금이나마 숨을 골랐다. 이미 오를 경사도, 겪을 고난도 남지 않았지만, 평지를 느긋하게 걷는 평범한 산책마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여행자는 휴식에 굶주려 있었다.
그대로 앉아 있으려니 당분간은 일어날 생각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등산루트 중이었더라면 그 풀려버리는 긴장이 즉각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스위치로 작용했을 터이지만, 지금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다만 체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품에서 조금의 건조된 식량을 꺼내어 입에 넣은 채로, 여행자는 보다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문득 등에 매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툭 치고서는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있으면 너를 살릴 수 있어."
마치 누군가에게 대화를 걸듯이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순간 간절함이 비쳤다.
"네가 깨어나면, 해주고픈 이야기가 내게는 잔뜩 있는 걸.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계속 중얼거리던 여행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던 직전까지에 비하면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다시 생겨났는지, 여행자는 곧장 상자를 고쳐 매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곧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난 여행자는 힘찬 보폭으로 설경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143 (스승의 목소리에 담긴 복잡미묘한 울림을 알아들었는지, 그 존재는 한순간 쓰라린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조용히 깨물었다. 가까이 오라는 스스승의 부름에도 걸음은 선뜻 나서지 못 하고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스승님. (그는 한 걸음도 떼지 못 한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말하고 고개만 숙였다.)
의외로 마른 몸은 저항 없이 가볍게 이끌리며 난간에서 멀어지고. 그래, 언제나와 똑같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네가 대답하고, 그러면 난간에서 내려오고. 얼굴을 마주한다. 죽고 싶으면 자신이 죽은 뒤에 죽으라고. 예의 평온한 얼굴로 멀뚱히 무언가 생각하는 듯, 당신을 관찰하는 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아하핫! 자그락거리는 햇살같은 웃음소리, 시선을 피하는 당신의 얼굴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는다. 그래, 너에게서 이런 얼굴, 이런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게 좋았다. 짓궂은 마음은 몰래 숨기고.
"햇빛이 이렇게 좋은데도."
퍽 아쉬운 얼굴. 과연, 아직 쌀쌀한 한기가 다 가시지 않은 날들이었다. 초봄.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 곧 생명이 약동할. 난 바보라서 감기 잘 안 걸리는데? 설득력 없는 변명 따위를 늘어놓으며, 그러나 어깨에 걸린 당신의 외투는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끄트머리를 그러쥐고.
나지막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기색이 어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여행자를 막아서듯 울렸다. 한 남성이 기척도 없이, 가깝지는 않으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30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남성의 체격은 여행자보다는 조금 큰 정도였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회갈색 털옷으로 온 몸을 감싼 데다, 상의에 달린 후드를 꾹 눌러쓰고 있어, 드러난 것은 가무잡잡한 피부와 다부지고 각진 턱선, 길고 번듯한 코, 꾹 다물려 단호한 인상을 주는 입술 정도였다.
"저는 이 산 정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곳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후드 밖으로 드러난 남성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어투에서는 제 주거지를 방문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묻어났으나, 적의는 서려있지 않았다. 남성의 떡 벌어진 어깨 너머 눈 발 사이로, 지붕에 눈이 하얗게 오두막이 한 채 보였다. 그가 사는 집인 모양이었다.
어때, 제법 근사하지. 같이 온 건 네가 처음이야. 당신의 손을 놓고 들판 한가운데 풀썩 주저앉는다. 근처에 피어 있는 이름모를 들꽃들과 작은 풀 따위들을 쓰다듬듯 어루만지다가, 이윽고 옷자락에 스치던 토끼풀꽃 몇 송이를 꺾어 들었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꺾어 든 꽃송이들을 서툰 손놀림으로 차례차례 매듭지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꽤 멋드러지게 형태가 잡혀 간다. 누구였으면 좋겠는데?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묻고.
"나랑 영원히 같이 있기로 한 애 있어."
손에 들린 그것은, 어느새 토끼풀 꽃 한아름으로 장식한, 작고 소담한 화관이 되고. 어린아이의 머리에나 딱 맞을 것 같은 그것을 자랑하듯 들고 있다가, 당신의 머리에 씌운다. 사실은 얹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봄 햇살같은 웃음소리.
들판 한가운데에 풀썩 주저앉는 네 모습에 생각난건 돗자리라도 가져올껄 그랬다, 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다니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가 꽃송이를 꺾어서 매듭 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이제 앞으로 같이 있기로 했으니 비밀을 공개하기로 한거야? "
네 손에서 토끼풀꽃이 조금씩 이어지고 서툰 손짓에 비해서 조금씩 나타나는 것은 꽤나 유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되묻는 너의 말에 나는 그저 작게 미소 지으면서 토끼풀꽃을 나도 같이 꺾었다. 네가 가져간 양에 비해서는 적었지만 이 정도로도 내가 원하는 것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손에서 금세 다 만들어진 것은 어느새 내 머리 위에 얹혀져 너의 웃음소리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 잘 어울려? "
거울 앞에서 자세를 취하듯이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장난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나도 무언가를 손에서 엮어낸다. 너보다도 더욱 서툰 손놀림이라 이렇게 큰 화관은 만들지 못하지만 자그마한 것은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나는 너에게 손을 내어달라고 말하며 만든 것을 보여주었다.
당신의 장난스런 모습을 보며 까르르, 가볍게 박수를 치고. 화관이 작아 조금 우스운 꼴이 될 수는 있겠으나, 어쨌든 당신와 이 들판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은 진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같이 올 걸 그랬다. 화관도 씌워 주었겠다, 다음은 팔찌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볼까 싶어 들풀을 살피고 있던 그때에.
꽃반지 낄래, 너의 손에서 생각지도 못 했던 것이 등장한다. 무언가 엮는 것 같기도 했으나 화관을 완성하느라 채 신경을 못 썼던 탓이다. 반지를 마주하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 익숙한 웃음 뒤에 무언가를 숨길 준비를 하기 위해. 침묵은 아주 잠깐이었다. 시선을 들어 당신의 눈을 본다.
"좋아."
어쩌면 목소리가 조금 떨렸나, 눈치 못 채기를 바랄 뿐이다. 얼굴에 띄운 그것은 분명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손을 대면 부스러질 듯 기묘한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해 주셨던 옜날 이야기인데, 달은 태양의 고백을 듣고선 '모르겠다'고 답했다더라.
"네가 좋아."
중력에 휘둘리는 위성 따위보단 네 지적 수준이 더 낫겠지, 적막을 뚫고 찢겨나온 내 한 마디에 무어라 답 해야 할지는 넌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알아야만 한다, 우리를 에워싸 웅성이는 마을 주민들이 있으니까.
채 식지 못해 온기가 감도는 누군가의 몸뚱아리를 안고 주저앉아 있던 너는 상황에 겉도는 내 몰상식한 언행에 뭐라 답을 할까? 네가 도리에 맞는 말을 해 올 것은 알지만 그게 뭘진 모르겠다. 난 무릎을 굽혀 땅에 손을 딛었다. 네가 안고 있던 그것에게서 흘러나온 피는 흙 위에서는 마찬가지로 어둑한 것이 존재감 흐릿했던 것이, 내 손에 묻고 나서야 비로서 존재를 과시한다. 차분했던 나의 행동거지와는 반대로, 내 등에 매여 있던 소총은 내 중심이 낮아지면 느슨해져 그대로 땅으로 떨궈진다. 둔탁한 소음은 축축한 흙에 의해 어느 정도 무의미해졌다.
"13번째 구역 도살장의 장남, '코리엔더'는 널 연모하고 있어."
주변의 웅성임은 더 이상 네가 품고 있는 시체로 향한 것이 아닌, 나에게로 향해있다. 땅에 처박혀 있던 소총을 다시금 집어들어 탄창을 간다. 이질적인 금속의 철컥거림 후에 나는 다시 발음 하나 하나 명확히 뱉기 시작했다.
"답은 지금."
//아무렇게나 이어도 다 좋으니까 편하게 이어줘! 설정도 맘대로 해도 좋다! 헝거게임에서 모티브 얻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이어도 괜찮으니 !!찐심!! 편하게 이어주시라~
>>159 놓아버릴 뻔한 정신을 붙들고, 가까스로 벌어진 일을 받아들였을 때 들려온 말에, 귀를 의심했다. 느닷 없는 고백. 그리고 대답을 강요하는 말. 순간적으로 살의가 치솟았으나, 이내 사그라들었다. 제 품에서 싸늘히 식은 그와 자신은 연인이었다. 서로 잘 맞기도 했고, 시청자들의 동정이라도 사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관계였지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에 속편한 연애질은 무리였어도, 서로 걱정하고 챙기는 마음만은 언젠가부터 진심이 되어있었다. 실제로 기존에 바라던 바를 이루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를 바라는 여론도 우세해지던 참이었으니까. 그래봤자 총 한번 잘못 맞으면 시청자 여론이고 뭐고 다 부질없어지는 건데. 그래도 살고 싶겠지. 이해 못할 심정은 아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귓가에 탄창을 장전하는 소리가 스친 것 같았지만, 아랑곳 않았다. 이미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인 시신을 더욱 바싹 그러안았다. 그러고서 입을 열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른 사람 알아봐."
어떤 저의로 말했든 협조해줄 수 없다. 이만하면 맥락상 부자연스럽지도 않고 저 녀석도 대충은 알아먹겠지. 둘 중 하나가 죽어도 살아서 나가자는 이야기도 나눴었던 게 머릿속을 맴돌았고, 장단을 맞춰주면 생존 가능성이 올라가리란 것 역시도 모르진 않았지만, 온 몸이 무거워서일까,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탄창을 간 소총을 내리숙여 네 머리를 향해 조준한다. 내 사격 실력은 놀랍도록 평범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갓난아이도 개미를 잡을 수 있을 테다. 난 방아쇠에 닿아 있던 검지손가락을 느릿히 휘적였다. 탁, 탁. 철조각에 살덩이가 닿아 내는 규칙적인 사분의 삼박자.
전날 밤, 한참 너희들을 추적하던 도중 실세 그룹에게 물자가 내려왔었다. 그걸 보낸 스폰서의 말을 듣자 하니, 너와 그 남자가 함께 우승하기를 바라는 여론이 우세하던 것 같았다. 핏바람 부는 것과 연애질을 동시에 보고 싶다니, 부잣집 취향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일전의 독극물 묻은 칼에 스쳤던 허릿춤이 아려오는 느낌에 나는 다시금 이성이 차게 식는다. 내게 이 작전을 맡긴 실세 그룹원들의 악독함이 선명하다.
"네 달링의 죽음은 애도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도 살고 싶어."
미적거리던 손가락은 이내 단단히 방아쇠를 감싸안았다. 내 눈은 늘상 흐리멍텅하여 도축당할 돼지를 닮았다더라, 지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내 눈매에 힘이 들어가며 찌푸려지는 것은 느껴진다.
"너와 그 남자, 우승하길 바란다는 여론이 달궈졌더라. 이걸 들은 1구역 남자애는 너희를 살려 두면 너희 쪽으로만 보급이 갈 거라 생각해, 날 이쪽으로 붙인 거야."
"우리들에게 대중의 화가 돌려지더라도, 적어도 너희들이 우승하지는 않게 두겠다는 거겠지."
들은 바로는 그러했다. 천박한 망나니가 어려운 걸 알아 듣겠냐며 키득이던 누군가가 뇌리에 일렁였다. 나는 목구멍에 응어리진 울분을 억지로 삼킨다.
"내가 그들을 배반하고 우리가 협업한다면, 군중은 우릴 지지할 거야. 가혹한 실연의 아픔을 격은 너와, 더럽고 추악하게도 이기적이여서 태생부터 개망나니인 나. 절망적인 연애는 언제 보든 즐겁다더라."
요컨대 너와 팀을 맺으면 시청자들의 콩고물도 떨어지고 실세 그룹을 꺽을 수도 있을 발판이 마련되니, 나는 좋을 꼴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잔인한 말을 하면서도 말투 하나 변하지 않는다. 내 눈에 너는 고깃덩이를 안고 있는 동물 찌꺼기일 뿐.
너와 지낸 시간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 잠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허나 침묵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익숙한 미소가 네 얼굴에 감돈다. 하지만 너와 지낸 시간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네 목소리가 아주 살짝 떨렸다는 것은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 손 줘봐. "
그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진 알 수가 없고 너의 미소는 어떤 방향으로던 충격을 주면 부스러질 것 같아 나는 아까도 잡고 있던 네 손을 살짝 잡아서 손에 올려두었다. 어느 손가락에 들어가야 크기가 꼭 맞을까, 하고 이리저리 끼워보니 우연찮게도 너의 약지에 크기가 딱 맞더라. 꽃줄기가 약해 혹시나 끊어질까 조심조심 너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본다.
" 잘 어울리네. "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선 머리에 얹어두었던 화관을 네 머리에 조심스럽게 올려본다. 나한테는 작았던게 너의 머리에는 더욱 어울리는 것이 마치 이 모든 들판이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듯 하다. 그렇게 너의 손엔 반지를, 너의 머리엔 화관을 올려둔채 너의 옆에 앉아서 저 멀리 보이는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 증표야. 아까의 약속에 대한. "
비록 보잘것 없는 들꽃으로 만들어져 금방 시들어버리겠지만, 그 의미만큼은 네가 알아주길 바랬다.
왼손 약지.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기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딱 들어맞고. 손가락 위에 내려앉은 작은 꽃송이 하나가 어찌 이다지도 사랑스러운가.
"...예쁘다."
당신이 화관을 씌워 줄 때까지,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곧 시들기라도 할 것처럼 꽃송이에 손도 대지 않고서 말 없이 눈에 그것을 담았다. 먼 풍경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을 피해서, 그래,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리곤 당신의 어깨를 향해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툭. 이런 얼굴은 보이기 싫으니까.
내가 화관을 머리에 씌워줄때까지도 너의 시선은 곧장 내가 만들어준 반지에 가있었다. 서툰 솜씨로 만든 것치고는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의 옆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네가 어깨에 기대는 느낌이 들어 몸을 조금 움직여 좀 더 편한 자세를 할 수 있게 해주려 할 때,
" 그러니까 좀 더 따뜻해지면 나오자고 했잖아. "
이런 순간까지도 이런 말 밖에 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그럼에도 너의 어깨에 손을 둘러서 품으로 끌어안아준다. 네가 얼굴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아 가슴팍에 네 얼굴이 묻히도록, 하지만 답답하지 않게. 조금의 바람이라도 너에게 흘러갈까 어깨에 걸쳐있던 외투도 좀 더 단단히 여며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서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 지금은 행복해? "
내 행복은 너의 행복이 기준이니까. 너가 웃고 기뻐하는 것이 나에겐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그렇기에 너를 만나고서 오늘 처음으로 나는 너에게 행복을 물었다.
>>161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조용한 가운데 쇳덩이를 가볍게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거슬리게 느껴졌다. 맥락도 없이 시청자들이 좋아할 법한 대사를 내뱉은 남자-이름이 코리엔더였던가. 나 고수 싫어하는데.-의 총구가 나를 향한 것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절망적인 사고만 맴돌던 머릿속에 의문이 비집고 들었다.
코리엔더는 자신을 우리 구역으로 보낸 배후를 배신하고 나와 러브라인을 형성하면 자신이 살아날 수 있을거라 믿는다. 그 이유는 절망적인 연애사는 인기가 있고, 시청자들이 지지하면 생존에 필요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녀석의 머릿속에 있는 러브라인 구도를 시청자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정선이라는 건 맥락을 타기 마련인데, 살고 싶다느니, 군중은 우릴 지지할 거라느니, 이런 시청자에게는 불필요한 정보가 공중파를 탄 마당에 어떻게 여론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래, 코리엔더. 비록 네가 바라는 건 못 들어주겠지만, 그 대신 "사랑" 먼저 해본 경험자로서 조언 하나 해주자면, 나랑 이 친구는 제 4의 벽을 넘는 발언은 공개적으로 안 했어. 지금이랑 비슷한 대화를 안 한건 아닌데 몰래 필담으로 했지. 연인이 되기 전까지는 관계가 돈독해지는 맥락도 많이 고려했었고. 내 생각엔 그래서 시청자들이 몰입해 준 거 같아."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치고는 퍽 평온하게 들리는 투로 말하며, 시체에서 눈을 떼고 코리엔더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마를 똑바로 겨눈 총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래. 뭐 죽을 때까지는 종영이 아니니까 앞으로 만회한다 치자. 그런데 난 네 제안이든 협박이든 받아들이고 기운을 뺄 이유를 못 찾았어. 왜냐면 생존이 지금 나한테 그렇게 큰 메리트가 아니거든. 시도는 좋았는데, 거래 상대가 어떤 상태고 뭘 원하는지도 고려하면 원하는 걸 얻어낼 방법을 찾기가 더 쉬울거야. 그리고 꼭 그 절망적인 로맨스를 하는데 다른 사람으로는 안되고 정 내가 필요하다면..."
방법이 있을까? 살해 협박을 당하고 있음에도 진지하게 대안을 찾아주는 제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그 와중에도 단 하나의 대안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방아쇠를 당기고 내 시체랑 하는 걸 추천할게. 살아있는 나보다 더 임팩트가 클거야. "
세상을 뒤엎어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쟁이 있었던 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종족간의 갈등과 서로 멸하고 말겠다는 그 살벌한 분위기조차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였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뒤에서 서로 종족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추악하기 짝이 없는 무리가 토벌되었고 모든 오해가 풀려 다시 각 종족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를 멸하려는 그 현상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모였고 그들은 정말 열심히 싸움을 말리며 때로는 강력하게 대응하기도 하며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등, 정말로 열심히 활약했고 기어이 평화를 되찾았다.
허나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것을 빌미로 부와 명성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고 지금의 평화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아는 이는 각 종족을 다스리는 왕이나 일부 귀족들, 그리고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일부 이들, 그리고 함께 힘을 합쳤던 그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모였던 이들 정도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보단 지금의 이 분위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던 이들은 자연히 하나둘 자신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흩어졌다. 허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정말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이전과는 다르게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었다. 실제로 몇몇은 머지 않아 다시 만나서 새로운 모험을 떠나기도 했었고.
인간족인 이 사내 역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이들 중 하나였다. 용족, 마족, 엘프족, 드워프족 기타 등등. 정말로 많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순간이 아직도 바로 전 날 같았으나 벌써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너무 많이 주목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황가에서 주겠다고 한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그냥 가볍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어느 정도 받은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의 경비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활약상을 알기는 했으나 그의 뜻에 따라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굳이 소개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조용히 이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응? 날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 "네. 만나보시겠습니까?" "응. 그러지 뭐. 굳이 만나고 싶다고 하는 이가 있다고 하니까."
어느날처럼 막사에 앉아 경비대 일을 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다는 그 말에 사내는 만나보겠다고 자신의 부하에게 이야기했다. 누구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면회용 방으로 향했다.
"네. 제가 이 마을의 경비대장입니다만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왔는데."
방으로 들어서며 그는 일단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찾아온 이를 확인하려고 했다.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다 or 도저히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장벽을 강하게 친다 or 전쟁을 다시 일으킬 생각이고 널 죽일 것이다 라는 느낌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괜찮으니까 자유롭게 이어도 괜찮아. 누가 찾아와도 상관없어! 옛 동료도 좋고 황가에서 또 돈과 명예를 주겠다고 찾아와도 괜찮고 하다 못해 그냥 친구나 아예 모르는 이라도 상관은 없어. 다만 분명하게 사내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라는 설정만 있으면 될 것 같아.
>>172 경비대장이 방으로 들어서자, 면회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앉은 키를 감안해도 작고 마른 체구와, 숏컷으로 짧게 잘라낸 부스스한 레몬색 금발과, 단정하지만 서늘한 인상의 이목구비, 날카로운 눈매 안에 자리잡은 옅은 벽안을 가진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그는 경비대장의 인사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보인 뒤, 입을 열었다.
"바쁘신 중에 실례합니다. 저는 이 마을에 잠시 머물게 된 여행자인데, 마을 게시판에서 경비대원 채용 공고를 보고 찾아뵈었습니다.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요."
대하기 편하다고 여겨지는 인상은 아니니 말투라도 정중히 해보려고 했는데, 어떨 지 모르겠군. 힘 쓰는 직군 중에서는 이 쪽이 페이가 좋던데. 구직활동을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올라오곤 하던 긴장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경험상 긴장하면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더욱 쌀쌀해지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여성은 애써 미간과 입매에 힘을 풀어보고자 노력하며, 차분히 경비대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취직을 목적으로 찾아온 캐릭터로 생각하다보니 마을 게시판에 채용공고가 붙어있다고 해버렸는데, 괜찮을까?
"아. 취업. 그쪽이로군요. 분명히 경비대원 결원이 생겨서 채용 공고를 게시판에 붙이긴 했었는데 그것을 보고 오셨나보죠?"
전쟁이 끝나고 약 일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죽은 각 종족원들의 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즉, 지금은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으며 며칠전에 게시판에 채용 공고를 붙인 것을 떠올리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남성이건 여성이건 어린아이나 노인이 아니라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했으며 최소한의 체력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레몬색 금발 여성은 어떨까. 날카로운 눈매와 벽안이 상당히 인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내는 일단 근처 자리에 앉았다.
"물론 일이야 제공할 수 있긴 하지만 알다시피 마을 경비는 단기적인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쭉 자리를 지켜주면서 일을 해주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지라. 마을에 잠시 머무는 것이라면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 가능하면 얼마나 이 마을에 있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정말로 잠시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계속해서 경비를 서는 이를 구하는만큼 경비대원은 조금 힘들 것 같고 다른 일자리 정도는 소개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인상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적어도 조금 힘들다고 바로 그만둘 인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경비대원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것만 봐도 힘 쓰는 일에 익숙하거나 혹은 거부감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문제는 저 여성이 얼마나 이 마을에 있냐라는 것이었다. '잠시'라는 것이 정말로 잠시라고 한다면 경비대 입장에선 뽑아서 얻을 메리트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선 난색을 표하면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적어도 일 년 정도 이 마을에 있어준다면 간단한 체력 테스트 및 여러 테스트를 하고 조건에 부합하면 뽑을 수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마을 이곳저곳을 보수하는 그런 일도 있긴 한데 그 일은 어떨까요? 그 쪽도 사람은 엄청 많이 구하고 있는데."
/물론 괜찮아! 다만 경비대원이니까 아무래도 잠시 머무르고 가는 사람을 뽑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이렇게 물어보는 쪽으로! 얼마든지 편하게 이어도 괜찮아!
성별 불문, 기재된 나이대에 기초 체력이 된다면 충분하댔던가. 그러고 보니 작년에 전쟁이 끝났다니 한창 어수선할 테고, 그렇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아쉽겠지. 경비대장이 근처 자리에 앉자, 여성 또한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이어, 경비대장은 마을에 얼마나 머물지를 물어왔다. 장기적으로 근무할 사람을 채용하고자 하기에 마을에 머무는 것이 아주 잠시라면, 채용하지 않는 대신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1년 이상의 장기적인 근무가 가능할 지는 확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물론, 동행하고 있는 친구 역시 오랜 방랑에 지쳐가고 있었기에, 마을에 적응할만하다면 집을 사서 눌러앉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도착해서 하루 이틀로는 이 마을에 정착해도 괜찮을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니까. 페이가 괜히 좋은 게 아니었나 보군. 어쩔 수 없지. 경비대장님 말마따나 일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무리해서 공갈할 만큼 쪼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칠 즈음 경비대장이 일자리를 하나 제시했다. 마을 보수 공사도 일손이 급한 모양이었다. 그럼, 자리가 없을 걱정은 아마 없겠군.
"어제 막 마을에 도착한 참이다 보니, 1년 이상 체류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불확실하군요. 그럼 말씀해주신 일자리를 우선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친절하시네, 전쟁통이고 조건에 맞는 일손도 부족해서 여유 없으실 텐데. 여성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지금이 불확실할 뿐이고 나나 친구나 마을 분위기에 잘 적응하면 눌러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중 일은 모르지만 일단 여쭤나 볼까.
"1년 이상 장기체류할 계획이 생기거나 아예 정착하게 된다면, 그때도 구인 중이시라면 다시 찾아뵙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찮다니 다행이다! 하긴 전후 복구중이니 오래 일할 사람을 뽑는게 합리적이지:3 즉흥적으로 던진 상황인데 잘 받아줘서 고마워!
"알겠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도적이나 불량배들이나 그런 문제는 남아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래 일할 이들을 우선하다보니. 아. 괜찮다면 이걸 가져가서 제시해주면 아마 더 이야기가 쉽게 풀릴 거예요. 일자리 찾는거. 나름의 소개장 같은 건데. 필요하다면 가져가주세요."
이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후에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는 경비대 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고 그 지갑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담겨있는 명함을 내밀었다. 물론 이 자체가 만능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건 전쟁을 끝낸 이들 중 하나로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은 있었다. 아무에게나 줄 순 없었으나 그래도 나름 성실해보였기에 그렇게 어떻게 보면 소개장이 될 수도 있는 제 명함을 내민 그 상태에서 만약 받았으면 사내는 순순히 명함을 줬을 것이고 필요없다고 한다면 지갑에 다시 집어넣었을 것이다.
아무튼 여성의 입에서 아예 정착하게 된다면 다시 찾아뵙고 싶다는 말에 사내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안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오히려 함께 하겠다고 한다면 체력이 확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는 가정하에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지금만 해도 금방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채용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얼마든지요. 아마 그때도 제가 경비대장으로 있을테니 찾아와주세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력 테스트나 다른 기타 테스트를 대충 넘기거나 하진 않을테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해주시고요."
물론 유사업무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경력자라고 봐도 될테니 그렇게 어렵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할 수는 없는만큼 그 부분만큼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외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저나 마을 촌장님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면 이것저것 알려주거나 도와줄 수 있으니 참고해주시고요. 여행자님이 이 마을 주민이 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을에 있는 동안 부디 편안한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마을에서 입지가 크신 분인가보다. 하긴 이런 흉흉한 시기에 경비대장이라면 입지가 좋을 수밖에 없겠네. 나야 나쁠 거 없지. 여성은 명함을 받아 들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친구 녀석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아니다, 그 녀석은 덩치도 좋고 완력도 나보다 나아서 단기 계약도 되고 힘쓰는 직종이라면 문제없겠네. 나는 일단 겉보기에는 비실거려 보이는 핸디캡이 있으니까. 여성의 물음에, 경비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테스트를 대충 넘기거나 하진 않을 테니 각오는 해달라는 말과 함께.
"예, 그때는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직장이었나 본데. 하긴 그럴 수 있지. 종전한 지 1년밖에 안 지났잖아. 마을 분위기가 슬럼가 수준으로 흉흉하지 않다는 건 여기서 그만큼 치안을 확실하게 잡았단 걸 거고. 그러면 채용도 허투루 하지 않을 만하지. 다시 면접을 보러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몸을 좀 만들고 와야겠다. 이어 경비대장의 안내와 환영 인사에, 여성은 한 번 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답했다.
"갑작스레 찾아뵈었는데도 친절하게 대응해주시고 환대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시간을 뺏는 것도 도리가 아니니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슬슬 마무리려나? 막레로 받아줘도 좋을 것 같아! 수고 많았어;D
식별 명칭 : 이스라필 격리 코드 : A1/1G3L 격리 단계 : 파멸급(Catastrophe) 격리 시설 : 파트모스 섬 성당형 격리시설 HA-R1-1-1AG3D01/1
개체 설명 : 키 155cm 추정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소녀 형상. 백색의 깃털을 가진 황새 형태의 날개가 견갑골 아래쪽으로 부터 돋아나 있으며, 그것은 A1/1G3L의 비행을 돕는 날개와 똑같은 기관으로 추정된다. 기본적으로 A1/1G3L은 인간을 허무 혹은 비관적으로 보는 적대적 자세를 취하기에 격리 절차에 따른 격리가 필요하다. A1/1G3L은 항상 협회에서 특수 제작한 마스크를 착용중이며, 이를 벗겼을 시에 그녀는 인간의 목소리와는 다른 파장의 생명체에게 있어서는 가장 이상적인 음색으로 인식된다. 이를 장기간 청음시, 황홀경에 이르며 이후 환각 및 환청 증세를 통해 ██을 ██있어, ██으로 향할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에 이른다. 또한 A1/1G3L는 협회 제작해 착용중인 순백색의 특수격리복을 벗으려고 하는데, 이를 제지하지 않을 경우 구속에서 풀려 여섯의 나팔을 창조할 수 있다. 만약 격리복을 벗은 상태에 이른다면 비상사태 Atto를 실시한다.
격리절차 :
A1/1G3L은 파트모스 섬의 ██████성당으로 위장된 격리시설 HA-R1-1-1AG3D01/1의 지하 30m 아래의 3평크기의 방음벽으로 이루어진 격리실에서 나오는 것을 금한다. 만약 격리실에서 나왔다고 함은 비상사태 Atto를 의미함으로, Atto의 소강이후 다시 해당 시설에 격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상사태 Atto를 대비하여 격리실 15m위에는 상시 출동이 가능한 특수부대 출신의 협회요원으로 구성된 C-Team을 주둔시킨다.
-P급 직원 가이드 라인-
1. 비상사태 Atto를 제외한 일반적인 격리 절차에 있어 협회의 P급 직원은 L급 피험체과 동행하여 격리 작업을 실시한다. 2. L급 피험체는 사형수 및 개인회생이 불가능한 채무자, 생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는 자들을 P급직원 면접하에 채용한다. 기본적으로 면접까지의 과정에서의 채용 정보는 협회의 채용이 아닌, 파트모스 섬의 격리 전염병 환자를 간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장한다. 3. P급 직원은 L급 피험체과 동행하여 A1/1G3L의 기분상태를 확인하고, 최우선적으로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를 교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스크는 매일 협회의 화물비행기를 통해 오직 한 개만이 제공되며, P급 직원은 이를 분실하거나 손상할 경우 즉시 협회 및 C-Team에게 보고해야만 한다. 4. P급 직원은 L급 피험체에게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손상시키지 않게 지도해야하며, 만약 L급 피험체가 이를 손상시키는 시도를 할 경우 즉결처분을 실시한다. 5. 마스크의 교체작업은 L급 피험체에게 지도한다. 6. 마스크의 교체를 마친 직후 새로 배급받은 것이 아니고, 교체하여 남은 마스크는 즉시 특수용기에 담아 폐기하고, L급 피험체와 P급직원은 소독을 실시한다. 7. A1/1G3L이 마스크의 소재에 대해 질문할 경우 그것에 대해 P급 직원과 L급 피험체는 답변해서는 안된다. 8. 마스크의 교체작업이 끝나면 30분간 L급 피험체는 P급 직원의 감시하에 A1/1G3L와 가벼운 대화를 실시한다. 이 대화 작업은 협회와 A1/1G3L 간의 협의 사항이기에 이를 거부할 경우 협회는 P급 직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9. A1/1G3L이 착용한 협회의 특수격리복을 벗으려는 시도를 할 경우 P급직원은 C-Team에 보고하고, L급 피험체를 이용해 그것을 저지해야한다. 저지 실패시에는 비상사태 Atto를 위해 협회 회선으로 빠른 보고를 요한다. 10. 격리작업에 참여한 모든 인간은 A1/1G3L의 목소리에 노출될 경우 자결용 장비와, 처분용 장비를 사용한다. 11. A1/1G3L이 요구하는 마스크의 제거와 격리복의 탈의에 대해서는 일절 기각한다. 12. 그외의 대부분의 A1/1G3L의 요구에 대해서는 협회에 보고한후 허락하는 것으로 한다. 13. 격리와 관련된 모든 인원은 A1/1G3L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를 금한다. 특히 종교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동의 및 반대 모두 금한다.
*A급 직원 이상만 완전히 읽을 수 있는 정보 열람입니다
▣ 파트모스 섬 집단추락 사건 1908년 6월 30일 파트모스 섬 ████ 건물 옥상에서 ██명의 인간이 추락사했다. 추락 이후 숨을 거두기전 피해자 ██의 유언은 마치 ██같은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들렸다라는 정보가 있으며, 목격자 ██에 의하면 ██으로 향할 수 있다고 모두가 큰소리를 지르고는 옥상에서 마치 하늘 향하듯 아래로 추락했다고 증언했다.
-사망자 명단- 이하 이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제██차 비상사태 Atto 생존자 음성기록
C-TEAM ██ : 일단 빌어먹을 나팔... ████의 머리가 마치 수박저럼 터져서 분수를 뿜어냈었지.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C-TEAM ██ : 화재를 진압하려고 했더니 물에 불이 붙는 이상한 일을 겪었지.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C-TEAM ██ : ███가 샛별같은 것에 접촉했더니, 온몸이 쑥처럼 생긴 식물로 변해 죽어버렸어, █는 빛을 잃었다며 울부짖다가 자기머리에 총을 겨눴던가. 나도 따라 죽을걸. 그 빌어먹을 천사를 봤다면 천국같은 곳에 가지않고 죽었으면 좋겠어. 아? 사족은 필요없다고? 빌어먹을.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C-TEAM ██ : 온갓 벌레들이 와서 딱 죽지않을 만큼 괴롭히더군. 못견딘 몇명은 그대로 목숨을 끊었다. 여섯번째 나팔을 꺼내기전에 격리에 성공한건 다행이야. 그게 일어났다면 아마 세상은-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A급 요원 ███ : 인터뷰를 마치고 C-TEAM ██에 대한 은퇴 요구를 허가합니다. 협회의 기억말소작업을 실시합니다.
데이터의 열람이 불가합니다.
....... ...... .....
당신은 어쩌다 이 빌어먹을 곳에 들어온 어린양(Lamb)이다. 어쩌면 사형을 면책해주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작업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일지도. 어쩌면 거대한 빚을 떠안고 더 이상 구제방법이 없어 탕감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바린 이야기일지도. 혹은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정도로 시궁창에 떨어진 이야기일지도.
>>178 꼼짝없이 사형당하는 줄 알았는데 일거릴 주겠단다. 급여도 나오는 모양이었다. 사형수에게 맡기는 업무인 걸 생각하면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위생적으로 역겹거나 셋 중 하나겠지만, 나쁠 거 없겠다 싶었다. 사형수 신세도 벗어났는데 굳이 자살을 결심하고 추진할 정도로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보니.
듣자 하니, 내 직장은 이 곳, 파트모스 섬의 격리시설이고,(뭘 격리하지?) 하는 일은 나와 조를 짜게 된 직원의 지시와 지도를 따르는 거란다. 내가 들은 건 그 정도다보니, 얼마나 어떻게 고된 일이길래 형 집행 일주일을 앞두고 써먹기로 결정하나 궁금하기도 했다. 막상 시작하면 궁금해한 걸 후회하려나? 뭐, 재미 없으면 그만두면 되지. 운 나쁘면 내가 결정하고 말것도 없이 그만둬질 수도 있고.
그래서, 지금은 숙소에서 일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짐이랄 것도 없어서 짐 정리를 할 필요도 없다보니 지루해서 이런 저런 노래가 섞인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금 이런 여유는 솔직히 달갑지 않다. 딴 생각 안 나게 정신없이 일하고 싶고, 그런 건 근무 첫날이 최고인데. 아, 빨리 일하고 싶다.
그런 사형수였던 자의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정장을 입은 초로한 여성이 몇일째 잠을 안자고 자기 관리조차 안된 상태로 숙소로 찾아왔다. 목에 걸린 직원용 식별카드에는 분명 생기있고 정돈된 모습이었는데, 눈앞의 인물과 과연 같은 인물인지 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손톱은 불안에 물어뜯은 듯 너덜너덜하고 굳은 피도 닦이지 않은 상태였고, 눈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어쩌면 일의 강도는 꼭 사형수에게만 가혹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반쯤 풀어해쳐진 머리가 부스스 한 것은 덤이다.
"처음뵙겠습니다. L급 직원으로 선정되신걸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성함이.."
P급 직원인 여성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고 상대의 이름을 떠올리려다 이내 기억나지 않는 다는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181 언제부터, 몇 곡이나 섞였는지 모를 뒤죽박죽 콧노래를 3절째 부를 때쯤, 누군가 숙소에 찾아왔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딱 봐도 어딘가 맛이 간 것처럼 보이는 사오십 대 여자분이었다. 저분이야? 내 직속 상사가? 운이 나쁜걸.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실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다, 편견은 갖지 말자. 일이 고되셔서 저런 모습이지 의외로 똑 부러진 분이실 수도 있잖아. 그러나 애써 편견을 밀어두고 가져본 기대를 배신하듯, 여성의 첫인사는 무척이나 산만했다. 축하 인사를 했다가,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다가, 갑자기 너무 많은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TMI에, 영문 모를 다른 소리와, 말을 하려다 마는 것까지…. 큰일 났다. 알기 쉽게 가르쳐주실 것 같지가 않아. 하지만 곤란할수록 웃는 게 내 버릇 같은 거라 습관처럼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하지 못한 말들은 한 귀로 흘리기로 했다. 내가 알아들어야 하는 말이면 굳이 말실수라고 하시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이제는 업무 설명을 좀 해주시겠지? 사람 죽인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면 무지 급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핵심은 간단하고, 또 당연한 말이었다. 너는 이제 겁나 갈릴 것이다. 이것도 업무 설명이라면 설명인가? 아니면... 겁을 주고 싶으신 건가? 겁먹은 척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네, 그렇죠? 그런 것쯤이야 여기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제받았을 때부터 짐작했는걸요. 더럽거나 어렵거나 위험하거나 셋 중 하나나 둘이거나 셋 다거나 그런 업무일 거라는 거요. 그래서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걸 해도 되고, 어떤 걸 하면 안 되고, 그밖에 주의할 점은 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조금 겁먹은 체라도 해드릴걸 그랬나? 아냐, 그거 잘못하면 놀리는 것처럼 될 수도 있는걸. 그리고 어떤 일을 하는지 배울 의욕을 보이는 부하직원인데 겁 좀 안 먹었다고 미워하시겠어.
호톤은 그녀를 사오십대 정도로 보고있었지만, 그것은 혹시라도 알게되었다면 분통을 터뜨릴 이야기였다. 기껏해야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가는것이 그녀였으니까. 스트레스 때문에 급격한 노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단 1년내로 말하는 곳이 이 격리시설이기 때문이다. 아샤니크 호톤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야 그녀는 '아' 하고 기억났다는 듯 손톱을 깨물었다. 역시 스트레스성의 반응이었다.
"기억났습니다. 호톤씨였군요. 저는 제인 도. 제인이라고 부르시길."
물론 그건 누가들어도 가명이었다. 제인 도라는 말은 보통 익명의 여성을 지칭한다. 이 여자는 애초에 협회의 보안상의 이유로 L급 피험체에게 본명을 노출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시설내에서 달리 대화하는 것은 그 격리개체를 제외하고는 본인뿐이었다. 가명을 들먹거려도 겹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먼저 확인차 묻는 질문입니다만. 종교는 없으신게 확실하겠죠?"
제인은 사실 호톤이 겁을 먹건, 먹지않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다. 왜 그들을 L급 피험체라고 부르겠는가. 격리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인간이기에 그들을 Lamb라는 의미에서 L급 피험체라고 협회에는 지칭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번의 호톤이라는 자는 비협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게 오직 제인에게 있어서 편한 부분이었다.
"무슨일을 하는가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해도되는 부분은 하면 안되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입니다. 그럼 하면 안되는 것을 먼저 말하는게 좋겠죠. 당신의 입장상 이 시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저희 회사의 허가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섬을 산책하는 일은 있을수도 있겠네요. 다만 그 경우에도 제 감시하에 일어날 일입니다. 만약 탈출시도를 할 경우에는,"
제인은 정장안에 감쳐둔 처분용 권총을 슬며시 보였다.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이 가능합니다.하면 안되는 것을 했을시에는 즉결처분이 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게 탈출시도고, 그외에는 허가외에 업무의 객체와 만나려고 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일에서 하면 안되는 부분입니다. 당신이 해야할 일은 당신 숙소아래에 위치한 격리실의 격리 객체와 관련된 작업입니다. 객체가 무슨이유로 격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받지않습니다. 뭐 이부분은 객체와 대화 작업에서 금방알게될 부분이지만 제 입으로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객체와는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마십시오. 매일 이곳으로 공수되는 마스크를 교체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합니다만, 마스크를 교체하는 작업에 있어서 마스크를 행여나 오염시키거나,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그리고 마스크를 교체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신속하고, 지연없는 처리가 필요합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적으로 10초이내. 객체가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은 대화의 노출은 30초이내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객체의 요구는 저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요구를 들어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새 마스크와 교체한 마스크는 폐기합니다."
기계적으로 제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약 30분간 객체와 당신은 대화해야합니다. 객체와 협의된 사항이기에 객체의 요구를 들어줘야하는 입장입니다. 무슨 소재던 관계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종교를 제외하고. 마스크의 소재에 대해 질문은 대답할수없습니다. 객체에게 만약 그 질문을 듣더라도 모른다라고 답하십시오. 만약 객체가 착용하고있는 격리복을 벗으려한다면 그것을 제지해야합니다. 이상이 이 시설에서 당신이 알아야할 사항입니다."
와,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이름이네. 역시 가명인가? 나도 가명을 댈 걸 그랬나? 죄수 번호 같은 거. 근데 뭐 말씀하시는 거 봐서는 내 이름 원래 알고 계시는 모양이었으니까. 게다가 가명 대서 뭐할 거야. 이어 제인은 확인하듯 종교는 없는 게 확신하냐고 물어왔다.
"네, 없어요. 무신론보단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쪽?"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없다고 확신하는 무신론이나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처럼 딱 들어맞는 점잖은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도 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 마지막으로 업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듣자 하니, 허락 없이 시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단다. 탈출하면 죽인대고. 대신 제인의 감시하에 산책은 해도 된다는 모양이다. 기꺼웠다. 콧바람 좀 쐬려면 직장 상사와 데이트해야 한다는 거 빼고는.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차라리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며 딴 생각이 안 나게 지내고 싶었으니까.
다행히도 업무에 대한 설명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내 일은 내 숙소 아래에 사는 객체라는 존재를 관리하고 상대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간수인데 감정노동 하는 간수 같은 거네. 신속하게 마스크를 갈아 끼워 주고, 금지 화제 피해서 말 상대 해주고, 허튼짓하려고 하면 막고. 객체라는 것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라곤 했지만, 그건 금지 화제를 피한 노가리까지고, 그 이상의 요구는 제인 씨를 거쳐야 하는 거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이상이 내게 허가된 정보라는 모양이지만, 객체에 대한 것이 아닌 질문도 하지 말란 소리는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난 궁금한 건 참지 않기로 했다.
"이해했어요. 월급은 얼만지, 승진할 수도 있는지 궁금한데 그건 여쭤봐도 돼요?"
내가 사형수 출신이라곤 하지만 저쪽도 직원이라고 칭했지 않은가. 죄수나 노예가 아니라. 물론 사형당하지 않는 대신 하는 노역이라고 쳐도 모범수 조건 같은 건 있지 않을까? 없으면 뭐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만.
"...그쪽이라면 문제없군요. 앞으로 봐야할 것은 독실한 신자일수록 시련으로 다가올테니."
무언가 체념한듯한 그리고 넌지시 업무에 대해서 불가사의한 느낌이 드는 제인의 말이었다. 오히려 사정이 낫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오히려 의문이 될 것이다. 독실한 신자에게 있어서는 시련이 된다는 것, 종교는 가지고 있는가라는 맨 처음의 질문. 여기서 머리가 돌아간다면 대충 단순한 더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인터넷 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음모론같은 것을 본적이 있다면 더더욱이.
"그것은 이쪽에 계약서를 봐주십시오."
반쯤은 계약서라기보단 입으로 이미 들었던 주의사항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책임은 지지않는다는 내용이 가득한 어떻게 본다면 사형수의 신분이 아니라면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종이쪼가리였다. 하지만 위험에 대한 리스크를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범죄자가 쥘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은 아닌 수당이, 월급제 형식도 아니고 하루 업무 일당으로 쥐어지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 있냐고 한다면, 당장에 L급 신분으로서는 없었다만, 마치 희망고문을 한다는 듯 1년내 생존시라는 조건으로 L급에서의 신분에서 승급도 적혀있었다. 오히려 그 부분이 1년내에도 생존할 수 없다는 걸까?
"아, 네. 수령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였을까 지직하고 무전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의 근원을 찾자, 제인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제인은 그것에 대답했다. 수령하도록 하겠다는 말이 얼마지나지않아 소형 드론같은 것이, 모터소리를 내며 곧바로 밀폐된 상자 하나를 이 자리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지옥 깊숙한 곳, 주술 담긴 광풍이 불었다. 강보다 넓고 산보다 높은 저택 구석구석을 휩쓸고 나자 새파란 불길이 곳곳에서 치솟았다. 삼백 년 간 잠들어있던 저택과 함께 깨어난 염화의 악마는 불길처럼 일렁이는 남색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침실을 벗어났다. 까만 흰자위를 접어 웃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새파란 불길이 일었다. 회색 피부 거죽을 뒤집어쓴 기다란 손이 한차례 휘적이자 발밑에 오각형의 문양이 떠올랐고, 일순 거센 화염이 입을 벌리며 악마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파란 불길은 지구의 작은 단칸방 안에서 다시 한번 일었다. 와장창, 쨍그랑-! 지옥에서 분 것보다 약한 바람이 집 창문이며 식기며 온갖 가구들을 깨부쉈으나 바깥은 이상하리만치 항의 하나 없이 조용했다. 수라장 속 화염의 악마는 태연하게 내부를 둘러보다가 당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날 부른 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환에 성공한 건 삼백 년 만인데……. 네가 날 불렀다고? 흐음. 생각보다 별거 없는 인간이라 놀랐네."
그는 한번 손을 휘적이더니 집안에서 나뒹굴던 의자를 어떠한 접촉도 없이 순식간에 제 뒤로 이동시키더니 익숙하고도 거만하게 착석했다.
// 조절은 하겠지만 웬만해서 이렇게 툭툭 내뱉는 게 취향이라 괜찮은 참치가 이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외계인 존재 발견되지 않은 평범한 지구의 지구인인 것만 지켜주면 지구 속 판타지 여부, 시대, 인종 모두 상관 없을 거 같아. 종족은... 마녀, 마법사, 인간 정도면 좋겠어 XD !!
황실에서 쫓겨나고 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원래 사내는 황자 중 하나를 지키는 실력이 있는 근위기사였다. 열여덟에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스무살이 된 해에 황자의 눈에 들어 황자의 청으로 황자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 측근의 자리에 올랐다. 허나 그 자리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사내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황자를 호위했으나 황자의 주변의 있는 이들의 모함에 황자의 귀가 솔깃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언젠가 황자를 배신할지도 모르는 이. 근본도 없는 고아 출신. 저 강한 무력으로 반드시 이 황실을 어지럽힐 이. 황자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혹시나 저 사내가 더욱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될까 두려워 계속해서 모함했고 황자는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사내를 내쳤다. 황자를 지키는 근위기사라는 자리에서 쫓겨나 정말 아무것도 없는 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까지의 공을 인정해서 목숨만은 겨우 살려주겠다라는 그 말귀가 사내의 머릿속에 서늘하게 남아있었다.
올해로 스물 넷이 된 사내는 조용한 마을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소일거리 ㅡ이를테면 들짐승 퇴치, 도적 퇴치 등ㅡ 를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실력이라면 길드 같은 곳에 들어가서 좀 더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는 굳이 눈에 띄지 않는 길을 택했다. 괜히 이름을 뽐냈다가 그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다고 한들 혼자서 열을 상대할 순 없었고 그 이상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목숨을 유지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길을 택한 사내는 방금 사냥한 곰을 들쳐매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을 위협하는 흉악한 곰을 퇴치했으니 보상금은 꽤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내가 마을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저기 오네요. 저기. 바로 저 자입니다. 저 자." "근데 저 사람에겐 무슨 일로?"
뭔가 마을 입구 부분에서 말들이 들려왔다. 정확히는 마을 사람 중 두 명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온 모양인데. 의뢰를 부탁하러 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일단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허나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아직 누가 자신을 찾는진 모르겠으나 최악의 경우 자신을 죽이러 온 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실에서 쫓아냈다고는 하나 혹시나 복수할까 두려워 자신의 목숨을 뺏으려는 이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가만히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을 위치를 바라봤다. 누구일까. 어떤 목적으로 대체?
/상대가 누구인지는 자유! 정말로 죽이러 온 이도 괜찮고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 이도 괜찮아! 다만 아. 저 사람 아닌데요. 라던가 이어지지도 않을 철벽을 친다던가, 영화 컷!! 이런 식으로 갑자기 흐름을 완전히 깨버리고 모든 것을 망상으로 바꿔버리는 전개라던가. 그런 것은 힘들 것 같아!
'이번에는 자네도 마음에 들어 할 만한 타겟이야. 싸워서 꺾고, 깨부숴서, 쓰러뜨릴 가치가 있는 상대지.'
'페이가 꽤 붙어 있군.'
'어때, 하겠나?'
'......제적당했던 내가 조기졸업생이랑 투닥거리게 생겼군.'
짧은 회상 속에서 다시금 스스로에게 목표를 주지시킨 뒤, 사냥꾼은 눈을 떴다.
청부업계, 혹은 특정인을 목표로 하는 다소 폭력적이고 지엽적인 일에 특화된 용병 업계에 몸을 담은지도 어언 6년, 나이로는 아직 스물다섯이지만 경력으로는 진작에 이골이 난 몸이었다. 업계에서도 기벽으로 여겨지는 특유의 사냥 방식 탓에 특정 조직에 몸을 담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만 제한다면 이미 손에 꼽히는 명성, 내지는 악명을 사냥꾼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기벽, 그 어떤 수단으로 시작하던 마지막에는 타겟과 싸움으로 끝을 봐야 한다는 무의미한 고집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치기 어린 행동이다, 아마추어리즘이다 따위의 비판은 항상 사냥꾼을 따라다녔다. 어차피 암살자인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는 항변으로 일관해왔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청부업자의 행태와 어울리는 것도 분명 아니었기에 언제부터인가 사냥꾼이라는 별명은 자연스레 그 자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사냥꾼 본인은, 별다른 반응도 없이 그 별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업계에서도 경력이 빛 바랠 만큼 오래된 일부 청부업자들은, 차라리 기사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농담삼아 말하고는 했다. 한때 기사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다가 불미스러운 제적처분 뒤로 청부업에 뛰어들었고,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연연하는 기벽도 당시에 맺힌 분한 마음 때문이라는 사냥꾼의 과거사는 그런 베테랑들에게만 드문 드문 알려진 이야기였다.
바로 그 제적처리자가, 자신이 떠난 해에 아카데미를 조기졸업했던 예전의 동문을 마주보고 있었다.
"여, 오랜만이지?"
양옆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이야기하던 마을사람들을 쓱 밀어내며 당신 앞으로 나서는 사냥꾼은,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다지 숨기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가오는 사냥꾼의 태도는 싸움을 준비하는 태세도 아니었고 살기 또한 없었다. 오히려 옛 친구를 맞는 친근한 태도로 사냥꾼은 천천히 당신 앞에 섰다.
>>188 사람들을 밀어내며 등장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사내는 처음엔 누구인가 싶어서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허나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와 그 말의 내용을 들으며 사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좋은 이유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계심을 더욱 키우며 사내는 빤히 상대를 바라봤다. 싸움을 준비하는 태세도 아니고 살기 또한 없었으나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으며 사내는 경계심을 가지며 일단 거리를 띄위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들쳐매고 있는 곰을 내려놓고.
"적어도 좋은 이유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져서 친근하게 얘기를 하긴 힘들겠는데."
갓 얼어붙은 얼음마냥 사내의 목소리가 상당히 차가웠다. 허나 자신 역시 딱히 검을 꺼내거나 하진 않으며 사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허나 그럼에도 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으로 향했고 여차하면 바로 뽑을 수 있도록 준비 자체를 갖췄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사내는 입을 열어 차가운 목소리를 다시 내뱉었다.
"그래도 이유는 들어야겠지. 무슨 이유로 온 거지?"
만약 자신이 바로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이유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타깝게도 자신도 쉽사리 죽을 생각은 없었다. 저 친근한 태도가 연기인지, 아니면 갑자기 돌변해서 공격해올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며 사내는 침을 삼켰다. 그 자세에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쫓겨나긴 했지만 어쨌건 황자를 지키는 근위기사까지 올랐던 이인만큼.
아, 나오려 하네. 성마른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흘러나온 음절은 차디찼다. 그게 욕이든 다른 것이든 어쨌든 긍정적인 게 아닐 것은 확실했다. 성혜주는 대뜸 시니컬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곧장 정색을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새카만 하늘이 보였다. 더럽게도 맑다. 제 마음에는 이리도 먹구름이 꼈는데 말이다. 아니, 밤이 온 건 같나.
앞길을 막고 선 자는 옛 연인으로 오 분 전까지는 연인이었던 놈이다. 여자 밝히는 놈이란 건 옛적에 알고 있었는데, 자신과 사귀는 동안에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유흥업소까지 드나들었단다. 헤어질 이유로는 뻔하고 흔한 이야기지. 그런 새끼가 앞에서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질질 짜면서 빌고 있으니 이거 원……. 속이 안 좋단 말이지. 침이라도 뱉어줄까 싶다가 그것마저 아까워 걸음을 옮겼다. 왠지 속이 쓰려 담배 한 개비를 무는 사이 뒤에서 혜주야, 혜주야 하고 애원하듯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저놈하고 연애란 걸 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찌질하고 음침한 놈은 만나지 말 것.
약간 멍한 정신으로 걷다 보니 어느덧 자취방에 가까워졌다. 이런 기분으로는 들어갈 마음이 영 들지 않는다. 솔로가 됐는데 물리적으로도 혼자가 되면 진짜 좆같을 거 같았다. 성혜주는 구두 밑창으로 담뱃불을 끄고는 앞에 늘어진 포장마차 중 하나로 불쑥 들어가 앉았다. 클럽이라도 갔다 왔다기에는 제법 얌전한 차림새인데, 그렇다고 정숙하다기엔 헝클어진 단발머리와 번진 립스틱이 요란한 여자가 들어오니 잠시 힐끔거리는 시선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졌다.
"……소주랑 막창, 부탁해요."
입 험하고 정신머리도 험한데 주인아저씨에게 팔자에도 없는 예의를 차리려니 절로 말이 끊겼다. 잠시 더듬거린 성혜주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낯을 하고 턱을 괴었다. 포장마차치고는 꽤 조용했다. 시간이 늦어서인가? 홀로 청승 떨러 온 사람이 많은 것은 만족스러웠다. 저 혼자 난리였으면 꽤 서러울 것 같았다.
>>190 아이고, 오늘도 힘들었다. 검도장 문을 열어젖힌 이진은 얼굴로 곧장 들이닥치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입안으로 하품을 삼켰다. 땀에 젖은 도복을 벗고 개운하게 씻은 뒤 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온몸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피로는 여전했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 겨우 식사를 마치고 쓰러져 자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애매하게 억울했고, 또 허기졌다. 모처럼이니,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먹고 싶은 음식을 헤아려보자니, 달달한 소주 한잔에 기름지고 칼칼한 안주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식욕이 돋았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군것질도 자제했으니까 오늘은 치팅 좀 해볼까? 대신 내일은 건강하게 먹고. 그렇게 (저항할 생각도 없었지만) 유혹에 넘어간 진의 발길은 직장인 검도장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포장마차로 향했다. 손으로 비닐 막을 밀어 열며, 진은 어느새 얼굴을 익힌 주인아저씨에게 붙임성 좋게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사범님 오셨네!" 넉살 좋게 인사를 받은 아저씨는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쩌지, 오늘따라 붐비네. 자리가..."
평소라면 다른 손님과의 합석을 제안하던 주인아저씨였지만, 오늘따라 심상찮은 손님들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선뜻 권하지 못하는 것이 흐려진 말끝에서 느껴졌다. 아저씨도 난감하신 것 같고, 다른 가게로 갈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눈에, 한 사람 정도는 더 앉을 수 있을 만한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한 손님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숙연하긴 했지만, 그중에 단연 고약한 일을 겪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은 잠깐의 고민 끝에, 헝클어진 단발에 입가에 립스틱이 번진 여성 손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실례합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주변에 다른 포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지만, 진은 어쩐지 가장 말 붙이기 어려워 보이는 상태의 이 손님이 마음이 쓰였다. 저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을 가다듬지도 못했을 정도로 멘탈이 나간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기분 좋은 상태에서 술을 마실 때보다 자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 취하게 되면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도. 결국은 오지랖이지 뭐. 거절하면 더 권할 수는 없을 테지만, 이대로 집에 가서 계속 마음 한 켠이 찝찝한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상대의 손이 검으로 옮겨가자, 자연스레 사냥꾼도 좀 더 노골적으로 패검 중이던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일견 도발적으로 보이는 그 동작은 한편으로는 극도로 억제되어 있었고 싸움의 의사를 뒤로 미루는 함의이기도 했다. 아예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는 또 아니어서 문제였지만.
"뭐, 타겟의 얼굴을 보러 왔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구미가 당기는 청부를 받아서 말이지."
사냥꾼은 그렇게 본의를 밝히고서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바로 검을 맞댈 생각도 없었고,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으로의 방문이었지만, 그런 의사를 납득시키기에는 너무 폭력적인 목적을 가지고 왔음을 스스로도 알았기에, 당장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사냥하러 왔다고 선포하는 주제에 멋대로 칼을 늦추자고 말하는 것부터가 기만이라면 기만일 것이다.
>>191 나 왜 이러고 있지. 한 잔, 두 잔, 세 잔을 목뒤로 벌컥벌컥 넘기다가 든 생각이었다. 세상에 사람은 많고, 연애라는 거에 미친 사람은 더 많아서 그중 아무나 골라잡아 만나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단지 스쳐 지나가는 인연, 수많은 옛 애인 중 하나일 텐데. 이번에는 꽤 오래 만났었나, 그랬긴 했지. 왜 그랬지? 그야 정신 상태가 말썽이었으니 그깟 놈 붙잡고 있었던 거겠지, 머저리…….
툭, 하고 소주 잔을 든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수족냉증으로 인해 생긴 찬 온기가 이마를 넘어 뇌속까지 파고들자 어느정도 정신이 깨는 기분이다. 그리고 얼마 없는 친구가 옛적에 했던 말도 파고들었다. 넌 항상 왜 그런 애들만 만나? 그때 뭐라고 답했더라. 아, 대답은커녕 어물거리다가 답지 않게 넘겼던 것 같다. 꼴에 친구라고 제 밑바닥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나 보지. 그런 애들만 만나기는, 내가 그런 애라 그런 새끼들만 만난 거지, 시발……. 깊게 사귀기에는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한 주제에 외로움은 많아선. 탁!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 성혜주는 소주 잔을 조금 거칠게 내려놨다. 안으로 말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단발의 끄트머리가 흔들렸다. 동시에 다가온 인기척을 따라 눈을 굴렸다.
"예에, 뭐……. 그러세요."
감정에 휘말려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었으므로, 성혜주는 최대한 말투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특이한 사람이네, 보통 미친년인 줄 알고 피하던데. 어느새 따른 술잔을 들이키며 평이하게 생각한 성혜주는 허공을 쳐다봤다가 다시금 이진을 향해 시선을 꽂았다. 가로로 시원하게 트인 큰 눈이 나른하게 감겼다가 뜨였다. 성혜주는 외로움 많고 경계심 많으면서 또 사람을 만나는 데에는 막무가내였다.
"합석비는 뭘로 내실래요?"
소주 잔을 느리게 흔들며, 상대를 꼬실 때 으레 그렇듯 입꼬리를 올렸다. 제 버릇 못 고치고 또 시동을 건다.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성혜주에겐 단지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 외로운 밤, 달보다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게 좋았다.
>>193 다시 보니, 여성 손님은 분위기가 숙연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꽐라가 되어있었다. 이건 합석을 청할 게 아니라 경찰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탁, 하고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손놀림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선선히 승낙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뭐, 적당히 요기하면서 살피다가 인사불성인 것 같으면 택시 부르든가 해야지. 진은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려는데, 어쩐지 얼굴이 근질근질해서 여성 쪽을 보려니, 어쩐지 무안해질 만큼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뭐 묻었나? 샤워하면서 세수는 제대로 하고 나왔는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냐고 물어보려던 그때, 진은 여성의 입에서 나온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귀를 의심해야 했다.
합석비? 내가 잘못 들었나? 합석을 돈 주고 해야 하는 거야? 그것도 가게 주인인 아저씨가 아니라 손님인 저 분한테? 왜? 못 온 사이에 그런 방침이라도 생겼나? 애매하게 찌그러진 얼굴을 다 펴지 못한 채 주인아저씨를 바라보니, 아저씨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생각을 가다듬었다. 애초에 오지랖을 부릴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장사하시는 동안 인사불성으로 취한 여자 손님이 이번이 처음이시겠어. 그냥 다른 가게 가자. 여성에게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여성이 짓고 있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착잡해졌다. 초면이라도 사람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은 그냥 넘기기도 싫었고, 겸사겸사 주인아저씨 수고도 거들까 싶어서 나섰는데, 합석하려면 돈을 내라는 말에, 추파 같은 시선이 돌아올 줄이야. 그래, 그것도 내 사정이니까. 그것도 술에 취한 사람이 남의 사정까지 헤아려주길 바라는 건 무리한 거니까. 진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히 대꾸했다.
"여자분 혼자서 만취하신 채 다니시기엔 밤길이 위험할 것 같아서 제 찝찝함 덜자고 합석 청한 거긴 한데요. 솔직히 비용까지 지불해가면서 오지랖 부리고 싶진 않네요. 다른 가게로 갈게요." -"그려, 걱정 말어. 여차하면 내가 경찰 부를 테니께. 이담에 오면 서비스 넉넉히 드릴게, 미안하구먼." "아이고, 아니에요. 그만큼 아저씨네가 핫플이란 거 아니겠어요. 내일 또 올게요!"
아저씨가 미안하실 일이 아닌데, 내가 다 무안해져서 일부러 농담하듯 말하며 두 손을 휘젓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래, 오늘만 날이냐. 내일이 있는데. 착잡한 마음을 애써 덜어내며 터벅터벅 걷는데,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쭉 사귄 애인인 명훈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아, 퇴근했어? 오늘도 고생 많았어.] [안 피곤하면 잠깐 통화할래?]
조금 전 느꼈던 끈적한 불쾌감이 씻긴 듯이 사라졌다. 진은 입가에 미소가 퍼지는 걸 느끼며, 홀린 듯이 키패드를 두드렸다.
"그런 것은 관계없어.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친근한 분위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네 이야기는 여럿 들었으니 말이야."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렴풋이 들은 것은 있었다. 그런 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게 대체 뭐겠는가. 아쉽게도 사내는 순순히 목숨을 내놓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살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든지 죽어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런 반발없이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이런 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황가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할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제 목숨 하나는 부지해야하지 않겠는가. 이내 상대의 입에서 청부라는 말이 나오자 사내는 조금 더 거리를 띄웠다. 허나 바로 공격하지는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 경계를 아주 조금만 풀며 사내는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일단 들어보겠어."
지금 이 상황에서 이야기를 할 것이 뭐가 있을까. 어떤 제안을 하고 받아들이면 살려주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인다라는 전개? 아니면 도망치라고 이야기하며 풀어주는 전개? 어떤 일이 앞에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으나 태연함을 가장했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말해두지만 그냥 순순히 죽어줘. 라는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을거야. 물론 너도 그런 제안을 할리는 없겠지만."
_너한테 처음 총 쏘는 방법을 배운 그 어리숙하던 이. 총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려와서 조준하기가 어렵다고 조잘거리고 툴툴거리던 목소리.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다보니 나아진 실력에, 네게 지나가는 한 마디 칭찬이라도 들으면 말갛게 웃던 눈. 그랬던 사람은 어디 갔냐는 듯이 지금 네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지금 떨리는 손 끝은 미숙함에서 비롯됨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이 들끓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_너한테 처음 총 쏘는 방법을 배운 그 어리숙하던 이. 총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려와서 조준하기가 어렵다고 조잘거리고 툴툴거리던 목소리.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다보니 나아진 실력에, 네게 지나가는 한 마디 칭찬이라도 들으면 말갛게 웃던 눈. 그랬던 사람은 어디 갔냐는 듯이 지금 네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지금 떨리는 손 끝은 미숙함에서 비롯됨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이 들끓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아니라고 말해줘요, 선배.”
_떨리다 못해 흐느끼는지라 발음이 뭉개졌으나, 총도 겨누지 못 하는 손이니, 온전히 올곧은 것이 있다면 눈빛이었다. 진실이 겁나더라도 알아야 한다, 눈동자는 너만을 비추었다.
보자,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이 뭘까. 아니, 계산 된 말을 뱉을 때는 이미 지났나? 그렇대도 어차피 솔직해지는 방법따윈 잊은지 오래였다. 진실이니 거짓이니 하는것따윈 신경쓰지 않게된지 오래되었지만, 눈앞의 후배-라고 할만한 너는 아직 진실이라는게 무엇인지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눈동자였다.
"유감이네."
그렇다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게 예의겠지. 짧막하게 대답한 뒤 나 또한 네게 총구를 겨누었다. 네게 가르친것이 있으니 그것에 걸맞게 행동하기 위해서.
"손이 떨리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줬었지? 조준이 엉망이면 총을 가진 의미가 없다는건 여러번 말 해줬었지? 봐, 벌써 상대방도 총을 들었어.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라고 했었지?"
_유감이라는 두 글자가 총알 같았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 한 마디에 무너지는 것이다. 좌절, 분노, 슬픔, 증오, 배신감, 의문, 실망, 모든 것에서 눈과 귀를 막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보겠다 발버둥친 것이 결국은 절망으로 바뀌어 감정이 휘몰아치니 무슨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 그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은 잘 만들어진 말이구나 싶다. 너를 비추던 눈동자는 이내 제 손에 쥐어져 떨리는 총 한 자루를 향한다.
“그러게요, 의미가 없네요.”
_당신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선배.
“제가 아직도 당신의 후배인가요?”
_네게서 배웠으니 총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생 너를 잊지 못 할 것이다. 처음 총을 잡았을 때보다도 더욱이 못나게 떨리는 손과 타겟을 바라보지 않는 눈. 그런 머저리같은 상대가 눈 앞에 있다면 누구라도 몸 어딘가에 구멍 하나는 내 줄 수 있을 것이고,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노리기도 쉬우리라. 그런데도 아직 숨을 쉬고 있음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 가르침은 누구를 향하는가 묻는다.
_총을 잡고서도 그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체감치를 못해 마냥 순진무구하고 어리석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언젠가 이 일을 계속하다보면 다칠 일도 찾아오고 죽을 일도 찾아올텐데, 네게서 잘 배우고서 선배를 지켜주는 후배가 되어보자 기대하는 생각. 처음으로 생명을 해했을 때는 또 다른 생각도 했다. 제가 죽는다면 아마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은 네 얼굴이겠다고. 그리고 지금은 기술은 늘었고 생명을 해하는 것에는 감각이 무뎌졌지만, 여전히 어리석은 이였기 때문에 총을 쥐고 있는 손을 내렸다.
“네. 아직은요. …아직은, 아직은 선배니까, 부탁 좀 들어줘요.”
_지키고자 했던 이를 한 순간에 해해야만 한다는 진실이 내장을 뒤집고 비틀어 꼬는 듯해 구토감이 솟았다. 토해낸다면 먹은 것이 아니라 울분을 뱉을 것이다. 씹어뱉은 발음이 흐느끼듯 스러진다.
“아주 멀리 떠나서, 경치가 아주 멋진 곳으로 가서요…, 좋아하는 단골 가게도 만들고, 핏비린내 대신 꽃향기나 맡고, 다칠 일이라고는 가끔, 가끔 요리하다 손 베이는게 전부인, 그렇게…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단 듯이, 아주 시시하고 재미없게 살아가줘요…….”
_제가 다시는 당신을 찾을 수 없게요. 만약 우리가 재회할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어느 한 쪽이 죽어야할테니까.
_제압이란 단어는 이상했다. 무언가 억눌러서 통제할 것이 있어야 제압이라 부를만 할텐데, 아무런 의지가 없는 몸은 허수아비 같았다. 나무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부러지진 않으니 다행이리라.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총을 네게 겨누었을 때부터 이미 목숨을 내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네가 달려들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총도 곧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장난감 플라스틱 총보다도 위협적이지 못 했는데 그마저도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뚫린 입으로 무슨 소리라도 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가 배우질 못한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였어요. 그 사람도 지금 절 못 죽이고 있거든요.”
_죽음은 겁나지 않았다. 네가 죽이려고 했다면야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둔한 이는 왜 떨고 있는가. 이제는 몸으로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키고자 했던 자를 죽여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은 게 채 이해되기도 전에, 네가 달려들어 제압이라고도 못할 제압을 함으로써 몸으로도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널 해쳐야만 함을 겁내는 것이다. 용기도, 배짱도, 자존심도, 아무것도 없었다.
“……전 책임을 져야해요. 선배가 없어진 빈 자리는 그 후배가 메꾸겠죠.”
_그런 시시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기엔 늦었다. 총을 잡았더라도, 사람을 해했더라도, 적어도 당신처럼 되고 싶단 생각만 안 했더라면 늦지 않았을텐데.
“왜요, 못할 것 같아서 겁나요? 멍청한 후배 가르치는 일보다 쉬울걸요.”
_악에 받친 목소리에 끝까지 힘을 싣지 못할 것만 같아서, 절대로 너를 보지 않았더라. 유감이다. 꺾여버린 고개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눈물이 맺히지 않게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 총까지 놓쳐버린 너를 죽이는건 아주 쉬웠다. 쉬울터였다. 자신을 못 죽이고 있다는 너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너를 찍어 누른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채로 생각을 시작했다.
"네가 전의를 잃은게 처음부터 보였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것에 관계없이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라 가르친건 자신이었으니.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너를 가르치는 것 만큼은 진심이었다.
"굳이 전부 책임지려 하는 버릇은 너만 피곤해지니 빨리 고치는게 좋아...라고도 이미, 몇 번이나 말했었지."
그런 네게 진심을 써버렸다. 그런가. 그것부터 문제였던것이다. 그 무엇에도 진심을 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기본적인 것 부터 놓치고 있었으니 지금 널 죽이지 못 하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너를 죽이지 못 하게 되어버렸다. 네가 말 한대로 평범하게 사는것 따위는, 자신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못 할것 같아서 겁이 나니까. 이런 자신을 닮으려한 너도 마찬가지일까. 그래도 나만큼 늦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기는 한데.
"그래... 그럼, 네 말대로 후배가 멍청하다는걸 감안하면서 말 할게. 저쪽에 있는 철문을 열면 비상계단이 나와. 그 계단을 쭉 내려가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어. 내가 사용하려던 루트니까 장담해."
그리고, 네가 이것이 싫다고 하면 남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상황. 그런데 나는 이미 진심을 담는 실수도 저질렀고, 그런 주제에 너를 죽이는것도 싫다고 하니 남는건 하나겠지.
_그래, 지금만 해도 굳이 총성을 내지 않고도 조용히 죽일 수 있다. 반항할 기미는 보이지도 않으니 목이라도 조르면 수분 내에 숨이 넘어갈 것이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 자도 그러했다. 비록 너를 죽일 용기는 없으나 진심을 밝힐 용기는 있었다.
“……저는 말할 수 있어요. 선배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_비록 그 시야는 두 눈을 힘주어 감아 여전히도 너를 비추지는 못 했다. 하나 두 눈을 봐야만 진심이 느껴지기에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물기가, 떨림이 진했다. 누가 들어도 우는 듯한 목소리임을 본인도 느껴 울음을 참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총에 맞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칼에 찔리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해야하는 일도 하지 못 하고 감정에 휘말려 휩쓸려가고만 있다. 그럼에도 그러해도 좋으니 네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는.”
_걱정인지 가르침인지 모르겠으나 어느쪽이어도 괴로운지라 입술을 물었다. 여기서 헤어지게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선배가 아니고, 네 손에 눌린 이도 더 이상 후배일 수 없다. 선배라는 말을 애써 짓이겨진 소리라도 내는 것은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는 간절함이었다. 부탁 좀 들어달라며 말했던 요구를, 욕심을 받아달라며. 겁이 나더라도, 어울리지 않더라도, 견뎌낼 수 없더라도 모른체 살아가달라고.
“이게 무슨…!”
_처음이었다. 팔에 힘을 올곧게 싣고 뿌리치려 애썼다. 실수로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릴까 겁에 질려하는 꼴이 처음 총을 쥐었을 때보다 우스울 지경이었다.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서, 억지로 쌓은 둑이 평화로운 척 잔잔하다 한 번의 파문이 일자 넘쳐 흘러버린다. 기어코 총을 쥐어지게 된 손은, 머리를 겨누게 된 손은 눈에 띄게 떨었다. 네 손에 붙잡혀있더라도 멈추지 못 하는 울림이었다. 이제는 울음 때문인지 겁 때문인지 모를 떨림이다. 이제서야 너를 바라보나 눈물이 시아를 흐려 온전하게 담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 터다. 너와같이 진심을 밝힐 용기가 있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은 그저 비겁한 거짓말 뿐.
"거짓말을 일삼고, 너까지 통째로 전부 배신한데다, 죽이려고 까지 한 인간을 끌어안고 가는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걸 가르쳐주고 있는거야. 명백한 적을 살릴 이유가 어디에 있지?"
감정론을 전부 배제하고 이론만을 들이채운 말이었다. 자기자신의 감정조차 들어가질 못 한, 그런. 그럼에도 그 말을 굳이 육성으로 내뱉고있는것으로 암시하는것이다.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선배니 후배니 하는것들은 전부, 지금 너를 붙잡고 있는 이 손으로 부숴버렸다고. 그러니까,
"...이제 봐주네. 지금 잘 하고 있으니 그대로 쏴. 그럼 책임지는 행위로도 충분할거야."
_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가 그랬듯이 전하고 싶은 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소리내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으니, 입을 계속 다문 채로 대답을 거부할 뿐이다. 눈물을 훔칠 생각도 않고 훔치지도 못 하는 이는 눈물이 차올랐다가 떨어지며 뿌옇다가 선명해지는 시야. 그런 시야로 너를 보고 있었다. 죽이고 싶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버렸기 때문에, 죽이고 싶지 않다는 뜻은 네가 죽겠다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알 수 밖에 없었다. 너를 닮고 싶어했던 이도 널 죽이지 못 하고 저는 죽을 각오를 했으니 알 수 밖에 없으리라.
_이런 일을 함에도 여지껏 살아 숨쉬다 못해 지금까지도 숨을 쉬는 건 네 탓이다. 덕이라고 해야할지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고민하나 고르지 못 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기에는 타인의 죽음을 쌓아올린 삶이니 얼굴에 철면피를 두르더라도 못할 짓이다. 그런 삶일지라도 계속 숨을 쉰 건 네가 목표가 되어주었고, 스승이 되어주었고, 지금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를 이름도 없는데 치사하게.”
_이름을 부르니 눈물짓다가도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네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가짜 이름이라도 불러보려다 말았다. 대신 너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총구에 기대는 네 무게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번 저울질을 해본다. 너를 죽인 저가 살아갈 때와, 저가 죽은 네가 살아갈 때. 아무도 죽지 않기를 원하나, 총구에 기대는 모습을 보니 그게 편한 길이라 고르는 것인가 싶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선배, 한 번만 거짓말하지 않고 말해주세요. …선배는, 정말, 죽고 싶어요?”
_도망치라는게, 죽음으로 도망치라는게 아니었는데 그것이 네 피난처라면 제 마음이 무슨 문제일까. 그저 어디선가 네가 살아있으리라 믿으며 위로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가보다.
_네 뒤만 쫓아 자라왔던 이는 여태 그 길이 거짓이라고 해도 다른 길을 찾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네가 먼저 걸어갔을 지언정 저가 직접 걸었으니 제 길이라고 우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속 가던대로 꿋꿋이 걸어가겠노라,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겠지. 총구와 네 머리가 맞닿지 않자 손목을 꺾어 방향을 틀었다. 허공을 향한 총구는 더 이상 떨리질 않았다. 울음이 멎은 것이 아닌데도 그럼은 역시 모든 떨림은 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죽이러 와요.”
_그 말이 얼마나 기쁘게 들리는지 당신은 모르겠죠.
“선배가 죽이러 올 때까지 절대 안 죽을테니까, 선배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저 죽이러 오라고요.”
_멍청하면 용감하다는 말에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다면 잘 웃는다는 말이리라. 네 이름을 듣더니만 여전히 눈물로 촉촉하더니만 말갛게 웃지 않는가. 그러고나서는 허공에 불규칙한 총성을 울린다. 없는 시간을 더 줄여버리려는 의도였다. 이 소리를 듣고 찾아올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네가 떠나길 재촉하기 위해서.
>>215 # 고생 많앗어~ 요근래 답레가 기다려질만큼 재밋엇다! 이런상황 개재밋겟다; 하고 가볍게 올린거엿는데 이렇게까지 대유잼이 되다니……. 선배님 존함이 궁금하고 이건 아무도 안물어봣지만? 후배는 어느정도 선배 대신 구른 후에(?) 경치 좋은 어딘가로 아주 멀리 무작정 떠나서 거기 있는 꽃집에 무작정 아르바이트로라도 써달라고 할 계획이라더라. 선배가 못찾게.
>>216 #너 참치도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고생많았어~ 선배님 이름... 엄청 특이한거일것 같다. 정작 가명은 진짜 평범한거였겠지만. 후배 구르고ㅠ나서 정작 자신이 평범하게 사는구나... 선배는 후배 말 안 듣고 하던 일 계속 하는데 후배가 엮일만한 일이다 싶은건 다 끼어들어서 괜히 기웃댈듯?
>>217 # 재밋없을 수가 잇나요………? 재밋게 이어줘서 고맙다고 108배라도 올려야 쓰겟는데……. 가명조차도 고귀햇을 우리 선배님… 만수무강무병장수하세요 ㅠ 응, 어느 정도 책임 다 진 거 같다 싶으면 이 일에 손을 떼야 선배가 살 거라고 생각햇거든. 다시 만날 때는 누가 죽든 할테니 만날 일 없게 만드려고 그랫대~ 선배님… 그렇게 해서는 우주최강의 선배밖에 되지 못해요……. 그래도 살아쥬셔서 감사합니다 ㅠ
>>219 # 선배 가르침을 받고 자라서 선배님 관해서는 일취월장 했대~ (??) 선배님 알게 모르게 후배한테 물든거 같아서 둘 관계성 넘 존맛이야 ㅠ 앗 근데 우리 일상도 끝나고 햇으니까 계속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는 건 민폐인가 걱정되갖구 :3 혹시 더 얘기할 거 잇으면 못다말에서 찾아줘~~!
연구원님,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맑은 구슬 굴러가듯이 청량하게 울린다. 목소리는 한없이 산뜻한데 보이는 모습은 만신창이다. 유리벽에 찰싹 달라붙어 당신을 바라보는 실험체는 천진난만하게 방글방글 웃는다.) 내가 재밌는 비밀 얘기 해줄게. 나는요, (목소리를 주욱 낮추더니 소곤거린다.) 내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어버릴 거야. (배싯 웃는 것은 참 아이같았다. 하는 말이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222 마음가짐이 잘못 되었는걸. 물론 네가 죽지 않길 바라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도 있지만, 기왕이면 나 포함 모두를 죽이겠다는 목표를 가지도록 해. (웃는 당신의 미소를 지켜보다가, 묘한 표정으로 유리벽 너머를 바라본다. 바이탈을 체크하고, 변화를 기록하고, 가끔은 실험체화 회화를 가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재촉에 한숨을 내쉰다.) 좋아. 그러면 문항이다. 비, 바람, 눈, 번개, 무엇이 좋지?
>>223 왜? 너희는 내가 죽어서, 이 짓을 또 할거야. 나랑 비슷한 조건의 실험체를 찾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고. (잠깐 골똘하게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히죽거린다.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왕이면 걔도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어버리면 좋겠다. 우릴 가둬둔건지 너흴 가둔건지 헷갈릴거야, 그치. (문항이라는 말을 들으니 유리창에 달라붙어있던 몸을 떼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버린다.) 지겨워, 지겨워. 눈이 좋아, 눈. 하늘에서 내리는 거 말고 네 눈.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낸다.)
>>224 그건 우리로써 꽤 괴롭겠는걸. 너같은 적합자를 찾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록 말소를 위한 전초 작업, 은폐, 인력들을 생각하면. (마주보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면서 볼펜으로 차트를 툭툭 건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천천히, 가혹하게, 해내겠지. 우리가 전원 죽지 않는 이상. (한숨을 지으며 대자를 뻗어버린 당신을 내려다본다.) 우린 이미 갇힌 신세야. 협조를 안해준다면, 해줄 때까지 무언갈 하는 수 밖에 없고. ……내 눈이면 충분하겠어? 네게 한 짓이 있는데. (차트에 했던 것처럼, 볼펜으로 제 눈가를 툭툭 두드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내 눈 만큼이나 예쁠걸. 눈에 체크할게. 자, 다음. 모험할 친구는 누가 좋아? 나비, 고양이, 개, 그리고 나.
>>225 협조는 이미 충분하잖아. 마지막의 마지막에 딱 한 번 반항하는거야. (내려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볼멘소리.) 난 너희가 고통받는게 보고 싶은데, 정말, 난 이미 죽어버렸을테니까 직접 못 보는게 아쉽다. 나중에 죽어서 만나게 되면 이야기 들려줘? 내 시체를 어떻게 했는지부터가 시작이야. (대자로 뻗어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세워 앉았다. 기대감이 부풀어올라 설렌다는 듯이 눈을 빛낸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기억 안 나는데, 네 눈은 기억나거든. (내가 보는게 그런 거 말고 뭐가 있겠어? 비아냥대더니 친구라는 말을 듣자마자 헛구역질 시늉을 한다.) 우웩, 그런 낭만적인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너나 나나.
>>226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데, 몸의 60프로가 없어도 살려낼 수 있는 게 여기 의료진들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내 권한으로 가능한 거라면 뭐든 가져다줄테니. 옆방은 초콜릿 상자를 달라고 했어. (당신의 설렌다는 눈빛을 질린다는 표정으로 받아낸다.) 보고싶으면 말해. 눈높이는 언제든지 맞춰줄테니. 대신 주지는 못하니까 양해해줘. (당신의 헛구역질하는 시늉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럼. 현실에서 하기 힘든 것, 이루기 힘든 것이니까 낭만인 거 아니겠어. 자, 친구가 된 기념으로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겠어? 대답 안하면 정말 나라고 적어버릴테니까.
>>227 내가 언제 죽을진 너희 손에 달렸지.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을 거라니까. (몸의 60%가 없어도 살려낸다는 말에는 눈을 찌풀거렸다. 죽음조차 내 것이 아닌 처지가 영 고깝다.) 초콜릿? (초콜릿 상자. 제 귀가 먹었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이고, 동그랗게 뜬 눈을 얄밉게 깜빡거린다. 그러다 히죽 웃으며 야살스레 눈꼬리를 접는다.) 걔 귀엽다, 그럼 나 옆방 애 만나게 해줘요. 잘생겼어? 예뻐? 나보다 나이는 어리면 좋겠는데. 너희들은 새빠져라 공부에 연구만 하니까 다 늙어빠진 상이라고. (키득거리며 다시 대자로 누워버린다.) 됐거든, 안 봐. 내 눈도 잘 기억 안 나지만 그래도 분명 네 눈보단 예쁠 걸. (친구다 된 기념이라니, 뭐라니. 귀 후비적거린다.) 그러든가. 연구원님, 나랑 친구하고 싶었어요?
- 에구, 또 그 1인실 애기에요? - 네…. 하지 말래도 계속 그래요. - 거기 누가 있다고 그러는지 몰라, 정말.
"이상해. 왜 선생님들은 안 보이지이."
당신을 바라보면서 가물거리는 눈이 동그랗다. 아이 환자복은 옷이 조그말텐데도 그것도 크답시고 둥둥 걷어올린 소맷단들이 벙벙하고, 달려있는 주머니도 조그맣다. 아이는 조그만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를 손바닥 위에 꺼내놓는다. 그것들을 볕드는 창문가에 조르륵 줄지어 세워놓고, 비어있는 병실 침대 위로 올라와 앉고 하자니 짧은 다리가 바쁘다. 종종종 걸어와서 폴짝 뛰어 올라 앉으면 아주 작게 풀썩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 거짓말쟁이 아닌데…."
시들시들, 금새 기운없어 하며 고개를 숙인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이 동동 떠있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강렬하게 반짝이는 따스하고 온갖 것에 겹쳐 보이는, 그럼에서도 마치 옛 된 창백한 흰 색의 여인과도 같은 단편으로 흐릿하게 엿보이는 무언가가 부드럽게 그 풍경, 그 장소에서 말했다. 아니, 그것은 소리도 무엇도 아니 였으나 아이에게는 그렇게 인지되는 것이라. 그것은 이것은 정말로 빛인가? 그렇게나 강렬한데 눈부시지도 않다. 이렇게나 따스한데 공기와 사물은 그 온기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 것은 아이에게는 어떠한 의미인가. 그와 상관없이 이 존재는 명백했다.
{너의 진실은 그들에게 진실이 아니야. 빛을 알지 못하기에 진실은 자체로 덧 없으로다}
그것은 아이의 중얼거림에 다시금 그렇게 '말했다' 지금 것 그래 왔듯이 다른 누구에게도, 울림조차 없는 들릴 수 없는 기이한 것이나 아이에게는 익숙할 터인 방식으로...
비틀어진 천좌(天座)의 치세도 오늘로서 막을 내렸다. 나, 개천교(開天敎)의 교주인 홍련마제(紅蓮魔帝) 채유라(蔡流羅)의 일생 최후 업적이었다. 무림의 끝없는 혈육도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고, 암흑과도 같던 지난 날들을 뒤로 보내고 개천교의 이름처럼 하늘을 다시 열어 새롭게 시작하리라.
그렇지만, 새롭게 열린 세상을 보지 못하고 나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업(業)이었다. 그 업은 내가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했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이자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을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
나는 눈 앞의 당신 인생을 비틀어놓은 장본인이었다. 정도(政道)로서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기에 사도(邪道)로서 본보기가 될 정도를 부숴야만 했다. 미래가 유망하던 한 유파를 내가 세울 마교(魔敎)의 명성을 위해서 파멸시켰으니까. 생존자인 너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복수를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나를 의지해왔다. 내가 그 복수의 대상임을 너는 몰랐다. 내가 그렇게 너를 속였으니까. 모든 것은 정도의 잘못이라고. 잘못되어 비틀어진 천좌와 천좌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정도를 꺾어 버리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정도의 짓이라 너를 속였다.
어쩌면 그 때부터 나는 나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내 업적을 마무리했을때 무대에서 퇴장할 때는 네가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알고있지 않았느냐. 네 칼끝이 향해야 할 곳은 저곳이 아니라.."
나는 수많은 피가 묻어 지워지지도 않는 내 오른손의 검을 무너진 옥좌로 향했다가 왼손으로는,
"이곳이 아니더냐."
나를 가리킨다.
"수년간 내가 염원하는 일을 위해 도구로서 일해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이제 그 검으로.."
피가 튀는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을 뒤로 하며 병사들은 앞으로 질주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를 치는 것이었다. 반란이라면 반란이었으나 명분은 그들에게 있었다. 이 일대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는 그야말로 영지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사는 악독한 이였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금을 수탈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자신의 유흥을 위해서 노예처럼 부렸으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영주에게 시달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칼을 들고, 창을 들고 공격했다. 영주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기사나 병사들 중에서도 마음을 돌려 반란군들에게 합세했다. 반란군들은 거침없이 영지를 점령했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영주가 있는 성 뿐이었다.
은색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성문앞에 서 있는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원래 감옥에 있던 이였다. 집안 대대로 영주를 지키면서 살아왔으며 자신 역시 영주를 보필할 생각이었다. 허나 이번 대의 영주의 폭정을 막아보고자 몇 번이나 간청했고 영지민들에게 도움을 몰래 주는 등 나름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보려고 노력한 이였다. 허나 그것이 너무나 거슬린 탓이었을까. 결국 사내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렇게 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영주는 결국 이 사태를 막아보고자 사내를 다시 풀어줬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보라고 요청하며 막기만 하면 너의 죄를 다 씻어주겠다는 말을 한 것을 떠올리며 사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그 분에게 희망은 없어. 아마도 잡혀서 죽게 되겠지. 아마 여기서 막아선다면 나 역시도 같은 운명을 걷게 되겠지. 허나 집안 대대로 그 일가를 모시고 산 나에게 있어서 다른 길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며 사내는 쓴 웃음소리를 냈다. 이 또한 운명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가가 대대로 수행한 그 임무를 마지막까지 하리라 다짐하며 사내는 반란군들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반란군이여. 허나 이 앞은 지나갈 수 없습니다. 굳이 지나가겠다고 한다면 저는 죽이고 지나가십시오. 가능한한 서로 피를 흘리지 않는 쪽이 좋겠지만... 당신들은 돌아가지 않을테니 저는 제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자. 오십시오."
이어 사내는 두 손에 검을 쥐었다. 마법도 일부 사용할 수 있으며 검술 실력도 제법 좋은 이였기에 어설프게 공격을 하면 오히려 죽을지도 모르는만큼 반란군들은 잠시 멈칫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용기가 있거나 사내에게 맞설 이는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내는 그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을 것이다. 일단 덤비진 않으며,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상황은 폭정을 일삼은 영주를 몰아내고 죽이기 위해서 반란군이 일어난 상태이고 충언을 했다가 감옥에 갇혔던 사내가 풀려나서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영주 이가를 지켜왔으니 자신도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일단은) 마지막 관문을 막고 있는 그런 상황이야. 일단은 판타지도 가능하다는 느낌으로 마법도 사용 가능하다는 설정이야! 이 모든 것이 꿈이라던가, 영화 촬영 끝! 처럼 갑자기 뜬금없이 상황을 종결시켜버리는 것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도 괜찮아! 사내를 아는 이도 괜찮고 모르는 이도 괜찮아. 설득을 해도 괜찮고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괜찮아. 사실 파엠 풍화설월 브금 듣다가 갑자기 떠오른 상황이라서 정말로 적대하고 죽이려고 해도 오케이야! 물론 설득하거나 대화를 시도해도 오케이야!
>>234 파죽지세. 반란군은 우뚝 섰다. 나아가자니 태산같은 굳건함이 가로막고 있고, 돌아가자니 국민들의 피에 물든 땅을 밟을 염치가 없다. 고작 20대 초중반의 어린 사내인데, 그 위압감에 병사들은 방어적인 태세를 취해 머무는 것이 고작이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오랜만이오, 내 벗이여."
어느샌가 최전선 앞에 기척을 나타낸 남성이 답을 해 오며 사내 쪽으로 살며시 거리를 좁힌다. 온통 검은색으로 싸맨 것이 그가 암살자임을 과시하는 듯 했다. 얼굴을 가리던 천을 조금 내려 얼굴을 온전히 내비치면 보이는 것은 텅 빈 두 눈이였다. 이 자리에 선 이상 결의가 비쳐질 법 한데, 그 푸른 눈에 비치는 것은 빛조차 반사되지 않은 암울함이였다. 그에 상반되게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훤히 웃으며, 단검을 도로 허리춤에 차더니 사내 쪽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한다. 그걸 보는 반란군은 더욱 경직되었으나, 듣자 하면 돌발행동을 하는 남성의 욕이 섞여있었다.
"동무께서도 알다시피, 난 살인을 즐기오. 다만 지금 그대는 미련하기 짝이 없어 살해가 꺼려지네-" "자고로 살인은,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꺽는 묘미로 행하는 것이지. 가축마냥 죽음을 받아드리는 중생은 찢어도 아무런 낙이 없더외다."
그는 사내와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탈옥한 남자였다. 사내가 그와 정녕 친했든, 남보다 못한 사이였든,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그는 제 아비와 윗혈육을 죄 극악무도하게 살해했으면서도, 투옥 생활 내내 내비친 모습은 평범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어린 청년의 모습이였던, 그런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오랜만에 본 친우에게 이런 부탁으로 눈을 띄우는 것도 참 염치 없다만, 옛 정을 봐서라도 들어 주면 안 되나?"
사내가 별 제지를 하지 않는다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피를 뒤집어쓴 그대의 주군에게 내 여동생의 혈흔까지 스며들었다네. 오라비로서 도리는 다할수 있게, 비켜주면 안 될까."
(대광장의 높디 높은 단상 위, 환호와 꽃다발의 세례를 발밑으로 두고 양팔을 펼치며 연설하는 한 장군, 그러나, 광장 구석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입구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아득한 모습이다.) 저기, 보여? 너는 나보다 키가 크잖아.(당신 바로 옆에서 벽에 기댄 채, 처량한 목소리로 묻는다.) 보일 리가 없으려나. 너무 멀어서...... 멀어서 차라리 다행일지도. 다들 시끄럽네. 엄청 기뻐하고들 있어. 바보들, 저 사람이 사실은 어떤 작자인지도 모르면서. (신경질적으로 깨진 바닥재를 차면서)저 광장 안쪽에 있을수록 돈 많은 중심가 사람들이지? 우리같은 부랑아들은 관심도 없는 사람들. (무기력하게 골목 안으로 고개를 돌리고)그래. 이게 현실이겠지. 그날 정말로 우리를 구해줬던,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옥에서 썩고 있는지도, 아무도 모르게 암살당했는지도 몰라.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그리고 저 가증스러운 돼지는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개선하고 있잖아? 우리에게는......(감정이 북받쳤는지, 말이 끊어진다.) 원수나 다름없는 저런 쓰레기가.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이렇게 피던데. 입에 물고 있던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 어설프다. 얼마나 어설픈지, 라이터로 불을 제대로 켜지도 못 하고 틱틱거리기만 한다. 이내 엄지 끝이 아린지 손을 탈탈 털기까지. 담뱃불조차 제대로 못 붙히는 걸 봐서야 아무래도 담배를 피워봤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러고보면 옷차림새가 교복이었다. 가지런하고 깔끔히 다림질 돼 있다. 단추 하나 푸르고, 타이와 조끼는 온데간데 없고, 셔츠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폼도 어딘가 어색하다. 답답한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에 꼽는데, 그러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이더니 일순간 흔들렸다.)
>>238 (그것도 하필이면 그 순간 눈을 마주친 인물이, 반듯한 생활과 모난 데 없는 온화한 성격, 완벽한 성적으로 마치 이것이 학생의 가장 바람직한 표본이라는 듯 선생님들의 총애와 학생들의 호감을 함께 사고 있는 범생이 반장이었으니. 그런데, 진짜로 학생의 바람직한 표본이라 할 만한 모범생이라면 결코 발을 들이지 않을 이 으슥한 기계실 뒤편에 마주친 이 반장의 입에는 모범생의 입에 물려있으면 안 될 것이- 네가 물고 있는 것과 색깔 조금 다를 뿐 내용물은 매한가지일 가느다랗고 길다란 막대기가 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반장도 너와 이렇게 눈을 마주칠 것을 예기치 못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곧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범생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한 번 건네고는 네게서 시선을 뗀다. 그리곤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려 한다. 그런데 주머니에 있어야 할 게 없는 모양인지 그는 주머니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다가, 다시 네게로 시선을 돌려오더니 그 반듯하고 온화한 모범생 미소로, 그 미소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네게 건네어온다.) 너. 괜찮으면 불 좀 빌려줄래.
>>239 (머리라도 한 대 맞고 세상이 빙글뱅글 도는게 아니라면야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입에 물고 있던 건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빼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거랑 반장 입에 있는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흔들렸던 눈동자는 이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왜 담배를 피려고 했더라, 쌩양아치 꼴통새끼라는 소리가 지겨워서였다. 담배같은 거 피워본 적도 없고, 술도 마신 적 없다. 교복은 수선한게 더 나아보이고, 검은 머리카락은 지겹고, 피어싱은 반짝거리고, 공부를 드럽게 못하고, 입 좀 험할 뿐인데. 운동 좀 한다고 너무한 거 아냐? 다 대가리 총, 아니 활 맞아봐야 해. 듣는 소리들이 지겨워서 욱해버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반장을 보면 아무래도 경험이 있어 보였다. 정보의 과부하.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눈인사짓에도, 불 빌려달라는 말에도 잠시 대꾸 하나 없었다.) …너 담배 피냐? 개어이없네. (불이라면 분명 라이터. 손바닥 위에 올려진 라이터와 담배 한 개피를 바라보다 손을 꾹 쥐었다. 욱하기야 했지만 찬물 샤워라도 한 듯한 일에 번쩍 정신 차리고보니 역시 이건 아무래도 아닌 짓 같았다.) 니 빌려줄 불 없어. (머리카락 헤집듯 굴더니 네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비장하기도 하지.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피할지 막을지는 모르지만 그럴 깜냥으로 다가가 손을 뻗는다.)
>>240 응, 피지? (대답이 태연하다. 태연해도 너무 태연하다. 너 스프라○트 마시냐? 하는 말에 응, 마시지? 하고 대답하는 수준으로 태연하다. 마치 자신이 흡연하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태도다. 네가 굳은 표정으로 저벅저벅 다가올 때도 반장은 한결같이 태연했고, 네 서슬에 반장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쉽사리 담뱃개비를 빼앗겨주었다. 그제서야 눈이 조금 커진다. 이 상황이 신기한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퍽 신기한 상황이긴 했다. 모범생의 흡연을 저지하는 양아치라니. 매정하게 톡 쏴붙이는 말에, 반장을 눈을 깜빡이더니 또 연하게 웃는다.) 범생이랑은 맞담하기 싫은가 봐? (정확히는, 모범생의 흡연을 양아치가 저지하는 이 상황 자체가 신기한 게 아니라- 저번에 담배 피는 모습을 학생부장님께 걸렸을 때, 불호령은커녕 너 뭐 고민 있냐? 하고 어른스러운 걱정 가득 담긴 어조로 자신을 배려해준 학생부장님의 모습이 기억나서였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에 대한 자상하기 그지없는 배려일까, 아니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현대의 권문세가라 할 수 있는 집안의 도련님께 제공하는 관대한 특혜일까- 어느 쪽이든, 학교 풍기의 최일선에 선 책임자조차 자신에게 그렇게 너그러운데, 자신을 턱 막아세우는 동급생의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방금 똑같은 짓을 하려던 처지인데도 말이다.) 뭐 상관없어... 그러면 그거 돌려줄래? 다른 데서 피던가 할게.
>>241 (빼앗은 담배까지 손에 두 개비가 쥐어진다. 이걸 어쩌면 좋은지 모르겠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건지, 그래도 돈 주고 산 걸텐데 버려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이다. 일단은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내가 피려던 거랑 라이터는 코치쌤 걸 쌔벼온건데, 입에 이미 물었으니 버릴 수 밖에 없고…. 코치쌤이야 친한 사이라 별 생각 없다만 반장이랑은 같은 반이란 것 빼고 접점이 없다. 과언이 아니라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이 없었다. 그러던 중 들려오는 단어. 맞담.) 하, 야. 나 담배 안 피거든? 꼬라지 이러면 다 담배필 줄 아는 건 공부 좀 한단 놈도 똑같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들켰으니 담배 핀다고 생각할 것도 같긴 하다. 하지만 억울했다. 불 안 붙였다고! 못 붙였다고! 손가락 아리다고!) 폐 썩어 뒤지는게 장래희망인가…. (혼잣말이라기엔 듣든 말든 상관없단 듯 궁시렁거렸다. 궁시렁거리는 걸 듣고 반장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간, 이 꼬인 상황을 어떻게 하는지가 문제였다. 학생부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이 다 같은 반응일테니까. 자신이 담배를 폈다고 하면 드디어 걸렸냐고 쥐 잡듯 잡을 것이고, 반장도 담배를 핀다고 말해보았자 반장이 담배를 피겠냐고 할게 빤해보였다. 한마디로 나 뭣됐는데?) 닌 뺏어간 거 돌려주는 사람 봤냐?
>>242 그렇지만 너 담배 피려고 하고 있었잖아? (반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인즉슨 정론이다. 행색이 양아치같건 말건, 오늘 담배 피는 게 처음이건 아니건, 담배를 피려고 시도하던 순간에 반장과 마주쳤다는 것은 사실이니. 그러다 그는 네 손에 들려있는 라이터를 보곤 킥킥 웃었다.) 첫 시도인 건 믿어줄게. (하고 웃던 반장은, 네 투덜거리는 소리에 웃는 소리를 거두고 평소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결국 겉모습 보고 떠드는 건 너도 피차일반인 것 같으니 말이다. 당연하다. 겉모습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그 사람의 표면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돌려줄래. 나한텐 그게 타이레놀 같은 거라서.
>>243 아, 안 피잖아. 눈 장식이야? (담배를 핀 적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머리를 벅벅 헤집는다. 그러고나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고갯짓으로 탈탈 털어 손으로 빗어봤자 결이 상할 만큼 상한 탈색모이자 염색모는 부스스했다.) 어, 그래. 참 고마워 돌아가시겠다. (이미 뭣된 건 똑같은데 담배 돌려주나 안 돌려주나 똑같지 않나. 돌려주길 바라는 반장을 빤 쳐다보다 샐쭉 웃는다. 교복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 말고도 무언가 들어있었다. 작고 긴 막대 모양의 불량식품. 아ㅍ로!) 야, 자. 내가 특별히 빌려준다. (분홍, 노랑, 연두, 하늘. 색도 참 유치한 불량식품이다. 분홍색을 집어 입에 물고 네게는 노랑색을 건넸다. 이런 거 먹다가 들키면 혼나는 것도, 담배 피다 걸려서 혼나는 것도 매한가지다. 코치쌤 너무 팍팍하다고.) 이것도 맞담이라고 대충 쳐.
>>244 (사람에게 있어 겉모습은 가장 먼저 마주치는 언덕이다.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일단 언덕을 넘어가봐야 안다. 그러나 일단 조금 올라서 넘어보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네가 건네주는 아폴로에서 반장은 생소한 것을 보았는지, 눈을 깜빡인다. 가면같은 미소 너머로, 호기심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응? (일단 내미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먹어본 적 없는 간식이다- 어떻게 먹는지는 안다. 누군가 먹는 것을 본 적은 있으니까. 다만 이렇게 손에 쥐어보는 게 처음이라. 살아가는 데 있어 쓰잘데기없는 것은 모두 쳐낼 것을 학습받은 삶인 탓에, 이런 것을 손에 대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마침내 견디다 못해 그런 쓰잘데기없는 것들에 손을 뻗치려 했을 때, 가장 먼저 닿은 게 담배였다는 것은 불행한 우연이다-. 반장은 조금 어색한 손짓으로 아ㅍ로를 꼼지락대다 입에 물고 안의 내용물을 깨물어서 이빨로 짜내 본다. 알기 쉬운 포도당 덩어리가 혀끝으로 떨어진다. 니코틴의 각성 효과에야 비할 수 없겠다만, 일단 달짝지근한 게 혀끝에 닿으니 기분은 한결 나아진다.) 응, 괜찮네. (반장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 편안해진다.)
>>245 (분홍색을 입에 물고 있다가 하늘색도 입에 문다. 물려있는 끝 부분만 이로 짜내 조금 먹었고 안 먹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하면 금방 그 이유가 밝혀진다. 그러니까, 담배는 검지랑 중지로 잡았지? 아ㅍ로 두개를 담배 개비라도 되는 듯 손가락 사이에 끼더니 후- 입바람 소리 낸다. 담배 피는 시늉 하고는 널 바라보며 또 얄궂게 웃는다.) 내가 이겼다? 난 두개, 넌 하나. (담배를 동시에 두 개피 피는 것도, 불량식품을 동시에 두 개 먹는 것도 그다지 이겼다 졌다 따질만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장난치는 기분은 유쾌하다고 웃는 모양이 개구지기도 하고 해맑기도 했다. 장난질이 끝나면 웃음도 금방 끝나고, 손에 들린 아폴로 봉지를 빤 쳐다본다. 걸리면 분명 뒤지게 혼나는데, 쓰읍.) 너 가져라. (네게 내밀고는 잠시 시야를 멀리도 던진다. 짬 처리하는게 아니라는 핑계를 고민 중이었다.) 뇌물. (피지도 않은 담배를 굳이 선생님들한테 이르지 말란 건가보다.)
보라빛 자색 머리카락을 지난 사내는 달을 가득 담고 있는 호수가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 그 호수를 바라봤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쁜 풍경을 과연 이후에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사내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뭐가 어찌되었건 내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고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마법사 동료의 전송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과 동료들은 이 세계에 전쟁의 불씨를 피운 세력들의 본거지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살아남을지, 죽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처음에는 으르렁거리기 바빴으나 어느 순간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동료가 되어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 하지 않았는가.
사내는 원래 그저 한 작은 왕국에서 기사로서 일하고 있던 이였다. 허나 그 왕국은 지금 이 지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를 어두컴컴한 파멸의 어둠 속으로 밀어넣으려고 하는 '그 세력'의 암약으로 많은 이들이 제물이 되어 사라졌으나 사내는 겨우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에 동료. 그리고 더 나아가 왕족들까지. 정말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제물이 되어 소멸했으며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였다. 그 날 이후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그들의 존재를 쫓았다. 그들을 쫓는 것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뭐든지 이용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쫓는 다른 이들과 함께 행동했고 지금 이 순간에 온 것이었다. 다양한 종족이 있었고 그 종족의 차이로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으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지금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반드시...'
그들은 강하고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다. 과연 동료들 중에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마 죽을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최대한 제 가슴 속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송곳니를 그들의 목덜미에 꽂아넣으리라. 그렇게 사내는 다짐했다.
부스럭. 생각을 다잡으며 호수를 바라보는 와중 풀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 동료? 허나 살기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료인가? 어느 쪽이건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내는 입을 열었다.
"누구야? 이 시간에 잠 안 자고 호수까지 나온 이는? 나처럼 마지막 풍경이 될 수도 있는 이 풍경 보려고 나온 인가?"
괜히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하면서 사내는 뒤를 확인하려고 했다.
#모든 싸움의 결전을 앞둔 밤에 제 삶의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르는 호수를 바라보는 와중에 발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는 상황이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상황이 바로 끝나는 그런 상황만 아니면 좋겠어!
#온 이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동료도 괜찮고 결전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응원이나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찾아온 이도 괜찮고 하다 못해 이간질이나 타락을 목적으로 온 적이라는 이도 상관없어. 다만 살기가 없다는 상황으로 썼으니 막 살기 풍기면서 죽이려고 왔다..같은 상황만 아니면 좋겠다 정도?
>>247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풀숲을 해치고 나타난 것은, 곰처럼 둥글고 우람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솥뚜껑처럼 큰 손으로 후드를 벗자, 싹싹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사람좋은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이고, 기감도 좋으셔라. 일부러 살금살금 오고 있었는데 다 눈치채시고. 역시! 용사님이십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사내를 추켜세우던 그는, 끙차,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매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건이 한가득 들어있는지, 미어터질 듯 빵빵한 배낭은 내려놓는 소리도 퍽 육중했다. 무거운 가방 탓인지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켠 중년인은 가방을 열고 물건들을 하나 둘 씩 꺼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한두 번 읊어본 게 아닌 듯한 장사멘트가 청산유수처럼 술술 쏟아져나왔다.
"자자, 내일이면 결전이시죠? 마침 여기 기깔나는 포션들이 있는데요, 빨간 포션, 파란 포션만 있는 게 아니라 상태 이상 종류별로 요긴한 포션에, 피가 멎고 마나도 소량 회복해주는 보라색 포션까지! 위험한 전투일수록 보급은 단단히 해두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없으면 챙기고, 있어도 더 쟁여두고! 포션 한 병에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습니다요, 나리~"
과장된 태도로 겁을 주듯 말하다가도 능청맞게 웃어 보인 상인은, 이내 큼직한 양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더욱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가격을 들으시면 고민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요. 근데 아시다시피 여까지 오기가 많이 빡세잖습니까. 마물도 심심찮게 나오고 말이지요. 제 목숨값 좀 보탠 가격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사... 응원하는 의미에서 샘플도 넉넉ㅡ히 드리겠습니다요, 헷헷헷."
>>248 사내는 눈앞의 중년인을 바라보며 일단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말 그대로 포션을 팔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일까. 물론 저 설명만 들으면 저 포션들은 확실히 탐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대로 돈을 써도 되느냐는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개인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당연히 저 포션들을 구입했겠으나 지금은 개인이 아니라 동료가 있었고 여정을 위한 금액은 공동의 것이었으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개인적으로 쓰기 위한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 말을 들어보면 가격이 꽤 비싼 모양이었으니까.
"장사하신다고 수고가 많으시네요. 여기까지 오신다고 말이에요."
허나 마냥 마음을 놓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방심하면 위험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바로 내일이 모든 것이 끝날지, 혹은 자신이 죽을지 알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 갈림길에 발을 들이밀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아는가. 저 상대가 그 작자들에게 매수당한 존재일지. 포션이라고 말을 하나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사람 속마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보급품은 제가 일방적으로 구입할 순 없거든요. 제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몇 개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말에 따르면 가격이 제법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용사는 아니니까 그 호칭은 가급적... 딱히 사명감이나 정의감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자신에겐 너무나 과분한 호칭이었다. 정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때는 동료들까지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런 마음은 일단 지금은 접어두기로 하며 그는 숨을 내뱉으며 저 호수에 떠 있는 달처럼 사르륵 물에 녹이려고 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중년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되죠? 일단 가격을 좀 들어볼게요. 그보다.. 여기까진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도 궁금한데."
>>249 "우리 똥강아지들 안 굶길라면 마수밭이고 뭐고 건너야지요. 돈 없는 게 마수보다 무섭습니다요."
상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넉살 좋게 주워섬기면서도, 서글서글한 눈웃음 너머로 용사의 낯빛을 살폈다. 제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어딘지 경계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거 참, 젊은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민간인이라도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입에 풀칠할까 말까인데. 뭐, 샘플 한 병 정도는 먹어드려야겠구먼, 에잉. 넉넉하게 챙겨왔기에 망정이지. 그런 궁리를 하는 사이,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보급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몇 병 구매할 의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딘가. 서비스 넉넉히 얹어드리고 보급을 관리하는 양반을 소개받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사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용사라는 호칭이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십니까? 용사님이 싫으시면 뭐 총각이라 불러드릴깝쇼? 아니면 젊은이?"
거 까다로운 양반일세,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서글서글한 영업용 미소를 한가득 지어 보인 채 넉살 좋게 대꾸하던 상인은, 사내가 가격을 묻는가 하더니 이내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여기까진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묻자 좀은 과장된 투로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이고야, 이 대륙에 여러분들 행선지 모르는 작자 있으면 간첩이우다. 간첩 거 속고만 사셨나. 아유, 됐습니다요. 자, 보십쇼."
먹고살기 힘들구먼, 참말로. 상인은 작은 칼로 제 손을 얕게 그었다. 보란 듯이 펼쳐 보인 솥뚜껑만 한 손에 그인 얕은 상처에서는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안 아픈 것은 아니었는지, 아야야, 하고 엄살만은 아닌 듯한 앓는 소리를 내며 빨간색 포션이 담긴 조그마한 샘플 병을 따고 쭉 들이켜자, 그의 손바닥에 난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갔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상인은 다 아문 손으로 입가를 닦아낸 뒤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맛은 없습니다. 약이니까요. 그래도 보시다시피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확실합니다요. 이건 샘플이고, 빨간 포션, 파란 포션은 단품으로는 이 정도 양에, 한 병당 3골드에 드리고 있습니다요. 보라색 포션은 5골드, 상태 이상 포션은 4골드." 가방에서 포션 병을 하나씩 꺼내 보이던 상인은, 이내 가방 안에서 큼직한 상자를 꺼냈다. "이게 원래 추천해드리려던 상품인데, 빨간 포션, 파란 포션, 보라 포션 다섯 개씩에, 독, 마비, 동상, 화상, 환각에 뭐, 석화, 수면, 감전... 뭐 그런 각종 상태 이상에 쓰는 포션 세트까지, 다 해서 87골드인데, 오늘만 특별히! 할인해서 80골드에 드리고 있습니다요. 물론 이렇게만 드리는 건 또 섭하니께,"
상인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제 엄지손가락만한 주머니를 상자 위에 얹었다.
"그리고 이게 최근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제품인데, 포션 맛을 못 견디시는 분들을 위해 개발한 환약이외다. 이것도 씹으면 더럽게 쓰우만, 안 씹고 넘겨도 아까 포션 못지않게 효과가 즉각적이지요. 포션 세트 사주시면은 서비스도 서비스지만 건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큰맘 먹고 빨간 거 세알 챙겨드리리다. 어떠십니까요?"
타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엔 경계를 풀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방침이었다. 어쩌면 한순간에 왕국이 사라져버린, 더 정확히는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모두 재물이 되어 사라져버린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사내 역시 미소를 유지했다. 아마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진 이런 자세를 아예 없앨 순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상인의 행동에 집중했다. 제 손에 상처를 내니 붉은색 피가 방울을 맺어 드러났다. 그러다 포션을 먹더니 그 상처가 회복되는 것에 상당히 효능이 좋은 포션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장사 수완이 좋으시네요. 보통 이런 상인은 보기 힘든데."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절대로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감탄하듯 이야기하며 사내는 제 주머니를 생각했다. 80골드라고 한다면 그렇게 나쁜 금액은 아니었다. 저 상인이 먹은 샘플 이외에는 모두 거짓 포션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독이 있다면 제 동료 중 하나가 바로 간파할 것이고 효능이 안 좋은데 효능이 좋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조차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는 일이고 효능이 안 좋은 포션도 쓸모는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선 일단 속는 셈 치고 구입하는 것이 좋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렇다면 사도록 하죠. 어차피 내일 있을 싸움에선 많은 격전이 예상되니까 포션은 있어서 나쁠 것이 없으니까요."
80골드. 주머니에서 커다란 10골드를 8개 꺼낸 후에 그는 상인에게 내밀었다.
"여기까지 온다고 고생 많았는데 바로 돌아가진 마시고 근처에 있는 여관이라도 잡아서 쉬세요. 아니. 이미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손바닥은 깨끗이 아물었어도 채 가시지 않은 얼얼한 느낌에 버릇처럼 후후 불 뻔 했으나, 상인은 엄살을 피우는 대신 가볍게 털어내고는 히죽 웃어 보였다. 이내 사내가 의혹을 거두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칭찬을 건네자, 상인은 껄껄 웃으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우리 강아지들 맥이고 입히려니 이래 됐지요. 아이고, 나쁜놈들 잡아서 가난도 잡히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요, 열심히 만들고 파는 수밖에요!"
진담과 너스레를 섞어 주워섬기며 웃으려니, 사내가 구매 의사를 밝히며 10골드짜리 금화 여덟 닢을 꺼내 내밀어왔다. 상인은 지금까지 지어 보인 미소 중에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넙죽 대금을 받아 들고는 주머니에 넣은 뒤, 포션 세트가 든 상자에 환약 주머니를 넣어서는 사내에게 건넸다.
"아이고야, 시원시원하셔라!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요. 재고는 이게 전부라 날이 밝는대로 돌아가봐야 합니다만 끝나실 때쯤 신제품까지 재고 꽉-꽉 채워서 또 오겠습니다. 그 때도 많이 사주십셔! 건승을 빌겠습니다요~"
상인은 금새 홀쭉해진 가방을 한 팔에 대충 매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여보인 뒤, 뒤 돌아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한껏 흥에 겨운 콧노래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지다, 이내 사내의 뒷모습과 함께 멀어져갔다.
뭍에서 난 것들은 하늘을 향해 위로 자란다. 그렇다고 모두 하늘을 동경하지는 않을텐데 이 아이는 유달리 그것이 심했다. 눈이 부신 푸름을 눈에 담겠다고, 학교에서 도망쳐나왔다. 뜀박질로 모잘라서 자전거를 굴리기 위해 발을 세차게 굴렸다. 평일의 대낮은 의외로 한적하다. 모두가 회사에, 학교에,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속도를 내기 좋았다. 바람도, 여름이 다가온답시고 나날이 물씬 짙어져만 가는 녹음도 달가웠다. 풍경 구경에 혼이 빠져 점점 가까워지는 당신을 보지 못 했는가보다. 아이 판단에 브레이크로는 부족하겠고 방향도 꺾어야겠다 싶었다. 급하게 잡은 브레이크와 갑작스런 방향 꺾기, 큰 소리가 나는 건 응당 당연한 일이었는데 꽤 뒤늦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 넘어지겠다고 버텨보려한 것인데 자전거거도 아이도 나란히 바닥행이다. 그래도 넘어짐을 미뤄보겠다고 난리친 덕에 다침은 덜 하겠다.
약간은 맥 빠진 비명소리가 바로 뒤를 이었어. 볼품없는 아저씨는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지. 이 아저씨는 말이야,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업무에, 야근에, 사무실에서 나타나는 온갖 인간 군상극에 결국 못 견디고 뛰쳐나와버렸지만 말이야. 나올 때까지는 당당하게 걸어나왔는데, 막상 나오고보니 불안감이 가슴을 지배했지. 어쩌면 그래서일거야- 자꾸 핸드폰을 쳐다보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크게 듣고 주변을 의식하지 못했던 건. 그래서 이쪽도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아이를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그는 당황한 듯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한번 보았다가(아직 약정이 한참 남았는데! 하지만 다행이 손이 좀 까지긴 해도 핸드폰은 지켜낼 수 있었어.), 바로 넘어진 아이에게 다가갔어. 엉거주춤, 주저앉은 상태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다가가는 모양새가 아주 좋진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마저도 저를 바라보며 묻는 것에 멈칫하고 말았지.
"학생 ㄱ..아니, 나야 괜찮은데-"
다시 다가가며, 아이를 훑어봤어. 아까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던데...자전거를 타면 어디 하나 까지기 쉬운데...하면서 말이야.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혼돈을 만드는 신이 나타났고 그 신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났다. 세상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모든 것을 지워없애려고 하며 아무런 질서도 없는, 그야말로 약육강식과 다를바 없는 지옥같은 세상을 만들려는 그 움직임에 맞서 신은 이 모든 혼란을 끊어 없앨 수 있는 '용사'를 이 세상에 내려보냈다.
고아 출신으로서 열심히 공부하여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한 사내는 어느날처럼 강의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자취방에 들리기 위해 길을 걷다가 신호를 위반하고 가속하는 차에 치일뻔 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했으나 차에 부딪치기 직전, 신은 그 사내를 불러들였고 용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했다. 이어 신은 어느 한 제국에 계시를 내렸고 마법사들은 신의 계시에 따라 사내를 이 땅에 소환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 그저 혼란만 느끼던 사내였으나 제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적응했고 이 세상에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파악했고 조금 오래 고민을 하던 끝에 이 세상을 위해서 검을 들고 싸우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그 여정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크게 동료들과 싸우는 일도 있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수차례 있었다. 허나 최종적으로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신을 봉인하는데 성공했고 이 세상에 평화를 가지고 왔다. 물론 그것은 용사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사명을 마치고 사내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개의 선택지였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것인가. 사내는 자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곳에 오고서 삼 년. 동료들과 정도 많이 들었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허나 그런 자신을 결국 이세계에서 온 이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견제를 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왜 빨리 돌아가지 않냐고 눈치를 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나마 제국 자체에서 무슨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사내는 나무에 기댄채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달을 조용히 바라봤다. 너무 오래 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 했으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에 대해서 고민에 고민을 하며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한번씩 팔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는 것이 딱 고민하고 있을때의 버릇 그 자체였다.
조용히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고개를 내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정말 말 그대로 맥커터짓.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당신에겐 볼일 없어요) 이런 것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와도 괜찮아. 굳이 이런 상황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면 사내에게 볼일이 있어서 오는 이였으면 좋겠다 정도? 그래야 서로서로 핑퐁이 가능할 것 같아서! 로맨스건 그냥 동료끼리의 추억 그리기 이야기건 다른 소소한 이야기건 그건 정말로 어느 쪽이라도 괜찮아!
식을 마치고 나니 피로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였던가. 한때는 결혼이 두 사람의 사랑에 의해 맺어진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어떤 결혼은 축하보단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다. 제겐 이 결혼이 그랬다.
제국 북부의 겨울은 아주 혹독하고 춥다고 했다. 제가 살던 왕국은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였다. 국토가 작으니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날씨였다. 잎사귀가 둥근 나무, 서늘하지도 따갑지더 않은 햇볕, 바람에 섞여드는 달큰한 꽃향기…. 그런 것들을 사랑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이곳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 그보다 앞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곳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인 방은 적막하다. 대공비의 방이라고 했다. 방은 따뜻하지만 아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따금 나무타는 소리와 바람에 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데 물 밖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물 속에 있는 사람이고. 살아남으세요. 가능하다면 행복하게 살아요. 누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절박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덕분에 숨은 붙어있지만 이걸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래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고해성사 같은 생각은 짧은 노크에 끊어지고, 침묵을 긍정이라 생각한 듯 천천히 문이 열린다. 허공 어드메를 쳐다보던 눈이 느리게 움직였다. 마주치는 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 망국의 공주와 제국의 북부대공이 정략결혼함.. 로판배경 적폐 설정입니다 ^^.. 삶의 의지 다 잃은 공주가 oO(언젠가는 죽인다..)는 생각과 함께 삶의 의지 되찾은 순간
사내가 바라본 거기에는 언제 부터인가 그곳에 있었던 피와 같이 붉어 강렬하고, 새하얀 눈과 같이 선명한 화려한 형상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앳돼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한 어느 형체가 있었다. 그것은, 소녀는 붉은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꽃송이를 한 손에 쥔 채, 사내와 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으며, 당신이 바라고 맞이하고 싶은 결말이란 무엇인가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소녀 이였고 사내에게 갑작스레 그렇게 물었다. 소녀는 그 물음 만을 남긴 채, 그저 손에 쥔 꽃과 사내를 바라보면서 마치 멈춰버린 듯이 그대로 있었다
발소리가 난 곳에 서 있는 소녀가 사내의 눈동자에 비쳤다. 강렬하면서도 선명한 붉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보아 귀족가의 사람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마을 사람인 것일까. 아니. 어쩌면 전자일 확률이 더 높았다. 저런 드레스를 평범한 사람이 입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 허나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 어느 한 가능성에 몰두하지 않기로 생각했다. 손에 쥐고 있는 아름다운 꽃송이를 눈에 담던 와중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의 질문이었다. 이 세계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바라고 맞이하고 싶은 결말은 무엇인가. 무슨 의미인 것일까. 일단 질문을 들었으니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친구와 인연을 얻었고 동시에 이전에 살았던 삶을 잃었고 내가 바라고 있는 결말은 글쎄.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데. 불행하려고 살려는 이는 없고, 나 역시도 결국엔 뭐가 되었건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이세계에 와서 친구와 인연을 얻었으니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전에 살던 세계에서 이곳으로 왔으니 이전에 누리던 평범하던 삶을 잃었으니 절로 그렇게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것을 묻는건지 물어도 될까? 그보다 어디의 사람이니? 혹여나 귀족가의 고귀한 혈통이라고 한다면 무례를 용서해주겠어? 아직 내가 귀족 가문이라던가 이런 것에 대해서 조금 무지해서. 외우고 익히려고 노력을 하긴 하는데."
말끝을 흐리면서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선 면목이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허나 어느 정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이 세계'라고 말을 굳이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이세계에서 온 이라는 것을 아는 이 같았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는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속할 수도 있는 이가 있을 수 있는거야? 결국 어딘가에는 속하는 것이 사람이고, 설사 사람이 아니라도 어딘가에는 속하는 법이잖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신에게 문제를 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혹은 자신을 시험하고 싶은 것인지. 어느 쪽이더라도 질문에 명확한 답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소녀는 자신에게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네가 누구인지 맞춰달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냥 지나가던 근처 마을 사람으로밖엔 생각할 수밖에 없는걸."
어쩌면 자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적당히 대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일단 그 정도로 해석을 마치기로 하며 사내는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지나가던 마을 사람은 무슨 일로 나에게 이런 것을 묻는지 물어도 괜찮을까?"
이번에는 또 뭐라고 대답할런지. 수수께끼 비슷한 것을 내려고 할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명확한 답이 나올지. 그래도 복잡한 생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256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북부와 저 멀리 떨어진 남쪽의 국가를 일방적으로 침략해놓고, 무리한 전쟁으로 일어난 불상사들을 전부 북부의 전쟁 불참으로 돌리다니요. 국왕 본인이 신성자로 나서서 직접 이 정략 결혼을 맺어버린 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거절해야만 합니다, 대공. 지금까지 저희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아니면,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계신겁니까?」
자신의 절친한 친우이자 서기관의 목소리는, 덧없는 먼지바람처럼 차갑게 언 얼음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이젠 어찌해도 들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서기관이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은 무슨 표정을 지어보였던가. 차갑게 식어버린 나뭇가지의 살 떨리는 소리가 그보다 더 매서운 바람에 묻혀간다. 이 보여주기 식의 결혼식 내내, 자신은 해야할 일이 많았다. 모든 것을 감안해둔 바, 그저 대공으로써, 북부의 주민들을 위해 최선의 최선만 다하는 것. ……그런데 어째서 집중하지 못했지.
결혼식 내내,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빛을 떠올린다. 공허해보이던 표정이 퍽이나 망국의 공주다웠더랬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행복을 빌어주며 축복의 언사를 날리던 주민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로 저에게 무언가 말을 했었던 것 같다. 무어라 했었지. 입모양을 떠올리던 와중, 한밤중의 산책이 갑작스레 끝이 났다. 이전까진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었던, 대공비의 방. 그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자작나무 타는 소리에, 무심코 그 문을 열고 말았다.
어둑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허무의 장막을 한꺼풀 벗어낸 것 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닮아보여서.
“그대. 방은 춥지 않은가.”
실없는 소리를 흘려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 지 훤히 보여, 괜히 난로 옆에 쌓여있는 장작을 집어들어, 검붉게 부서져내린 재 사이에 던져 또다시 불길을 새로 쌓는다.
/ 로판이랑 북부대공을 잘 접해본 적이 없지만 소재가 흥미로워보여서 열심히 이어봤어 o>-<! 고치고 싶은 부분 있음 이야기해줘~~!
안 부딪히겠다고, 안 넘어지겠다고 그리 안간힘이었건만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괜찮다고 답하는 당신의 말에도 죄송하다고 한 번 더 사과한 이유였고, 눈썹이 추욱 처진 모양새가 꾸밈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두서없이 미안하다고 말해버린 것도 지금 되짚어보자니, 한참 어른에게 애매하게 반말과 존댓말 그 어중한간 사이를 줄 탄 것만 같아 양심이 쿡 찔린 아이였다. 허겁지겁 일어난 당신 못지 않게 부산스레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아이는 행동을 서둘렀다. 일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한 번 폴짝 제자리에서 뛰어보인다.
“완전 괜찮아요, 저.”
고 사이 방글방글 웃는 낯에 기운찬 행동하며 괜찮아보이기는 했다. 다만 아이가 아무리 활기차더래도 철인은 아니니 생채기는 나있었다. 한쪽 무릎이 까져있었는데,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이 아이 이미 무릎에 드레싱 밴드라던지 반창고가 두어개 붙어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제 상처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고, 무릎 살펴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손만 아주 유심히, 찬찬히, 시간을 들여서 빤히 살펴보았다. 주저앉아 있었으니 상처가 났다면 손바닥에 났을 거라는 아이의 추론은 들어맞았다.
“아저씨 손! 손 까졌는데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대, 손 까먹어놓고서─핀잔을 하지는 않았는데 왠지 핀잔 소리가 들리는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262 대답이 어렵지 않은 질문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내놓은 애매한 답.
“…덕분에요.”
이 결혼이 내키지 않았던 건 꼭 저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타인을 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테니 제 얼굴을 보는 게 불편하겠지. …제 눈 앞의 사내가 사람이라면. 찬찬히 얼굴을 살핀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 그에겐 제가 예측한 불편함이나 부채감이 없다는 사실만 깨닫는다. 문득 생각한다. 사는 동안 지옥에 있는 건 나뿐이겠구나. 죽이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죄인이 된다면 아마 죽어서도 지옥에서 살게 될 것이다.
“당신도 피곤할 텐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요.“
아까보다 환해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도 없는 말. 눈을 바라보고 할 자신은 없었다.
“…원하지 않았던 결혼인 건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나까지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시야에 문득 약지에 낀 반지가 걸린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라고 했던가. 이것까지 내어준 건 나름의 죄책감 때문인가.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것 없지만.
“괜한 의무감 같은 것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쪽으로든.”
어떤 것이든 모른 척 눈 감아주겠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당신이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이든, 도무지 제게 정을 붙일 수 없어 다른 이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깨닫지 못했지만, 일종의 방어기제이기도 했다. 최대한 타인처럼 지내야 당신을 죽이려는 이 마음이 저를 갉아먹지 않을 테니.
/ 안녕, 찔러줘서 고마워~ 이쪽은 대공이 전쟁에 나갔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썼는데 괜찮을까? 혹시 잇기에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해줘 ^ㅁ^
결과적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사내는 이 철학과도 같은 심오한 말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대체 이 소녀는 누구란 말인가. 뭔가 자신에 대해서 굳이 언급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꼭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기에 영 석연찮은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뭔가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런 것이 경계심을 사게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할 나름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기보단... 초면이기도 하고 난 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리고 너는 알려주지 않잖아? 그렇다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 편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면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여러번 도리도리 내젓는 것이 이런 타입은 영 익숙치 않은 타입이었다. 다른 가치를 부여하려고 해도 그냥 지금 시점에선 지나가던 마을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고 자신은 대답을 한다. 그 이상의 가치가 나올 순 없었다. 적어도 사내는 그러했다.
"뭔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역사를 기록하는 이 같네. 아니면... 긴 세월동안 인간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신..같은 존재려나?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확실히 궁금하긴 하네. 나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이 될지 말이야."
자신이 만약 떠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 사실은 영원히 알 수 없을테지. 물론 여기에 남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일 또한 없겠지. 결국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자신이 알 길은 없다는 결론에 도다르며 그는 조금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요. 어떠한 것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것을 보고, 듣고, 만지며 다루는 것에도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너는 무엇이냐. 라고 묻지 않으셨나요? 단어는 다르지만 그렇게 하셨지요. 여럿 되고, 세월에서 땅과 바다의 이들이 저를 두고 가로되, '붉은 뱀' 또는 '신이 품은 독'이라고 칭하고는 했답니다. '결말을 품는 것'이라고도 이어지네요 무엇이라 칭하여져 였더라도 저, 그 이름 사마엘은 줄곧 같았답니다"
사내의 그러한 말에 소녀는 한 손을 들어서는 그 손을 스스로의 입가에 가져다 대어서는 가리어보이며 사내를 바라보는 그 두 눈을 가늘게 뜨도록 하며 그렇게 말했다
"역사란 세상의 기억, 그렇기에 기록하는 이는 제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독자일 뿐이랍니다. 또는 그 속의 배역이거나.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역시 생각하기에 다르지요. 저희가 이렇듯 독자이자 배역이라면 그 호기심이, 열망이 되어 그 이야기가 한층 더 와닿겠지요"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소녀는 입가를 살짝 가리던 손을 내려서는 원래의 자세와 함께 눈을 또렷하게 떠 사내와 주변을 흘기어 바라보더니 거기에 첨언하듯이 하는 태도로서 그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드릴게요, 그러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에요. 피는 활력을 뜻하니 생육을 모아 피우는 것이니, 이를 간직할 수 있어요. 당신이라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에요. 설령, 그것이 단지 그 눈에 미를 느끼는 것 뿐이 전부라고 할 지라도"
그리고 사내의 물음에 소녀는 그때 돌연 사내를 향하여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지금까지 줄곧 손에 쥐고 있던 그 붉은 꽃을 사내를 향하여 건네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붉은 뱀, 신이 품은 독. 결말을 품은 것, 그리고 사마엘. 처음엔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더 엄청난 이라는 것을 짐작하며 사내는 침을 삼켰다. 허나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신과도 싸워서 봉인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사내는 떨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약간의 경계심은 품었으나 그것도 잠시. 상대가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한, 자신 역시 무작정 적대하거나 위협할 생각은 없었다. 설사 저 사마엘이라는 이름이 자신이 아는 사마엘이라는 존재와 같은 이라고 할지라도.
"확실히 그 말대로네. 그래. 독자일 뿐이겠네. 혹은 배역이거나."
그렇다면 저 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냥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그저 관망하고 싶다는 것일까.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그런 추측을 세우나 굳이 더 특별한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주겠다는 그 붉은 꽃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사내는 그것을 조심히 잡았다.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인다라는 말에 그 아름답고 붉은 꽃을 사내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제와서 어디에 유용하게 쓰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왕 줬으니까 죽지 않도록 화분에 잘 넣어둬야겠는걸. 관리도 하고. 아무튼 고마워."
그것보다 이거.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한다면 가져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면서 고개를 갸웃했으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 세계에 왔을 때 알몸으로 온 것은 아니었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나 자신과 접촉한 것 정도라면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 꽃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거나 그런 것이 있을까? 어쨌건 식물이니까 관리에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잖아? 기껏 받았는데 며칠도 안되서 말라 죽이거나 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이전에도 앞으로도 계속 쓰여져 나갈 그 이야기들이 저희와 함께함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도 자아낼 것들을 기대가 된답니다. 이미 보았던 것과 다름이 없을지라도 그것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내가 긍정하여 그리 말하자 더불어서는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시작이 끝으로서 존재한다면 끝 또한 시작이 될지어니 본래 의도에 맞게 당신에게 쓰여도 좋고, 다른 누군가에게 쓰여져도 좋은 것이 되겠지요 또한 이대로 다른 누구도 아닌 이 꽃만의 결말을 보고자 곁에 두는 것도 괜찮겠지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쓰이지 않는 것이 말로 비로소 가장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현상과 결정에 도달하기에 까지 기다림 뿐."
이어서 사내가 소녀가 건네주는 그 꽃을 받아들이며 그리 말하자 그에 맞추는 것처럼 소녀는 마치 설명하듯이 덧붙이도록 말했다
"다른 생장하고 번성하는 것과 같이 대우하여 주세요. 줄곧 곁에 두고서 다른 것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겠지만 그리 하여 준다면 기뻐할 것이에요. 활력을 조금씩 부어 준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265 한참동안이나 답이 돌아오지 않아, 불꽃에 눈길을 빼앗긴 사람 마냥 난로를 내려다보다 들려온 대답에 천천히 그 얼굴을 돌아본다. 자신과 가장 먼 곳에 있던 당신에 대한 소문은 자그맣게나마 들려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하고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음은,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이 만들어냈음이리라. ─그러나 최악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어미처럼 울고, 소리지르고, 자신의 몸을 찢진 않았으니. 하지만 그런만큼, 당신은 마치 모든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이끌고 간 지원 병력이 막 당신의 영지에 도착했을 때, 전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피가 얼굴에 묻은 지도 모르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당신의 얼굴을 기억한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좀 더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말, 혹은 사려깊은 위로의 말을 내뱉을 순 없는걸까. 여태껏 그래왔기에 단 한번도 자신의 방식에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지만, 날카롭게 다려놓은 듯한 송곳 같은 말들에 당신이 자신을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이 북부에서 원활히 살아남기는 힘들기에. 당신의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대로 자신에게서 신경을 꺼달라는 강력한 의사로 전달되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야만 했다.
“오래 붙잡아두진 않아. 그대도 피곤할 테니.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을 가장 먼저 전해야할까. 자신과 국왕의 정치 싸움에 억울하게 휘말려버린, 한 나라의 공주였던 이에게. 다양한 생각들로 인해 피곤한 기색을 띈 얼굴을 손으로 반쯤 쓸어내리고는, 끝내 최악의 방향으로 일을 연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당분간은. 눈에 띄는 행동도, 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부탁할 것이 있다면 다른 하인들이 아닌, 서기관이나 그의 조수를 부르고. 식사는 내가 직접 초대한 것 외에는 금하도록. 서신 전달 역시 내가 직접 하겠다. 그리고 최소 한달 안에 국왕의 부름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그대가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이건 의무감 같은게 아닌, 북부를 위해서이니.”
여태껏 수많은 전쟁을 벌여오며, 그와 동시에 상대 적장과의 수싸움을 벌여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이는, 다름아닌 국왕이었으니 원천을 차단하는 것이 맞겠다 판단한 것이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제 할말을 전부 전해둔다. 다만 마지막 말 만큼은 조금의 망설임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의무감,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이었기에.
“그리고, …….”
여태껏 사람과 이야기하며 시선을 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당신의 표정을 보고있는 것만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다듬고, 입을 연다.
“그 반지는 빼지 말아주었으면 해. 부정한 것을 걷어내는 신력이 담겨있으니까.”
─당신이 살아주었으면 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것 뿐이었다.
/응응! 생각해보니까 전쟁 가장 끝자락에 와서 도착한 모습을 보여졌다~ 설명이 빠져있었네! 이번에 추가해서 넣었어!
무릎을 지적당한 아이는 그제서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살짝 발을 뻗어서 무릎을 보니 새로운 상처가 나 있긴 한데 심한 것도 아니고, 자전거에서 넘어졌는데 이 정도 다쳤다면 아주 튼튼하지 않은가. 여기저기 다치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라서 별 대수롭지 않단 반응이다. 하지만 핀잔어린 눈길과 함께 안 괜찮아보인다고 하니, 어떤 말을 해야하나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번뜩 스치는게 있었다.
“전 어려서 괜찮은데.”
히죽 말려올라가는 입꼬리로 만들어진 미소가 방금 지은 웃음과는 사뭇 달랐다. 방글방글 웃으며 괜찮다 할 때는 해맑기만 했는데, 이번 지은 웃음은 보고 있자면 얄밉지 않을까. 아이는 약국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더니 넘어진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앞바구니에 걸친 채 바닥에 누워있는 가방도. 두뇌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실수를 한 건 자신, 저 때문에 다친 것은 이 아저씨. 약국까지 자전거를 끌고가는 것보다야 뛰어갔다 오면 훨씬 빠르고, 상처가 작단들 어쨌든간에 제 부주의로 다친 사람이고─아저씨한테 맡겨놓고 혼자 다녀와야겠다─결론이 나는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저 가방 안에 밴드는 있어요! 여기 얌전히 있으시면 제가 후다닥 다녀올게요. 그리고─”
읏차─기합이라기엔 한 번 시늉이라고 하려고 내본 소리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자전거를 덜커덩 일으켜세웠다. 가방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꽃을 키우고 기르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거겠지?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어쨌건 받은건데 방치하기는 좀 그렇잖아. 활력을 어떻게 부어줘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약간 마법적 힘이 담긴 무언가인지. 아니면 은유적 표현인 것인지. 아무튼 일단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꽃을 키우고 관리하는 방법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꽃을 바라봤다. 방금 들은 말 덕분인지 조금은 묘하게 신비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괜히 더 예쁘게 보이기도 하고. 괜히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워. 당분간은 이 꽃을 기르고 관리하는 것에 집중해야겠네. 머리를 식히기도 좋을 것 같으니까."
시간을 너무 끌 순 없겠지만 그래도 며칠은 이 꽃에만 집중하자. 그러다보면 앞으로 자신이 어째야할지에 대해서도 자연히 답이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을 내리며 그는 꽃을 괜히 조심스럽게 잡았다.
>>271 어떤 분노는 끓어오르기보단 차갑게 식는 쪽에 가까웠다. 길게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얼굴을 찌푸리거나 악을 쓰는 대신 짧게 웃음을 뱉었다.
“나를 놀리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군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저 사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심지어 아는 사람조차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 아니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질 나쁜 농담을 던지는 악취미가 있는 건가. 처음 저를 내려다보던 눈은 어떠했던가. 떠올려보려고 하지만 기억은 흐리다. 실은 그날의 기억 자체가 그렇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기에 가만히 있는 것 말고 달리 없지 않은가요.“
이미 필요한 조치는 다 취해졌을 테지.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더더욱 없었다. 미리 말해준 것에 대해 감사히 여겨야 해야 하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때의 자유를 약속해준 것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 눈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얼마나 자유롭게요? 날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기라도 해요? 아니라면 그런 약속은 말아요. 적선하듯 던져주는 희망이 더 비참하니까.“
이를 꽉 물고 다시 피어오르는 불길에 시선을 던졌다. 울컥 치미는 감정들을 억누른다. 오늘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버릴 목숨이라면 당신에게 흠집이라도 내고 싶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려 아프게 하고 싶었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죽을지도 모르지. 제 목숨은 그날 끊어졌다고 생각했으니 그 뒤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검이 가장 좋겠지. 제게는 단도가 더 나을까? 디저트 나이프나 포크 같은 게 숨기기엔 더 쉬울지도 몰라.
>>272 어어, 이것봐라? 젊어서 회복력도 빠르다고 아주 기고만장한 얼굴이네. 아이의 미묘하게 얄미운 그 얼굴에 아저씨는 속으로 혀를 찼지. 너도 눈 깜빡해봐라, 아저씨 나이 되기 쉽상이다-라던가,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나중에 그렇게 몸 험하게 쓰다간 뼈 나가는 건 순식간이다-같은 가슴 깊은 곳에 수그려 있던 꼰대력이 고개를 드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지. 행동력 빠른 아이가 자신이 뛰어오겠다며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으니까 말이야. 엉겁결에 자전거를 받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서야 멀어지는 아이의 뒤를 설렁설렁 쫓아갔지. 어차피 목적지는 알고 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담보는 무슨- 그냥 같이 가면 되지...."
다리를 다친 건 그쪽이면서. 약간은 찜찜하지만 아이의 활기를 이겨낼 수 없는 어른이라, 아저씨는 그저 느릿하게 따라갈 뿐이야. 가끔씩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에 덜컹거리는 자전거를 잘 잡고, 가방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피는 활력을 뜻한다고 했던가. 그 부분을 괜히 곱씹으나 굳이 더 말을 하진 않으면서 그는 눈을 조용히 몇 번 깜빡였다. 일단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고 그냥 둬도 상관없으며 생물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정성을 들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으니 더더욱. 어느 순간 이 붉은빛이 갑자기 훅 사라지진 않겠지. 그렇게 속으로 바라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본래 있어야 했던 그곳의 너머라."
아마도 자신이 원래 있었던 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언젠가 선택을 하고 돌아갈지도 모르는 원래의 그곳. 그 풍경을 잠시 눈에 감으면서 그는 생각을 하다 꽃을 들어올려 그 향기를 맡아보려는 듯 코로 가져갔다.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그 향을 즐겨보던 그는 살며시 팔을 아래로 내렸다.
"생각보다 엄청난 뜻이 담겨있는 선물을 받아버린 모양이네. 이쯤되니 이런 것을 이제 정말로 받아도 될지 의문이 절로 들 정도야. 그렇기에 덧없지 않을거야."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이상 더더욱. 그렇게 말을 하며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달을 바라봤다. 자신이 살았던 세상과 비슷하다면서도 다른 그 곳. 바로 그 장소를 눈에 조용히 담으면서 그는 이야기했다.
"그렇지요? 이 세계는 당신이 본래대로 그곳에 있어, 다른 이와 갖게 하여 저물어 끝을 고하게 될 그 생을 색다르게 쓰이도록 해버렸어요. 비록 원했던 것도 알았던 것도 아니 였을 테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든 간에 곧 당신의 의지와 구분이 점차 서서히 사라지게 되어 이러한 순간에 이르게 하였죠"
사내의 그 되새기는 듯한 한마디. 소녀에게는 그러한 표현으로서 인가 소녀는 마치 어떠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평하여 전하듯 그리 말했다
"당신에게 전해 줄 것 이였으니 그러한 의문을 갖지 않아도 될 것이에요. 오히려 이곳 에서의 당신의 일대기에 비하면 소소한 것이라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당신의 그 대답이 저에게 있어서는 훌륭한 것이죠"
그리고는 이어지는 사내의 그 말에 소녀는 흥겨운 듯한 분위기와 억양을 담아서는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이 꽃을 '사크리피키움 비탈레' 이라고 줄곧 부르곤 했었지요. 활력을 먹고, 줄곧 머금어 지는 것으로 비로서 다른 것에 넘치도록 하는 꽃이라고 전하였지요"
사내의 질문에 소녀는 양팔을 스스로의 등 뒤로 넘겨 향하여 뒷짐을 지는 듯한 시늉을 한 번 해 보이고는 설명하듯 대답했다
"확실히 알았던 것도 아니고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와서 후회하거나 하진 않아. 여기에 온 것은 여기에 온 것 자체로 역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체험을 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
처음에 이곳에 왔을때 상당히 당황스러웠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사내는 웃음을 약하게 터트렸다. 정말 그땐 다 믿을 수 없었는데.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을 받아들였으나 자신은 전혀 그러지 못하고 얼마나 심적으로 긴장하고 고민을 했었는지.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추억이라고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괜히 돌아가야 하나..라는 고민의 답이 살며시 기우는 듯 하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제 마음 속 천칭에게 한탄했다.
"사크리피키움 비탈레라. 기억해둘게. 그 이름."
사크리피키움. 그리고 비탈레. 그 이름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그는 그 꽃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평범한 꽃은 아니로구나. 아니면 이 세계에선 평범한 꽃인데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나중에 동료들에게 물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꽃을 잡은 손에 괜히 힘을 약하게 주었다.
"슬슬 들어가봐야겠어. 이 꽃을 넣을 꽃병도 마련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야기 상대가 되어줘서 고마워. 또 보는 날이 있을까?"
아니면 이걸로 이 소녀를 보는 것은 마지막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소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말의 시작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소녀는 자신을 계속 관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칭한 이름을 생각해보면 그게 정말이라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눈앞의 소녀의 정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모를 수가 없겠지. 이것은 축복일지, 아니면 저주일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오늘 이 순간의 작은 에피소드일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는 알 수 없겠으나 차차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그는 소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또 만날 날을 기약해야겠어.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이 될지, 아니면 내세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앞으로 영원히 없고 이번이 마지막일지. 이 붉은 눈동자를 가진 붉은 소녀의 인상은 그만큼 강렬했고 지금 이 순간도 꽤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으니 자연히 참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 순간이리라. 그렇게 사내는 생각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점차적으로 하나하나 잊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바이바이. 또 어딘가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 이를테면... 내가 이 세계에 계속 남는다고 한다면 말이야."
그렇게 말을 남기며 사내는 뒤로 돌아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손에 쥔 붉은 꽃에 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소녀를 뒤로 하며.
/이 이야기의 막레를 이렇게 올릴게! 상당히 흥미로운 소녀 캐릭터였고 이으면서 재밌었어! 수고했어!
약국까지 달려보려고 했는데, 어라─붉은 신호가 들어온 횡단보도가 길을 막았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멈춰있자니 아이의 귀에 자전거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싶어서 휙 돌아다보면 그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오고 있었다. 열심히 뛰어왔던 방향을 거슬러 도도도 발을 옮긴다. 뛰는 건 아닌데, 걷는 것도 아닌 겅중겅중한 걸음이 금세 당신의 옆에 도착한다.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다시 발을 옮기자니 자전거를 맡긴 이유가 없어졌다. 아이는 그래서 자전거를 꼭 쥐었다. 내가 잡으면 이 아저씨가 놓겠지─고집이 있었다. 그러고서 몇 걸음 떼보자니, 이 아저씨는 왜 이리 느긋한가 의문이 들었고 그것은 곧 물음이 되었다.
“아저씨 안 바빠요? 회사라던가 직장이라던가.”
바쁜 사람 다치게 해서 발목 잡고 있는 건 아닌가 몰라─아이는 냉큼 덧붙였다. 교실에서 바라보면 하늘만 느리게 흘러가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바쁘기만 하다. 개 중에는 자고 있기도 하고, 딴짓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 아이는 녹아들기가 싫어서 뛰쳐나와버렸으니 바쁘지 않았다.
"다른 드래곤들이 어디서 뭘 하면서 어떻게 사는지는 나도 대충 알고는 있는데 모든 드래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적어도 난 그냥 여기서 유유자적하게 내 개인 연구를 하거나 그냥 가끔 근처 날아다니거나 근처 짐승들 사냥해서 먹고 사는 것이 고작이야."
키가 얼미잡아 약 3~4m 정도 되며 온 몸이 찬란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실버 드래곤은 한탄하는 목소리를 내며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굴. 아니. 둥지 입구에 설치되어있는 제단 앞이었다. 근처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바치겠다며 음식이나 재물을 놓고 가는 것까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은 딱히 해를 끼친 일도 없고 그냥 가끔 바람 쐴겸 근처를 비행하거나 혹은 둥지 근처에 살고 있는 커다란 들짐승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런 행동조차도 인간들에게는 무섭게 비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음식은 자신이 가져가서 창고에 두고 저장해서 두고두고 먹었으나 재물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 아니면 다시 돌려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 정말로 크게 화가 나서 이런 거 필요없으니까 제발 두고 가지 마라고 마을 입구에 나타나 크게 외친 후에 돌아간 적이 있었다. 아. 그게 문제였구나. 실버 드래곤은 한탄하며 고개를 더욱 아래로 내려 그 제단 위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봤다.
"혹시 제물로 바쳐진거면 난 인간 안 잡아먹으니까 돌아가라. 제발. 그리고 혹시 날 죽이러 온 거면 딱히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없고 굳이 여기서 날뛰고 싶지 않으니까 못 본 척 하고 돌아가줘라."
인간을 제물로 받을 생각도 없고 싸우는 것도 싫다는 듯 드래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이 이내 드래곤은 자신의 머리를 아래로 낮춰서 눈을 마주치려고 하며 한탄이 섞인 목소리를 뱉었다.
"그런데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은 아니잖냐. 자꾸 뭘 바치지 말라고 다시 돌려줘도 계속 그렇게 갖다주고 그래서 한번 근처 마을에서 크게 화 한 번 낸 것이 다인데, 그나마 부순 것도 없고 바로 돌아왔는데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인간들도 화내고 그러잖아. 드래곤도 화낼줄 알아. 그러니까 제물로 바쳐진 인간은 받을 생각 없고 날 죽이러 온 거라면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세 번만 더 생각해줘라. 응?"
오른쪽 앞발로 자신의 이마를 잡고 한숨을 내쉬던 드래곤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제단 위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두 개가 아니라 나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거나 이야기하러 온 인간이라면 일단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긴 한데. 어느 쪽이냐. 인간."
/상황설명을 하자면 드래곤이 자신의 둥지 앞에 만들어진 제단 위에 인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한탄하는 그런 내용이야. 맥커터로 해서 그냥 흐름 자체가 푹 끊어지는 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괜찮다! 평범한 마을 사람일 수도 있고, 드래곤과 싸우러 온 이일수도 있고, 정말로 제물일 수도 있고, 혹은 왕가나 이런 곳에서 뭐 요청하려고 찾아온 것일수도 있겠고 그 부분은 '인간'이기만 하면 자유롭게 해줘도 좋을 것 같아! 굳이 요청사항을 말하자면... 대화적 핑퐁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야.
>>284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제단에 걸터앉은 벚꽃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순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 히아신투스는 난감한 웃음을 띠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하도 쌓인 게 많았는지 넋두리를 늘어놓는 눈부신 은빛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있었다. 난 그냥 약초 따다 지친 김에 동굴 앞에 돌침대가 있길래 한숨 자려고 했을 뿐인데, 느닷없이 거대한 은색 드래곤이 나타나서 꼼짝없이 잡아먹히나 했더니 신세 한탄 들어드리는 처지가 됐네. 그나저나, 이거 돌침대가 아니라 의식용 제단이었구나? 인신 공양에도 쓰였어? 그런 것치곤 퍽 안락하던데. 역시 아무 데나 누우면 안 되겠구나. 저 드래곤이 식인을 안 해서 망정이지, 사람도 먹는 드래곤이나 산짐승이 왔으면 세상모르고 자다가 뱃속에 입주했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자다 깨서 넋두리 들어드리게 된 거 정도로 끝난 게 감사한 일이긴 하다. 드래곤이 기나긴 넋두리 끝에 용무를 묻자, 히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이런 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지? 히아는 앉아있던 제단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드래곤님의 둥지인 줄 모르고 하산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무단으로 영역을 침입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가 상체를 일으키려니, 의아해졌다. 요새도 이 근방에 인신 공양 풍습이 있나? 마녀사냥 등 사람을 해치는 민간신앙은 왕국에서 단속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니다, 또 모르지. 다른 마을 상황은 모르고 암암리에 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드래곤 슬레이어보다는 특히 인신 공양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받으시는 모양인데,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무단 주거 침입한 거 죄송하기도 하고. 히아는 잠시 궁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다른 마을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제가 머무는 마을에서는 인신 공양 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 약 50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인간 마을에 경고하신 뒤에도 인간 제물을 꾸준히 받고 계시는지요? 그 문제가 여전히 골칫거리시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은 오래 사는 종족이니 한 10년 20년 전의 일을 최근으로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지. 그러니 마지막 인신 공양이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오래전의 일이라면 용에게 경고받은 마을에 찾아가 다시는 인신 공양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와 전할 수도 있을 거다. 인신 공양이 지금도 계속되는 문제라면 드래곤이 인신 공양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전하고, 그런데도 마을 입장에서 인신 공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그 이유를 알아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서 인신 공양을 할 이유가 없게 만들 수 있을 거다. 말이 안 통하면 왕국 군에 찌르면 되고. 모쪼록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좋겠군. 무단침입이 송구하니 최대한 도울 생각이긴 하지만 나도 생업이 있단 말이야. 아니다, 지금 드래곤님의 태도가 무척 관대하다곤 해도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죽다 살아난 참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하다 보니 잠시 가셨던 긴장이 올라왔다. 긴장하지 말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말이 통하는 드래곤님 앞이면 더 나을 거다. 히아는 제 표정이 치료소에 찾아온 환자를 대할 때와 비슷하길 바라며, 드래곤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범한 마을 사람...이지만 주거침입을 한 대신 용의 귀찮은 일 중 하나를 해결해 주려는 약사 겸 치료사 인남캐로 이어봤어! 잇기 힘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줘( ^ω^ )
"인간 제물은 받은 적이 없지만 근처의 인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기에 음식이나 돈이나 귀한 것들을 두고 가는 편이야.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인간인 네가 있으니까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군. 인간을 받아버리면 대체 이 인간은 어디로 보내야할지 고민중이었는데. 제물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허나 온전히 말을 믿진 못하며 실버 드래곤은 의심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제 눈앞의 인간을 바라봤다. 이어 실버 드래곤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자연히 쿵, 쿵, 쿵. 하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고 실버 드래곤은 몸을 낮춘 후에 자신의 배를 바닥에 깔며 눈앞의 인간과 시선을 마주하려고 했다. 제물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서일까. 조금은 기분이 풀린 것인지 표정 또한 풀린 상태였다. 물론 그 변화를 상대가 알아차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풍습은 잘 모르겠어. 인간 세계에 내려가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거든. 괜히 내려갔다가 찍혀서 사냥하러 온다던가 혹은 내 둥지 안의 보물을 뺏어가겠다거나 그런 이들이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아무튼 도움이라. 그렇다면 근처 마을에 전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정말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그 제단 위에 뭘 두고 가지 마라고. 도데체가 몇 번이나 올려진 물건들을 잡아다가 돌려줘도 더 큰 것을 주고, 더 화려한 것을 주니 이제는 돌려주는 것도 힘들어."
전에는 커다란 보따리 안에 금괴를 몇 개나 올려뒀던지. 마을 광장에 집어던지려고 하다가 참고 마을 입구에 내려놓고 왔다고 이야기를 하며 실버 드래곤은 으으. 소리를 내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잡았다. 뒤이어 한숨을 내쉬면서 실버 드래곤은 왼쪽 앞발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이야기했다.
"참고로 내 영역은 내 둥지 정도니까 그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별 상관없어. 요즘에는 마법 연구에 푹 빠져있어서 가능하면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아무것도 두지 말고 이 안에만 인간들이 들어오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어?"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나 그래도 답은 궁금했는지 드래곤은 살며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역시 공짜로 일을 시키기에는 미안했는지 그는 보상을 하나 제공했다.
"만약 성공적으로 해준다면 그래. 인간들은 금을 좋아하지? 금괴 3개를 줄 수 있는데. 어떻나?"
/문제 없어!! 드래곤을 죽이려고 오는 인간캐를 대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 정도면 무난하지!
>>286 인간 제물은 받은 적 없다는 말에, 히아는 눈을 끔벅였다. 하도 제물에 학을 떼길래 진짜 끔찍한 형태의 인간 제물이라도 받은 줄 알았네! 그래도 다행이다. 물론 받는 이가 기뻐하지 않는 제물을 준비하느라 들어갔을 수고를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상념을 뒤로 하고, 그는 드래곤이 의심을 거두지 않자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인간 제물을 받으신 적은 없군요, 그건 다행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 차 말씀드리자면 지나가던 길에 쉬고 있었을 뿐 인간 제물이 아닙니다. 제가 제물이라면 인간 마을에 가서 드래곤님의 입장을 전해드리겠다 제안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 저를 죽이려 할텐데요."
그렇게 대답하고서 한껏 쳐들어 뻐근해진 목을 움직여 풀려니, 드래곤이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세 발짝 쯤 물러나서는 몸을 낮췄다. 히아는 잠시 움찔했지만, 겁을 먹은 티를 내지 않고자 싱긋 웃어 보였다. 어우, 목이 안 아픈 건 좋은데 드래곤님 머리가 가까이에 있는 건 좀 쫄리네. 그래도 자세를 낮춘다는 건 우호적인 사인인 거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아버지랑 누나들도 걱정할 거고, 이제야 마을 주민들이랑 좀 친해졌는데 여기서 갑자기 개죽음당하면 서럽단 말이야. 이어 하는 말을 듣자니, 그가 앞서 했던 말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죽이러 온 거면 잘못한 게 없다느니 그러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모습을 드러내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표적이 되나 보구나. 하긴, 인간도 자기보다 작은 생물이 원치 않게 달려들면 귀찮고 피곤하고 때로는 무서운 것처럼 저 드래곤님도 그럴 수 있겠다. 피곤하시겠네. 제물로 바쳐지는 것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품목인 것 같으니 난처하실 만하고. 그런데 바쳐진 물건들을 몇 번이고 돌려주고 크게 화까지 내셨으면 자원을 낭비하고 드래곤님의 화를 돋우기만 하니 그만둘 만도 한데, 왜 그러는 걸까? 한층 기분이 나아진 듯한 드래곤의 말을 경청하던 히아는 곧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거부 의사를 표하셨음에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니 무척 골치 아프셨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물을 돌려주러 가셨을 때나, 경고하러 가셨을 때 인간들이 왜 계속해서 제물을 바치는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보통 인간이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는 동기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여차하면 마을에 직접 가서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드래곤이 알고 있는 동기가 있다면 좀 더 협상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아니다, 크게 화를 냈다고 하니 물어봤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이 있었다면 그게 기적이겠다. 그런데 용 님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길래 왜 제물의 규모가 커진 거지? 이건 그 마을에 가서 물어봐야겠네. 그 전에, 드래곤님이 바라는 걸 다시 확인하자.
"제단 위에 뭔가를 두고 가지 말 것, 이 동굴에 접근하지 말 것을 전해달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가능합니다. 경과는 전서구를 통해 전해드려도 될는지요? 무단으로 드래곤님의 영역에 침입한 것을 만회하고자 드린 제안이나,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거기에, 괜찮으시다면 드래곤님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왔다는 증표를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신체에서 떨어지신 비늘이나... 아니면 인간 손으로 한 줌 정도의 갈기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다 일어나려니, 좋은 생각이 떠올라 히아는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제단을 철거하시고 이 동굴 주위에 환각 마법을 걸어 동굴은 온데간데없고 아무것도 없는 공터나 바위 언덕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러면 드래곤님께서 여기에 계신 것조차 아무도 모르게 될 것 같습니다만."
/주말에 좀 바빠서 이제야 이었네;w; 그나저나 세상에 그랬구나! 상상도 못했어0o0 드래곤을 죽이려는 인간이 왔으면 어떤 전개가 됐을까? 역시 전투?
"물어본 적이 있냐고? 다들 도망치기 바쁜데 뭘 어떻게 물어보겠어?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질문하면서 말을 나누는 네가 신기할 지경인데."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드래곤이었고 어지간한 인간들에게 있어선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도망치기 바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기 바빴다. 이렇게 태연하고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당돌한 인간은 자신이 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실버 드래곤은 씨익 웃었다. 자연히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지만 딱히 잡아먹을 생각은 없다는 듯, 드러난 이빨을 다시 입꼬리를 정리하며 감추며 실버 드래곤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서구라. 괜찮네. 확실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여기는 아직 내 영역이 아니니까 침범한 것은 아니니 신경쓰지 말고.. 증표? 하하하. 이 드래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당돌한데? 허나 아무런 증표도 없으면 확실히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좋아. 비늘을 주지."
이어 드래곤은 오른쪽 앞발을 들어올린 후에 자신의 몸을 살며시 긁적였다. 이내 뭔가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은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비늘이었다. 물론 그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콩알보다 아주 약간 더 큰 정도일까. 그것을 가져가라는 듯, 손으로 집고서 상대에게 내민 드래곤은 이어지는 제안을 듣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어 무안하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다가 슬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머뭇머뭇거리지만 바로 이야기를 하지 않던 실버 드래곤은 이내 한탄하며 이야기했다.
"그게... 그럴까도 싶었지만 내가 환각 마법은 잘 부리질 못해서. 드, 드래곤이라도 못하는 것은 있어! 인간도 잘하고 못하는 것이 있잖아! 비행은 자신 있고 불꽃을 쏘는 것도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것도 자신 있지만 환각은 잘 못 해!"
괜히 푹 찔리는지 드래곤은 으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강하게 도리도리 저었다. 어찌나 세게 저었는지 작은 바람이 근처에 울렁일 정도였다.
"그리고 제단은 아무리 부숴도 결국 또 세워버리니 포기했어. 정말로 불안하고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뭔가를 바치지 못해서 미칠 것 같으면 그냥 간단한 음식이나 올려두라고 전해주고 그냥 가능하면 나는 마을에 내려가서 불바다를 만들거나 공격할 생각은 없으니 아무 것도 올리지 말라고 전해줘."
그것으로 충분해. 그렇게 말을 마치며 실버 드래곤은 입을 꾹 다물고 빤히 상대를 바라봤다. 할 수 있겠냐는 듯이.
/위에서도 썼지만 정말로 다양한 인간이 오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거든. 왕족이 와서 자신네 왕국을 지켜달라고 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드래곤을 죽여서 내 명성을 떨치겠다! 하는 사냥꾼까지 말이야. 죽이려는 인간이 왔으면 어쩔 수 없이 드래곤도 싸우려고 하겠지. 역시. 그 부분은 흐름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288 역시나 대화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았구나. 드래곤의 반문에, 히아는 난감한 마음에 머쓱하게 웃었다. 원치 않는 제물을 계속해서 받으니 짜증이 난 상태에서 인간의 사정같은 건 알 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편지라도 남겨주셨더라면 마을주민들이 돌아와서 읽었을텐데. 어쩔 수 없지. 일이 그렇게 해결되지 않았으니, 왜 제사를 그만둘 수 없었던 건지는 내가 알아볼 수 밖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자니, 별안간 드래곤이 이를 드러냈다. 히아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 표정이 순간 으르렁거리느라 이를 드러낸 짐승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뭐 잘못했나? 튀어야 하나? 무심코 뒤를 힐끔거리며 퇴로를 확인하려니 드래곤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아까 그거, 나름대로 웃음같은 거였나? 아이고, 놀래라. 하긴 도마뱀같은 두상으로 사람 웃음같은 거 흉내내시기 어려우실 수 있지, 그렇지. 근데 드래곤님들끼리도 사람처럼 웃으시기도 하고 그러려나? 잠시 실없는 생각에 빠지려는데, 드래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영역을 침범한 건 아니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역시 화나서 으르렁거리신 게 아니라는 거네.
"그래도 다른 개체가 영역 바로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실 만도 했는데, 너그럽게 넘겨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히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나 좋자고 비늘을 달라고 했나? 난 그거 필요없어! 약에도 못 써!! 드래곤 님의 전언인 게 증명이 되어야 마을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려를 할 테니까 부탁드린건데!! 왜 말씀을 들으면 내가 아쉬워서 달라고 한 것처럼 들리지? 당혹스럽네... 아이고, 됐다. 이종족 환자라고 생각하자. 환자가 하는 말에 일일이 신경 쓰면 이 일 못하잖아. 게다가 못 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흘려넘기며, 히아는 드래곤이 내민 비늘을 받아들었다. 드래곤의 비늘이 아니라 조금 큰 잉어 비늘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의 크기였다. 곤란하네, 이렇게나 작으면 사람들이 드래곤님의 전언이라는 걸 알고 진지하게 듣긴 커녕 사기꾼이라고 욕할 것 같은데. 그렇게 비늘을 손에 들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드래곤은 무안하다는 듯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침묵하더니 푸념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듣자니, 비행과 화염마법, 빙결마법에는 능하지만 환각마법은 다루지 못한다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이라고 모든 마법에 능한 건 아니구나. ...그런데 비행이 특기라? 날지 못하는 드래곤도 있나? 날개달린 드래곤에게 비행은 성인이 걸어다니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나? ...아, 설마. 이 드래곤, 해츨링인가? 전설과는 달리 모든 마법에 능통하지 못한 것도, 비행을 특기라 하는 것도 해츨링이라면 설명이 된다. 얼마전 감기 걸려서 왔던 아기용 의자를 짚고 서더니 의기양양한 듯이 포효인지 옹알이인지 모를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고 제 아버지와 나를 쳐다봤었다. 그래도 해츨링이라도 몇백살은 먹었을 테니 어린애 취급은 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면 마치 인간이 열살 먹은 야옹이한테 애기취급받는 거랑 비슷한 기분일 테니까. /미안 또 늦었네, 가정의달이라 정신이 없었어ㅜㅜ 오호 정말 다양하게 고려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쓰다보니 궁금해진 건데, 이 실버드래곤은 애기야 으른이야?😯
>>289 + "그러셨군요. 그러면 드래곤님의 거처를 불이나 얼음 장벽으로 감싸고, 그 앞에 표지판을 놔두는 건 어떨까요? 이를테면, "제물 사절! 출입금지! 어길 시 저주 내림!"같은 식으로요."
그렇게 제안을 건넨 뒤, 히아는 조심스러운 투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 죄송하지만 이 정도 크기로는 제가 드래곤님의 전언을 받고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커녕 다른 동물의 비늘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거짓말쟁이로 몰릴 것 같습니다. 좀 더 큰 건 어려우실지요? 이보다 더 큰 비늘을 떼어내실 때 아프시다면 조금 전 말씀드린 것처럼 갈기를 조금 잘라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실버 드래곤은 아무런 말 없이 빤히 그 상대를 바라봤다. 거처를 불이나 얼음 장벽으로 감싸거나 표지판을 놔둬라라.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불과 얼음으로 감싸면 자신이 다니기에 너무 불편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근처 짐승들이 다 달아나서 뭘 사냥해서 먹기도 힘들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드래곤은 눈을 감고 자신의 오른쪽 앞발의 발톱으로 땅을 콕콕 찔렀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은 해보겠는데 나는 굳이 말하자면 출입을 금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에 이상한 거 올리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정도라서. 네가 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사단이 난다면 그런 것도 생각을 해봐야겠어. 그리고 이거보다 더 큰 거? 아. 이거. 벗기기 은근히 어려운데. 아프다기보다는 크면 클수록 이게 잘 안 떨어져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표정을 조금 찡그리던 실버 드래곤은 이내 잠시만 기다리라고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꼬리를 살며시 곡선 형태로 접으며 자신의 팔이 있는 곳까지 이동시켰다. 뒤이어 꼬리를 몇 번 흔들더니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비늘을 제 앞발로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적어도 아까전에 줬던 것보다는 3배 정도는 큰 것이었고 드래곤은 그것을 상대에게 받으라는 듯이 아주 가볍게 던졌다.
"아니. 그보다 방금 전의 것이 너무 작은 거야? 그 정도 크기여도 드래곤에게서 얻어냈다는 것은 어지간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간들 중에서는 그거 못 가져서 안달인 녀석들도 어느 정도 있다고 배우기도 했고. 아무튼 갈기는 안돼. 내가 이걸 어떻게 길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조금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실버 드래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으며 실버 드래곤은 빤히 상대를 바라봤다. 물론 갈기는 안된다는 듯이 실버 드래곤은 두 앞발로 자신의 갈기를 보호하려고 했다.
/말하는 것에 위엄도 없고 서술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상당히 젊고 어린 그런 드래곤이야. 성별은 드래곤이니까 정하지는 않았다 느낌이지만! 아무튼 그래서 약간 철이 없는 면도 있고 얘는 뭐지? 하는 그런 느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만 비행이 특기라는 것은 그만큼 다른 드래곤보다 좀 더 빠르다..라는 느낌이야! 달리기가 빠르면 달리기가 특기다..라고도 하잖아?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 맞아. 나는 사립 ■■ 학원의 47대 학생회장이고... 46대 학생회장이고... 45대, 44대, 43대, ...첫 번째부터 마지막까지 회장 직을 연임하고 있단다. 이걸로 겨우 호기심이 풀렸을까? 네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장은 느긋한 태도로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의 제복과 대비되는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답답했는지 분위기에 변화를 주기 위함인지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소매 끝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완장에는 학생회의 문양이라기보단 오랜 비밀결사의 문양처럼 보이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으며, 오른쪽 어깨에 느슨히 걸쳐 있었다.
7. ■■ 학원의 졸업생이 느끼는 '학창 시절에 있었던 큰 도움을 받았지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중한 친구'의 추억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대상으로 한 고향 없는 노스텔지어입니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고, 대화에 집중하느라 헤어나올 수 없었다면 '글쎄요, 다른 졸업생 선배들에게선 들어본 적 없는 말이네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 졸업생은 다른 친구에게 그것의 존재를 수소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맞아, 그 항목의 존재는 나를 가리키는 거야. 난 그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었어. 실제로 이 세상에 더는 남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를 나는 데려갔지. 그걸 괴담의 일부로 치부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사랑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아,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
6. ■■ 학원은 22시 이후 학생이 독단으로 3의 배수 교실, 별관 체육실, 기숙사 밖을 나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습니다. 만일 해당 장소 밖에서 22시를 맞았을 경우 절대 복도에 체류하지 마십시오. 3의 배수가 아니더라도 교실에 남은 목소리는 생자의 기척을 지워 살 가능성을 만들어 줄 것이고, 화장실에 있는 죽은 자의 기척이 당신의 존재를 흐려 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가 있어도 선생의 영역에 도움을 청하러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6-1. 우리도 살아야지. 누가 이런 학교를 떠맡고 싶다고 생각이나 했겠어? 6-2. 선생님, 추워요. 추워요. 왜 교무실만 히터 틀어 주세요? 맨날 우리한테 교실이랑 교무실 다 청소하게 시키면서 교무실만 여름에 에어컨 틀고 겨울에 히터 틀고. 6-3.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은 인간이 아냐. 복도를 돌아다니면 인간이 아니게 될 거야.
"그래, 그 항목의 일부는 내가 썼지. 하지만 밤에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것들이 어느새 자기들끼리 역겨운 행위를 반복하고 합쳐지고 불어나는 것을 반복해... 어느새 낮까지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고 있었어. 누군가는 선택해야 했고, 내가 그것들을 사냥하겠다고 했어. 처음에는 22시를 넘은 것들을 처리했지. 적힌 규율을 어기는 게 부담인 건 그것들도 마찬가지라서 그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나는 22시로 끌어들여졌고... 그래, 인간이 아니게 되었어.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고, 요괴도 아니고, 다람쥐, 개, 여우, 어린 송아지와 바닷물째로 끓어 익은 게와 시궁쥐도 아니고... 나를 섬겨줄 것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경멸의 대상이지. 나는 고기와 같은 것이야, 나는 누굴까?"
그는 당신을 보며 마지막 힌트까지 내어 놓고는 꼬리 끝을 흔들었다. 학생회실은 강박적으로 대칭으로 되어 있었으며, 한 쪽에 책장이 놓여 있고 반대편에 책장에 놓여 있었는데 꽂힌 책이 같았다.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서랍장은 방의 정확히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는 네 개의 의자가 있고 중앙에는 꽃병이 있는데 꽃은 방금 그가 꺼내서 씹어 먹었다. 그가 앉을 의자 맞은편에 당신의 자리가 있었고 양 옆의 의자 뒤에는 거울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는 사람이 비쳤고 봐서 좋을 건 없단 분위기를 풍겼다. 창문이 있었는데, 손잡이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있는 것은 문이었다. 천장의 맞은편에는 바닥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 사실을 눈치챈다면 당신은 천장과 천장 사이에 앉아 영원히 공중을 떠다녀야 할 운명이었으므로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는 접시와 식기가 있었는데, 접시 위에는 대칭으로 되어 있는 스테이크 한 장이 있었고 나이프는 손잡이까지 날로 되어 있어서 쓸 수 없었다. 스테이크를 썰고자 한다면 나이프를 잡은 손에 날이 파고들 것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꽃병이 있던 자리에 빈 접시가 있고 그의 손에는 약간의 육즙이 묻어 있으며, 그는 처음부터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당신과 마주본다.
"나는 누굴까?"
아아! 당신은 이것에게 바쳐져 있다. 당신이 나이프를 써서 남아 있는 스테이크 한 장을 마저 없애든,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을 그의 접시 위에 올리든, 대칭은 완성될 것이다. 당신은 그 사실에 눈물을 흘릴 만큼 감격하였다? 당신은 기꺼이 당신의 신앙(그것은 당신의 인생만큼 오래되었을 수도 있었다)을 버리고 그것을 섬기기로 하였다? 오래도록 헤메었던 당신의 삶에 드디어 당도한 도착점이란 이곳이라고 당신은 믿었 을 리가 없다.
- 젊은이들은 쓸데없이 호기심과 용기만 가득해선 항상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는 한다. 누군가가 도서관에서 발견한 오래된 책 속의 쪽지에서 시작되어 마치 유행처럼 번진 이 '놀이'는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22시부터 23시가 될 때까지 복도를 돌아다니고, 교실과 교실을 전전하며 쪽지에 적힌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식이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이 날뛰는 망아지들을 향해 선생님께서 게시판에 경고문을 붙인 참이었다. 그리고, 운 나쁘게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소녀는 그런 위험한 호기심의 말로이자 제물이 되어 식탁 위에 올랐다.
그녀는 이 매력적인 모험에 처음부터 가담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학원 내에서도 무뚝뚝함에 가까울 정도로 말수가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감정 표현이 부족한 그녀는 좋게 말하면 어른스럽고 침착한 학생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아이들은 많았는데, 이번 모험은 그중 한 친구의 '사람이 부족하니 자리를 채워달라' 는 말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의 손에 이끌렸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떠올린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이와 다르게 젊어 보인다' 라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회장직을 연임했다면 그 나이도 상당할 텐데 눈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은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제복 입은 학생이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껄끄러운 느낌과 제복의 색이 하얀색이 아니라는 점, 완장의 문양 등을 제쳐두면 말이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에서 그가 벗어둔 겉옷과 소매를 거쳐갔고 당연하게도 완장을 향했다. 저런 문양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뜻일까?
- "얘들아, 나 사실... 어제 우리 학원 졸업한 언니를 우연히 만났거든? 그런데 그 언니가 그 친구 이야기를 하더라." "그 친구라면... 일곱번째 항목에 나오는 그거?" "그래! 그거! '소중한 친구'! 진짜로 그 사람 이야기를 했어!" "에이, 그건 그냥 괴담 같은 거야. 졸업생이면 일곱 번째 항목을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너 여기 다닌다고 그냥 장난친 거겠지."
오늘의 모험을 위해 점심시간을 틈타 그늘 속에서 은밀한 모임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은 내가 그곳까지 끌려왔을 즈음엔 일곱 번째 항목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그 미지의 존재를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일부는 그저 전통성을 가진 괴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모임이 끝난 후 교실로 돌아가며 졸업생들이 그 존재에게 받은 큰 도움이란 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학생끼리 주고받은 도움이니 커봐야 과제를 도와주거나 물건을 빌려준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는 일곱 번째 항목 속 당사자의 말을 듣고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버릇처럼 공손히 모으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맞잡았다. 뭐라도 붙잡지 않으면 무언가에게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막연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 발치에 있는 것들마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밤이 학원에 도래했을 즈음 어린 모험가들은 약속된 장소에 모였다. 이런 일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소녀를 제외하고는 죄다 손에 양초가 꽂힌 작은 촛대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모험가들의 촛불 빛을 나누어 받으며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촛대를 가진 아이들 중에서도 이번 모험에서 가장 의욕이 넘치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괴담뿐만 아니라 쪽지의 내용도, 우리를 제외한 또 다른 모험가들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고 잠입에 성공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매우 들떠있었다. 그 친구는 여섯 번째 항목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항목이 으레 다른 학원들의 교칙처럼 통금 시간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우리는 그 아이를 나침반 삼아 움직였다. 지시에 따라서 복도를 걷다가 제 3교실로 들어가고, 10분쯤 지난 뒤 다시 복도를 걷다가 제 6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처음만 해도 여섯 번째 항목의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의 생김새를 추측하며 재잘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제 6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복도를 향해 난 창문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장 먼저 교실에서 뛰쳐나간 사람은 의욕이 넘치던 그 아이였다. 지금 떠올려 보면 그때 아이들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어느 것도 믿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최근 학생들 사이에 실종된 친구들의 이야기가 퍼지긴 하였으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는 전부 헛소리에 불과하며 괴담은 그저 괴담일 뿐이고, 소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와 있었고 이곳의 공기와 모든 것을 피부로 선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의자에 앉은 그와 마주 보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내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양쪽에 놓인 책장과 책처럼, 네 개의 의자와 의자에 있는 네 명의 무언가처럼. 스테이크처럼. 나는 대칭을 맞추기 위해 접시 위에 오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로 향했다. 대칭으로 된 스테이크를 지나쳐 빈 접시 위에 섰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바쳐진 제물. 밟혀 깨진 접시의 파편 위에 무릎을 꿇어앉아 준비된 것을 바치자.
- "근데, 우리 진짜 들어가도 되는 걸까...? 하지 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야, 보러 가고 싶다더니 이제와서 이러기야?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던 이야기 몰라? 수업 시간에 배웠잖아. 무서우면 넌 그냥 돌아가. 난 갈 거야."
날카로운 고통이 다리와 무릎을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조각난 파편에 베이고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붉은색을 마주한 나는 갑작스럽게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눈만 깜빡였다. 덜 익은 스테이크처럼 비릿한 향이 퍼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지?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본능이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 깊고 어두운 것에 더 발을 들였다가는 피를 보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위험을 즐기는 취미 따윈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 손에는 큰 가방을 들고 외지에서 온 손님같은 모습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저 시골에서 이제 막 올라온 듯한 이미지의 여자는 수수한 디자인의 옅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얼굴을 덮어 가릴만큼 넓은 챙이 있는 하얀 모자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분수대 앞에 서서 눈만 끔뻑인다. 나름 어색하지 않게 서 있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다.)
>>296 (그런데 그 때, 무언가 작고 반짝이는 물체가 여성의 근처로 날아들더니 작은 금속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 저만치서 짧은 연갈색 머리에 둥그런 눈매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유순한 인상의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여성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이고, 죄송해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297 앗! (반짝이는 빛에 놀랐는지 여자는 그만 모자를 놓쳐 바닥에 떨어트린다. 물체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여자는 당연하게도 분수대의 턱에 걸려 휘청거리다 그대로 넘어진다. 가방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피할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자는 물에 빠지지 않고 턱에 주저앉는 채로 끝난다.)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여자는 당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당신을 올려다보며 베시시 웃어보인다. 겉으로 보기엔 금색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것을 제외하면 확실히 멀쩡해 보인다.) 맞다, 오르골! (뒤늦게 생각이 났는지 놀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지더니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왼발이 바닥에 닿자 통증같은 것을 느낀 듯 휘청이지만 정신이 없어 이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대로 황급하게 가방부터 열어본다.) 다행이다...! 깨지지 않았어! (가방 안의 물건을 확인한 여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다 당신이 있음을 떠올리고 다시 허둥지둥 당신을 바라본다.) 죄송해요! 제가 길을 막고 있어서...! 참! 물건! 반짝이는 걸 봤는데, 혹시 그걸 찾으시는 건가요?
>>298 (넘어졌던 여성이 허겁지겁 자기 짐을 확인하는 걸, 남성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깨지지 않았다는 말이 들리자, 그는 잠시 반색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아닙니다. 제가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려다 부주의해서 이 쪽으로 날아온 거니 그건 괘념치 마세요.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병원 안 가보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렇게 묻고 남성은 아차...하고 중얼거리더니,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급히 메세지를 보내는지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299 동전이요? 아, 이 분수대가 동전을 던지는 곳인가요? (지금까지 분수대 앞에 있었으면서도 정작 정신이 없어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여자는 이게 바로 소문의 그? 하는 듯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닥에서 일어난다. 왼쪽 발에 최대한 힘이 가해지지 않도록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모습은 의외로 위태롭지 않고 균형이 잡혀있다. 여자는 다른 동전들이 있는지 보고 싶은 듯 분수대 안을 들여다 보려다가 당신의 사과에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며 양손을 젓는다.) 괜찮아요, 사과하실 것 없어요! 많이 놀라지 않았거든요! 병원은... (병원이라는 말에 조금 난처해 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러다 메세지를 보내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초조함과 걱정이 담긴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며 눈치를 본다.) 그... 저, 바쁘신데 제가 붙잡은 것 같아서 죄송해요. 괜찮으신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머쓱함과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짓는다.)
>>300 아, 네. 보통 소원 빌려고 동전을 많이들 던져요. 저도 일행 기다리면서 그러려던 참이었고요. (여성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남성은 어딘가 엉거주춤한 여성의 자세를 염려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바쁜데 붙잡하서 미안하다는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 일행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미뤘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놀라셔서 잘 모르시는 걸 수도 있으니 병원에 가셔서 제대로 진찰 받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301 소원을... 와, 정말 있었구나! 실제로는 처음 봤는데 신기하네요! 아,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의 말에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다. 마치 소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이다.) 네? 약속을... (미뤘다는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여자는 충격받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키더니 안절부절 못하며 다급하게 이야기한다.) 제가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해요! 분수대 앞에 서 있지 말아야 했는데... (허리를 숙였다 펴면서 사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병원이 어디 있는지 잘... 몰라서... 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처음부터 작게 시작된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하더니 결국 잘... 이후부터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바라본다. 양쪽 귀 끝이 살짝 붉어져있다.)
이 세계는 게임 속의 세계이다. 제국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고 힘이 있는 크림힐트 가문의 현 가주는 며칠 뒤에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고 그 이후부터 크림힐트 가문은 처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리고 게임의 흐름대로라면 집안을 어떻게든 부흥시키려고 하는 자신마저 2년 후에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고 그대로 크림힐트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 말을 들은 크림힡트 가문의 현 가주의 아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신에게 그 말을 전한 집사 역시 말을 전하고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꼭 이 말을 전해야만 한다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일단 말을 전하긴 했지만 이 말을 믿어도 되냐는 듯이 집사는 조심히 올해 18살의 사내에게 이야기했다.
"도련님. 일단 그리도 급하고 다급하게 전해달라고 해서 전하긴 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게임 속의 세계라니요. 게임이라고 하면 그거 아닙니까. 그거. 체스나 기마나 그런 것들. 지금 이 세상이 어딜 봐서 체스와 기마란 말입니까."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도 체스와 기마는 아니지. 내가 폰이나 킹도 아니잖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허나 보통 미친 녀석이 아니고서야 이런 허무맹랑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자신의 가문이 역사 뒷편으로 사라지고 만다는 그 이야기를 그렇게 다급하게 전하려고 했을 리가 없다고 사내는 판단했다. 일단 만나보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집사에게 부탁했다.
"일단 그렇게 다급하게 전하려고 했다고 하니 직접 들어보고 싶어. 응접실로 오게 할 수 있을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도련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지시였으니 일단 데리고 오겠다는 듯이 집사는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내 역시 자신의 방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1층에 있는 손님용 응접실로 들어간 후, 길이가 긴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의자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사내는 가만히 그 자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저 정신이 오락가락한 이의 헛소리일 뿐이지. 그것도 아니면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든 것은 직접 만나보면 알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손님을 맞이하려고 했다.
"당신이 저에게 그... 경고를 전하신 분이신가요? 그러니까 게임 속의 세계..라던가 혹은 제 아버지가 암살당할 것이라고 말한 분. 실례이지만... 좀 더 자세히 그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겠습니까?"
손님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거지인지, 그것도 아니면 비슷한 귀족 가문의 자제인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으나 상대가 누구건 최대한 정중하게 기품을 갖춰 이야기를 하려는 듯, 사내는 상당히 예의바르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전생자가 경고를 했고 그 전생자의 말을 들어보고자 저택 안에 있는 응접실로 초대한 상황이야. 맥커터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도 괜찮아. 다만 들어온 이가 경고를 한 그 전생자였으면 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그 외 기타 설정은 인간이기만 하면 뭐라도 오케이야.
#사내와 서로 아는 사이여도 괜찮고 아예 모르는 사이여도 괜찮아. 일단 사내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설정이야. 서로 아는 사이라면 집사가 이야기를 했겠지만.. 이 부분은 그냥 자유도를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모순이라는 것으로 부탁할게!
>>302 ...예? (폐를 끼쳤다니, 분수대 앞에 서 있지 말아야 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남성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외마디 소리만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얼어있는데, 여성이 고개를 푹 숙인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병원이 어디있는지 잘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에, 남성은 가까스로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저만치 보이는 큰 건물을 가리켰다.) 아, 저기 보이는 건물이 병원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고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남성은 다리를 다친 여성이 따라잡을 수 있게끔 빠르지 않은 보폭으로 앞장섰다.)
>>304 (여자는 당신이 당황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사과만 한다. 오히려 당신의 외마디 소리를 듣고 이것이 자신을 향한 질책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안함이 철철 넘치는 모습이다.) 네? 정말인가요...? (멀지 않다는 말에 고개를 들고 겨우 당신을 바라본다. 근처에 있는 병원도 못 알아본 자신이 부끄러워 귀 끝은 여전히 붉었지만 당신의 미소를 발견하고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긴장으로 굳어있던 입매에서 힘이 빠지며 안도의 미소가 보인다.) 아! 감사합니다! (당신이 앞장서자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방과 모자를 황급히 주워든 다음, 조금 절뚝 거리기는 해도 당신의 뒤를 잘 따라간다.) 병원,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무척 친절하시네요!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베시시 웃는다.) 참, 저는 리에나라고 해요! 조금 늦은 인사지만 만나서 반가워요!
>>306 아닙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할 일이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생각했던 병원은 오늘 따라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남성은 빨라지려는 보폭을 애써 여성에게 맞추며 걸었다. 이내 여성이 통성명을 하려는 듯 이름을 밝히자, 남성 역시 이름을 밝혔다.) 저는 장의지라고 합니다. 성이 장이고, 이름이 의지입니다만, 발음하기 어려우시다면 장이라도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는 사이 정형외과에 도착했다. 평일이라서인지 대기실 안은 한산했다.) 잠시 앉아계세요, 접수하고 오겠습니다. (리에나에게 소파에 앉아있기를 권한 뒤, 의지는 곧장 초진 진료 창구로 향했다. 접수를 마친 의지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에나의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의 인연은 쭉 이어지지 않는 한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한 이야기도 어느 순간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에 있는 젊은 20대 초반의 사내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약혼녀가 지금 여기로 온다는 모양이었다. 글쎄. 사실 어린 시절에 만났다고는 하나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사내는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모두 거짓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릴 때 만난 적도 있고 이야기도 했다는데 기억이 안 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인지.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으니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 모든 것은 다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이렇게 심호흡만 할 뿐이었다.
어떤 이일까.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는 들었으나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애초에 이 약혼에 대해 호의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옛날처럼 약혼이 절대적인 분위기는 아니라고 했으나 그럼에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는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부모라던가. 갑자기 만나라고 해도 조금 곤란하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일단 만나보고 얘기라도 나누라고 하니 그에 응하겠다고 나온 것이지. 사내는 굳이 말하자면 약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사내는 길게 한 줄기로 묶어내린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괜히 정리했다. 상대가 호의적이건 호의적이지 않건 어쨌건 귀족 집안의 도련님이라는 자각은 충분했기에 좋게 보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설사 약혼관계가 여기서 끝난다고 하더라도 상대 역시 귀족이니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물론 깨진 사이에서 좋은 관계가 형성될진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의 문이 열리면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일지, 메이드일지, 아니면 약혼녀일지. 긴장어린 표정으로 사내는 그저 문이 있는 방향만 조용히 바라봤다.
/어릴때 만났다고는 하나 기억에는 그다지 없는 자신의 약혼녀라는 이를 기다리는 사내의 상황이야. 맥커터질. 그러니까 정말 뜬금없이 장면이 뚝 끊어지는 그런 느낌이 아니면 누가 들어와도 오케이야. 약혼녀 캐릭터가 온다고 하더라도 약혼을 이어가고 싶어해도 상관없고 끊고 싶어해도 상관없어. 다만 상황극이 이어질 수 있는 핑퐁은 가능했으면 좋겠어.
>>308 그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부드러우면서도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미성이 들렸다. 사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듯, 반쯤 속삭이는 듯한 음략이었다.
"형님. 저 모건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옅은 훈색이 도는 은발과, 연보라색 눈동자, 단정하면서도 유순해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의 동생인 모건이었다. 모건은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사내를 향해 돌아서서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형님. 곧 비즐롯 공작 영애께서 도착하신다는 건 알지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허락을 기다리려는지, 모건은 맞은 편에 앉는 대신 문 앞에 서서 제 형을 바라봤다.
//글 안에 넣지는 못했지만, 형이 약혼하는 걸 꺼려한다는 걸 알 정도로는(사내가 토로할 수 있을 정도로는) 형이랑 사이가 좋고, 그런 형의 처지를 안타까워 할 만큼 사이가 좋은 동생을 의도하고 써봤어요. 괜찮으시다면 약혼녀가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약혼녀도 제가 굴려도 괜찮을까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으나 곧 들려오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긴장을 풀었다. 자신의 동생의 목소리가 작다고 한들 어떻게 못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닫고 자신에게 말을 꺼내는 동생을 바라보며 사내는 무슨 일로 왔냐는 눈빛을 보였고 이내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의문을 품고 물었다.
"긴히 하고 싶은 말? 그래. 네가 굳이 지금 이렇게 몰래 들어와서 전하는 말이니 뭔가 해야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무슨 말이니?"
곧 제 약혼녀가 도착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방에 몰래 들어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니 못 들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긴장을 푸는 것도 좋겠다 싶었으나 굳이 지금 이렇게 말을 전하려고 하는 것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긴 시간을 낼 순 없지만 일단 들어와서 앉아서 얘기해보렴."
어찌되었건 자신은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도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방금 제 동생이 말한 비즐롯 공작 영애를 맞이해야만 했다. 어릴 때 만났다고는 하나 사실 잘 기억도 안 나는 그 약혼녀가 온다는데 자신의 동생과 응접실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긴 시간은 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며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들어올 때 내 얼굴이 이상하진 않았니? 부끄럽게도 방금 전까지 엄청 긴장하고 있었거든. 그 영애가 도착한 줄 알고 말이야."
/그 부분은 너참치가 편한대로 해도 좋을 것 같아! 여긴 자유상황극이고 나는 맥커터나 그런 것이 아니면 얼마든지 괜찮은 편이거든!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본다. 보이는 건 온통 우거진 풀숲과 거대한 나무뿐. 심지어 햇빛도 잘 들지 않아 어둑어둑하다.) 어떡해. 우리 진짜 길 잃은 거 아니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신을 돌아본다.) 아 씨. 반딧불이가 뭐라고 괜히 숲에 들어와서. 그러게 내가 그냥 바다나 보러 가자고 했잖아. (탓하는 말을 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한다. 본인도 동조했으면서 이제 와 당신 탓을 하는 건 옳지 않다.) ...... (하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에 입이 꾹 다물린다. 그러면서도 힐끔 당신의 눈치를 본다.)
>>317 (한 발 앞장 서서 걷고 있던 소년은, 옆에서 걷고 있던 아이가 울먹이며 볼멘소리를 내자 잠시 멈추어 섰다.) 점점 어두워지니까 무섭지? 그래도 걱정 마. 지금 숲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건 위험하지만, 이 근처에 숲지기 누나가 지내는 오두막이 있어. 거기로 가면 숲 밖으로 데려다주실 거야.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나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소년은 백팩을 잠시 풀더니, 안에서 초콜릿 에너지 바를 두개 꺼내 하나를 내밀었다.) 자, 먹으면서 가자. 오두막까진 좀 걸어야되니까.
>>318 (당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고개를 숙인다. 화를 내도 되었을 상황에 다독여주니 더욱 미안해진 탓이다.) ...미안. 네 탓이 아닌데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 못 돌아갈까봐 무서워서 그랬나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며 초코바를 받는다. 한손으로 꽉 쥐자 비닐이 부스럭거린다.) 숲에 자주 왔었어? 그 오두막이라는 거. 들어보긴 했는데 실제로 가본적은 없거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탈출구가 제시되었기 때문인지 한결 나아진 표정이다.) 아무튼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정말.
>>319 괜찮아, 불안하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사과해줘서 고맙다. (상대를 향해 씩 웃어보이곤, 다시 앞을 주시한 채로 길을 찾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쯤에 이정표로 해둔 표시가 있을텐데... 혹여라도 보고도 놓칠까 눈에 힘을 주며,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대답한다.) 어, 우리 형 따라서 자주 오곤 해. 어릴 때부터 그 누나랑 셋이서 자주 놀았거든. 그래서 숲에서 길을 잃으면 찾아서 보고 오라고 이정표같은 것도 만들어놨고... 아, 저거야. (가리킨 손끝에는, 오솔길 옆에 서 있는 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흰 헝겊이 보인다.) 저 하얀색 보이지? 저게 매달린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그 누나네 오두막이 나와. 저런 표시를 여러 나무에 해뒀으니까, 만약에 혼자 길을 잃어도 저것만 찾으면 돼. 호루라기같은 걸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좋고. 하도 조용하니까 호루라기를 불면 누나가 금방 찾으러 오거든. 사실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혼나는 건 각오해야 해. 한번은 밤까지 헤매다가 불었는데 거의 한시간동안 잔소리들었지 뭐야. (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줄 수 있길 바라며, 소년은 머쓱한 듯 웃고는 헝겊이 걸린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발 앞장서며 말했다.) 아무튼, 이대로 쭉 걸어가면 도착할거야. 걷다가 힘들면 말해, 잠시 앉아서 쉬어도 되니까.
>>320 뭐.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하거든.(툭툭거리는 말투와 달리 내심 당신과 자신의 그릇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괜히 멋쩍어 초코바의 성분 읽는 척한다.) 어디? 아. (당신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어두운 곳에서 휘날리는 하얀 헝겊은 유달리 눈에 띈다. 마치 구세주처럼.) 하얘서 그런가 튀네. 그럼 저걸 셋이서 다 달아놓은 거야? 아이디어 좋네. 호루라기도 같이 매달려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꼭 쓸데없는 말 한마디 덧붙이는 건 못된 버릇이다. 한걸음 차이로 뒤따르면서도 혹여나 당신을 놓칠까 발을 바삐 움직인다.) 그나저나 뭐 하다가 밤까지 헤맸대. 지금처럼 길 잃기라도 했어?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피어오른다. 호기심. 힘들면 말하라는 말도 제쳐두고 앞선 이야기 다시 화제로 끌어왔다.)
>>321 응, 저거 야광이라 밤엔 더 잘 보인다? 그 누나네 아줌마까지 넷이서 고생 좀 했지. 호루라긴 나도 생각 못했는데 다음에 오면 넉넉히 사다가 보이는 거마다 걸어놔야겠다. 누나가 고생 좀 할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숲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과 호루라기 걸어놓은 놈 누구냐며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뛰쳐나가는 누나의 모습이 연달아 떠올라 볼을 긁적이다, 이내 여상한 투로 질문에 대답한다.) 아, 형하고 담력 시합. 낮에 서로 숨겨둔 보물을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거였는데 내가 무섭다고 호루라기 불어버려서 승패는 못 가리고 사이좋게 그 누나네 아줌마한테 혼났어. (그러다 너무 제 이야기만 했다는 생각에 옆을 보며 묻는다.) 그러고보니, 넌 숲에 들어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322 그게 뭐야. 불쌍한 보물. 혼자 숲에 남겨졌겠네. (키득거리다 처음 들어왔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자연과 가까운 인생은 아니었다. 놀 때는 숲보단 카페나 놀이공원을 다녔더라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잖아. 오늘도 반딧불인지 뭔지 아니었으면 안 왔을걸. 정작 그 반딧불인 코빼기도 못 봤지만 말이야. 하여튼 인터넷 찌라시 믿을 게 못된다니까. (역시 바다를 갔어야 한다며 혀를 찬다. 그러다 문득 인터넷보다 신빙성 높은 당사자가 본인 앞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숲에 자주 들어왔으면 알겠네. 인터넷 글 진짜야? 여기서 반딧불이 본 적 있어?
>>323 혹시 모르지, 오늘 가다가 발견할지. (맞장구치며 같이 쿡쿡 웃는다. ) 그랬구나, 반딧불이까지는 사실이었어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니까 허탕 치는 경우가 많은데. 응, 몇번 봤지. 주로 형하고 누나네 집에 가던 길에 보거나 셋이서 쏘다닐 때 마주친 거지만. ...아, 누나한테 부탁하면 반딧불이가 많은 곳으로 안내해줄 지도 몰라. 물론 누나가 오늘 한가해야 말이지만. (달리 할 일이 있다고 하면 그냥 얌전히 집에 가야지, 하고 머쓱하게 웃는다. 그렇게 대화하며 걷는 사이, 저만치 오두막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한다. ) 거의 다 와 가네, 저기야.
>>324 그럼 내가 발견하면 가져도 되는 걸로 알게. (앞선 장난스러운 분위기 이어오며 웃는다.) 아, 그래? 완전히 찌라시는 아니었구나. 으으음. 결국 운빨이라는 건가. (있긴 하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보기 어렵다는 것에 아쉬워해야 할지. 앓는 소리를 내다 이어진 당신의 말에 화색이 돈다.) 그래도 직접 찾아내는 것보단 그 언니가 한가할 확률이 더 높겠지. 좋아. 빨리 가보자! (당신이 가리키는 오두막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조그맣던 형체가 점점 커진다. 그러다 도중 힘 빠져 뜀박질 멈추고는 허리 숙여 무릎 부여잡는다.) 아니, 하, 진짜, 가까운, 줄 알았더니, 왜, 멀고 난리......
>>325 아, 잠깐만. 천천히... (만류할 새도 없이, 뛰쳐나가는 아이를 뒤쫓아간다. 머지 않아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며 쓴웃음을 띤 얼굴로 옆에 멈추어선다.) 주변에 나무가 없어서 잘 보여서 그렇지 생각보다 먼 거리야. 힘들면 좀 쉬었다가 가자. (소년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돗자리를 꺼내 편 뒤, 생수병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넨다. ) 자, 마셔. 목 마를텐데.
>>326 괜찮...진 않네. 응. 쉴래.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기엔 숨도 차고, 다리도 아파 결국 돗자리 위에 앉았다.) 진짜 준비성 철저하다. 가방 무거웠겠는데. 있다 좀 들어줄까? (내심 감탄하며 당신이 건넨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연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자, 너도 마셔. (뚜껑이 열려있는 상태 그대로 당신에게 내민다.)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좀 소풍 온 것 같기도 하고. 돗자리 깔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야~ 집에 가자~ (수업이 다 끝나고 당신의 반에 온 소년은 싱그럽게 웃으며 당신을 찾고 있는듯 했다.) 오 너도 잘가! (이미 이 반의 아이들과도 꽤나 친한 사이인듯 인사를 주고받던 그는 슥 눈치를 보고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종례도 빨리 끝난것 같은데 뭐하고 있어?
>>327 그러자, 배고프면 말해. 도시락도 있으니까. (싱긋 웃어보이고는 배낭에서 제 몫의 물을 꺼내 한모금 넘기고 옆에 앉는다. ) 아, 괜찮아. 어릴 때부터 보통 그만큼 들고 다니거든. 그리고 그 물은 너 계속 마셔. 일부러 두 병 챙겼으니까. (제 손에 들린 물병을 흔들어보이며 대답하고는 마저 물을 마신다.) 그러게, 있을 건 다 있으니 사실상 소풍이 맞긴 하지. (웃으며 대답하다, 문득 궁금해져서 묻는다) 그럼 넌 평소에는 뭘 하고 놀아?
어라, 무슨 일이야? 오늘 불침번 서는 날도 아니잖아. 혹시 무서운 꿈이라도 꾸셨는감? (방글방글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창가에 걸터앉아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피와 시체가 늘비해있는 사이, 교복을 입은 좀비들이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쟨 맛있는 거 먹는 꿈을 꿨나봐. 부럽다.
>>330 선배 외로우실까봐 와봤심더! (그리 튕기고선 옆에 살며시 앉는다. 당신이 내려다보는 쪽에 시선이 갔다가도 다시금 눈을 내리깐다.) 아, 저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잘~ 먹고 있지 않슴까? 아는 사람 보일까 겁납니다... (혀를 내두르더니 콧등에 주름이 새겨진다. 창틀에서 두어 걸음 떨어지나, 더 이상 발소리가 나지 않는걸 듣자하면 여전히 당신 뒤에 서 있는 거라 짐작 가겠다.)
>>328 (재잘재잘 소란스러운 교실 한 구석에 똑 떨어진 섬과 같이 가만히 앉아있는 남학생이 하나.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괜히 바쁜 척 가방이며 서랍을 뒤적인다. 당신이 가까이 오자 한 마디 한다.) ...어, 왔어? (사실 아까부터 네가 온 것을 눈치챘지만. 이제야 안 척, 이제야 고개를 든다.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꽤 반갑다.) 별 거 아냐. 문제집 좀 챙기느라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 앞머리 사이로 슬쩍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도 이쪽을 보고 있다면 지금 눈이 마주쳤다.) 또 이상한 데 들르자 할 건 아니지?
청산유수 화술의 달인, 뒷골목에서 잘 알려진 상인인 그는 그 깔끔하던 성격도 당신 앞에서는 한 없이 누그러진다. 당신은 그가 가장 아끼는 고객이며, 당신에 한해서 그는 공짜로 의뢰도 맡아줄 수 있을 테다. 이윤을 추구하는 그에 걸맞지 않게 녹진해진 감정을 안고서 새순이 태양을 우러러보듯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이목구비 눈에 담느라 당신이 하던 말은 반절 정도밖에 못 들었다는것 뒤늦게 눈치챈다.
"미안, 자기야. 다시 한번 말해줄수 있을까?" 꿀이 떨어지듯 흐물텅한 목소리로 작게 노래하듯 되묻는다.
말라죽은 나무 시든 꽃 썩은 바위 짐승 사체 즐비한 숲. 숲이라고도 할 수 없을 모양새다. 척박한 죽음 이 땅에 내리꽂혔으니 되려 황무지란 이름 더 어울린다. 그리고 이 음산한 기운 내뿜는 황무지 횡단하는 수레가 있다. 수레엔 사지 꽁꽁 묶은 새끼 가축들 실려있고 곁에는 어른 대여섯과 아이 하나가 일제히 걸음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다른 어른에게 끌려가고 있다. 그 눈가에 안대 매여있고 두 손은 저 가축마냥 밧줄로 묶어두었다. 아이의 걸음걸이 퍽 위태롭다. 기묘한 일행 한참동안이나 황무지 숲 헤쳐나간다. 이윽고 그들 멈춘 곳은 높다란 절벽 위다. 끝 보이지 않는 험난한 비탈길이 그 아래 있다. 일행이 일제히 멈춘다. 제 묶인 밧줄 잡은 어른 멈춰서자 비척비척 걸어가던 아이의 걸음도 뚝 멎는다. 여정 내내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풍기던 일행 그제서야 바쁘게 움직인다. 수레의 가축들 절벽 앞으로 옮기고 무언지 모를 것 땅에 흩뿌린다. 어른 하나가 아이의 안대 풀어주고 손목 묶은 밧줄도 잘라낸다. 마침내 아이의 시야 훤히 드러난다. 하지만 시커멓게 죽은 두 눈에는 다가올 운명에 대한 공포며 슬픔 따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체념에 가까운 것 엿보일 뿐이다. 준비 끝마친 듯 일행이 각자 자리 잡는다. 가축들 절벽 위에서 안절부절 못해한다. 무리 중 건장한 남성이 수레에서 도축하는 칼 꺼내어든다. 축생들 본능적으로 위기 느끼지만 팔다리 묶여있어 오도가도 못한다. 그리고 송아지들 망아지들 새끼 돼지들 차례로 곧장 비참한 단말마 내뱉으며 죽는다. 선혈 흩뿌려지는 광경 보고도 아이는 전혀 미동 없다. 그 시선 무엇도 없는 허공만 응시할 뿐.
드높고 지고하신 존재시여 일개 하찮은 미물 주제 위대한 분께 말씀 올리는 짓 범하여 몹시 송구하나 이 어린 것들의 목숨 당신 위해 공양하겠사오니 부디 오랜 노여움 거두어주시길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누군가 소리 높여 또박또박 기문 읊음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 발길질로 아이의 몸 밀친다. 거친 압력에 아이 힘없이 고꾸라지며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온갖 가지 덤불 돌멩이 자갈에 연한 살갗 쓸려 생채기 나고 핏방울 맺힌다. 한참을 구르고 넘어지고 다쳐도 아이는 비명 하나 몸부림 하나 않는다. 찰나의 시간 지나고 아이는 어두컴컴한 구릉 밑바닥에 도달한다. 그 몸 무척이나 만신창이다. 그나마 걸쳤던 옷가지도 넝마 꼴이 되어선 허연 맨살 드러나보인다. 아이는 가축 사체더미 위에 웅크린 채 가만 있지만 죽은 것 아니다. 옅은 숨소리 내며 제 아직 살아있음을 명백히 피력하고 있다.
//어떤 인외 존재에게 산제물로 바쳐진 인간이야. 되도록이면 그 제물을 받은 인외 쪽으로 이어줬으면 해 둘이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거라 인외가 제물을 잡아먹거나 죽이는 그런 전개는 사양할게~
가축이 죽는 단말마가 울리자 구릉 밑바닥에 있는 이의 두 귀가 움찔했다. 듣기만 해도 귀가 아픈 그 울음소리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것은 거대한 여우였다. 눈처럼 새하얀 꼬리가 총 아홉개. 크기도 크기지만 그 생김새만 해도 절대 평범한 여우는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는 피냄새를 맡으며 그 여우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잠에서 막 깨어나 하품을 막 하니 그 날카로운 이빨이 살벌하게 번쩍였다. 그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가축의 시체더미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이내 그 여우의 눈동자에 비쳤다.
이 가축의 시체더미와 저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무엇인지 여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바쳐진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꽤 오랫동안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항상 동일했다. 여우는 고개를 아래로 내려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귀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듣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를 냈다.
"아이야. 거기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야. 내 너를 보아하니 또 여기에 바쳐진 그 아이로구나. 참으로 딱한 인간들이구나. 나에게 뭔가를 바치고 싶다면 저 가축으로 충분하거늘, 아직 다 크지도 못한 이런 아이를 바쳐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오랜 노여움을 거둬달라고 늘 이야기하나 정작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반복을 하니 너무나 딱하기 짝이 없구나. 내 조만간에 그 인간들이 있는 마을을 멸할까 고민이 되는구나. 허나 그렇게 하면 이렇게 다른 가축 고기를 먹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소나 말, 돼지야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니 바치는 것에 불만은 없었으나 이런 어린 아이까지, 그것도 산채로 바치는 것은 여우에게 있어서 불만이었다. 어찌 자기 동족을, 그것도 이런 어린아이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고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그 인간들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올리던 여우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네 앞으로 꽤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 바쳐졌다. 하지만 내 이 가축들은 모두 내 식사로 잡아먹으나 너 같은 인간은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너는 돌아갈 곳이 이제 없겠구나. 그 전에 온 아이들도 모두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어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는 일이 많았다. 혹은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여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려서 결국 다른 들짐승들의 밥이 된 이도 있었지. 너는 어찌하겠느냐. 아이야."
적어도 너만큼은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여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새하얀 꼬리를 가지런히 땅으로 내려오도록 정리하며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아이의 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겨울의 마천루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바람은 수백미터 너머 텅 빈 새벽 거리의 육교 위로도 숨결을 남겼다. 으슬으슬해진 공기를 의식한 것일까, 육교 난간에 허리를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검은 코트를 괜시리 손으로 여몄다. 이 장소에 있는 두 존재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동작임을 알면서도.
"[늦지 않게 생명을 거둘 것],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에게 깊이 관여하지 말 것], 그게 우리 규칙이니까."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는 사무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일부러 가장한 딱딱함임은 자명해 보인다. 차갑게 보이려고 해도,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떨림과 불안한 입매는 명백한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고 있었다.
"저승사자인 우리가 자꾸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자꾸...... 간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잖아."
의무를 상기시키는 목소리, 하지만 그 행간의 미묘한 뉘앙스는 어쩐지 감정적이다. 어쩌면 질투일까, 부러움일까. 그 이상한 감정의 노이즈 때문에, 그녀의 말은 도무지 설교로 들리지 않는다.
수십 블록 뒤 마천루에서는 여전히 등대의 불빛처럼 도시의 빛이 남아있건만, 검은 코트의 여자는 그저 그 빛을 등지고서, 새벽 주택가의 어둠과 적막만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히- 하고 길게 소리내며 이빨 드러낸 채 웃는다. 저승사자라는 직속에 걸맞게 마냥 해맑고 아이다운 웃음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이름에 걸맞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기는 하다. 아무래도 그녀는 소명 의식과 책임감에 뜻을 두지 않는 인물인 모양이지. (저승차사 또한 '인물'이라 칭할 수 있나? 이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당신의 한탄도 자책을 겸한 질책도 어깨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가벼이 넘겨버린다. 아무렴 어때요, 자존감 높은 언사는 건강한 영혼의 척도이니 일등차사감이라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흐음."
질문의 이유 명쾌히 대답해주지 않음에 그녀가 콧소리를 흘린다. 가늘어진 눈매로 가늠을 해보니, 당신의 미응답이 까닭을 자신도 알지 못 하기 때문인지 숨기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궁금할 뿐인지를 살핌이다. 자신이 당신을 실력 있고 훌륭한 저승차사라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 말마따나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니. 공적으로 얽혀든다면 말 한 마디로 자신한테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다.
"... 뭐, 별 이유가 있어서 도와주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큰 문제가 되지 않겠다는 계산 하에, 그녀는 당신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기로 하였다. 그간의 정이 있는데 과연 나를 함부로 내칠 수 있을까? ... 하는, 신뢰에 기반한 결론이다.
"그냥... 기특하잖아요? 착하고, 배려심 깊고, 사주팔자도 살펴보니 멀쩡히 살아남는다면 분명 이 세상을 더 옳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렇게나 젊은데. 그래서 그냥...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으니까......"
육교 난간에 팔꿈치 괴어 턱을 받친다. 부가 설명을 위하여 자유로운 남은 팔로 이리저리 손짓을 해보다가 이내 그만둔다. 축 늘어진다. 당신이라면 알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흔히 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후배의 동요에 사라졌던 평정이 조금은 되돌아온 것일까, 그녀는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서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사수의 흔들림에 힘을 얻다니, 사수로서 실격인가 하는 잡상을 조용히 흘려보내면서.
"그 아이가 아니어도, 세상을 더 괜찮은 곳으로 만들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많아.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이 말은 그녀의 안에서 나오는 말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며 읊는 그 목소리는 아마도, 다른 저승사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사하는 것 치곤,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아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듯, 도전적인 의문을 애써 감춘 그 말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수명이 끝난 생명을 거두는 이유는 그게 옳거나,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 아니야. 몇분만에 잊는구나. [살아있는 존재에게 깊이 관여하지 말 것]."
그 인용의 어색함을 스스로도 느낀 것일까, 그녀는 곧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다시 꺼내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두었다. 손보다 살짝 큰 한 권의 노트를 잡은 채로. 당신의 눈에도 익숙할 그 노트는, 명부다.
"이 세상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것이고, 우리와는 상관없어.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승사자인 거야. 알잖니."
이윽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서서히, 비스듬히 내려 당신을 마주보았다. 가장된 차가움 아래 불안에 떨리는 눈이 당신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녀는 다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만두고 말았다. 흘러나오던 문장이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지만, 뒤로 이어졌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거짓말같은 일이 또 있을까. 아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버린 문장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교하자마자 앞치마를 뒤집어 썼다. 꽃집을 하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자주 그래왔는데,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손님맞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일처리도 똑부러진 이 아이가 너무할 정도로 말을 더듬어버렸지. 남몰래 좋아하는 아이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아이는 속으로 오늘따라 엄마도 아빠도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어딜 나간거냐며 투정소리를 내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말실수하면 안 돼, 긴장하지 말자. 좋아하는 걸 들키면 안 돼.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가 바로 짝사랑 아티스트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태연하고 빙긋 휘어진 눈매도 화사하니 아까 전 말 더듬은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기만 하다.
모른 체 해줘야 했을까? 그러나 말은 이미 튀어나가 버린 뒤였다. 어찌나 놀랐는 지 말을 버벅거리기까지 하는 꽃집 점원이자 같은 반 친구를 보며, 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뭐 청소년 유해업소같은 것만 아니면 아르바이트하는 걸 딱히 잡지는 않으니 아는 체 정도는 해도 상관없...겠지? 그래야 할텐데. 뭉게뭉게 떠오르는 기우를 애써 떨쳐낼 찰나,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 놀라는 바람에 잠시 뒷전이 되었던 제 용건이 생각나, 그는 명랑한 투로 대답했다.
"아, 꽃다발 좀 사려구. 혹시...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 있어?"
찾는 꽃을 밝히는 진의 목소리는 점차 자신없이 기어들어갔다. 생소한 종이라고 알고 있는데... 과연 있을까? 학교 앞 꽃집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유명한 꽃들이 많을 것 같단 말이지. 이것도 편견이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반 친구가 난처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진은 씩 웃어보이며 덧붙였다.
"없으면 다른 파란색 계열 꽃 예쁜 거 추천해주라! 기왕이면 꽃말도 좀 괜찮은 거 있을까? ...아, 최애 줄 건데, 파란색 꽃 좋아한댔거든."
...뭐, 걔가 최애 바이올린 주자는 맞으니까 상관 없겠지. 공연 응원 선물이라는 대외적인 목적에도 맞고. 꽃말이라고 해도 목적을 안 알려주면 추천하기 애매발 텐데, 제법 완벽한 핑계였어. 내가 자연스럽게 말했는지가 문제긴 하지만. 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어색했어도 적당히 넘어가주길 기도하며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347 자신의 손에 닿은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져 그녀는 명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난간에서 허리를 떨어뜨리고 몸을 아래로 숙이면, 어렵지 않게 육교 위로 떨어진 명부에 손이 닿지만, 어쩐지, 겨울바람에 뻣뻣해진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 것만 같아 그녀는 멍하니 그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지만, 생각이 있기는 하구나."
순 멋대로 행동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언어가 되기 직전의 구체화된 생각이 입 속을 돌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멋대로 동경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만들었다. 어설픈 비유이지만, 선을 따라 걸어온 우등생이 자유롭게 사는 낙제생을 자꾸 훔쳐보듯이, 이 실없는 후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더 그 속내를 엿볼수록 오히려 씁쓸함만 더해지는 것 같았다.
"때가 되지 않은 생명을 거둘 생각은 없어. 네가 시간에 맞춘다고 말했으니, 내가 끼어드는 건 월권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사수인 후배의 방만한 일처리를 교정하기 위해 개입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원래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만 빼면, 그녀의 말은 분명 원론이었다. 그 원론을 지키는 것이, 그녀로서는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니? 여전히 네가 늘어놓는 변명들,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추악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 아이의 선성을 믿어서 다가갔는 말을 오롯이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아이가 사람을 구할 사주를 타고난 게 아니었더라도, 너는 그 아이의 운명에 개입했으려나?"
같은 반 친구 이름은 보통 다 기억하겠지, 그치? 그러니까 이름 한 번 불렸다고 들뜨면 안 돼! 아이는 한 때는 제 이름이 투박하다고 생각했었다. 목씨 성에, 연꽃 연 자를 쓴 단 두 음절짜리 이름 소리가 입 안에서 구르는 느낌이 별로였다. 꽃집 아이에게 목련이란 이름을 지은 것도 장난스럽고, 그러니 이름 불린다고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아이 귀에 그렇게 달가운 단어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그탓에 네 이름도 한 번 입에 담으면서 웃어버리는 인사가 환히 반갑다. 이렇게 손까지 흔들면서 인사하지 않아.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
꽃 이름을 듣자마자 아이 표정이 난처해진다. 이름부터 보라, 히말라야가 붙었다. 히말라야를 원산지로 하는 꽃이 국내에서 나기 쉬울 리가 없다. 구매처가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구하기 까탈스러운 건 같아, 꽃다발을 구한다는 건 당장 오늘 내일 선물을 한다는 뜻일텐데 구할 시간이 촉박했다. 좋아하는 아이를 실망시키는 일은 어떤 방향으로도 싫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네가 먼저 다른 꽃도 괜찮다 해주어서 참 다행이다.
"네! 안쪽에서 금방 찾아올게요."
아이는 바로 가게의 안쪽으로 향했다. 딱히 멀어지진 않아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는 훤히 보였다. 바로 앞에서 좀 멀어진답시고 말을 남기더니, 손에는 속속들이 꽃이 만개한다. 장미, 튤립, 수국, 카네이션, 한 송이로 모자르면 두 송이, 한 줄기도 쥐니 손에 그러모아진 꽃들은 푸른 다발이다. 다른 한 손에는 델피니움, 옥시, 용담까지. 그렇게 푸름을 두 손 가득 모아오고서 종알종알 설명을 늘어놓는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맹세,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영원한 행복, 꽃과 순서대로 맞추어 보여주더니 이제는 다른 손 차례다. 냉정, 날카로움, 당신이 힘들 때 나는 사랑을 느껴요. 왜 굳이 두 손으로 나누었나, 보기에는 예쁘지만 꽃말이 좋지 않은 꽃들이었지.
"마음에 드는 꽃이 있을까요? 꼭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 만들어줄게!"
왔다갔다 오가는 말투 속, 마음은 오가지 않아서 그러모은 꽃들을 널 보고 핀 듯이 잘 쥐고 있다.
>>351 아아, 역시 있을리가. 난감하게 할 뻔 했네. 오늘은 급하니 다른 파란 꽃으로 하고,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는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말이지. 그럼 오늘은 히말라야의 히 자도 꺼내지 않고 있다가 생일날 놀래켜버릴까? 아, 꼭 생화가 아니더라도 원데이 클래스같은 데서 다른 걸로 비슷하게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지도... 이런 저런 궁리에 잠겨있자니, 꽃을 가지러 안쪽으로 갔던 연이 양 손 가득 다양한 푸른색 꽃들을 들고 돌아와서는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엄청 능숙하네, 하루이틀 일해본 게 아닌가봐. 학기중에 알바하려면 빡셀 텐데 대단하네. 감탄도 잠시, 진은 설명에 집중하려는데, 장미와 튤립의 꽃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진은 괜히 뜨끔하는 마음에 머리카락 속으로 홧홧해지려는 귀를 감추며, 간간히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렇구나. 다 예뻐서 고르기 힘들긴 하다. 근데 카네이션이 파란색인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신기하네."
일단 꽃말이 좋지 않은 건 패스. 고백성 꽃말도... 곤란하고. 중요한 날에 고백 공격을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수국 아니면 카네이션이네. 둘 다 들어가도 예쁠 것 같은데... 모처럼이니까 지르지, 뭐. 당분간 비자발적 다이어트를 하게 될 것을 예감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진은 고민하느라 진지해진 얼굴을 풀고 도로 서글서글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
>>350 떨어진 명부, 그걸 줍지 않고자 하는 당신. 명부를 떨어뜨리고자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가죽 자켓을 입은 여성은 손을 뻗어 그를 대신 주워주는 대신 자켓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를 택했다. 당신이 말을 잇기를 기다린다.
당신의 속이 어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 사람의 운명 알 수 있음이 사람의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기다린다. 그 정도의 시간은 감내해줄 수 있는 사이었다. 우리는.
"... 너무해요, 사수. 제가 평소에 뇌를 빼놓고 다니는 작자처럼 보였다는 말이에요?"
뭐, 부정할 수는 없다. 제 행실이 가벼움을 알기에 투정은 가볍게 끝낸다.
"고마워요. 역시 우리 사수님은 '우등생'이시라니까."
당신의 대답이 자신한테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 당신은 알까? 나의 월권 행위를, 중대한 실책의 가능성을 눈감아 넘어주겠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키던지. 손바닥에 났던 땀을 자켓 주머니에 두고 나온다. 아이가 죽는 그 날에 휴가라도 내어 나의 일처리를 모른 척 하라 덧붙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무사하겠지.
"......"
갈색 눈동자가 당신을 가만히 응시한다. 당신이 이런 질문을 한 까닭을 가늠하기 힘든 탓이다. 아니... 애초에,
"... 변명이 아니라 제가 진짜 진심으로 지금까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큰 결심하고 털어놓은 건데요?! 와, 진짜, 배신감! 지금까지 제가 한 말 안 믿고 계셨던 거죠! 그쵸!!"
충격받았다고 가짜로 우는 척을 한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노력이요, 그녀의 천성대로 한 행동이기도 하다. 훌쩍훌쩍, 눈물 닦는 시늉이 어느정도 끝났을까.
>>353 길다기에도, 짧다기에도 적절치 않을 만큼 미묘한 시간이었다. 이윽고 당신의 사수는 다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감정의 흔적이 잦아든 눈으로 당신을 응시했다. 익숙한 표정, 여느 때 줄곧 보아 온 냉정한 선배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냉정한 얼굴에 드물게도, 어색하긴 해도 나름 공이 들어간 미소가 드러났다.
"고마워."
그 말, 내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려나.
두 걸음 정도, 그녀의 모습이 뒤로 물러났다. 그만큼 표정도 밤의 어둠에 가려 흐릿해졌다. 직전의 미소도, 사의도 사그라들고, 이윽고 어둠에 기대어 만든 평정으로 그녀는 다시 선배이자, 사수로서 경고의 말을 남겼다.
"그래도, 적당히 해줘. 위에서 감사 나오면 곤란해지니까. 지금까지 커버해준 적도 없지만, 위에서 직접 확인하는 건 더더욱 내가 손 못대."
보고한 적도, 아직 한번도 없었지만.
이윽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마천루의 빛에 간신히 드러나던 싸라기눈보다 창백한 얼굴도 머리칼에 가려졌다. 머리카락도, 코트도, 바지며 구두도, 이제는 정말 어둠의 일부인 것처럼 검은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신에게 보여진 그 검은 뒷모습은 어둠 속의 묘한 요철이었다. 무언의 감정이 담긴.
"눈 온다."
아까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겨울밤의 적막이 희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얀 겨울의 색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빛도 서서히 밤의 저편으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그녀는 천천히 육교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새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빛이 육교 바닥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 하얀 색 사이로 여전히, 당신의 발치에는 명부의 검은 표지가 아까와 같이 놓여 있었다.
아⎯특수진압반 녀석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볼펜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둔 채 걷는 자세가 불량하다. 불만의 대상으로 보이는 특수진압반,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세상에 초능력이란게 난 것부터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초능력이 세상에 나타났다. 초능력으로 좋은 일만 하면 참 좋을 일인데, 악용해서 범죄를 일으키는 놈들이 나타났다. 그럼 그 녀석들을 잡아넣겠다는 초능력자들도 나타날 것이다. 근데 일반 시민이라는 신분으로 날뛰게 두자니 이쪽도 저쪽도 골칫덩이라서,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고, 나쁜 놈들 잡는 놈들은 경찰이니까⎯특수진압반이라는 것이 생겼다. 한 마디로 초능력 쓰는 놈들만 잡는, 초능력 쓰는 경찰들이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한테 왜 불만이냐면야, 이 사람은 특수지원반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좀 얌전히 좀 합시다, 예? 초능력 쓰는 냥반들 화려한 거 알겠다만 뒷처리하다 죽겠다고요. (싸우는데는 하릴 도움 안되는 초능력이래도 치유는 치유. 쓸모는 넘쳤다.) 내가 병원을 차렸으면 지금 떼부자일걸, 쯧. (오늘도 현장에서 새빠지게 지원 나와 구르고 구른 탓에 피곤함에 찌든 모양이다. 그러다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매우 어색하게 눈길을 피하고 냉큼 바닥을 쳐다본다.) 아이쿠, 누가 길바닥에 쓰레기를! (어색하다.)
>>356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어색해하는 상대를 향해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머쓱하나마 넉살좋게 인사를 건넨 것은, 크고 둥글둥글한 체격을 가진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한갈리로 묶어내렸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곱슬머리는 곧 풀어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구겨지고 군데군데 올이 풀어진불편해보이는 제복 오른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특수진압반 반장 도라희 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애석하게도 상대의 푸념을 듣고 말았으나, 화를 낼 의향은 없는지, 여성, 도라희는 살갑지만 예의바른 투로 말했다.) 저희 뒤처리 해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다들 살살하고는 싶은데 적당히하다가 범죄자를 놓칠까봐 매번 신세지게 되네요. 저희도 부상자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밖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특수진압반 사무실로 와주시고요.
>>358 아, 예, 안녕하십니까. 특수지원반 선우 산입니다. (주울 것도 없는 길바닥을 보며 어색한 연기를 하는 건 그만두었다. 부러 딴청 피우러했던 게 오히려 더 머쓱함을 불러왔고, 뒷목을 쓸어내리며 멋쩍어하다가도 예를 갖춰 바른 인사를 한다. 짜증과 불만이 드러나던 목소리가 헛기침 한 번에 수그러들었다. 말투도 삭 바뀌었고. 상대의 차림을 보니 여태 궁시렁거렸던게 좀 낯부끄럽기도 하고. 누가 들을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다, 진짜로. 원래 보는 눈 듣는 귀 없을 때는 나랏님 욕도 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일선에서 제일 고생하시는 분들한테 못할 소리 했습니다. (입 발린 말이라거나 직위에 눌렸단들 할 말 없을 만큼, 본인도 제 태세 변환이 우스워서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 했다.) 도움……….…. (다시 길바닥을 빤 내려다보더니, 허리 숙여 보도블럭 사이 핀 꽃을 똑 꺾는다. 입바람으로 호 불어 먼지를 터는 듯 굴더니 곧장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핑 생기가 도는 것도 같고.) 도움은 제가 드려야할 거 같습니다만. (손을 내민 이는 멀뚱멀뚱 당신을 바라본다.)
>>360 아, 소개가 늦었네요. 특수진압반 반장 도라희라고 합니다. (그냥 지나갈 걸 그랬나? 피차 퇴근길일 텐데. 아니다, 꼴이 이래서 모른 체 했어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겠지. 저와 마주치기 전과는 달리 수그러든 태도로 인사하는 산을 보며, 자기소개로 화답했다.) 아이고, 오죽 고생스러우시면 그러셨겠습니까, 요즘 부상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인데요. 괘념치 마십쇼. (퇴근하는 사람 오래 붙잡아두면 안 되지. 나도 얼른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마눌님이랑 공주님한테 부비고 싶다구. 그런 상념과 함께 손사래를 치며 대답하던 라희는, 다음 순간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아니, 저 사람. 흙 먹... 아니 꽃을 먹는다? 길가에 핀 걸? 요즘은 길가에 난 채소도 중금속 나온다고 안 뜯는데, 저거 먹어도 돼...?! ...아, 아니다. 저 양반 능력이 해독같은 건가보지 뭐. 부럽다, 우리 공주님이 쑥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 능력이 있으면 길가에 핀 쑥도 정화해서 갖다가 뭔가 맛있는 거 해서 바칠 수 있을 텐데. 뭐, 그냥 시장 들러서 쑥이나 쑥인절미를 사가도 되지만. 놀란 티가 역력했을 표정을 애써 수습하는데, 산이 뜻밖의 말을 건네며 손을 내밀어왔다. 도움? 내가? 여기서? ...아, 내 꼴이 상당히 부상자같겠구나. 퇴근했거나 퇴근중이실텐데도 성실하시네.) 아이고, 아닙니다.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치료는 확실히 받은 상태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퇴근 길이신 것 같은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요.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칼은 쓸 줄 아나?(고급스러운 재질의 흰 천 보따리에서 팔뚝보다 살짝 긴 길이의 단검을 한 자루 꺼내 당신에게 던져 준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사제는 구마 중에 날붙이를 만져서는 안되니까. 가지고 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쓰되, 휘두르지는 마. 축성된 물건이니까. (불안한 미소와 함께 혀를 날름거리고는, 이번에는 낡은 헝겊 주머니를 꺼낸다.)미안한 소리지만 이 근방은 소금이 귀한 곳이란 말이지. 이것밖에 못 구했으니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어. 중심원만 소금을 쓰고 외곽과 내부는 편법으로 할 수밖에.(주머니를 살짝 기울여 소금을 조금씩 뿌려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성흔은 아니지만, 내 피에 기름부음 좀 해주면 의식용으로는 쓸 수 있겠지. 이럴 때는 성유보다 성수가 신통한 법이지만, 물로는 오망성을 못 그으니까. 수상진을 사용할 여건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서 그 칼, 휘두르지 말라고 한 게 방금 전이기는 한데, (당신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는)살짝만 찔러 줄 수 있을까? 아주 얕게.
그, 그런 규칙이 있는 거군요! 죄송해요. 아직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온 게 없어서… (이어지는 자책. 허둥지둥하더니 단검을 꽉 붙들고서 요만큼도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불안한 미소를 발견한 뒤에서야 조금 움직인 듯 만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소금으로 그려지는 원의 시작과 끝을 동그란 눈으로 좇는다.)아무리 선생님이 편법으로 하셔도 제가 공들여 한 것보다는 훨씬 그 효능이 좋겠죠. 암요, 그렇고말고. 애초에 저 같은 건 왜 태어나서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도 따라오지 말 걸 그랬어. 죄송해요 선생님…………(중얼중얼중얼) 아! 네, 기름 부음. 네에. 알겠어요.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윽. 아프실 것 같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 아프게 해볼게요. 죄송해요…… (연신 무언가에 사죄하더니 덜덜 떨리는 단검이 상대방의 손바닥 앞에 도래한다.)아주 얕게. 아주 얕게. 아주 얕게…… (단검이 지나간 자리에 선명한 핏방울들이 일직선으로 터져 나온다. 긴장. 불안. 염려. 등으로 단검은 꽤 깊이 들어갔을 수도 있겠다.)아, 아이고…
흡.(칼에 찔린 순간 짤게 숨을 들이쉬고는, 찡그린 표정 그대로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마룻바닥에 댄다.) 자책하는 것 치고는 솜씨가 좋은데. 날에 묻은 피는 닦지 말고 털어내게.(그대로 손을 움직여 소금의 원 안쪽에 피의 원과 문양을 그려낸다. 파상풍이 걱정되는지도 않는지.) 아, 그리고, 꼴에 꼰대짓 할 생각은 없지만 말해두겠는데, 마음 좀 편히 먹으라고.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문양이 완성되자, 손을 떼고 보따리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낸다.) 자기비하할 필요 없어. 불안한 건 알겠지만, 적어도 무지하거나 서툴러서 일을 망칠 거라는 걱정 따위는 전혀 할 필요 없는 일이니까. 결국에는 이런 요식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야. 정말 핵심이 되는 의례였으면 편법으로 했을 리 없잖아. 그런데 그거 아나? 구마 예식을 하다 보면 이런 과정의 8할은 약식으로 넘기는 게 일상이란 말이지. (병 속의 기름을 피의 원진 위로 조금씩 흘려내며 마저 말한다.)요컨대, 중요한 순간에 가장 성패를 좌우하는 건 이런 준비절차보다도 나나 자네의 정신이라는 거야. 지금 하는 준비는 그저 부담을 보조하기 위한 준비일 뿐이고. 그러니까 절차를 다 망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 걱정은 내려놓으라고. 영혼이 가장 준비되어 있어야 하니까.(그러고는 입술을 깨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이윽고, 기름을 다 따라낸 다음에서야 피 흐르는 손바닥을 지혈하기 시작하며 말한다.)거울을 하나 부탁했었는데, 마련해 왔나? 없으면 물동이를 대신 써야겠고. 용도는 알고 있지? (씨익 웃어 보이며)긴장도 풀 겸, 직접 해봐.
(상대방이 내는 음성 하나하나에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 날에 묻은 피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털어내는 것 성공!) ……선생님은 정말 잘 참으시는 것 같아요. 뭔가, 뭐랄까, 존경심이 막 샘솟고 그러네요…… (중얼중얼중얼중얼) 마, 마음을 편히! 넵! (등이 꼿꼿하게 펴지면서 탁하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기어들어 간다. 꼼질대는 손가락.)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위로되고…… 심장도 가라앉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중요한 건 영혼. 중요한 건 영혼. (둥둥 떠다니는 기름을 보며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젠장!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만약 이번이 망한다면 십중팔구 기름기만 가득한 제 영혼 탓입니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마음속으로 가슴 100번 두들겼을까, 지혈하는 선생의 모습에 서글퍼진다.)거울은 여기 가져왔어요. (까먹지 않고 잘 챙겨온 본인에게 1초 뿌듯. 폭설이 내린 새하얀 머릿속은 답이 없다.)아…………… (삐걱대는 움직임) 네에, 거울이, 거울은 이렇게 하던 거였나…… (거울을 피로 된 원진 안에 둔다. 이게 아니면 어떡하지? 이제 막 선생이나 빨빨 따라다니는 초짜가, 그것도 걸핏하면 공황에 빠지는 초짜가 제대로 뭘 알겠는가. 파리해진 얼굴이 추운 듯이 떨면서 애절한 눈빛으로 선생을 본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슬며시 손을 뻗어 놓여진 거울의 방향만을 약간 돌린다.)좋아, 잘했어. 빼는 것 치고는 이론에도 모자람은 없군. 이대로만 하자고. 어께 좀 펴고.(계속 격려해주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의 태도가 걸리는지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러면, 일단은...... 준비 끝이군. 우리 신도분께서는 이 진 위로, (천장을 올려다보며)2층에 계시니, 구마 예식을 행하면 '그것'만 여기(거울을 가리키며)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는 자네가 저거 들고 32교구에 전달하면 되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지?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게. 내가 잘 참는 것 같다고 그랬나?(갑자기, 대뜸 지혈된 손바닥을 당신을 향해 바짝 들이밀어 보인다. 말라붙은 피로 빨갛게 물든 손바닥이다.) 명심해. 몇시간 뒤면 뼈져리게 느낄 테지만, 물리적인 상해나 위협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악마는 자네가 가장 약할 때, 자네의 귀, 머리, 마음 속에서 일을 시작하는 법이지. 예식의 다른 모든 부분은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찌할 수 없어. 그런데도, 만약 정말로 자신이 없다고 한다면...(말을 삼킨다.) ...일단은, 햇빛이 충분히 들 때까지 시간이 남았어.(진작에 박살내 둔 서쪽의 창문과 벽을 가리킨다.) 밥이나 좀 들면서 마음을 다스려 보자고.(하얀 보따리에서 제병과 포도주를 꺼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옛 선조들의 말씀이 틀린 것 하나 없다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쩌할 도리 없이 그것조차 의심스럽다. 여성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눈 앞의 남성을 침묵과 함께 응시한다. 저고리 품 안에 숨기고 있는 단도만이 그녀를 지켜줄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는 인간이라고도 호랑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모양새였다. 비린 핏내음에 어질거리는 정신을 붙잡고 옅게 살랑거리는 흑호의 꼬리를 애써 무시하려 하며, 그녀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삼켜낸다.
"......그거, 어디서 나셨는지요."
그가 보여주는 갓끈 역시 그녀에게 거센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기저에 의심 어린 분노 역시 조금씩 스며드는 것 치고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간접적인 대답은 되었을 것이다.
(낯을 점령하고 있던 먹구름은 잘했어— 한 마디에 쓸려내려간다. 눈꼬리가 기분 좋게 곡선을 그린다. 헤헤. 천치들이나 할 법한 웃음도 흘리면서 다시금 상체를 바로 세운다.)감사해요… 거울은 맡겨만 주세요! (상대방보다 한 박자 느리게 천장을 쳐다보고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1시간 이어진 적은 드물다.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온다. 갑자기 나타난 빨간 손바닥이 그것들의 행군을 저지한다. 보고만 있어도 자신의 손바닥이 쓰린 것만 같아서 시선을 아래로 박았다.) 유약하고 연한 부분만을 노리는 악마들은 참, 이기적이네요…… 저는 정신도 남들보다 물렁거리고 운동 같은, 신체적인 부분도 서투르지만…… (상대방을 정결하게 바라본다.)신도님과 선생님…께 든든한 부분이 되어드리고 싶……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붕붕 내젓는다.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네, 네! 도중에 시장해지시면 안 되니까요. (뚝딱뚝딱 물과 휴지, 컵 따위를 꺼냈다. 보조자의 역할에서 흠잡을 만한 부분은 없었다. 뚝딱거리는 보조자는 대강의 차림을 마친 뒤에 짤막하게 기도했다. 눈을 무겁게 뜨고서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늘 그랬듯이, 신도님이 좀 걱정되긴 하네요.
잡아먹었다는 간단한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여성은 핏기가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충격에 휘청일 것 같은 두 다리를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붙들고 간신히 꼿꼿하게 서 있다. 실종된 것은 몇 달 전이었는데 이제서야 잡아먹었다니. 제가 반 시진이라도 더 빠르게 찾아내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의 손가락에 붙들려 위태로이 흔들거리는 갓끈마저 애처롭다. 그 이의 미소마저 피로 얼룩진 것 같다.
"믿는다고 하면 제게 돌려주시려는지요?"
여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놀라울 만치 조용하고 침착하다. 인간답지 않은 소리나 납작 누워 위협하는 흑호의 귀에도 변함 없이. 분명 공포심 역시 그 마음 속에는 있을테지만, 지금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읽기 힘들었다. 또다시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닌 말을 꺼내는 것 조차 호랑이 영물이 아닌 그저 평범한 존재를 대하는 것과도 같은 태도다.
(회의에 찬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표정이 부드러워진다.)아주 좋은 말이군. 입은 대개 우리 몸에서 성령과 가장 먼 곳이라고 하지만, 자네 말에는 정말 필요한 언어가 있어. 지금 그 말을 잊지 마. 순수한 선의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니까.(몇십년이나 엑소시즘을 해왔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자신이고, 사람을 보는 감식안은 여전히 어두울 뿐이다. 그러나 이 허점투성이 부제의 입에서, 오래 전 떠난 누군가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들었다는 것에 희망을 느끼며, 당신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접을 수 있었다.) (제병을 건넨다.)당장은 괜찮겠지만,(역시 염려하는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오늘을 넘기기는 힘들지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더군. 계획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게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겠지만, 자네가 말했듯이 유약하고 연한 부분만을 노리는 게 악마니까, 주께서 우리의 약함을 살피시길 바랄 뿐이야. (컵의 4분의 1 가량 포도주를 따라 건넨다.)마시게.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나는 아직도 예식 자체보다는 신도분을 사전 처치해 두는 게 가장 곤혹스럽단 말이지. 사람 구하기 위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주의 어린 양을 물리적으로 붙잡아다가 어디 묶어놓는 짓을 매번 해야 하니 원...(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
"돌려줄까?" 짓궂은 질문을 하면서 그 웃음기는 통 지워지질 않는다. 손에 위태로이 붙들린 갓끈은 작은 바람에도 떨어질듯 하다.
"걘 네가 무서운거 잊고도 나랑 실랑이할 정도로 소중히 한다는거 아니." 낮은 목소리 공기중에 울리는 것이 음산하다. 그의 초점이 여성의 얼굴에서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시선은 곧 종점에 닿고, 그곳은 그녀가 단도를 숨긴 품 부근이였다. 육안으로 보일리 없으니 신사답지 못한 우연일 수도 있겠다만, 그의 입꼬리 피식 당겨지는 꼬락서니 보아하면 글쎄.
"왜 그리 아껴." 되묻는 목소리는 차분하다. 여성더러 얘기 해보라는 듯, 쫑긋 세워진 귀는 그 안의 숨겨진 흰 솜털을 내보였다.
(온화한 듯한 상대방의 말이 줄글로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은 부드러운 깃털을 만지는 것과 유사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은 꼭 정제된 기도문 같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 공황 속에 놓여도 선생의 말 한 마디만 있다면 출구를 찾을 자신이 있다.) 신도님께도 선생님의 말씀과 제 말이 들렸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왜 굳이 상대방을 선생님이라 칭할까?) 악마의 말이 들리고 있을까요…… (제병과 포도주를 건네받았다. 자세를 고쳐 앉은 뒤, 마른 입에 살과 피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의 악습은 가만히 있지 않고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리게 했다.)주여…… (중얼중얼중얼) 아까 신도님을 조심스레 묶는다고 묶었지만, 생채기가 난 것 같아 마음이 쓰여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알지만. (뚫려있는 서쪽을 바라봐서 해를 확인했다.)선생님, 선생님이 보시기에 오늘의 악마는 어떤가요? 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신도님의 얼굴만 봐도 이곳저곳이 가려운 것 같고, 괴로워서. (곧 구마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에 괜스레 손이 떨렸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기도문을 웅얼거린다.)싸우고 있을 거야. 우리를 대신해서. 말했듯이, 귀와 머리와 가슴에서 악마는 일을 시작하니까. 사람에게 들린 악령은 몸의 바깥으로 1할의 악의를 던지지만, 남은 9할은 유혹과 압박을 위해 쓴다고 하던가.(우울한 안색으로 주의 살을 받아들인다. 제병을 삼킨 뒤 이어 말한다.) 몸을 묶을 때 내 묵주를 두고 왔어. 임시방편이지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테지. 무슨 악마인지는, 잘 모르겠군. 예로부터 뭇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서 여러 악마들을 규명하고, 구분하려 들어 왔다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그 악마들도 모두 주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이고, 선의로서 주께서 임하시길 기다리는 우리는 악성보다는 선성을 보고 일해야 한다는 것 뿐.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조금씩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한다.)지금까지의 추이를 봐서는 아마도 몰록의 권속이 아닐까 싶군. 수준으로 보자면야, 대개 이 땅에 발 들이는 조잡한 악귀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는 듯 한데. 악마학은 미지의 영역이 많으니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지만, 우리 신도님의 증세만 봐서는 그래.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음, 오늘만 세 번째, 아니, 네 번째로 말하는 건가?(조금 표정이 풀려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린다.) 정신이 꺾이지만 않으면 어떤 악마라도 자네에게 죄 주지 못하리라는 것. 교만하지 말고, 공포를 품지도 말고...(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린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 음, 그런데, 좀처럼 석양이 들지 않는군. 몇 시지? 햇빛이 충분히 들어야...(쿵, 갑자기 천장에서 들려온 굉음에 사색이 돼서 벌떡 일어난다. 떨리기 시작한 손에서 멎었던 피가 다시 방울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전 구마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신도님도, 고통을 털고 웃으시면서 집으로…… (보기 힘든 긍정적인 말의 연속. 끝맺음을 못 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한 층 더 단단해지는 데에는 충분히 기여했다.)예전에는 왜 주께서 악도 빚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가끔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위에서 고전 중이신 신도님이 고성을 지르고 우시는 모습을 몇 번 봤어요. 그때마다 제 정신은…… 제 정신은 아직 미성숙한 거겠죠. (악령에 씐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주 잘 안다.)…몰록의 권속. (너무 빛바랜 시간.)32교구에 전달되면 확실히 알 수 있겠죠. 나중에는, 악마학을 좀 공부해보고 싶어지네요. (눈을 찡긋거리는 상대방을 보고 편안한 미소를 띤다. 이 역시 보기 힘들다.) 공포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고, 지식도 쌓고, 선생님한테 도움도 되고… (굉음과 동시에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천장을 쳐다보는 것 대신 한 일은, 흐르기 시작한 피를 마주하는 것.)…안 좋아요. 선생님, 이거 안 좋은 상황이에요! (물로써 자신의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거울이 있는 쪽을 보았다.)아…… 선생님. (주를 부르는 것 대신 선생을 부른다. 그려둔 진이 묘하게 뒤틀려 있고 거울은 금이 가 있다. 어디선가 비명까지 들려온다.)
(소리와 함께 막간의 안식도 깨진다. 왜 주는 악을 만드셨는지, 악마학을 배우고 싶은 이유는 무언지, 그런 마음을 추스리게 해 준 대화들이 대답할 새도 없이 모두 세상 바깥으로 끌려나가고, 아까와 같은 공간에 이제는 싸늘한 공포만이 있다.) 대체 무슨...(멀쩡한 쪽 손에 힘이 풀린 듯, 보따리를 놓쳐 떨어뜨리고 만다.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작은 회중시계는 침이 멋대로 돌아가고 있다.) (어질거림을 느끼는지, 피 흘리던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에 어둠이 덮히는 것만 같다. 손바닥에서는 붉은 피 대신 구더기가 기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염병. 분명 제대로 고정시켜 뒀어. 진 안에서 밖으로 힘을 뻗을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대체, 대체 무슨...(패닉이 온 듯 중얼거리다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다. 창백해진 표정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을 되뇌이다가, 문득 이마에서 손을 떼어낸다. 벌레가 들끓던 상처의 모습은 환상이었을까, 다시 보니 그저 피가 흐르고 있을 뿐다.) 미, 미안하군. 이럴 때가 아닌데. 말마따나...(약간 더듬거리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다가도,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쓸데없는 말을 끊어 버린다.) 일단은, 조치를...(말의 뒷부분이 흐릿하다. 당신에게 닿았어야 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령이 닿지 않는다.)
(기능을 상실한 회중시계를 보고 있자니 시야가 이지러지는 것 같았다. 참으로 독한 악마구나!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좀먹히는 상황에서 정신을 붙들어 매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 잘하지 못해도, 일단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상대방의 창백한 얼굴에 입은 저절로 다물어졌다. 이마에 묻은 피. 우선 선생님의 손바닥 출혈을.) ……(부제는 상대방의 손바닥에도 물로 십자가를 한 번 긋더니 자신의 품에 있던 목재 십자가를 꺼내 쥐여 주었다. 짧은 기도를 마치고 상대방을 본다.) ……엄청 무섭네요. (가만히 있으면서 상대방의 잘려나간 지시를 기다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부제는 가져온 성수를 천장에 뿌렸다. 빈 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전한 굉음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목도와 산사나무를 한 손에 쥐고 고민하기를 수 초. 천장에서 검은색 진흙 같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죠. 선생님…… 당혹스러움에 잠겨있기도 잠시 선생의 머리 위로 꽤 큰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이자 팔을 크게 휘둘러서 쳐낸다.) 신도님을 데리고 나와서…… 도, 도망가야 할까요…… (한 뼘 가깝게 상대방을 본다.)
...!(당신이 조치를 취한 순간 숨을 헐떡인다.) 고마, 고마워. 추태를 보였군. 구마 사제로서 후배를 보호는 못할 망정...(자책하며 떨어진 회중시계에 손을 뻗다가, 돌아가는 침을 다시 보고는 흠칫한다.) 도망은, 의미 없겠지. 아니, 도망가면 안돼. 영문 모를 일이지만, 이미 악마가 세상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보였어. 신도님께선 아마도 이미...(말을 삼킨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는 거야. (손 안의 십자가와 무사히 아문 상처를 망연히 보다가, 짧게 기도하고는 십자가를 당신에게 돌려준다.)이제 괜찮아. 1층은 아직 안전지대니까. 2층은 진작에 암실로 조성해 뒀다. 위험한 방식이지만, 2층을 악마에게 양보한 대가로 지금같은 사고 하에서도 당장은 놈의 영향력을 제한시킬 수 있어. (거칠게 발을 써서 중심원의 소금으로 찌그러진 진을 덮는다. 그러자 진흙도 떨어지지 않는다.)이 진은 층과 층을 잇는 통로였는데, 악마가 역이용했군. 여길 통해 우리에게 간섭했어. (한숨을 쉬며 보따리를 털어내서, 마지막으로 촛대를 꺼낸다.) 지금은 일단 내 판단에 따라 주겠나? 십자가는 품에 넣고 성경을. 수신호를 정하지. 서로의 목소리는 곡해될 수 있으니까. (무슨 수를 썼는지 초에 쉽게 불을 붙인다. 촛불 앞에 손을 비춰 보인다.)손동작으로 숫자를 알려주면, 그 페이지를 읽으면 돼. 이대로 2층으로...(다시 미련이 남은 눈으로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다, 못내 걸음을 뗀다.) 간다. 마음의 준비를 해둬.
(삼켜지는 말을 듣고 있자니 시야가 흐려졌다. 가엾은 영혼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고통에 어디까지 발버둥쳤을까. 이런 부류의 슬픔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닌 모양이다. 검은 소매에 눈물 자국이 남았다. 삿된 것들을 구축한다는 꿈 아래 사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애. 악마가 자신을 그렇게 볼까 덜컥 겁이 났지만 진흙이 멈추었기에, 그가 밝힌 촛불이 눈 안으로 들어왔기에, 눈물과 두려움은 말라갔다.)……네, 네! (성경을 급하게 꺼냈다. 상대방을 따라 층계를 밟으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회중시계가 눈에 밟혔다. 그의 미련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결국 흰 천을 회중시계 위로 덮어두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걸음이 멈춘 곳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생각보다 더한 농도에 눈을 껌뻑.)선생님…… 제 앞에 계시죠? (팔 휘적이다가 촛불 발견하고 안심하는 표정. 성경을 만지작거린다. 곧 시작해야 한다.)신호…… 주시면, 읽겠습니다.
(당신의 발걸음 앞으로 삐걱이는 널빤지의 비명과 함께 조용히 걸어나간다. 계단까지, 그리고 층계를 오르기 시작한다. 점점 어둠이 짙어질수록, 흐리멍텅해지는 정신머리를 애써 부여잡으려 하지만, 녹록지 않다. 그래서 조금 늦게 대답이 나온다.)그래. 앞에 있으니 잘 따라오라고. 읽을 때는 빛이 필요할 테니 더 가까이 붙는 게 좋아. 아마도 자네라면, 필요한 구절은 외우고 있을 듯 하지만서도. (이후로 약간,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어 묻는다.)이런 상황에 할 이야기는 아지만, 하나만 물어도 될까? 그, 요즘은 유달리 기억력이 나빠져서 말이야. 간혹은 구면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고, 낮선 사람에게 익숙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어. 특히나 보통은 안 듣는 소리를 들으면 괜히... 그런 병리가 더 도드라진단 말이지. 흠.(마지막 몇 마디는 살짝 잠긴 목소리가 되더니, 헛기침다.) 별 뜻 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나? 싫은 건 아니지만, 부제...한테,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건 좀 낮설다고 해야 할지, 참...(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해묵은 옛 기억을 되짚는 듯 목소리는 회한에 차 있다. 어쩌면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회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서 광원 하나에 의지해 움직이고 있으니 겁이 하나둘씩 축적되기 시작했다. 몸을 가까이 움직이니 열이 좀 더 짙게 느껴졌다. 성경책을 훑으며 약식으로 조용히 웅얼거렸다. 걸림돌이 되기도 싫었고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거룩한 대천사들과 천사들이여, 저희를 보호해 주소서…… (상대방이 질문을 던질 때까지 성경을 입에 올렸다. 이내 책을 덮고서는.) 아, 그,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보네요. 별 건 아니고…… 신부님, 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달싹이는 입술. 여전히 얘기하기 힘들다.) 너무 제 편의대로 했죠, 나중에 천, 천천히 바꿔볼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물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본다. 눈치가 엄청나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의 얼굴에서 붕 뜬 느낌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뒤 이어지는 말.) 아, 회중시계? 제가 천을 덮어두고 오긴 했어요. 일반적인 천은 아니니까…… 다 끝난 뒤에 들고 가도 될 것 같아요. (갑작스레 떨어지는 자신감!) 아마, 아마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전방 주시한다.)
(당신이 여러 구절을 암송해 준 덕분인지 조금은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한다.)괜찮아. 바꾸지 않아도. 그냥 그 호칭은 조금... 익숙해서 말이다. 향수를 느끼게 하거든. 나도 내 은사를 그렇게 불렀으니까. (어느 새 계단을 다 올라선다. 2층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정말 촛불과 근처의 손 외에는 무엇 하나 당신 쪽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나, 말해둬야 할 게 있다. 미안하지만, 아까부터 하나, 자네를 속이고 있었어. 이론에 박식한 자네라면 이미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지금부터 할 예식에 있어서, 내가 자네에게 맡긴 역할은 사실 보조가 아니야. 사제의 역할이지.(흔들리는 촛불 앞에 손가락을 가져가, 약속했던 수신호를 취한다.) 미안하군. 역시 나는 구마사제로서 실격인 모양이야. 이럴 때 책임질 수 없어서야, 원.(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이상할 정도로 식어 있는 목소리다. 정말 당신의 '선생님'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일까, 어둠 너머로는 무엇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줬던 칼은 일단 내려놓지. 구마 사제는 예식 중에 날붙이를 잡아선 안되니까.
이거 봐봐! 이거 저번에 너가 말했던 거 맞지? (갱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 슬럼가 골목, 한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손에 들린 피묻은 휴대폰을 흔들어보인다. 통신력의 장악은 곧 권력. 휴대전화는 힘의 상징 그 자체다. 그러다 슥 주변을 둘러보고, 품 속에 숨긴 채로 당신과 자신만 볼 수 있게 슬쩍 꺼내놓는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신중하다.) 이것만 있으면 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며. 잘됐다!
여긴 어디일까요? 그리고 저는 누구일까요?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햇빛은 따듯하고, 울창한 숲이 기분좋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주변의 흙은 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마음에 드는 숲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곧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 생각을 그만두었습니다. 정체 모를 불안감과, 떠올려야 해~ 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지만... 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는것 보다, 주린 배를 채우는것이 먼저였습니다.
숲의 풀과 흙을 기분 좋게 밟으며 걷다 보니, 덤불에 무성하게 열린 빨간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입에 넣어보니 새콤하면서도 달콤한게, 엄청나게 맛있었습니다! 앞으로 평생 이것만 먹고 살아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어느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이번엔 목이 말랐습니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손을 물에 담가보니, 얼어버릴것처럼 차가웠습니다. 분명 따듯한 날씨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니,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봅니다. 차가움을 견디면서 손을 물에 담가, 떠 마시자 이번엔 갈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심심함이 몰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복잡한 여자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바로 저입니다! 심심함을 채우기 위해서 무작정 걸어봅니다.
미지에 맞서 모험을 나서는듯한 전율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저는 굉장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에서 아주 좋아보이는 나뭇가지도 주웠고, 발로 흙을 밟을때마다 들려오는 소리와 향긋한 풀내음이 코를 간질이는게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 모험의 꽃인 보물만 발견하면 되는데... 아, 마침 저기에 있습니다. 누군가의 오두막인걸까요? 조금은 겁이 났지만, 그래도 이 두려움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보물을 발견할 수 없을겁니다. 저는 도망치는 여자가 아닙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두막 안으로 돌격합니다!
...역시 돌격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봅니다. 누군가 사는 곳일까요? 가구들도 깨끗해 보입니다. 창가 쪽을 바라보자 예쁜 꽃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분명히 제 모험의 대미를 장식할 보물이 분명합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폴짝거려 보지만... 닿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고난과 역경일까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몇번이고 점프를 반복합니다. 반드시 저걸 갖고야 말것....
끼야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러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제 목덜미를 붙잡고 절 번쩍 들어올렸습니다! 아아, 저는 이렇게 죽고야 마는걸까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자, 무시무시한 수염 괴인이 있었습니다. 아마 거인족인게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클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만 울면서 오줌까지 지려버렸고(이것은 여러분과 저만의 비밀입니다...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간곡하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맛이 없을거라고, 놓아주면 엄청 맛있는 열매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멋대로 집에 와서 죄송하다고 저의 필살 사죄의 포즈 3연타를 공중에서 시전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덜덜 떨고있는데... 어라, 이 괴인 조금 곤란해 보이는 표정입니다. 아마 오줌을 지린 제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라, 식욕이 싹 가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저의 협상의 기술이 빛날때입니다.
놓아주지 않으면 싸버리겠다. 라고 당당하게 외쳐봅니다. 무엇을 쌀건지는 여러분께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소녀의 마음이 망가져버리는것조차 각오한, 필살의 표정으로 괴인을 노려보자... 괴인은 저를 어디론가 끌고갑니다. 자유? 자유의 몸이 되는걸까요? 라고 생각하는 차에, 풍덩, 하고 목욕탕에 던져집니다.
아아, 깨끗하게 하고 잡아먹힐 운명인가 보군요. 틈을 봐서 탈출해야 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차에, 또다시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저와 비슷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도 잡힌걸까요? 이것저것 물어봐야 겠습니다.
...아무래도 여기는 평범한 가정집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소녀가 괴인 수염거인의 딸이라는것은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전혀 닮지 않았는걸요! 키도 저와 비슷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입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납치해온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괴인 수염거인, 예의주시해야 할 대상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맛있는 밥도 주었고(그렇게 맛있는건 처음 먹어봤습니다.) 따듯한 잠자리까지 주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살짝 들것만 같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요? 으음...
고민하고 있으니 그 아이가 다가옵니다. 무서우니까 함께 자자고 하는군요. 저는 조금도 밤이 무섭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아직 어린애인게 틀림없습니다. 흐음, 그런데 이 아이는 제게 꽤 우호적이군요. 잘만 하면 저의 부하로 삼아줄 수 있겠습니다.
어젯밤엔 꽤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꽤 많이 친해졌습니다. 우리는 낮동안엔 즐겁게 달리기를 하거나, 숨바꼭질도 하고, 같이 모험도 떠났으며, 나무열매도 주워먹었고, 즐거운 인형놀이도 했습니다. 정말, 정말로 즐거운 순간이었습니다. 잘하면 저의 친구로 삼아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것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접 말하는건 역시, 제법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제게 용기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풀이 죽는것도 같지만, 풀이 죽어있다고 해서 달라지는건 없으니 오늘도 열심히, 전력으로 놀아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게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들은 굉장히 화가 나있었고, 저를 보자마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로 저를 베었고, 큰 망치로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뜨거운 불로 저를 태웠고, 차가운 얼음으로 절 찔렀습니다. 어째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새빨간 나무열매의 색깔과 똑같은, 새빨간 피가 흐릅니다. 손을 넣으면 얼어버릴것처럼 시린 강물처럼, 제 몸에서 흘러내립니다. 그녀들이 제 몸에 쇳덩어리를 채워, 더이상 움직일수가 없게 되었을때.
저는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아빠가 절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가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있는 모습을.
절 공격한 사람들은 저를 차가운 방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잔뜩 소리를 지르며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왜 사람들을 죽였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손가락이 사라졌습니다.
핑크와 살몬을 어떻게 한거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팔이 사라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기억을 잃어버렸냐는 말에 아마 그런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저질렀다는 악행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납치하고 고문하고...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그건 내가 아니야. 난 숲에서 눈을 떴을 뿐인데 먼저 공격한건 너희잖아. 얼마나 아팠는데. 왜 너희 말은 진실로 취급하면서 내 말은 거짓말로 치부하는거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젠 차라리 아프지 않은게 더 어색할 정도가 되었고, 그들은 내 기억을 해석하기 위해 총력을 다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니까.
10년, 10년이나 걸렸어. 내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왔는지 알기나 해? 처음엔 내가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과했잖아. 이미 충분하고도 남아서 넘칠만큼 속죄했잖아. 살려달라고 빌었어. 울면서 애원했어. 그러다 포기하기도 했고, 너희들이 원하는건 전부 받아줬어.
하지만 이젠 전부, 그 아무것도 상관없어. 설령 내가 저지른 악행이라고 하더라도 너희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이 없어지는건 아니잖아.
나는 모았던 힘을 터트렸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것을 불태웠고, 그녀들은 전부 내 이름이라고 여기는 이름을 증오스럽게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볼품없는 나는 내 마음도 볼품없다고 종종 생각했다. 사랑은 엄청 대단하고 특별하고 아름답다는데 내 사랑은 그렇지 않다. 짝사랑이라 그런가? 아닌데, 서브병이니 뭐니 하면서 짝사랑하는 서브남주 좋아하는 애들이 내 주변에 천지삐까린데. 그러니 내 문제다. 나는 여자주인공도, 서브여주도 아닌 엑스트라라서. 드라마였으면 뒷통수나 나왔을까 말까, 웹툰이었다면 눈코입도 없었을 거고, 소설이었다면 이름도 없었겠지. 그러다 현실을 보는 거다. 이런데에 마음 쏟고 고민할 시간이 어딨느냐고, 대학 안 갈건가. 공부나 해야지, 공부나. 나는 별 생각없이 요 근래 우리 학교에 잘만 놀러오는 고양이나 귀여워해주며 실실 웃었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꼈다. 고양이에게 신세 한탄, 손장난치면서 웃는 꼴. 꽤나 한심해보일 것 같아서 입을 합 다물었다. 아는 얼굴만 아니어라, 아니지, 아니다. 아는 얼굴이어라. 아니, 어느 쪽이 나은거야? 쪽팔려서 자퇴만 안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부처님알라신시바신마라탕탕후루떡볶이눈꽃빙수시여.
"야, 돼지고양이. 너 나 두고 바람 피우니?"
이러면 짝사랑 얘기는 얼추 고양이 이야기 같지 않나.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거야. 슬쩍 인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꼬나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그럼에도 지 혼자 고양이랑 쑥덕대면서 시시덕 거리는 걸 그냥 무시하라니. 자고로 대한민국 고쓰리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즐겁더랜다. 그러고보니 저 뒤통수 낯익은데, 쟤 나랑 같은 반이던가? 아닌가? 그럼 작년에 같은반?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여도 소녀의 인기척을 느낄수 있었을테다. 그녀는 당신이 고개를 돌리면 힐긋 내려보는 것 외엔 달리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이, 그녀의 얼굴에 늘어진 그림자와 조합해보면 꽤 험악해 보인다. 속내 알 수 없는 무표정인지라 더더욱. 조용히 입을 앙 다물고 있으니 새초롬한 미인 어디가고 깡패만 한 명 있는듯한 분위기다.
"어,"
당신의 독백에 멋대로 난입해 답을 달더니, 옆에 풀썩 주저앉고선 그 뚱뚱한 고양이를 한 손 가득 쓰담는다.
"난 이 누나가 더 조아~"
아까의 목소리에서 한 톤 더 올려 고양이의 속마음 독심술(아님)도 해준다. 그러는 표정 아까와 다를 것 없이 무뚝뚝한게 이질적이다... 고3은 다 이런거야.
situplay>1596845082>58 (Choi Choco라는 상호의, 2인 테이블이 2개나 있을까 싶은 자그마한 카페. 그래도 딴에는 무인주문기도 있고 칠판형 입간판도 있다. 입간판에는 커피콩 캐릭터가 초콜릿 모양의 건물 문을 열고 내다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주방 위생 모자로 머리카락을 꽁꽁 감춘, 2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 큐브형으로 자른 초코 케이크를 잔뜩 담은 접시를 든 채, 행인들을 부르고 있다. 나름 유니폼인지 여성의 까만 앞치마에는 입간판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개업했어요 초코 케이크 좀 드시고 가세요 시트는 커피 맛이에요~ (공짜 케이크임에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먹어본 사람들은 맛있다고 대답해준다. 이걸로 영업이 되길 바라며 눈이 마주치는 족족 말을 붙여본다.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이에게도.) 안녕~ 케이크 한번 먹어볼래? (아이가 케이크를 사러 와주지는 않을듯하지만 혹시 알아? 맛있으면 부모님께 오자고 졸라줄지? 그러다 여성은 제 실수를 알아채고 멈칫했다. 어린이에게 커피가 들어간 케이크는 곤란하지.) 아차차!! 잠시만~ (매장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여성은 납작빨대에 가나슈를 살짝 묻혀서 아이에게 내민다.) 어린이는 초코만~
아, 제기랄. 손에 피 묻히는 거 싫어하시는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행차하셨대. (의자에 손목과 발목이 결박된 채,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는 얼굴을 돌려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는다. 항상 깔끔하게 넘겨올렸던 앞머리가 피로 엉겨붙은 채 눈을 가린 사이에서도, 당신을 향해 지어보이는 느슨한 눈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 보러 온 거면 물이나 주고 가. 왜 널 죽이려했는지 듣고싶은거면 가까이 오고.
1. 성규가 케이크를 이미 시식중이었던 상황으로 이어도 될까? 애기 NPC를 보니까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걸 할려면 성규가 이미 케이크를 먹고 있어야겠더라구:3 2. 1에 이어서, 애기 NPC도 내가 임의로 움직여도 괜찮을까? 곤란하면 편히 말해줘! 다른 방향으로 이어볼게X)
나도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 (파티장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새하얀 미니드레스가 이곳에 있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이질적으로 만든다. 당신의 상태를 살펴보듯 의자 주변과 당신을 눈으로 살핀다.) 그러게 잘 좀 하지. 내가 여기 오지 않도록. (상대를 약올리듯 얄미운 말투는 여전하다. 그러나 평소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는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당신의 웃음을 본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주하기를 포기한다. 짧은 침묵 뒤에 그녀는 입구 바깥에 선 사람에게 명령해 물이 담긴 유리잔 하나를 받아들고 당신에게 다가간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 꼴을 보니 마음이 좀 바뀌네. (당신의 앞에서 멈춰 선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썩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상처 받은 사람 같기도 하다.) 물, 주세요 해봐. 안 그럼... 내 손이 미끄러질 것 같네.
>>396 (후, 숨을 고른다. 얽히고 설킨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건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혈향 섞인 잔숨은 텁텁할 정도로 뜨겁다. 마주쳤던 눈을 피하는 너의 모습을 보고서, 느슨한 눈웃음은 지워지고 흉흉한 안광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잘 했으면 네 드레스는 붉게 물들었을거야. 그걸─ (잠잠하던 목소리가 순간 격앙되어, 그걸 숨기고자 묶인 팔목을 세게 흔들어 덜컹, 하고 의자가 고동친다.) ─내 눈으로 못 보게 된다는게 아쉬울 따름이고. (다가오는 당신을 향해 턱을 쳐든다. 뭐냐, 그 표정은. 조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한 일, 너가 느끼고 있는 것. 그 어긋난 맞물림의 결과가 이거냐?)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잖아. 이리와, 내가 의도한대로 연회장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원래대로라면 모든 걸 끝냈어야 했을 그 날처럼, 사랑을 속삭여줄 테니까. 그걸 바라고 있잖아?
(의자가 만든 소음 때문인지, 당신의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진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린다.) 저런... 미안하다고 해줘야 하려나? (주도권을 쥐기라도 한듯 당당하게 행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신의 이리와,라는 말에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자 다시 제자리에 멈춰 선다. 울림이 끊어진 구두 소리가 퍽 애처롭다.) …내가 정말 그걸 원하는 것 같아?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끝이 붉다. 허를 찔린 사람처럼 한참 말이 없던 그녀는 진정하기 위해 숨을 작게 들이쉰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네. 이 꼴로 나한테 그런 말이나 속삭여야 한다니. (당신의 앞,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그녀는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어디 한번 해봐. 사랑이든 저주든 마음껏. 혹시 알아? 내가 마음이 흔들려서 당신에게 물이 아니라 자유를 줄지도. (손에 든 물컵을 눈짓으로 가리키고 당신을 보며 웃는다.)
(2인 테이블 중 하나에 앉은 거구의 남자가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는, 마침내 포크로 한 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으려다, 쉴 세 없이 영업중인 사장과 그에게서 초코가 묻은 납작빨대를 받은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는 얌전히 빨대에 묻은 초콜릿을 빨아먹다, 맛있었는지 사장을 똘망똘망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언니! 케이크도 먹고 싶어요! 옆에 있던 아이의 부모님이 난처한 기색으로 아이를 달래보지만, 당연하게도 아이는 자기도 케이크를 먹고 싶다며 요지부동.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케이크를 한 조각 먹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이야, 맛있네! 특히 이 초코 크림이 최곤데! 빵도 맛있지만 어린이가 먹으면 머리가 띵~ 해서 아야~ 할지도 모르는 맛이야. 10년만 더 일찍 먹었으면 아야~ 했겠는데!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잘 울리는 목소리에 저음이지만 또박또박한 발음 때문인지, 호들갑스러운 태도 때문인지, 다행히도 아이의 시선은 곧장 남자에게도 집중되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아 하니 남자의 말에 설득당했다기보단, 어쩐지 괴인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부끄러워하거나 기가 죽기는 커녕 뻔뻔스럽게 연기(?)를 이어간다. 결국, 아이는 남자를 측은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 사장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종알종알. 그러면 언니 초코 크림 쪼끔만 더 주세요, 맛있어요! 그제서야 남자는 안도한 듯 다시 케이크에 집중한다.)
// >>395 장문 소설체면 답텀이 느려지는데 괄호체는 금방 써지더라구 ㅋㅋㅋ 아이고 찾아봤었구나! 찾느라 고생했겠네, 개인적으로는 성규의 다양한 면모는 최사장님(상호명으로 성만 유추해봤어 ㅋㅋㅋ)이랑 돌리면서 좀 더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그리고 답변들 고마워! 캐조종이나 성규가 어떻게 느낄지를 고려해준 것도 고맙구 :D 아이손님 엔피씨를 보자마자 저 상황이 바로 떠올랐는데, 충분히 흥미로운 상황? 내지 대화를 틀 만한 계기가 되면 좋겠네X)
(하, 하, 하. 목에 들끓는 핏가래와 감정이 섞인 웃음을 흘리며 제쪽으로 다가오는 당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얼굴 근육이 진정되지 않아 어금니가 부러질 정도로 꽉 문다. 귓가를 때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야 그제서야 안심한다. 너가 내게서 무슨 말을 원하는 지, 내가 진정 들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너는 내가 이 꼴이 되고나서도 듣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구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젖혀지고, 시선은 당신의 웃는 얼굴, 그리고 물잔을 차례로 향한다. 그리고 묶여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만한 태도의 눈웃음을 지어보인다.) 자기야. (둘의 사이에서는 꽤 생소한 호칭이다.) 나를 잡느라 고생하신 분이 저 너머에 계신 걸 알아.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이쪽 모습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거울을 흘끗 돌아보았다가, 다시 상냥한 미소로 당신을 올려다보며 턱짓을 한다.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이.) 너 외에는 들려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맑은 웃음은 꼭 즐거운 아이 같건만, 그 속에는 누구를 향한지 모를 눌러 숨긴 슬픔이나 분노 따위가 가득하다.) 설마 듣고 싶기만 하려고. 내가 이런 사람인 거...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낯선 부름에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길을 잃고 흔들린다.) …그걸 알면 좀 더 착하게 굴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있지. (거울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차갑다. 그 때문인지 마지막 말은 언뜻 그를 향한 걱정 같기도 하다.) 이런. 얼마나 좋은 말을 해주려고 그러실까? (당신의 말 한마디가, 그 웃음이. 그리고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시선 모두 잘 짜인 거미줄처럼 느껴진다. 이 이상 가까이 가면 서로 무슨 꼴을 보게 될지 눈에 뻔히 보이는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이거 기대되는 걸. (당신이 내게 줄 무언가가 달콤한 독일지, 쓰디쓴 꿀일지, 그도 아니면 잘 벼려진 칼날일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거역할 수가 없지.) ... (느리게 당신에게 걸어간다. 날 선 구두소리가 그녀의 걸음에 맞춰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위태롭다.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의 발끝, 금방이라도 당신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말없이 당신을 내려다본다.)
(알고 있지. 처음은 가증스러운 사냥감일 뿐이었다. 네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비참한 실패로 끌어들여 이 자리에 묶여있게 만들었고. 그러나 나는 태생적으로 실패를 용납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타인이 보기에 그저 자기합리화에 가까울 지 몰라도, 등받이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며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반쯤 기울인다.) 내겐 뽑아낼 정보도 없을텐데? 너도 알다시피, 난 오로지 네게 몰두하고 있었거든. 마음도, 몸도. 하하…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광인의 조소. 혹은 웃음으로 위장한 흐느낌. 2일 내내 고문을 받은 탓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결국에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마치 주변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하다. 너의 발걸음 소리가 걸음폭으로 인해 일순 끊어질 때마다 가슴을 졸이고, 그렇게 너가 급하게 뿌린 듯한 향수향이 느껴질 즈음에 고개를 처들어 네 귓가에 들이민다. 조그만 목소리로, 우리가 연인이었을 적처럼 낮게 깔고서 속삭인다.) …눈도, 고개도 움직이지마. 노인네는 처음부터 네가 죽길 바래왔어. 내게 사주할만큼. (부디, 네가 나를 보았을 때처럼 표정연기를 망치지 않기를.) 자, 이제 물잔으로 내 머리를 내려쳐. (슬 떨어지는 척을 하며 네 안색을 살핀다.)
(끝까지 모르고 싶었던. 아니,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지 않았던 말. 당신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중에도 이기적인 나는 그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참았다. 대체 그날의 무엇이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대답 없는 질문만 마음속을 맴돈다.) ... (당신의 속삭임과 함께 다가온 짙은 혈향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눈을 깊게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나는 버려졌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은 조금이라도 쓸모없는 도구라면 치워버리기 선호했고, 나는 그리 좋은 도구가 아니니까. 슬픔과 분노, 원망과 두려움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대책없이 하는 말은 아닐 거라 믿어.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내게 쥐어준 건 결국 날카로운 칼이구나. 당신도, 그 사람도... 참 잔인하다. 결국 이렇게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하!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내게 줄을 풀어버리라 이야기하지. 그럼 나는 마지못한 척 당신을 도울텐데. 당신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잔을 높게 들어 올린다. 거친 손길에 흘러넘친 물은 방울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남는 흔적들이 꼭 그녀의 눈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가득이다. 그리고,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마.
(너는 날 반절 밖에 모르고 있어. 난 너의 모든 걸 알고 있지. 집착 그 이상의 교만일 지라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그래, 나의 이상. 목적을 잃어버릴 정도의 어지러운 향을 풍겨 내 머릿속을 헤집지. 네가 아는 반절의 나라도, 내가 대책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거야. 떨어지는 물이 발등을 적시는 것을 무시하며, 이죽인다. 봐라, 손에 대지도 않던 날 선 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쥐는 모습을. 나를 찌름으로써, 완성되었으면 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뭐? (용서? 이죽이던 것이 순간 멈추고, 벙찐 얼굴이 된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넌 어째서 이런 상황에서도 날 탓하지 않고─암전. 쨍그랑, 소리가 귓가에 세게 울린다. 이마를 타고 몇 번이고 흘러내렸던 뜨듯한 액체가 눈알까지 파고들어 흰자를 물들이는데도 정신을 차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피를 흘리며, 당신을 바라보는 표정은 아마 당신을 대하면서 처음으로 지어보였던 표정이 아닐까. 흔들리는 눈동자, 모든 방벽이 허물어진, 모든 것의 답을 구하는 표정.) …… (아주 일순의 표정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사라졌다. 바깥의 이목이 모두 이쪽에 쏠렸을 때, 컷팅해놓은 로프를 풀고 새끼손가락을 높게 들어올린다. 암구호를 알아들은 심복들은 알아서 노인과 얼마 남지 않은 호위병력을 밖에서 제압해두었겠지. 곧 심문실의 문이 부서지듯이 열리며 부하들이 들이닥친다.) 뭐해. (거만한 미소는 다시금 피로 물든 얼굴을 차지해, 당신의 앞에 우뚝 선다. 그리고─) 떨어져있는 왕관이 눈 앞에 있잖아. (무릎을 꿇고, 네 손을 갈구하며 양손을 내민다.
(아.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처음에는 당신의 그 멍청한 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으로는 상실에서 오는 불쾌한 만족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끝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을 때는 한숨이 나왔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떤 단어로 정의해야 완벽해질까.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형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거지 같은 마음 하나 때문에 나는 당신의 눈길을. 손길을. 마음을. 고통과 슬픔, 당신의 죄마저 전부 끌어안고 싶었다가 때론 모두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두렵다. 당신의 잔인함마저 내 탓이기를 바라는 내 모습이.) ... (거친 소음에 그녀는 뒤를 바라보려다, 당신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에 선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준비된 연극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끝나는 모습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 당신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글쎄. 왕관이 아니라 목줄이 아닐까. 그녀는 당신이 내민 손을 바라보고도 생각에 빠져 있어 한동안 미동이 없다.) 후회하지 않겠어? (잔이 깨지며 조각에 스쳤는지 손바닥에서 붉은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다 통증을 느끼고서야 상처를 인지한다. 그러나 오로지 당신만을 주시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는 당신을 놀리듯 태연하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나를 그 분께 바치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어리석은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아직 늦지 않았다며 달콤한 말로 꾀어낸다. 모두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며 당신을 위하듯 속삭인다.) 잘 생각해. 왕관이 올바른 주인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여자는 스스로를 시험한다.)
>>400 (케이크를 먹으며 사장과 가족손님들 쪽을 보니, 아이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가나슈를 묻힌 빨대를 받는 것으로 해결된 모양이었다. 아이가 자기 몫을 순식간에 먹어버리자, 또 먹고 싶다 하려나 싶어 주시하려니, 의외로 "다음에 어린이 케이크 사주세요!" 라고 조르는 걸로 넘어가준다. 어설펐을 지언정 결과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포크로 케이크를 자르는데, 사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는 감사인사를 하자, 남자는 빈 손을 내젓곤 대답했다.) 아, 별말씀을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케이크 무척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시트가 충분히 부드럽고 촉촉한데다, 크림도 딱 기분 좋을 만큼 달달하고 고소해서 쉽게 질리지 않더군요. 앞으로 또 오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표하듯, 접시 안의 케이크는 제법 덩치가 작아져있었다.)
>>408 (케이크가 맛있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꼽아주는 손님의 말에 여성은 감격한듯 입이 귀에 걸렸다. 덩치에 비해 자리가 불편할수도 있는데 점잖게 호평해주고 곤란한 상황에 도움도 주고 잘만하면 좋은 손님이 되어줄거 같다.) 감사합니다~ 커피랑 차도 있는데 한번 맛보시겠어요? 시그니처메뉴는 카페모카여도 에스프레소부터 허브차까지 있고 디카페인도 가능해요~ (테이블일체형인 태블릿으로 주문할수 있다고 덧붙이려다 그러면 강매같은 모양새가 되어 실컷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나쁜인상만 남길듯해 그만두었다. 그러면서 손님을 살피자니 분명 초면인데 묘하게 낯익은 느낌이다. 동굴저음이란 말이 어떤의미인지 확 실감나는 목소리도 그렇고,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인가? 혹시 가수? 호기심이 커졌으나 차마 묻지는 못했다. 영업하는 입장에서 사적인 질문을 했다간 좋은 인상을 줄리가 없으므로. 나중에 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만 어떨지?)
용서? (한음절 한음절 곱씹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당신의 제안에 비아냥거리거나 반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신을 바치는 이유는 물론이거니와, 용서받아야 할 이유, 그 분이 용서의 주체인 이유, 그걸 제안하는 이유를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한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짧은 연기가 섞여 녹아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얄쌍한 유혹은 통하지 않음을 반월처럼 휘어진 눈웃음으로 대신한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내가 틀리지 않음은, 내 유일한 주인은 오직 너뿐이라는 것이고. (내민 양손은 당신의 잔을 잡고있던 팔 쪽으로 향해, 검과 작위를 하사받는 기사처럼 소중히 감싸안는다. 불충하다고 할만한 점은 욕망으로 점철된 시선이 오로지 당신의 얼굴을 향해있다는 점일까.) ─날 지배해줘. (감싸안은 당신의 팔에 한 번, 두 번 입을 맞추었다가 상처자국이 나있는, 네 피로 물든 손바닥에 입을 길게 맞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시선은 집요하게 당신의 얼굴을 핥고, 당신의 혈액은 마치 립스틱처럼 입술을 붉게 빛나게 만든다. 너에게 지배당하고 싶고, 널 지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당신의 손길을 기다린다.) 밖에 있는 늙은이와 강경파들은 내가 죽여줄게. 여태껏 중립을 지키던 녀석들도 네 지시 하나면 전부 치워버릴게. 어떻게 할까?
(당신의 웃음에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한낱 인간이 감히 주인의 선택을 의심하다니. 누군가가 손가락질하며 그리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후회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나를 당신에게 바친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올바른 주인을 찾아가려면. 아니, 내 올바른 주인은...) ─! (당신의 손이 팔에 닿자 그녀는 죄지은 사람처럼 긴장한다. 지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그에 반응하듯 숨을 들이켠다.) 읏, (억눌린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는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입맞춤에 통증이 선명해지고, 예민해진 감각은 그녀의 생각을 온통 헤집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야에도, 머릿속에도 온통 당신뿐이다. 당신을 유혹한 대가가 이리도 혹독하다.) ... (집요하게 이어지는 당신의 시선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그녀는 도망치듯 눈을 감았다가 뜬다. 잠시 뒤에는 눈치를 보듯 조심스럽게 당신과 다시 눈을 맞추려 한다. 당신의 입술처럼,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다.) 나는... (꼭 뜨거운 불길 앞에 놓인 것만 같다. 숨이 막히고, 말을 이어갈 수 없다. 그녀는 당신의 얼굴을 감싸기 위해 남아있는 반대쪽 손을 뻗었다.) 그런 걸로는 부족해. (젖어있는 목소리는 대답이 아니라 탄식이었다. 눈앞에 놓인 왕관을 쓰기 위해 몸을 굽혔다. 결국 그녀는 당신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내게 키스해. (승리의 영광을 가져온 기사는 대우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전리품은 이제 당신의 것이다.)
>>409 (제 칭찬에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사장의 반응에, 다소 험악한 인상을 풍기던 남성의 표정도 제법 부드러워진다. 음료를 권하는 말에 그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가게 문이 열리더니 일행인 듯한 두 사람이 들어온다. 그 중 한명이 놀란 얼굴로 성규를 보며 일행에게 속닥거린다. 소리를 죽인다고 죽였지만, 좁은 가게 안이라 들리지 않을 턱이 없다.
헐, 저기 봐! 한성규다! 그 왜 우리가 본 뮤지컬에서 나쁜 숙부 역할 했던 사람! 어, 진짜네? 근데 그 사람... 논란있지 않아? 그 왜, 연애프로 나갔다가 여참가자한테 무안주고 도중하차했다며. 야, 듣겠다. 조용히 해! 나가자, 나가.
남성 - 한성규를 알아본 이가 일행의 등을 떠밀며 가게를 나가버리고,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진다. 성규는 한 입 크기로 작아진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뒤, 꿀꺽 삼키고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가능합니까? 그만 일어나봐야 해서요.
/성규도 방송이나 뮤지컬 이야기를 꺼내긴 애매해서 한번 손님들일 뻔한 npc들을 동원해봤어! 반응하기 어려우면 편히 얘기해줘~
('탐욕스럽도다.' 누군가가 내게 해준 말이었다.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모든걸 탐하는 자와 단 하나만 탐하는 자가 같을 리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신념이고, 신앙이며, 한 스푼으로 바닥을 보인 내 모든 감정을 털어넣어서 만든 결과가 이곳에 있으니. 당신의 명령을 받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킨다. 당신의 팔을 잡고있던 손은 서서히 당신에게로 당겨지듯 움직여 뒷목을 살포시 감싸고, 다른 한 손은 당신의 손을 제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듯, 힘을 주어 봉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자리까지 가까이 다가가, 서로의 숨결이 닿을 무렵, 명령대로 취하는 것은 당신의 입술이 아닌 새하얀 목과 턱의 언저리, 당신의 맥박이 느껴지는 동경맥이었다.) ─두 가지 잘못을 했어. 첫 번째, 상대를 불문하고, 내가 지금 입술을 맞춘 곳을 노려오면 어떻게 하라했지? (내가 당신을 노려, 이곳에 잡혀오게 된 계기. 계획의 일부였지만 너는 피하지 않고, 맞서지 않고 내게 반격을 포기해버렸다. 반려 동물를 다루듯, 단호하면서도 타이르 듯 읆조리다가도 벌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는 지, 흰 과실을 베어물듯, 네 목을 약하게 깨문다. 이빨 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흉터처럼 붉은 흔적을 남긴다.) 두 번째. 애초에 이곳에 날 구할 생각으로 왔구나. 왜 무엇보다 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그런 행동들이면 한 번이면 충분해. ─명심해, 네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협박인가? 아니, 당신이라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의 억지기도 하고, 울분을 토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겠으면 자연스럽게 날 밀어내.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니까. ……고문받느라 씻지도 못했고.
(어두운 방 안. 라디오에서 운석이 지구에 도달할 때까지 24시간 걸릴 예정이라는 인공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말인 즉슨 지구 멸망까지 24시간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듬거리던 손이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르른다.)지겨워 죽겠네. 어차피 운석이니 멸망이니 그딴 이야기만 계속 나오는 걸 들어봤자 뭐해. 하여튼 이놈의 세상은 마지막까지 재미가 없어.(혀를 차며 동의를 구하듯 당신을 본다. 정확히는 당신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을. 실내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둡다. 멸망이 확정되었을 때부터 활개치고 다니는 무법자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빛을 차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야. 아직 살아있지? 겨우 하루 남았는데 더 빨리 가면 억울할걸. 지구 멸망하는 꼴은 보고 가야지. 평생 한 번밖에 못 보는 절경일 텐데.(비꼬듯 말하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당신의 손길이 뒷목에 닿아와 팔에서 멀어지자, 그녀는 반대로 잡혀있었던 팔을 들어 올려 당신의 어깨 부근의 옷을 움켜쥐려 한다. 당신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다는 듯. 숨결이 가까워져도 미동 없이 눈동자만 바라보던 그녀는 입맞춤이 다른 곳에 내려앉았을 때 약점을 노려진 사냥감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 한다. 그러나 빈틈없이 붙잡힌 그녀는 결국 멀어지지 못하고 눈썹만 찌푸린다. 그녀가 아는 한, 당신은 무언가를 길들이는 일에 딱 알맞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와 실망, 포기와 체념 끝에 달콤한 희망과 행복을 보여주며 매 순간 당신을 갈망하게 한다.) …글쎄, 당신을 기다리라 했던가? (이건 제 잘못이 아니라며 심술이라도 부리듯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 (당신의 이름을 부르려던 목소리는 날숨이 되어 소리 없이 흩어진다. 당신에게 길들여진 그녀는 목덜미를 물려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한다. 그저 당신이 새긴 흔적을 통해 벌을 받고 있음을 깨달을 뿐. 붉은 낙인이 당신과 그녀의 관계를 드러내듯 피부를 물들인다.) 그래서야. 당신뿐이니까. (나는 이제 당신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듯 속삭인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앞으로도 당신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 당신의 말처럼 내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건 당신 하나뿐이다. 그러니 당신을 위해 이렇게... 자꾸만 나를 버리게 된다. 그것이 내 목숨이라 해도.) 상처들, 치료부터 받겠다고 약속해. 그럼 놓아줄게.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말에 순간 긴장감이 풀렸는지, 헛웃음을 지은 그녀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조금 진정된 듯하다. 말을 마친 그녀는 당신의 얼굴에 닿아있던 손을 작게 움직여 엄지손가락 끝으로 당신의 볼을 살며시 쓸어보려 한다.)
(당신의 조그만 심술에도 이야기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쉽사리 넘어가질 못한다. 무언갈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옴싹거리다, 결국 새어나가버린 웃음으로 덮혀버린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밀어내기엔, 네 목덜미에서 풍겨오는 향수가 퍽 달큰했기에. ─도무지 사랑만은 고갈되지 않을 것 같구나.) ……너는 정말……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말을 채 이어나가지 못한다. 순식간에 사고가 정지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그럼에도 장소와 타이밍에 의해 간신히 억제되고 있던 끓어오르는 강한 욕구가, 그 입가에 걸린 미소에, 거친 숨에, 눈빛에 섞여녹아 간절함을 더한다. 떨어지라고 했으면서, 키스는 해주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발치에서 떨어지지 않는 손길을 바라는 동물처럼 이미 충분히 가까운 다리를 당신의 다리에 밀착시킨다. 몸도 자연스레 붙게 되었지만, 당신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이런 기분이었나. 계속 같이 있고 싶으니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그거 알아? 시덥잖은 고문들보다, 네가 휘두른 유리잔이 가장 아팠다는 거.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네가 지어보이는 헛웃음 마저 더 보고싶고, 소유하고 싶어 괜히 그런 농을 친다. 볼이 손가락으로 쓸리자 슬 밀려나는가 싶다니, 고개를 가볍게 비틀어 자연스레 제 입가에 닿게 한다.) 알겠어. 대신, 네 목에 남겨둔 건 오래오래 남겨둬야해. 또 언제 해줄 수 있는 건지 모르니까. (정말 놓아줄거야? 같은, 그 답지 않은 무구한 시선을 연기하는 걸 보면 아마 이 계획은 과정이 아닌 완성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아무도 방해할 수 없이 견고하며, 고질적인 집착증에 가깝고, 우리들의 쓸리고 닳아버린 애정을 틀어 맞춘, 짜고 친 연극의 피날레가.)
# ??? : 아뇨 안 놓을래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치가 준 레스가 너무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그럼 이렇게 막레로 할까?! 진짜 킹왕짱짱재미있었다!! ㅠㅠ 사실 나 가끔씩 이 아이들의 AU 상상하면서 이럴 때는 어땠으려나? 하고 놀 정도로 짱잼이었어... ㅋㅋㅋㅋㅋㅋ ㅠㅠㅠ
#쭈인님 정말 치명적이야 :p.......개인 사정으로 하루이틀 늦을 때마다 계속...계속 생각했어 이걸 어떻게 잇지!?!? 하고 ㅋㅋㅋ쿠ㅜㅜ AU 들려주세요.....너참치의 뇌속으로 DIVE할래.....근데 정말 새로운 타입의 캐릭터에 새로운 타입의 상대였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아이러니한 감정이 너무너무...너무하고(?) 몰입해서 행복하게 즐겼습니다 우하학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 정말 치명적인 건 당신... ㅠㅠ 이어가느라 참치가 힘들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다!! ㅠㅠㅠ 사실 제가 곰손이라 잘 풀어볼 수 있을지 걱정이긴 하지만 부디 같이 이야기... 해주신다면...! 감히 한 AU 올리겠습니다!! 인데 그럼 여기는 어려울테고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1:1 어장이라도 가야하나 (혼돈) 혹시 모셔도 될까요 참치님...?! ;m 나도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는데 저도 정말 너무 너무했습니다...(?) 저도 덕분에 너무 즐거웠어요... 행복했어요 진짜 감사합니다... (폴더인사)
# 다행이야!!! ㅠㅠㅠ 저는 제 앞에 금손님이 계신다는 것만 아는데요? 오호홓ㅎ 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자세한 거 하나도 생각 안 하고 돌린거라 괜찮아! 정체성 불확실 좋아!! 부담없이 가볍게 이런저런 썰풀고 하면서 편하게 해보자! ㅋㅋㅋㅋㅋㅋ 그런가...? 우리는 무언가를 깨어버린 건가...?! 참치도 앞으로 행복가득 금전가득 건강가득!! ㅠㅠ 그럼 어장은 내가 만들까? 제목은... 뭘로 하면 좋지... Lost the game... 이런 느낌밖에 안 떠올라...! ㅠㅠㅠ
# 어헣 이럴수가 쭈인님보다 더한 콩깍지가 참치한테 씌인 것 같은데 (의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음 어장 제목은 Behind the Finale 어때!? 일단 자유상황극 스레에서 둘의 스토리의 완결 부분을 엿본 느낌이기도 하고, 비하인드썰로 이것저것 풀어볼 예정이니 이중적 의미를 가미해서....ㅋㅋㅋㅋㅋㅋ 앗 그래주면 고맙지~~~ 0레스 내용은 참치에게 맡기겠습니다 우하하 왜냐하면 이제 자러가야하기 때문....흑흑 놀아줘서 고마워 굿나잇 참치 쭈압~
# ㅋㅋㅋㅋㅋㅋㅋ ^____^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아... 참치 진짜 똑똑한 참치구나??? 어장 제목은 Behind the Finale로 확정! 그럼 내일 점심 전까지 내가 어장 세워둘게! 0레스... 최대한 열심히 찾아서 가져올게...!! ㅋㅋㅋㅋㅋ 잘자 참치야! 나도 놀아줘서 고마워! 쫀밤 참치!!
>>415 (테이블을에 붙은 태블릿을 통해 결제를 완료하고서, 성규는 친절한 사장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안도감과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꼈다. 유명해지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유명세를 좇아 욕먹을 걸 각오하고 연애 프로에도 출연했건만, 누구나 다 알 만큼은 유명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뭐, 그 때 일은 엎어진 물이고, 괜히 들쑤시기보다는 지금 일에 집중해야지. 무엇보다도 신장개업한 가게에 폐를 끼치지 말고. 그런 상념을 깬 것은,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는 사장의 목소리였다.) 아, 감사합니다. (음료와 쿠폰을 받아드는데, 사장이 시식용으로 내놓으려던 케이크도 먹겠냐고 제안했다. 성규는 놀라 케이크와 사장을 번갈아 봤다가, 열없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고 대답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주신 것에 비해 약소하지만 주변에 입소문이라도 많이 내겠습니다. (아예 제작자분들 동료들 스텝분들한테 한 조각씩 돌릴까, 하는 생각을 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인원이 몇인데 조각으로만 돌린대도 혼자서 그걸 다 만드시려면 쓰러지실 거다. 알바생 고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번창하면 좋겠군.)
/ 아이고 싱겁긴! 오히려 최사장님이 손님들한텐 상식적인 대응을, 성규에게는 호의적인 대응을 해줘서 고맙더라:) 아무래도 케이크 받고 나면 막레 각일 것 같은데, 혹시 또 해보고 싶은 상황 있을까?
안녕하…세요. (아, 민망해라. 긴장하고 주눅든 목소리는 고작 다섯자짜리, 모르는 사이에서도 주고 받는 평범하디 평범한 인사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삑사리가 나 순간 높게 튀었던 목소리와 반대로 아이의 눈은 아래로 데구룩 굴러간다. 굴러간다, 그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동그랗고 순한 눈망울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의 원래 겨, 경호 대상… 전 그 분의 대역이에요. 그러니… (목이 메이는 듯 하다.) 제게는 목숨 걸지 마세요. (이 말만큼은 강단있게 소리냈다. 이 때만큼은 당신과 마주하는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428 아이고, 공짜케이크도 잔뜩 주셨는데요. (너무 대출혈서비스 같은데. 괜찮으려나 싶었지만 거절하기도 민망했기에 선선히 쿠폰을 건네며 감사인사와 함께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혼자 다 먹으면 포동포동한 대군이 될 테니 소속사 식구들하고 나눠먹어야겠군. 다 먹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포장된 케이크를 집어드는데, 사장이 뮤지컬에 대해 물어왔다. 성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아, 혹시 뮤지컬 좋아하십니까? (그는 집어들었던 케이크를 잠시 내려놓고, 전에 없이 적극적인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의 눈빛은 어쩐지 광기에 찬 것 같으면서도 절박해보이기까지 했다.) 지난주부터 이 근처에 있는 ㅇㅇ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뮤지컬에 출연중인데요, 제목은 [이씨의 난]이고, 혹시 조선 단종 아십니까? 그 왜,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요. 당시의 역사를 모티브로 창작된 가상 역사물입니다만, 독특한 부분은 왕위와 벼슬이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닌 가상 배경에, 납작한 악당 없이 모두가 각자의 사정에 의해 타인과 대립하는 피카레스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어린 조카와 목숨을 걸고 대립하는 주인공의 숙부 창한대군 역을 맡고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한소절만이나마 짧게 보여드릴 수도 있구요. (창한대군이 이런 심정으로 왕위를 뺏고자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어느새 무대에서나 보이는 눈빛이 된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성규는 열띤 태도로 영업(?)을 이어갔다.) 전 이번 작품이 데뷔작입니다만 캐스팅이 정말 호화롭습니다. 여기 보시면, 주인공은 제작총괄도 맡고 계신 유이지 선배님이시고요, 서브주인공은 작년에 서바이벌 프로를 통해 베X테X 타이틀 롤로 데뷔하신 A 선배님이시고, 주인공의 고모이자 충신인 은월공주는 무려 작년에 뮤지컬 레X카에서 댄X스 부인 역으로 열연하신 B 선배님께서 연기하십니다.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저희 극이 창작극인데 캐스팅에 돈을 많이 쓰는 바람에... 그렇지만 뮤지컬 좋아하시고 여기 나오시는 배우님 중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시간 나실때 한번 봐주시면 절대 후회 안 하실겁니다. 이번주까지 20퍼센트 할인중인데, 시간 되면 한번 보러와주시겠습니까? 주위에도 알려주시면 제가 이곳 케이크 맛있다고 입소문은 물론이고, 가능하시다면 제가 배우, 스테프, 감독님들께 이 곳 커피나 케이크 하나씩 돌리겠습니다. 어려우시다면 인력을 확보하실 때까지 기다릴 용의도 있습니다.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기분으로 말을 쏟아내고서, 성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 부분을 물어보고 싶었구나! 어쩌다보니 성규도 영업광기에 걸려버렸는데, 아마 이번 턴에 한번 보러 오고 입소문 내 주는 대가로 방송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흔쾌히 알려줄거야! 😉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부터 경호를 맡은 라일라라고 합니다. (길고 곱슬거리는 흑발에 짙은 갈색 피부와 진논색 눈동자, 둥글둥글하고 육중해보이는 체형의 여성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다 자신은 경호대상의 대역이라는 말에 라일라는 의아한 표정을 띠었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첫 출근한 경호원도 곧장 경호대상과 접촉하게 하지 않을 만큼 삼엄한가보군.) 그렇군요. 그럼 그 분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첫 출근부터 지각은 곤란하다. 착각해서 지체했으니 알려주시거든 서둘러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라일라는 대역의 대답을 기다렸다.)
>>432 (열변을 토해내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사회인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수치심과, 무심코 몸짓을 크게 해서 겁을 주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것이 무색하게, 사장은 겁을 내거나 황당해하기는 커녕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반가움 뒤에 굉장한 야망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미친 놈 취급 받을 줄 알았는데.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해 눈만 끔벅이는데, 혼자서도 아니고 친구와 함께 공연을 보러 오고, SNS에도 홍보해주겠단다.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부터 새어나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제안이었을 텐데... (이어 사장이 다음주엔 커피차가 가능하고, 조각케이크는 어렵지머 큐브케이크는 가능하다고 일러주자, 성규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곧장 끄덕였다.) 네,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아, 마침 리허설이 다음주 목요일에 있는데, 그날까지 부탁드려도 될지요? 비용은 계산 후 이 번호로 연락주시면 곧바로 입금드리겠습니다. (성규는 지갑을 꺼내 제 명함을 사장에게 건넸다. 흰 바탕에 성규의 사진과 소속사, 연락처, SNS 계정만이 적혀있는 단순한 구성이었다. ) 제 팬 분들께 돌릴 커피차와 케이크에 대해서는 리허설 이후에 자세한 일정을 논의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 동안에도 약속대로 제 가족, 친구, 동료들, 가급적 연락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Choi Choco를 알리고 추천하겠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기회도 찾아오는구나. 가까스로 합격했더니 손익분기점을 못 넘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캄캄했던 눈 앞이 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손을 잡자고 제안해놓고 통성명을 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아, 그러고보니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한성규라고 합니다. 직업은 아시다시피 뮤지컬 배우고, 나이는 25살입니다.
/뮤지컬 가상캐스팅으로 원하는 배우를 넣어봤더니 캐스팅비로만 파산각이길래(A는 나현우 배우님을 토대로 살을 붙였고, B는 그냥 신영숙 배우님이 모티브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걸 반영해봤어 ㅋㅋㅋ 성규랑 최사장님이 엮이기 위해서 많이 고민해줬구나, 고마워! 아, 전 스레 사정 하니 말인데, 다음 상황에 리허설 커피차 이후 시점으로 다음 커피차 일정 의논하느라고 만나서 술 한잔 하다가, 서로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어쩌다 털어놓게 되면 어떨까? 지금 성규에게 최사장님은 은인이니까 최사장님이 만약에 방송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줄 것 같아서말야ㅋㅋㅋ(어떤 부분은 억울하다고 막 토로할지도?ㅋㅋㅋ)
>>433 (짐짓 큰소리쳤지만 내심 걱정이었다. 친구도 회전문관객까지는 아니라 뮤지컬 흥행에 엄청 보탬이 되지는 않을것이다. SNS 역시 카페계정이나 개인계정이나 팔로워가 대단히 많지도않다. 반면에 커피차는 가게를 하루 비워야한다는 부담이있지만 반대로 일정금액 이상의 매상은 확보된다. 어딜보나 이쪽이 남는장사라 손님의 정중한 감사인사가 민망했다. 그때 나름의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안 그래도 가게의 벽면이 좀 휑한감이 있어서 그림이라도 걸어둘까 했는데 기왕 거는거 저손님의 뮤지컬공연장면을 그려다가 걸어둬볼까? 음악은 뮤지컬넘버로 틀어두고? 이 손님의 뮤지컬공연이 끝나면 다른뮤지컬의 그림이랑 넘버로 바꿔가면서 아예 뮤지컬컨셉의 카페로 꾸미면 힙하겠는데~ 상상만으로도 매상이 오른것만 같아 여성은 싱글벙글 명함을 받았다.) 네네 견적내는대로 이 번호로 연락드릴게요~ 그뒤에 돌리실 커피차도 맡겨주세요! 그리고 저희카페 추천해주신다니 부탁드리고 싶은게요... (여성은 마른침을 넘기고는 아직 휑한 벽면을 가리켰다.) 손님네 리허설에 커피차 제공했을때 현장사진을 좀 촬영해서 여기 전시해도 괜찮을까요? 그리고 제가 미술을 좀 배웠어서 여기에 그림을 좀 그려둘 생각인데요 기왕 이렇게된거 손님의 뮤지컬을 조금이라도 더 홍보할겸 저희카페의 컨셉도 확실히할겸 손님의 뮤지컬 주요장면을 그려도 괜찮을까요? (뮤지컬넘버를 카페에 틀겠다는 얘기까지는 하지않았다. 그건 음원을 사서 하면 되니까. 나~중에 잘되면 이 손님을 비롯한 배우들에게 실제공연과 다른느낌으로 녹음해달라고 부탁드릴수도 있으려나? 김칫국부터 질펀하게 마시며 여성도 자기소개를 했다.) 한배우님이시군요 저는 최이현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신장개업한 카페점주고 한배우님과 동갑이에요 앞으로 잘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 일댈 해보자고 제안했으면 이정도는 신경쓰는게 당연하지! 오히려 헛다리짚고 전스레에 매달린게 좀 민망한데ㅋㅋ 어쨌든 덕분에 뮤지컬카페라는 컨셉을 잡을수도 있었어서 나야말로 성규주에게 고맙게생각해~ 리허설커피차 잘끝내고 술한잔 하는것도 좋다! 다음상황까지 매끄럽게 진행되겠는데~ 그나저나 한가락씩 하는 배우들이긴하네... 그래도 그 두명으로 파산각이라니 아직은 영세한 제작사인걸까? 그래서 성규가 영업에 The 진심이고? 그러고보니 주인공배우이자 제작총괄이라는 유이지는 모티브가 누구야?
>>434 (사장의 부탁에, 성규는 의외라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대답했다.) 아이고, 그래주시면야 저희야 무척 감사합니다만, 그 정도까지 해주시면 카페 홍보나 커피차 정도로는 송구스러울 것 같습니다. 현장사진이야 제작사 측에서도 오케이해주실 것 같고, 그림을 그려주시는 대신, 약소하지만 사장님은 물론이고 친구분의 좌석까지 마련해드리고, 또 원작 단행본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해도 괜찮을는지요? (마음같아서는 회사와 정식 콜라보레이션을 주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커피차라는 중대한 스케쥴을 만들어놓은 시점에서 서두르다간 사장이나 회사측이나 탈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넣어두었다. 그림이든 현장사진이든 손익분기점 때문에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니, 아마 승낙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러던 성규는, 카페 점주, 최이현이 자신과 동갑이라고 밝히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20대 중반에 창업하셨다니, 대단하신데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님.
/아이고, 고맙긴 ㅋㅋㅋ 찾아보니까 진짜로 연예기획사에서 운영하는 뮤지컬 카페가 있더라! 물론 Choi Choco는 뮤지컬 제작사나 성규네 소속사 소속이 아니지만 잘 협업하면서 서로 윈윈하면 좋겠는걸 ㅋㅋㅋ 그리고 최사장님이 아이디어 뱅크니까 제법 순조로울 것 같고! 그리고 전 스레에서의 일도 모처럼 아이디어 꺼내준 만큼 다음 상황에서 잘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걸 ㅋㅋㅋ 올려서 히트친 작품이 드문 데다, 이번 이씨의 난이 사극이다보니 의상이나 소품 비용도 비쌌을 거고, 서브주인공이 설정상 후천적 시각장애인인데 액션도 소화해야 해서 그거 무마하는 거랑, 전쟁 연출 씬 때문에 예산이 팍팍 나가는데, 그걸 메우려면 아이돌 티켓파워라도 끌어와야 모면이 될까 말까 하는 상황에, 제작총괄인 유이지가 이 극만큼은 절대로 아이돌 캐스팅 안된다고 우겨서 흥했는데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네 마네 하는 상황ㅋㅋㅋ 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 성규의 경우에는 방송 때 일 때문에 떨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붙은 거라서 이거 망하면 나도 망한다 모드라 창한대군 모드가 나온 거구 ㅋㅋㅋ 아, 유이지는 내 자캐야 ㅋㅋㅋ 자캐 주변인물 만들기 귀찮을 때, 딱 맞는 직업이나 조건을 가진 자캐가 있으면 갔다 쓰느 편이거든 ㅋㅋㅋ 실존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부분은.... 자기가 제작한 뮤지컬의 주연을 맡았다는 부분에서 해밀턴의 극본, 작사, 작곡을 맡고 타이틀 롤 초연 배우였던 린 마누엘 미란다를 벤치마킹했어! 아, 참. 이번 장면은 이걸 막레로 마무리하고, 다음장면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436 이현주도 수고 많았어! 응, 괜찮으면 새 스레 제목이나 0레스 내용 정도만 정해서 스레 파도 좋을 것 같아. 시트는 없어도 잘 맞는 캐하곤 오래 가는 편이라 이현주 편한 대로 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게, 아마 뮤지컬 배우들도 종종 오는 곳이고 굿즈도 판다니 아마 뮤덕이면 관심있어할만한 장소일 지도 ㅋㅋㅋ 지금도 영업은 하더라!
오, 캐릭터나 연예인 생일카페같은 느낌이려나? 재밌겠는걸! 난 막 상투튼 머리모양 커피얼음 넣은 역적의 수급 가배차(커피)같은 걸 상상했는데 그건 너무 호러인 것 같기도 하고 ㅋㅋㅋ 메뉴에 뮤지컬 넘버 제목을 붙인다거나 하면 어때? 이 씨의 난에 드물긴 하지만 훈훈하고 다정한 장면이 없지는 않은데, 그런 건 아인슈페너나 콘판나로 하고, 유독 피카레스크적인 장면은 에쏘랑 다크초코로 가는 거지!(물론 뮤지컬 넘버 제목은 내가 지어야겠지만 나올 때 되면 어떻게든 만들지 뭐 ㅋㅋㅋ)
아, 그러고보니 이현이가 뮤지컬을 볼테니 내쪽에서 장면을 어느정도 제시해야겠구나. 오너 대 오너로 말해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일상에서? 무대 장면을 넣는 게 좋을까?
그리고 이지는 이현주 말대로 직장상사 겸 동료배우라고 보면 돼! 성규 입장에서는 은인 중 하나고, 이지도 고민하다 기용했더니 쓸만한 신인이고 합도 나쁘지 않아서 우호적인... 허물이 덜한 직장 상사 정도? 아, 그러고보니... 이지랑 성규가 사는 대한민국은 비이성혼인(구성원들의 젠더에 관계없는 결혼. 동성혼 포함!)도 법제화된 가상의 대한민국이라는 설정인데, 그 부분은 괜찮을까? 이지가 부인이 있어서 성규의 배우적인 부분을 다루면 그 부분이 언급이 안 되진 않을 것 같아서 미리 물어봐.
그리고 아이돌 캐스팅이 없었는데도 왜 간당간당하냐면, 보통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더블, 아니면 트리플 캐스팅이잖아. 그리고 티켓파워가 있는 아이돌들은 이름있는 뮤지컬이 아니고서야 고만고만한 배역보다는 주인공이어야지 계약이 가능할 거라고 봤거든(아닐 수도 있는데 내 궁예로는 그렇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갔어 ㅋㅋㅋ) 그런데 이제 메인 주인공은 기본 기량이 배우급은 되어야 한다는 게 이지 주장이라서, 다른 이사진들이 눈 딱 감고 아이돌 넣자고 하는데도 밀어부쳐서, 출연진 전원 오디션으로 뽑은 신인이랑, 아이돌과 또이또이하거나 비싼 몸값의 중견배우로만 구성해버렸어 ㅋㅋㅋ(좀 황소고집이야 이지가ㅋㅋㅋ) 그래서 비슷한 비용을 들였을 때에 비해서 티켓이 덜 팔린거지! (소재(창작극, 로맨스 없음 등)가 마이너하거나, 캐스팅 외 제작비로 많이 띵까먹었다거나...그런 부차적인 이유도 컸겠지만 ㅋㅋㅋ)
>>437 안녕~ 성규주! 의욕적으로 써준 내용 잘봤어! 뮤지컬카페 알아봐준거며 뮤지컬넘버도 만들어주려고 한거며 고맙고 성규랑 친해지고도 싶었어서 고민했는데 미안... 성규주의 설정을 내가 다 소화하기는 힘들거같아
성규의 직장상사나 동료배우가 NPC로 등장하는건 그럴수있다고 생각해~ 나도 이현이엄마가 언젠가는 등장하리라고 예상했고 그런데 직장상사의 가족까지 나올줄은 몰랐어 법이나 제도까지 설정했을줄도 몰랐고.... 설정을 그만큼이나 정교하게 짠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라면 못그랬을거야! 다만 이미 너무 세세하게 정해져있는게 많아서 이대로면 성규와 이현이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게 아니라 성규를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에 이현이가 들러리가 될거같다는 우려가 드는것도 사실이야
성규주가 잘못되었다는건 절대로 아니야 하고싶은건 해야지!! 하지만 성규주가 바라는걸 내가 해낼수는 없을거 같아 정말로 미안 하지만 성규는 체격도 좋고 목소리는 동굴저음이고 아이에게는 서툴지만 다정한 팔색조매력의 친구니까 분명 나보다 훨씬 좋은참치 만날거라 생각해! 그때 야광봉 열심히 흔들게~
>>438 그랬구나, 첫 장면에서도 그랬다시피 엔피씨를 장면설정을 활용하는 게 내 스타일이고, 이름이 있는 엔피씨고, 그개 자캐더라도 이 서사에서 성규나 이현이 외의 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우려가 들었다니 유감이야. 이현주 말대로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맞는 것 같네. 그동안 어울려주고 끝내기 전에 언질해줘서 고마워. 이현주도 즐상판하길 바래:)
>>441 생존자는커녕 자그마한 셸터를 유지할 배터리 하나조차 발견하지 못한 기구한 날이었다. 영 감이 안 좋더라니. 셸터를 나설 때부터 한기가 새 들어오던 허름한 구형 방한복이 결국 말썽이다. 희고 흰 세상에선 유난히 붉은 목도리를 둘러멘 아이가 재깔이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커 보이는 별과 함께 검고 싸늘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참 극성이다. 말로만 대장이지, 나는 이 녀석을 보살필 이유도 능력도 없는, 그저 그런 아저씨일 뿐인데.
"그래. 이만 돌아가자."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두꺼운 장갑을 낀 손으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아무리 어둡대도, 돌아가는 방향은 이 아이가 잘 아니까. 언제나처럼 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겠구나.
... 태연히 돌아서던 한쪽 다리가 먹먹하다. 감각이 없는 다리를 절뚝이는 것보다, 당장 셸터에 있는 식량과 식수가 모두 부족한 것이 신경 쓰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연결 됐구나! 다행이다. 있잖아. 나 지금부터 너희 집 갈 건데 너도 올래? (목소리에 겹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들어간다.) 참고로 미친 것도 아니고 죽고 싶은 것도 아니야. 그냥 혼자 있는 것도 질리고 너한테 주고 싶은 것도 있고. 도착할 때까지 뭔지 안 알려줄 거니까... 에이씨. 이거 왜 안 돼. (빵빵해진 가방의 지퍼가 반쯤 나아가다 멈춘다. 온 힘을 다해도 미동조차 없다. 하지만 전부 중요한 것들이라 포기할 순 없다. 한참을 낑낑거린 끝에 겨우 지퍼를 잠근다.) 아, 미안. 너한테 그런 거 아니야. 아무튼 궁금하면 무사히 도착하길 빌어봐. 사실 이렇게 되고 나서 나가는 건 나도 처음이긴 한데... (고민을 하는 듯 흐음~ 하는 소리가 몇 초간 이어진다.) 그래봐야 걸어 다니는 시체잖아? 그것도 다 썩어가는.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어~
ㅡ
좀비 아포칼립스. 전화를 받은 이가 친구거나 연인이거나 가족이거나. 기다리거나 중간에서 만나거나 심지어 내가 먼저 찾아왔는데? 라는 상황도 상관없다. 편하게 이어줘!
>>445 왔냐? 가방은 뭔데 그렇게 빵빵해. (가방에 던지는 시선은 1초. 상대방 전신에 신경을 기울인다.) 걔네가 그래도 단순히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무시당할 건 아닌데, 어디 물린 건 아니지? (옷에 가려지지 않은 상대방 신체를 구석구석 살폈다. 장난인지 진짜 물어보는 건지 모호한 어조.) 에휴. 뭘 그렇게 전해주고 싶길래. (가방 내려두라는 손짓.)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다. 영상으로 남겨놓기라도 하지. 나중에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일… (다시 상대방 눈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은데 말이야. 너 맨정신 맞아? 아무리 나한테 줄 게 있어도 그렇지 그 길을 뚫고 온다고? 큰 가방 맨 좀비가 어슬렁거리면 너인 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기운만 가득하던 까만 눈에서 오랜만에 빛이 났다. 상대방 얼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은 죽 미끄러져 손에서 멈췄다.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 대담하게 상대방 손을 잡았다. 망설임이 없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호기심을 해치우는 것처럼 잡은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손가락으로 찔러봤다. 콕. 콕콕!
“너 되게 재밌다. 나랑 더 놀자.”
혀가 문드러질 때까지 단것만 먹었다. 시간이 없든 남아나든 재미만 찾아서 긁어모았다. 타인들이 곧잘 경멸하는 쓰레기 같은 성격의 인간. 그런 인간에게는 독서나 명상이나 수업 같은 게 쥐약이었다. 선생의 설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교무실 나오면서 우연히 발견한 상대방은 그야말로, 크으, 끝내주는 구원!
“바쁜 것도 없잖아. 이대로 얘기나 할래? 이름이 뭐야? 뭐 좋아해? 나 잘생기지 않았어? 요건 농담이야…… 하하. 산책이나 할까? 아. 그냥 학교 나갈래?“
어이, 단장님!(불량한 태도로 삐딱하게 다리를 뻗어 당신이 가는 길목을 막는다.) 기억합니까? 우리 자랑스러운 헌장, 6조. 기억하시겠지,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단장인 당신이 기억 못할 리가 없잖습니까?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한 번, 읊어볼까요? (눈을 감고, 시를 암송하듯이 중얼거린다.)제 6조, 코덱스의 검을 받은 자가 검을 쥐고 떠나는 것을 불허한다. 그리고 4조 2항, 코덱스에 있어서 검이란...... (패용한 검을 허리춤에서 뽑으며)모든 가르침, 검을 쥘 수 있는 힘, 그 자체. (당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건방지게 칼끝을 까딱거린다.)떠나시더라도, 팔은 주고 가셔야지요. 단장님.
>>448 (구부러짐 없는 허리,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세로 앞을 향해 걷다가 당신에 의해 멈춘다. 대꾸 없이 말을 들으며 바라보는 무표정한 얼굴은 불쾌감 없이 그저 덤덤하다.) 뺀질거리기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군. (감정 없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순수한 감탄과 약간의 칭찬이 묻어있다.) 이젠 정말 의심할 여지없는 훌륭한 기사가 된 것 같아 무척 기쁘네. 그러나 제1조가 무엇인지 잊은 것을 보니, 아직 배움이 부족한 것 같군.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과 겨누어진 칼끝을 거쳐 비어있는 자신의 허리춤을 본다. 그리고 뜻 모를 의미로 눈썹을 쓱 올리더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다.) 제1조. 무엇이 막아서든 결코 뜻을 꺾지 말라. (맨손으로 상대하려는 듯 가볍게 자세를 잡는다. 먼저 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까딱인다.)
>>449 (무기 없이 자세를 취하는 당신을 보자,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 하다.)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화가 날 정도로. 단장님께서 가르친 내용 중 비무장한 상대에게 칼을 들이대는 무자비함은 없었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비무장이라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런 나라도 헌장의 길을 따르는 기사입니다. (비로소 바른 자세로 서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본적인 경계 자세를 취한다.)맨손으로, 이 나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검을 쓰지 않고 이긴다면, 그것으로 검을 코덱스에 돌려주었다고 할 셈입니까? (검을 쥔 손이 살짝 떨린다. 동요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전투 태세인지.)돌아가시죠. 나라고 해서, 그 팔을 정말로 거둬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450 (자신감이라는 말을 듣자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렇게 보였나? 나도 나름 긴장하고 있네. 검을 든 기사를 눈 앞에 두었으니 말이야. (거짓은 아닌지 당신이 경계 자세를 취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함께 자세를 가다듬는다.) 글쎄. 잘 모르겠군. 그저 이긴다면... (당신이 쥔 검과 당신의 손을 가만히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가 한동안 머물다가 느리게 돌아와 다시 당신의 눈을 향한다.) 뜻이 더 강했다는 것 뿐이겠지. (돌아가라는 말에 진지하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귀여운 신입을 비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 된다. 흥미로운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썹을 쓱 올린다.) 내 생각을 해주어 고맙지만... 때로는 원치 않아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건 그대인 것 같군. 내 팔을 거둬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대련 상대에게 가르침을 주듯 말하더니 먼저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움직이려 한다.)
>>451 (움직임에 반응한 것인지, 갑자기 뒤로 크게 물러선다. 검을 들고서 적수공권의 상대에게 하는 태세 치고는 방어적이다.)...그 뜻이 나쁘다는 겁니다. 코덱스를 등지면서, 코덱스를 위한 헌장을 들먹이면 어쩌자는 겁니까. 역시, 역부족입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상황을 무사히 지나갈 수는 없어. 평생 검의 길을 걸었음은 당신이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정말 검을 버리고 나를 넘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나를 때려눕히면, 검을, 우리를 등지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입니까? (당신과의 거리가 다시 줄어들기 전에, 험악하게 허공에 대고 검을 크게 휘두른다. 살벌한 파공음이 울린다.)뜻을 위해서?
>>452 (당신이 뒤로 물러서자 공격하려 하지 않고 멈춘다.) 누구 덕에 입에 달고 살았더니 버릇이 되어버려서 말이네. 이젠 코덱스의 일원이 아니니 이 버릇도 고쳐야겠군. (미동 없이 당신의 말을 경청한다. 등지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냐는 질문을 듣자 잠시 멈칫하지만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당신을 본다.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목소리가 딱딱하다.) 만족하네. 오래 슬퍼하는 것보다 잠시 마음 아파하는 것이 더 나을 테니.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후회도 하지 않네.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다시 당신에게 다가가려 한다. 사이에 짧게 이어지는 공격 역시 그저 위협에 가까울 정도로 이전보다 가볍다.) 그러는 그대는 검과 그대들을 등지려 하는 자를 왜 붙잡으려 하는 것이지?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고? 설마 이제와 무기를 들지 않은 이는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닐 거라 믿네.
>>453 ...좋습니다. 다 좋다 이겁니다.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그게 우리네 방식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베고 싶으면 베고.(망연히 손 안의 칼을 쳐다본다.) 하려는 건 다 해야지요. 검으로써. (다가오며 보다 약하게 공격해오는 당신을 거칠게 견제한다. 칼날의 옆면으로 팔뚝을 꽤 강하게 후려친다.)그러니까 당신은 자격이 없는 겁니다. 관철하기 위해서는 칼날이 필요하니까요. 부정하려고 해도 당신은 아직, 기사입니다. 코덱스에 있고, 여전히 글러먹은 후배를 대면하고 있단 말입니다. (조용히 당신을 마주하고, 노려본다.)여기를 떠나서 무얼 하려 하든, 결국 검은 당신을 부를 터입니다. 필요에 의해 다시 검을 잡을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 아냐고요? 당신은 나와 다르지 않아, 내가 당신에게 배웠으니까. 베지 않으면 바뀌는 건 없습니다. 이 상황도, 앞으로의 일들도. 왜 붙잡으려 하냐고?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검을 잡은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 나는 이제껏 여기 남아 있었던 것이니까요. (순간 검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로 팔을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살벌한 예기가, 스쳐지난다.)무엇이든 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한 법이니까......
>>454 (공격을 받는 순간 통증을 느낀 듯 눈썹이 짧게 찌푸려지더니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당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더니 끝내 눈을 내리 감았다가 뜬다.) 앞서 했던 훌륭한 기사라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 같으니 말이네. (잠깐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연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네. 그대를 넘기 전까지 나는 아직 기사이며 그대는 내 후배이지. 이곳을 떠나도 분명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검을 잡게 되겠고, 또한 지금처럼 누군가의 뜻을 꺾으려 할 것이며, 다시금 무언가를 버리려 할 것이네. 허나 그때는 모든 것이 기사로서는 아닐 것이네. 검은 기사만이 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빠르게 몸을 물리지만 날카로운 예기가 지나간 자리에 실금 같은 상처가 생기며 옅게 피가 새어 나온다.) 목표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목표가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생길 것이네. (한동안 검의 궤적에 머물던 시선이 자신의 상처로 향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당신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는다.) ...꼭 하나의 길만이 옳은 길은 아니야.
>>455 하나의 길만이 옳은 길은 아니다......라, 뜻을 꺾지 말라는 말을 하던 사람의 말치고는, 볼품없을 따름입니다.(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사납게 휘둘러 주변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던 검을 거둬들인다.) 당신 말대로, 분명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기에 가장 위험하지 않겠습니까?(검을 수직으로 세워들고,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초월하기 위해 다 자란 이들은 할 수 없는 극단까지 치닫습니다. 지금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만은 인정하십시오. 분명,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헌장은 떠난 당신이 검을 든 것만으로도 배반이라고 하겠지만,(회의적인 투로 고개를 저어보인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기사의 배움 바깥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현재의 맥락에서 당신은 여전히... 내 목표입니다. (비로소 안정적인 호흡으로 서서히 검을 내려 정확히 당신을 겨눈다. 다시는 빗나가지 않을 것처럼, 한 치윽 오차 없이 정중선을 겨냥하고 있다.)그것을 끝내시려거든, 단장님, 마지막입니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내가 당신의 팔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도 내 목을 가져간다는 마음으로 승부를 받으십시오.(자세를 고쳐잡는다, 공격적으로.) 검으로, 기사로서, 이 자리를 지나가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이후로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길을 걷던, 결단코 그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이건 결투입니다, 단장님.
>>456 그래. 부족한 자의 형편없는 말이지. (당신에게 모순을 지적받자 부정하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말 끝에 뱉어지는 작은 숨이 탄식 같다.) ...과거 동료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하더군. 나 역시 기사가 아닌 삶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 앞으로의 일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니 그대처럼 더욱 이 순간에 집중해야겠지. 그리고. (눈빛에 짧은 온기가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보며 매우 기뻐한다고 하던데, 나 역시 기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게. 지금껏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니 내게 그 결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대의 각오를, 그 뜻을 내게 증명해내게. (줄곧 일자로 굳어있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그대의 목표를 넘어보도록.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사냥감에 집중하는 맹수처럼 짙고 고요해진다. 처음으로 조금의 여유도, 방심도, 직전의 미소도 없이 날 선 모습으로 검을 마주하고 자세를 잡는다.) 기사로서 검과 명예를 걸고 코덱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그대와의 결투에 조금의 거짓 없이 충실하며,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 나는 어느 방향이든 즐거우니까 공격 성공이나 캐릭터 부상 여부는 캐조종 걱정하지 말고 참치가 원하는 쪽으로 편하게 묘사해줘! :)
>>457 (입술을 꽉 깨물고, 갈망하는 눈으로 당신의 검을 마주한다. 비로소 읍을 하며, 묵은 진실한 감정을 한 마디 말로 토해낸다.)...감사합니다. 모든 부모는 끝내 자식의 등을 보게 되겠지요. 나는 아직 부모가 아니기에, 모르겠습니다. 단장님은, 보이십니까? 제 다음 수가.(당신의 그림자를 보듯이, 옛날의 자기 자신을 보듯이, 당신에게 너무나 익숙할 준비자세를 드러낸다.) 기사로서 검과 명예를 걸고, 코덱스, 그리고 나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 결투에 전신전령으로, 코덱스에게 검을 받은 이래 당신께 받은 모든 것을 주리라고,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익숙한 방식으로 매듭짓겠군요. 언제나처럼의, 그 한 수로. (비로소 자세를 순간 낮추고, 땅을 가볍게 박차며 칼을 횡으로 끌어당겨, 당신에게 배웠던 그 일격으로 쇄도한다. 목표는 좌견, 미묘하게 엇박을 노리는 교묘한 박자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얻어낸 검의 길이다.)
>>460 다음 수라... (당신을 마주하며 감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길게 숨을 내쉰다.) 그대에게 충실하겠다 맹세했으니 솔직히 답하지. 보이네. 그러나 그대가 아닌 내 모습이 보이네. 내가 취할 자세와, 내가 선택할 다음 행동이. (그리고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모든 걸음보다 한 발 더 앞서나갈 당신의 모습이 보였으나 말로 전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의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함께 잔잔히 미소 짓는다.) 그리 되겠지. 언제나 그렇듯 오늘 역시 잊을 수 없게 되겠군. (마치 허공에 자리한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생경한 기분이 든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감각이 이런 것인가 이해하려 해본다. 순간 당신의 검과 자신의 검이 온전히 겹쳐 보이는 것 같은 환상을 본다.) 그대를 가르칠 수 있어 영광이었네. (조금도 어긋남 없이 당신의 움직임에 반응해 곧바로 발을 뗀다. 미동 없던 검이 당신의 가슴께를 향해 날을 세워 파고든다. 살짝 기울어져 미묘한 대각선을 유지하는 검의 궤적,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어지는 방향, 어쩌면 영영 지워지지 않을 흉이 남을지도 모르는 날 선 깊이. 바람이 스치듯, 그러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듯 당신을 지나치며 쓸어간다.)
>>461 (두 사람의 착지의 순간, 그러나 한쪽만이 허물어지듯이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셨습니다.(마지막 순간, 자신이 죽더라도 맞찔러야 했다. 그래서 상대의 팔만이라도 빼앗는 것, 이게 이 검식의 완성,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해서, 최후에 방어를 택해 정중선을 지켰기에, 살아남았다. 두 동강난 자신의 검은 그 미완성된 검식의 불명예스러운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은 상대가 손속에 자비를 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공격 중 패배를 예감하고 방향을 돌린 어중간한 방어로 막을 수 없는 절명수였을 터, 그런데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저 상대가 검을 늦춰 준 덕분이겠지.) 후, 흐윽...(선혈이 흘러내리는 흉부를 꼭 부여잡고 토혈한다.)이거 좋군요. 찰나로 결정되는, 흉통에 몸이 트이는 감각, 어째서일까요. 이래서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요, 검도, 당신도. (조용히 토막난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여전히 당신에게 허물어진 등을 보여준 채로, 묻는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붙들고 늘어져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지도 않았잖습니까, 단장님, 떠나...시는, 이유.
>>462 배신자의 비겁한 도망이라 생각하게. (자세를 고치며 검을 가볍게 털어낸 다음 갈무리한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잠시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강하게 주먹을 한 번 쥔다. 아주 찰나였지만 순간 느껴지던 섬뜩한 감각은 분명 팔을 잃을 것이라는 확신임이 분명하다. 맹세를 어기면서까지 검을 늦춘 이유라면... 그대의 검이 더 오래, 이곳을 넘어 더 멀리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에.) 돌아가면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네. (손에서 힘을 풀고 당신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다 멈춰 선다. 마지막 긍지마저 버린 자가 과연 당신을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뒷모습이라도 담고 싶은 듯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당신의 등을 바라본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겠네. (슬픔인지 한숨인지 모를 무거운 웃음기가 목소리에 섞인다. 나와 닮았으나 정 반대인 것도 같은 당신의 그 말과 태도. 앞으로 당신이 걸어갈 그 길, 당신의 검이 지켜낼 것들이. 싫어할 수가 없다. 아니, 이미 너무 마음에 들어버렸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더군. 인간도, 검도, 헌장도. 그 불완전함을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이 나였으면 했을 뿐이네.
>>464 하, 여전히 잘 모르겠네요. 여문 사람의 판단이리는 겁니까?(바들거리는 팔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선다.) 저라면, 그런 이유로 코덱스를 등지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다시, 뒤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뒷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쓸쓸히 중얼거린다.)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패용한 검을 검집째로 풀어 들고, 씁쓸한 눈으로 내려본다.)단장님은, 관철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헌장이 말하는 바, 1조 그대로, 뜻을 꺾지 아니했고, 내 뜻은 꺾였습니다.(검을 옆으로 가볍게 던진다. 토막난 검이 다시 검집에서 흘러나와 바닥에 널부러진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기사인 내가 더 이상 당신을 막을 명분은 없습니다. 코덱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를 부렸던 것도 나지만, 나 이상으로 철없이 굴 수 있는 사람도 우리들 중에는 더 남아있지 않군요. (쓸쓸히, 당신을 두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코덱스의 건물 쪽을 향해.)앞으로는, 나 자신의 방식대로 해 나가겠습니다. 나름의 길을 쫓겠습니다.(마지막에서야 겨우 힘이 들어간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걸음 걸음마다, 흘러내린 피가 그를 따라 바닥에 선을 긋는다.) 즐거웠습니다. 단장님.
>>465 여문 사람보다는 미련한 자의 판단이라고 봐야 옳겠지. 그런 점은 닮지 않은 듯 하여 다행이군.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진심이 담긴 탓인지 끝맺는 말이 무겁다. 당신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끝까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미안함을 속으로 삼킨다. 묵묵히 당신이 하는 말을 들으며 조각난 채 바닥에 흩어진 검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더니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정리한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바닥에 기사의 검을 내려 놓으며 당신의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몸을 바로 세우며 다시금 곧은 자세로 선 다음, 코덱스의 건물과 당신의 등을 향해 기사의 예를 취한다. 나아가는 당신을 향한 축복과 응원, 감사와 속죄를 모두 한마디 말에 담는다.) 그대를 믿네. (작게 미소 짓는다.) —경. (등을 돌리면 자신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님을 알기에 발걸음을 돌리기 직전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단장이자 기사로서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헌장의 마지막 조항을 잊지 말게.
/ 이렇게 막레가 되려나? 같이 돌릴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어! 단장님의 말을 빌리자면 후배님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나는 돌리면서 즐거웠는데 참치도 돌리면서 즐거웠었으면 좋겠네 :) 이후로 후배님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진다! 단장님과 나랑 돌리느라 수고 많았어 참치! :)
>>466 /재밌었어, 단장님도 레더도 수고 많았어. 중간에 시험때문에 3일인가 말없이 잠수탔었는데 미안했어. 후배는, 처음에는 어쩌면 단장님처럼, 언젠가 때가 되면 마찬가지로 코덱스를 떠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의외로 마지막까지 기사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기 나름의 길인 거지. 단장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려나, 결국 떠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살아가려나, 물어봐도 되려나?
>>467 /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야! 참치도 수고 많았어 :) 안 그래도 3일 동안 참치가 많이 바쁜 것 같아서 나도 해야할 일들 처리하며 느긋하게 기다렸으니까 걱정 마!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미래라니 멋진 서사다... 특히 후배님의 기사라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의지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아. 내가 마음대로 썼던 내용이긴 하지만, 헌장의 제1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어쩌면 후배님인 것 같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기사'라는 뜻을 꺾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후배님의 검은 부러졌지만 가는 길은 꺾이지 않았고, 단장님의 검은 온전히 남았지만 길의 방향이 꺾인 것처럼 보여서 더 감동적인 것같아. 당연히 물어봐도 되지! 오히려 단장님을 궁금해해 줘서 고마운걸! 단장님이 떠난 뒤 후배님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거라면, 아마 첫번째는 기쁨일 것 같아. 단장님도 자신의 선택이 최선보다는 차악이었다고 생각하긴 할 것 같아서 기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후배님의 모습에 무척 기뻐할 것 같네. 그리고 두 번째는 >>461 레스에서 나온 것처럼 후배님을 가르칠 수 있었던 일이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는 점일 것 같고! 단장님이라면 후배님이 자신보다 더욱 훌륭한 기사가 될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잠시나마 자신이 후배님의 선배이자 스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 같아. 단장님이 살아가는 방향이라! 사실 세계관이나 떠난 이유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기는 해! 그래서 내가 혼자 생각하고 있던 이유로 보자면, 특정 사건을 코덱스가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정말로 움직여 버리면 코덱스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이 오게 될 상황이라 단장님이 기사직을 내려놓고 사건을 해결하러 떠났다.일 것 같아서, 사건을 해결한 다음 그 영향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노려지는 바람에 한동안 도망치고, 조용한 곳에 숨어 조용히 살아가는 일의 반복이지 않을까 생각했어. 중간중간 기사였을 시절처럼 남들도 돕고 하면서 말이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아마 용병처럼 살아가는 느낌이려나?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사건을 해결해 주는 방향으로! 성격도 지금이랑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렇게 용병처럼 생활하게 되면 나중에 후배님을 다시 만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려나? :)
그리고... 기쁘게 쓰고 보니 혼자 레스 길이가 너무 길어진 것 같네. 혹시 부담이 되었다면 미안해...
우편 왔습니다—! (옹달샘 자리잡은 파랑새 지저귀듯 맑은 알림. 울타리 너머로 들어서진 못하고 그 가에 세워진 우체통. 그것이 우편배달부인 나에게 그어진 금. 금을 밟지 않게 가방 가득 넣어온 우편을 차곡히 우체통 안에 밀어넣고, 몰래 따다온 꽃송이도 하나 얹어둔다. 늘 그래왔다. 이 집에 어떤 아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 이후, 일부러 이 집에 배달올 때만 혹시라도 저 목소리에 고개를 내밀까 기대하며 크게 목청 올린다. 아디선가 꺾어온 들꽃 한 송이를 같이 넣어둔다. 영 만나지 못했지만 얼굴 맞대지 않아도 마음은 가닿으리.)
>>469 (큼직한 저택 앞에 선 우체부의 외침이 울린 지 얼마 후, 문이 열리더니 지팡이를 짚은 10대 중반 남짓한 소녀가 나왔다. 마른 체구에 창백한 피부, 부스스한 긴 밀빛 머리카락까지. 큰 병을 앓다 일어난 듯 핼쓱한 인상을 한 그는, 위태로운 걸음으로 급히 우체통 앞으로 달음질 쳐 오더니, 우체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우체통에 기대어 두고는 급한 손놀림으로 우체통 안을 뒤적이다, 원하던 것을 발견했는지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들고는 급히 열어본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면 갈 수록 지친 기색이 완연하던 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더니, 이내 온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번진 채 편지를 가슴에 품는다. 그러다 우체부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민망했는지 창백하던 낯이 발갛게 물든 채 헛기침한다.) 실례했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세계를 위협하던 커다란 싸움이 마침내 끝이 났다. 세계를 위협하던 마의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을 따라 세계를 파멸로 이끌려던 이들 또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란 속에서 혼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던 이들은 완전히 해방되었고, 전 세계가 전란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였고, 여기저기에서 전란을 마친 이들을 영웅으로 부르며 칭송했다.
사내는 전란을 마친 파티에 속한 이였다. 평범하게 사냥을 하며 살아가던 18살인 사냥꾼이었으나, 전란의 불꽃이 제 마을을 덮쳤고, 눈앞에서 가족은 물론 친구, 이웃까지 모두 몰살당하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으며, 화살을 쏘며 마을과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으나 전혀 닿지 않았고 제 목숨마저 잃을 뻔 했었다.
허나, 그때 자신을 구해준 이들이 있었다. 여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와 그 사내를 따라서 함께 여행을 하고 있던 이들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며, 아직 죽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구출했다. 마을을 습격한 마의 세력은 전멸했으나, 이미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붉은 혈향이 그 땅에 번져 안타까운 비극을 알렸다.
사내는 그들에게 청해 여행에 동행했고, 마침내 마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서 가족과 친구, 이웃의 복수를 마칠수 있었다.
힘겨운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을, 제국의 황제는 크게 환영했으며 공을 치하하고, 많은 포상을 하사했으며 원하는 이에 한해서 황자와 황녀와의 혼인까지 추진했다. 그 혜택을 온전히 다 받은 이도 있었고,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사내는 고민 끝에 포상 대신, 잿더미가 되버린 자신의 마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황실의 지원을 부탁했다.
부귀영화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고향이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향을 다시 재건하고, 그곳에서 이전처럼 사냥을 하면서 소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내의 가장 큰 꿈인만큼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황가의 지원을 약속받은 그는 딱 하루, 제국의 수도에서 머무르며 동료들과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신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잿더미가 되었던 마을은 옛 모습을 되찾았고 마을을 재건한 사내는 예전에 살던 그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사냥을 하거나, 곤란한 일이 있으면 돕기도 하는 등. 사내의 삶은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와있었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을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었으며, 마을 중앙에 사내의 동상이 세워져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내는 그 동상을 제발 치워줬으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도 동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늘도 산에 들어가 위험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돌아온 사내는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가 자신의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눈이 좋긴 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기에 그게 누군지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며시 갸웃하던 사내는 그게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서성이고 있는 이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 누구신가요? 제 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말 그대로 세계를 구한 용사 일행이 있었고 사내는 그 용사 파티에 있었던 이야. 모든 전투를 끝내고 세계를 구한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와 2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마을을 재건하고 이전에 살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집 앞에 찾아왔다는 내용이야! 전 동료여도 상관없고, 황가에서 찾아온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맥커터나 뜬금없이 꼽주는 그런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471 용사의 집 앞을 서성거리던 이는, 낮게 묶어 길게 늘어뜨린 긴 흑발과 어두운 피부, 석류석처럼 짙은 심홍색 눈동자와 선해보이는 이목구비를 지닌 청년으로, 용사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약사 게리였다. 남의 집 앞에 서서 뭐 하는 꼴이람, 이 좋은 휴일에. 그는 제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허나, 어쩌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마의 세력을 몰아낸 용사 중 하나이자, 전란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재건한 영웅이 마을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의 피해자 아닌 피해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원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중인데다, 피해자의 바로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상황전달을 맡게 되었으니. 체념하고 도로 어깨를 펴려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의 주인이자, 마을의 유명인사. 그였다. 게리는 곧바로 돌아서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들며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용사님 댁 근처에 사는 게리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새벽 즈음에 용사님의 동상의 머리가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붙잡았습니다만... 범인이 자신은 용사님께서 바라신 대로 해드린 것 뿐이니, 용사님께서 내리시는 처분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요. 그래서 촌장님께 용사님을 모셔오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만, 동행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새벽시간이라면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더라. 사내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히 오늘 사냥을 위해서 숲에 있는 오두막으로 이동해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있었던가. 그러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 후에, 조금 더 준비를 하다가 바로 또 사냥을 갔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마을에선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자신의 동상이 참수되는 사건이 있었다니. 와. 그 동상의 목을 치는 이가 정말로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제 동상의 머리가 참수되었다는거죠? 딱히 누구의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세운 것을 마음대로 말이에요."
솔직히 사내에게 있어서 그 동상은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물건이었다. 물론 용사로서 칭송받고 나름 유명해진 것은 좋긴 하지만,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라니.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상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보기 낯간지러워서 시선을 회피했던 것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힘겹게 지은 동상을 마음대로 참수하는 것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자신을 이유로 대서 버티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단 뭐가 되었건 가보는 것이 좋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범행...이겠죠? 일단? 그 범행 동기가 정말로 제가 그걸 원해서 했다는 것 뿐인가요? 2년 전에 끝난 전란을 일으킨 세력이라던가, 혹은 그 세력의 추종자라던가 그런 류일 가능성도 있나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처형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동상을 떠나서 그 세력의 일부가 아직 살아있고 꿈틀거리고 각지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단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 눈앞의 이가 그것을 알 수 있을지는 또 별개였지만.
>>473 "예, 용사님께서 몇번이고 철거를 희망하셨다는 그 물건 맞습니다. 마을에 있는 동상이랄 만한 것도 그것밖에 없었고요."
본인이 싫어하면 차라리 거대 동상 말고 미니 동상을 만들어서 팔아먹지. 아니, 애초에 동상일 필요가 있나? 공정과정에서 예산 잡아먹는데. 차라리 이 마을을 관광지라고 선전하면 그깟 동상 안 만들어도 관광객이 쇄도할텐데. 게다가 용사님께서 사냥꾼으로 전직하셨으니 용사님께서 납품하신 몬스터 부산물로 경매를 열어도 되고. 저 동상도 파손된 김에 역시 녹여서 미니 동상이 아니더라도 실용적으로 쓰면 안 되나? 아, 모르겠다. 대답해놓고는 그런 궁리에 빠져있던 중, 용사가 퍽 진지한 얼굴로 꺼낸 이야기에, 게리는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들을 한 순간 잊어버린 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과 그 추종자?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신 거지? 그 세력은 전원 사망해서 그림자도 안 비친 지 한참인데? 그러나 이내 황당함은 가시고 측은지심이 고개를 들었다. 범죄에 노출된 사람이나 전쟁을 치른 병사들은 열에 아홉 마음의 병을 얻어 매사에 민감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는데, 용사님이면 오죽할까. 우선은 안심시켜드리는 게 좋겠다.
"글쎄요, 범인은 마을에 사는 안나라는 열 네살 난 아이입니다. 용사님께서는 만나보신 적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제가 아는 그 아이는 용사님의 일대기를 각색한 동화책의 내용을 술술 외우고 다녔고, 최근에도 용사님께서 다니시는 사냥 코스를 성지순례하겠다고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산으로 들어가려 하는 통에... 제가 말리느라 애를 꽤나 먹었었습니다. 그 아이가 힘이 좋긴 해도 몬스터에게 포위당하기라도 하면 위험하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고작 동상이 아닌 용사님을 바로 노리지 않았을지요."
그렇게 차분히 제 의견을 밝힌 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나와 촌장님, 다른 어르신 분들은 마을 회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혹시 잠은 편히 주무시고 식사도 제 때 하시는지요? 용사님께서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면 돌아가서 재판을 내일로 미뤄주십사 청할 작정입니다." /다행이다! 그럼 용사님이 가겠다고 하거나 다음날로 넘겨주면 마을회관 씬으로 넘어갈게!
고작 열 네살밖에 안 된 아이가 동상의 목을 잘라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아이인 것인가. 자신만 해도 그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 열 여덟때의 일이었다. 자신은 열 네살때 뭘 하고 있었더라. 기억을 더듬더듬 뒤집어보지만, 적어도 싸움이나 힘을 써야만 하는 무언가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기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열 여섯이나 열 일곱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수고하셨어요. 산에 오른다고 해서 바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아무튼 혹시 모를 일이지요. 워낙 교활한 녀석들이고 그 뿌리가 엄청 깊었으니까요. 도발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녀석들을 완전히 쓸어버렸다고는 하나 혹시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가 살아남아 또 뭔가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전쟁이 끝난지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 작자들에게 가족과 친구, 이웃을 잃었을 때의 기억이 남은 그에게 있어서는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기간은 아니었다. 허나 적어도 지금 사안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컨디션은 괜찮아요. 바로 가볼게요. 그 작자들이 아니면 딱히 처벌을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왜 그랬는지 정도는 듣고 싶으니까요. 그 아이의 입으로 직접 말이에요."
정말로 그 정도의 일이라면 그냥 꾸중을 하는 것만으로 조용히 넘길 수도 있으나, 혹시 또 모를 일 아니겠는가. 자신은 불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는만큼, 역시 직접 만나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마을 회관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솔직히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ㅋㅋㅋㅋㅋ 정말로 맥커터나 진짜 뜬금없이 꼽주는 내용만 아니면 괜찮아! 이야기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오케이!
>>475 "예. 힘으로 부러뜨린 게 아니라 화염 마법으로 뜨겁게 달구어 녹인 뒤 절단했다는 모양입니다."
동상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걸 생각하면 체력도 지구력도 장난 아닌 것 같지만요... 라고 중얼거리며 게리는 볼을 긁적였다.
"아닙니다. 어른으로서 아이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을 막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안나가 반란 세력의 잔당의 사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아이가 어리긴 어려도 열 네살인데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안나가 대단히 서운해하겠는데. 안나의 동심을 지켜주긴 어렵겠군. 모델인 본인도 썩 달가워 않던 동상 하나 때문에 여러모로 말썽이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다, 용사가 마을 회관으로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자, 한시름 놓은 듯 손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용사님을 모시고 오기 전까지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으니 안나도 진술이 가능할 정도로는 진정됐을 겁니다."
게리는 한발 앞서 마을 회관으로 용사를 안내했다. 작고 아담한 집들을 지나, 마을 광장을 가로지르려니, 어쩔 수 없이 사건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위풍당당하게 선 목 없는 용사. 바닥에 처량히 나뒹구는 위엄있는 표정의 머리. 희생된 건 마을 주민 몇을 제외하고는 모델을 포함하여 아무도 반기지 않던 동상 하나뿐이었음에도 큰 사단이 벌어진 것에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게리는 차라리 시선을 돌리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회관으로 들어서자, 작은 원탁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일부 모여있었다. 왼 편에는 촌장을 비롯한 (동상 건설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일부는 애써 분을 삭이는 듯 험악한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오른편에는 입술이 잔뜩 나온 채 억울한 듯 올리브색 눈망울을 그렁거리는 양쪽으로 땋아내린 갈색머리의 어린 소녀와, 그 소녀를 보호하듯 옆에 선 소녀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여러분, 용사님 모셔왔습니다."
게리의 목소리에, 마을 회관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향했다. 가장 먼저, 촌장이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용사님 오셨습니까. ...그, 오면서 보셨겠지만 용사님의 동상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다 이 맹랑한 꼬맹이가 저지른 짓입니다요!!"
마을 주민 중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자, 갈색 머리의 소녀가 질세라 빽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오셨으니까 용사님한테 들어봐요! 내가 잘 못했나, 안 했나!!" "안나야, 엄마랑 소리 안 지르고 말하기로 약속했지?" "그치만 저 어른들이 귓구멍이 막혔는지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 "아니, 이 녀석이 글쎄!!"
금세 험악해진 분위기에, 게리가 원탁을 탁탁 두드리며 나섰다.
"그만들 하세요. 용사님께서 안나에게 자세한 정황을 듣고 판단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그러고는 안나의 옆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조곤조곤 말했다. "안나야, 용사님은 이제 막 이번 일을 아셔서 안나가 왜 용사님의 동상을 망가뜨리려 했는지 잘 모르셔." "...응." "그러니까 어렵겠지만 안나가 화 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줘야 해. 할 수 있겠니?"
그러자, 여자아이 - 안나는 격해진 감정을 누르려는 듯 입술을 삐쭉거리다 이내 크게 숨을 들이 쉬고, 좀은 떨리지만 똑똑한 투로 대답했다.
"...화 안 내구, 잘 말할게. 촌장님이랑 어른들 안 끼어들면. " "안 끼어드실거야. 만약에 끼어드시면, 엄마가 안나 이야기하게 두라고 이야기할게." "오빠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제 어머니와 게리의 장담에 한시름 마음을 놓았는지, 안나는 소매로 얼굴을 훔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용사를 향해 똑바로 서서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저는 안나라고 합니다. ...어른들 말씀대로, 오늘 새벽에 용사님의 동상을 부순 건 저예요. ...저는, 제가 왜 용사님 동상을 부쉈냐면, ...동상, 용사님이 치워달라고 몇번이고 이야기하셨잖아요. 저... 엄마한테 들었고 직접 본 적도 있어요. 저는... 이해가 안됐어요. 어른들은 저 동상을 용사님을 위해 세웠다는데,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짓은 하면 안되잖아요. 어른들은 용사님이 치워달라는 데도 죽어도 안 치워주고... 그러니까 제가 치우려고 했어요. 목을 자른 건 위에서부터 조금씩 잘라서 내리려고 그런 거예요. 한꺼번에 크게 자르면 위험하니까... 무엇보다도, 용사님이 저 동상이 있는 게 좋으셨으면, 그래서 제가 치우려고 해서 화난 거면, 사과드릴게요. 제가 그런 건 어디까지나 용사님이 저 동상을 치우시길 바라서였으니까요. ...근데."
안나는 고개를 홱 돌려 촌장과 마을 어른들을 노려보며 다시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로 애써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
"제가 악마 들린 아이여서, 못된 사람이 시켜서, 용사님에게 나쁜 마음이 들어서 그랬다는 말은, 절대 인정 못해요. 왜냐면, 왜냐면... 싫다는 걸 강요하는 거야말로, 나쁜 거니까요!"
다시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을 마른 세수로 거칠게 닦아내며, 안나는 몇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 이내 다시 용사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아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도 받아들이는 쪽은 어떨지 몰라서 쫄리지 뭐야 ㅋㅋ 그래도 이을만하겐 나온 것 같아 안심이네! 언제든 잇기 난감하면 편히 이야기해줘:>
그렇기에 혹시나 확인차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고작 열 네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열 네살 아이를 속여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의 말만 들으면 그런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고 사내는 판단했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가 저렇게까지 변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도중, 자신의 동상이 보이자 사내는 그 동상을 가만히 바라봤다. 목만 잘려 땅에 구르고 있는 그 모습에 사내는 괜히 자신의 목을 손으로 잡고 난감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동상인데 저렇게 목이 뒹굴고 있으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사내는 애써 다른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목이 잘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더더욱. 아예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 걸으니 저 앞에 마을 회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회관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올리브색 눈망울을 가지고 있으며 양갈래 갈색머리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가 동상의 목을 잘라냈다는 그 아이겠지. 사내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와중,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와 사내는 촌장을 바라봤다.
"네. 전부 봤습니다. 아주 제대로 절단이 났더군요."
씁쓸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사내는 막 소리를 지르는 마을 주민과 여자아이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단 기가 상당히 센 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자리에서 겁먹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도발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더더욱. 자신은 저 나이때 어땠더라. 그렇게 잠시 생각하다 왜 그랬는지를 이야기하겠다는 말에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른 분들도 이 아이의 말에 끼어들지 말아주세요. 판단은 제가 듣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끼이면 반드시 이런저런 시끄러운 소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 소녀가 왜 그런 짓을 했냐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그 역시, 끼이지 말 것을 부탁한 후, 그는 살며시 무릎을 굽히고 소녀와 시선을 마주하려고 했다.
들려온 이유는 참으로 단순했다. 자신이 없애주길 바랬는데 없애질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누군가를 위하는데 그 사람이 싫어하는 짓은 하면 안된다는 말.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마냥 옳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동상은 개인의 것만은 아니었고, 지금은 이 마을의 것이었다. 마음은 이해가 되었으나 마냥 옳다고는 할 수 없는 그 행동을 들으며 사내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나야. 더 물어볼 것은 없어. 그것으로 충분해. 일단 신경써줘서 고마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동상을 없애려고 했다는 마음에 일단 사내는 감사를 표했다. 허나 이후에 나올 말은 약간의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동상의 목을 자르는 것은 옳은 행동은 아니야. 남을 위한다면, 그 사람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되는 것은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위한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또 항상 옳은 것은 아니란다. 물론 난 저 동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저 동상은 일단 나를 생각해서 세운 것이고, 이제는 누구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이 마을의 물건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이를테면 안나도 안나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물이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없애려고 하면 기분이 상하겠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나눠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디 저 동상이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적어도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렇게 동상을 세우면서 관광 효과도 조금은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전란을 끝낸 용사의 동상을 보고 싶어하는 이는 이 넓은 땅에 분명히 존재할테니까. 저 동상은 처음에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세워진 것일수도 있으나, 이제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에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사내의 생각이었다.
"나도 안나가 악마가 들렸다거나, 못된 사람이 시켰다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안나는 순수하게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일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동상을 파괴하고 그러면 안되는 거야. 알았지? 앞으로는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판단해서 일을 벌이지 말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좁히면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해. 오늘의 일을 교훈 삼아서 말이야."
절대로 자신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지, 사내는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안나에게 작은 윙크도 보냈다. 이어 그는 다시 다리를 펼친 후에 촌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저는 이번 일에 책임을 묻지 않을게요. 어린애가 한 행동이고, 이 아이도 나쁜 마음으로 한 행동은 아니니까요.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지. 어디 동상 하나 파괴했다고 처벌을 내리니 뭐니, 나쁜 마음이 들었니 뭐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고, 목이 잘린 동상이라. 일단 어쩔 수 없이 동상은 철거해야겠네요. 그 대신에, 차라리 저를 본따서 만든 기념품을 만든다던가 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그것도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동상보다는 나을 것 같거든요."
>>477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말에 마음을 놓은 듯 빳빳하게 긴장했던 어깨에서 한결 힘을 빼던 안나는, 용사가 이어 길게 늘어놓는 훈계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점검하려는 듯 잠자코 경청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자신을 벌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안나는 고개를 조금씩 갸웃거리기 시작하더니, 그의 말이 끝날 때 쯤에는 억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용사님 말씀은, 제가 용사님 동상이 싫다는 이유로... 어른들한테 동상을 치우자고 이야기 안 하고, 멋대로 동상을 치우려고 한 게 잘못이란 거죠? ...용사님 말, 다 틀렸어요.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좁히라고요, 제가 어른들한테 용사님이 싫어하니까 동상은 내리고 다른 관광 요소를 만들자고 이야기 안 해봤을 것 같으세요? 용사님이 저 봤어요? 용사님이 저랑 이야기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용사님 동상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 처음엔 용사님 동상 세워진다고 들었을 때, 엄청 신났거든요? 진짜 용사님은 만나지 못해도 용사님 동상에 맨날 인사하러 가야지, 했거든요? 그런데도 용사님이 싫어하니까 제가 좋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용사님 의사 무시하는데 가만히 있기 싫어서 그랬던 건데... 그리고 제가, 어른들한테 결국은 허락 못 받았으니까 일방적으로 치운게 맞다 쳐요. 그런데 그럼 왜 안 돼요?"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어가자, 안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 왼팔을 오른손으로 꽉 붙들었다가, 몇번이고 떨리는 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 어른들은, 촌장님은, 용사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억지로 동상 세우고 용사님이 치워 달라는데도 안 치웠는데, 왜 치우는 건 어른들 허락 받아야 해요? 그것도 당사자인 용사님도 아닌 어른들 허락을요. 용사님은 대체 저 동상이 싫으신 거예요, 좋으신 거예요? 오늘 새벽까지는 용사님이 저 동상을 치우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모르겠어요. 용사님을 본딴 기념품도 크기만 작지 동상이랑 비슷하잖아요. ...저한테 혼만 내시고 벌 안 받게 해주시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전 용사님이 말씀이 하나도 납득이 안 돼요. 그러니까, 벌 받으라면 받을게요. 원하시면 저 동상도 고쳐놓고요. 저 동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졌으니, 저 동상이 망가져서 싫은 사람이 있다면 망가뜨린 제가 고쳐놔야죠."
이래서 실제 용사님은 좋아하지 말라는 거구나...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안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의자에 풀썩 앉았다. 상황을 시켜보던 게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린 아이니까 심한 벌을 받겠냐만은... 화제를 돌리는 게 좋겠는걸. 마침 용사님께서 관광상품 이야기도 꺼내셨고.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한 손을 들고 말했다.
"용사님께서 기념품 이야기를 하셔서 말입니다만, 미니 동상은 양산해서 상시 판매를 하든 귀족 나으리들을 타겟으로 호화롭게 한정수량을 제작하든 재료비와 공임비를 확보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용사님께서 묵으신 여관이나 용사님의 사냥코스 등을 관광지로 내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용사님께서 없어져도 괜찮은 물건 아무거나 몇개 주시면 경매에 부쳐도 불티나게 팔릴 텐데요."
>>478 "싫어해. 하지만 싫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뭘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양보를 해야하기도 하고, 의견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자신 쪽에서도 최대한 양보를 하면서 방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저 동상은 이제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많이 겹쳐진 상태였다. 자신이 싫어한다고 해서 무작정 없앨 수 있는 것이 어디 말이 되겠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이 마을에서 단 한 명이라도 싫어한다면, 모두 없어져야 하는 것이 될텐데 그래서야 어떻게 사회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저 아이의 생각 또한 틀린 것이 아니기에 사내는 굳이 더 말을 하진 않았다.
"나에게 실망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역시 싫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뭘 할 순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런 짓이 당연해진다면, 이 세상을 전란에 빠뜨린 이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니."
어려운 문제였으나 일개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이 설명하기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지는 잡혀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 다른 동료들이 있으면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주제가 바뀌는 것을 들으며 그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 부분은 마을 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해서 정해주세요. 다만... 사냥코스는 몬스터들이 나타나니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역시 기회가 기회니까 저 동상은 치워주세요. 어차피 저렇게 된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딱히 칭송받고자 그 전쟁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단지 이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가족이 죽고 친구들이 죽어서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뛰어든 것이었거든요."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저 이대로 당할수만은 없겠다 싶어 싸우러 간 존재였다. 특별히 현명한 것이 아니며,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누리는 이 일상을 되찾고 싶었고 그것을 되찾았으니 영웅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저 애매하고 낯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부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 생각을 강요할 순 없었으니까.
"그리고 저 애에게는 벌을 주지 마시고요. 어찌되었건 원인은 저인 모양이니..."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던 사내는 팔짱을 가만히 끼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차후의 일은 다시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은 저 아이에 대한 것으로 모인 것이니 말이에요."
/좀 더 이 캐릭터가 머리가 좋고 현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오너부터가 머리가 완전 뛰어나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어렵다...어려워...
어 뭐야! 내 고철 파이프랑, 네 피클 절임이랑 바꾸지 않을래? 왠지 들고다니면 기분 좋을 것 같아.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방호복 안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울리며 흘러나온다. 이미 괴물에게 다리를 다쳐 벽에 기대 앉아있는 당신에게 말하는 중이다. 문 밖에는 여전히 당신들을 찾는 괴물의 끔찍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 리설 컴퍼니 기반! 위험한 회사에 취직해 괴물이 가득한 행성에서 폐지줍기...ㅋㅋㅋㅋ 나사 빠진 친구인데 잇는 건 자유롭게!
>>479 용사에 말에, 안나는 무어라 대꾸를 하고 싶은 지 입을 달싹였지만, 이미 화제는 동상 대신 내세울 만한 관광상품으로 넘어갔기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어, 용사가 안나에게 벌을 주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후의 일은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제안하자, 당사자인 용사가 선처를 한 마당에 더는 처벌을 주장하기도 모양이 나빴다고 생각했는지, 촌장은 "그러시지요." 라고 동의를 표했고, 나머지 마을 주민들도 이의를 표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안나의 어머니도 안나의 어께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우리도 이만 집에 갈까?" "응, 그 전에 용사님한테 한 말씀만 드릴래." "목소리 안 높이고 드릴 거지?" "응."
장담하듯 어머니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보인 안나는, 어머니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뒤에야 용사를 향해 바로 섰다. 억울함도 노기도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용사를 올려다보며, 안나는 헛기침을 한 뒤 말을 꺼넸다.
"이야기는 다 끝났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저는 세우는 건 마음대로 해도 되고, 철거는 그러면 안 되는 건지, 왜 그런지, 되고 안 되고를 정하는 기준이 있는지를 여쭤본 거예요. 제가 납득할 만한 답변은 용사님께 들을 수 없었으니, 다른 어른들께 여쭤보던가 할게요. 그리고, 전 용사님께서 동상을 철거하려던 걸 잘못했다고 지적하셔서가 아니라,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 주지는 못하시면서 잘못됐다고만 되풀이하시는 부분과, 제가 동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나 동상에 대해 어른들께 말씀을 드렸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으시고 단언하신 점에 실망한 거예요. 이 부분은 확실히 하고 싶어요."
"이 녀석, 용사님이 너그럽게 봐주신다는데 고맙습니다, 하지는 못할 망정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안나가 이야기하던 중에도 영 참기가 어려웠는지 내내 표정이 험악해져 있던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울컥한 듯 안나를 꾸짖자, 안나는 고개를 돌려 주민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맘에 안 드시면 벌 주시던가요 근데 용사님도 방금 동상 치우라셨는데 그 동상 부순걸로 벌 주시게요? " "너 이녀석 말버릇이!!!" "베에~"
혼을 내려는지 마을 주민이 성큼 다가오자, 안나는 눈밑 살을 당기고 도발적으로 혀를 쏙 내밀더니, 곧장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마을 회관을 나가버렸다. 당연하게도 마을 회관은 다시 성난 주민들이 노여워하는 소리로 가득 찼고, 안나의 어머니 역시 용사와 촌장, 마을 주민들에게 연신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더니, "안나, 너 거기 안 서!!"라고 외치며 다급히 마을 회관을 나섰다. "아, 왜애! 목소리는 안 높였잖아!" 라고 앙칼지게 외치는 안나의 목소리 뒤에 등짝이라도 맞았는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이 연이어 울리자, 촌장은 골이 아프다는 듯 머리를 싸쥐며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고, 그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다소곳이 서 있던 게리는, 헛기침을 하고는 용사의 곁에 다가서서 위로하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안나가 아직 어려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토론이 어렵긴 하지...<:3 용사님의 발언이 안나가 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해. 내용이 이렇게 흘러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ㅎㅎ
>>481 저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내는 그저 피식 웃었다. 무슨 특별한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건 저 애가 저렇게 생각한다면 저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 생각을 수정하거나 바꿀 순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억지로 수정하거나 고치거나 할 마음은 없었다. 용사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자신이 뭘 어찌하랴. 어린애를상대로 말싸움 하거나 할 마음 또한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말이 서투른 것도 있었으니까요."
어차피 더 따지지는 않을 생각이었고,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 아이의 표현을 빌려서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그렇게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생각을 해줬으면 했다만, 그것을 일일히 설명할 생각은 그에겐 없었다. 어찌되었건 이제 일은 정리가 된 셈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후우 감았다.
"그러면 일단 저도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만간에 수도에 조금 갔다와야 할 일이 있어서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네요. 그러니까 그 기간때는 아마 사냥 의뢰라던가, 그런 것은 조금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양해를 바라겠습니다."
아직 촌장이 그곳에 있었으니 사내는 그렇게 보고하듯 이야기했다. 딱히 도망치거나 바람을 쐬러가는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나러 갈 참이었다. 수도에 남은 이들도 있었고, 그들 중에서 자신을 초대한 이가 있었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어찌되었건 사내는 괜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옛 마을 분위기 그 자체는 아니었으나, 역시 평화가 돌아오긴 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럼 다들 푹 쉬십시오. 이만."
그렇게 말을 남기며 사내는 먼저 회관을 나가려고 했다. 아마 그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딱히 갈 곳은 없었고, 사냥을 마친 그때부터 집에 가서 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이런 전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어쨌건 상황은 끝난 것 같기도 하니... 일단 막레 비슷하게 써봤어. 잇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더 이어도 괜찮아! 막레로 받는다면 수고했다는 인사도 남긴다! 참고로 전개가 저렇게 되었지만, 나는 재밌었다!
혼잣말처럼 무의식적으로 흘러나간 중얼거림을 주워담기에는 이미 늦었다. 내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지? 뒤늦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러 막아 보지만, 마주쳐버린 너의 시선을 되돌릴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에 켜진 앰뷸러스 불빛이 얼굴과 목덜미에까지 옮아 시뻘겋게 물들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아, 아, 홀로 떠올릴 수 있는 오만 욕을 자신에게 퍼부으며 자책하기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을 눌러보려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너로 채워지는 것이 기묘하다. 언제부터였더라? 스쳐지나간 옷깃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생각했을 때? 느즈막한 오후의 햇살을 덮어쓴 옆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찰싹 달라붙은 몸이 어린 시절 함께 뒹굴었던 기억 속의 너와는 달라서 놀란 마음이 들었을 때? 아니, 어느 하나가 계기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스며드는 중이었구나. 맘 속에서 끝을 모르고 부풀던 물풍선이 내뱉은 한 마디에 팡, 하고 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지 마."
미안. 어쨌든 지금은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늦게나마 시뻘게진 얼굴을 네가 못 보게 필사적으로 옷소매 안에 가리는 것 뿐이었다.
ㅡ 이 새벽에 포카포카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가지구.. 편하게 이어줘☺️~ 이을 맘이.. 든다면 말이지만...👀
>>484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냐면, 너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마비된 사로 인해 너와 함께 걷던 걸음걸이가 서서히 느려지고, 네가 나보다 먼저 멈춰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큰일이야. 내가 들은 말이, 그 말이 맞다면, 그것은, 그 의미는. 삐딱거리는 움직임으로 돌아서려다, 너에게서 돌아온 거절, 거부, ……혹은 쑥쓰러움으로 추측할 수 있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오자 급하게 제동을 건다.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는 더욱 고물 로보트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언제부터…….”
난, 언제부터였을까. 네 가느다란 속눈썹이 나의 목 부근에 멈춰서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을 때, 낮잠을 자던 너가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 보았을 때(귀여워서,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다.), 자전거 뒷좌석에 탄 네 체온이 몸에 닿은 곳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렇기에 언제부터냐고 물어본다면, 매순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 때마다 내가 느낀건, 유독 귀가 화륵 불타오르는 느낌과 함께 단지 한 문장의 감상 뿐이었다. '큰일났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가 없겠다. 하지만 답을 미룰 수는 없어. 얼굴을 쓸어내린다. 열을 내리기 위함이었지만, 역효과였다. 그럼에도 몸을 돌려 너를 본다. 얼굴을 가린 네가 보이자 손 끝이 저릿거려온다. 필시 심장박동이 너무 빠른 탓이다.
“…난 네 말이면 잘듣잖아. 그런데 이번 한번만…”
밤공기를 뚫고 지나가, 네게로 가는 길. 얼굴을 가린 옷소매를 저릿거리는 손가락 끝으로 붙잡고서, 서서히 내리려한다.
시원한 밤공기 스치던 뺨을 옷 소매로 가두니 달아오른 것이 식지 않아 순식간에 홧홧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시선을 내리깐 곳, 미처 꽉 채우지 못 한 빈틈 사이로 조금 삐걱거리는 너의 몸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쯤 오니 이제 몰아쳐오는 것은 후회다. 왜 이야기했을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왜 이전에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으면 더 정리된 생각과 마음으로 네 앞에 설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워져 곧 현기증이 이나 싶은데,
네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사실 어떤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해 얼빠진 상태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뭐라고? 뭐라고 했어? 설마 네 입에서 나온 대답이 혹여나 기대하던 것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뜩하게 무서워지기 시작한 연약한 마음이.
"그- 그런 게,"
아닌, 첫 물꼬는 어이없게 튀어나간 말 한 마디로, 그 다음엔 지금도 여실히 느껴지는 두 뺨의 뜨듯함으로,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한 마음을 또 부정하기는 싫은 마음에 입술을 물었을 때. 얼굴 보여줘. 아,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이 뛴다.
두근, 두근, 몸의 모든 힘이 심장 뛰는 데에라도 쓰여지는지. 단단히 막았다고 생각했던 두 팔은 애초에 그런 것도 아닌 것처럼 허무하게 내려가고야 말았다. 반사적으로 내리깔았던 눈을 서서히, 서서히, 들어올려서.....
...다시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쿵, 하고 첫 고동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다음 순간엔 이미 또 다른 말이 흘러나가고 말았다.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로 들릴 지 몰라도.
"........역시, 좋아하나 봐."
ㅡ 이런 달달한 답레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달다 달아,,,,, 이게 설탕이지...
순하게 내려 앉았던 옅은 회색의 눈, 여러번 탈색을 거듭한 것 같던 물빠진 장미색 머리칼. 채도라곤 찾을 수 없던 조각같은 여성의 얼굴에 그려진 입술이 물이 퍼지듯 붉어진다. 그녀는 가녀린 석고상 같은 허연 팔을 뻗어 너를 붙잡았다. 난간에 기댄 당신의 모습이 흡족한지 아직도 붉게 미소를 문 채다.
" 아니야, 너 똑똑하잖아. 내가 널 얼마나 오래 보아 왔는데."
항상 사근사근 부드럽게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만큼이나 몽환적으로 들려온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구슬 같은 목소리다.
" 십 년이면 눈치챘어야지~."
어깨에도 채 닿지 않는 부드러운 머리칼은 지나치게 얇아 달빛이 깊이 스몄다. 빛나는 그것이 매서운 바람에 흩날려 마치 누가 강제로 쥐어 뜯은 은사 같다.
" 내 연극, 즐거웠지?"
너의 목덜미로 서늘한 감촉이 아찔하게 다가간다.
//갑자기 뱀파이어랑 혐관, 애증 같은 매운맛이 끌려서 막 쓰는 새벽글. 아무나 자유롭고 편하게 이어줘. 소꿉친구 컨셉이면 좋겠다.
난간에서 마주하게 된 너는 평소와 같이 아름다웠다. 저 하얀색의 피부, 물빠진 장미색 머리, 옅은 회색의 눈....
" 하, 설마 했는데. 진짜로? "
다소 놀란 마음과는 다르게, 몸과 표정은 멋대로 움직였다. 비웃는 듯이 치켜 올라간 입꼬리 하며, 어이없는 것을 들었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턱 짚는 모습은... 내가 의도한게 아니다. 하지만 십 년 동안이나 연기를 지속한 그녀처럼, 이런 연기는 이미 내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 즐거웠냐고? 그래보여? 네 말대로 십 년이나 봐왔는데 속은 내 기분을 알기나 해? "
아, 이게 아니다. 겨우 이따위 말이나 뱉으려고 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널 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된다. 괜스레 밀어내고, 짜증내고. 그런 나에게, 오늘 네가 큰 폭탄을 떨어트렸다.
" ....뭐, 그래도. "
그래도, 다가오는 너를 피하지는 않았다. 단지 머리카락 끝자락부터 천천히 너의 얼굴을 구석구석 눈에 담아내고 나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 예쁜건 똑같네. "
네가 나의 목을 물려는 것에 맞추어, 너의 등을 감싸듯 안으려 했다.
//매운맛.... 은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지만... ^^... 아무튼 열심히 써봤어...!
나는 가만히 너의 연극을 지켜보았다. 그래, 너는 그런 연기를 탤했구나. 너의 주인공을 그렇게 해석했구나.
" 모르지, 난 속인 입장이니까."
쾌활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TV 속 이혼 재판을 마친 어느 여주인공이나, 코미디 드라마에서 가족들과 함께 깔깔 장난치는 모습처럼 과하고 또 행복해보였다. 죄책감이라곤 하나 없어 보이는 그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더니 원래 연기하던 그 얌전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온다.
" ..너, 뭘 알고 이러는거야?"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나를 감싸는 너는 계산에 넣지 못했는데. 나는 잠시 땅을 응시하려했으나, 시꺼먼 그것은 하늘과도 같이 아득하게 깊어보일 뿐 분간이 되지 않았다. 위아래 구분없이 섞인 게 꼭 너와 나 같잖아.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목마름을 참을 수 없었다.
" 네 피 냄새를 사랑했어."
반짝, 회색눈이 빛을 내면 마법과도 같은 사랑의 속삭임이 네 귀을 간질거인다. 사랑, 달콤하지 않은가. 불타는 에로스의 화살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뜨거워지고 미친듯이 뛰더니 내 몸을 네게로 이끄는 그것. 그것이 너, 의 피였다. 나는 등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네게 내 무게를 실었다. 바람과도 같은 가벼움이 네게 느껴진다. 그리고 주사바늘에 찔리는 듯한 깊고 첨예한 통증이 네 목을 뚫고 지나간다.
" 하."
잠시 지긋하게 눌렀던 내 도톰한 입술을 떼면, 피가 입가에 흐르고, 나는 이성을 억누르며 붉은 것을 혀로 핥아댄다.
속인 입장이라는 말에 절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한 방 먹었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어서였을까.
" 모르지, 난 속은 입장이니까. "
너에게 같은 말을 되돌려준다. 나는 몰라. 그야 네가 속였는걸? 아무것도 모르길 바란거 아니었나?
" ...... "
나의 피 냄새를 사랑했다는 말에, 나는 굳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기를 선택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들... 내가 죽은 뒤의 너에게 족쇄처럼 따라붙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너에게 기억되고 싶지만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는,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는것이 좋을 것 같으니.
그렇기에 목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히는 느낌이 들었을때도, 신음 한번 흘리지 않고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 ....? "
하지만 이내 다시 떨어진 감각에, 아주 잠시 얼빠진 표정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그 건조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을테다.
" 이제 내 차롄가? "
연극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배역에 과몰입하게 되는 경향도 있다고 하던가. 지금의 내 상태를 굳이 표현하려 하자면, 그것이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 너의 그 붉은 입술을 사랑해. "
부러 다른 부위가 아닌 입술을 말했다. 계속해서 봐왔던 것과는 달리, 방금 전 붉어졌던 그 입술을. 나는 새로운 너마저 사랑하게 되었으니.
연인 사이에나 붙이는 애칭을 이럴 때에나 붙여본다. 밤하늘이 아득하고, 공기는 차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퍽 멀리 위로 올라와 있고,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자기, 하고. 꾹 신음을 밀어참은 그이의 심정을 그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태생이 사냥자였다. 먹잇감의 기분은 짐작도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슬프도록 얼이 빠진 그 얼굴 위로는 다시 건조한 미소가 쓰라리도록 피어났다. 그 건조함이 제 몸을 버석버석 갈라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사랑하면 곤란한데. 넌 곧 죽을 거라서."
너를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거칠게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널 난간 끝으로 밀친다. 곧 떨어질 거라 협박하는 살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애절함에, 그보다도 그 얼이 빠진 바보같음에 화가 치민다.
" 작별 키스 쯤이라면 해줄 수 있어. 나, 어려운 여자 아니야."
일부러 얄궂은 말만을 지나치게 골라내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트는 제 모습이 얼마나 악에 바쳐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하지만 그 전에. 조금만 더. 아직 배가 덜 차서 말이야. 넌, 내가 가장 공들인 사냥감이었어."
가냘픈 몸짓이 어느 발레단에 나오는 것처럼 부드럽고 사뿐히 네게로 내려앉는다. 그러나, 어느 발레의 발동작도 힘이 가득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지. 사뿐한 그 무게가, 점점 무겁게 널 짓누르고 옭아맨다. 네 목을 날카로운 손가락과 손날 손톱 하나하나로 잔인하게 짓이기고 상처내며 너의 상처를 벌리다간 그것에 내 입을 대고 계곡 물을 마셔 목을 축이는 어느 짐승처럼 달려들어 탐미할 것이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먹잇감. 그래. 지금의 나는 고작 먹잇감에 불과하다. 단지 늑대에게 목을 물려있는 작은 토끼정도의 먹잇감이겠지. 하지만 그 토끼는, 자신이 먹힐 것이라는걸 알고서도 굶주린 늑대의 볼을 쓸어준다. 네 굶주림이 그만큼 컸던 것임을 알 것 같아서.
" 오히려 전혀 곤란하지 않지. " "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죽을 수 있다면야. "
다만 그것이 너에게 족쇄가 된다면 슬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 아니, 넌 어려운 여자야. "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너의 진심을 알아내기 힘들었고, 갖은 노력을 쏟아봤지만 사실 진심을 내비친 적이 있었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너는, 어려운 여자였다.
" 그건 영광인데. " " 좀 더 공을 들여줬으면 좋았을걸. "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오래 볼 수 있었을까. 허탈하게 생각해보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방금 물렸던 곳을 손으로 헤집어내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 아, 흐으, 큭, "
끔찍한 고통이 몸 속을 파고든다. 벌어질대로 벌어진 상처는,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엉망진창이 되어 너의 입술만큼 붉은 피를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을 어떻게든 참아내려 이를 꽉 깨물고 있을 때, 너의 입술이 내 상처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 .....사레 들릴라. 천천히. "
고통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다시금 너를 감싸안고, 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이 피는, 과연 날 죽이기 위해 흐르는 피일까.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내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너를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세상이 망하고, 의지할 곳 없는 너와 나 같은 외톨이들은 이곳으로 끌려왔어. 엄밀히 따져 보안서류에 사인을 하고 지장을 찍고, 수 많은 테스트를 거친 것은 우리의 의지가 맞긴 하지만. 이리보나 저리보나 우린 끌려온 게 맞았지. 분명 너도 동의할거야. 글쎄, 세상에 인연 하나 없이 덜렁 남겨진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이런 곳이라도 오면 적어도 하루는 더 먹을 수 있고 하루는 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처지란 세상이 망하기 전과 그닥 다를 게 없는 거 같아. 그런 의미에서 우린 행운인걸까?
더럽고 거칠던 네 더벅머리와 산발이 되어 엉킨 내 머리칼. 그저 텅 비고 공허한 네 눈과 악의와 저주로 가득찬 내 눈. 그 새하얀 방에서 처음 너를 마주했을 때 나는 네가 낯설지 않았어. 너는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 그래서 난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널 마음대로 불러댔어. 이 차가운 세상에 내가 입에 담을 이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어서. 미안,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네. 오늘은... 레몬으로 하자. 처음 널 본 날 네 머리색이 꼭 잘 익은 레몬색 같다고 생각했거든.
우리는 어찌보면 성공했고, 어찌보면 실패했어. 같이 한 시간이 어느정도인진 모르겠지만... 네가 한 뼘이나 크고, 내 머리도 그보다 훨씬 자라났으니 짧진 않았을거야. 버틸만큼 버텨준거지. 잘 해왔어. 그리고 축하해. 나보단 네가 좀 더 완성작이었나봐.
" 자, 이제 날 죽여. 레몬. "
세상이 망하기 시작한 날, 난 오히려 기뻐했어. 차라리 이렇게 다같이 죽어버리자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꼭 비싼 술을 한가득 먹어치운 기분이었지. 사실, 난 싸구려 알코올 밖에 마셔본 적 없어서 비싼 술에 취한 기분은 몰라. 하지만 이는 그만큼, 그러니까 내가 결코 경험해본 적 없는 표현으로 설명할만큼, 그 어떤 때보다도 기쁘고 황홀했단 뜻이야. 오래 가진 않았어. 다같이 뒈지자니깐, 생각보다 사람들의 명줄은 길고 문명은 쉽게 무너지지 않더라고. 그러니까 너랑 내가 만나게 된 거겠지만.
" 너도 알잖아. "
셜리는 내게 정부가 '그들'에게 맞설 인간병기를 만들 계획이라 말해줬어. 멍청한 셜리. 우리가 아무리 못배워먹은 부랑자 자식들이라지만 그 병기가 우리란 걸 눈치 못챌 줄 알고? 그렇게나 많은 글자가 적힌 종이는 오랜만인지라, 금방 멀미가 나버려 대충 사인해버리긴 했지만말야, 우리가 사인한 그 서류 기억나? 그들은 친절히 설명해줬어. 우리는 단지... 군인들에게 새로 보급될 각성제의 안정성을 확인할 임상 테스트에 참여할 뿐이라고. 그러니 국가에서 책임지는 이 안전한 쉘터에서 스트레스 없이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야. 개소리지. 멍청한 셜리가 알려줬잖아. 셜리는 멍청하게 구는 내 모습에 조언하듯 한 마디를 더 던졌지. 이제 곧 '그것'들을 척결할 시간이 올거야. 망할, 우리의 안전한 이 쉘터도 곧 척결 당한단 이야기 아니겠어!
" 너를 위한 일이란 걸... "
그 놈들이 우리에게 놓던 주사 기억나지? 항상 신체 스캐너에 들어가기 전 놓던 그거 말야. 내가 보기에, 그건 '그것'들과 관련이 있어. 우리도 알아챘잖아. 우리의 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그래, '그것'과 비슷해지고 있었어.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면 어떤 코믹스의 슈퍼히어로와 같은 힘을 얻었다며 좋아했겠지. 젠장. 하지만 난 확신할 수 없어. 우리가 히어로일까? '그것'의 힘을 조금씩 수혈 받는 우리가 말야. 그것들과 섞인 우리는 뭐가 되는걸까?
" —피터와 소피아의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 곧 우리의 차례야. "
이 쉘터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너도 봤잖아. 어디 대륙에서 데려왔을지 모를 우리와 같은 10대 부랑아들. 어느 시점부터 하나둘 보이지 않고... 가끔은 우리 앞에서 돌연 죽어버리던 아이들. 몇몇은 실험이 끝나 사회로 돌아갔다고 했지. 아아, 멍청한 셜리!
"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마지막 기회야. "
'그것'의 힘을 과도히 주입하면 잠깐의 폭주 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더군. 우리는 몰랐지만말야,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보단 '그것'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나봐. 키가 한 뼘 크고 머리가 자라버린 우리는 이전의 어린 우리로 돌아갈 수 없는거야. 레몬, 그래도 난 나보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 알고 있겠지만, 난 병들어 죽어가고 있잖아. 그러니 지금 빨리 죽여. 그리고 넌 자유를 찾아. 어떻게든. "
미안해 레몬. 나도 모르게 널 사랑했었어. 자, 그러니까 어서 날 죽여. 아직 네게 웃어줄 수 있으니까 말야.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초능력 개발 생체 실험을 당하는 아이들로 상황극을 해보고 싶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있는 다양한 행동들을 좋아한다. 찬 몸을 데우기 위해 옷을 껴입거나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손을 잡는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추운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위해 서로를 끌어안는 그런 행동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그렇게 서로를 붙어있게 하는 마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내 겨울은 유독 차가운 기억들로 이뤄져 있었고 그랬던 나는 겨울을 지나기 위해 동물들이 그러했듯 몸을 웅크리는 것으로 겨울을 지나고자 했다. 추운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내게서 나는 온기가 떨어지지 않고, 대신 몸에 남아 나를 미온이 데워주곤 했다. 그렇게 나는 추위를 견뎌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이 혼 직후의 하늘은 새하얀 구름이 모든 것을 내려낸 듯 가볍게 흘러간다. 그 풍경 아래로는 내린 눈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이 옅은 눈의 흔적들이 쌓였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어내는 사람들, 작은 눈을 가지고 손으로 뽀드득뽀드득 소릴 내며 만지고 있는 아이들, 내린 눈에 넘어질까 조심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모습과 추위도 잊은 듯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발걸음을 옮기는 직장인으로 도로는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났다. 거기에, 너를 기다리는 나까지 하여 이곳은 가득 찬 듯했다. 괜스레 목에 찬 머플러를 더듬었다.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은 흔적이 꽤 보이는, 못생긴 머플러. 그 머플러를 손으로 더듬고 있으면 안정이 되는 느낌이 든다. 혼자서 추위를 기다리던 나에게 네가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선물해준 머플러를 나는 소중히 목에 두르곤 기다린다. 차가운 기억들로 가득했던 내게 어울리지 않을 만큼, 따뜻한 온기와 함께 괜스레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켜고, 발로 눈을 쓸어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널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나는 이 계절에 내가 느껴봤던 가장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머플러로 손을 감싼 채 추위에도 몸을 살짝 떨면서도 널 기다리고 있다.
(여기였던가?. 접선 장소인 골목길에 도착하자 걸음이 멈춘다. 기억을 더듬어 확인하듯 두 눈동자가 바쁘게 주변을 훑는다. 확신이 섰는지 탐색이 끝나갈 즈음엔 골목길 벽에 몸을 기대고 선다. 사람도 없고, 그나마 들리는 건 가끔 날파리 날아다니는 소리뿐이자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리 자신이 버리는 패라고 해도 적의 소굴에 집어넣는, 그것도 모자라 '그 사람'과 어떻게든 가까워져 알게 된 정보들을 보고하라니 참 무모한 짓이다 싶다.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면서도 곁에 사람을 두려고 한다니.) —♪ (의미 없는 시간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알게 된 게 없는데 뭘 보고해야 좋을까. 호감은 무슨. 그 흔하다는 호의조차 사지 못했는데 친구는 웬 말이고 동료는 더 웬 말일까. 그런 고민들을 하며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 어딘가의 스파이 캐!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시대나 배경이나 상대 인물은 상관 없어서 자유롭게 정해줘!
(타닥, 타닥. 짙게 깔린 밤의 어둠을 밝혀주는 모닥불 위로 퍼지는 잔불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고찰에 잠겨있……다기보다는 자신 몫의 육포를 뜯어먹는 중이다. 모험을 해온지 어연 5년. 파티가 캠프에서 자는 동안 불침번을 서며 새벽에 까먹는 간식만큼 또 별미가 없더라지. 묘한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파티장인 내가 먹는다면 누가 막으랴. 친분있는 사이에서 짠 파티기에 탱커인 네가 해라 식으로 정해진 것이라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자리임은 알지만 대충 그런 당돌한 상상을 하며 불멍을 때리다, 뒷쪽 가까이서 들려온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조용한 골목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몇 년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소환된 이였다. 오랜 모험과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오래 살면서 나름 이 세계에 정도 들었고, 삶의 방식도 익숙해진데다가 고아원에 버려져서 쭉 고아로 지내온 탓에 딱히 원래 세계에서 그를 기다리는 가족은 없긴 했으나 그럼에도 원래 살던 세계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근처를 돌아보면 수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기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 분위기에 섞일 수 없었기에 그는 절로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담. 그런 혼잣말을 하며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나. 아니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이 좋을까. 물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돈 걱정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이나 게임을 보면 꼭 이런 상황 속에서 황제는 뒷통수를 치기 바빴는데 이곳의 황제는 평생 쓸 수도 없을 돈을 포상으로 줄 것을 약속한 덕이었다.
"돈 걱정이 없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어쩔까. 파트너."
자신이 차고 있는 검을 괜히 뽑으면서 사내는 그 검에 말을 걸었다. 당연하지만 검은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답이 돌아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내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라노벨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소환된 이야! 싸움이 다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난감해하는 상황! 가급적 같이 모험을 떠난 파티원이었으면 좋겠어! 사내와 같이 소환된 이여도 괜찮고, 이세계의 사람인데 같이 모험을 떠난 이여도 괜찮아! 황자황녀엘프드워프인간 기타 등등 다 괜찮다! 맥커터만 아니면 오케이
(둥그렇다. 어두운 밤 환히 뜬 보름마냥 둥글기만 하다. 따뜻하고 말랑해보이는 두 뺨도, 놀라서 크게 뜨인 두 눈도 마냥 둥글어서 적대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눈동자는 영영 당신 모습을 비출 듯 하더니 한 번 깜빡거린다. 그러더니 샐쭉 입꼬리가 말려들어가고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녕! (어깨에 걸쳐 몸을 가로질러 메고 있던 가방에서 부산스레 책을 한 권 꺼낸다. 몇 년이고 몇 번이고 다시 본 듯 낡아빠진 표지가 없던 향수도 불러 일으킬 것만 같다. 책장이 촤르르륵 넘어가다 멈춘다. 멈춰진 페이지를 당신이 잘 볼 수 있도록 펼쳐들고서, 목소리 크기를 낮추고 당신에게 소근거린다.) 나는 이 괴물을 찾고 있어. 너도 그래?
#인외를 찾아헤매는 중~ ㄹㅇ 인외가 나타나도 그냥 우연히 마주친 평범한 인간이어도 아무상관없당
>>499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산들산들,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위가 고요합니다. 어슴푸레한 어둠을 뒤로하고, 이 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던 사람이 당신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이 사람은 키가 퍽 크지만 중성적인 외양을 하고 있어 외양만으론 성별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동굴에서 만나기엔 치렁치렁한 옷차림입니다.) 반갑구나, 여행자여.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란다. (상냥하고 온화한 남자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무해함이 통한 걸까요, 아니면 당신의 손에 들린 그 책에 흥미가 있는 걸까요. 당신이 펼쳐든 책에 그려진 그것은, 어떤 거대한 날개를 지닌 무언가입니다.) 멋진 책이구나. 어디서 얻었느냐?
(당신같은 옷차림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보물을 찾다가는 분명 십분도 채 안되어 옷이 다 상할 것만 같다. 같은 목적을 지닌 친구라도 만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아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아주 살짝.) 친구 기다려? ...요? (여행자라는 호칭에 넓은 바다를 누비는 해적이라도 된 듯해 들뜬 목소리가 어색하게 맺어진다. 어둠 속 인영이 드러나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고개가 뒤로 꽤나 젖혀지는 탓이다. 무심코 친구를 기대하며 내뱉은 반말이 계속되어서 늦은 존댓말을 띄웠다.)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하늘을 나는 섬도, 예쁘게 노래하는 인어도 보았대. (책 이야기에 들떠 금새 툭 반말이 나온다. 자각도 못하곤 당신에게 책을 잘 보여주려는 듯 팔을 쭉 뻗는다. 어둠이 무색하게 두 눈이 반짝거린다. 동경과 호기심, 설렘과 기대, 그런 것들을 가득 담아.) 나는 이 괴물의 이름이 궁금해. (이때만큼은 다시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가 낮아지며 소근거렸다.)
친구를 기다린다... 그 표현이 훨씬 더 시적이구나. (당신이 건넨 말이 우연히도 마음에 들었던 듯, 키큰 사람은 환히 웃으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친구... 그렇게 부를 수 있었어. 내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이라면, 친구라고 불러도 좋겠지. (그 사람은 당신이 내밀어오는 책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그 눈에는 호기심 또한 반짝이고 있지만, 그 눈에 어린 것은 호기심만이 아닙니다. 추억을 되짚어보는 그리움 또한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 살며시 손을 올려보려다, 당신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당신에게로 눈을 마주쳐옵니다. 새벽에 뜬 달을 떠오르게 하는 눈동자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마치 비밀 이야기를 나누자는 듯한 당신의 어조가 꽤 친밀하게 느껴졌던지, 그는 흡족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당신의 귓가에 입을 갖다대어 나직이 속삭입니다.) 이 괴물에겐... 남아있는 이름이 없단다. 잃어버렸지. (그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덧붙입니다.) 어떠니, 네가 하나 지어주련?
(칭찬은 낯간지럽고, 환히 웃는 당신의 미소는 반가우니 마주 웃고 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더 새어나오고, 뺨은 밝다.) 자유? 여기 갇혔어요? (갇혔느냐 물은 건 이쪽이다만, 아무리 보아도 갇힌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고개가 또 기운다. 이번에는 확실히 갸웃거리듯 움직였다. 혹시 보이지 않는 곳에 당신이 묶여있기라도 한가 살펴보듯 당신 너머를 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당신의 책구경에 방해되지 않게 팔은 잘 뻗어야하니 관찰은 짧았다. 아니,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당신의 눈동자에 비출 제 모습이라도 찾는 듯 깜빡깜빡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이다. 불쾌하지는 않을테다.) 눈 되게 예쁘다!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곧 당신이 귓가에 속삭이자 비밀 이야기가 간지러워 까르륵 소리내어 웃어버린다. 그리고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내거는데, 달님같지도 별님같지도 않은 두 눈이 반짝거린다.) 어떻게 알아? 친구에요? 기다리는 친구가, (또 목소리 크기가 낮아진다.) 이 괴물이었어요?
오, 그런 셈이지. (그의 너머를 바라보면,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그저 바닥에 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둠 속으로 계속, 계속 뻗어있다. 어둠 속으로 뻗어갈수록 직물의 직조 구조가 기괴한 프랙탈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명백히, 그는 이 옷에 매여있다. 왠지 예전에 할아버지의 방에서 본 것 같은 무늬다. 뭔가를 한창 연구중이셨더랬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너야말로 예전에 만난 친구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걸. (그는 손을 뻗어 책을 쓸어본다.) 이 책을 쓴 사람 말이다. (자신의 할아버지보다는 한참 어려보이는, 명백히 할아버지의 나이보다 당신의 나이에 더 가까운 외양을 하고 있는 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파르스름한 눈동자에 담겨, 당신의 모습이 옅게 비친다. 그 뒤로 보이는, 마름모꼴의 동공.) 그건 아니란다. 이제는 끝난 시대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잔재일 뿐이니, 이름도 없어진 게지.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이 괴물을 찾는 거니?
(그런 셈이라는 대답은 퍽 이해하기 어려웠다. 갇혀있다기에는 이곳에는 쇠창살도 없고 문에 걸린 자물쇠도 없으니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곧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생경 처음 보는 풍경 속의 오래된 낯익음. 짧은 관찰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느껴진 그것은 뱃속에 자리 잡았다.) 앗, 아름답다? (당신의 말을 듣자니 순간 예쁘다는 말은 초면에 실례인가 싶었더라. 다른 단어도 떠올려둬야 할까 잠시 몰골하자면 당신의 말에 주의를 빼앗긴다. 책을 쓴 사람과, 당신의 옛친구와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말은 뱃속에 자리잡은 것이 움트게 했다. 당신의 손길이 스쳐간 책을 이제는 품에 안았다. 그러다 펼쳐서 보여주었던 그 페이지를 한 번 눈에 담았다 당신을 바라본다.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사이 새벽달을 닮았던 눈동자가 가깝다. 움튼 것이 꿈틀거리며 심장을 건드는 것 같다. 쿵쿵 두근거리는 박동이 어지럽다.) ...응. (움튼 것의 이름은 의심이었다. 그것을 뿌리뽑기 위한 질문.) 이미 찾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