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소원을... 와, 정말 있었구나! 실제로는 처음 봤는데 신기하네요! 아,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군요!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의 말에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다. 마치 소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이다.) 네? 약속을... (미뤘다는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다. 여자는 충격받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키더니 안절부절 못하며 다급하게 이야기한다.) 제가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해요! 분수대 앞에 서 있지 말아야 했는데... (허리를 숙였다 펴면서 사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병원이 어디 있는지 잘... 몰라서... 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처음부터 작게 시작된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하더니 결국 잘... 이후부터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바라본다. 양쪽 귀 끝이 살짝 붉어져있다.)
이 세계는 게임 속의 세계이다. 제국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고 힘이 있는 크림힐트 가문의 현 가주는 며칠 뒤에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고 그 이후부터 크림힐트 가문은 처참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리고 게임의 흐름대로라면 집안을 어떻게든 부흥시키려고 하는 자신마저 2년 후에 누군가에게 암살당하고 그대로 크림힐트 가문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 말을 들은 크림힡트 가문의 현 가주의 아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신에게 그 말을 전한 집사 역시 말을 전하고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꼭 이 말을 전해야만 한다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일단 말을 전하긴 했지만 이 말을 믿어도 되냐는 듯이 집사는 조심히 올해 18살의 사내에게 이야기했다.
"도련님. 일단 그리도 급하고 다급하게 전해달라고 해서 전하긴 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게임 속의 세계라니요. 게임이라고 하면 그거 아닙니까. 그거. 체스나 기마나 그런 것들. 지금 이 세상이 어딜 봐서 체스와 기마란 말입니까."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도 체스와 기마는 아니지. 내가 폰이나 킹도 아니잖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허나 보통 미친 녀석이 아니고서야 이런 허무맹랑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그것도 자신의 가문이 역사 뒷편으로 사라지고 만다는 그 이야기를 그렇게 다급하게 전하려고 했을 리가 없다고 사내는 판단했다. 일단 만나보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는 집사에게 부탁했다.
"일단 그렇게 다급하게 전하려고 했다고 하니 직접 들어보고 싶어. 응접실로 오게 할 수 있을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도련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지시였으니 일단 데리고 오겠다는 듯이 집사는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내 역시 자신의 방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1층에 있는 손님용 응접실로 들어간 후, 길이가 긴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의자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사내는 가만히 그 자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저 정신이 오락가락한 이의 헛소리일 뿐이지. 그것도 아니면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든 것은 직접 만나보면 알 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손님을 맞이하려고 했다.
"당신이 저에게 그... 경고를 전하신 분이신가요? 그러니까 게임 속의 세계..라던가 혹은 제 아버지가 암살당할 것이라고 말한 분. 실례이지만... 좀 더 자세히 그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겠습니까?"
손님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거지인지, 그것도 아니면 비슷한 귀족 가문의 자제인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으나 상대가 누구건 최대한 정중하게 기품을 갖춰 이야기를 하려는 듯, 사내는 상당히 예의바르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전생자가 경고를 했고 그 전생자의 말을 들어보고자 저택 안에 있는 응접실로 초대한 상황이야. 맥커터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도 괜찮아. 다만 들어온 이가 경고를 한 그 전생자였으면 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그 외 기타 설정은 인간이기만 하면 뭐라도 오케이야.
#사내와 서로 아는 사이여도 괜찮고 아예 모르는 사이여도 괜찮아. 일단 사내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설정이야. 서로 아는 사이라면 집사가 이야기를 했겠지만.. 이 부분은 그냥 자유도를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모순이라는 것으로 부탁할게!
>>302 ...예? (폐를 끼쳤다니, 분수대 앞에 서 있지 말아야 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남성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외마디 소리만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얼어있는데, 여성이 고개를 푹 숙인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병원이 어디있는지 잘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에, 남성은 가까스로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저만치 보이는 큰 건물을 가리켰다.) 아, 저기 보이는 건물이 병원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고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남성은 다리를 다친 여성이 따라잡을 수 있게끔 빠르지 않은 보폭으로 앞장섰다.)
>>304 (여자는 당신이 당황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사과만 한다. 오히려 당신의 외마디 소리를 듣고 이것이 자신을 향한 질책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안함이 철철 넘치는 모습이다.) 네? 정말인가요...? (멀지 않다는 말에 고개를 들고 겨우 당신을 바라본다. 근처에 있는 병원도 못 알아본 자신이 부끄러워 귀 끝은 여전히 붉었지만 당신의 미소를 발견하고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긴장으로 굳어있던 입매에서 힘이 빠지며 안도의 미소가 보인다.) 아! 감사합니다! (당신이 앞장서자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방과 모자를 황급히 주워든 다음, 조금 절뚝 거리기는 해도 당신의 뒤를 잘 따라간다.) 병원,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무척 친절하시네요!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베시시 웃는다.) 참, 저는 리에나라고 해요! 조금 늦은 인사지만 만나서 반가워요!
>>306 아닙니다, 저 때문에 놀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할 일이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고 생각했던 병원은 오늘 따라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남성은 빨라지려는 보폭을 애써 여성에게 맞추며 걸었다. 이내 여성이 통성명을 하려는 듯 이름을 밝히자, 남성 역시 이름을 밝혔다.) 저는 장의지라고 합니다. 성이 장이고, 이름이 의지입니다만, 발음하기 어려우시다면 장이라도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는 사이 정형외과에 도착했다. 평일이라서인지 대기실 안은 한산했다.) 잠시 앉아계세요, 접수하고 오겠습니다. (리에나에게 소파에 앉아있기를 권한 뒤, 의지는 곧장 초진 진료 창구로 향했다. 접수를 마친 의지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에나의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시절의 인연은 쭉 이어지지 않는 한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한 이야기도 어느 순간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에 있는 젊은 20대 초반의 사내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약혼녀가 지금 여기로 온다는 모양이었다. 글쎄. 사실 어린 시절에 만났다고는 하나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사내는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모두 거짓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릴 때 만난 적도 있고 이야기도 했다는데 기억이 안 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인지.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으니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 모든 것은 다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는 그저 이렇게 심호흡만 할 뿐이었다.
어떤 이일까.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는 들었으나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애초에 이 약혼에 대해 호의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옛날처럼 약혼이 절대적인 분위기는 아니라고 했으나 그럼에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는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부모라던가. 갑자기 만나라고 해도 조금 곤란하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일단 만나보고 얘기라도 나누라고 하니 그에 응하겠다고 나온 것이지. 사내는 굳이 말하자면 약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느낌에 가까웠다.
사내는 길게 한 줄기로 묶어내린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괜히 정리했다. 상대가 호의적이건 호의적이지 않건 어쨌건 귀족 집안의 도련님이라는 자각은 충분했기에 좋게 보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설사 약혼관계가 여기서 끝난다고 하더라도 상대 역시 귀족이니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물론 깨진 사이에서 좋은 관계가 형성될진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의 문이 열리면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일지, 메이드일지, 아니면 약혼녀일지. 긴장어린 표정으로 사내는 그저 문이 있는 방향만 조용히 바라봤다.
/어릴때 만났다고는 하나 기억에는 그다지 없는 자신의 약혼녀라는 이를 기다리는 사내의 상황이야. 맥커터질. 그러니까 정말 뜬금없이 장면이 뚝 끊어지는 그런 느낌이 아니면 누가 들어와도 오케이야. 약혼녀 캐릭터가 온다고 하더라도 약혼을 이어가고 싶어해도 상관없고 끊고 싶어해도 상관없어. 다만 상황극이 이어질 수 있는 핑퐁은 가능했으면 좋겠어.
>>308 그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부드러우면서도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미성이 들렸다. 사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는듯, 반쯤 속삭이는 듯한 음략이었다.
"형님. 저 모건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옅은 훈색이 도는 은발과, 연보라색 눈동자, 단정하면서도 유순해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의 동생인 모건이었다. 모건은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사내를 향해 돌아서서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형님. 곧 비즐롯 공작 영애께서 도착하신다는 건 알지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허락을 기다리려는지, 모건은 맞은 편에 앉는 대신 문 앞에 서서 제 형을 바라봤다.
//글 안에 넣지는 못했지만, 형이 약혼하는 걸 꺼려한다는 걸 알 정도로는(사내가 토로할 수 있을 정도로는) 형이랑 사이가 좋고, 그런 형의 처지를 안타까워 할 만큼 사이가 좋은 동생을 의도하고 써봤어요. 괜찮으시다면 약혼녀가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약혼녀도 제가 굴려도 괜찮을까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으나 곧 들려오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긴장을 풀었다. 자신의 동생의 목소리가 작다고 한들 어떻게 못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닫고 자신에게 말을 꺼내는 동생을 바라보며 사내는 무슨 일로 왔냐는 눈빛을 보였고 이내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의문을 품고 물었다.
"긴히 하고 싶은 말? 그래. 네가 굳이 지금 이렇게 몰래 들어와서 전하는 말이니 뭔가 해야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무슨 말이니?"
곧 제 약혼녀가 도착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방에 몰래 들어와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니 못 들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긴장을 푸는 것도 좋겠다 싶었으나 굳이 지금 이렇게 말을 전하려고 하는 것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긴 시간을 낼 순 없지만 일단 들어와서 앉아서 얘기해보렴."
어찌되었건 자신은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도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 방금 제 동생이 말한 비즐롯 공작 영애를 맞이해야만 했다. 어릴 때 만났다고는 하나 사실 잘 기억도 안 나는 그 약혼녀가 온다는데 자신의 동생과 응접실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긴 시간은 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며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들어올 때 내 얼굴이 이상하진 않았니? 부끄럽게도 방금 전까지 엄청 긴장하고 있었거든. 그 영애가 도착한 줄 알고 말이야."
/그 부분은 너참치가 편한대로 해도 좋을 것 같아! 여긴 자유상황극이고 나는 맥커터나 그런 것이 아니면 얼마든지 괜찮은 편이거든!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둘러본다. 보이는 건 온통 우거진 풀숲과 거대한 나무뿐. 심지어 햇빛도 잘 들지 않아 어둑어둑하다.) 어떡해. 우리 진짜 길 잃은 거 아니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신을 돌아본다.) 아 씨. 반딧불이가 뭐라고 괜히 숲에 들어와서. 그러게 내가 그냥 바다나 보러 가자고 했잖아. (탓하는 말을 하자마자 곧바로 후회한다. 본인도 동조했으면서 이제 와 당신 탓을 하는 건 옳지 않다.) ...... (하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에 입이 꾹 다물린다. 그러면서도 힐끔 당신의 눈치를 본다.)
>>317 (한 발 앞장 서서 걷고 있던 소년은, 옆에서 걷고 있던 아이가 울먹이며 볼멘소리를 내자 잠시 멈추어 섰다.) 점점 어두워지니까 무섭지? 그래도 걱정 마. 지금 숲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건 위험하지만, 이 근처에 숲지기 누나가 지내는 오두막이 있어. 거기로 가면 숲 밖으로 데려다주실 거야.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나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소년은 백팩을 잠시 풀더니, 안에서 초콜릿 에너지 바를 두개 꺼내 하나를 내밀었다.) 자, 먹으면서 가자. 오두막까진 좀 걸어야되니까.
>>318 (당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고개를 숙인다. 화를 내도 되었을 상황에 다독여주니 더욱 미안해진 탓이다.) ...미안. 네 탓이 아닌데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 못 돌아갈까봐 무서워서 그랬나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며 초코바를 받는다. 한손으로 꽉 쥐자 비닐이 부스럭거린다.) 숲에 자주 왔었어? 그 오두막이라는 거. 들어보긴 했는데 실제로 가본적은 없거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탈출구가 제시되었기 때문인지 한결 나아진 표정이다.) 아무튼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정말.
>>319 괜찮아, 불안하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사과해줘서 고맙다. (상대를 향해 씩 웃어보이곤, 다시 앞을 주시한 채로 길을 찾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쯤에 이정표로 해둔 표시가 있을텐데... 혹여라도 보고도 놓칠까 눈에 힘을 주며,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대답한다.) 어, 우리 형 따라서 자주 오곤 해. 어릴 때부터 그 누나랑 셋이서 자주 놀았거든. 그래서 숲에서 길을 잃으면 찾아서 보고 오라고 이정표같은 것도 만들어놨고... 아, 저거야. (가리킨 손끝에는, 오솔길 옆에 서 있는 나무의 가지에 매달린 흰 헝겊이 보인다.) 저 하얀색 보이지? 저게 매달린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그 누나네 오두막이 나와. 저런 표시를 여러 나무에 해뒀으니까, 만약에 혼자 길을 잃어도 저것만 찾으면 돼. 호루라기같은 걸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좋고. 하도 조용하니까 호루라기를 불면 누나가 금방 찾으러 오거든. 사실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혼나는 건 각오해야 해. 한번은 밤까지 헤매다가 불었는데 거의 한시간동안 잔소리들었지 뭐야. (제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줄 수 있길 바라며, 소년은 머쓱한 듯 웃고는 헝겊이 걸린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발 앞장서며 말했다.) 아무튼, 이대로 쭉 걸어가면 도착할거야. 걷다가 힘들면 말해, 잠시 앉아서 쉬어도 되니까.
>>320 뭐.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하거든.(툭툭거리는 말투와 달리 내심 당신과 자신의 그릇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괜히 멋쩍어 초코바의 성분 읽는 척한다.) 어디? 아. (당신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어두운 곳에서 휘날리는 하얀 헝겊은 유달리 눈에 띈다. 마치 구세주처럼.) 하얘서 그런가 튀네. 그럼 저걸 셋이서 다 달아놓은 거야? 아이디어 좋네. 호루라기도 같이 매달려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꼭 쓸데없는 말 한마디 덧붙이는 건 못된 버릇이다. 한걸음 차이로 뒤따르면서도 혹여나 당신을 놓칠까 발을 바삐 움직인다.) 그나저나 뭐 하다가 밤까지 헤맸대. 지금처럼 길 잃기라도 했어?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두려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피어오른다. 호기심. 힘들면 말하라는 말도 제쳐두고 앞선 이야기 다시 화제로 끌어왔다.)
>>321 응, 저거 야광이라 밤엔 더 잘 보인다? 그 누나네 아줌마까지 넷이서 고생 좀 했지. 호루라긴 나도 생각 못했는데 다음에 오면 넉넉히 사다가 보이는 거마다 걸어놔야겠다. 누나가 고생 좀 할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숲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과 호루라기 걸어놓은 놈 누구냐며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뛰쳐나가는 누나의 모습이 연달아 떠올라 볼을 긁적이다, 이내 여상한 투로 질문에 대답한다.) 아, 형하고 담력 시합. 낮에 서로 숨겨둔 보물을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거였는데 내가 무섭다고 호루라기 불어버려서 승패는 못 가리고 사이좋게 그 누나네 아줌마한테 혼났어. (그러다 너무 제 이야기만 했다는 생각에 옆을 보며 묻는다.) 그러고보니, 넌 숲에 들어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322 그게 뭐야. 불쌍한 보물. 혼자 숲에 남겨졌겠네. (키득거리다 처음 들어왔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자연과 가까운 인생은 아니었다. 놀 때는 숲보단 카페나 놀이공원을 다녔더라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잖아. 오늘도 반딧불인지 뭔지 아니었으면 안 왔을걸. 정작 그 반딧불인 코빼기도 못 봤지만 말이야. 하여튼 인터넷 찌라시 믿을 게 못된다니까. (역시 바다를 갔어야 한다며 혀를 찬다. 그러다 문득 인터넷보다 신빙성 높은 당사자가 본인 앞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숲에 자주 들어왔으면 알겠네. 인터넷 글 진짜야? 여기서 반딧불이 본 적 있어?
>>323 혹시 모르지, 오늘 가다가 발견할지. (맞장구치며 같이 쿡쿡 웃는다. ) 그랬구나, 반딧불이까지는 사실이었어도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니까 허탕 치는 경우가 많은데. 응, 몇번 봤지. 주로 형하고 누나네 집에 가던 길에 보거나 셋이서 쏘다닐 때 마주친 거지만. ...아, 누나한테 부탁하면 반딧불이가 많은 곳으로 안내해줄 지도 몰라. 물론 누나가 오늘 한가해야 말이지만. (달리 할 일이 있다고 하면 그냥 얌전히 집에 가야지, 하고 머쓱하게 웃는다. 그렇게 대화하며 걷는 사이, 저만치 오두막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한다. ) 거의 다 와 가네, 저기야.
>>324 그럼 내가 발견하면 가져도 되는 걸로 알게. (앞선 장난스러운 분위기 이어오며 웃는다.) 아, 그래? 완전히 찌라시는 아니었구나. 으으음. 결국 운빨이라는 건가. (있긴 하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보기 어렵다는 것에 아쉬워해야 할지. 앓는 소리를 내다 이어진 당신의 말에 화색이 돈다.) 그래도 직접 찾아내는 것보단 그 언니가 한가할 확률이 더 높겠지. 좋아. 빨리 가보자! (당신이 가리키는 오두막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조그맣던 형체가 점점 커진다. 그러다 도중 힘 빠져 뜀박질 멈추고는 허리 숙여 무릎 부여잡는다.) 아니, 하, 진짜, 가까운, 줄 알았더니, 왜, 멀고 난리......
>>325 아, 잠깐만. 천천히... (만류할 새도 없이, 뛰쳐나가는 아이를 뒤쫓아간다. 머지 않아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며 쓴웃음을 띤 얼굴로 옆에 멈추어선다.) 주변에 나무가 없어서 잘 보여서 그렇지 생각보다 먼 거리야. 힘들면 좀 쉬었다가 가자. (소년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돗자리를 꺼내 편 뒤, 생수병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건넨다. ) 자, 마셔. 목 마를텐데.
>>326 괜찮...진 않네. 응. 쉴래.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기엔 숨도 차고, 다리도 아파 결국 돗자리 위에 앉았다.) 진짜 준비성 철저하다. 가방 무거웠겠는데. 있다 좀 들어줄까? (내심 감탄하며 당신이 건넨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연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자, 너도 마셔. (뚜껑이 열려있는 상태 그대로 당신에게 내민다.)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좀 소풍 온 것 같기도 하고. 돗자리 깔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야~ 집에 가자~ (수업이 다 끝나고 당신의 반에 온 소년은 싱그럽게 웃으며 당신을 찾고 있는듯 했다.) 오 너도 잘가! (이미 이 반의 아이들과도 꽤나 친한 사이인듯 인사를 주고받던 그는 슥 눈치를 보고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종례도 빨리 끝난것 같은데 뭐하고 있어?
>>327 그러자, 배고프면 말해. 도시락도 있으니까. (싱긋 웃어보이고는 배낭에서 제 몫의 물을 꺼내 한모금 넘기고 옆에 앉는다. ) 아, 괜찮아. 어릴 때부터 보통 그만큼 들고 다니거든. 그리고 그 물은 너 계속 마셔. 일부러 두 병 챙겼으니까. (제 손에 들린 물병을 흔들어보이며 대답하고는 마저 물을 마신다.) 그러게, 있을 건 다 있으니 사실상 소풍이 맞긴 하지. (웃으며 대답하다, 문득 궁금해져서 묻는다) 그럼 넌 평소에는 뭘 하고 놀아?
어라, 무슨 일이야? 오늘 불침번 서는 날도 아니잖아. 혹시 무서운 꿈이라도 꾸셨는감? (방글방글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창가에 걸터앉아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피와 시체가 늘비해있는 사이, 교복을 입은 좀비들이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쟨 맛있는 거 먹는 꿈을 꿨나봐. 부럽다.
>>330 선배 외로우실까봐 와봤심더! (그리 튕기고선 옆에 살며시 앉는다. 당신이 내려다보는 쪽에 시선이 갔다가도 다시금 눈을 내리깐다.) 아, 저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잘~ 먹고 있지 않슴까? 아는 사람 보일까 겁납니다... (혀를 내두르더니 콧등에 주름이 새겨진다. 창틀에서 두어 걸음 떨어지나, 더 이상 발소리가 나지 않는걸 듣자하면 여전히 당신 뒤에 서 있는 거라 짐작 가겠다.)
>>328 (재잘재잘 소란스러운 교실 한 구석에 똑 떨어진 섬과 같이 가만히 앉아있는 남학생이 하나.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괜히 바쁜 척 가방이며 서랍을 뒤적인다. 당신이 가까이 오자 한 마디 한다.) ...어, 왔어? (사실 아까부터 네가 온 것을 눈치챘지만. 이제야 안 척, 이제야 고개를 든다.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꽤 반갑다.) 별 거 아냐. 문제집 좀 챙기느라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긴 앞머리 사이로 슬쩍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도 이쪽을 보고 있다면 지금 눈이 마주쳤다.) 또 이상한 데 들르자 할 건 아니지?
청산유수 화술의 달인, 뒷골목에서 잘 알려진 상인인 그는 그 깔끔하던 성격도 당신 앞에서는 한 없이 누그러진다. 당신은 그가 가장 아끼는 고객이며, 당신에 한해서 그는 공짜로 의뢰도 맡아줄 수 있을 테다. 이윤을 추구하는 그에 걸맞지 않게 녹진해진 감정을 안고서 새순이 태양을 우러러보듯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이목구비 눈에 담느라 당신이 하던 말은 반절 정도밖에 못 들었다는것 뒤늦게 눈치챈다.
"미안, 자기야. 다시 한번 말해줄수 있을까?" 꿀이 떨어지듯 흐물텅한 목소리로 작게 노래하듯 되묻는다.
말라죽은 나무 시든 꽃 썩은 바위 짐승 사체 즐비한 숲. 숲이라고도 할 수 없을 모양새다. 척박한 죽음 이 땅에 내리꽂혔으니 되려 황무지란 이름 더 어울린다. 그리고 이 음산한 기운 내뿜는 황무지 횡단하는 수레가 있다. 수레엔 사지 꽁꽁 묶은 새끼 가축들 실려있고 곁에는 어른 대여섯과 아이 하나가 일제히 걸음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다른 어른에게 끌려가고 있다. 그 눈가에 안대 매여있고 두 손은 저 가축마냥 밧줄로 묶어두었다. 아이의 걸음걸이 퍽 위태롭다. 기묘한 일행 한참동안이나 황무지 숲 헤쳐나간다. 이윽고 그들 멈춘 곳은 높다란 절벽 위다. 끝 보이지 않는 험난한 비탈길이 그 아래 있다. 일행이 일제히 멈춘다. 제 묶인 밧줄 잡은 어른 멈춰서자 비척비척 걸어가던 아이의 걸음도 뚝 멎는다. 여정 내내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풍기던 일행 그제서야 바쁘게 움직인다. 수레의 가축들 절벽 앞으로 옮기고 무언지 모를 것 땅에 흩뿌린다. 어른 하나가 아이의 안대 풀어주고 손목 묶은 밧줄도 잘라낸다. 마침내 아이의 시야 훤히 드러난다. 하지만 시커멓게 죽은 두 눈에는 다가올 운명에 대한 공포며 슬픔 따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체념에 가까운 것 엿보일 뿐이다. 준비 끝마친 듯 일행이 각자 자리 잡는다. 가축들 절벽 위에서 안절부절 못해한다. 무리 중 건장한 남성이 수레에서 도축하는 칼 꺼내어든다. 축생들 본능적으로 위기 느끼지만 팔다리 묶여있어 오도가도 못한다. 그리고 송아지들 망아지들 새끼 돼지들 차례로 곧장 비참한 단말마 내뱉으며 죽는다. 선혈 흩뿌려지는 광경 보고도 아이는 전혀 미동 없다. 그 시선 무엇도 없는 허공만 응시할 뿐.
드높고 지고하신 존재시여 일개 하찮은 미물 주제 위대한 분께 말씀 올리는 짓 범하여 몹시 송구하나 이 어린 것들의 목숨 당신 위해 공양하겠사오니 부디 오랜 노여움 거두어주시길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누군가 소리 높여 또박또박 기문 읊음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 발길질로 아이의 몸 밀친다. 거친 압력에 아이 힘없이 고꾸라지며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온갖 가지 덤불 돌멩이 자갈에 연한 살갗 쓸려 생채기 나고 핏방울 맺힌다. 한참을 구르고 넘어지고 다쳐도 아이는 비명 하나 몸부림 하나 않는다. 찰나의 시간 지나고 아이는 어두컴컴한 구릉 밑바닥에 도달한다. 그 몸 무척이나 만신창이다. 그나마 걸쳤던 옷가지도 넝마 꼴이 되어선 허연 맨살 드러나보인다. 아이는 가축 사체더미 위에 웅크린 채 가만 있지만 죽은 것 아니다. 옅은 숨소리 내며 제 아직 살아있음을 명백히 피력하고 있다.
//어떤 인외 존재에게 산제물로 바쳐진 인간이야. 되도록이면 그 제물을 받은 인외 쪽으로 이어줬으면 해 둘이 상호작용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거라 인외가 제물을 잡아먹거나 죽이는 그런 전개는 사양할게~
가축이 죽는 단말마가 울리자 구릉 밑바닥에 있는 이의 두 귀가 움찔했다. 듣기만 해도 귀가 아픈 그 울음소리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것은 거대한 여우였다. 눈처럼 새하얀 꼬리가 총 아홉개. 크기도 크기지만 그 생김새만 해도 절대 평범한 여우는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는 피냄새를 맡으며 그 여우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잠에서 막 깨어나 하품을 막 하니 그 날카로운 이빨이 살벌하게 번쩍였다. 그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가축의 시체더미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이내 그 여우의 눈동자에 비쳤다.
이 가축의 시체더미와 저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 무엇인지 여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바쳐진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꽤 오랫동안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은 항상 동일했다. 여우는 고개를 아래로 내려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귀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듣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를 냈다.
"아이야. 거기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야. 내 너를 보아하니 또 여기에 바쳐진 그 아이로구나. 참으로 딱한 인간들이구나. 나에게 뭔가를 바치고 싶다면 저 가축으로 충분하거늘, 아직 다 크지도 못한 이런 아이를 바쳐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오랜 노여움을 거둬달라고 늘 이야기하나 정작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반복을 하니 너무나 딱하기 짝이 없구나. 내 조만간에 그 인간들이 있는 마을을 멸할까 고민이 되는구나. 허나 그렇게 하면 이렇게 다른 가축 고기를 먹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소나 말, 돼지야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니 바치는 것에 불만은 없었으나 이런 어린 아이까지, 그것도 산채로 바치는 것은 여우에게 있어서 불만이었다. 어찌 자기 동족을, 그것도 이런 어린아이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고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그 인간들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올리던 여우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네 앞으로 꽤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 바쳐졌다. 하지만 내 이 가축들은 모두 내 식사로 잡아먹으나 너 같은 인간은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너는 돌아갈 곳이 이제 없겠구나. 그 전에 온 아이들도 모두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어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는 일이 많았다. 혹은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여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려서 결국 다른 들짐승들의 밥이 된 이도 있었지. 너는 어찌하겠느냐. 아이야."
적어도 너만큼은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여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새하얀 꼬리를 가지런히 땅으로 내려오도록 정리하며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아이의 답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겨울의 마천루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바람은 수백미터 너머 텅 빈 새벽 거리의 육교 위로도 숨결을 남겼다. 으슬으슬해진 공기를 의식한 것일까, 육교 난간에 허리를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검은 코트를 괜시리 손으로 여몄다. 이 장소에 있는 두 존재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동작임을 알면서도.
"[늦지 않게 생명을 거둘 것],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에게 깊이 관여하지 말 것], 그게 우리 규칙이니까."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는 사무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일부러 가장한 딱딱함임은 자명해 보인다. 차갑게 보이려고 해도,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떨림과 불안한 입매는 명백한 감정의 동요를 나타내고 있었다.
"저승사자인 우리가 자꾸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자꾸...... 간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잖아."
의무를 상기시키는 목소리, 하지만 그 행간의 미묘한 뉘앙스는 어쩐지 감정적이다. 어쩌면 질투일까, 부러움일까. 그 이상한 감정의 노이즈 때문에, 그녀의 말은 도무지 설교로 들리지 않는다.
수십 블록 뒤 마천루에서는 여전히 등대의 불빛처럼 도시의 빛이 남아있건만, 검은 코트의 여자는 그저 그 빛을 등지고서, 새벽 주택가의 어둠과 적막만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히- 하고 길게 소리내며 이빨 드러낸 채 웃는다. 저승사자라는 직속에 걸맞게 마냥 해맑고 아이다운 웃음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이름에 걸맞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기는 하다. 아무래도 그녀는 소명 의식과 책임감에 뜻을 두지 않는 인물인 모양이지. (저승차사 또한 '인물'이라 칭할 수 있나? 이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당신의 한탄도 자책을 겸한 질책도 어깨 한 번 으쓱이는 것으로 가벼이 넘겨버린다. 아무렴 어때요, 자존감 높은 언사는 건강한 영혼의 척도이니 일등차사감이라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흐음."
질문의 이유 명쾌히 대답해주지 않음에 그녀가 콧소리를 흘린다. 가늘어진 눈매로 가늠을 해보니, 당신의 미응답이 까닭을 자신도 알지 못 하기 때문인지 숨기는 것인지 혹은 정말로 궁금할 뿐인지를 살핌이다. 자신이 당신을 실력 있고 훌륭한 저승차사라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 말마따나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니. 공적으로 얽혀든다면 말 한 마디로 자신한테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는 계산이다.
"... 뭐, 별 이유가 있어서 도와주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큰 문제가 되지 않겠다는 계산 하에, 그녀는 당신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기로 하였다. 그간의 정이 있는데 과연 나를 함부로 내칠 수 있을까? ... 하는, 신뢰에 기반한 결론이다.
"그냥... 기특하잖아요? 착하고, 배려심 깊고, 사주팔자도 살펴보니 멀쩡히 살아남는다면 분명 이 세상을 더 옳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렇게나 젊은데. 그래서 그냥...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으니까......"
육교 난간에 팔꿈치 괴어 턱을 받친다. 부가 설명을 위하여 자유로운 남은 팔로 이리저리 손짓을 해보다가 이내 그만둔다. 축 늘어진다. 당신이라면 알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흔히 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후배의 동요에 사라졌던 평정이 조금은 되돌아온 것일까, 그녀는 옷깃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서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사수의 흔들림에 힘을 얻다니, 사수로서 실격인가 하는 잡상을 조용히 흘려보내면서.
"그 아이가 아니어도, 세상을 더 괜찮은 곳으로 만들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많아.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이 말은 그녀의 안에서 나오는 말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며 읊는 그 목소리는 아마도, 다른 저승사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사하는 것 치곤,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아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듯, 도전적인 의문을 애써 감춘 그 말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수명이 끝난 생명을 거두는 이유는 그게 옳거나,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 아니야. 몇분만에 잊는구나. [살아있는 존재에게 깊이 관여하지 말 것]."
그 인용의 어색함을 스스로도 느낀 것일까, 그녀는 곧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다시 꺼내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두었다. 손보다 살짝 큰 한 권의 노트를 잡은 채로. 당신의 눈에도 익숙할 그 노트는, 명부다.
"이 세상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것이고, 우리와는 상관없어.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저승사자인 거야. 알잖니."
이윽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서서히, 비스듬히 내려 당신을 마주보았다. 가장된 차가움 아래 불안에 떨리는 눈이 당신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그녀는 다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만두고 말았다. 흘러나오던 문장이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지만, 뒤로 이어졌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거짓말같은 일이 또 있을까. 아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버린 문장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교하자마자 앞치마를 뒤집어 썼다. 꽃집을 하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자주 그래왔는데,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손님맞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일처리도 똑부러진 이 아이가 너무할 정도로 말을 더듬어버렸지. 남몰래 좋아하는 아이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아이는 속으로 오늘따라 엄마도 아빠도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어딜 나간거냐며 투정소리를 내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말실수하면 안 돼, 긴장하지 말자. 좋아하는 걸 들키면 안 돼.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가 바로 짝사랑 아티스트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태연하고 빙긋 휘어진 눈매도 화사하니 아까 전 말 더듬은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기만 하다.
모른 체 해줘야 했을까? 그러나 말은 이미 튀어나가 버린 뒤였다. 어찌나 놀랐는 지 말을 버벅거리기까지 하는 꽃집 점원이자 같은 반 친구를 보며, 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뭐 청소년 유해업소같은 것만 아니면 아르바이트하는 걸 딱히 잡지는 않으니 아는 체 정도는 해도 상관없...겠지? 그래야 할텐데. 뭉게뭉게 떠오르는 기우를 애써 떨쳐낼 찰나,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 놀라는 바람에 잠시 뒷전이 되었던 제 용건이 생각나, 그는 명랑한 투로 대답했다.
"아, 꽃다발 좀 사려구. 혹시...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 있어?"
찾는 꽃을 밝히는 진의 목소리는 점차 자신없이 기어들어갔다. 생소한 종이라고 알고 있는데... 과연 있을까? 학교 앞 꽃집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유명한 꽃들이 많을 것 같단 말이지. 이것도 편견이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반 친구가 난처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진은 씩 웃어보이며 덧붙였다.
"없으면 다른 파란색 계열 꽃 예쁜 거 추천해주라! 기왕이면 꽃말도 좀 괜찮은 거 있을까? ...아, 최애 줄 건데, 파란색 꽃 좋아한댔거든."
...뭐, 걔가 최애 바이올린 주자는 맞으니까 상관 없겠지. 공연 응원 선물이라는 대외적인 목적에도 맞고. 꽃말이라고 해도 목적을 안 알려주면 추천하기 애매발 텐데, 제법 완벽한 핑계였어. 내가 자연스럽게 말했는지가 문제긴 하지만. 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어색했어도 적당히 넘어가주길 기도하며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347 자신의 손에 닿은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져 그녀는 명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난간에서 허리를 떨어뜨리고 몸을 아래로 숙이면, 어렵지 않게 육교 위로 떨어진 명부에 손이 닿지만, 어쩐지, 겨울바람에 뻣뻣해진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 것만 같아 그녀는 멍하니 그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지만, 생각이 있기는 하구나."
순 멋대로 행동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언어가 되기 직전의 구체화된 생각이 입 속을 돌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멋대로 동경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만들었다. 어설픈 비유이지만, 선을 따라 걸어온 우등생이 자유롭게 사는 낙제생을 자꾸 훔쳐보듯이, 이 실없는 후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더 그 속내를 엿볼수록 오히려 씁쓸함만 더해지는 것 같았다.
"때가 되지 않은 생명을 거둘 생각은 없어. 네가 시간에 맞춘다고 말했으니, 내가 끼어드는 건 월권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사수인 후배의 방만한 일처리를 교정하기 위해 개입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원래 그러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만 빼면, 그녀의 말은 분명 원론이었다. 그 원론을 지키는 것이, 그녀로서는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니? 여전히 네가 늘어놓는 변명들,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추악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 아이의 선성을 믿어서 다가갔는 말을 오롯이 믿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 아이가 사람을 구할 사주를 타고난 게 아니었더라도, 너는 그 아이의 운명에 개입했으려나?"
같은 반 친구 이름은 보통 다 기억하겠지, 그치? 그러니까 이름 한 번 불렸다고 들뜨면 안 돼! 아이는 한 때는 제 이름이 투박하다고 생각했었다. 목씨 성에, 연꽃 연 자를 쓴 단 두 음절짜리 이름 소리가 입 안에서 구르는 느낌이 별로였다. 꽃집 아이에게 목련이란 이름을 지은 것도 장난스럽고, 그러니 이름 불린다고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아이 귀에 그렇게 달가운 단어는 처음인 것만 같았다. 그탓에 네 이름도 한 번 입에 담으면서 웃어버리는 인사가 환히 반갑다. 이렇게 손까지 흔들면서 인사하지 않아.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
꽃 이름을 듣자마자 아이 표정이 난처해진다. 이름부터 보라, 히말라야가 붙었다. 히말라야를 원산지로 하는 꽃이 국내에서 나기 쉬울 리가 없다. 구매처가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만 구하기 까탈스러운 건 같아, 꽃다발을 구한다는 건 당장 오늘 내일 선물을 한다는 뜻일텐데 구할 시간이 촉박했다. 좋아하는 아이를 실망시키는 일은 어떤 방향으로도 싫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네가 먼저 다른 꽃도 괜찮다 해주어서 참 다행이다.
"네! 안쪽에서 금방 찾아올게요."
아이는 바로 가게의 안쪽으로 향했다. 딱히 멀어지진 않아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는 훤히 보였다. 바로 앞에서 좀 멀어진답시고 말을 남기더니, 손에는 속속들이 꽃이 만개한다. 장미, 튤립, 수국, 카네이션, 한 송이로 모자르면 두 송이, 한 줄기도 쥐니 손에 그러모아진 꽃들은 푸른 다발이다. 다른 한 손에는 델피니움, 옥시, 용담까지. 그렇게 푸름을 두 손 가득 모아오고서 종알종알 설명을 늘어놓는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사랑의 맹세,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영원한 행복, 꽃과 순서대로 맞추어 보여주더니 이제는 다른 손 차례다. 냉정, 날카로움, 당신이 힘들 때 나는 사랑을 느껴요. 왜 굳이 두 손으로 나누었나, 보기에는 예쁘지만 꽃말이 좋지 않은 꽃들이었지.
"마음에 드는 꽃이 있을까요? 꼭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 만들어줄게!"
왔다갔다 오가는 말투 속, 마음은 오가지 않아서 그러모은 꽃들을 널 보고 핀 듯이 잘 쥐고 있다.
>>351 아아, 역시 있을리가. 난감하게 할 뻔 했네. 오늘은 급하니 다른 파란 꽃으로 하고, 히말라야 푸른 양귀비는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말이지. 그럼 오늘은 히말라야의 히 자도 꺼내지 않고 있다가 생일날 놀래켜버릴까? 아, 꼭 생화가 아니더라도 원데이 클래스같은 데서 다른 걸로 비슷하게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지도... 이런 저런 궁리에 잠겨있자니, 꽃을 가지러 안쪽으로 갔던 연이 양 손 가득 다양한 푸른색 꽃들을 들고 돌아와서는 하나씩 설명해주었다. 엄청 능숙하네, 하루이틀 일해본 게 아닌가봐. 학기중에 알바하려면 빡셀 텐데 대단하네. 감탄도 잠시, 진은 설명에 집중하려는데, 장미와 튤립의 꽃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진은 괜히 뜨끔하는 마음에 머리카락 속으로 홧홧해지려는 귀를 감추며, 간간히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렇구나. 다 예뻐서 고르기 힘들긴 하다. 근데 카네이션이 파란색인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신기하네."
일단 꽃말이 좋지 않은 건 패스. 고백성 꽃말도... 곤란하고. 중요한 날에 고백 공격을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수국 아니면 카네이션이네. 둘 다 들어가도 예쁠 것 같은데... 모처럼이니까 지르지, 뭐. 당분간 비자발적 다이어트를 하게 될 것을 예감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진은 고민하느라 진지해진 얼굴을 풀고 도로 서글서글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