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과 가까운 위치, 근거리에 온통 새까만 건물이 주변 풍경에 녹아들지 못한 채로 우두커니 존재하고 있었다. 초창기 건물을 지은 인물이 대체 무슨 정신머리를 가지고 만들었는지 궁금할만큼 검은색으로 덮혀있는 건물은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불빛이나, 연결되어 있는 어둑한 가로등이 아니라면 그 곳에 존재하는지도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 건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지면에 내려앉는 어둠과 어울리는 을씨년한 건물.
그게 웃기게도 망자들이 건너는 강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에서 유일무이하게 규칙이 존재하고 가장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중앙을 차지하고 앉은 하멜가문이 기거하는 건물이라는 것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건물의 중간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이 그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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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새까만 건물 외관과 다르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은 하얗기 짝이 없었다. 자칫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새하얀 방. 최소한으로 놓여있는 가구들은 방의 주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클래식하다면 클래식하고 오래되었다면 지나치게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는 가구들 가운데 열린 창문을 마주보고 놓인 티테이블과 1인용 소파 두개만이 주변 가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과 스타일인데 아마도 이것만이 방주인의 취향일 것이다.
방주인, 탄야 하멜은 1인용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열어젖혀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은백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타이밍에 맞춰 점박 무늬가 있는 귀와 길고 북슬북슬한 꼬리가 천천히 움직인다. 얼마나 이 소파에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티테이블에 놓여있는 유리 재떨이에 담겨있는 꽁초의 갯수, 그 아래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와인병의 갯수를 가늠해보면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의 제지 一 아니, 부탁에 의해 최소한의 외출을 제외하면 그는 계속 자신의 방 안에 머물렀다. 과보호를 하고 있단 걸 인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도 형제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제 스스로 숨을 끊을 자신이 없다는 것만이 형제들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일테지.
쥐고 있는 담배 끝에서 떨어진 재가 바닥을 더럽힌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은청의 시선이 그것을 짚었다가 무심하게 열린 창문 옆 벽에 걸린 작자미상의 그림으로 향했다.
아침에 올리다고 했던 선레 늦새벽에 올려버리기(?) 답레는 늘 말하듯 천천히 줘. 저런 분위기의 방으로 괜찮나?🤔 암튼 저기에 클래식한 카펫까지 덩그러니 깔려있는데 아마 바닥은 평범한 느낌? 대리석은 아닐텐데. 흠🤔 최소한의 가구라는 건, 침대 옷장 서랍장 같은 풀옵션 오피스텔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정도인데 미국 브이로그에서 볼 수 있는 집 내부라고 설명할게.
카리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골목을 나아간다. 평소의 위풍당당한 발걸음과는 다른, 그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어둠과 그림자에 숨어 중앙을 향해 나아간다. 오늘은 최소한으로 눈에 띄는게 중요했다. 아예 누군가의 눈에 안 띄는 것이 최고지만, 그것까진 그녀의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 어디 보자... 음, 이대로만 가면 되겠네. "
그림자 속에서 낡은 종이 한장을 꺼내 읽은 카리나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리곤, 주머니에서 검은 두건을 꺼내 입가를 가린다. 매고 있던 낡은 검은색 가방을 고쳐 맨 카리나는 살금살금 이질감이 강한 중앙의 건물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담벼락 주변을 오가며 순찰을 돌고 있는 수인들을 발견하곤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느낀 카리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5분, 10분,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체 지켜보던 카리나는 교대시간인지 자리가 비워지는 것을 확인하곤 잽싸게 담벼락을 향해 달려간다. 펄쩍 뛰어 매달린 카리나는 한번 힘을 팍 주더니 능숙하게 위로 올라가 반대편으로 몸을 던진다. 정돈된 정원의 풀 위로 몸을 던진 덕분에 그다지 아프지 않게 내려온 카리나는 엎드린 체로 감시의 시선을 피해서 움직인다. 중간에 한번 걸릴 뻔한 것을 빼면 무난하게 목적지 바로 아래에 도착한 여자는 제이루중요한 것을 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 할 수 있다, 카리나. 뒤져도 내 선택이다. "
자신을 다독이듯 중얼거린 카리나는 홀로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올려다버곤 벽을 타기 위해 다가선다. 평범한 건물이었다면 밟을 곳이나 잡을 곳이딱히 없어 힘들었겠지만, 이런 곳엔 아이러니하게 그럴만한 곳이 어느정도 있었기에 조금 느리긴 하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 크흐... 힘들어 뒈질 것 같네 "
3분의 2가량 올라왔을 때에, 정갈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아주 조금 후회가 몰려오긴 했지만, 카리나는 다시 맘을 다 잡고 목적지의 테라스를 덥썩 잡는다.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테라스 난간을 잡고 올라선 카리나는 테라스 안쪽으로 몸을 던진다.
" 하아..하아... 선생님이 하도 안 와서 찾아왔어.. 흐흐.. "
땀범벅이 된 얼굴로 마침 쇼파에 앉아있던 탄야를 발견한 카리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숨도 고르지 않고 말을 건낸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가방에서 그림책을 꺼내보인다.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것에 무슨 의미가?🤔 답레는 천천히 써줄게. 내가 새벽에 퇴근하고 지갑을 분실하는 바람에 멘탈이 날아가서 잠을 제대로 못잤거든....ㅋㅋㅋ 분실신고는 다했으니까 걱정마() 아무튼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카리나에게서 한국인 오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이대로 숨쉬는 것을 관두면 열망을 이룰 수 있을까. 열어둔 창문으로 뛰어내린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까. 고개를 기울여서 테이블 위에 놓은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탄야의 머리카락이 기울인 방향으로 흘러내렸다. 무기력하게 한숨과 닮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그는 의미없이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를 문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이미 해버렸겠지. 스스로를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지적한다. 지독하게 단 바닐라향과 와인에 담긴 알콜내음이 방안을 가득 메우다 못해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머리가 아플 만큼 지독했다.
잔에 아주 조금 담겨있는 와인을 삼켜낸 뒤, 그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했다. 자신의 방이었으나 탄야는 즐겨입는 평상복보다 노출이 덜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그래도 그 어깨와 뒷목을 드러내고 있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창문을 이용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는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소파에 푹 파묻었을 것이다. 감정 기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은청의 시선이 당신의 모습을 살피다가 곧 가늘게 변한다.
" 너 一 "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듯이 그에게 당신이라는 존재는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 감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가늘게 접으며 뜨고 있던 은청의 시선을 감고 탄야는 잠깐 담배를 쥐고 있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누구든 말을 잃기 마련이듯 지금의 그도 할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 무모한건지, 바보인건지. " 라는 말을 무감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당신에게 접근했다. 지독하게 달디단 바닐라향이 짙었을 것이다.
" 나는 당당하게 찾아오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아니었나봐? "
그림책을 꺼낸 당신의 팔꿈치 근처에 손을 올리고 끌어당기며 담배를 쥐고 있는 다른 손으로는 당신의 뒤로 뻗어 창문을 닫느냐고 당신과 그의 거리는 꽤 가까웠다. 질책도 하지 않고 그저 감정기복이 적은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탄야의 귀가 닫혀있는 방문 쪽을 향해 젖혀졌다가 되돌아온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조용한 은청의 시선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거침없는 성격인 카리나로서는 대놓고 정문으로 방문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지이지만 이번에는 그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은 오로지 탄야 때문이었다. 지난번 마야와 부딪친 후의 탄야의 기분을 조금은 느꼈던 카리나는 마야와의 접촉은 최소한으로 하려던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을 탄야가 반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단순한 카리나의 생각 속에선 이 방법이 최적의 방법이었기에 이렇게 벽을 타고 올라와 탄야의 방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 당당하게 찾아오면 그, 마..마...아무튼 네 동생이 또 발작할 것 같아서 몰래 왔지. 아마 어지간한 사람들은 못 봤을걸? "
갑갑한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검정색 복면을 풀어 손에 쥔 체,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탄야에게 환하게 웃어보인다. 방주인은 속이 뒤집어지고 어안이 벙벙할텐데, 무엇이 그리 태평한지 카리나의 새하얀 이가 그 자태를 탄야에게 뽐내고 있었다.
" 들어올 떄 표정보니까 많이 무료한 것 같던데, 잘 온 거 같네. 그동안 뭐 하느라 안 왔어? "
카리나는 탄야의 어꺠를 토닥여주며 키득거리곤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탄야의 얼굴을 보니 생각한 것보다 더 반가운 모양이었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감정이 적어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신을 지나쳐서 창문을 닫은 후에야 그 무감한 표정을 지은 채로 " 미야. " 하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형제의 이름을 정정해줄 뿐이다.
" 그건 발작이 아니라 걱정이라고 부르는거야. "
일정한 음정과 일정한 톤으로 말을 덧붙혔다. 환한 웃음을 마주하는 사람이라 하기에, 여전히 탄야의 표정은 무뚝뚝하다. 닫혀있는 문 밖의 기척을 살피는 듯 그의 한쪽 귀가 다시금 움직였다. 당신의 말을 듣는 그의 감상은 한가지였다. 뻔뻔하지. 그는 당신의 몸에 대고 있던 자신의 손을 흘려내듯 떨어트리며 당신에게서 거리를 두려다가 당신의 행동에 은청의 시선을 가늘게 접고 바라봤을 것이다.
" 내표정은 항상 그러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고. 一 그러게. "
1인용 소파로 되돌아가는 탄야의 긴 꼬리가 낮은 위치에서 흔들흔들 움직였다. 탄야는 소파에 몸을 가라앉힌 뒤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끄며 비스듬히 턱을 받치고 당신에게 시선을 준다. 당신을 향한 감상에는 변함이 없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이지. 고작 그런 이유로 저 벽을 타고 중앙까지 숨어들다니, 뻔뻔하고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 그러게. " 하고 탄야는 한박자 느릿하게 단어를 뱉어냈다.
" 무모한 짓을 했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언제가 됐던 만났을텐데. "
새 담배를 끄집어낸 손으로 탄야가 당신을 향해 맞은편 소파로 손짓을 해보였다.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태도였지만 여유로운 지배층의 모습이 언뜻 드러났다.
말을 덧붙이는 탄야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쪽까지 데리러 와서 그런거면 모르겠는데, 제 집 앞에서 그런 걸 보니 충분히 발작이 맞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이유까진 딱히 덧붙이지 않고 새하얀 이를 환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 원래 인생이 다 그런거야. 다 계획처럼 되면 삶이라는게 지겨울거란 말이지. 가끔은 위험한 짓도 해줘야 한다고. 나야 사실 자신 있었으니까 상관없었지만. "
물론 벽을 중간쯤 올랐을 무렵엔, 걸리는게 아닐까, 괜히 이리로 왔나 하는 후회가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카리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탄야는 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못 봤으니까 자신만 아는 사실로 하기로 했다. 돌아갈 때는 탄야의 도움을 받을까 하는 갈등은 남아있었지만.
" 그리고 최근에는 네가 와줬으니까 이렇게 내가 오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
탄야가 손짓한 쇼파에 털썩 앉은 카리나는 생각 이상으로 폭신한 그 감각에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처엄 푹신함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만끽한 카리나는 턱을 괴고 말한다.
" 확실히 이런 곳에 있으니 달라보이네. 신기하긴 하다. 그래서 동생이 못 나오게 한거야? "
당신에게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마치 혈육이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한 뉘앙스가 미묘하다. 확실히 타인의 눈으로 보면 발작으로 보이나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탄야는 눈을 가늘게 접어 뜨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 그게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게다가 그 무모한 짓을 하는 너의 자신감에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
요약하자면, 무모한 짓을 한 주제에 뻔뻔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나무라는 말이지만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탄야 하멜이다보니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담담하기 짝이 없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다보니 더욱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가 내리며 그는 담배에 불을 붙히고 연기를 길게 마셨다. 이어지는 당신의 행동과 말에 그가 한숨처럼 짧게 웃는다.
변함없이 무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는 소파 팔걸이에 담배를 쥔 팔을 늘어트린 채, 은청의 시선을 잠깐 감고 말을 흘렸다.
" 보통 그걸 찾아온다고 하질 않는데. "
무력한 웃음과 몹시 닮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탄야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와인잔을 하나 더 꺼내오려는 생각인 듯 했다. "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는걸. " 하고, 들릴듯말듯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탄야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은청의 시선이 벽에 걸려있는 서너점의 이름없는 화가의 그림에 박혔다가 느릿히 당신에게 향했다.
" 동생이 왜 못나오게 했냐는 질문이야, 아니면 동생이 못나오게 했냐는 확인이야? 一뭐.. 어떤 의도던지, 내 대답은 비슷할테지만. "
" 뭐, 가정사는 어쩔 수 없는거지만.. 갑자기 초면부터 그렇게 막 들이대니까 부담스러웠단 말이야. "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굳이 탄야의 입에서 가정사를 캐묻고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정도로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카리나는 캐묻기 보다는 본인이 직접 말할 마음이 들면 이야기를 듣는 쪽이 더 맞았다. 애초에 저 탄야를 대화로 설득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카리나는 본인의 머리와 말재주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안되는 건 안되는거니까.
" 자신감 하나로 먹고 사는데 이정도는 기본이지. "
나무라는 탄야의 말에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아마도 지금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할리가 ㅇ벗었으니까. 물론 한쪽 눈썹이 치켜올려질 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긴 했지만.
" 뭐어, 뭐어... 어느쪽이 맞냐고 말하자면 둘 다 비슷하긴 한데.. 이렇게 된 김에 다 말해주면 좋겠다. 아, 마실래. 안그래도 벽 타고 오느라 목 말랐어. "
카리나는 늘어지듯 쇼파에 앉아선 한숨 돌리더니 와인잔을 꺼내러 가는 탄야의 말에 웅얼웅얼 대꾸한다. 벽을 타고 올라오는 일과 긴장하고 있던 몸이 슬슬 풀어지는 모양이었다. 묶고 있던 머리도 풀고 싶은 듯 했지만 묶을 때 걸렸던 시간을 생각하니 머리끈으로 향하던 손을 도로 내려선 뺨을 만지작거린다.
" 그래도 이렇게 너 찾아와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치? 이거 완전 고마워 해야돼. "
키득키득, 카리나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개구쟁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작태였지만, 어찌보면 낯선 탄야의 방에서도 평소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단조로운 뉘앙스로 중얼거려보였다. 그걸 가정사에서 시작됐다고 말해야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그 애의 성격에서 시작됐다고 해야할지 짐작할 수 없다. 아니 사실은 짐작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살아숨쉬는 모든 것과 쥐고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 형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 은청의 시선에는 그 어떤 감흥도 비춰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감흥없는 은청의 시선이 당신에게 잠시 머무르다가 대답없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와 비슷한 속도로 걸음을 옮긴다. " 둘다...인가. " 하고 탄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투명한 와인잔과 새로운 와인을 꺼내들었을 것이다.
" 하멜 가문의 벽에 타고 오를만한 지지대가 있었나.. 어쨌든, 어느쪽이든 대답은 똑같아. 아마 一 내가 바라는 것 때문이겠지.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그 이유일테지만. "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생각하는 바램. 다음날에는 눈 뜨지 않는 것. 스스로 숨을 끊어낼 용기는 없는 주제에 열망하고 집요하게 바라고 있는 것. 당신도 알고 있는 그의 소망이 그의 형제로 하여금 그를 과보호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손에 든 새로운 와인잔과 와인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탄야는 당신이 만지작거렸던 머리를 묶은 머리끈에 손가락을 걸었을 것이다.
" 나는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불청객처럼 굴건지. "
당신의 웃음에 무기력한 웃음이 섞였다. 당신이 제지하지 않는다면 그는 머리끈에 걸고 있는 손을 움직여서 머리끈을 풀어냈을 것이다.
" 꽤 어울리지만, 이쪽이 자연스러워서 더 낫다고 생각해. "
머리끈을 당신의 앞에 놓아둔 뒤 탄야는 도로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로 걸어가서 새로운 와인을 따서 당신과 자신의 와인잔에 따른다.
카리나는 탄야의 말에 키득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한다. 머리끈을 풀어내는 손도 막지 않고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 탄야의 삶 속에서 언제나 불청객이란 의미를 지닌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쁜 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탄야의 불청객이란 단어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웃어보일 뿐이었다. 물론 자기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 크흐흐, 나도 푼게 편하긴 한데. 몰래 숨어서 다니려면 묶는게 편하거든. "
이거 풀면 강아지 꼬리 같아서 눈에 잘 띈단 말이야. 카리나는 장난스럽게 풀린 머리를 흔들어서 살랑이는 것처럼 보이게 해보이곤 작게 웃으며 말한다. 아마 밖이었다면 크게 웃었을지도 모르지만, 숨어든 입장이란 건 잘 알고 있는지 소리 죽여 웃는 카리나였다. 그정도 교양은 있는 여자였다. 아무튼 탄야가 놓아주고 간 와인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도수 센 술은 아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 나 안 왔으면 뭐 하려고 했어? 잠자기? "
카리나는 있는 것이 별로 없는 탄야의 방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턱을 괴곤 궁금한 듯 묻는다. 눈 앞의 여자는 자신을 만나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무엇을 할까. 언제부터인가 탄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까지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탄야에 대해 물을 뿐이었다.
" 불청객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닥치고, 그걸 알고 있는 주제에 태도는 변함이 없어서 더 뻔뻔한 불청객. "
감흥도,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명확한 사실만을 짚어내듯 탄야의 목소리는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불청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내거나 거부의 태도를 명확하게 취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부하고 밀어내는 행동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 좋은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몇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보면 어느쪽인지 인지하기 힘들다. 탄야또한 그런 타입이었다.
" 여기서 나갈 때는 제대로 문을 통해서 나갈거니까 그냥 그대로 있어. 하멜가문의 벽을 타고 오를 정도로 겁없이 행동해놓고 그런 태도를 하는 건 꽤 웃긴데. "
와인에 곁들일 간단한 스낵류가 없는 건 그저 그의 버릇이다. 애초에 그는 취할 정도로 마시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제 와인잔을 들어 내용물을 비워내고 잔을 채우면서 그는 중얼거리고 다시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대고 당신의 말에 가늘게 은청의 시선을 접어뜨며 가만히 마주 바라봤을 것이다.
" 그림감상? "
티테이블에 와인잔이 부드럽게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짧게 울려퍼지고 당신을 보던 은청의 시선이 멀고 먼 어느곳을 짚어내듯 방향을 바꿔냈다.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바 없다. 그는 항상 그랬다. 그에게서 당신에 대해 묻는 질문은 열손가락에 꼽는 정도였지만, 당신이 그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거부감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가 대답을 피하는 건 가정사와 스스로가 집착하는 열망에 대한 것 뿐.
" 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나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만큼 자유로운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
이미 삼한사온으로 천천히 다가와줬다고 우기지 않을까😶 짐작일 뿐이지만 말이지. 이런 날씨에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 부분은 칼바람 냉기에 버석해지고. 여름만큼 겨울도 싫어. 작년에 비해 지나치게 대조되는 날씨라 할말을 잃었습니다. 한반도 날씨의 변덕이란. 내일 또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던데😒
탄야의 말에, 그저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카리나의 삶에서 초대 받은 적이 몇번이나 있던가. 그녀는 모르겠지만 태어났을 때마저도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나 다름없었는 것을. 그래서인지 불청객 취급에도 카리나의 반응은 그저 탄야의 투덜거림(?)이 즐거운 듯한 모양새였다.
"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있잖아. 그런거지. 푸흐, 숨어든 사람의 위치 정도는 잘 아니까. "
탄야의 가늘어진 눈에 뺨을 긁적이며 쓴 미소를 짓는다. 대담하게 숨어들긴 했지만 딱히 대책이나 생각해둔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대성공해서 탄야의 앞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지 않은가. 좋은게 좋은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은 카리나였다. 물론 그 꼴을 보고 있는 탄야는 탐탁치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 잠깐잠깐, 애초에 여긴 들어오는 것도 자유로운 곳은 아니잖아. "
카리나는 탄야의 말에 고칠 부분이 있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한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와인잔을 단번에 비우더니 몸을 일으켜선 탄야에게 다가간다.
답을 쓰기 어렵다보다는 이놈의 설표가 카리나에게 관심(이라하고 호감도라고 한다)을 가지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애먹고 있어. 이정도로 호감도가 관심이 안잡히는 애는 처음인듯. 탄야가 좀 템포가 늦되먹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감정기복이 적어서 인지..😶 아무튼 써봐야지... (대략 자아끼리 머리채 붙들고 싸우는 짤)
" 알고 있으면서 계속 그러는 건 악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네가 그러는 거에 대해 내가 이래라 저래라할 입장은 못되니까 네 편한대로 해. "
저렇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왜 저 태도는 변하지 않는지. 잠깐 생각하던 탄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어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꼴 하나 없는데다가 제멋대로 군다고 생각하기 좋은 저 마이페이스적인 면이 자신으로 하여금 당신을 불청객이라고 판단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불이 붙은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그는 여전히 은청의 시선을 가늘게 접어뜨고 있었다. 불청객이라는 평가에 변함은 없는데 자신은 어째서 당신을 내치지 못하고 있을까. 당신의 말에 그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침묵으로 당신의 말에 대한 그정을 표한 걸지도 모른다. 그 속내는 모르지만. " 내 집이야, 여긴. " 하고, 언젠가 당신이 들어봤을지도 모르는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대꾸했다.
" 외부인이 들어오는 게 어려울 뿐이지, 내부인에게는 너그러운 편이고. "
이어지는 그의 말은 무감정하리만치 단조로웠다. 발버둥을 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 들일 힘마저 모두 소진해버린 이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당신을 가만히 응시했을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라고 강요받는 이름이 없는 이가 할법한 이야기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당신을 바라보던 탄야가 한숨처럼 짧고 무기력하게 웃는다.
" 도와줘? "
네가 나를? 담담하게 단어를 중얼거리며 무기력한 웃음을 짧게 흘려낸 그가 느릿하게 소파에서 자세를 바꿨다. 당신을 바라보는 그 은청의 시선이 가늘었다. 그 시선에는 늘 같은 것이 깃들어있었을 것이다. 분명 당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감정과 그 외의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당신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죽지 못하고 겨우 살아가고 있는 반시체?
" ...참 쉽게도 이야기하는구나. "
그는 다시 무기력한 사람마냥 웃었다. 짧은 웃음이 잦아들 때 담배를 재떨이에 걸쳐두면서 그가 팔을 뻗었고, 피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팔꿈치를 쥐어 앉아있는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그의 감흥없이 빛나던 은청의 시선이 일순 사납게 바뀌었다.
" 처음 만났을 때도 말했을텐데. "
탄야는 잠깐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 내가 가장 열망하고 있는 것을 주지 못할거면 내버려두라고. " 하고 그가 끊었던 말을 잇는다. 사납던 시선은 특유의 순한 눈매로 인해 금새 기세가 시들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긋지긋하고 지쳐있는 기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