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이니 분노니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들.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시키려 해보아도 와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계속 도망치라고 했던 이유는 그 죄 없는 세븐스에 포함되기 때문이었던가. 제 정체를 앎에도 지켜준다고 말하며 정원을 꾸리는 모습을 어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이대로 폭탄이 터질 때까지 대화만 하면서 있을 수는 없다.
에일린도 수 많은 전투를 치뤘지만 결국 경험에서 이스마엘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사선을 넘나들며 시종일관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훈련을 하는 0특수부대와는 달리 프리덤은 결국 비세븐스와 가디언즈 일반 대원들을 상대로 싸웠으니까.
에일린이 마치 자신의 등뒤로 올 것을 예측하듯 역으로 자신의 공격을 잡고 반격을 하자 에일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었지만 그녀의 공격이 스치고 말았다. 그녀는 이스마엘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공격을 할 뿐이었다. 이스마엘의 말에 동의를 한다는 자신만의 표현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에델바이스가 추구하는 평화로운 세상, 이상적인 세상은 그녀와 프리덤 대원들에겐 지옥과도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에델바이스가 성공하리라 믿으며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죽을자리를 찾기 위해, 머지 않을 지옥을 피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 대신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싸웠다.
이스마엘의 공격을 맞은 에일린은 검은 안개로 변해 이스마엘의 머리 위에서 검은 가시를 쏟아내었다.
어차피 이 논의는 평행선이다. 쉽게쉽게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질 않았겠지. 복수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이가 까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 무던한 듯했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복수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어? 나도, 당신도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겁니까. 복수 없이 살아가?"
파괴된 기계뱀이 재조립되는 걸 보면서 너는 철우산을 내려놓았다.
"그들에겐 그 삶 자체가 복수인데, 그따위로 이야기해?"
감히. 너는 공중에서 모조 보검을 소환해 쥐었다. 실전성과는 거리가 먼, 이제는 예장용으로밖에 쓰이지 않는 구식의 형태. 끝이 살짝 굽은 그 기병도를 쥐어 세운 너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동물들 중 기계 곰을 향해 기병도를 내찔렀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 끝은 곰의 목 부분, 취약한 결합부를 노리고 있었다.
"역사를 돌아봤다면 알겠지, 복수가 끊기는 일 따위는 없다는 걸."
당신이 그렇게 끔찍하게 소중히 여기는 복수로.
"당신이 이야기한 사람들이!"
눈 먼 복수에 찔려 통곡하는 걸, 가만 둘 것 같아? 목소리는 점차 가라앉아 조금 작아졌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 정도는 한없이 무딘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곰에게 감행한 공격은 확실히 곰을 끝낼 만했다. 그 감각을 느끼며 검을 뽑아낸 너는 검을 한 번 휘둘러 기계로부터 튄 기름을 털어내고 다시 바로세웠다.
"강함이라고 했었지, 솔직히 말하건데 나보다 나약한 사람은 에델바이스에는 없어."
어디 쓰러트려 봐. 새까만 눈이 검 너머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완전방어 성공! 멧돼지의 공격력(500)보다 높은 방어값(942)으로 피해 없음! 반격 개시! 기계 곰에게 공격(552)!
기계동물들이 단체로 나타나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기계들처럼 냉정했다. 기계곰 셋이 달려들어도 자세를 유지하지만, 그것들이 허구임을 알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긴장은 하고 있었기에. 그 와중에 서로 아웅대는 자매의 목소리를 듣고 짧게 웃었다.
"애들은 애들이네- 참 귀엽기도 해라. 눈에 보였으면 그 혀부터 마비시켜 버릴 텐데. 종알종알 시끄럽잖니."
그녀가 가디언즈와 다를게 무어냐는 말에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다 같은 인간이라고. 원하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건 인간의 본능이야. 그리고 난 영웅은 아니라서."
영웅이 될 마음도 없고. 중얼거리며 독액을 조종하던 와중, 처음으로 자매의 비명이 들렸다. 오호라. 그 반원이 자매를 지키는 방공호였나. 주변으로 더미가 생겨도 그녀는 아랑곳않고 처음 노렸던 부분만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다보니 도시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주변엔 쓰러진 사람들 투성이였다.
"이쪽이 더 시끄럽나."
시민들의 아우성에도 그녀는 시끄럽다는 반응으로 일관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사람들 중에 자매의 모습을 찾자 기쁜 듯이 싱긋 미소지었다.
"어머.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팔팔하더니. 많이 아픈가보네- 응? 그렇게 아파?"
바닥에서 손을 떼고 일어선 그녀는 고통스러워 하는 자매를 보며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어투로 재잘거렸다. 살려달라며, 폭탄의 위치를 말하겠다는 자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공중으로 독액의 구체를 만들어 띄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일렁거리는 독액 구체를 자매의 위로 밀어보내고, 딱 쏟아지기 좋은 위치에 다다르자 손짓을 딱!
무슨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 말이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더라면, 바로 가시를 드러내고 본색을 드러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당신들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의 이상향을 이용하지 말라고 소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혹은 웃었거나, 전투 자체를 즐기는 상황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이스마엘은 최대한 평정심을 찾고자 했다.
차라리 말이 없는 것이 나았다. 지금 이 상황은 이스마엘에게 있어 가장 적합한 상황이기도 했다.
검은 가시가 쏟아질 적, 무장을 이용해 최대한 막아보고자 했으나 어깨를 비롯한 몸에 강하게 스쳐 피가 떨어졌다. 이를 악물던 이스마엘이 다시금 손에 휘감긴 사슬을 뻗었다. 끝 부분이 인위적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지더니 날서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낚아채듯 하며 그대로 땅에 처박으려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느릿하게 한 번 고개를 주억거려 짤막이 대답한 후, 상대방의 대답을 빠짐없이 귀담아 들었다. 열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상대를 가만 응시할 뿐이다. 자욱한 연기를 들이마시면서도 사감보다는 다른 생각이 앞섰다. 되돌아가 은행 15층 회장실이라…… 잊지 않도록 제대로 기억해두기로 한다. 다만 머리에 새겨두는 것과 그 정보의 진위여부는 별개다. 과연 순순히 사실을 말해줬을 가능성은?
글쎄, 상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의 여부도 문제며 그곳으로 이동했을 때 저들이 뒤를 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싸움의 승패는 대어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폭탄 해체가 늦을지는 싸워 봐야 알지 않겠나.
"검증입니다."
당신을 제압해 사실을 가려 보기 위한 확인 작업. 허리가 회전하며 어깨가 뒤로 돌아간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에 최고조의 힘이 모였을 무렵, 츠쿠시는 곧바로 레이첼의 방향을 향해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전방으로 휘두른 권타의 흐름을 타고, 응집된 예기가 창처럼 꿰뚫을 듯 쏘아진다.
지금이야 제가 먼저 기습을 해왔다지만. 공격을 당하고 나서도 반격이며, 방어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대화를 하려는 것이 어이가 없다. 이렇게 되니깐 내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고. 계속 저런 방식으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건지 뭔지. 찝찝한 느낌에 혀를 차고선 일어나는 멜로에게 보검을 겨눈다.
단답. 땅에 처박혔을 적 갈라졌던 보검이 다시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이스마엘의 주변을 맴돌았다. 견뎠다고? 글쎄, 견뎠을까. 이것이 견디는 것인가. 용서하고, 화합했지만……. 이스마엘은 속내를 한차례 크게 가라앉히려 시도했다. 박수 보내는 모습에 잠시 가면에 가려진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으나 인내한다.
"그건 마저 싸워봐야 아는 일이죠."
잔해를 편으로 내리치자 잔해가 튀어 이스마엘을 스쳤다. 하나가 강하게 몸을 치고 지나가 살점이 뜯겨도 이스마엘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앞으로 걸어나섰다. 이내 염력으로 잔해를 띄워 주변으로 조각을 회전시키더니, 전진하듯 하며 횡방향으로 거세게 그어내듯 쏘아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해도 좋으리라. 어쩌면 과한 의심으로 인해 시간을 소모했거나, 진실을 고한 자를 불신해 불필요한 피를 튀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고서도 그는 여전하게도 무심한 낯을 하고 있다.
"아뇨, 상황이 원만하게 돌아간다면 죽이지 않습니다."
레이첼이 피해를 수습하는 동안 그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중거리 용의 장검, 칼을 쥔 손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며 아래로 내리쳐진다. 기세를 놓치지 않고 연달아 공격하기를 택한 것이다.
"다만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저는 언변이 서투르니 이 방법으로 검증하려 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쥐어패서 사실을 말하게 하고 같은 진술이 반복된다면 그제야 믿겠다는 소리다. 과격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지만 그리 헛소리 지껄이는 그의 눈은 참되기만 했다. 한때 몸 담았던 진영의 가치관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사고방식이다. 허공에 내리 그인 검격은 칼의 궤적을 따라 마찬가지의 호선을 그리며 쇄도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