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이 우정 삼아, 애정 삼아 기다란 초콜릿 발린 과자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홀로 은빛 달 아래에 앉아 기다란 육포를 안주삼아 고독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모두 옛날 일이기에 잊으려 했지만, 원래 인간의 기억은 장난이 심해서 잊으려 하면 더 강해지는 게 너무나 얄궂었다.
"연인이라..."
그는 평소에 즐기지도 않는 독하기만 한 싸구려 술을 들이켰다. 뜨겁게 타는듯한 느낌이 식도를 자극하지만, 곧 다른 감각들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신경 끝자락이 곱아드는 것 같이 무감한 느낌 속에, 괜한 추억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그런 녀석은 사흘도 못 지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울고불고 할 것 같았다.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던 그녀는 목덜미에 7자가 없었으나, 그게 있는 이들 만큼이나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해바라기처럼 웃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를 더더욱 받아들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거절도 했었다. 설득도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꼭 해낼거라고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도, 미소도, 너무나 거북했다.
그 시선 밖에서 비웃기도 했다. 제까짓 게 하루이틀이지. 일주일이지. 그런 말을 하며 동료들 앞에서 그 훈련병을 무시했다.
허나 결국 두 달이 넘는 시간동안 행해진 지옥같은 훈련을 마친 그녀는, 조금 초췌해지고 먼지가 묻었을 뿐 여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보급 간식 잘 받아간다." "제기랄."
젠장. 내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여러 의미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신체적 여건이 좀 딸리더라도 끈기있게 도전하는 모습에 감동하는 다른 교관들도 있었다. 난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난 두려웠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오는걸, 나도 모르게 두려워했었다.
한 명의 대원으로써 조금씩 작전과 훈련에 익숙해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천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어느덧 한 명의 병사. 혹은 그 이상의 역량을 갖춘 그녀가 내게 개인적으로 대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왜 나였을까. 아직도 그건 모르겠다.
하사님, 하사님 하며 마치 나이차 나는 여동생마냥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게 귀찮아서 골탕을 먹이려고도 들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드는 죄책감은 내 손을 막아섰고, 결국 어느 순간쯤 가자 내 의도와는 달리 점점 더 그녀에게 관대해져만 가는 것을, 내 동료는 물론 나 자신까지 지각하게 되었다.
동료 한 명을 적의 탄환에 잃었다. 조금만 비껴갔으면 방탄복에 맞았을텐데. 그럼 살았을텐데. 세상은 너무 지독했다.
동료의 죽음에 내가 두려워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일 때, 마치 자신은 두렵지 않다는 듯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이성에게 포옹을 받았다. 난 그저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나 자신이 한심해졌었다.
어느샌가, 우린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요즈음엔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주 개인실까지 멋대로 들여와서는 하루종일 달라붙어 있곤 했다. 이상했다. 왜 귀찮거나 걸리적댄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까. 익숙해졌나? 그런 것 치곤 좀...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왜 그게 그렇게 들뜨는 거였을까.
그 들뜸을 해소하고 싶어 본인에게 그 심정을 토로했다.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품에 안기고선, 그 다음은...
허무한건지 만족한건지 모를 기분을 온 몸에 감아두고, 내 팔을 베개삼아 누운 그녀의 살짝 볕에 그을린 피부가 밤공기에 닿지 않도록 모포를 끌어올리다, 문득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살아남는게 고작인데, 끝난 이후를 묻는다니. 목숨이 먼저 끝날 판에.
그녀는 화가가 꿈이라고 했다. 이전에도 몇 번, 그녀가 무언가를 열심히 그려대는 걸 스쳐지나가며 본 적은 있었다. 모든 게 끝나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풍경과 사람들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내가 그녀와 항상 함께하며 지켜달라고 말했다.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받아들였었다.
당시 내 개인실에 두었던 랜턴은 낡아빠져서 종종 지멋대로 불빛이 깜빡이곤 했다.
지금은 그 랜턴 불빛에 의존해, 메모장에 그려진 내 초상화에 대고 나홀로 달을 술친구 삼아 건배했다.
별 생각 없이, 평소의 조심성 대신 튀어나온 말에 너는 조금 당황한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댔으나. 그렇게 문제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한 건지 손을 내린다. 그리곤 나름대로 생각한 대답에 그게 맞다는 답이 돌아오자 다시 머릴 굴린다. 둘이 친하다곤 생각했지만... 씨익 웃는 표정을 보자니 좋은 예감이란 게 없어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니 어느새 어깨를 짚은 손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경 안 쓴다는 것 치곤 이것저것 많이 해주실 모양이군요, 뭐 좋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는 장담 같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런 걸 기대하고 이스마엘이 이야길 한 것 같진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그냥 으름장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 뒤엔 또 등을 얻어맞았다. 윽. 피할 겨를이 없었던 건 아니고. 자꾸 때리는 걸 보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게 있는 듯하니 피한다고 해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맞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지만 뭔가 목적이 있으니까 때리는 것 아니겠는가. 맞추는 게 목적이면 맞아줘야지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 싶고.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물론 아프긴 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데.
"......"
할 말이라. 얼얼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면서 너는 말을 골랐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레시,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라든가, 뭔가 알고 그러느냐 하는 질문이 올 수도 있었지만 아마 그녀라면 그리 되묻진 않았을 터다. 너로서도 그냥 애매모호하게 받아들여지길 바란 말이기도 했고. 그렇게 레레시아를 보며 가볍게 웃은 넌 고갤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발걸음을 돌렸다.
괜찮지 않다 하면서도 의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버티는 선우를 바라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들어오며 요란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선우가 정확히 어떻게 아픈지까지는 정황을 모르니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지는 않았지만서도. 듣기로 훈련장에는 자동 회복 기능이 있다 하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예, 조금 연구할 것이 있어 말입니다."
그리 말하는 동안 시선이 짧게 제 검으로 향했다 떨어진다. 아마도 이 거추장스러울 만치나 길다란 칼이 보검인 모양이다. 방금 있었던 사건에 관해서는 별일 없었던 듯하니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겠지만―상대방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조금쯤 궁금증이 든다. 제 처지에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져 나쁠 것 없다.
자캐가_상처받으면 물리적인 상처에도 내색하지 않는 편이지만 정신적인 상처도 뭐 멘탈 박살나기 전까지 내색하지 않는 편이지..? 여러모로 자기가 받거나 받아온 상처는 숨긴다! 라서 주변 사람 속 썩이기 좋은 부류긴 한데 이게 남에게 짐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기인된 고의적인 숨김이 60%라면 40%는 자기가 온실같은 새장에서 나와 슬럼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개처럼 구르며 자라온 환경 탓도 있어. 슬럼은 분명 서로 의지하며 기대는 사람도 많지만, 그만큼 범죄의 온상이기도 해서 상처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아직 불신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있는거지...? 응..
네가_뭐라도_되는줄_알았나봐_라는_말을_들은_자캐 "무엇이 되어야만 합니까? 이상을 쫓고자 함에 자격은 필요가 없습니다. 꿈조차 꿀 수 없다면, 필히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 제0특수부대 소속입니다. 무엇이라도 되긴 하지요." "어찌 이상향에 대해 자격을 나누고자 하십니까." (적대세력)
"그렇지요, 네. 나설 권한은 없지요. 저는 당신의 가족도 아니고, 친우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며, 동료라기엔 허례허식에 불과한 관계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된 관점에서 당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위로는 기만이라지만.. 의지할 곳 하나 없으면 외롭지 않습니까."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래! 당신!)
"그럼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까?" "뭐라도 되는줄 알았냐고? 그래, 뭐라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설레발만 쳤던 겁니까? 나 혼자만 또 당신을 흉측한 망상속에 사정없이 몰아세우고 끔찍하게 울었냔 말이야. 재밌었어?" "당연히 재밌었겠지. 뭐해? 재밌었으니까 웃어야지.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
"안되겠다." "따라 나오십시오." < 제한테는 이럼
자캐를_상징하는_꽃 이런 질문이 나오면 명확하게 답을 주고 싶은데, 막상 이스마엘의 캐릭터성을 떠올리면 명확하게 답을 주기 어려운 해시네. 탄생화로 흘러가자면 매화지만... 음..... 굳이 정해보자면 해바라기...?
노크소리가 들려오자 너는 고갤 돌렸다. 이 시간에 누가? 네가 노크를 하러 갈 예정인 경우는 있었어도 이렇게 찾아올 만한 사람은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럴싸한 추론으로는 한 명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아 긴가민가하면서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을 보았다. 아직 못 씻었는데. 살짝만 열어볼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문 앞으로 다가가 여니 보이는 인영과 풍기는 향기에 너는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었구나.
"아, 아닙니다."
무슨 용건일까 싶어 올려다보니 시선이 좀처럼 마주치지 않아 의아해하던 차에, 당신의 등으로부터 천천히 네 앞으로 다가온 상자와 포장된 캔버스를 얼떨결에 받아든다. 아, 그렇지 참. 오늘,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이벤트를 떠올린다. 잠시 상자를 내려다보던 네가 다시 고갤 들어보면 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욕심을 좀 냈다는 목소리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 위해 굴러가는 시선 끝, 앓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너는 잠시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귀를 기울였다.
"잠시만 기다려요, 잠깐이면 됩니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라고 해서 네가 듣지 못할 리는 없었고, 수줍음이 가득한 표정과 어조를 듣고 나서 너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그런 말과 함께 잠시 문 뒤로 모습을 감췄다. 정말 잠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간, 안에서는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인지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멈춘다. 그리고 기다림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열린 문 너머에는 리본으로 장식한 호리병 모양으로 접힌 얇은 종이상자와, 종이상자와 마찬가지로 얇은 막대과자가 담겨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신경 쓸 겨를이 있었다면 방 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모카 향기뿐만 아니라, 방금까지 뭔가 하고 온 듯 접힌 소매와 올려묶은 머리, 흰 옷에 묻은 갈색 흔적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결국 제가 더 늦었군요, 미안합니다."
조금 급하게 포장한 듯 구겨진 부분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엔 네가 문 앞에 선 당신에게 선물을 내민다. 선물을 건네고도 네 손에는 여전히 뭔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손에 작은 종이 한 장만 접혀 남아있고 나서야 아직 남았다는 듯 종이를 펼치면, 그 안에 담긴 동그란 모양의 초코볼이 모습을 드러낸다.
"빼빼로는 아니지만, 남은 초코로 만들어봤습니다. 모카향이 좀 나는데 괜찮다면..."
초콜릿 취향까지는 알지 못해서 네가 좋아하는 걸 위주로 만들었기에, 혹시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억지로 먹는다거나 하지는 않길 바랐기에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선물을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고 속으로 자책하면서도, 꼭 먹어줬으면 한다는 마음이 공존해 초코볼 하나를 집어든 너는 당신의 입에 그대로 가져간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셔."
네 미소는 언제나 개운치가 않았다. 처진 눈썹과 대비되는 날카로운 눈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평소에 계속 풍겨대는 조금 음울하거나 답답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너는 미소지었다. 당신에게 받은 기쁨을 전부 표현하고 싶었으니까.
주말의 주방은 언제나처럼 고소한 냄새와 설탕의 달콤한 냄새로 가득하고, 이는 신디가 도넛을 튀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말이면 교회에 들러 기도하는 독실한 신자들처럼 신디는 주방으로 향했는데 이는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지라, 신디는 제사복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밀가루를 반죽으로, 반죽을 도넛으로 구워내는 의식을 매주마다 거행했다. 이는 도넛을 좋아하는 만큼 도넛을 만드는 과정 역시 좋아하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도넛을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보울에 계량한 밀가루를 붓는다. 신디는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드는 과정을 좋아했다. 힘을 주어 반죽을 치대면, 밀가루와 달걀, 설탕과 버터가 균일하게 섞여 한 덩어리의 반죽이 되어가는 순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홍조까지 띄워가며 웃는 것이었다. 반죽을 치대는 반복적인 행위에서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 슬픔도, 절제할 수 없을 분노도 잊어버리며 평온을 찾았고. 밀가루 반죽이 숙성되는 시간 동안 부풀어 오르는 반죽을 지켜보며, 마음속 희망도 같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래 같은 건 없고, 하루하루 굶어 죽지 않을 것을 걱정하던 때. 그런 불운한 삶에서 신디를 구원했던 것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기름과 설탕으로 범벅이 되었던 도넛이었다. 그때 혀끝에서 느껴지던 도넛의 단맛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허기는 물론이고, 공허했던 영혼마저 가득 채워 주었을까. 이는 신디의 삶에서 유일한 행복이었으며, 처음으로 찾아온 구원이었다. 신디는 그 강렬한 단맛을 오랫동안 음미하며,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던 도넛만 있다면 괜찮으리라 여기게 되었다.
어느덧 부풀어 오른 반죽을 알맞게 떼어내어 둥글게 만든 뒤, 구멍을 뚫은 뒤 유산지 위에 올린다. 무겁게 한 덩어리로 마음에 자리 잡았던 감정들에도 구멍을 뚫는다. 한 번 더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후, 알맞은 온도로 맞춰 둔 기름에 유산지에서 떼어낸 도넛을 조심스레 넣는다. 튜브처럼 떠오른 도넛들이 황금빛이 되었을 때 건져 내어 만들어둔 글레이즈로 아이싱한다.
우울한 현실에서 달콤함에 가지게 되었던 희망이 부풀고, 따뜻한 시간을 거쳐 지금이 되었을 때. 신디는 이 구원을 자신만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구원의 순간이 필요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디는 냄새에 주방으로 이끌려온 당신에게 웃으며 다가가 준비한 도넛을 권하며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