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최근에는 재미란 걸 전혀 못 느꼈다. 범죄자를 죽이기는커녕 잡아서 조지지도 못했고, 베로니카는 빈센트를 조질 수는 없었던 UHN이 잡아갔고... 재미, 아니면 다른 말로 정서적으로 위로가 될 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정말로 재밌었다. 거의 죽을 뻔한 일격, 그 사이에서 피어난 반격의 기회, 그리고... 승리는 못 했지만, 어쨌든 그 지옥에서 살아나갈 권리는 쥐었다.
빈센트는 합법적으로 악당 잡기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안 됐다. 결국 빈센트가 원하던 것은 못 이뤘으니까. 하지만 됐다. 그건 어차피 못 이룰 꿈이었다.
"아뇨. 잘 안 됐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르죠. 더 강한 이랑 싸워도 모자랄 판에, 약골들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고문할까나 생각하다니. 그 때는 제가 생각해도 좀 많이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빈센트는 토고에게 묻는다.
"토고 씨도, 자기보다 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동급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적을 상대할 때가 재밌지 않습니까?"
토고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재미..? 쓰읍... 토고는 그런 거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발상을 하지 못하겠다. 나보다 약한 상대를 진흙탕에 빠뜨리며 크크 웃는 건 좋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을 가지고 노는 것도 좋다. 돈을 잃는 건 조금 마음에 안 들지만.. 생명을 잃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굳이? 목숨을? 토고는 목숨을 걸고 무언갈 하는 건 옛날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헌터 일에 뛰어들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만한 건 최소한 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전투광? 아드레날린 중독? 그런 것인가?
"니 그럴 줄 알았다. 쯧.."
토고는 그가 하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더. 약골을 안전하게 고문... 이라는 말 자체가 토고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여는... 하.. 스승님아, 내 때려치우고 걍 일본가서 살련다...'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다. 너무 많은 것 같다. 토고는 머리가 아프다.
"내? 내가 니랑 같나? 내는 남이랑 싸우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하더라도 내보다 약한 아를 상대하는게 더 즐겁다. 왠지 아나? 내는 목숨 잃는 거 싫거든." "니처럼 전투광? 그런 놈도 아이고, 생명경시도 안 하는 편이라 내는 니 이해 못하겠다."
음. 사상이 많이 다른 사람인가 보다.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토고를 바라본다. 그럴 줄 알았다, 쯧... 그럴 줄 알았다, 빈센트가 이런 부류의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고, 쯧... 은, 아무래도 빈센트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빈센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토고의 말을 듣는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
"음.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그래도..."
어차피 인간은 다 죽고, 그 중에서 의념 각성자들은 더 빨리 다 죽는다. 어지간히 강한 게 아닌 이상 그렇지 않은가.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한다.
"...강한 이를 상대하는 게 실리적으로도 더 도움이 되고, 특히 그것 있지 않습니까."
빈센트는 몸을 돌려 교단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작은 불씨를 피운 다음, 손으로 꽉 누른다.
"처음에는 약하다고 방심하고 짓밟으려다가"
하지만 꽉 눌린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흰 연기와 함께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난다.
"무언가 자신이 생각했던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그리고는, 책상에서 순간 불이 확 올라왔다가 꺼졌다.
"이 '약골'을 짓밟기로 한 게, 인생 최후이자, 최악의 결정이 되었을 때 보이는 절망감. 이건 일방적인 약자들과의 싸움에서는 느낄 수 없죠. "
빈센트는 검댕이 묻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책상을 마도로 말끔하게 만든다.
"'약한 이들'과 싸우는 것도 즐겁죠. 하지만 그게... 좀 안전한 만큼 좀 약하고 밍밍한 맛이라면... 강한 자들과 싸우는 건 아주 끝내줍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토고는 방긋 웃었다. 헬멧 때문에 어차피 얼굴은 보이지 않겠지만, 이런 사람을. 아니, 이런 인간을 상대할때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강자라고 평가한다면 여러가지 약점을 대겠지만 강자겠죠. 하며 말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약자가 된 적이 있을까? 토고는, 그는 진정으로 약자가 되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힘에 취해 힘을 휘두를지언정 그 힘에 굴복당하는 입장이 되어 본 적 없다고 말이다. 하루 하루를 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타인에게 사기치고 가슴을 졸이며 어제 봤던 이가 오늘도 내일도 보이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그는 알까?
토고는 여전히 방긋 웃었다. 헬멧이 있기에 참으로 다행이라고 토고는 언제나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얼굴을 숨길 수 있어서.
"내는 니랑 달라서 말이다. 니가 느끼는 걸 내한테 말해봐야 니는 매운 걸 맛있다고 느껴도 내는 매운 걸 맛 없다 느끼는 사람이다. 라고 비유하면 알아듣겠제?" "그걸 남이 이해하던 안 하던 유감은 아닌기라. 왠지 알제? 니는 똑똑하니께 알기다. 모를리가 없제. 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백날 천날 말해봤자, 싫다는 반응밖에 안 돌아온다. 그렇다면 그냥 다른 얘기나 하는 수밖에. 빈센트는 토고의 이야기를 묵묵하게 듣다가, 생명을 뭐라고 묻냐는 말에 턱을 쓰다듬는다.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냐고? 글쎄. 빈센트는 할 말이 많아서, 잠시 말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는군요. 호흡하고, 파괴하고, 전기 신호로 연산하는 수많은 세포들의 집합이 계속해서 협업하는 양태를 나타내는 두 글자 단어... 뭐 이런 답을 원한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죠? 일단은, 기본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되도록이면 잃어서도, 빼앗아서도 안되는 것, 이 정도는 당장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고민하더니,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저한테 무언가 가르쳐보려던 이들이 항상 머리말부터 꺼내던 개념이고, 무고한 이의 삶은 생각해본 적도 범죄자가 산 채로 소각장에 들어갈 상황이 되니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아무렇게나 던지던 단어들 중 하나고, 절대 뺏으면 안 된다면서도 수틀리면 뺏는 게 일상인 무언가이며... 그렇기에 제일 중요한 것이죠."
생명. 그것은 소중하다. 라고들 사람들은 말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힘을 원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드는 자도 있다. 생명이란 것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일까. 토고는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한 사람의 생명이 가지는 가치는 얼마로 환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검성의 생명과 지나가는 민간인의 생명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검성은 영웅이다. UGN과 그것을 이루는 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자이다. 가디언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수 많은 목숨을 구한 영웅. 하지만 지나가는 민간인은?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때론 소중한 자녀일수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고아가 운 좋게 어른이 되어 살고 있을수도 있다. 그는 검성과 똑같은 가치를 지닐까?
답은 아니다. 검성을 살리기 위해 민간인 한 명을 죽이라면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넘칠 것이다. 하지만, 검성을 살리기 위해 검성의 가치만큼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라면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만큼 생명이란 개체에 따라 한 없이 낮아질수도, 한 없이 높아질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토고는 생각한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하지 않는게 좋다고. 그런 것에 가치를 붙이지 않는 게 좋다고. 그러면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토고는 생각한다.
눈 앞에 있는 이 상대는 인간인가?
생명에 대한 개념을서술하는 그를 보며 토고는 엘터 교관을 떠올린다. 그는 생명을 수없이 앗아간 과거가 있겠지. 그러면서도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 했겠지. 그리고 우리들을 가르치며 윤리에 대해 말했지. 그는 이런 존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중요하다... 라는 말이, 오락적으로 중요하다는 거가? 아니면, 윤리적으로 중요하다는 거가?"
토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최선을 다해 머리를 식힌다. 지금 당장 자퇴서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마음을 억누른다. 나 자신을 위해? 아니, 그나마 있는 사람을 위해서.
"니한테 소중한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내 생각 못하겠지만, 소중한 사람. 그래. 그런 사람의 생명도 니는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볼때... 니는... 특별반이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여 특별반의 목적, 니는 알고 있제? 편입생인 내보다, 니가 더 많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