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 다시금 무의식을 거세게 두드렸다. 구석에 틀어박혀있던 이스마엘을 단단히 붙잡고 끌고 오는 건 대답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가면 끔찍한 일만 가득할 텐데. 이겨내고 끝내 익숙해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텐데,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고 있는데. 손목에 닿은 손수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자못 역겹게 다가왔다. 순간 시야가 아찔하고 어지러운 감이 있었다. 토기가 치미는 느낌이었으나 헛구역질도 나오지 못했다. 어지러운 이유는 피를 흘려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믿기로 했다. 덜컥 끌려와 짊어지게 된 현실이 무겁다. 메스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무의식처럼 호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스러움을 표현하기엔 지쳤다.
"제가 아플걸…… 왜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허망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쏟아진다. 한 손으로 어떻게든 지혈해 보고자 어설프게 고개를 숙이고, 이까지 사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눈을 깜빡이기가 무섭게 다시금 고인 눈물이 쉴새없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느슨하게 묶였는지, 거세게 묶였는지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을 때,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왜 당신은 계속 사과하는 겁니까? 얘기하려던 것을 삼키듯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당신이 사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그만하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왜? 대체 왜. 차라리 내버려 뒀더라면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잡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의 세상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 동료를 잃는다는 불안을 품지 않고, 아버지를 다시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뎌질지도 모르는데. 끝내 그것이 자신이 박살나는 길이라 할지언정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텐데…… 당연히 당신은 이 사실을, 나아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당신에 대해 이스마엘이 잘 알지 못하듯.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불현듯 당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그들이 언제까지나 있는 그대로 느끼기를 바랍니다. 무뎌지는 게 그들처럼 되는 길이라면. 지금 꼴이 딱 그런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다시금 느끼고 있지 않은가. 잔인한 사람. 이스마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때 메스를 쥐었던 손목을 놓아주자 팔에 힘이 풀렸는지 힘없이 내려갔다. 지혈을 하듯 다른 손목에 팽팽한 감각이 느껴졌으나 여전히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불덩이를 얹은 듯 화끈거리며 쓰라리지만 이런 건 살던 곳에선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단지 다른 곳이 미칠듯이 아팠다. 폐부다. 상냥하게 괜찮노라 속삭여주던 과거의 목소리가 기억에 맴돌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눈물과 함께 고통이 폐부를 찔러온다.
"……집에, 다녀오고 싶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스마엘이 끝내 가장 여린 모습을 보였던 이유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이며 홀로 중얼거린 소리는 여전히 닿지 않을 소망을 속삭이는 듯했다. 가장 단란하고 행복했던 때가 그리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전 막연히 기댈 수 있는 것 중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었다.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그냥, 네가 그런 상황이라면 아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아마 네 행동으로 고통을 느낄 테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여겨온 그 생각 때문에 너는 그 질문인 듯, 그러나 질문이 아닐 수도 있는 질문에 차마 무어라 근거를 대며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섣불리 생각하고 행동한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 하물며 의무병처럼 관련된 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어서, 그래서 제가 하는 행동이 제대로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과하는 겁니다. 제 행동으로 상처가 더 나빠질지도 모르니까요."
지금은 없는 고통이 생겨버릴지도 모르니까, 그저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행동한 것 때문에 생기게 될 문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게 떠오르는 지금 그 부분에 대해서 너는 사과를 해야만 했다. 혼자 있고 싶어하는 걸 방해했다. 스스로 손목을 찢어내고 그 안을 헤집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막았다. 아프지 않다는 사람에게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픔을 강요하는 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멈추지 않을 네 모습에 대해 사과해야만 했다.
"그만하라고 해도, 안 됩니다. 미안합니다. 결국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을 괴롭히는 걸 용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대체 누가 당신을 보고 내버려두겠습니까."
단단히 손수건을 묶고 나서야 고갤 든 너는 이젠 마주쳐주지 않는 눈과 푹 숙인 머리를 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네가 놓았던 팔은 메스를 찾아 움직이거나, 널 밀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툭, 바닥에 닿을 수 있다면 그러려는 듯 아래로 내려갔을 뿐. 내려앉은 머리칼과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분명 턱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이 보였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만한 자그마한 소리, 바람 소리라도 겹쳤다면 듣지 못했을 만한 중얼거림이었지만 너는 그런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놓칠 수 없었다. 언제나 곤두세워진 감각이 이런 때라고 무뎌지랴.
"...그렇담, 다녀옵시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드시 이루려고 했던 목적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을까. 홀로 중얼거리는 말, 혼잣말에는 많은 것이 담긴다. 누군가가 들었으면 하고 중얼거리는 것과는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마찬가지일 터... 정제하지 못하고, 말하고자 의도하지 않은 것이 튀어나온다는 것은 때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심이 무심코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너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네 손이 손목 대신 손을 붙잡는다.
"지금 당장."
지체해서는 안 된다. 방향을 틀 수 있다면 지금뿐이다. 본능이 지르는 소리에 너는 귀를 기울인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무엇이든 해야 해, 이 축축한, 점점 옅어가는 쇠 냄새로부터 벗어나자. 스스로를 해하는 소망은 이뤄줄 수 없어도, 다른 거라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너는 연신 힘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이 집이 에델바이스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집. 그 짧디짧은 한 단어에 담긴 것이 얼마나 많은지 세는 건 미련한 짓이다. 본래 그 단어가 가져야 할 의미라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