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기억이 계속해서 비집고 들어오려 시도한다. 끔찍한 기억은 이스마엘의 발목을 쥐고 평생 따라붙을 것이다. 헨젤이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조각을 길에 두었으나 새가 그 뒤를 쫓아 모조리 쪼아먹게 되어 결국 마녀가 있는 곳에 발을 들인 것처럼, 끔찍한 기억은 목표를 향할 길을 잃게 만들고, 삶을 집어삼키고, 종국엔 자신을 먹어치울 것이다. 이스마엘은 알고 있었다. 그동안 유지해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임을. 사랑하던 모든 것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본능은 현실을 도피하며 스스로 조작한 기억 깊은 곳으로 이스마엘을 끌고 갔다.
끝내 본능이 몸부림쳐 결론지은 것은 이 세상이 지금 가짜라는 결론이다. 이스마엘은 지금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이다. 가장 두려운 꿈, 눈을 감았더니 떨어져 버린 새로운 세상…….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했지만 가짜 같았다. 아직 남아있는 이성이 이스마엘을 깨우려 무진 노력했으나 이미 깊게 잠긴 듯싶었다. 불현듯 끔찍하고 역겹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무엇에게서 역겨움을 느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났지만 어차피 가짜지 않은가.
"……."
이스마엘은 손목을 향해 다시금 시선을 던졌다. 너덜너덜한 손목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한 방울씩 불규칙적으로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금 당신으로 던진다. 쓰라려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했지만 여전히 이스마엘은 알 수 없었다. 쓰라린 것 같지만 남이 아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자신도 거짓된 통증을 느끼곤 하니, 아마 그쪽이 아닐까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여전히 모르겠다. 일단 웃는 것이 좋겠다. 흐린 이성 너머로 이스마엘은 불안정하게 미소 지었다.
"가짜인 것 같습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답은 가늘게 떨려온다. "추악하다 생각하십니까?" 상황과 맞지 않는 질문을 뒤로 이스마엘이 스스로 답하듯 중얼거렸다. "추악하겠지. 끔찍한 망상에 남을 사정없이 몰아넣고……. 그 사람은 지금 진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아갈 텐데." 눈동자 또한 다시금 가늘게 떨려온다. 시선을 다시금 맞췄지만 여전히 당신의 눈동자가 인위적인 무언가로 구성된 기분이 든다. 무엇으로 이루어졌지? 홀로그램인가? 아니면 안드로이드? 아니면…….
"무슨, 뜻, 입니까..? 저는, 저, 저는……."
단어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스마엘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야." 부정하는 단어는 점차 숨가쁘게 변하더니 이내 탄식과 함께 공용어도 아닌 수준에 이르렀다. Nein, Ich habe mich nicht geirrt. 불현듯 들었던 끔찍하고 역겹다는 생각의 주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이다. 홀로 살아남은 자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이스마엘에게 선고했다. 이곳은 현실이노라고. 종국에는 목이 졸린 듯 가느다란 침음이 흘렀다.
앞에 선 너도 가짜인 것 같냐는 물음에 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현재 얼마나 정신적으로 몰려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너는 재촉하거나 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숙고는 나쁜 게 아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같은 게 아니지 않은가. 섬세한 일을 할 땐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문제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너는 가만히 있었던 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들려온 대답은 가짜라는 말이었다. 너조차도 가짜 같은... 하기사 네게 그런 판단을 거부할 만한 요소가 얼마나 있겠는가. 손목을 헤집는 걸 제지당했고, 지금 계속해서 신경을 긁는 것일지도 모르는 질문을 건네는데도...
"...그렇습니까."
그러나 어쩐지 납득했다. 뒤엣말 때문이었을까, 현실일 리가 없다. 추악하다 생각하느냐. 어느 누가 가짜라고 확신한 세상에서 가짜인 존재에게 이런 푸념 섞인 말을 중얼거린단 말인가. 그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것이 분명한 그 목소리에 너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스스로도 망상이니 뭐니 하는 말로 미처 전부 게워내지 못한 현실감에 몸부림치고 있다. 네가 뭘 할 수 있지? 널 바라보는 눈에는 감정이 실린 것 같지 않다. 대체 이게 왜 내 앞에 있지 하는 듯한 눈, 너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홀로그램으로 자신을 외부와 차단하며 보아오던 세상의 편린이 아닐까? 홀로그램 너머로 보아 온 모습과 네가 얼마나 다르길래, 아니면 재머 없이 내던져진 세상 따위 존재할 리 없디고 생각했기에 그 세상에서 나타난 너까지도 거짓이라고 여기는 걸까.
아니라며 중얼거리던 목소리에 불규칙척인 들숨 날숨이 뒤섞여 점점 가쁘게 변한다. 상황을 따른다면 얼추 이해할 수 있지만 나중에 확실히 알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까지 들려온다. 이윽고 스스로 뭔가 죄이는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에 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러면... 평생을 가리고 살 생각이었습니까."
감정이 날카로워진 사람에게 논리적인 접근 따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기에 너는 어쩔 수 없다며 합리화하곤 말을 꺼낸다. 네가 가짜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람 안에 있는... 반투명한 껍질에 감싸인 존재를 어떻게 하면, 꺼내는 게 옳은 일일까? 그 안이 행복하다면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둬야 하는 건 아닐까? 이번에도 너는 직관을 따르고 있었다.
"일단 심호흡을 좀 하시죠, 달콤한 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한대도, 사람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나아온 사람이 순순히 따라 움직일 것 같진 않았지만 우려 섞인 말을 건넨 너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목으로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어떡한담. 입술을 잘근 씹던 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그 상처를 감아 누르려고 했다. "미안합니다." 라는 사과와 함께.
서로 기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부분이 충돌하고 있었다. 재머 칩은 카시노프가 훔쳤다, 칩을 깊숙한 곳에 꽂은 나머지 고장이 났다, 이건 악몽이다, 뇌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나머지 생겨버린 거짓된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 의심을 품지 못한 채 무의식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스마엘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라도 지금 상황은 모두 망상이며, 추악하게 망상에 남을 밀어 넣는 자신과 희생양인 당신이 옳은 상황인 것 같다 생각하며.
무엇인지 모를 재질로 이루어진 당신의 새카만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덜컥 두려워졌다. 돌아가서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당장 레지스탕스가 자신에게 가진 시선이 어떻게 바뀔지도 두려웠다. 망상에 떠밀었다는 걸 깨닫고 경멸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기에 시선이 두렵다. 당신의 말 한마디로 현실이 무의식을 거세게 두드리자 자연스럽게 숨결은 가빠졌다. 이성이 이상향으로 가는 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속삭이고, 깨달을 것이 있지 않느냐 간절히 빌고 있었으니 그 상황을 회피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제게……."
궁지에 몰린 듯, 이스마엘은 거의 울듯이 숨을 삼켰다. 가쁘게 가다듬는 숨을 뒤로 애써 유지하던 표정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제게 대체 무얼 바라십니까……?"
탄식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절박함에 가까웠고, 공포에 가까웠다. 평생 가리고 싶냐고? 아니, 아니다. 적어도 이전엔 떳떳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재머 없이 던져진 세상에서 본 현실은 이스마엘을 한차례 무너뜨렸다. 이상향으로 가고자 하는 전의마저 상실할 정도로. 살아있고, 말을 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엘리나. 죽어있고, 움직이던 모습도 끝내 멈춰 가족의 품에 싸늘하게 돌아오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해 영영 돌아오지 못할 헬무트. 자신은 아버지를 한 번 더, 최악의 경우 스스로의 손으로 잃어야만 하고 누군가는 고작 살아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아 죄를 저지르고도 행복을 찾는다는 그런 현실로 돌아가길 바라는 건가? 싫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차라리 가리고 갇혀 살고 싶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
그런데 당신은 현실이 아닌 곳에 있는, 무기질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진 존재면서 왜 나를 현실로 내쫓으려 드는가.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었으나 당신이 손목을 지혈하듯 손수건으로 감싸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노라 생각하고 말았다. 손수건은 따뜻했고, 상처가 쓰라렸기 때문이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감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말았다. 괴롭다. 무언가 더듬거리며 말하고자 하여 자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아무것도 나오지 못했다. 유리 조각이 목에 걸린 것 같다. 말을 뱉어내면 채 못 다해 피를 토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만약 이곳이 진짜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제게 왜 이렇게 대해주는 겁니까?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인데, 팀에 분란을 일으킨 사람인데, 납으로 된 혀로 누군가를 고통받게 만들었는데, 왜 저를─ 다물린 입술이 다시금 벌어졌다.
"왜, 미안하다고.. 하십니까?"
메스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피 묻은 메스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굴렀다. "대체, 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미안하다고…." 더듬거리며 뱉던 단어를 뒤로 현실이 아닌 너머의 것을 쳐다보는 듯하던 시야가 흐려졌다. 공막에서는 투명하게 물이 차올랐다.
"왜……."
닿지 않을 소망을 얘기하듯 허망하게 속삭이는 꼴이 여렸다.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묵직한 무게가 실려 중력을 이겨내지 못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물론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직전에 네가 뱉었던 말과 연결해서 이해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흐름, 너는 여기서 마땅히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혹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려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말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애초부터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으니 의식적으로든 반사적으로든 튀어나오지 않은 말을 억지로 꺼낼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되뇌이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너는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말을 끝맺는다. 드디어라고 해야 할까, 가빠지는 숨소리에 연상되는 표정으로 변해가는 표정을 보며 너는 잠시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손목을 덮은 손수건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흰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묶어야 할 것 같았으나 한 손으로 손수건을 묶는 기술 같은 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손수건째로 손목을 가볍게 붙잡을 뿐, 그제야 들려오는 목소리와 땅에 떨어지는 메스로부터 반사되는 빛, 너는 대답하기 전에 메스가 떨어진걸 확인하자마자 메스를 발로 걷어차 호수에 빠트려 버리려고 했다. 이제는 손을 놔도 괜찮을까?
"손수건이 닿으면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상처에 무엇이든 닿는데 안 아플 리가 없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 무뎌지는 듯한 통각이 지혈제와 약을 마주했을 때 다시 되살아나는 경험 정도는 해봤으니까. 아무리 손수건이 부드러운 재질이라고 해도 본래 그 위를 덮던 한 층의 피부보다는 한도 끝도 없이 거칠게 느껴지는 법이다. 눈물이 흐르는 걸 미처 보지 못하고 너는 손수건에 감싸인 손목을 살짝 돌려 손수건의 양 끝이 위를 향하도록 했다. 어떻게든 묶어놓기 위해서였고 그 위로 고갤 숙여, 어설프게나마 이빨과 한쪽 손을 이용해 손수건을 묶는다. 당연하지만 꽉 묶일 리가 없어서, 조금 헐렁하게 묶이고 말았다. 쯧. 하고 마음에 들지 않게 묶여버린 손수건에 혀를 찬 너는.
"죄송합니다, 익숙지가 않아서..."
그러고 보면 이런 부분은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혈법을 배울 때 조금 뒤로 처졌던 걸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너는 그제야 고갤 들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본다.
"잠깐... 잠깐만 손을 놓겠습니다. 역시 아팠겠죠, 헐렁하면 상처에 쓸려서 더 아플 겁니다. 잠시만 손을 놓을 테니 기다려주세요."
아픔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걸 이해하기에는 단서가 모자랐기에, 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그러나 사실은 아닌- 선택을 하기로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스를 들고 있던 손을 놓은 너는, 헐렁하게 묶인 손수건을 풀고 상처에 닿게 다시금 손목에 얹은 뒤에, 힘주어 묶었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런 건 그다지 잘하는 편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 다시금 무의식을 거세게 두드렸다. 구석에 틀어박혀있던 이스마엘을 단단히 붙잡고 끌고 오는 건 대답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현실로 돌아가면 끔찍한 일만 가득할 텐데. 이겨내고 끝내 익숙해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텐데,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고 있는데. 손목에 닿은 손수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자못 역겹게 다가왔다. 순간 시야가 아찔하고 어지러운 감이 있었다. 토기가 치미는 느낌이었으나 헛구역질도 나오지 못했다. 어지러운 이유는 피를 흘려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믿기로 했다. 덜컥 끌려와 짊어지게 된 현실이 무겁다. 메스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무의식처럼 호수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망스러움을 표현하기엔 지쳤다.
"제가 아플걸…… 왜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허망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쏟아진다. 한 손으로 어떻게든 지혈해 보고자 어설프게 고개를 숙이고, 이까지 사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눈을 깜빡이기가 무섭게 다시금 고인 눈물이 쉴새없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느슨하게 묶였는지, 거세게 묶였는지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을 때,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왜 당신은 계속 사과하는 겁니까? 얘기하려던 것을 삼키듯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당신이 사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그만하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왜? 대체 왜. 차라리 내버려 뒀더라면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잡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의 세상에 몸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 동료를 잃는다는 불안을 품지 않고, 아버지를 다시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뎌질지도 모르는데. 끝내 그것이 자신이 박살나는 길이라 할지언정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텐데…… 당연히 당신은 이 사실을, 나아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당신에 대해 이스마엘이 잘 알지 못하듯.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불현듯 당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그들이 언제까지나 있는 그대로 느끼기를 바랍니다. 무뎌지는 게 그들처럼 되는 길이라면. 지금 꼴이 딱 그런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다시금 느끼고 있지 않은가. 잔인한 사람. 이스마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한때 메스를 쥐었던 손목을 놓아주자 팔에 힘이 풀렸는지 힘없이 내려갔다. 지혈을 하듯 다른 손목에 팽팽한 감각이 느껴졌으나 여전히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불덩이를 얹은 듯 화끈거리며 쓰라리지만 이런 건 살던 곳에선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단지 다른 곳이 미칠듯이 아팠다. 폐부다. 상냥하게 괜찮노라 속삭여주던 과거의 목소리가 기억에 맴돌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눈물과 함께 고통이 폐부를 찔러온다.
"……집에, 다녀오고 싶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스마엘이 끝내 가장 여린 모습을 보였던 이유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이며 홀로 중얼거린 소리는 여전히 닿지 않을 소망을 속삭이는 듯했다. 가장 단란하고 행복했던 때가 그리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전 막연히 기댈 수 있는 것 중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