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 그리고 절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감정이 폭발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않다.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고, 늘어났다. 갑작스럽게 악몽을 꿀 때도 있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기도 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고 합리화하며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기도 했다. 이스마엘은 후자였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버지가 움직였을 리가 없다 생각했고, 대원과의 분쟁은 카시노프 때문이라 생각했다. 카시노프가 삿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재머마저 꺼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고 믿었다.
헬무트는 죽었다. 움직일 리가 없다. 품에서 쓰러지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그 시체는 동명이인이다. 아닐 리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은 카시노프가 재머를 고장 나게 만들어서 벌어진 일이다. 재머가 모종의 이유로 고장이 났다. 에스티아도 모른다. 가본 적은 없지만 고치는 법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야 카시노프가 고장을 냈기 때문이다, 그 삿된 것은 세븐스로도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재머를 훔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재밍을 위해 이식한 칩을 찾아보려 했다. 그리고 손목이 붙들렸다. "Wer?"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익숙한 목소리다. 누구더라? 이스마엘은 고개를 돌리려다 멈췄다. 얼굴이 드러날 것이라 판단했는지 고개를 아예 숙여버렸다.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왜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 익숙한데 누구더라? 동료인 건 안다.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다 눈을 굴린다. 안면에 하얗게 쏟아져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서슬 퍼런 눈동자가 당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기억났다. 리오 씨다. 이상하다, 그때 리오 씨는 엘리나의 공격으로 굳어버렸는데. 아! 그때 다른 사람이 구해줬다. 그건 기억이 난다. 이스마엘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 리오 씨. 재머 칩을 잃어버렸습니다."
왼쪽 손목의 옆면은 너덜너덜했다. 엄지와 검지로 헤집어 살이 짓무르고 찢어진 부분도 있었다. 아프지도 않은 건지 이스마엘은 잠깐 표정을 가다듬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입술의 양 끝이 바르르 떨리다 호선을 긋는다.
"아무래도, 그러니까, 그게, 카시노프가 훔쳐서 되찾은 칩이라, 다시 이식하는 과정에서 깊숙하게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놓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를 뒤로 이스마엘이 쥐여진 손목을 뿌리쳐보려 팔을 움직이려 시도했다.
붙잡았다. 네 손은 상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메스를 든 채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그 끝을 자신에게 향하던 손목을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붙잡히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목적을 향해 경주하려고 하는 그 손목에는, 팔에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너는 네게 향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날카로운 목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뿌옇게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니라 분명히 전면이 보였다. 물론 이목구비는 머리카락에 덮여있었지만, 그 틈으로 언뜻언뜻 너머 비치는 모습은 평소에 보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네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얼굴과도 달랐고... 뭣보다 네가 더 조그마한 탓에 얼굴을 완전히 푹 숙이더라도 그림자 너머는 언뜻 볼 수밖에.
"칩 말입니까? 잃어버렸다면 찾으면 되는..."
도저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잃어버린 재머 칩, 짓무른 손목, 서슬 퍼런 메스.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여기서,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메스로 손목을 찢고 그 안을 보겠다고? 그녀의 맨얼굴을 전부 보게 된 것도 대비되지 않은 충격이라면 충격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행동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너는 어쩔 수 없이 되묻고 있었다. 질문의 답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너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네게 스스로 묻는 셈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어떡하지? 지금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에 달려들어 버린 건 아닌가? 네 손을 뿌리치려는 듯한 움직임에 너는 여전히 손목을 붙잡으려고 손에 힘을 줬다. 아무리 그래도 이걸 놔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눈 앞에서 제 손목을 메스로 쑤셔댄다거나, 시선을 돌려 네게 메스를 휘두를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무실에는 가보셨습니까?"
문득 떠오르는 소문. 설마... 그제야 상황이 어떤지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아, 너는 이스마엘의 나머지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짓무르고 찢어진 손목, 메스 같은 날붙이로 깔끔하게 베어낸 게 아니라 신경질적으로 긁고 후벼댄 흔적, 한참을 그 손목을 쳐다보던 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씻고 왔습니다! 반응이 늦긴 했지만, 레시는 뭔가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것 같네요.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본인이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그거랑 별개로 잠옷은 참 귀엽네요, 모에한 소매야...
>>507 검은 루시아에 대해서요! 일단 루시아는 지금 에델바이스의 보검에 에스티아가 넣어두었다고 들었는데, 똑같은 세븐스가 둘 이상 존재할 수도 있는 건가요? 세븐스 숫자라든가 생각하면 겹치는 게 있을 거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에델바이스랑 부딪히면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일종의 복제품일까요?
>>511 >>514 오 뭔가 이게 그럴듯한 추론 같네요, 일단 부활...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시체 조종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나왔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봐요! 그렇담 세븐스 자체도 좀... 몸에 머무르는 건지, 영혼과 같은 부분에 영향을 받는 건지가 궁금해지는데...!
재머가 없었기 때문에 기계음으로 대체된 목소리가 아닌 본연의 것이 흘렀다. 자신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도 모를 정도였는지 더듬거리며 내뱉는 단어의 배열은 규칙적이지 못했다. 올려낸 입꼬리가 바들거렸다. 웃듯이 휘어진 눈에 박힌 연두색 시선은 갈팡질팡 흔들렸다. 혼란스러웠다.
"예. 여기서."
잠깐 갈 곳을 잃었던 시선이 멈춘다. 왜 자신을 멈추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왜 자신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걸까. 순수한 의문이 담긴 눈동자가 온전하게 당신에게 내리 박혔다. 눈을 뜬 모습 자체는 평범한 사람과도 같았으나 연두색 홍채가 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 몽롱했다. 당신의 질문에 기이하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을 고민하고 곱씹기보다는 과거의 흔적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의무실……. 아, 의무실. 예.. 그 이후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스마엘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피가 흘러 떨어진 땅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이며 조그맣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문장이다. 주체는 온전하게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곱씹어 보며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 반절이었고, 나머지 반은 대화를 어떻게든 이어가보자 남은 이성이 애를 쓰는 것에 가까웠다.
"계속 문을 두드리며 괜찮냐느니, 제발 문 좀 열어달라느니, 칩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느니 지껄이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때 날 가려주지 못했는데, 바람이, 내 편이 되어줬던 사람이……."
문장의 배열이 멈췄다. "그건 카시노프가 만든 가짜야…." 허망하게 중얼거리던 이스마엘은 연두색 눈동자를 홉뜬다. 촘촘한 속눈썹의 끝이 위로 향했다. 조그맣게 벌어진 입과 만면에 그려진 표정은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정확히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손목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프지 않냐니. 당신을 마주하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피었다. 이스마엘은 본래 눈부터 웃음이 피어나곤 했다. 이번엔 달랐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입가가 한껏 끌어당겨진다. 눈매가 호선을 그어대더니 접혔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안정한 미소였다.
"……모르겠습니다."
혹시 제가 아파 보입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현실이 아니잖아……. 목소리의 끝이 가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