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해주는 쥬데카의 말에 집중하며 아스텔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요컨대 경우에 따라서는 연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집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같이 밥을 먹을 정도면 자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일단 특별히 더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허나 이 논쟁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레레시아라면 과연 어떨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기도 하면서 그는 입을 다시 열었다.
"...너는 그렇구나. ...그렇긴 해. ...고작 안 떼어주는 것으로 틀어질 정도라면 그 사이는 처음부터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니겠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깻잎을 떼어주는 것 자체는 정말로 사소하고 아무래도 좋은 행동이었다. 떨어지지 않는다면 두 장 다 가져가서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깻잎을 반드시 한장만 떼어서 먹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영향이라고는 하나 역시 이런 쪽으로는 꽤 무지한 것이 크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가만히 침묵을 지ㅕㅆ다.
"...역시 공부가 더 필요하겠어. ...뭐랄까.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나는 싸우거나 죽이는 것 이외에는 크게 잘하는 것이 그다지 없다보니. ...물론 그렇다고 내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거든. ...여러모로. ...가르쳐줘서 고마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알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나 이내 그는 쥬데카를 바라보면서 살짝 목소리를 줄이면서 그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그 목소리는 상당히 은밀했지만 그래도 정말로 가깝게 있는 그라면 아마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잡지를 보고 있다는 것은 가급적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해줘. ...그다지 알리고 싶진 않아서."
당연하지만 그 대상은 제 연인이었다. 연애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런 잡지를 사서 보고 있었다는 말이 알려지는 것을 생각하니 그건 조금 부끄러웠는지 이내 아스텔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허나 재빨리 자신의 세븐스를 이용해서 자신의 얼굴을 식힌 후, 그는 쥬데카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는 이런 것에 관심 있어? ...그러니까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라던가."
어느새 호수가는 마리가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에델바이스 근처에 있는 호수는 꽤 넓었으니 누군가와 마주치거나 할 일이 적기는 했지만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으면 그저 방안에 있으면 될 것을 일부러 호수가에서 혼자 청승을 떠는 것은 아마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리라.
특히 마리는 레이버 전 이후로 호수가를 찾는 일이 더 많아졌다. 가디언즈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 사실 처음에는 설득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투 중에 말을 섞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 중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더 물을 걸, 더 들을 걸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드는 이유는 레이버의 과거를 알게되면서 자신과 그녀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내 엄마와 아빠는... 너희같은 테러리스트. 세계의 질서와 규율을 없애려는 이들에 의해서 죽었어.'
라고 말한 레이버의 말이 가슴 한 구석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우리 부모님은 가디언즈, 세계의 질서와 규율을 지킨다는 이들에게 죽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상황이 지나고 나서야, 마리는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말. 누군에게도 닿지 않는 말이었다.
자신이라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부모님의 원수를 모두 죽이고 나 또한 따라 죽는 그런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생각에서 벗어난 것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스승님과 또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부모님의 유지 덕분이었다.
그래.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손에 피를 묻히리라. 내가 죽인 이들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에게 자신은 복수의 대상, 즉 원수이리라.
제 손에 피를 묻히면서 누군가의 복수의 대상이 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한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는, 나는 누군가에게 복수할 자격이 없다, 라는 것이었다.
"...피곤하다."
피곤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눅진한 무력감과 무거운 죄악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그 말을 꺼낸 것이다.
호수의 물이 찰랑거리는 그 바로 앞 축축한 풀잎들 사이에 앉아있던 마리는 이내 풀잎 사이에 몸을 뉘었다. 마치 고양이가 그러하듯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가을이 깊어지고 바람은 차가웠다. 눈을 감으며 침잠한다.
세계가 자신에게 너무 잔인하다.
에델바이스에 온 이후 계속해서 자신의 아픈 과거와 부딪힌다. 마을을 잃어버리고 살아남은 아이들, 가디언즈에 잡혀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아이들을 보았을 때 사실 마리는 옛날 망가졌던 자신을 떠올렸다. 레이버를 보며 자신을 떠올렸고 이내 그녀의 마음에 깊이 이입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입단한 단발머리의 그녀를 생각한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의 죽음 옆에 서 있었던 이들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너는, 왜 이곳에 왔어?
생각은 자연스레 가디언즈에서 배신했다는 쥬데카로 이어진다. 생사를 함께 넘은 동료. 그가 과거와 달리 에델바이스에 목숨을 걸고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쥬데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단지 그와 내가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 때문일까. 이제 그녀도 동료인데, 함께 세상을 바꾸어 나갈 이인데. 마음 속이 수런거린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그녀를 미워하기 싫어.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어? 네가 죽인 이들을 생각해 봐. 너는 그녀를 미워할 자격이 있어? 세계가 잘못된 거야. 그런 거야.
마리는 선우가 변장을 하고 함께 찾아보자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그저 웃음으로 흘려버린다.
"사실 십 년 전이니까.... 그 친구를 바로 알아볼 자신이 없기도 해. 기억나는 부분도 적고.... 만약 변장하고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좀 더 자신이 똑똑했다면, 혹은 충격에 망가지지 않았었다면 온전히 그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고향에라도 갔다가 그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조직에 폐를 끼칠 수도 있는 거구. 역시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행동할 수는 없어."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났는지 선우를 바라봤다.
"음, 혹시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세상은 좁다고 하니까 네가 아는 사람 중에 내 친구가 있지는 않을까? 그,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름은 쥬드이고, 나이는 아마 나보다 두 세살 많았었던 것 같아. 남자고 세븐스이고. 음... 세븐스 능력은 아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어. 아마 정신계통이 아닐까 싶구. 외형은... 지금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머리카락은 녹색이고 눈동자 색은 어두운 계열이었던 것 같아."
머리카락 색이 녹색이었다는 건 최근에 생각난 거라고 덧붙였다. 선우에게 설명하기 위해 기억을 되살리려 하면서 하나하나 나열하다보니 전체적인 인상을 잡혀가는 것 같았다. 혼자 생각했을 때보다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뭔가 추상적이었던 것이 구체화되는 것 같고. 또... 쥬데카가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버렸다.
"혹시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가 있었어?"
마리는 조금 기대하는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쥬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대감이 서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