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굳건히 전장에 서던 그녀는 언제나 새하얀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부상을 입어도 꿋꿋이 서서 금빛 눈으로 저 먼 앞을 바라보았다. 부러뜨려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두 다리였는데. 그렇게 허망히 무너질 줄 누가 알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혁명의 마지막 희생은 그녀였다. 초를 다투는 순간을 넘어 살아남은 이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숨도 심장도 멎어 다만 희미하게 남은 미소 만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했고, 세상은 바뀌었다. 모두가 바라던 세상으로.
...시간이 흘러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무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눈 깜빡하니 부쩍 추위가 느껴지는 어느 날이었다. 해가 저물었는데도 왠일로 바깥이 소란스러워 굳게 잠가두었던 창문을 열고 내다보자, 색색의 호박등이 거리에 달려있고 여러 모습으로 변장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Trick or Treat! 익히 아는 말들이 들려오자 그래 이 즈음이었지, 싶다. 느닷없는 찬바람이 불며 곧 겨울이 올까 싶던 이맘때. 이 계절.
진짜 딱 한 번 만이니까! ......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에 창을 열어둔 채 돌아서 숨을 골랐다.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른 세수를 하며 속을 진정시키는데 뒤에서 창틀이 달그락 울렸다. 그리고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다급히 뒤를 돌자-
"표정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생전과 같은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장난스레 반짝이는 금빛 눈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희미해질 것처럼 창백한 모습을 한 그녀가, 창틀에 걸터앉아 싱긋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흐려지고 뭉개져서 어쩔 줄 몰라하니 익히 아는 웃음소리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여전히 울보구나. 하긴. 너니까."
나 없으면 울지도 못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보다 깊은 이해자였던 이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긴 시간 눌러놓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숨 가쁘게 울며 그녀를 부르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다가와 토닥여주는 손이 너무나 선명하게 차가워서. 울음을 쉬이 그칠 수 없는데 이렇게라도 만난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미안해. 약속 못 지켜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다는게 느껴져서. 울면서도 더듬더듬 그 손으로부터 차가운 몸을 끌어안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헤어질 테니 시간이 얼마 없더라도, 지금은 그저 더 작게 느껴지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만이 최선이라 느껴졌기에.
멜피와 함께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헤어진 이후, 여전히 밝은 가로등과 대비되는 묘하게 우중충한 바닥 색깔로 버무려진 할로윈의 거리를 둘러보면서 걷는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사탕을 주기도 하고, 사탕을 받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더 늘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사탕바구니를 흔들던 너는 어딘가 잠시 앉아서 쉴까 하고 시선을 돌렸다. 마침 눈에 들어온 건 할로윈 풍으로 장식된 벤치, 그리고 그 벤치에 앉아 있는 아스텔의 뒷모습이었다. 아마 뱀파이어로 분장한 거겠지? 음, 확실히 고전적이면서도 모범적인 답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쪽으로 다가가본다. 가만 보니 뭔가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잡지?
"......"
훔쳐본다거나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네 눈이 밝은 편인 걸 어쩌겠는가. 얼핏얼핏 보이는 잡지 내용을 보니 자잘한 정보가 담겨있는 듯했다. 으음, 굳이 따지자면 남자아이들이 잡지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이 주로 읽을 만한 잡지 같은데. 모처럼이니 좀 놀래켜 볼까 하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아스텔이 놀라거나 하는 표정은 못 본거 같기도 하고. 오늘은 조금 가벼운 기분인 채로 있고도 싶으니까.
"Trick or treat!"
와악, 하는 느낌으로 아스텔의 어깨를 덥썩 잡으려고 하면서 그렇게 소리친다. 사탕, 준비했으려나?
연애. 그것은 지금껏 아스텔이 살아온 세계와는 딴판인 세계였다. 자신은 싸우고 죽이는 것 외에는 잘하는 것이 그다지 없었다. 허나 이런 자신도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었다. 아예 모르던 것이라면 모를까. 한번 맛 본 그 분위기는 너무나 달콤했고 놓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임무를 게을리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렇게 비번인 상황일 때 시간을 내서 그 분야를 조금 더 연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한번 제 품에 들어온 그녀를 놓거나 할 생각은 그에겐 없었다.
아무튼 제대로 연구를 하기 위해 서점에 가서 연애 정보가 담겨있는 잡지를 구입한 아스텔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그 잡지를 읽었다. 그러니까 보통 데이트는 어디로 가면 되는가. 분위기와 무드는 어떤 것이 중요한가. 연애의 진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벤트는 무엇이 좋은가. 그런 것들을 학습하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깊게 집중하면서 읽었으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방금 읽은 페이지에 있는 '관람차'를 타면 입맞춤을 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라는 부분이었다. 아니. 왜? 단순히 높게 올라가는 것 때문이라면 자신은 그녀를 안고 몇 번이나 하늘을 날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없지 않았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스텔은 흐음. 소리를 내면서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때였다. Trick or treat! 라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덥썩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아스텔은 깜짝 놀라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들려고 했으나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모습에 순간 멈칫했다. 헛기침 소리를 내면서 아스텔은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미안. ...그리고 Treat."
이어 그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몇 개 사뒀던 사탕 중에서 커러멜 사탕 세 개를 꺼낸 후에 쥬데카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음. 조금 습관이 되어있어서. 정말로 미안. ...아무튼 강시야? 그 복장은? 아. 맞아. 그것보다... 해피 할로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