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설명한 이유도 제법 믿을만한 사유지만, 제는 태어날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얘기해 주는 사람마다 그리 말했으니 달리 본인이 할 말은 없었다. 가끔 어릴 때의 사진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볼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웃음을 지었으나 제는 여전히 표정을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굳히고 있었다. 조그맣게 다물린 입을 뒤로, 새로운 것을 던져주자 잡아낸다. "아, 고맙네." 맵고도 단 냄새. 이건 익숙하고 제법 맛있던 것이었는지, 제는 짧게 감사를 표했다. 탄산은 아마 제의 입맛에 맞지 않는 듯싶다.
이해한다. 사연 없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좋은 미끼였고, 제에게 있어서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당신과 달리 이렇게 사연 가득한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 언젠가 분란이 나지 않을까 싶은 흥미. 그렇다면 로벨리아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유라는 것도 급을 나눠 주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재밌을 텐데. 제는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계피 향이 입에서 은은하게 감돈다.
"사연이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당연히 사연이라고 해야겠지. "
제는 과거를 곱씹었다. 웃음, 시끄러운 소리, 비명, 환호, 숭배……. 죽음은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으니 이젠 목전에 두어도 그러려니 싶은 삶. 세븐스 하나가 살려달라 빌었으나 머리를 터뜨리니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날. 글쎄, 이것을 사연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우스운 일이다. 당연한 삶을 살았을 뿐인데 결국 누군가에겐 사연이 될 뿐이지. 제는 다시금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고작 소시지 하나, 수정과 두 모금. 이걸로 식사는 충분했던 것인지 잔 내려놓는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온 이상 충분한 이유겠지."
제 느긋이 눈 들어 올린다.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지는 것 같다. 마치 앞만 보는 사람처럼.
고민 없는 대답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둘 다는 안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그녀가 생각하는 아스텔은 개인적인 이유를 고를 것 같았으니. 알았다고 말하고 그녀도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즙 빠진 레몬 조각만 덩그러니 남은 잔을 살짝 옆으로 밀어두고 몸을 테이블에서 떨어뜨려 의자에 기댄다. 다음 잔은, 대답을 한 뒤에 시키기로 할까. 일단 듣고.
진실게임에서의 그 대답에 대해 추궁 아닌 추궁을 하자 아스텔은 그게 뭐가 문제였냐는 듯이 말했다. 그 상황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가장 적합한 답을 내놓은 것 뿐이라고. 농담하냐고 하고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진지하다... 그 순간에는 그녀도 표정이 난감, 아니 허탈해졌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그를 향해 손을 저었다.
"아냐. 뭐 그건 게임일 뿐이었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한 대답이라면 됐어. 겨우 그런 거였냐- 는 기분이라 좀 그렇긴 한데."
기분이 나쁜 건 아니라며 늘어뜨린 손을 휘휘 가로젓고 내려놓는다. 헌데 방금 그 대답으로 김이 빠지니 술이 당긴다. 서로 잔이 비었으니 다음 잔부터 시키자며 아스텔의 앞으로 메뉴판을 밀어준다. 그리고 손짓으로 부른 점원에게 레레시아 먼저 주문을 넣었다.
"러스티 네일. 그리고 마른 과일을 약간."
첫 잔을 위스키로 했더니 오늘은 위스키 입맛이 된 듯 하다. 두번째도 같은 베이스의 칵테일을 주문하고 아스텔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무엇을 골랐든 주문을 하고서 점원이 빈 잔을 가지고 돌아간 후에, 갈 곳을 잃은 듯한 두 손을 잠시 쥐고 펴다가, 포개서 얌전히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것을 신호로 그녀가 말했다.
"아까의 이유 말인데. 대외적인 이유는 그냥 동료로서 이런 자리 한 번쯤 괜찮지 않느냐 이고. 개인적인 이유는 뭐... 데이트 신청 비슷한 그런 거 였는데."
그냥 그렇다는 투로 대답을 툭 내놓더니 고개 스윽 돌리고 노란 눈동자 데구르르 굴러 옆으로 향한다. 답을 내놓고 꾹 다문 입술이 아 저질렀다- 같은 느낌도 든다. 시선 향한 곳에 나뭇결 가득한 벽 밖에 없지만, 그 벽에 뭐라도 있는 양 시선을 꽂고서 중얼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무작정 한 명을 어떻게든 찍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 물론 찍으라면 찍을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가 조금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상황 아닌가. 그건. 자신이 그런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아스텔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술을 골라야 하는 때가 된 것 같아 아스텔은 가만히 술을 바라봤다. 역시 자연히 그의 눈길은 맥주 베이스로 향했다.
"여기 이 스네이크바이트라는 것으로."
일단 맥주가 들어가면 자기 입맛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주문을 마쳤다. 딱 그 무렵이었을까? 레레시아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전자는 대충 예상한 내용이었으나 후자는 응? 하는 표정을 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말하는 것에 아스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허나 괜히 목이 타는지 컵에 물을 따라서 그 물을 원샷으로 처리한 후 아스텔은 가만히 레레시아를 바라봤다.
"데이트라는 것이 내가 일반적으로 상식으로는 알고 있는 그 데이트?"
이내 아스텔은 약하게 음. 소리를 내면서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상황이 꺼려진다거나 그 답이 자신에게 있어서 꺼려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좋냐 싫냐라고 따지면 좋았다. 지금껏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기도 하고....
"...레레시아."
이내 아스텔은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들은 다 애칭으로 부르고 그러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이어 잠시 또 침묵을 지키던 아스텔은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제 뺨을 살며시 긁적였다.
"그러니까. 음. 그런 거 받아본 적이 처음이라서. ...알다시피 내가 알고 지낸 이들은 대장과 에스티아 정도니까. ...아니. 뭐, 완전히 그건 아니고 에델바이스 내에서 몇명 더 알고 지내긴 했고 초창기 멤버의 제임스라던가, 리키라던가 친하게 지내는 이들도 있긴 한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 진짜."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말을 깔끔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던 아스텔은 이내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다가 살며시 내리면서 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아니. 일단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겠네. 그러니까 그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알려져있는 그 데이트 신청인거야? 아니. 개인적인 것이라고 넘길 순 없잖아. ...일단 난 당사자니까."
"그래. 그대로 둬선 안돼. 무엇보다 그 안에는 배신자도 있어. 글라키에스의 손아귀에서 운 좋게 벗어났다고 하지만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U.P.G 본부 건물 제 13층. 가디언즈를 이끌고 있는 간부 클래스 세븐스 중 한 명인 레이버는 카시노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전, 에델바이스와 무승부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전투를 이끌어가던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전 글라키에스가 관리하고 있는 시설에 처들어가서 아이들을 모두 빼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내 그녀는 잠시 말을 끝낸 후에 카시노프를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이번엔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쓸어버릴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니까 그 녀석들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실행해줘."
"켈켈켈. 확실히 나도 그 녀석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블러디 레드를 하나 파괴한 것도 모자라서 하나는 탈취하고 기껏 잡아놓은 아이들도 풀어준 건방진 녀석들이지."
"그래. 그러니까 내 손으로 없애버릴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저번처럼 도망가면 안돼. 도망칠 수 없게 만들어야 해."
"지원은 필요없나? 다른 이들에게..."
"필요없어. ...나에게 굴욕을 준 이들이야. 내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그 녀석들의 성향을 생각해봤을 때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무조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법이 말이야."
뭔가를 떠올렸는지 카시노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버는 가만히 그런 카시노프를 바라보면서 숨을 죽였다. 뭐든지 상관없어. 실행해줘. 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카시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쥐새끼들을 끌어내려면 그럴싸한 미끼를 던져주면 되는 거야. 일단 기다려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내가 준비해둔 것이 있으니까."
평화로운 나날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 0 특수부대가 구출한 아이들이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시설 중 하나가 습격당했다. 그리고 그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20명의 아이들이 가디언즈에게 다시 붙잡혔다. 이미 철저하게 정신이 파괴되어 저항할 생각도, 도망치지도 않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순순히 끌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를 하고 있던 제 2 치료부대 중 단 한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한명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겨우 로벨리아에게 도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령을 남기고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벽으로 향한 눈동자엔 부드러운 나무결과 진한 갈색과 엷은 갈색이 만들어내는 나무의 단면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결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다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향할라치면 얼른 다시 벽으로 돌아온다. 지금껏 잠깐 시선을 돌리긴 해도 이렇게 고개까지 돌리고 피하진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게 더 이상하잖아.
그 대답을 해놓고 그녀는 가만히, 조용히 있었다. 앞에서 시선이 느껴져도 그대로. 물 마시는 소리가 나도 그대로. 굳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샌가 테이블 아래 무릎 위로 옮겨 간 두 손이 맞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러니까 아스텔이 하는 말을 확실히 듣고 있다 이거였다. 단지 반응을 안 했을 뿐이다. 그러는 것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되었지만.
"...뭘, 그냥 그러려니 하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 하다가, 확실히 해야겠다며 다시 그 말의 진위를 묻는 아스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레시아가 시선을 슥 내리며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료로서 마시자고 한 거라고. 그것만 말할 걸 그랬을까. 술이라도 빨리 나오면 좋겠는데 시간이 멈췄는지 늘어졌는지 잠깐이 영겁 같다. 아. 됐어. 그냥 말하고 술 나오면 마시자. 그거 하나 대답하는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거 맞아. 그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거. 그거 말고 달리 뭐가 있는데."
어쩌다보니 톡 쏘아붙이듯한 말투가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답은 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주문한 술들이 나와서 그녀는 그녀의 것인 잔을 가져와 물처럼 들이켰다. 안 그래도 작은 잔을 잔숨에 반이나 비우자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 했다. 그 상태로 다시금 툴툴댔다.
맞댄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거. 벌이 쏘듯이 톡 쏘는 말투에 아스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막 나온 술을 천천히 마셨다. 꽤 당황한 탓인지 맥주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왜 갑자기 이쪽이 혼나는 입장이 된건지 알 수 없어 그는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 자신이 혼나야 할 입장은 전혀 아니지 않은가. 뭔가 지금 상황 되게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무의식적인 생각이 천천히 흘러갔다.
"...문제는 없어.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세상 돌아가는 것에 약하니까. ...바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나 싶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미스인가. 괜히 안주를 손으로 집어서 하나 먹고. 아스텔은 잠시 말을 골랐다. 데이트라는 것은 보통 호의가 있는 이에게 신청하는 것이 아니던가.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레레시아가 자신에게? 그다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내 아스텔은 어떻게든 말을 골라내서 이어나갔다.
"...기분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아."
적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다는 듯, 아스텔은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리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키다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면서 그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멋대로 상상해버리고 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싫다면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한다면 더 말 안할테니까."
자신의 감이었으나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 그건 그것대로 더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답을 기다렸다. 허나 상대가 언급 안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자신도 입을 다물어야지. 굳이 억지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물론 묻기야 하겠지만 이건 그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수잔나가 죽었다고?" "예. 방금 비보가 들어왔습니다." "안타깝게 됐어. 개인 교육용 안드로이드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죽어버릴 줄이야. 뭐, 자기 연민 하나 불러일으키자고 자식 하나 못 키우고 처분했다 방송에서도 지껄였겠지. 그럼 다른 세븐스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 나였어도 죽였을 걸."
가란은 품에 안긴 무언가를 간지럽히듯 자상하게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미동도 없는 무언가를 사랑스럽진 않지만 그런 듯싶게 바라보던 가란이 다시금 입을 벌렸다.
"뭐, 그 여자 죽었다니 나도 안심은 못 하겠네? 그 여자보다 내가 더 나쁜 새끼니까. 사지라도 찢기면 그게 다행이겠지?" "그, 그럴 리가요. 보스가 어떻게.." "농담이야." "아, 아하." "뭐해? 웃어."
가란이 연구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벌렸다. 연구원은 애써 마른 웃음소리를 내더니 강화유리로 된 벽 너머로 시선을 옮겨 던지다 후회했다. 강화유리 너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낭자하게 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난 안 죽어." "가디언즈의 비호가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 폐하께서 날 지킬 테니까." "폐하, 께서요?" "응."
가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강화유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나마 덜 더러운 틈새 너머를 봤다.
"폐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나아가서 이곳을 지켜주실 것이야. 보렴, 벌써 그 미친 반동분자끼리 서로 좋다고 얼싸안다 남은 부산물을 여섯이나 찢었잖니? 그러니까 이건 이제 버려야겠다. 적당히 처분해 줘."
가란이 연구원의 품에 아무렇게나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방부처리도 하지 못한 세븐스의 잘려나간 머리. 연구원은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려 무진 애썼다. 가란이 강화유리 너머 합금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연구원은 부패가 시작됐을 때 나는 역겨운 냄새에서 아찔해졌던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막아세우려 했다.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위험합니다." "너, 거슬리네."
가란은 잠시 연구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문을 열어버렸다. 피비린내가 자욱하고 곳곳에 널린 고깃덩어리와 홀로 서있는 아이 하나만이 이 안에서 있던 일이 무엇인지를 짐작게 했다. 홀로 살아있던 조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머리였을 텐데 지금은 온통 붉었고, 헐렁한 옷도 온통 샛붉다.
이제 보니 가란은 눈물을 짓고 있다. 자수정 빛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뚝 떨어지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칭찬을 해주다가도 이젠 울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싶은 눈이었다.
"무슨 일이더냐, 가란. 어찌 울고 있는 게야?" "마음의 상처는 옮는다기에 신이 가까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대체 누가 네게 가시를 박았더냐. 고하라."
조그마한 얼굴에 놀람이 깃들자 가란은 눈을 연구원 쪽으로 흘겼다. 잘린 목을 들고 멀뚱히 선 연구원의 뒤로 가란을 경호하던 여성이 서더니, 이내 그를 강하게 걷어차 강제로 합금으로 된 문 너머로 들여보냈다. 아이가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자연스레 돌렸다.
"저것이냐." "……." "저것이 대체 무어라 했기에 네 그리 눈물짓는 것이냐." "신과 폐하의 유대를 모욕하였기에……."
가란이 작달만하게 속삭였으나 아이는 확실히 들었는지 일순 꼬리를 팽팽하게 폈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연구원을 쳐다봤다. 주변에 묵직한 기류가 흐르자 연구원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미친 녀석이 거슬린단 이유로 날 죽이려 하는구나! 아이가 연구원을 향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연구원은 뒤로 물러났지만, 합금으로 된 문이 서늘하게 등에 닿았다. 연구원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뒤로 돌아 문을 박박 긁어대기 시작했다. 절망 어린 비명이 목을 타고 흘렀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날 죽이면 반역이야, 반역이라고!"
아이가 어느덧 연구원의 앞에 섰다. 가란은 아이의 뒷모습 너머 절망에 빠진 연구원을 보더니 눈웃음을 지었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반역은 네가 저질렀지. 감히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의심을 품은 죄. 잘 해봐. 연구원은 도망치려는 듯 움직였으나 그 이후 끔찍한 비명소리를 뒤로 쓰러져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패한 세븐스의 머리가 피에 젖어들었다. 잠시간의 정적을 뒤로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되었구나. 그렇지?" "폐하."
가란은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가란의 품에 능숙하게 안겨 웃는 아이는 풍경과 다르게 사랑스러웠다.
"은혜에 감복하였으나, 폐하의 옷에 꽃이 피었습니다." "네 보기에 아름다우냐?" "폐하에 비견될 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장관 입지요." "네 아팠으니 그만큼 대갚음 한 것이노라. 바깥 녀석들은 날 시해하려 들고, 오직 너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제일 총애하는 자가 어찌 상처를 입도록 두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