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아닌 것 같다. 아닌가? 그가 무감정하게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조금 되는 듯한 모양새였기에 너는 진심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마 농담이겠지.
"그러게요, 대체 누가 사람의 정의를 내렸을까요."
막연하게 이런 존재라면 사람이다, 인간이다 하는 생각은 있었을지언정 어째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건 아닐까? 그래도 모처럼 생긴 기회에 너는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런 부분은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굳이 범주를 정하고 싶지도 않고요."
인간이 다른 동식물들을 분류할 때 쓰는 방법을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까? 좀 더 멀리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과도 닮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바라보는 우리는 어떨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라 불리는 종 각 개체를 동일한 개체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당장 네 앞에 선 그와 너조차도 많은 게 다른데. 대체 뭘로 묶어 인간이라고 부르겠느냐 그 말이다.
"하하... 이상적이라기보단 조금, 답답한 게 아닐까요? 상상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냄비에 물을 받으며 비아냥 섞인 말을 건네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너는, 혹시 뭔가 할 게 없을까 싱크대 주변을 살폈다.
"미쳤을 때 본 게 진짜 본연의 아름다움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외려 미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미쳐 살아가는 거겠죠."
어느 쪽이든 반대편에 놓인 것을 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러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셨음 해요."
너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었고, 그가 좀 더 긍정하는 사람도 이기적인 존재였으니. 이타적으로 비춰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너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그가 꺼내는 유머를 들었다.
"조금 아쉽네요, 나중에 기억나면 말씀해주세요."
아마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먼저 꺼낸 이야기었기에 꽤 기대했건만 답을 들을 수는 없었으므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는 이어진 질문에 대해 답을 해야 할 때였다. 술을 잘 마시냐는 물음.
"잘 마시는 편은 아닙니다, 쓴 걸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도 해서요."
에봇은 어떠십니까? 그는 술을 잘 마실까? 잘 마실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되물었던 너는 틀을 집어넣은 뒤에 그가 앞으로 나서자 뒤로 물러선다. 곧 오븐이 닫히고 타이머가 설정된다. 이제는 오븐에서 파이가 구워질 동안 뒷정리를 하면 되는 걸까, 싱크대를 돌아보고 설거지를 대신 해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를 따라 너도 싱크대를 쳐다본다. 싱크대의 넓이가 적당히 넓다면 아마 너도 설거지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스물 넷입니다, 에봇은요?"
뜬금없을 수 있는 질문이긴 했지만 사실 이름을 서로 주고받았을 때에 나왔을 만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너도 지금이 때라고 생각한 건지 그의 나이를 묻는다.
제는 눈을 떴다. 상반신만 일으키며 코를 세우자 피 비린내가 자욱하다. 명색이 황제인데 이런 곳에서 잘도 잤다. 아무렴 어때, 폭군이라 하든지 말든지. 고깃덩어리 사이에서 자는 게 한두 번이게. 졸음이 가시지 않아도 팔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 제를 잡아 안아올렸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기다렸더냐." "신은 늘 곁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지요." "말은."
>>57 (ㅇ0ㅇ)(깨달음 방어형이 끌리긴 했지만 방어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잘 안 되더라구요... 대신 막아주는 것 자체는 지금까지 몸으로 떼웠는데 음... 아 보검 효과니까 보검 무장으로 막는거라고 하면 상관...없나? 캡 혹시 버스트 지금이라면 바꿀 수 있을까요?
(*농담입니다*) 걱정은 아니고, 그냥 퍼뜩 떠오른 무언가였다. “요 근래 시내에서 결혼 생활 파탄나는 집안이 많이 생겼던데, 원인이 뭘까 안 궁금해?” 뭔 바람이 불었는지, 그저 짖궂은 장난을 치고 싶은 기분이 든 모양이다.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가도, 눈을 깜박이면 다시 무덤덤한 얼굴이 보인다.
“범주를 정하는 의미도 없을 것 같네.”
정해 봐도 그런 것은 넓게 보면, 비세븐스가 세븐스를 보는 시선 비슷해지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더 큰 건 본인들이 아무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여도 사회 체제는 굳건할 것이다. 바뀌는 것이 없을 테니 의미가 없는 대화다만, 흥미가 있으면 그걸로도 의미는 된다고 생각한다. 뭐라 할 말이 있던 듯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당신을 내려다보다가도 곧 시선은 다시 닦던 냄비로 다시 한다.
“답답하네.”
당신의 답에 긍정하듯 메아리친다. 자신의 비꼬는 말에도 일관적으로 답하는게 그닥 마음에 들진 않는다. 대화의 서두부터 그래왔다만, 그래고 대놓고 기분 나쁘라고 속 긁어대는 태도를 그냥 넘어가는 사람은 불편하다. 자신과의 대비도 불편하고, 그냥 이해도 안 되어서 이상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식었다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신경 쓰다가도 말아버린 것이 얼굴에 훤히 드러난다. “상상력 부족하면 뭔 재미로 살아?” 무던한 회답을 하며 싱크대 주변을 살피던 당신을 눈으로 좇는다.
“말은 잘 하네.” “지금 보는게 본연의 아름다움이라면 어때. 넌 만족해?”
자신은 만족 못 하는지라,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정상인이라고 농을 떨듯 말을 끝마친다.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해 달라는 당신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다. “너 하는거 봐서.” 차가운 얼굴을 하다가도 끝에 가선 살풋 미소짓는걸 보면, 부정적인 답은 아닐거다.
“지금까지 기억 안 나는걸 보면 앞으로도 여전할지 싶은데.” “미안해서 어째, 말 하다 마는것 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는데.”
그의 미안하다는 말은 진정성이 하나도 담기지 않아 무미건조 하게 들린다. 어째 당신이 조금은 아쉬워하는것 같다는 기분이 들지만 굳이 뭔가 더 말하진 않는다. 술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는 당신의 답을 들으면 그래보인다고, 들으면 실례 될수도 있는 말을 딱히 필터 거치지 않고 내뱉는다.
“알코올이 몸에 안 받는지라, 안 마셔.”
요전에 회식 때도 술은 안 마시고 물만 마셨었다. 마셔도 취하기 전에 토기가 오르고, 얼굴만 벌게지는게 그닥 보거나 느끼기 좋은 것도 아니니 마실 연유가 사실 없다. 설거지를 도우려 하는 당신을 보면 옆으로 살짝 비켜 서준다. 다 씻은 식기들은 건조대에 널듯 차곡히 집어넣으며 대화를 잇는다.
“스물 넷? 나랑 차이..”
차이가 별로 안난다고 하려던 말을 흐리고선 끊어버린다. 때문에 애매해진 문장. 외형만 봐서는 미성년자에 가까운 나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아직 어린 티 못 벗은 것이 꽤 의외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이를 물으면 곧 답하려다가도 자신이 예전에, 처음 입사했을때 들은 응수를 기억해낸다.
진심이라는 말과, 이어지는 시내에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은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냐는 말이 이어지자 너는 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려나. 농담이겠지.
"답답하죠... 저도 안답니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맞장구 치는 듯한 그의 말에 너 역시 다시 한 번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상력이 모자라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말까지 들려오자 너는 그러게요. 라면서 운을 뗐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으니까요."
참 다행이죠, 라면서 싱크대가 넉넉한 걸 확인하고 유루가 닦고 있지 않은 주방도구들을 닦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쏴아. 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진다.
"으음... 사실은 말이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해도 제가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지금 처한 모든 상황 전부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족한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정상인과 광인은 종이 한 장 차이, 뒤집으면 정 반대가 되고 서로 마주보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너 하는거 봐서 결정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눈가를 살짝 휘며 웃을 뿐이었다.
"그건...아쉽네요, 기억이란 건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니까요."
언젠가 생각이 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렇군요, 그럼 술자리는 싫어하세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술자리에 대해 생각하는 건 별개라고 생각했기에 너는 그에게 살며시 물어보았다. 너도 술자리 자체는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으음... 스물... 여덟?"
그가 말을 흐려버리자 힌트가 될만한 걸 찾을 수가 없어져 하는 수 없이 그의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를 생각해야만 했다. 일단 너는 나이를 구별하는 데 고려할 대상은 아니었다. 당장 그 나이대로 보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아니 아마도 없었으니까. 그러면 그는 몇 살 정도려나. 일단 겉모습만 봐서는 중년 같지는 않았다. 그럼 청년일텐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 하면 그래도 대화를 주고받을 때 딱히 막힘도 없고, 고민하는 기색 없이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나름 생각을 충실히 정리하고 살아온 시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20대 후반이지 않을까.
보검 사용자의 세븐스를 더욱 증폭시키는 힘이니 뭐니, 글라키에스의 친절하고 정연했던 설명은 그의 기억에서 성의 없는 한 줄짜리 요약본으로 변해버렸다. 쉽게 말해 존* 세지게 만들어주는 힘이라는 것 아닌가. 복잡할 것 없이 명확한 기능이라 편했고, 실제로 그 위력 덕에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으나 마냥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제의 일은 여러 행운이 겹쳐 우연히 얻어낸 결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운 좋게 위기의 순간 보검의 숨겨진 기능이 발동되었고, 어떤 이유에선지 여유를 부리면서도 결코 틈을 내주지 않았던 상대가 눈에 띄게 흔들렸으며, 때마침 탈출 직전 아스텔이 합류해 시간을 벌어주었으니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일 테다. 그렇게나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도 휴식 없이 곧장 뛰어다녀도 무리 없을 만큼이나 멀쩡했다. 비록 그 운이 누구에게서 비롯했는지를 떠올리자면 기분이 찜찜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은원에 충실했다. 의도나 본심이 어땠든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면 그것은 분명한 호의다. 제 대신 공격 받아 피투성이가 되었던 동료의 모습이 기억에 그린 듯 선연했으므로, 어떤 방향으로든 신세 진 이상 그것을 곧이곧대로 되갚거나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힘써야 했다. 날이 다 밝기도 전에 훈련실로 달려가서 부지런히 머리 굴려가며 이것저것 해대느라 바쁜 것도 그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사용법을 깨닫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세밀한 조정과 파악이 필요했다. 어디에서부터 무엇까지 가능한지, 어떻게 조합해야 가장 효율적인 활용이 가능할지. 직접 활동하며 익히는 시간만큼이나 생각하는 시간도 길었기에 몸이 지치는 않았지만, 천착에만 몰두하다 보니 생각을 환기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오늘은 이만 할까 싶어 막 자리를 뜨려고 하던 때였다. 한편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몇 번쯤 보아온 익숙한 얼굴이 그의 눈에 들었다.
"오, 나한테 이상형 털린 놈. 몸 존* 멀쩡한가 보다?"
……말을 이따위로 하지만 반갑다는 뜻일 거다. 그러는 자기도 몸 존* 멀쩡한 새*니까 틀림없이 비꼬는 말은 아니다. 마침 쉬어야겠다 생각하던 참인데 딱 좋게 나타났네. 그는 참 얄미울 정도로 실실거리며 쥬데카에게 불쑥 다가가서는, 그의 길 앞에 멋대로 버티고 섰다.
생각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눈썹이 까딱 오른다. 오, 그새 이름도 지어줬나. 유루의 특이한 별칭에 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색채에 관해 박식하지 못해서 그럴듯하게 부를 파랑을 모르기도 하고, 이미 그만의 별칭ー또라이ー이 정착된 탓에 그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그는 아-하는 불퉁한 감탄사를 뱉으며 제 머리를 대충 쓸었다.
"아, 맞다. 그 새*도 그랬었지. 오늘 그 또라이 새*- 아니, 걔 본 적 있냐? 살아는 있나 해서."
말로는 나가 뒤져라, 짜증나는 새*, 미**, 기타 등등의 험한 말을 해대도 걱정되는 게 본심이다. 레레시아에게도 마찬가지고. 올려다보는 시선이 제게 닿자 그는 능청스레 웃기만 했다. 사실 용무 전혀 없지만 심심해서 괜히 놀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러는 거다. 그는 쥬데카와 길게 대화해 본 적 없었지만, 그간의 마주침에서 직감적으로 그가 장난치기에 좋은 상대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다.
"그게 후퇴한 직후에 의무실로 가신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직 못 만나봤습니다. 물론 살아계시지만요."
이야기 정도는 들었다. 아마 의무실에 가서 여러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려나. 나중에 만날 때 선물을 좀 준비해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승우가 여기서 하려던 일에 대해 듣는다. 그 직후에 되돌아오는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봐야 했고.
"버스트 말씀이시죠, 저도 비슷합니다."
위험한 임무였으니 쉬어두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마냥 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몸이 굳지 않도록 움직여주기도 해야 하고 지난번 글라키에스와의 전투에서 근접전으로 해결을 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무기도 좀 써볼까. 라는 감각으로 온 셈이다.
뭐, 살아 있으면 됐다. 나중에 찾아가서 속이나 긁어 줄까. 시답잖은 생각을 끝으로 머릿속에 떠도는 걱정을 치워버렸다.
"그래? 넌 씨* 어떤 건데? 나는 글라키… 그 ***이랑 같은 거일걸."
어떤 형태의 버스트인지 묻는 말일 것이다. 이야기를 하려니 필연적으로 어제의 상황이 뇌리에 스쳐갔다. 반응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일격, 그리고 후퇴하기 전 터뜨렸던 거센 불꽃과 충격. 음, 역시 생각하니까 좀 열받는다. 잠깐 놀리느니 마니 해도 시시껄렁한 소리나 좀 하다 나가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팔짱 낀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대뜸 말했다.
"야. 뜨자."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결론내는 꼴이 참 제멋대로다. 그렇지만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사고를 거쳐 내린 판단이었다. 어차피 혼자서만 줄창 연습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붙어가며 배우는 게 더 나을 테고, 상대도 훈련하러 왔다 하니 그렇지 않겠나. 쥬데카의 입장에서는 들어오자마자 봉변 당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것을 고려할 정도로 섬세하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막무가내로 덤빌 생각까지는 없는지, 말만 떨어진다면 곧바로 검이라도 꺼낼 기세로 대답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저번 미션 이후 아스텔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전에 약속을 한 것이 있긴 하지만 바로 가는 것보다는 역시 조금은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는 굳이 레레시아를 찾아가진 않았다. 보아하니 그때 꽤 다친 것 같기도 했었으니까. 자고로 다친 상태에선 술을 먹으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일단 그 약속 수행은 조금 미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스텔은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기도 하고, 자신의 보검을 바라보기도 하며 그는 조용한 침묵을 지켰다. 듣자하니 버스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던가. 에스티아가 모조용 보검에 심어놓은 세븐스. '사이버 엘프'인 루시아.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괜히 작게 숨소리를 내던 아스텔은 밖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 싶어 자신의 개인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레지스탕스인 이상 최대한 기지가 눈에 띄면 안되기에 기지를 지하에 만들어둔 것은 납득할 수 있었으나 역시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나갈 수 있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조금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는 도중 아스텔은 딱 모퉁이에서 레레시아와 마주칠 수 있었다.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 오른손을 살짝 올려 인사했다.
"안녕. ...몸은 괜찮아?"
/약속이 있으니 찾아가긴 했겠지만 부상을 입었으니까 찾아가지 않았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우연찮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공방 형태다. 이쪽은 열심히 버스트로 때리고 저쪽은 버스트로 막으면 되겠네. 그는 가뿐한 기분으로 보검을 꺼내들었다.
"뭐, 개같이 싸우면서 감 잡는 게 빠르지 않겠냐."
장난스레 씩 웃으며 끝낸 말과 함께, 보검이 해방되며 손끝으로부터 견갑과도 같은 무장이 뒤덮이기 시작한다. 드러나는 부분 하나 없이 견고한 무장이 갖춰지자 내내 고수하고 있던 느긋한 기색도 사라진다. 그는 당장이라도 쏘아질 듯 몸을 낮추었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은 탄성을 뱉고는 자세를 풀어버렸다.
"아, *. 너 씨* 준비운동 안 했지 않냐? 다 하면 말해라."
대뜸 한 판 붙자며 밀어붙인 것치고는 차분하다고 해야 하나. 다음 임무 때까지 몸 보전 잘 해야 하니 발목이라도 삐끗하는 일은 없어야지 않겠나. 그는 기껏 발동한 보검을 다시 돌려놓고서는, 그것이 작대기라도 된다는 양 대충 체중 실어 검에 기대고 있다. 정말로 준비운동 정도는 기다려 줄 요량인가 보다.
퍽 하는 소리가 숲속 깊은 곳에서 울려퍼졌다. 무엇인가가 나무에 찍히는 소리같아 누군가는 어디선가 벌목을 하는 중인가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연이어 계속해서 들려왔고 간간히 남자가 끙끙대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가본다면 나무에 걸어둔 과녁에 손도끼를 던지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과녁에는 이미 숱한 칼질 자국과 화살자국, 간간히 총알의 흔적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과녁에 손도끼가 깊게 박힐 때면 이것을 빼기 위해 끙끙대며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훈련을 한 시간이 오래 되었는 지 그의 전신은 온통 땀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때 엘사녀와 싸울 때 총알이 다 떨어져 큰일이 날 뻔한 것을 생각해 보면 총이 아닌 것을 다루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엘사면 노래나 부르지 사람을 잡고 있어"
이내 탈진 했는 지 바닥에 쓰러져 멍하니 하늘을 본다. 선우가 그때 구한 아이들은 다른 부대에 맡겨져 정신 치료를 받고 있고 나중에는 다른 안전한 마을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꾸 구하지 못했던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아이가 떠올랐다. 가디언즈 여럿을 길동무로 보내주긴 했지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이라는 후회가 가시질 않는다.
"배고프다."
몸을 일으키고는 호숫가 근처에 가서 장작과 버너를 준비한다. 지난 번엔 훈련장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가 곤욕을 치뤘으니 이번에는 밖에서 먹는다. 두툼한 고기와 함께 각종 향신료를 꺼낸다.
너는 그의 말에 조금 들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가? 그냥 단순히 뭔가 분출할 만한 거리를 찾고 있던 건 아닌가. 물론 그런 생각은 그가 공격을 하려는 듯하다가 준비운동을 안한 것 아니냐는 말과 함께 자세를 풀어버렸다는 점에서 날아갔다, 어디까지나 훈련이다. 뭐 그런 생각이려나.
"준비운동이라, 으음."
자세뿐만 아니라 아예 보검 무장까지 풀어버린 그를 보며 뭔가 생각하던 네 눈이 접히더니 땅을 박차는 소리가 퍼진다. 상대는 비무장인 상태, 게다가 자세도 풀어놓았으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다만 그가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기에 너 역시 무장을 착용한 건 아니었다. 그냥 맨 몸 그대로, 그의 얼굴을 노리고 주먹을 내지르기 직전, 네가 하는 말은 들렸으려나.
"실전에는 준비운동이란 게 없잖습니까."
움직임이 빠른 편이었긴 해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공격, 뭣하면 무장으로 막아버려도 될 만한 선공이었다 모든 상황이 다 완벽한 실전이란 게 어디 있을까. 적어도 네가 겪어 온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복귀한 뒤로 레레시아의 모습은 기지 내에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어도 하루는 머리끝도 보이지 않다가, 늦은 밤 쯤에야 몽실몽실 하얀 머리칼이 돌아다니는게 보였겠지. 복귀 직후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벌써부터 저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싶겠지만. 마주칠 때마다 인사도 잘 받아주고 보기에는 성했으니 그런 의구심도 오래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오. 안녕."
아스텔과 마주친 것도 그렇게 평소마냥 돌아다니던 와중이었다. 모퉁이에서 딱 마주친 상황.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지금은 넋을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당황하지 않고 마주 인사를 건네었다.
"몸이야 보다시피 말짱하지. 근육은 좀 욱신대는데 못 걷고 그럴 정도는 아니야. 빈혈기는, 뭐 어쩔 수 없고. 넌 어때?"
괜찮냐는 물음에 답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머리를 하나로 땋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 훈련장에 가려고 하거나 다녀오는 길이지 않았을까. 빈혈을 언급한 만큼 낯빛은 창백하지만 표정 만은 묘하게 밝아서 조금 위화감이 들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불길한 느낌은 아니었겠지. 넌 어떠냐며 되물은 레레시아는 아스텔이 온 방향과 가려는 방향을 둘레둘레 돌아보곤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삼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임무 나가는 중이야? 또 뭐 생겼어?"
아무래도 아스텔이 가는 방향이 나가는 길이었으니. 큰 건 하나 처리하자마자 또 뭐가 생겨서 나가는가 싶었나보다.
"...그럼 다행이야. 저번 임무는 누가 하나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어느 정도의 운도 분명히 작용한 임무였던만큼 만약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누구 하나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허나 아무도 죽지 않았고, 그저 조금 다친 것으로 끝난 것은 적어도 아스텔에게 있어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무튼 근육이 욱신댄다는 말에 아스텔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몸으로 향했다. 못 걷고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말에 조용히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들려오는 말에 아스텔은 곧 대답했다.
"...이상없어.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으니까. 다만 넌 근육이 욱신대면 좀 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 임무는 아니야. ...당장은 쉬는 중이고 그냥 바람이나 쐴까 해서 개인실에서 나오는 길이야."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없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이러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출동해야할지도 모르나 당장 그런 임무는 없었기에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면서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근육이 욱신대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 ...근육이 쉬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근육통이니까. ...무리하면 더 심해져."
나름대로 충고를 하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전의 약속에 대한 것이었다.
피곤하다. 달리 이어지는 말은 없다. 굳이 피곤하다에 더 덧붙여보자면 지루하다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본디 사람 사는 것이 그렇다지만 이렇게 지루할 수가 있나. 전투니 생사를 넘었니 재잘대던 남들은 유대가 쌓였다는데 본인은 도저히 모르겠다. 본디 모든 전투는 생사를 넘는 것이요 각자도생이 당연한 일 아니었나. 살아남는 건 하나뿐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불경하기 짝이 없으나, 글라키에스라 불린 여성은 제법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기실 아이를 구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로벨리아의 뜻이 그렇다니 넘어가지만, 굳이?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언젠가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는 위험요소는 미리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구한다는 이유를 떠올려도 감은 잡히지 않았다. 모르겠다, 더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 따위를 풀어볼 만한 사람도 아니다. 제는 나무 위에 휘감겨 오침에 들까 싶던 참이었다. 하나의 인간이 호수 근처에 있던 나무에 대고 훈련 내지 화풀이를 하기 전까지.
이쪽의 빌어먹을만치 끔찍한(제는 깃털 재질이 아닌 솜 재질에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베개에 적응하지 못해 잠 설치고, 간만에 눈이라도 붙이고자 했건만 거슬리게. 제는 아량을 베풀어 참기로 했다. 그래, 아량 베풀어 몸이나 정결케 하자. 저녁이 되면 알아서 가겠지. 그러면 한결 더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인생사 절대 제맘대로 되는 법 없다. 된다고 해봤자 엿같은 일만 마음대로 생겨난다. 훈련의 소음에 호수로 도망쳐오며 차가운 물에 몸 담그고 평안을 찾고 있었건만 이젠 이쪽으로 온 것이다.
"이번엔 또 뭐야."
호수에서 무언가 움직이더니 물에서 기어나오듯 한다. 새하얀 몸신을 드러내니 새하얀 용이다. 장작 앞에서 수염을 한 번 꿈틀거리는 모습이 제법 고압적이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제에게 있어 당신은 이미 '짜증나게 낮잠을 방해한 사람'으로 속에 낙인이 찍혀있었기 때문인지, 제의 눈은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전중, 잠시 멍 때리고 있던 그녀를 그녀의 동생이 흔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전은 아니었지만. 작전중에 멍때리고 있는것은 아무리 그대로 좋지 않죠. 그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습니다.
"아하하, 미안 미안.." "언니, 역시 아직 릴ㄹ" "쉿, 왔다."
그녀는 현재 레지스탕스에 소속해 있었습니다. 딱히 그녀에게 뭔가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그저 살기 위해서였죠. 그녀와 동생의 부모님은 세븐스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두 딸을 아끼고, 남을 잘 믿는 착한 천성의 사람들이었죠. 분명히 그 천성에 대해서 거짓은 없었을겁니다. 그러나.. 지속된 세븐스의 탄압과 두 딸이 받는 부조리의 여파. 본인들도 사람만 착하다보니 여기서 속고 저기서 속고, 그러다간 결국 두 딸을 버리기까지 이르렀죠.
'너희같은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든게 멀쩡했어!'
가디언즈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원망을, 그녀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시끄러....'
어라 너무 떠들었나요? 그러는 사이 그녀는 임무를 끝낸 모양이네요. 그녀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어디가서 제대로 일하기도 힘들고, 집도 없는 세븐스 자매가 둘만의 힘으로 살아남기엔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죠. 그래도 이 곳은 비교적 온화한 성격을 지닌곳이고, 전투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 그녀는 몰라도 동생에게는 상당히 맞는 분위기일겁니다.
"됐다, 이제 가자." "..... 응"
그녀와 다르게 동생은 꽤나 소심한 타입입니다. 임무만해도 말이 같이 다니는거지 일은 그녀가 전부 다 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에게는 동생밖에 남지 않았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성격상 하나뿐인 동생을 버리거나 하는짓을 할 수 있을리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한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을 애지중지했습니다.
"가서 뭐 먹을까~ 카레 만들어 먹을래?" "응, 좋아."
그녀가 동생을 여기는 감정에는 여러가지가 섞여있습니다. 그녀가 남자친구에 빠져 가족을 소홀히 했을때의 죄책감. 같이 버려진 처지인 동질감, 소심한 성격인데도 처한 환경에 대한 동정등.. 그러나 역시 가장 큰것은 애정일것입니다.
"있지~~"
그러나 이때 웃고있던 그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달았으면서 모른척 했을지도 모르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상대방도 똑같이 자신을 여겨준다는 보장은 없다는것을. 한번 깨져버렸던것이.
호수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아니, 정확히는 기어나오는 것이 맞겠지. 새하얀 몸을 드러내는 기다란 존재를 보니 아름다움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 정도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식사 준비를 방해하는 사악한 존재고 무엇보다 저 고압적인 수염이 마음에 안드니 이무기 때의 악몽을 되살려준답시고 복수 한번 해준다.
"고기 한덩이 얻어 먹으러 왔어?"
평범한 뱀이라면 고기 한덩이 쥐어주고 보내면 될 일이고 이무기라면 아까 그 발언으로 또 천년을 기다려야할테니 정중히 사과해야겠지. 용이라면...뭐라고 해야할까? 아니, 그전에 용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이었나? 딱봐도 불만이 많은 표정이니 설화에 맞게 대충 장단 맞춰주고 보내면 되겠지. 제사라도 지내줘야하나?
"동료니까 한두덩이 정도는 나눠줄 수 있지. 고기는 많으니까."
보검을 만든 시설에서 죽인 시체들로부터 이것저것 가져 걸 암시장에 팔았더니 제법 쏠쏠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을 목격한 이후부터는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하여 파밍을 못했지만 그 전까지 훔친 그들의 무기나 장신구 등을 팔아치워도 값이 제법 나왔다. 총알이나 폭탄 값을 제하고나서도 서너번 정도의 고기 파티를 할 돈이 갑자기 생기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났다.
누구 하나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말에 새삼 교전 때가 떠올랐다. 까딱 잘못했다간 미션이고 뭐고, 정말로 위험했다. 그 정도 부상으로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결과적으로 특수부대에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부상도 이곳의 의료반이라면 얼마든지 케어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덕분에 모조 보검의 숨겨진 힘도 개방했으니 하늘이 따라준 결과라고 할지. 더 큰 시련의 시작 같기도 하고.
"임무 아냐? 난 또, 그새 무슨 일 생겼나 했네."
괜찮냐고 물으니 아스텔도 쉬어서 괜찮다고 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찬가지로 아스텔을 슬쩍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가벼운 차림이다. 하긴, 임무라면 입구가 아니라 워프 게이트로 갔겠다. 어쩐지 아스텔과 마주치면 임무에 나가거나 복귀했나 그 두 생각이 먼저 든단 말이지. 최근 자주 마주치긴 했지만, 임무에 연관된 쪽을 더 많이 봤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음-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 아프진 않지만 여기저기 좀이 쑤셔서. 그래서 지금도 가볍게 몸이나 풀고 오려고 했는데."
욱신대면 쉬라며 무리하면 통증이 심해질 거라고 그가 말해주었으나, 레레시아는 쉽게 말을 들을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며 잔소리가 조금이라도 나올까 싶으면 도망갈 듯 했다. 그러나 도망가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눈빛만 반짝 하고 빛났다. 아스텔이 전에 했던 약속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맞다. 약속했지. 정신이 없어서 잠깐 깜빡했네. 물론 가야지- 지금 가자. 지금. 어차피 쉬는 중이었잖아? 아니면 잠깐 쉬고 뭐 할 거 있어?"
한발 물러섰던 것보다 성큼 앞으로 걸어와 아스텔의 코 앞에서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왠지 할 일이 있다고 해도 다음으로 미루라며 끌고갈 것 같은 시선- 이지 않았을까.
앞으로 훌쩍 다가와 코 앞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그럻게 묻자 아스텔은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두걸음 뒤로 물러섰다. 딱히 동료들을 꺼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훌쩍 다가온 탓에 스스로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지금 가자고 이야기를 하는 그 말에 아스텔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상태를 눈여겨보려는 듯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당장 문제가 커보이는 것은 없기도 했고, 입원한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알았어. 딱히 해야 할 것은 없어. 아마 낚시를 가거나 혹은 필요한 생필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러 가거나, 그게 아니면 거점이 안전한지 주변 정찰을 하거나 했을걸."
왼쪽 손가락을 짝 펼친 후, 그는 리스트를 하나하나 이야기할 때마다 하나씩 접었다. 정확하게 세 개를 접은 후, 그는 다시 왼손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튼 지금 먹으러 가자는 말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긴급 임무가 나온다고 한다면 자신은 이미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워프 게이트를 통해서 출동했을테니까. 그만큼 당장은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이야기겠지.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계단을 통해 천천히 슈퍼마켓으로 위장하고 있는 1층으로 올라서려고 했다.
"...먹고 싶은 장소 있어? ...방은 좀 곤란할테고, 마을에 있는 작을 술집도 괜찮긴 할 것 같은데."
작은 거점이자 마을이었으나 있을 것은 있었다. 대도시의 커다란 술집은 아니어도 가볍게 술을 먹고 안주를 먹을 수 있는 가게라면 당연히 마을에 있었다.
저 새*가? 순간 떠오른 생각은 그것 뿐이다. 기껏 배려 좀 해줬더니, 괘씸하긴 해도 분명히 틀린 데 없는 말이다. 훈련은 실전같이. 여유나 방만은 그와 같은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었으니.
판단은 빨랐다. 완전히 무방비한 자세였으니 이대로라면 피하더라도 늦을 테다. 그는 비딱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하기를 택하며 피하기를 포기했다. 움직임을 대신해 빠르게 전개된 무장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보던 그의 몸으로부터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철갑이 붉게 물들며 녹아내릴 듯한 열이 끓어오른다. 그대로 물러나거나 무장을 마주 발동시키지 않는다면 맨몸으로는 버티지 못할 고열이다.
"얍삽한데?"
그러나 싸움에 있어 비겁하다는 말은 찬사나 다름없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 있으니 철면 너머의 얼굴은 웃고 있을 게 뻔했다.
"오냐, 씨*. 개처럼 떠보자고."
처음은 몸풀기부터, 하려고 했지만 그게 싫은 듯하니 제대로 가야겠지. 말을 끝맺자 한껏 달아올랐던 무장의 열기가 사그라드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열이 한 방향으로 몰린 것이다. 이윽고 후방에서부터 폭발이 일며 그 반동으로 그의 몸이 급속하게 쏘아진다. 그는 평상시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던 보검을 손에 쥐고 찌르듯이 앞으로 바로세웠다. 기본형의 형상을 유지한 보검의 끝이 불길하게 번뜩이며 쥬데카의 몸을 곧게 꿰뚫고자 한다. 실전에는 준비운동이 없으니, 버스트도 준비할 시간이 없어야 타산이 맞지 않겠나.
죽여버릴까. 죽여버리고 대충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버리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그깟 다리 없는 존재와 본인의 차이점도 모르는 저런 무지몽매한 녀석 같으니라고. 뱀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니 죽일만한 이유는 충분할 테다. 땅에 내디딘 발톱으로 당장 할퀼까 생각하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무지몽매한 녀석이니 알려줘야 응당 옳은 군주가 아니겠는가. 불 붙이지 않은 장작 위에 앞발 하나를 턱 얹어버리며 불을 더 키우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제는 불만을 표출했다.
"심기를 건드려놓고 고깃덩이 던져주면 된다 생각하는 겐지."
나무를 때려 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호수에서 거슬리는 행동을 하더니만, 이젠 뱀 취급까지 하고 길거리 개취급을 한다라. 우습군! 코웃음을 치던 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검은 머리라. 검은 머리는 제법 많아서 나중에 마주쳐도 냄새라도 맡지 않는 이상 기억하긴 어렵겠군. 코가 예민히 반응해 날것의 냄새 맡았다. 제가 느릿하게 장작 하나를 앞발로 쥐어올려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꼬리의 끝으로 굴렸다. 당신을 향해 장작 하나가 모난 꼴로 구르더니 얼마 못가 멈춘다.
"제법 흥미롭구나. 그래, 네 무슨 연유로 예까지 와서 고기나 굽는지 궁금하구나. 남의 단잠을 깨울 정도로 나무를 그렇게 쳐댔으니 호수에서 쓸데없는 감성팔이 한번 하며 혼자만의 힐링이니 뭐니 하는 걸 즐길 생각은 아닐 테고."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싼 무장과 무장을 달구는 고열, 너는 주먹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보검이 빛을 내는가 싶더니 금방 네 몸은 검은 광채를 발하는 무장으로 덮였다. 머리를 감싸는 헬멧과 가죽 재킷을 연상시키는 갑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감사합니다."
얍삽하다는 말에는 감사의 말로 응수하며 곧 이어지는 공격은 마치 로켓처럼 발사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뒤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폭발과 그 폭발의 크기만큼 빠른 속도, 너는 그 짧은 순간 자세를 잡았다. 분명 빠른 공격이었으나 그 공격 자체는 곧았으니 궤도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므로 네 양 소매를 따라 촤르륵. 하고 흘러내려오는 체인을 붙잡은 손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대신 방향을 튼 발의 움직임을 따라 들어올려졌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담긴 자신감을 무턱대고 받아낼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아 너는 체인을 들어올린 손을 놀렸다. 곧게 찔러 들어오는 보검의 측면을 향해 휘둘러진 체인의 끝을 밟는 동작. 동시에 체인이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보검의 날과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보통이라면 끊어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 번 싸움 이후로는 다르다.
"흐읍...!"
장력으로 당연히 곧은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막는다'는 건 뭐지? 반드시 정면에서 그 진행을 멈추게 해야만 막아내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너는 체인을 이용해 보검의 궤도를 비틀어 흘려내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절반 정도만. 검의 궤도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네 옆구리에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기에 너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그대로 맞았더라면 아마 몸에 바람구멍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공격, 정말 그랬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담긴 힘 자체는 그러했다.
"역시, 파괴력은 비할 데가 없군요...!"
그러나 일단 막아냈다면 다음은 뻔하지 않은가, 너는 보검의 궤도를 비틀었던 체인을 움직여 보검과 승우의 손을 휘감으려고 했다. 휘감는 데 성공한다면 그대로 움직임이 제한된 승우의 몸통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으리라.
//헉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언젠가 보여줘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쥬는 싸우는 것만큼은 진심이라서요...(눈치 초장부터 버스터 공격 좋습니다...!
그냥 가까이 다가섰을 뿐인데,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나는 아스텔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기대도 꼼짝 않았으면서. 그래도 더 다가가지 않고 가만 서서 보고 있으니 아스텔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안색이 허여멀건한 것 말곤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도 심심해서 훈련장에 가려던 참이라고도 했고. 아스텔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레시아의 얼굴이 싱긋 웃었다. 대답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여간 일상이 재미없다니까. 쉬는 중에도 정찰을, 아, 하긴 저번에도 했지."
쉬는 날 하는게 고작 세가지라는 점은 제쳐두고 그 중에 정찰이 끼어있는게 참 뭐랄까, 아스텔스럽다고 할까. 맹목적인 워커홀릭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든다. 너무 그쪽만 생각해서 다른 부분은 맹한 사람 같달까. 둔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지금 가자고 했으니 선뜻 곁으로 따라가려다가 그녀의 걸음이 멈칫했다. 훈련장에 갈까 하고 나왔던지라 옷이 트레이닝복인게 발목을 잡았다. 옷이 술 마시는데 문제가 되진 않는데 그렇지만 그, 좀 그렇지 않은가. 잠깐을 말한 레레시아는 아스텔을 보고 얼른 말하고 휙 돌아섰다.
"머리 빗고 옷 대충 갈아입고 올 테니까 위에서 기다려! 뭐 마실지 생각해두면 거기로 갈테니까 생각 좀 해두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후다다닥 빠르게 걸어 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겠지.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다시 나타났을 때는 묶었던 머리를 풀어 잘 빗고 평소 사복과 비슷하지만 조금 신경썼나, 싶은 차림이지 않았을까. 와인색 블라우스에 검은 스커트와 스타킹, 겉옷은 오버핏의 얇은 암갈색 코트를 걸치고 잘 신지 않던 낮은 굽의 구두도 신고 있었으니까. 굽소리 또각이며 걸어가 어김없이 검은 장갑 낀 손으로 머리칼을 넘기며 아스텔에게 뭐 마실지 생각 해봤냐고 물었을 것이다.
일상이 재미없다는 말에 아스텔은 괜히 반박하듯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재미가 없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 물고기를 낚아올릴때의 재미는 나름대로 짜릿한 감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전문적으로 잘 낚아올리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낚시를 즐기는 것이 재미가 없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반박했다. 물론 그녀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오직 그것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춤에 대한 것도 연습은 하기도 한다고. ...뭐, 일단 그것도 가끔은 해달라고 했으니까."
단순히 그것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다시 한 번 반박하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뭔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확실히 이상한 변명같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괜히 작게 혀를 차면서 한숨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삼키는 와중, 잠깐을 외치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말을 하는 그녀의 말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마실지 생각을 해두면 그곳으로 가겠따고 하는 그 말에 아스텔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봐야 작은 마을이었다. 역시 무난하게 술집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다음엔 뭘 먹을지였다. 제일 무난하고 좋아하는 술은 역시 맥주였다. 와인류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급적인 것은 너무나 비쌌고 동양의 술도 가끔 들어오면 먹을 수는 있었으나 자신의 입에 그렇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가장 입에 익는 것은 그에게 있어선 맥주였다.
아무튼 밖에 나온 후, 그는 일부러 바람을 일으켜서 그 시원함을 만끽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허나 이 평화로움은 어디까지나 마을이라는 이름의 작은 상자 안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 마을을 떠나 밖으로 조금만 가도 이런 평화로움은 꿈도 꾸지 못할 지옥같은 분위기와 풍경이 가득했다. 참으로 이질적이지만 그래도 그에게 있어선 익숙할지도 모르는 풍경을 바람과 함께 구경을 얼마나 했을까? 또각거리는 굽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들어오니 사복치고는 꽤나 꾸민 것처럼 보이는 레레시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전 사복보다 조금 더 꾸민 느낌이 나는 것이 꽤 힘을 준 것이 아닐까라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지만 의외로 빠르구나. ...잘 어울리네. 그 옷. 디자인이나 색이나."
허나 이것은 또 그에게 있어서 고민거리를 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렇게까지 입은 것을 보면 정말로 이 술자리를 은연중에 기대를 했거나 꼭 마시고 말겠다는 나름의 어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분위기가 있는 곳을 가야할까.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던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쉰 후 그녀에게 물었다.
"...칵테일류 좋아해? ...원래는 맥주 쪽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입고 나왔는데 조금 분위기가 있는 곳이 나을 것 같아서. 맥주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편이기도 하고. ...안 좋아한다면 맥주 쪽으로 가고."
무식하게 들어온 공격이라면 그만큼 무식하게 받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쥬데카의 성향은 이쪽이 아닌 모양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격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 어느 쪽이든 쉽게 속단해서는 안 된다. 비틀리게 엉켜버린 검은 목적했던 각도에서 어긋나 있다. 부딪치기 전까지는 예상치 않았는데, 이런 공격에 체인으로 대응한다는 선택은 상당히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그는 붙잡혀버린 검에 더는 미련 두지 않고 재빨리 손을 떼었다. 어차피 검은 그의 주 무장이 아니었다. 무기를 포기한 덕분에 손까지 묶여버리지는 않았으나 완벽한 회피까지는 불가능했다. 몸을 뒤틀었지만 한발 늦었다. 몸 한쪽을 덮쳐오는 뻐근한 통증이 반갑지 않다.
"한 대씩 맞았네. *, 공평하게 가게?"
그렇지만 여전하게도 실실거리며 눈앞에 상황에 집중을 유지한다. 여유로운 체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는 이 공방에 진실로 즐거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무렴, 겁대가리 없는 그라고 해도 이겨낼 가망조차 없는 적을 상대로 계속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이란 본능적인 공포와 스트레스를 자극하는 데가 있다. 하지만 목숨만큼은 걸지 않은, 혹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해도 항거조차 하지 못할 초월적인 적수는 아닌 상대와의 전투는 오히려 정다운 대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기분이 들뜬다. 그는 제 몸통을 파고든 다리를 그대로 붙잡고 중심을 흐트러뜨리려 했다. 잡는 데 성공했다면 그런 대로, 붙잡지 못했다면 그렇더라도 상관 없다. 다시금 뜨거운 열기가 치솟으며 그를 중심점으로 한 폭발이 일었다. 가까운 거리가 곧 공격의 수단이 된다. 터지는 힘을 추진력으로 다가왔을 때와 반대로, 이번에는 터지는 충격을 빌려 쥬데카와 쭉 거리를 벌린다. 폭연이 자욱하게 깔린 폭발점으로부터 멀어져 동태를 살핀다.
도룡뇽, 뱀. 용인할 수 있다. 제 그런 모욕이야 아량껏 넘길 수 있다 생각했다. 다만 그 모욕을 주는 방법이 잘못 됐다. 차라리 입만 놀렸더라면 넘어갔을 텐데, 장작에 손 얹었단 이유로 아예 지성조차 없는 존재로 본다라. 설령 본인이 허기가 졌다 한들 대화가 가능한 존재임을 알았더라면 사람 대하듯은 해야할 것 아닌가.
"혹 인간 외의 존재가 전부 멍청하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혹 그렇다면 편협한 생각은 고치는 것이 좋겠는데."
본디 인간간의 관계는 조심스럽기에 누군가의 험담은 쉬이 오가지 않는다. 다만 제 오만불손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입 모아 얘기할 정도였으니, 그 성격이 어떤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때문에 이리 나오는 것은 제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것이요, 강한 자존심으로 비롯된 경고였다. 한 번이다. 앞으로 한 번. 이제 용인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더군다나 제는 먹을 것을 심히 가리는 성격이었기에. 당신이 알 리가 없었으니 추후 일어나는 이야기는 그나마 유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짐승 취급에만 집중할 뿐이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장작을 물끄러미 본다. 온기.모습에 요 며칠 시끄럽던 구하지 못한 아이 얘기가 괜히 떠올랐다. 그걸로라도 이바지를 했으면 된 일이거늘 유난스러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도 그 얘기로 시끌시끌하니 이젠 불만 봐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물끄러미 온기가 느껴지는 곳에 집중하다 시선을 옮겨본다.
"우스운 대답이군. 그 힐링 때문에 나무에 그렇게 공격을 해댔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이 숲에서 누가 믿겠나."
익는 냄새. 비명이 들리는 듯싶어 귀를 까딱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착각이겠지. 제는 물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물을 조종할 수 있냐라.
"용이라 해도 두 번 물에 들어가고 싶진 않아서 말이지. 대단히 미안하군 그래."
고개를 슥 돌려버린다. 겉껍질만 용이지 아무것도 못하지 않던가요. 황제는 쓸모가 없습니다. 제는 그 이후 울린 총성을 기억한다.
레레시아가 일상이 재미없네라고 하니 아스텔이 살짝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 낚시는 재밌다나. 그건 개인차이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발끈하는 모습이 어딘가- 음, 뭐랄까. 재밌다? 이 사람이 이런 반응도 하는구나 싶은? 뭔가 처음의 그 무뚝뚝한 이미지가 많이 무너져내린 듯 했다. 어물어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하는 말도 꽤나 의외였고.
"흐응."
그렇게 기대는 안 했는데. 나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말을 들은 그녀는 작게 소리를 내며 잠깐이나마 아스텔을 지그시 응시했을 것이다. 의문과 흥미가 동시에 감도는 눈으로.
그 뒤는 곧장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손질하고 왔다. 트레이닝 가기 전이라 다행이었다. 빗질은 좀 급하게 했지만. 밖으로 나가자 가는 바람이 뺨을 스친다. 제법 쌀쌀한 공기였다. 바람에 산발이 되지 않게 머리칼을 넘기며 아스텔에게 다가가니 그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별로 고민 안 했거든. 술 한잔 걸치는데 이 정도면 됐지. 뭐. 좀 고른 보람은 있네."
이것도 별 생각 없었는데, 잘 어울린다 들으니 괜히 어깨를 으쓱이게 된다. 엄청 고민해가며 고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쓴 차림이긴 했으니까. 장갑 낀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아스텔을 본다. 뭐 마실지 생각했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칵테일 어떠냐는 말이었다. 칵테일이라. 그것도 괜찮긴 하지만.
"칵테일도 맥주도 가리지 않으니까 다 괜찮아. 분위기야 뭐, 술 맛있게 마실 수 있으면 그게 좋은 분위기지."
뭘 그렇게 새삼 신경 쓸까나? 그녀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슬쩍 좁히며 얄밉게 종알거렸다. 금빛 눈동자가 반달처럼 접혀서 아스텔을 빤히 들여다본다.
"간단한 칵테일 몇 종류 하는 펍을 알고 있으니까 거기로 가도 좋고, 아님 네 단골집 알려줘도 좋고."
휙 다가섰다가 휙 물러나며, 그녀가 아는 곳 아님 그가 아는 곳으로 가자며 말하고 레레시아가 한 발 또각 앞섰다. 어디든 대답 여하에 따라 그녀가 이끌거나 아스텔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게 되겠지.
그냥 기분 탓일수도 있고 저쪽에서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일단 묘하게 얄미운 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페이즈에 넘어간 것 같아 그는 아주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그 와중에 자신을 또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그 역시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마냥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눈길을 돌렸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었다. 역시 다른 이와 교류를 하는 것은 묘하게 어려운 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괜히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칵테일 가게는 잘 몰라. ...파는 곳은 알긴 하지만. 일단 내 주력은 맥주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면 안내 부탁할게."
펍을 알고 있다고 하니 꽤 그런 쪽으로 마시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일단 그녀의 뒤를 따라가듯 천천히 걸었다. 안내를 부탁한다고 한만큼 먼저 앞장서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맥주집이거나 혹은 그녀도 잘 모른다고 한다면 자신이 안내를 했겠지만. 아무튼 그는 또각또각 작게 발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술 좋아해? 너."
이전 자신과 밥 한끼, 혹은 술을 한 잔 하자고 이야기를 한 것을 떠올리면서 그는 괜히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요컨대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그렇게 한 잔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인지 궁금하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말로 술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무슨 다른 용건이 있어도 말해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어느 쪽이어도 아스텔에겐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 0 특수부대원들과 교류를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나름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당신은 그녀의 그런 손을 잡는다.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일 없이 그녀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손을 맞잡는다. 정확히는 손목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붙잡은 손아귀를 통해 상당한 악력이 전해져 오고 있을 참이었을까.
"꽉 잡아라."
그런 짧은 말만을 전한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휙 뻗는다. 손 아래에서 기다란 고기 줄기가 쏘아져나가 뭉툭한 나뭇가지를 휘감는다. 그것으로 둘의 몸은 하늘로 치솟았다. 나무 위로, 전신주 위로, 철근 위로, 전신을 덮쳐오는 바람을 가르며 활주만을 반복한다. 그리고 마침내 발이 닿은 곳은 지금은 방치되어 쓰이지 않을 오랜 송신탑. 그 꼭대기에. 그나마 추락을 방지하려는 듯한 난간이 기둥을 중심으로 플랫폼을 빙 둘러 세워져 있었지만, 잘 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부서질듯 녹슬고 해진 비주얼이 구실은 전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담력을 시험하는 듯 아슬아슬함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레이."
새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고스란히 피부에 부딪혀온다. 까마득한 경치가 시야를 가득 장악한다.
원래 그렇다는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작은 몸에 비해서 상당한 악력이 내 손목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손을 잡은 채 어딘가로 데려가려는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던 와중에, 엔의 다른 한 손에서 솟아나온 살점은 커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마치 새총 내지는 그네마냥 그 힘으로 둘을 같이 허공으로 쏘았다.
귓가를 때리는 맞바람이 얼굴을 마주 밀어내는 것 같았다. 발이 채 무언가에 닿지 않는 것을 경험한 게 하루이틀은 아니었지만, 타인에 의해 이렇게 날아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두려움보다는 심장이 펌프질하는 흥분감이 몸 곳곳으로 퍼졌다. 하늘을 날아 바람을 뚫고서, 우리는 커다란 철탑의 발판 위로 올라섰다. 아래를 봤다간 아찔함에 중심을 잃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경치가 좋은 곳은 맞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 높고 불안정한 발판 위에서, 작게만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예상했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타격이 들어갔다는 걸 다리의 감촉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검을 포기하고 몸을 비트는 판단은 박수칠만 했다. 그게 검이 주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설령 주무기가 검이라고 해도 바로 검을 빼낼 방법이 없다면 검을 놓은 게 더 나은 선택이겠지.
"그런 걸 노린 건 아닙니다...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가 붙잡혔다. 정타였다면 붙잡히지 않았을 테지만 빗겨맞춘 탓에 누적시킨 피해는 크지 않았던 모양. 때문에 결국 상대는 여력이 있었고 공방의 방향은 바로 뒤바뀐다. 미소짓는 상대와는 달리 네 표정은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듯했으나 실제로 그러한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코 앞에서 느껴지는 고열과 이어지는 폭발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듯한 눈빛이 역력한 채로 열기와 충격에 휩쓸려 순식간에 튕겨져 나가는 그와 너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려졌다. 다리를 붙잡히지 않았다면 아마 너도 뒤로 튕겨나며 피해를 좀 덜 입었겠지만 그 붙잡힌 힘으로 너는 폭발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폭발 뒤에 으레 남는 연기 속에서 한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치르르...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연기를 꿰뚫고 무엇인가 튀어나온다. 너인가? 아니다, 그건... 말뚝이었다, 분명히 연기 너머, 너와 멀리 떨어져 버린 상대를 노린 말뚝은 연결된 체인을 견인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연기가 걷힌다면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땅을 짚은 네 모습이 보일 터, 네 손에는 여전히 체인이 꽉 쥐어져 있었으며 말뚝이 꽂히든, 아니면 빗나가 벽에 박히든, 너는 그 체인을 다시 잡아당기려고 했을 것이다.
농인 걸 알면 되었다만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대화를 나누기 이전, 일련의 과정으로 휴식을 방해받아 조그맣게 남은 앙금 때문이다. 이 거슬리는 감정을 어떻게 눌러야 하나. 지금까지 거슬리던 사람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곱씹어 보다 이내 그만뒀다. 전부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거슬리노라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직접 나서거나,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슬리는 존재가 살아있는 상황 자체를 처음 겪으니 그저 인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대로."
제는 굳이 시선을 던지지 않기로 했다. 인간이 지닌 가죽에 대해 그렇게 큰 감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굴곡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가죽 벗겨내면 다 같이 근섬유로 이루어진 존재 아닌가. 제 느긋하게 꼬리 끝단 살랑인다. 운동이 힐링이라는 사실은 일부 시인하나 고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주둥이 잠시 실룩인다. 제가 생각하는 운동과 당신의 운동이 차이가 있음은 언젠가 밝혀지겠지.
"그래, 공물 바치었으니 받아주도록 하지."
제법 비꼬듯 놀리는 분위기임에도 용인하는 것은 아직 많은 것을 배워나가기 위함일지. 제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소시지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 인간 모습으로 받을까 고민하다 재차 레지스탕스에 정식으로 입단하기 전 있던 곳에서 한 대원이 나신으로 돌아다녔다간 많은 사람들이 곤란할 것이라 빌듯이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결국 앞발로 꼬치를 쥐고 공중에 떠올라 몸을 웅크리기로 했다. 예민한 코가 한 번 들썩인다. 눈이 굴러 당신 향한다.
"몰랐다면 어쩔 수 없지만, 훈련은 훈련장이 멀쩡하게 있으니 그쪽을 쓰는 것이 더 체계적이지 않을까 싶군. 나무는 공격에 쉬이 부러지지 않는가."
그녀의 얄미움을 캐치하는 눈썰미에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기분 탓일 거라며 능청을 부린다. 맹해보이면서도 은근 감이 좋다. 계속 추궁한다면 그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야, 이유 없이 얄밉게 구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시선을 마주해오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치고 있다가 아스텔의 시선이 먼저 물러났을 때 아주 작게 키득.. 흐르는 소리 있었을 것이다.
"주력이 맥주였구나? 그렇군- 그럼 내가 아는 가게로 갈게."
새로운 걸 알았다는 듯이 중얼거린 레레시아는 안내하겠다며 걸음을 내딛었다. 일단 향한 곳은 이 마을에서 여러 술집들이 늘어선 거리 쪽이었다. 두어걸음 앞서서 걷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고 걸음의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아스텔과 비슷하게 나란히 서서 다시 속도를 되돌린다.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으니 나란히 걷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기도 했고.
"음- 다들 그거 한 번씩은 물어보네. 나 술 안 좋아하게 생겼나?"
술 좋아하는가. 일전의 쥬데카도 그렇고 다른 대원들과도 어쩌다 술 얘기가 나오면 꼭 듣는 질문이었다. 아스텔의 경우엔 할 말이 없으니 그냥 꺼낸 질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게 술이랑 안 어울리게 생겼나?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비뚝 기울였다가 똑바로 하곤 대답했다.
"좋냐 싫냐로 대답하자면 그렇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데. 뭘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가끔 맛이나 분위기를 즐기고픈 생각은 들긴 해."
취기는 들지 않아도 고유의 맛은 느껴지니 그 쪽으로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말을 하며 거리 중간 즈음에서 이쪽이라며 한 골목으로 걸음을 휙 돌린다. 골목으로 접어들 적에 잠깐이지만 아스텔의 옷소매를 잡고 끌었다가 놓는 감촉이 지나갔을 것이다.
"너는 술 좋아하는 편일까나? 즐기는 안주는 있어?"
들었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며 밤의 어둠이 내린 어둑한 골목을 천천히 걷는다. 좁은 골목에 울리는 건 두 사람의 발소리 뿐이었으리라.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으니까. 대장도 에스티아도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그런 마당에 술을 먹자고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좋아하는 것일까 싶어서."
뭘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세븐스 탓일까? 일단 알콜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물질이었다. 독을 다루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효능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을 할 뿐이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의외다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하게 궁금한 것 뿐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대답을 마쳤다.
일단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그는 잠시 주변을 눈으로 살폈다. 딱히 순찰을 하기보다는 그냥 근처 풍경의 구경. 그리고 가는 길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일단 아는 가게를 늘려둬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다음에 다른 이와 술을 먹거나 할 때 같이 가도 나쁘지 않을테고. 물론 자신이 자주 가는 맥주집을 더 우선하겠지만.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그는 막 들려오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 ...물론 취하기보다는 취하기 전의 감각이 좋아. 그때면 많은 것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 편하기도 하고. 안주는... 고기류가 좋아. 닭을 튀긴 것도 좋아하고, 고기를 구워서 먹는 것도 좋아해."
안주로는 육식을 선호한다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괜히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자신이 자주 가는 곳도 한 번 안내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다시 앞을 제대로 바라봤다. 그러다 아. 소리를 내면서 아스텔은 한가지를 정정하듯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딱히 임무가 피곤하다거나 현실이 고달파서 즐기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런 느낌 자체가 좋을 뿐이야. ...이것도 너무 즐기면 안 좋다고 하지만...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가끔은 말이야. ...애초에 술을 늘 마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당장 내일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임무로 투입될 몸이었다. 그러니까 마실 수 있을 때 마셔서 나쁠 것은 없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스스로 합리화를 시도했다.
>>266 왜? 라고 답하는 미역..아니 레이 너무 일상적이라 좋은데 두번째 진단에서 울어버렸다.. 반격은 못하고 막거나 피한다니.. 소중한 사람이 생겼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게 최선이지만 레이라면 분명 무리해서라도 막아내려 할 것 같아서 눈물샘이 고장나버렸어.. 엉엉엉..😭 마지막에 뭔가요.. 그.. 강한 군인다운 그.. 어!!!! 압수다 압수!!!!
>>267 >알고 있다고 릴리< 멜피야.... 하... 알고 있는데 놓을 수 없는 거냐고.. 과거가 발목 붙잡는 캐 왤케 많지..? 다 한 곳에 밀어넣고 정말 좋은 날씨+포근한 이불+넷플릭스+좋아하는 음식으로 힐링 시켜주고 싶다.. 결혼하자 ㅋㅋㅋㅋㅋㅋㅋ 승우는 복 받았네(?)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느낌이라 안타까운 거야...🥲 멜피는 잘못 없어.. 괜찮아..🥲🥲🥲
당신의 물음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무구하게 자신을 의심하며 고개를 기울이며 그렇게 되물을 뿐. 그것이 곧 긍정이 된다는 것도 모른채. 바람이 불어오면 그것만으로 이런 높은 철탑이 미세하게 휘청인다. 그것이 그 꼭대기에 올려진 사람의 감각으로 느껴진다. 세상에는 부러 스릴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계 된 시설들이 있다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안전장치라고는 전혀 구비되지 않은 잠재적인 위협.
승우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자주_짓는_표정_세_가지 1: 장난치거나 반가울 때 짓는 미소! 주로 실실거린다, 히죽, 히, 얄밉게, 능청스레, 장난스럽게 등등으로 묘사되는 웃음이다! 2: 한쪽 눈썹은 들고 다른 한쪽은 찌푸리는 표정. 주로 아니꼬움, 황당함, 의문, 혹은 골똘하게 고민할 때 나오는 표정임! 3: 열받거나 짜증나서 팍 찌푸린 표정!
자캐의_질투는_어떤방식 저번에도 답한 답변이다!!! 일단 질투라는 감정 자체에 둔감하기 때문에 질투를 느낀다 해도 의도치 않게 건전하게 풀거나 질투심을 유발한 사람을 수상하게 느껴서 의심함...() 그리고 애초에 질투라는 걸 하기엔... 얘의 사회경험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질투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해도 그게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름....🤦♀️
자캐의_아픔을_참는_방식 일단 참는다! 그리고 참는다! 무작정 눌러서 참는다! 참고 참아서 억눌려 가라앉을 때까지 견디고 기다리기만 해. 이로 인한 부작용도 외부보다는 내부로 돌리고. 좋지 못한 방식이지🤔
"그런 거였어? 그렇지만 나는 밥 먹을래 술 마실래 했는 걸. 술을 고른 건 아스텔인 걸-"
그렇다. 정확히 약속을 하던 때로 되돌아 가보면 레레시아는 밥 한 끼 하던지 술을 마시던지 라고 했었다. 거기서 아스텔이 술을 골랐으니 그러자고 했던 거였지. 사실 밥을 골랐어도 2차로 술 한 잔 하거나 반주를 하게 됐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인 걸로.
골목길을 걸으며 한 번 흘끔이니 아스텔은 주변을 둘러보는 듯 했다. 길을 기억해두려고 그러나. 뭐, 좋은 곳이니 알아주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녀로서도 기쁘지만. 그녀 없이 온다면.. 기분이 좀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인지도 모르겠지만. 짧은 상념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아스텔의 목소리가 일깨운다. 다시 돌아보자 미소가 보이길래 그녀도 싱긋- 웃었다.
"취하기 전의 감각이라. 헤에. 고기 좋아하는구나. 나도 무겁지 않은 고기 안주라면 좋아해. 육포 같은 거. 순살로 된 닭튀김도 좋지."
말하니까 먹고싶네. 오늘은 맥주에 닭튀김이나 잔뜩 시켜볼까. 그렇게 떠들다가도 다시 말이 들려오면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라길래 기회는 만들면 되지- 라고 답을 하고,
"가끔 그러는 사람이랑 아닌 사람은 딱 보면 티가 나. 넌 아닌 쪽이라는 거 잘 보인다구. 어. 그렇다기보다 안 그럴 거 같은데 의외라는 느낌인가? 술 좋아하는거나 은근히 하는 말들 신경쓰는거나?"
그건 아닌가아? 얼굴은 앞을 향한 채 눈만 옆으로 굴려 아스텔을 보면서 하는 그 말 참 얄밉다. 반으로 곱게 접힌 눈동자가 선연히 웃고 있어서 더더욱.
잠시 주던 시선을 앞으로 되돌리고 한 발 성큼 내딛자 어둡던 골목이 끝나고 은은한 조명빛이 밝히는 작은 거리가 새로이 나타난다. 화려한 네온사인은 없고 가게마다 작은 등이나 빛을 내는 장식 등등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서 아스텔의 팔을 가볍게 잡고, 나무로 된 입간판을 세운 한 가게로 다가갔다. 입간판엔 커다란 쉼표 하나가 그려져 있는게 전부이며 가게 외관도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문을 열 때는 전자음이 아닌 영롱한 금속 종소리가 작게 울리고, 내부는 따뜻한 조명과 전체적으로 나무결을 살린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그저 그런 펍의 풍경을 하고 있었다. 자리는 점원과 바로 얘기할 수 있는 바테이블과 별도의 테이블들이 있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나무나무한 가게네- 어디 앉을래? 창가? 아니면 저기?"
안에는 손님이 몇 있었지만 자리를 고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레레시아는 처음 온 아스텔에게 편한 자리를 고르라고 해주곤, 자리가 어디가 됐든 고르는 곳으로 가서 앉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바로 메뉴판이 나왔을 테니 뭐가 있는지 볼 수도 있었을 거고.
"...육포는 몰라도 순살 닭튀김은 괜찮은 안주지. 뼈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편하게 먹을 수 있잖아. 술먹을 땐 제격이야. 그건 그렇고 그렇게 의외야? ...벽을 치면서 산 기억은 없는데."
은근히 하는 말을 신경쓰는 것이 의외라는 느낌에 아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신이 다른 이와의 교류가 은근히 서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냥 차갑게 군 적도 없고, 마냥 무뚝뚝하게 군 적도 없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짓지만 이내 그는 표정을 관리했다. 너무 꼴불견인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은 없기도 했을뿐더러 그가 가지고 있는 습관 중 하나였다.
아무튼 자신의 팔을 잡고 가게로 다가가는 모습에 아스텔은 저 가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걸어오면서 위치는 파악했기 때문에 다음에 또 올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다시 한 번 그 가게의 입간판을 바라봤다. 쉼표. 쉬었다 가라는 의미인 것일까. 꽤나 인상적인 가게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의 상당히 차분하고 수수한 분위기가 아스텔의 기준에는 딱 좋았기에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조용히 술을 먹기에는 딱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잠시 자리를 고민하다 저 편. 정확히는 조금 더 안쪽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창가도 나쁘지 않지만, 술을 먹을 땐 안쪽이 좋아. 좀 더 가게의 인테리어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니까."
창가 자리에 앉으면 아무래도 자연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보이기 마련이었기에 카페 안의 인테리어와 고유한 분위기를 상대적으로 적게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적어도 아스텔의 기준에선 그러했다. 아무튼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간 후, 그는 테이블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어 메뉴판이 나오자 그는 메뉴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하나를 골랐다.
"난 블루 하와이. 너는?"
왜 블루 하와이를 골랐는가.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블루 하와이의 색이 마치 자신이 낚시를 하는 호수와 비스무리한 색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런 이유를 딱히 밝힐 이유는 없었고, 밝힐 생각도 없었기에 그는 특별히 이유를 더 말하진 않았다. 레드아이도 나름 괜찮을 것 같지만 이건 숙취를 해소할 때 먹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블루 하와이를 선택했다.
간결히 대답하고는 눈으로 당신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후 그녀는 아주 잠시동안은 말이 없었다. 귓전에 스치는 바람과 그것이 자아내는 철근의 소음들을 즐기게 두는 것처럼. 그 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앞에서 만났던 레이의 표정이 복잡하게 보였다."
앞이라면 아까 신발을 만지고 있던 그때인가. 그러고보니 그때의 그녀는, 당신의 얼굴을 거진 뚫을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반려동물이었나. 반려는 몰라도 동물과는 거의 비슷하도록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으니. 어쩌면 당신에게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어렴풋이 알아챈걸지도.
"아니라면 미안하다."
물론 그것은 그저 그녀의 기우일 수 있을 것이다. 원채 호기심이 많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단지 당신이 신경쓰이고 있었을 뿐일테니.
용이 호명하자 화려함 일색의 남성이 뒤를 돌았다. 가란이라 불린 남성은 가히 매력적이었다. 새하얀 정장과 고대 동양을 기조로 한 화려한 도포를 걸친 모습도 매력적이지만 최근 기르기 시작해 짧은 꽁지를 묶은 은색의 윤기 있는 머리카락, 자수정을 빼다 박은 눈에 여우처럼 깊은 눈웃음까지. 마흔을 갓 넘겼음에도 20대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대로 늙어 세월을 마주해도 많은 사람들이 길을 지나다 다시 한번 눈에 담고자 뒤를 돌았을 것이다.
"션은 어디에 있느냐?" "저런, 요즘 신이 아니라 어리숙한 녀석만 찾으시니 섭섭합디다."
가란은 인간의 모습을 한 용을 바라보다 어깻죽지로 손을 뻗어 도포를 벗었다. 용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막 돌아왔는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살결 위로 자신의 도포를 걸쳐주자 용의 몸이 어디 하나 드러나는 곳 없이 전부 가려졌다. 용이 옷깃을 여밀 적, 가란은 엉성한 손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흘러내리려 하는 어깨 부분을 조금 더 세밀하게 정렬해주며 동여맸다.
"어리숙한 면에 흥미가 동하여 곁에 두도록 허한 것이 누구더라." "신이옵지요." "그렇다면 다시 뺏지 않는 이상 탓하지 말아야지." "총애를 되찾고자 억지로 손 뻗으면 노하실 것이면서." "잘 아는구나."
가란은 용의 감흥 없는 눈을 마주했다. 이따금 가란은 저 감흥 없는 눈에 다른 감정이 담기는 걸 상상했다. 공포, 경멸, 굴복, 사랑……. 눈물이 맺힌 날, 그 눈물이 지금껏 수집한 보석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음을 알기나 할까. 온전히 손에 쥔 날 공포에 질렸더라면, 어떻게 될까, 때로는 사랑에 흠뻑 빠져들어 열과 눈물, 혹은 수치심에 범벅 져 자신만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추잡한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란은 내색하지 않는 대신 가늘게,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기로 했다.
"그렇다면, 과연 폐하께서 총애하는 션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하, 좋은 곳에 있겠군요. 아주 좋은 곳에."
또 시작이군. 용은 속으로 생각했다. 가란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아랫사람들이 갈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션도 조만간 가란의 괴팍한 성격에 죽어라 갈려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꾸짖거나 막을 생각은 없었다. 용은 지금껏 가란을 막은 적이 없었고, 버티지 못하는 쭉정이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가 떨어지면 거기서 끝이다. 더는 상종할 가치가 없으니 지금껏 흥미가 동했으나 식은 쭉정이들처럼 적당히 가란이 처리할 것이다. 과연 션은 어떨까. 내 기대를 충족하기나 할까? 용은 손을 뻗었다. 가란이 고개를 내밀자 뺨을 쓸었다.
"그래, 어디 용써보련. 내 이로 인해 흥미가 동하면 그 노고를 치하해 줄지 어찌 알겠니." "그 말이 신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면 안아주렴, 내 걷기 싫으니 네가 일꾼이 되어주어야 마땅치 않겠더냐." "총애하는 션이 있는 곳은 아니될 텝니다, 폐하." "아무렴 안다. 단지 여흥이 늘어지는 듯하니, 물갈이를 할 시간이 되었겠거니 싶어서 말이다."
가란은 얌전히 용을 안아 올리며 끓어오르는 쾌감을 억누르려 애썼다. 말하지 않아도 거기까지 신경 썼구나. 그 어리숙한 션이 하루빨리 떨어져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가란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연 높은 곳에 올라 마주한 용의 눈은 어떨까. 입술을 짓씹는다.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이고 생각하겠구나. 션은 직업윤리에 대해 이따금 고민할 때가 있었다. 세상이 이지경이니 직업윤리를 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직업윤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찾고 싶은 날이 있었다.
"상태는 어떻지?" "보다시피 물고기라 속이고 횟감을 쳐도 믿어줄 정도지요."
정당성을……. 왁자지껄한 웃음을 뒤로 피가래 끓는 소리가 희미했다. 원래부터 하고자 했던 일이 이런 부류였으니 각오는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정신이 아득했다.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것이 포르말린에 절은 카데바였더라면. 그 아찔한 냄새에 감정이라도 무뎌졌더라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자 누군가 느긋하게 어깨 위에 손을 짚었다.
"보, 보스." "정신 차려야지, 션 군.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을까?" "그게……."
션은 시선을 굴렸다. 고통을 이겨내려는 손가락이 수술대 위를 광적으로 긁어내는 것이 눈에 선명히 박혔다. 방금 손톱이 부러졌다. 누군가 그걸 발견했다. 션은 입술 속의 연한 살을 짓씹었다.
"아하, 션 군. 이해하네. 당연히 이해하지. 많이 괴롭구나?" "아, 아닙니다." "그렇지? 당연히 아니어야지. 션 군은 저게 사람으로 보이나?" "아, 그게, 시, 신체적 구조로는……."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하얗게 물든 손길에 고통이 스몄지만 션은 짓씹은 살을 악물고 버텼다. 가란이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션 군…. 7이 박혔는데 신체적 구조가 같다고 할 수 있나? 혹 자네는 반동분자일까? 지금 문밖에 가디언즈 병사가 대기하고 있으니 입 조심해야지. 즉결 처형 당하기 싫으면." "……." "알아 들었으면 입 똑바로 열어. 이게, 뭐야?" "……세븐스입니다." "옳지, 잘 아네."
손이 떨어졌다. 옷에 핏자국이 남았다. 어깨에서 막혔던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기가 무섭게 손이 닿았던 곳이 뜨겁다. 가란이 한가롭게 웃는 모습이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괜히 짓씹은 속살을 혀로 훑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알면 거기 있는 실톱 좀 줄래?" "……저, 실톱은 어디에 쓰시려고.." "당연하잖니."
가란이 피로 범벅 진 의료용 장갑을 낀 검지 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션 군, 나는 이런 일에 대한 면허는 없지만 이런 일에는 경력이 10년이 넘어가다 보니 머리통 하나는 끝장나게 잘 연단다. 그러니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렴.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야지."
션은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실톱을 건넸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뒤로 각종 경박한 문장이 흘렀지만 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몸을 꿈틀대며 피거품과 함께 질러대던 비명소리가 가늘어졌을 때, 가란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션 군, 눈 감았네?"
안색은 새파랗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느끼는 감정과 다르게 뇌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이 상황을 도피하고자 반대되는 표정을 택했다. 션은 가쁜 숨을 뒤로 고른 치열을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폐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와 흩뿌려지는 그을음, 잔열 남은 싸움터를 바라보던 그의 머리에 일순간 깨달음이 스친다. 아, 이건 오판인가? 검은 연기 속에 시계가 가려져 헤매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일 테지만, 상대의 세븐스는 그런 감각의 차단을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는 폭발의 주체는 될 수 있을지언정 연막 속을 볼 수는 없다. 그 말인즉, 그라고 해서 안에서부터 날아드는 기습에 완벽히 대비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폭발음이 한 번, 그리고 충격음이 한 번. 쾅. 한순간 끊임없이 돌아가던 사고도, 시야도, 몸체로부터 느껴지던 통증도 모두 한순간에 멎어버린다. 충격으로 인해 짧은 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이다. 날아드는 물체의 궤도를 비틀기 위해 폭발을 일으켰지만 때가 조금 늦고 말았다. 그다지 덜어지지 못한 채 끄트머리만 조금 빗겨진 힘이 그대로 머리를 치고 날아갔다. 다만 그 덕분에 말뚝이 머리에 박혀버리는 참사만큼은 피했으니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신은 금세 돌아왔지만 시야가 흔들리는 듯했다. 머리 위쪽에 직격한 물체를 눈으로 쫓아가자 그 종착점에 상대가 있었다.
"씨-*, 대가리 깨지겠네."
쨍하게 몰려오는 두통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무장 안으로부터 뜨거운 감각이 스멀스멀 흘러내리는 듯하다. 피라도 터진 모양이지. 미간이 한껏 좁혀지며 눈이 가늘어진다. 아, 아프니까 더 웃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니까 상관없나.
"역시 실수 한 번이 무섭다. 개-, 아니. 새*야. 그렇지?"
그 와중에 아직 친하지는 않은 동료라고, 나름대로의 순화 표현을 쓸 여력은 있나 보다. 잡담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듯 곧바로 행동이 이어졌다. 무장의 곳곳으로부터 여러 줄의 총열이 전개되며 사방, 정확히는 지면을 향해 마구잡이로 탄환을 흩뿌린다. 그중 몇은 쥬데카의 근처에 날아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부터 다시금 불꽃이 터져나왔다. 조금 전의 일로부터 교훈을 얻었는지 폭발의 형태가 위로 높았으나, 다만 이번에는 하나로 그치지 않을 셈이다. 발 밑으로부터 지뢰가 터져나가듯 충격이 연발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최근 이전엔 이렇게 대화를 나누거나 한 적이 없잖아? 몰랐던 거니까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특수부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그녀도 타인과 교류를 필요 이상으로 하고 있지 않기도 했으니. 아스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의외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많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얼굴에 시무룩함이 지나가는 걸 보고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며 신경 쓰지 말라 덧붙였겠지.
간판이 쉼표인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반응을 슬쩍 살피니, 조용히 미소를 짓는 얼굴이 안의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싶다. 적어도 오늘 한 잔 하고 갈 기분은 나는 듯 했다. 원하는 자리를 고르라 넘겨주니 그는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편이 좀 더 가게의 내부를 즐길 수 있노라고. 그녀도 그 말에 동감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고른 테이블로 걸어갔다. 둥그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로 마실 것을 고르는게 자주 온 듯 보이지 않았을까.
"시작부터 상큼한 거라. 그럼 나는 위스키 사워. 주전부리는 일단 한 잔 마시면서 생각할까나."
얼마나 마실지는 모르지만 시작은 가벼우면서 입맛을 돋구는게 좋을 테니까. 메뉴판을 가져다 준 점원에게 얘기하자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아스텔이 달리 안주를 추가하거나 했다면 그것도 확인하고서 갔을 것이다. 술이 나오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사이, 의자에 기대어 턱을 괸 그녀가 아스텔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툭 물었다.
"첫 잔만 칵테일하고 다음은 맥주로 할 거야? 맥주가 주력이라길래 그걸로 할 줄 알았는데."
메뉴판에는 분명 맥주도 있었다. 시판 제품부터 펍의 수제품까지 종류도 꽤 다양했을텐데. 별로 고민 없이 칵테일을 고르길래 그냥 오늘은 칵테일이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첫 잔이니까 고른 건가 싶기도 하고. 별 거 아닌 생각이지만 당장 할 말이 없어서 물어본다. 한 번 해본 말인만큼 그녀의 시선은 마냥 아스텔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칵테일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면 칵테일로 마실까 싶어서. 딱히 크게 싫어하는 것도 아니니까. 맥주야 나중에 마셔도 상관없어."
이를테면 스테이크 집에 가면 스테이크를 먹고, 디저트 카페를 가면 디저트를 먹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어쨌든 이곳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칵테일이라면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가장 맛이 좋다는 의미이니까. 그다지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으며, 딱 그 정도일 뿐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는 살며시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주변의 인테리어를 바라봤다. 역시 들어올 때와 비슷하게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활기가 차서 좋아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마치 호수에 자리를 잡고 낚시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레레시아의 시선이 절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음 잔은 다음 잔을 마실 때 생각해도 안 늦어. ...임무도 아니잖아. ...조금 여유롭게 골라도 될 것 같은데."
빠른 판단력을 지녀야만 하는 임무라면 모를까. 고작 술을 마시는데 전투적으로 마실 이유는 없었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아스텔은 괜히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좀 더 자신 쪽으로 밀착시켰다. 단 한 시도 떨어뜨린 적이 없는 그의 검은 그야말로 지금 이 분위기에 있어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으며 이 거점을 벗어난 술집에서는 바로 난리가 날 물건이었으나 이곳은 엄연히 레지스탕스의 거점. 그가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뭐라고 할 이는 없었다.
이내 칵테일이 나오고 테이블에 놓여지자 그는 그녀의 몫을 그녀에게 먼저 내민 후, 자신의 몫을 챙겼다. 이어 그는 잔을 들어올린 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건배하자. 누군가와 술을 마시면 괜히 이걸 하고 싶어지더라."
너는 어떻냐는 듯이 그렇게 물어보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잔에 가볍게 제 잔을 부딪치는 것을 기다렸다. 경쾌한 소리가 울린 이후, 그는 술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매캐한 연기를 밀어내듯 숨을 내뱉는 네 손에 쥐어진 체인으로부터 공격이 명중했음을 전달받는다. 아주 완벽하게 들어맞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잖은 충격을 주기는 한 모양. 연기가 사라지며 정확히 보이는 승우의 모습과 들려오는 말소리로 그렇게 파악한 너는 체인을 잡아당겨 말뚝을 회수했다.
"언제든 멈출 수야 있습니다만."
실전처럼, 이라곤 했지만 결국은 훈련이다. 여기서 부상을 심하게 입어서 문제가 생긴다거나... 하는 건 아무래도 본말전도다. 물론 금방 상처는 치유되는 장소지만,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말하던 찰나 승우의 무장으로부터 흩뿌려지는 탄환과 뒤이은 폭발, 멀리서부터 자신을 노리는 게 분명해 보이는, 지면을 타고 이어지는 이어진 폭발의 면을 보던 너는 머리를 굴렸다. 범위가 너무 넓다. 그럼 뒤로 물러서야 할까? 폭발은 위로 솟아올랐기에 아까처럼 폭연에 숨어 기습을 노리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네 주변을 둘러싼 탄환이 폭발하는 순간 너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다리 쪽에 수납되어 있었던 것마냥 무장이 우산처럼 펼쳐졌고 아래로부터의 폭발을 탄 듯 그대로 너는 좀 더 위로 붕 떠올랐다.
"으윽..."
다만 탄환의 수가 많았던만큼 충격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을뿐더러 폭발로부터 가해지는 고온은 막는다고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을음으로 덮인 무장과 그 안의 피부가 달라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신음을 삼킨 너는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말뚝을 던졌다. 이번에도 노리는 것은 머리... 가 아니라 아마 승우의 발치, 조금 뒤쪽이었다. 그대로 바닥에 강하게 박힐 만한 정도의 힘, 말뚝이 땅에 박힘과 동시에 체인이 팽팽해지며 금속성의 파열음을 퍼트렸을 터다. 그러나 팽팽함은 오래 가지 못했으니, 점점 느슨해지는 체인은 그 주인을 말뚝을 향해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대로 공중에서 승우에게로 너는 날아가고 있었다. 처음에 시도했던 공격처럼, 이번에도 역시 내지르는 것은 주먹이다. 다른 점이라면 아까보다는 빠르고, 무장으로 감싼 주먹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요컨데 가는 곳의 가장 최적인 걸 골랐다 이 뿐일까. 특별히 칵테일 전문인 곳은 아니지만 종류도 제법 있고 주문하면 따로 만들어주기도 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하다.
"취향에 연연하지 않는구나. 그것도 의외네."
보통은 좋아하는 것 우선적으로 고르기 마련이니.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의외라고 말하며 그녀도 시선을 굴렸다.
바테이블에 둘. 별도의 테이블에 셋. 그녀와 그를 제외하면 있는 손님들은 그 정도인 내부는 잔잔한 대화소리와 잔 달칵이는 소리, 간간히 쉐이커 흔드는 소리만이 정적이 내려앉지 않게 공기를 울리고 있다. 이런 술집이 그렇듯 한 벽면을 술병으로 채운 바테이블 안쪽에서 잔을 정리하던 점원이 그 구석으로 가 뭔가를 조작한다. 몇개의 버튼음과 구식 음향기기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나고 곧 나즈막한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긴장을 풀고 일상의 피로를 잠시 내려놓게 해줄 분위기가 슬그머니 테이블을 감싸온다.
다음 잔은 마실 때 생각해도 되지 않냐며, 급할 거 없지 않느냐는 아스텔의 대답이 들렸다. 하지만 레레시아는 그의 손이 머리칼을 정리하고 검을 당기는 걸 지켜보다가 턱을 괸 손끝을 까딱였다. 그냥 물어본 거야. 짧게 내놓는 말은 그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아까 그도 그러지 않았냐고. 사실 그녀의 마시는 속도가 빨라서 다음 잔을 미리 생각하는 습관도 있다보니 나온 말이기도 했으나. 오늘은 그녀도 느긋해지고 싶으니 천천히 마시며 생각하기로 한다.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술잔이 나와서 턱 괸 손을 내려야 했지만.
"그래. 이러면 혼자 마신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좋긴 하더라."
그녀는 먼저 밀어준 잔을 들며 아스텔의 건배에 호응했다. 칭- 크기도 모양도 담긴 술의 색도 다른 두 잔이 부딪히자 듣기 좋은 소리가 가늘게 울린다. 그가 시킨 블루 하와이는 이름처럼 새파랗고 그녀의 위스키 사워는 레몬이 퐁당 빠졌다 나온 것처럼 노랗고도 투명하다. 위에 엷게 덮인 거품층과 함께 한모금 머금자 부드러운 신맛이 밋밋한 혀를 쓸며 지나간다. 첫 모금을 그렇게 즐기고 한 모금 더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에는 술과 함께 나온, 견과류 담긴 작은 접시가 한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다.
"-최근, 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어때? 다른 사람들하고는. 생각한 만큼 교류하고 있어?"
잔을 내려놓고 대화거리를 고르는 듯 하다가 꺼낸 말은 역시 별 무게감 없는 것이다. 다시 턱을 괼 듯 테이블에 팔을 걸치다가 그대로 기대기만 하고 의자를 살짝 당긴다. 자연스럽게 테이블과 가까워진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건배에 호응함에 따라 챙. 하는 작은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 맑은 소리를 아스텔은 좋아했다. 누군가와 교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물론 교류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그런 교류에 목이 말라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겠는가. 지금껏 그런 교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으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모든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푸른 칵테일을 입에 담으니 상큼한 맛이 돌았다. 이전에 먹었던 블루 하와이보다 조금 더 상큼한 맛이 강하다고 느끼며 그는 괜히 한 모금 더 마셨다. 입가에서 그 상큼함을 천천히 녹이던 그는 잔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제 0 특수부대가 만들어지기 전보다는 교류가 있지. ...그래도 아직은 내가 맡는 임무가 많으니까 많은 교류는 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전보다는 괜찮아."
매번 임무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리지날 보검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경력이나 경험이 있어서, 혹은 로벨리아의 부관이라서 그런지 로벨리아는 그에게 이런저런 일을 지시할 때가 많았다. 그만큼 로벨리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에 대해 아스텔은 그 어떤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조금 피곤한 감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하지만 이런 일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에 대해 불만이나 불평을 표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내용물이 가득 들어있는 잔을 괜히 잡고 뱅뱅 원을 그리듯 돌리던 그는 다시 잔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 그는 답을 망설이다가 싱긋 미소를 보였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 ...뭐, 이제는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다수의 어린아이들이 또래 아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유대감을 키워나가야 할 나이 때 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서로 죽이고 싸우는 것만 배웠으니 말이야. ...그 이후로도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임무만을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래서 이 나이를 먹고 이렇게 하는 것이 신선해."
작게 웃음소리를 내면서 그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쓸데없는 말을 해버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미안. 너하고 이야기를 하면 괜히 필요없는 것도 말해버린단 말이야. 적당히 흘려줘. 방금 말들은. ...아무튼 춤 말이지만, 가끔 상대를 해달라고 했지만 역시 조금 더 길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아직 제대로 익힌 것이 없어서 말이야. 상황이 상황이라 마냥 배울수만도 없어서. 일단 시간은 내보고는 있지만."
당황한 기색이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 양, 보조개가 떠오르는 미소를 보인다. “안 궁금해?” 굳이 못을 박듯이 되묻더니 그새 놀리는 것에 흥미가 떨어진 듯, 차분한 얼굴이다. 당신이 그의 맞장구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면 뭔가 생각하듯 잠시 침묵하다가 그걸 깬다.
“답답한 사람이 좋아질것 같은 온도야. 친해지고 싶다고 했던게 빈 말이 아니었다면 운 좋네.”
돌고 돌아 사고는 다시 당신이 아마도 가디언즈를 배반했다는 것으로 돌아간다. 속을 긁어도 별 말 없는걸 보면 죄의식에 절어서 아무 말 안 하는 걸수도 있고, 그는 죄의식 많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어수선하다. 당신이 별 말 없이 그의 태도에 맞춰주는 것은 당신의 천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스키마를 거쳐 결론 짓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맞아, 많지. 난 마리 걔 능력이 재밌더라.”
상상력하면 창의력이 뒤따르듯 생각나고, 창의력 하면 응용. 응용 하면 세븐스. 그런 생각을 거쳐 온걸 그대로 뱉어서 조금은 뜬구름 잡는것 마냥 들릴지도 모르겠다. “육감도 응용하려면 상상력이 중요할줄 알았는데, 아니야?” 육감도 어찌 보면 추상적인 것이니 당연 그럴줄 알았나보다. 위스크를 건조대에 올려놓고선 자신 몫의 설거지는 끝났다는 양, 물기 젖은 손을 대충 셔츠에 문댄다.
“내가 불러놓고선 설거지까지 시키니, 좀 미안한데.”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표정부터 별 생각 없는듯하고, 말 하던 시점에서 이미 등을 돌려 오븐을 체크하러 갔으니. 오븐 불을 키면 꽃모양으로 장식된 파이나 유령이 가운데에 자리잡은 파이 여러 개가 연한 회색빛을 안고 있다. 처음 넣었을때보다 진한 채도였으니, 잘 구워지고 있는건 확실했다.
“미는 주관적이니까.”
눈가를 휘며 웃는 당신을 보면 고개를 다시 오븐 쪽으로 돌린다. 그저 아까 보았던 파이의 회색빛이 각도 때문은 아니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
“네가 만족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뭐고?”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 들려오면 할 말을 찾듯, 당신 쪽만 가만 응시하는 것이 느껴질 테다. “기억 나면 바로 달려올게.”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이미 기억 하긴 글렀다고 단정지은듯 하다. 살짝 웃는 낮짝은 맑아보인다.
“술자리는 좋아하는데,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이상한 데서만 운이 좋은지라.”
왕게임을 싫어한다는건 아닌데, 관심도 과하면 힘들다. 내향인인지라 그는 더 힘들었다고 무언가의 징징거림을 해 댄다. “참여한 내 잘못이긴 하지만.” 다음번엔 참여 안 하고 구경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당신의 그의 나이를 추정하는 것을 들으면 눈매가 축 쳐지는 것이, 눈을 온전히 뜬 모양이다.
“좋아질것 같다는거 취소야.”
빈말이지만, 연기한 투는 평소의 무덤덤한 것인지라 진심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타이머가 울리면 그걸 끄러 바로 몸을 돌린지라, 어째 보면 삐진 사람의 행동 같기도. 타이머를 끄고 당신이 썼던 오븐 장갑을 집는다. 오븐을 열면 따뜻한 열기와 함께 사과 파이의 단촐한 단내가 풍겨온다. 그는 오븐 장갑을 끼지 않고 접고선, 그대로 틀들을 꺼내 식히려 카운터 위에 올려놓는다. 장갑을 대충 오븐 핸들에 널어놓고선 오븐을 닫으면 더운 것도 그걸로 끝이다.
>>385 굳이 잭 발렌타인주라고 칭할 필요는 없고 잭주나 발렌타인주라는 식으로 해도 괜찮아요. 물론 잭 발렌타인주라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요! 아무튼 상판에 대해서 잘 모르겠거나 한다면 얼마든지 질문해주세요! 답할 수 있든 단계에서는 얼마든지 답을 할테니까요. 또한 스토리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질문해주시면 될 것 같고 일단 >>0 레스에 스토리때 전투 기본 룰이라던가 전투에서 쓰이는 요소인 '버스트'에 대한 요소도 있으니까 참고해주시길 바랄게요! 특히 버스트는 셋 중에서 하나를 고르셔야 해요.
그건 그렇고 루시아에 대한 시트도 써서 올려야하는데..오늘은 쉬고 내일 올려야겠어요. (글러먹음)
어지럼증이 밀려와 머리를 흔들거리면서도 말투에는 흥분감이 역력하게 묻어난다. 한 번 불 붙은 이상 끝을 봐야겠다는 심산인가? 맨 처음 준비운동부터 시작해 천천히 가자고 했던 건, 진심으로 시작했다간 지금처럼 끝까지 가리란 사실을 스스로 알아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전처럼 날고 뛰어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반응속도도 집중력도, 전반적인 감각이 둔감해진 듯했다. 그는 연쇄적으로 터져나가는 폭발의 끝으로부터 날아오르는 쥬데카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미**, 임기응변 개쩌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무리 없이 피할 수 있으려나? 쥬데카의 공격은 꽤나 빠르고 매섭다. 둔해진 머리로는 완벽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울 만큼이나. 그러므로 그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좋은 위치를 점하고 쏟아지는 공격은 위력적이지만 허공에서의 기동이 쉽지 않다는 단점 역시 공존한다. 그러니 이 수법을 쓴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 그는 전투의 여파로 부서지고 튀어오른 바닥면의 파편을 붙잡아 허공에 던져넣었다. 팔매질로 떠오른 파편이 날아드는 쥬데카와 그 자신의 틈 사이에 위치한 순간 기변이 벌어진다. 돌조각으로부터 어김없이 붉은 빛이 일렁이더니, 이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낌새로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다만 폭발점이 만들어진 지점이 시전자 자신에게도 무척 가까웠다.
그의 무장은 스스로의 약점, 능력의 여파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보완하여 폭발에 대한 내성이 극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버스트와 스페셜스킬의 위력을 경감시키는 것만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근거리에서 접하고도 무사하기는 더더욱. 그 사실을 알고서도 눈앞에서 거하게 터뜨리겠다는 것이다. 이판사판이라는 도박도 실전이 아니니 꺼낼 수 있는 수가 아니겠나. 소기의 목적은 버스트였으니 주객전도는 금물이지. 쥬데카가 버스트로 제대로 막으면 자신이 더 다칠 테니 지는 거고, 못 막는다면 제 무장이 더 잘 버틸 테니 이기는 거다. 속 편한 합리화를 끝으로 눈앞이 붉게 물들며 거센 힘이 터져나온다. 불길이 몸을 집어삼키기 직전, 참을 수 없는 격양에 그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궁금하지 않느냐는 말에 얼버무려 버린다. 진심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럼 물어보는 건 실례가 아닐까 싶어 말을 그만둔다. 그렇다고 침묵해버리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타협을 한 셈이다.
"그런가요?"
분명히 친밀감이 꾸준히 쌓여가는 듯한 말을 듣고 너는 다행이네요. 라면서 웃었다.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리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너는 이야기의 흐름을 되짚으며 고갤 끄덕였다. 아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해야 할까요... 음, 가끔이지만 대체 뭐 때문에 불길한 느낌이 드는지를 모르니,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불필요한 상상이라는 말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애초에 육감으로 잡아내는 일들은 대부분 불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해도 좋지 않은 일만 떠오른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에봇의 능력도 그렇지 않나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의 범주가 넓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되묻는다.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썼고요."
네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오븐으로 향하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서 주방용기를 깨끗이 닦기 위해 문지른다.
"으음, 만족하기 전까지 그건 알 수 없지 않을까요?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만족하겠다, 라고 생각해도 막상 그 때가 오면 어떨지는 모르니까요."
그건 언젠가 맛볼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질문을 빗나간 대답을 하면서 가벼운 미소를 유지한 채로 설거지를 계속한다. 그 와중에 기억이 난다면 바로 달려오겠다는 말에는 순수하게 그 자체로 고맙다는 듯 미소를 띄울 뿐.
"그랬...었죠, 확실히..."
이상한 부분에서 좋은 운이라. 누군가는 불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상황을 적어도 운이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그래도 나쁜 경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는 술자리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분위기는 괜찮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앗, 그...많이 틀렸나요?"
전부 뜨인 눈과 함께 덤덤한 목소리로 전하는 말, 너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눈을 제대로 마주치는 것도 잠시 타이머가 울려 몸을 돌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너는 좀 더 아래로 말했어야 했나, 아니면 그렇게 어리게 봤다(=얕보았다)라고 생각한 건가 싶어 거품이 묻은 네 손으로 흔들리던 시선을 고정했다. 어떡한담. 잠시 그의 눈치를 보던 너는 일단 설거지부터 끝내기로 한 듯 서둘러 거품을 닦아낸다. 그 와중에도 두어 번 정도 그의 모습을 살펴보는 게 퍽 처량하다.
용이 자신의 앞 발로 꼬치를 받아 쥐고는 몸을 웅크려 먹는다. 입술을 오므리는 것을 보아 그의 입맛에는 짤 것이라 추측했다. 역시 사람 입맛에 맞춰 만들어 진 요리라 동물 입맛에는 짠 모양이었다. 칼을 꺼내 고기 한덩이의 겉면을 조금씩 긁어내어 이미 뿌렸던 향신료와 소금을 조금 걷어내었다. 물론 다른 고기에는 자신의 입맛에 맞춰 자극적으로 조리하겠지만.
"훈련장? 그것도 좋지. 하지만 훈련이 끝나고 나면 고기를 못 구워먹잖아? 그러니 그냥 여기서 훈련도 하고 고기도 구워먹는 거지."
이전에 꼬맹이에게 들켜 큰 곤욕을 치른 경험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또 한번 그랬다가 들킨다면 더 이상 입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고기가 천천히 익어가며 맛있는 냄새가 숲 가득 퍼졌다. 이내 적당히 익은 한 덩이를 잘라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육즙과 자극적인 시즈닝이 잘 어우러졌다.
"용의 모습으로 먹기엔 너무 작지 않아? 옷 어디 놔뒀어? 가져다줄게. 인간 폼으로 돌아오지 그래?"
멈출 리 없었다. 지금의 너 역시 마찬가지다. 공중에서 위치를 잡고 돌진하는 건 별다른 수단이 없는 한 방향을 틀 수 없다. 그렇기에 빠른 속도로, 상대가 피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시도해야만 했으며 지금은 그러니까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말이지. 문제는 네가 그렇게 도저히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는 것과, 네가 공중에서 방향을 틀 방법이 전무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제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방향을 틀려면 다른 쪽으로 말뚝을 박아 잡아당겨야 한다, 사슬이 다른 곳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 동안 너는 계속해서 궤도를 따라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상 이 공격으로 마무리, 혹은 그에 준하는 상황을 만들고자 했으므로 너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
아마 너와 그의 사이에 튀어오른 파편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을 터다. 정확히는 파편이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네 머리는 수십 가지 이상의 생각을 순식간에 거친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애초부터 반격을 피할 생각으로 달려든 게 아니잖는가. 더군다나 지금 저 앞의 파편은 지금까지 폭발했던 것들과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전신의 피부가 일어나는 듯한 오싹한 감각. 너는 이를 악물었다. 치잇,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너는 체인을 놓고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러자 아래로부터의 폭발을 막아냈을 때와 비슷한, 우산 형태로 무장이 금속성의 마찰음을 내며 펼쳐졌다. 다른 점이라면 네 눈 앞에 발생할 폭발이 강한 만큼, 보통의 방어보다는 훨씬 더 단단했을 거라는 점일까. 문제는 속도였다. 우산처럼 펼쳐지는 방패가 완벽하게 펼쳐지기 전에 강렬한 섬광과 폭음, 그리고 엄청난 고열이 터져나온다.
"......"
아마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너는 지금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잠깐 끊겼던 정신이 돌아오자 너는 몸의 전면부가 화끈한 것을 느끼며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원하게 뱉을 수 없었던 것이, 폭연을 삼켰는지 목이 칼칼한 것을 넘어 타는 듯했기에 너는 켁켁 거리며 숨을 두어 번 뱉어낸다. 아직도 연기는 다 사라지지 않았지만 너는 그 연기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온통 그을음으로 가득한 무장을 내려다보며 땅을 짚고 일어서려던 너는 불현듯 흔들리는 시야에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마구 흔들리고 그제서야 뒤통수에서 통증이 느껴진다는 걸 깨닫는다.
"아윽..."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몇번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뒤를 돌아보면 벽에 강하게 부딪힌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헬멧이 없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깨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버스트가 아니었다면 막은 팔이 통째로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전부 막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끝날 피해를 지금 깨어날 수 있는 수준으로 경감시킬 수 있었던 건... 너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벽을 짚었다. 손은 물론이거니와 몸의 전면부에 입었을 화상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으므로 너는 계속해서 움찔댄다.
//그럼 이쪽도 버스트로 막아보기 >.< 방어무시를 무시하고 1배로만 맞는거... 밸런스 너무 잘 잡혀있는 거 같아요!
최근 어때. 가볍게 꺼낸 말이었으니 대답 역시 간단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누구와 뭘 했는지까지는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어떻다, 정도의 말이 나오고 그 중에서 적당히 다음으로 이어갈 화제를 고르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흐응."
레레시아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아스텔을 응시했다. 이전보다는 괜찮다던가 말할 때에는 얼굴을. 잔을 돌릴 때에는 그 손을. 그러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다시 얼굴로 시선을 옮겨가며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생각한다. 신기한 사람이다. 무엇이 어떻게, 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이윽고 그가 시선을 맞추며 얘기하길래 그녀도 슬슬 입을 열었다.
"미안할게 있나. 적당히 꺼낸 말에 너무 잘 대답해줘서 오히려 좋은데. 싫어하지 않아. 그런 얘기를 듣는 거."
정확히는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나도, 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그렇게 아이스러운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거든. 어릴 때는 툭하면 세븐스 조절이 안 되서 나가지도 못 하고 늘 라라랑 둘 뿐이었어. 그나마 라라가 있으니까 나았나. 그러다보니까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는 타인이나 바깥과 교류가 없었고. 줄곧 그 작은 방만이 세상의 전부였는데... 그, 여기 들어오고 시야라던가 많이 넓어지고 바뀌었지. 그래서 그 기분 이해해.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하면서 신기하고 들뜬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
아스텔의 얘기를 들어서인지 살짝 흘리듯이 말하던 그녀는 중간에 아차, 하듯 말을 바꾸었다. 말을 바꾸며 당황한 것 같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렇지만 시선이 아스텔이 아닌 잔으로 내려가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춤이라면 네가 낼 수 있는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이면 돼.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니까 잘 알고 있고, 애초에 프로급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대신 시간을 더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니까, 만족스럽게 익히거든 꼭 얘기해. 춤 신청을 받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으니까."
잊으면 화낸다? 늘상 하던 말투로 떠들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분면 순한 신맛인데 입안이 간질거리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다음 말을 찾아 꺼내었다.
"그러, 크흠. 그러면 내 제안에 수락한 것도 그 교류의 연장선이었어? 내가 꺼낸 말이긴 한데. 뭔가 이유라도 묻지 않을까 했는데 그냥 수락하길래 뭐지 싶었거든."
짜다. 짠 것은 싫다. 담백한 것이 좋았다. 간이 세면 무엇이 들었는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잡스러운 것을 먹지 않는 연유 이곳에 있다. 가늠할 수 없으면 더욱이 경계해야 했다. 이곳에 있다는 뜻은 로벨리아가 뽑은 사람이고, 일단은 예민한 기감에 독 없음 믿고 먹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죽일 생각 만반하다. 씹는 순간에도 그리 날카롭게 생각했다. 제 속에서 증오 끓어넘치던 그날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피 토하던 날 끔찍하였다. 과거, 어쩌면 어제도. 혹은.
"그렇군. 움직이는 것 여간 귀찮겠지."
혀로 느릿하게 육즙 묻은 아랫입술 훑는다. 여전히 짜다. 고기 익는 냄새 뒤로 시즈닝 냄새 코를 찌른다. 간단히 후추 정도만 뿌리는 것 좋아하였기 때문인지 자극적인 냄새 여간 익숙하지 않다. 소시지 하나로도 속이 받쳐주지 않으려 든다. 남들 반의반도 못 먹기 때문인가. 이어지는 말에 눈 감는다.
"아니, 혼자 할 수 있으니 기다리게."
겨우내 삼킨 것을 뒤로 겨우내 삼킨 것을 뒤로 몸을 느릿하게 움직인다. 물 흐르듯 움직인 몸 나무 뒤로 가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 몇 번 난다. 나무에도 가려지지 않던 거대한 몸신과 살랑거리던 꼬리가 사라진다. 아니, 꼬리는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변신한 뒤로 머리끈 끊겼기에 미처 묶지 못한 긴 머리카락은 바닥을 느릿하게 쓸법하나 세븐스를 이용해 공중에 떠 허공을 걸어오듯 했기 때문인지 머리카락 더러워지는 일 없다.
"마저 대화나 하도록 할까. 그래, 제법 재밌는 발언이었어.. 이곳에서 훈련 겸 힐링이라. 하나 궁금하여 묻는 것이니 답하지 않아도 되네. 글라키에스 때문에 그런 건가?"
"...그래? ...어쩌면 제 0 특수부대에 온 이들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르겠네. 정말로 자유롭게 산 이는 그다지 없을테니까."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온 것일테고. 물론 그게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스텔의 머릿속에 선우의 이름이 문뜩 떠올랐다. 전에 대화한 것에 따져보면 그는 상대적으로 꽤나 자유롭게 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부러울 정도로. 허나 그것이 일반적인 삶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쩌면 이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지 않던가. 답을 마치며 그는 괜히 블루 하와이를 다시 마시면서 1/4 정도를 남겼다.
"...노력해볼게. 알다시피 레지스탕스의 삶은 내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이쪽의 삶이자 인생이기도 하고."
아직은 들키지 않았지만 내일 운 나쁘게 가디언즈에게 이 거점을 들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가디언즈는 이곳을 총공격할 가능성이 높았고 애석하게도 아스텔은 그 모든 공세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오리지날 보검이 있다고는 하나 저쪽은 7개이다. 그 7개를 자신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안타깝게도 제 0 특수부대원들이 다 힘을 합쳐도 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곳의 삶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이내 그녀의 입에서 질문이 나오자 아스텔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야기했다.
"...억지로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내 교류에 대해서 상당히 물어보는 것 같은데. ...보통은 그다지 물을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만약 그런 것이라면 굳이 억지로 뭔가를 물으려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먼저 한 후, 아스텔은 숨을 잠시 죽인 후에 레레시아의 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유를 물어봐야만 했던거야? ...그런 거 없이 그냥 마실 수 있으면 마시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역으로 내 쪽에서 무슨 이유가 있었냐..라고 지금 물어볼게."
뒤이어 아스텔은 티슈를 뽑은 후, 젖어있는 제 입술을 가볍게 닦아낸 후, 근처에 놓여있는 물을 다른 컵에 한 잔 따라서 그 내용물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내 이야기했다.
"...굳이 이유를 하나 더 말하자면... 단순히 교류만은 아니야. ...정확히 설명하기 조금 애매하지만... 그게 무엇이건 그냥 할 수 있을 때 이것저것 하고 싶거든.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인생이고, 어제 힘내자고 이야기를 한 이가 다음 날, 제 친구의 손에 죽는 것도 여럿 보았고... 내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일도 있었고... 그냥 그래서 술이건 밥이건 다른 무엇이건 할 수 있으면 미루지 말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그런거야."
>>465 엘리나:......이해불가능한 말입니다. 엘리나:......제 아버지는 소재를 알 수 없습니다. 당신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리나:......그러니까 그 제안은 불가능한 제안입니다. 엘리나:......무엇보다 데려가준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고민은 무언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궁리에 가깝다. 해결책이 없는가, 숙고해보고 그 고민 끝에는 그것이 최악이든 최선이든 답이 존재한다. 그러나 답이라는 게 없이, 그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닫으며 막을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는 고민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가면 갈수록 몸이 망가지는걸 몸으로 느껴.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나는데, 난 벌써 죽어가는 중이야."
이걸 늦추려면 세븐스를 사용하지 않고, 그 반동을 겪지도 않으며 회복을 하거나 해야겠지. 하지만 이제 쉴 여유도 없는데다가 지금의 내 몸을 마법같이 회복시켜줄 그런 기적도 없다. 나는 작전을 거듭할수록, 작전 중에 사망하는 확률을 제외하더라도 저승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그 전에 작전 중에 끝장나겠지만."
마치 이 녹슬어서 무너지는것만 기다리는 철탑처럼. 무엇하나 받치는 것 조차 고작인 채로, 시간이 지날수록 스러져갈 것이다.
눈앞이 그저 밝다. 한낮에 태양을 마주볼 적이면 하얀 빛이 두 눈을 태워버릴 것처럼 빛나는데, 지금은 꼭 그것을 영거리에서 느끼는 듯한 기분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밝은 빛을 앞에 둔 채 망연한 어둠이 찾아든다. 찰나, 의식의 암전.
……극심한 고통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살갗이 온통 화끈거리고 귓가에는 이명이 쨍하게 울려 댄다. 의식적으로 정신을 일깨우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까무룩 뻗어버릴 것만 같아 필사적인 사고를 이어간다. 씨-*. 제대로 휘말리면 이런 기분이구만. 덕분에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역시나 목숨은 아깝다는 것. 특수부대원이라는 직책을 달았으면서 능력 조절을 삐끗해 사고사하는 것만큼 황당한 죽음도 없을 테다. 그래서 죽지만은 않을 정도로 조절하긴 했는데, 과연 너무 과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들었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이랬으니 할 말은 없지만서도. 통증으로 인한 불쾌감을 토로할 기운도 없어 그는 구태여 움직이려 힘쓰지 않고 그대로 주변을 느껴보았다. 등 뒤로 튼튼한 지지대가 느껴지며 하체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으로 보아, 이쪽은 날려가서는 아예 벽에 부딪치다 못해 박혀 버린 모양이다. 간신히 의식만은 붙들고 있는 게 용했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이런 무지막지한 짓거리를 벌일 마음을 먹은 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훈련장의 회복 기능은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다. 잠자코 숨을 고르며 기다리니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는 것이 느껴져, 그는 슬며시 눈을 뜨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쥬데카는 무사한 모양이다. 꼼짝할 정도는 되니 제 공격도 무리 없이 막은 듯하고. 소리내어 상대방을 부르려 했지만 아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에 전투 중 미처 사용하지 않아 바닥을 굴러다니던 탄환 하나를 작게 폭파했다. 주의를 끌 만큼은 되리라.
특수부대의 대부분이라. 그녀는 부대가 편성된 이후 말을 나눴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다들 가지각색의 삶이었지만 세븐스기에 고달팠다는 공통점은 있었지. 그 고달픔의 궤도 모두 제각각이겠지만. 그렇기에 한 곳에 모이게 되었을 거란 건 그녀도 생각했다.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면 여기에 올 리가 없으니까.
"지금 최우선이 무언지는 잘 아니까. 가능한 만큼이면 돼. 무리는 하지 말고."
제법 줄어든 푸른 술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짧게 말했다. 당장 내일의 미래조차 보장할 수 없는 시기에 그녀의 요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나중을 기약하는 건 미련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 나중을 보기 위해 앞을 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아니면 그냥, 잊지 않아주는 걸로 족할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새로 꺼낸 말도 앞서 했던 질문의 연장선이다보니, 아무래도 그게 좀 걸렸나보다. 그녀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젓고 술을 마셨다. 뭐, 아니라면 아니고 맞다면 맞을 수도 있는데. 일단은 아니라고 하는게 아무래도- 그렇지. 태연히 반 이상 비운 술잔을 내려놓고 아스텔과 마주보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온 이유를 묻는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며 그 뒷이야기를 들었다.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하자, 인가. 천천히 내리감는 눈커풀 뒤로 씁쓸함이 어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라진다. 그녀는 물에 손을 뻗지 않고 잔을 잠시 달각거렸다.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러는 것도 잠시였다. 이내 잔을 놓고 말한다.
"그냥 마시고 싶었나보다 하고 내가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궁금해한 덕에 네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괜한 질문은 아니었지. 내 이유는, 음- 적당히 대외적인 이유랑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뭘로 들을래?"
특별히 안 고른다는 선택지도 줄게. 라며 그녀는 손가락 셋을 펼쳐보였다가 내려 테이블에 얹었다. 농담 같지만 안 고른다고 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알아서 생각하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그에게는 제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레레시아는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저번에 다같이 모여서 게임했을 때. 그 때 그 마지막 대답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거야? 소거법으로 사람을 고르다니 너무한거 아니냐구. 다른 이유도 아니고 소거법이라니."
마지막이었는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순서보다는 그 내용이 핵심이니까. 그 때 아스텔이 했던 대답을 끄집어내어 잠시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소거법이라는 표현이 꽤나 신경 거슬렸나보다.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에 눈 한번 굴려본다. 여전히 검은 머리. 그리고 살구색. 아마 벗어던진 옷의 뒤로 보인 가죽의 색일 테지. 다시금 시선 돌린다. 움직이는 것이 싫다고 해야겠지, 괜히 자존심 세워 기 빼고 싶은 일도, 쓸데없는 분란 만들 생각도 없다. 이렇게 보여도 제법 평화를 사랑하는 편이라. 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호수를 쳐다봤을 때,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도."
곧 낙일 되어 해 온전히 지면 검은색이겠지, 절대 마시고 싶지 않은 색이다. 대신 나무 뒤로 가는 것을 택했다. 허공 느긋하게 걷는 모습 뒤로 제는 흘러내린 어깻죽지를 다시 끌어올린다. 불편하다. 소맷단 때문에 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발을 보니 손도 그럴 것은 자명하다.
"용의 모습이."
제 간단히 답했다. 인간의 모습 보다 용의 모습에서 자신의 힘을 더 조절하기 쉬웠으니 용의 모습이 본모습이겠거니 싶은 것이다. 그럴싸한 이유지 않은가. 제 탄산음료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맷단 너머로 가려진 손 드러내더니 갈고리 같은 손끝으로 툭 캔을 딴다. 콜라 특유의 달고 향긋한 냄새와 냉기. 다만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아마 바로 마실 생각은 아니고 잠깐 식혀 마실 것 같다.
누그러지는 표정. 씹는 소리가 느려지고 음료를 삼키는 목 넘김 소리가 자주 들린다. 먹는 속도는 느려졌다. 그럼에도 눈 한번 깜빡이더니 그뿐이다. 어떠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동정도, 안타까움도, 흥미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이곳에 온 이상 더 자명한 사실이고."
제 느릿하게 캔 들어 올린다. 탄산이 코를 찌르는 느낌이다. 혀를 살짝 담가보듯 한 모금만 입에 머금더니 느긋하게 삼킨다. 마셔본 적 없는 것이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제는 고개를 들더니 그제야 표정 하나 지어 보인다.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린 것이 과연 그렇겠냐는 표정이지만 언사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흥미본위였다. "그렇군. 좋지 못한 이유였겠어. 사과하도록 하지. 마저 먹게나."
대외적인 이유건, 개인적인 이유건 저렇게까지 말을 할 정도면 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있었던 것 같았기에 그는 둘 다를 요구했다. 만약 안된다고 한다면 개인적인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 대외적인 이유는 그냥 말 그대로 적당히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들어도 별 의미도 없는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그는 판단하며 남아있는 잔의 블루 하와이를 모두 입으로 집어넣었다. 이내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입가심을 하며 그는 견과류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응?"
마지막 대답. 뭘 말하는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는지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실게임..그거 말인가. 그때 마지막 대답이... 이내 소거법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그는 이제야 떠올렸는지 아. 소리를 냈다. 하지만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는 이야기했다.
"그때는 가장 적합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딱히 상대방도 진지한 답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테고. ...질문의 의도가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을테니 내가 누구를 언급해도 난감해질 것 같았기에 가장 적합하게 가능성과 불가능을 토대로 소거해서 답한 것 뿐이다만."
물론 상대의 투덜거림은 그런 이유로 나온 것이 아니겠으나 적어도 아스텔은 그때 자신의 대답은 누가 뭐라고 해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침묵을 잠시 지키는 듯하다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왼쪽으로 시선을 살며시 돌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실수를 한 모양이네. ...딱히 진지하게 의미를 둬야 할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베스트한 대답을 끌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기분 나빴다면 미안."
진심으로 가능하리라 믿었으나 농담으로 넘기는 걸보니 불가능한 것 같았다. 선우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음료를 마저 삼켰다. 요리는 다 끝났고 땀이 식어 제법 쌀쌀해졌으니 아공간에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우는 순간 어릴 때 그의 모습이 어떠하였는 가 궁금해졌다. 작은 새끼 뱀의 모습이었을까? 지금처럼 위풍당당한 용의 작은 버전이었을까? 어찌되었든 제법 귀여운 모양인지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어릴 땐 훨씬 더 귀여웠으리라 생각했다.
제가 손 끝으로 캔을 따자 손톱이 길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직후 그가 콜라의 김을 빼는 것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아차 싶어 아공간 속에서 수정과를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이건 탄산 없어."
자신의 사연을 대충 얼버무린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듯한 제의 말투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 이곳에 온 사람들치고 사연없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그 역시도 무엇인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고풍스럽고 오만한 컨셉러가 이곳에 올 이유가 어디있을까?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분명 그의 세븐스를 보면 이미 오래전에 가디언즈에게 토벌되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멀쩡히 살아있다. 멀쩡히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멀쩡히 여기서 놈들과 싸우고 있다. 대체 무슨 수로?
"너도 뭔가 사연이 있구나?"
선우는 제에게 진심으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체 저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것일까? 분명 모든 세븐스들은 어릴 때 한번 쯤은 자신의 능력이 특별한 것이며 자신도 가디언즈처럼 영웅이 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모두가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제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10대 중반 전후로 없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있는 것일까? 선우는 그의 성격과 어투가 그의 과거와 관련되어있고 그것이 여기 오게 된 원인이라 생각했다.
아마 네가 앞이 보였던 건 폭발의 찰나 눈을 질끈 감았기 때문이리라. 보통 전투 중 눈을 감는 건 좋은 판단도, 행동도 아니지만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눈을 감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온통 화끈거리기는 해도 눈은 그나마 빨리 제대로 된 상을 맺을 수 있었다. 다만 귀는 아니었다, 보통 이상으로 밝은 귀는 폭음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으니, 헬멧 안에서부터 주륵 흐르는 핏줄기는 어느새 네 목을 타고 두 줄기 길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아픔보다도 먹먹한 감각에 너는 고갤 휘젓는다. 충격에 온몸이 쑤셨지만 간신히 서 있을 수준은 되었기에, 너는 벽을 짚은 채로 천천히 일어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나머지 한쪽 손으로 꾹 눌러잡으면서 천천히 고갤 드는 동안에도 화상을 입은 피부로부터 느껴지는 작열통에 너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일어설 수가 없다. 손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너는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다행인 건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는 점일까, 훈련장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는 모양이었다.
"......보시다시피."
어느정도 회복된 청력으로 받아들인 작은 파열음,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바닥에 퍼진 승우의 모습과, 살아있냐는 물음. 살아있다. 애초에 서로를 죽이려고(죽일 듯이 하긴 했지만) 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게 정상이겠지. 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호흡했다. 기도에도 화상을 입었는지 숨쉬는 게 어려워 천천히 조금씩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 뒤편까진 화상이 없어서 앉는 것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는 점. 아무래도 그는 너보다 피해가 큰 모양이다. 유의미한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만약 조금만 더 반응이 늦었거나, 버스트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차리는 건 한참도 뒤였겠지. 점차 잦아드는 통증에 호흡이 원래 속도를 찾아가자, 너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걸로 끝...이겠죠."
분명 강력했지만 충격에 상대가 나가떨어지는 게 가장 큰 맹점이 아닐까, 만약 터트리는 동안 그 자리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너였다.
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설명한 이유도 제법 믿을만한 사유지만, 제는 태어날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얘기해 주는 사람마다 그리 말했으니 달리 본인이 할 말은 없었다. 가끔 어릴 때의 사진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걸 볼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웃음을 지었으나 제는 여전히 표정을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굳히고 있었다. 조그맣게 다물린 입을 뒤로, 새로운 것을 던져주자 잡아낸다. "아, 고맙네." 맵고도 단 냄새. 이건 익숙하고 제법 맛있던 것이었는지, 제는 짧게 감사를 표했다. 탄산은 아마 제의 입맛에 맞지 않는 듯싶다.
이해한다. 사연 없는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좋은 미끼였고, 제에게 있어서도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당신과 달리 이렇게 사연 가득한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 언젠가 분란이 나지 않을까 싶은 흥미. 그렇다면 로벨리아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유라는 것도 급을 나눠 주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재밌을 텐데. 제는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계피 향이 입에서 은은하게 감돈다.
"사연이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당연히 사연이라고 해야겠지. "
제는 과거를 곱씹었다. 웃음, 시끄러운 소리, 비명, 환호, 숭배……. 죽음은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으니 이젠 목전에 두어도 그러려니 싶은 삶. 세븐스 하나가 살려달라 빌었으나 머리를 터뜨리니 더 이상 들리지 않았던 날. 글쎄, 이것을 사연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우스운 일이다. 당연한 삶을 살았을 뿐인데 결국 누군가에겐 사연이 될 뿐이지. 제는 다시금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셨다. 고작 소시지 하나, 수정과 두 모금. 이걸로 식사는 충분했던 것인지 잔 내려놓는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온 이상 충분한 이유겠지."
제 느긋이 눈 들어 올린다. 연한 보라색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지는 것 같다. 마치 앞만 보는 사람처럼.
고민 없는 대답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둘 다는 안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고. 그녀가 생각하는 아스텔은 개인적인 이유를 고를 것 같았으니. 알았다고 말하고 그녀도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즙 빠진 레몬 조각만 덩그러니 남은 잔을 살짝 옆으로 밀어두고 몸을 테이블에서 떨어뜨려 의자에 기댄다. 다음 잔은, 대답을 한 뒤에 시키기로 할까. 일단 듣고.
진실게임에서의 그 대답에 대해 추궁 아닌 추궁을 하자 아스텔은 그게 뭐가 문제였냐는 듯이 말했다. 그 상황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가장 적합한 답을 내놓은 것 뿐이라고. 농담하냐고 하고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진지하다... 그 순간에는 그녀도 표정이 난감, 아니 허탈해졌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그를 향해 손을 저었다.
"아냐. 뭐 그건 게임일 뿐이었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한 대답이라면 됐어. 겨우 그런 거였냐- 는 기분이라 좀 그렇긴 한데."
기분이 나쁜 건 아니라며 늘어뜨린 손을 휘휘 가로젓고 내려놓는다. 헌데 방금 그 대답으로 김이 빠지니 술이 당긴다. 서로 잔이 비었으니 다음 잔부터 시키자며 아스텔의 앞으로 메뉴판을 밀어준다. 그리고 손짓으로 부른 점원에게 레레시아 먼저 주문을 넣었다.
"러스티 네일. 그리고 마른 과일을 약간."
첫 잔을 위스키로 했더니 오늘은 위스키 입맛이 된 듯 하다. 두번째도 같은 베이스의 칵테일을 주문하고 아스텔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무엇을 골랐든 주문을 하고서 점원이 빈 잔을 가지고 돌아간 후에, 갈 곳을 잃은 듯한 두 손을 잠시 쥐고 펴다가, 포개서 얌전히 테이블 위로 올려놓는 것을 신호로 그녀가 말했다.
"아까의 이유 말인데. 대외적인 이유는 그냥 동료로서 이런 자리 한 번쯤 괜찮지 않느냐 이고. 개인적인 이유는 뭐... 데이트 신청 비슷한 그런 거 였는데."
그냥 그렇다는 투로 대답을 툭 내놓더니 고개 스윽 돌리고 노란 눈동자 데구르르 굴러 옆으로 향한다. 답을 내놓고 꾹 다문 입술이 아 저질렀다- 같은 느낌도 든다. 시선 향한 곳에 나뭇결 가득한 벽 밖에 없지만, 그 벽에 뭐라도 있는 양 시선을 꽂고서 중얼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무작정 한 명을 어떻게든 찍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 물론 찍으라면 찍을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가 조금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상황 아닌가. 그건. 자신이 그런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아스텔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술을 골라야 하는 때가 된 것 같아 아스텔은 가만히 술을 바라봤다. 역시 자연히 그의 눈길은 맥주 베이스로 향했다.
"여기 이 스네이크바이트라는 것으로."
일단 맥주가 들어가면 자기 입맛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주문을 마쳤다. 딱 그 무렵이었을까? 레레시아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전자는 대충 예상한 내용이었으나 후자는 응? 하는 표정을 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말하는 것에 아스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허나 괜히 목이 타는지 컵에 물을 따라서 그 물을 원샷으로 처리한 후 아스텔은 가만히 레레시아를 바라봤다.
"데이트라는 것이 내가 일반적으로 상식으로는 알고 있는 그 데이트?"
이내 아스텔은 약하게 음. 소리를 내면서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상황이 꺼려진다거나 그 답이 자신에게 있어서 꺼려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좋냐 싫냐라고 따지면 좋았다. 지금껏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기도 하고....
"...레레시아."
이내 아스텔은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들은 다 애칭으로 부르고 그러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이어 잠시 또 침묵을 지키던 아스텔은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제 뺨을 살며시 긁적였다.
"그러니까. 음. 그런 거 받아본 적이 처음이라서. ...알다시피 내가 알고 지낸 이들은 대장과 에스티아 정도니까. ...아니. 뭐, 완전히 그건 아니고 에델바이스 내에서 몇명 더 알고 지내긴 했고 초창기 멤버의 제임스라던가, 리키라던가 친하게 지내는 이들도 있긴 한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 진짜."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말을 깔끔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던 아스텔은 이내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다가 살며시 내리면서 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아니. 일단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겠네. 그러니까 그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알려져있는 그 데이트 신청인거야? 아니. 개인적인 것이라고 넘길 순 없잖아. ...일단 난 당사자니까."
"그래. 그대로 둬선 안돼. 무엇보다 그 안에는 배신자도 있어. 글라키에스의 손아귀에서 운 좋게 벗어났다고 하지만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U.P.G 본부 건물 제 13층. 가디언즈를 이끌고 있는 간부 클래스 세븐스 중 한 명인 레이버는 카시노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전, 에델바이스와 무승부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전투를 이끌어가던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전 글라키에스가 관리하고 있는 시설에 처들어가서 아이들을 모두 빼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내 그녀는 잠시 말을 끝낸 후에 카시노프를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이번엔 봐주지 않고 전력으로 쓸어버릴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니까 그 녀석들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실행해줘."
"켈켈켈. 확실히 나도 그 녀석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블러디 레드를 하나 파괴한 것도 모자라서 하나는 탈취하고 기껏 잡아놓은 아이들도 풀어준 건방진 녀석들이지."
"그래. 그러니까 내 손으로 없애버릴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저번처럼 도망가면 안돼. 도망칠 수 없게 만들어야 해."
"지원은 필요없나? 다른 이들에게..."
"필요없어. ...나에게 굴욕을 준 이들이야. 내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그 녀석들의 성향을 생각해봤을 때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무조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법이 말이야."
뭔가를 떠올렸는지 카시노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버는 가만히 그런 카시노프를 바라보면서 숨을 죽였다. 뭐든지 상관없어. 실행해줘. 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카시노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쥐새끼들을 끌어내려면 그럴싸한 미끼를 던져주면 되는 거야. 일단 기다려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내가 준비해둔 것이 있으니까."
평화로운 나날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제 0 특수부대가 구출한 아이들이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시설 중 하나가 습격당했다. 그리고 그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20명의 아이들이 가디언즈에게 다시 붙잡혔다. 이미 철저하게 정신이 파괴되어 저항할 생각도, 도망치지도 않는 아이들은 그야말로 순순히 끌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를 하고 있던 제 2 치료부대 중 단 한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한명은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겨우 로벨리아에게 도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령을 남기고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벽으로 향한 눈동자엔 부드러운 나무결과 진한 갈색과 엷은 갈색이 만들어내는 나무의 단면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결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다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향할라치면 얼른 다시 벽으로 돌아온다. 지금껏 잠깐 시선을 돌리긴 해도 이렇게 고개까지 돌리고 피하진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게 더 이상하잖아.
그 대답을 해놓고 그녀는 가만히, 조용히 있었다. 앞에서 시선이 느껴져도 그대로. 물 마시는 소리가 나도 그대로. 굳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샌가 테이블 아래 무릎 위로 옮겨 간 두 손이 맞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러니까 아스텔이 하는 말을 확실히 듣고 있다 이거였다. 단지 반응을 안 했을 뿐이다. 그러는 것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되었지만.
"...뭘, 그냥 그러려니 하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 하다가, 확실히 해야겠다며 다시 그 말의 진위를 묻는 아스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레시아가 시선을 슥 내리며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료로서 마시자고 한 거라고. 그것만 말할 걸 그랬을까. 술이라도 빨리 나오면 좋겠는데 시간이 멈췄는지 늘어졌는지 잠깐이 영겁 같다. 아. 됐어. 그냥 말하고 술 나오면 마시자. 그거 하나 대답하는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거 맞아. 그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거. 그거 말고 달리 뭐가 있는데."
어쩌다보니 톡 쏘아붙이듯한 말투가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대답은 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주문한 술들이 나와서 그녀는 그녀의 것인 잔을 가져와 물처럼 들이켰다. 안 그래도 작은 잔을 잔숨에 반이나 비우자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 했다. 그 상태로 다시금 툴툴댔다.
맞댄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거. 벌이 쏘듯이 톡 쏘는 말투에 아스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막 나온 술을 천천히 마셨다. 꽤 당황한 탓인지 맥주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왜 갑자기 이쪽이 혼나는 입장이 된건지 알 수 없어 그는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 자신이 혼나야 할 입장은 전혀 아니지 않은가. 뭔가 지금 상황 되게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런 생각으로 무의식적인 생각이 천천히 흘러갔다.
"...문제는 없어.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세상 돌아가는 것에 약하니까. ...바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나 싶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미스인가. 괜히 안주를 손으로 집어서 하나 먹고. 아스텔은 잠시 말을 골랐다. 데이트라는 것은 보통 호의가 있는 이에게 신청하는 것이 아니던가.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것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레레시아가 자신에게? 그다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내 아스텔은 어떻게든 말을 골라내서 이어나갔다.
"...기분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아."
적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다는 듯, 아스텔은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리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키다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면서 그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멋대로 상상해버리고 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싫다면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한다면 더 말 안할테니까."
자신의 감이었으나 저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 그건 그것대로 더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답을 기다렸다. 허나 상대가 언급 안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자신도 입을 다물어야지. 굳이 억지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물론 묻기야 하겠지만 이건 그런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수잔나가 죽었다고?" "예. 방금 비보가 들어왔습니다." "안타깝게 됐어. 개인 교육용 안드로이드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죽어버릴 줄이야. 뭐, 자기 연민 하나 불러일으키자고 자식 하나 못 키우고 처분했다 방송에서도 지껄였겠지. 그럼 다른 세븐스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 나였어도 죽였을 걸."
가란은 품에 안긴 무언가를 간지럽히듯 자상하게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미동도 없는 무언가를 사랑스럽진 않지만 그런 듯싶게 바라보던 가란이 다시금 입을 벌렸다.
"뭐, 그 여자 죽었다니 나도 안심은 못 하겠네? 그 여자보다 내가 더 나쁜 새끼니까. 사지라도 찢기면 그게 다행이겠지?" "그, 그럴 리가요. 보스가 어떻게.." "농담이야." "아, 아하." "뭐해? 웃어."
가란이 연구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벌렸다. 연구원은 애써 마른 웃음소리를 내더니 강화유리로 된 벽 너머로 시선을 옮겨 던지다 후회했다. 강화유리 너머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낭자하게 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난 안 죽어." "가디언즈의 비호가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 폐하께서 날 지킬 테니까." "폐하, 께서요?" "응."
가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강화유리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나마 덜 더러운 틈새 너머를 봤다.
"폐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나아가서 이곳을 지켜주실 것이야. 보렴, 벌써 그 미친 반동분자끼리 서로 좋다고 얼싸안다 남은 부산물을 여섯이나 찢었잖니? 그러니까 이건 이제 버려야겠다. 적당히 처분해 줘."
가란이 연구원의 품에 아무렇게나 무언가를 안겨주었다. 방부처리도 하지 못한 세븐스의 잘려나간 머리. 연구원은 토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려 무진 애썼다. 가란이 강화유리 너머 합금 문을 열어젖히려 하자 연구원은 부패가 시작됐을 때 나는 역겨운 냄새에서 아찔해졌던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막아세우려 했다.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위험합니다." "너, 거슬리네."
가란은 잠시 연구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문을 열어버렸다. 피비린내가 자욱하고 곳곳에 널린 고깃덩어리와 홀로 서있는 아이 하나만이 이 안에서 있던 일이 무엇인지를 짐작게 했다. 홀로 살아있던 조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머리였을 텐데 지금은 온통 붉었고, 헐렁한 옷도 온통 샛붉다.
이제 보니 가란은 눈물을 짓고 있다. 자수정 빛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뚝 떨어지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칭찬을 해주다가도 이젠 울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싶은 눈이었다.
"무슨 일이더냐, 가란. 어찌 울고 있는 게야?" "마음의 상처는 옮는다기에 신이 가까이할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대체 누가 네게 가시를 박았더냐. 고하라."
조그마한 얼굴에 놀람이 깃들자 가란은 눈을 연구원 쪽으로 흘겼다. 잘린 목을 들고 멀뚱히 선 연구원의 뒤로 가란을 경호하던 여성이 서더니, 이내 그를 강하게 걷어차 강제로 합금으로 된 문 너머로 들여보냈다. 아이가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자연스레 돌렸다.
"저것이냐." "……." "저것이 대체 무어라 했기에 네 그리 눈물짓는 것이냐." "신과 폐하의 유대를 모욕하였기에……."
가란이 작달만하게 속삭였으나 아이는 확실히 들었는지 일순 꼬리를 팽팽하게 폈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연구원을 쳐다봤다. 주변에 묵직한 기류가 흐르자 연구원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미친 녀석이 거슬린단 이유로 날 죽이려 하는구나! 아이가 연구원을 향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연구원은 뒤로 물러났지만, 합금으로 된 문이 서늘하게 등에 닿았다. 연구원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뒤로 돌아 문을 박박 긁어대기 시작했다. 절망 어린 비명이 목을 타고 흘렀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날 죽이면 반역이야, 반역이라고!"
아이가 어느덧 연구원의 앞에 섰다. 가란은 아이의 뒷모습 너머 절망에 빠진 연구원을 보더니 눈웃음을 지었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반역은 네가 저질렀지. 감히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의심을 품은 죄. 잘 해봐. 연구원은 도망치려는 듯 움직였으나 그 이후 끔찍한 비명소리를 뒤로 쓰러져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패한 세븐스의 머리가 피에 젖어들었다. 잠시간의 정적을 뒤로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되었구나. 그렇지?" "폐하."
가란은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가란의 품에 능숙하게 안겨 웃는 아이는 풍경과 다르게 사랑스러웠다.
"은혜에 감복하였으나, 폐하의 옷에 꽃이 피었습니다." "네 보기에 아름다우냐?" "폐하에 비견될 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장관 입지요." "네 아팠으니 그만큼 대갚음 한 것이노라. 바깥 녀석들은 날 시해하려 들고, 오직 너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제일 총애하는 자가 어찌 상처를 입도록 두겠느냐."
확실히 지금은 아스텔이 그런 따끔한 소릴 들어야 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마주한 그녀의 태도는 먼저 그런 말을 한 사람치고 까칠하기 그지없었다. 역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 태도를 지적했다간 더한 무언가가 날아왔을지도 모르나-
"그거 말고 다른 뜻이 있을라구. 문제 없으면 됐어."
솔직하게 했을 대답에 그저 그렇게 종알대는 것으로 그쳤으니 다행이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말이다.
한차례 고비 아닌 고비는 넘겼어도 상황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니였다. 그러니 그녀의 뚱한 태도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반응이 없는 건 아니어서, 아스텔이 기분 나쁘지 않다며 오히려 좋다고 했을 때 금빛 시선이 그에게 휙 향했다가 금방 다시 아래로 휙 굴렀다. 시선과 함께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입을 꾹 다문 그녀는 아플 정도로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보며 귀만을 쫑긋 세웠다.
이윽고 그녀에게 대답을 요하는 말이 들리자, 보이지 않게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일단 술부터 마셨다. 작은 잔이지만 그만큼 독한 술을 단숨에 마시고, 점원을 불러 재차 새 술을 주문한다. 이번엔 칵테일이 아닌 위스키를 그것도 꽤 독한 것으로 글라스 가득 담아 시키더니. 잔이 테이블에 놓이기 무섭게 들어서 물마냥 들이켰다. 온더락의 얼음이 표면은 녹았을까 싶을 만큼 빠른 행동이었다.
얼음만 남은 빈 잔을 달칵 소리나게 내려놓고 레레시아는 잠시 멍했다. 누가 보면 너무 급하게 마셔서 탈이라도 난 줄 알겠지만, 곧 그녀가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리는 말로 인해 그럴 걱정은 없어졌다.
"왜애 취하지 않는 거야아아..."
가린 손 너머로 먹먹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그녀의 체질을 원망하는 한마디였다. 취기라도 빌리면 지금을 견딜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질 못 하니 술에 강한 몸뚱이가 새삼 원망스러울 수 밖에. 얼굴을 가린 레레시아는 잠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곧 얼굴을 가린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흘기는 듯한 시선이나마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내린 손으로 팔을 잡아 몸을 감싸고서, 그제야 비죽 튀어나온 입술로 말을 했다.
"싫다고는 안 했어. 말 꺼낸 김에, 말 하지 뭐. 그래서, 너는 뭐가 묻고 싶은건데."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라고. 그렇게 덧붙이고 한 손을 슬금 뻗어서 안주를 몇개 집어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취하지 않아도 그렇게 계속 빠르게 마셔대면 몸에는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조금 천천히 해. 천천히."
그녀의 세븐스를 생각해보면 딱히 문제는 없을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걱정이 된다는 듯, 아스텔은 굳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미 마셔버린 이상 막을 수는 없지만 추가적인 것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아무튼 방금 전까지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던 그녀의 모습은 적어도 아스텔의 눈에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상당히 급하고, 뭔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 그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그녀가 지금 심리적으로 상당히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니. 딱히 뭘 묻는다기보다는... 그러니까... 그냥 내가 멋대로 상상하고 그냥 답을 해도 되냐고 물은 거였다만 뭐 됐어."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이 주제를 계속 끌고 가고 싶다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쩌고 싶은가. 그에 대해 아스텔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그 관련으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사실 모르는 척, 혹은 그냥 대충 넘겨버리는 것이 맞았다. 자신은 특히나 다른 이들에 비해서 죽을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물론 어중간한 일로 죽을 생각은 없고, 진흙탕을 굴러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에델바이스의 신조인만큼 자신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세상 일이 뜻하는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아스텔은 잠시 숨을 약하게 내쉬며 아직 남아있는 칵테일을 입에 담았다. 그 안에 녹아있는 맥주가 유난히 입에 달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일거야. ...제 0 특수부대가 만들어지고 꽤 여러 시간이 지났고 자잘하게 교류는 이어졌고, 이런저런 말을 나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닐거야."
물론 자신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그것이 자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 역시 그녀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터였다. 아마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잘해봐야 손가락 한마디, 혹은 조금 더 나아가 손가락 하나 정도 뿐이지 않을까. 그렇게 추측하며 아스텔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알다시피 나는 대장의 부관이야. ...너희들보다 좀 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고 있고 꽤 자주 나가는 편이야. ...진흙탕을 구르고 흙탕물을 입에 머금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죽을 위험이 높아. ...말해두는데 이걸 핑계로 사용할 생각은 없어. 어디까지나 사실이 이렇다는 것은 전재조건으로 깔고 가는거야. 온전한 미래 약속은 솔직히 할 수 없어. ...했다가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건 배신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당해본 입장에선 꽤 힘들더라."
자신의 어린 시절. 정확히는 고독 의식을 빙자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쓴 웃음소리를 냈다. 이어 그는 다른 잔에 담겨있는 찬물을 마시면서 제 속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괜찮다면... 앞으로도 데이트 신청 해줘. ...그 데이트라는 거. 적어도 나에게 호감이 있거나 호의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잖아.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단순히 놀러나왔다..라는 것은 절대로 아닐테고, 내가 아는 그런 이유일테니까. ...레레시아. 나도 너하고 데이트 하고 싶어. ...앞으로도. 더욱 너에 대해서 알고 싶고. ....그러니까...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힘드네. ...그러니까... 임무나 대장의 명령을 우선하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나는 괜찮아. 나도 너하고 비슷하니까. ...그러니까 좋아해. 레레시아. ...라고 하면 되는걸까. ...미안. 감정은 확실히 있고,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네. ...말만 길어지고."
영 익숙하지 않은지, 조금 어려운지 그는 제대로 말을 똑부러지게 하지 못하고 주절거리듯 말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어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멋대로 상상해서 낸 답은 이거야.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적당히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넘겨줘. ...그냥, 그냥... 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했으니까. ...딱히 내 쪽에선 태도를 바꾸거나 어색하게 대하거나 하고 싶진 않으니까. 동료이고... 그냥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고 싶으니까."
훈련장의 회복을 믿고 저질렀다기에도 너무 과한 행동이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싸우다 보니 흥이 나서 이렇게 된 일을. 또 다른 이유 하나는…… 뭐, 지금은 신경쓸 필요 없는 이야기니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막았으니까, 네가 이겼다."
한쪽 끝에 등 기대고 널브러진 꼴이 어찌 보면 참 편안한 모양새다. 난데없는 자폭 공격에 관한 설명은 사실 그도 더 덧붙이고 싶었으나 여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결론만 짤막하게 대답하는 게 끝이다. 무장에는 열과 소리, 폭연 등에 대한 기본적인 방비가 되어 있어 쥬데카보다야 상황이 나은 부분도 있지만, 막는 데도 한계가 있고 충격량 그 자체만은 흘려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앞뒤로 골고루 박살났을 테니 그는 구태여 몸을 움직여보길 시도하지도 않았다. "두 번은, *. 못 하겠네." 다만 가쁜 호흡을 이어가면서도 입 나불거리는 것 멈출 생각만은 없다. 그는 멀쩡한 상태였다면 어깨라도 으쓱했을 법한 투로 말하곤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순수하게 전투하는 데 든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시작하자마자 속전속결로 끝내다 못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 나란히 뻗어버렸다는 사실이 제 생각에도 우스워 스멀스멀 웃음이 난다. 그러나 배에 힘 들어가기 무섭게 통증이 온 몸을 때려대기에 흐, 결국은 흐느끼듯 낮은 소리나 조금 흘리고 그쳤다. 무어라고 욕지거리 입만 벙긋거려 뱉고는 그는 고개를 바로하여 쥬데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떠냐, 소감은."
소감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겠다. 지금 심정이 어떤지, 대련의 양상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버스트를 써 본 감상, 혹은 상의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질러버린 데 유감이 있다면 말하든지, 이것저것 등등. 말을 마치자 머리 부분의 무장이 해제되며 얼굴이 드러난다. 통증으로 인해 한껏 찌푸린 이마 한쪽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고 익은 것이 덜 나아 얼굴 군데군데가 울긋불긋하지만, 덕분에 대련은 이걸로 끝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이겼다...라, 과연 그런 걸까, 그러나 굳이 아니라고 할 만한 이유도 없었고 또 할 기력도 없었기에 너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을 뿐이다. 어쨌건 이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회복은 계속되고 있었고. 덕분에 너는 점점 안정되는 호흡과 함께 잦아드는 통증을 느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다.
"...뜨거웠습니다."
가장 직관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상은 그러했다. 폭발로 인해 발생하는 열기는 상상 이상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면 레이버의 물줄기를 전부 증발시켜 버렸던 게 떠오른다, 그때만큼의 화력은 아니었지만 버스트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보검의 무장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뜨겁다. 라는 감상으로 끝낼 수는 없었으리라. 물론 그이렇게 짧은 대답만으로 끝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너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충격으로 튕겨나가지 않았다면...네, 과장 좀 보태서 잿더미가 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큼 위력은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개념이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낼 수 있는 위력이 원체 강력했던 걸까. 한번 대련을 해보니 어떻게 그를 보조할 수 있을지를 떠올릴 수 있었기에 확실한 수확은 있었다- 라고 생각했다. 실전처럼 치고받았기에 볼 수 있었던 무모함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지금 승우가 적잖은 피해를 입은 것같아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생각해본다.
"끄응...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 곳곳이 뻐근하고 쑤셨기 때문에 작게 신음을 흘리며 일어선 너는 승우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아직 그가 일어서지 못했다면 상태를 살피고 손을 내밀었을지도.
훈련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벌써 긴 말 뱉을 정도는 회복되었으니 좋게 평가할 여지는 과약 차고도 남는다. 그는 몸 당겨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키는 데 드디어 성공했다. 아직 일어서는 것까지는 무리지만 시시껄렁한 소리 해대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뜨겁다니. 완벽한 사실 적시에 그는 소리 내어 웃음 터뜨리고는, 한쪽 손을 느릿하게 들어 쥬데카를 가리켰다. "나도 소감 들려준다. 넌 씨*, 머리가 좋아. 판단도 존* 빠르고." 그의 능력은 즉발한다. 팽창하는 폭발의 속력은 상황파악, 사고, 행동을 거치는 일련의 과정을 앞서기 마련이다. 생각하는 즉시 행동한다 해도 늦고만 마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인데, 쥬데카는 지근거리에서의 공격을 빠르게 막아냈다. 감각이 날카로워 그런가? 그렇다 해도 그것 역시 상대방의 능력이니 괜한 공치사로 던지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랬으면 나도 *됐겠네."
키들거리며 그런 대답이나 했다. 문득 머릿속에 실수로 인해 동료가 죽는 사고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처벌받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물론 그런 헛짓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서도. 제게 내밀어지는 손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붙잡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힘주어 벌떡 일어나려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 처져서는 바닥을 짚고 주저앉아 버린다.
"개**, *. 하……."
말 많은 주제에 욕 말곤 다른 말 안 나오는 걸 봐선 안 괜찮다는 뜻이다. 자업자득이라 열낼 수도 없다.
급히 술을 들이키는 그녀에게 취하지 않아도, 라던 그 말이 아주 영향이 없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에에 하고 조금은 밉달까 아니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걱정 해주는 건데 라는 생각도 들어 술을 더 시키지 않았다. 대신 얼음만 남은 잔에 물을 따라 놓고 목이 탈 때마다 한 모금씩 마셨지.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꽤 긴장해 있었으니까.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던 건 아마 아스텔도 확실히 하고 싶지 않을까 해서 였는데. 그가 꺼낸 얘기는 그 과정을 뛰어넘은 내용이었다. 차분하게 시작한 얘기는 참 여러가지를 말했다. 대부분의 얘기는 그녀도 공감했기에 들으면 들을수록 까칠하게 일어섰던 긴장이 수그러들었다. 간간히 입에 머금은 찬 물이 머릿속이 어수선해지지 않게 식혀주기도 해서, 담담하게 현재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얘기할 때는 이제라도 됐다고 이 자리를 무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걸 핑계로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런 현실에서 그녀의 마음만을 고집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어진 얘기에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싹 달아났다. 그야말로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가,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온갖 생각들이 차올라 잠깐 귀까지 먹먹해질 정도였다. 머릿속만 그랬을까. 차츰 풀리기 시작하던 얼굴은 아스텔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커지고 입은 할 말을 잃고 달싹이기만 했다.
"그, 그러니까, 너 지금, 아니..."
겨우 뭔가 말을 하려던 레레시아였으나 누가 옆구리라도 찌른 듯이 흠칫 하더니 그녀의 몽실한 머리카락을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린다. 하얀 머리카락 위로 검은 장갑의 손까지 덮고 그 안에서 으아아으... 작게 앓는 소리를 흘린다. 그대로 고개가 숙여지더니 테이블에 콩 하고 이마 박는 소리가 난다. 기분을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이 잠시 이어지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든 그녀가 또 뜸을 들이고서야 느릿느릿 손을 내렸다. 자연스레 벌어지는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눈가와 뺨을 중심으로 홍조가 번져있었다. 흐읍. 숨을 들이쉰 그녀가 말을 시작한다.
"네가, 말 한 거. 다 알고 있고 생각도 많이 했었어. 나나 다른 사람들보다 부담이 많은데 거기에 내가... 이러면 안 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그냥 이전처럼만 이어도 좋다고 스스로 넘겨버리려고도 했는데. 그랬는데. 네가 먼저 그 말을 해버리면, 이제 무리잖아. 너 바보냐고. 왜 그렇게 솔직한 건데. 왜 이럴 때만."
사실 모르는 척 넘겨버렸다면 다신 말도 꺼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동료로서 변치않고 대해주는 것에 만족하고 모든게 끝난 후에는 과거의 한 때로서 가끔 씁쓸한 정도로 남겨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너 때문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사실 오늘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없었다구우..."
정말로 없었는데. 할 수 있을 때 하자고 생각했다던 그 말이 엉결겁에 한 발 내딛게 만들어버려서.
"좋아해. 아스텔. 데이트도 더 하고 싶구, 너에 대해 더 알고 싶구, 춤도, 다른 것도, 다 나랑 했으면 좋겠어. 지금도 나중에도, 네 옆에서 네 손 잡고 나란히 있고 싶어."
와악. 말해버렸다 말해버렸어! 술을 그렇게 마셔도 낯빛 한 점 변하지 않던 그녀가 그 말 좀 했다고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혔다. 그리고 그걸 보이는게 부끄러워 다시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입을 다문 채 소리없는 비명을 머릿속으로 질러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완전히 참을 수는 없었는지 작게 발 구르는 소리가 테이블 아래에서 타닥타닥 들려왔겠지.
"...말했잖아. 뭔가 되었건 다음으로 미루자. 다음에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이것도 마찬가지야."
아무래도 타이밍적으로 자신이 뭔가 아주 큰 실수를 하다 못해 꼬여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살짝 아스텔의 머릿속에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을 지금은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리라고 조금 자기 멋대로인 생각을 하며 아스텔은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침묵을 지켰다. 괜히 꽉 매여있는 자신의 허리춤의 검을 괜히 만지락거리면서 그는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 자신의 현 감정이나 그런 것은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표현력이 좋은 다른 이들이라면 똑 부러지게 이야기를 할까. 역시 이런 부문에선 상당히 서툴고 미숙하다는 것을 느끼며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모든 것을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미래까지 약속할 순 없어. ...글라키에스와 교전을 한 너희라면 충분히 이해할거야. 적어도 글라키에스는 나 역시도 전력으로 상대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어. 그런 이들이 더욱 있어. 가디언즈를 모두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그 날이 왔을 때 과연 지금 멤버들 중에 몇이나 살아있을지."
기적처럼 다 살아있을 수도 있지만 전사자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스트를 개방했다는 말은 듣긴 했지만, 버스트는 무조건 이기게 해주는 필승카드도 아니었으며 상대방 역시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어떻게 보면 이제야 겨우 스타트라인에 섰으나 그나마도 조금 더 뒤쳐져있는 편이었다. 자신이 항상 같은 임무를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임무 수행중에 사적인 감정을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위험해보인다고 해서 자신의 포지션을 어기고 그녀를 구하러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는 와중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허나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바라봤다.
"...일단 이마를 들어줘. 레레시아. 물론 심정은 이해가 가는데. ...나도 아닌 것 같아도 무슨 말 해야할지 모르겠고. 응. ...그러니까, 이럴 때 되게 다른 이들이라면 엄청 뭔가 이런저런 좋은 말을 하겠지만, 나는 잘 못하니까. ...그러니까.. 음."
말을 머뭇거리면서 고민하는 것이 정말로 무슨 말을 이어야할지 망설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좋은 말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려는 듯, 그는 끙. 소리를 내면서 표정을 찡그리다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리고 네가 살아있는 동안은 옆에 있어줄게. ...지금은 그걸로 괜찮을까? 그러다 모든 게 다 끝날 때까지 둘 다 살아있다면, 그땐 둘이서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가자.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을 다 하면서. ...거기에 나 하나 추가해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안될까?"
"항상...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행동이 최선일까... 하고요."
정확한 경우를 짚을 수 없다면, 가능한 많이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덕분에 너는 거의 항상 피로도가 쌓였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네 걱정은 나름 빛을 발한 셈이겠다. 때문에 너는 다행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다음이라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렇게 다짐한다.
"으음, 그러고보니 그러면 큰일이긴 하겠네요."
아무리 입은 부상을 치유해 준다지만 아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까지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어쨌건 너와 그 모두 훈련보다는 실전에 임하는 감각으로 치고받았지만. 그래도 실전은 아니라는 게 기저에 깔려있었던 모양이다. 둘 다 지금 생각도, 말도 멀쩡히 할 수 있는 걸 보면. 훈련장의 덕도 있긴 하겠지만... 네 손을 마주잡는 그였으나 아직 일어나는 건 힘든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일어서지는 못한 채, 땅을 짚고 주저앉는 그를 보던 너는 잡은 손에 힘을 느슨하게 하며 그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으윽, 하고 뻐근한 탓에 나오는 신음은 어쩔 수 없으려나.
"방금까지 그렇게 싸웠으니... 좀 더 쉬는 게 좋겠죠."
옆에 앉아 그렇게 말한 넌, 까먹고 있었다는 듯 네 손을 보더니 무장을 전부 해제했다. 반파된 헬멧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을 묶어 두었던 끈은 화기에 타 끊어졌는지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땅을 덮자 양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한 손으로 몰아쥐곤, 옷 안쪽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 올려 묶으니 아무렇게나 퍼져 흘러내리던 머리칼이 한 묶음으로 정돈되어 아래로 꼬리처럼 내려온다.
웹박수 확인했어요! 그리고 제주가 하고자 하는 말도 잘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투표를 굳이 해야할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진짜 진짜 진짜 정말로 정말로 베리베리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할 것은 없고 동결하는 기간동안 어떻게 잘 쉬시길 바랄게요. 아무튼 제주의 요청이니까 일단 그 요청은 받아들일게요.
일단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서 제주가 다시 이스마엘 시트를 복구해서 그쪽으로 다시 돌리고 싶다고 요청을 했고 이에 따라서 참가하는 분들에게 투표를 요청하셨어요. 일단 제 기준에는 어쨌건 자신이 뭘 돌리고 싶은가가 중요한거고, 사실 이런 사례가 제가 알기로는 없던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별 문제는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지만 일단 당사자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그에 대해서 가볍게 의견을 남겨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그녀에게 들려온 건 참 현실적인 그런 얘기들이다. 표현이 어색하고 어려운 건 알겠지만 이런 때까지 현실의 얘기를 해야 하냐구. 물론 그런 점도 어쩔 수 없이 좋아해버리는 그녀도 그녀였지만. 아무튼 그녀만큼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아스텔 덕분에 그녀도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가 들어달라 말 해야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내었을 것이다.
"...바보. 역시 바보야. 너."
그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어서, 그녀는 다시금 그를 향해 바보라며 투덜댔다. 밉거나 싫은 내색보다는 부끄러움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구부정하게 숙였던 몸을 바로앉아서 테이블에 살짝 기대곤 잔에 남은 얼음물을 마신다. 차가운 물을 삼키는 것으로 조금은 얼굴의 열이 식기를 바라며, 양 손으로 잔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장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약속하자는게 아니야. 나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밤조차 불확실한 건 잘 알고 있다구. 그런 무리한 걸 바라는게 아니니까. 네 말대로 지금은 그렇게 하고. 나중의 여행도 같이 가. 어차피 너도 여행 갈 거 였잖아. 그거 시작부터 같이 하기로 하는 거지 뭐."
그러는 걸로 좋아. 지금은. 종알종알 말을 늘어놓고 잔을 탁 내려놓는다. 그리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더니 으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날숨을 뱉었다. 이거 현실이지. 현실 맞지? 그녀의 손이 스윽 움직이더니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음. 확실히 아프다. 꿈이 아니네. 다시 천천히 손을 내린 레레시아는 조금은 처음과 같은 태도로 테이블에 기대어 아스텔을 빤히 응시했다.
"미래는 아직 몰라도 지금은 확실히 옆에 있어줘야 해. 임무 아닐 때는 말야. 나도 임무 중에는 임무에 집중할 거야. 아닐 때는, 가능한 신경 써 줘. 그냥 뭐 하냐고 인사만 해줘도 좋으니까."
아직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고, 시기가 시기인만큼 많은 걸 바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단지 남들보다는, 평소보다는 관심 조금만 더 써달라고 말하고 점원을 부른다. 상황도 기분도 진정되고나니 다시금 술이 당겨와서였다. 아일리시 커피에 휘핑을 뺀 것을 한 잔 주문하고, 아스텔도 뭔가 더 마실건지 묻듯이 바라보았겠지.
"...어디까지나 허락이 떨어지면의 이야기지만. 물론 내가 아는 대장은 편한대로 하라고 하겠지만."
지금이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힘이 필요한 시기이나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자유로운 나날이 보장될 것이라고 아스텔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벨리아가 지금의 세상을 얼마나 바꾸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만이 아니라 에스티아 역시도. 그 사람은 절대로 입으로만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었기에 하는 말인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땐 레레시아와 여행을 같이 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는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술 먹으러 왔잖아? ...있어줄거야.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임무가 없을 때는 일단 널 우선시할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24시간 붙어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자신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각자의 생활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고 스케쥴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일단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는 그녀가 주문을 하자 자신도 같은 것을 먹겠다면서 주문했다. 그녀가 먹는 것은 어떤 맛일지 궁금한 탓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호를 알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음. ...사귀는 거지? ...뭘 가장 하고 싶어? 아. 돌아가는 길은 올 때 대충 외웠으니까.. 그러니까..."
이어 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이어 그는 제 뺨을 오른손으로 살살 긁적이다가 아래로 내리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했다.
"음주 비행...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날아서 돌아가자. ...데려다줄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돌아갈 때 아무에게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붙어서 갈 수 있으니까. ...그 안겨서 가도 상관없고. 안 떨어뜨리니까."
이전에도 한 번 한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런 말들이 오가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녹아내렸다. 이내 그는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후, 그녀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딱히 이거 비밀로 안해도 나는 상관없어. 오히려 비밀로 해야 할 이유를 난 모르겠으니까. ...물론 네가 비밀로 하고 싶다면 상관없지만."
>>716 푸딩만 먹게 한다니. 이건 틀림없는 고문이야. (흐릿) 3개까지는 사실 진짜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한번에는 힘들죠. 역시. 그리고 불닭 소스는 진짜 매우니까 반만 먹어도 잘 먹는 거예요!! 승우와 같이 있어주는 이유라. 같은 제 0 특수부대 동료니까요! 적어도 아스텔과 에스티아는 그 정도 이유로도 잘 지내준다고 하네요. (속닥속닥)
>>727 믿고 말았던 거짓말 사랑해..8ㅁ8 으아앙.. 승우와 다른 에델바이스 멤버들이 잘 해주는 수밖에 없어!! 아무튼 배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말았군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에요. 그 와중에 그림자 고치..ㅋㅋㅋㅋㅋ 너, 너무 아늑할 것 같아!!
>>728 아무래도 Pre-story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미션 장소는 U.P.G 본부 건물 앞이니까요. 말 그대로 적들의 본거지 앞. 일단 레이버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번 것은 레이버도 전력을 다하는 진검승부!
일단 캡틴피셜 난이도는 버스트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갈리게 될 것 같네요. 정말로 쉬울 수도 있고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고. 고로 제 0 특수부대원들 화이팅!
>>737 적어도 아스텔의 경우는 뭔가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 좀 많이 크고 그냥 알고 지내다보니 뭔가 성격적으로 되게 잘 맞는 것 같고 투정부리는 모습이라던가 평소의 모습이나 그런 것들이 되게 귀엽게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은연 중에 속이 좀 깊어보이는 느낌도 있고 많은 것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는 상태랍니다. 오너적으로는 그냥 시트 때부터 호캐 부류였었고.. 직접 만나서 일상을 돌려보니 뭔가 캐릭터 조합이나 상성 등이 되게 좋은 것 같고.. 그렇다 보니까 점점 눈길이 가게 되는 케이스에 속하는 것 같네요. 암튼 그래요!
아직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나. 모든 일이 계획 내에서 풀리고 다 끝난 후에는 에델바이스도 해체 되는 거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후에는 에델바이스가 신 정부 같은게 되는 걸까? 얘기를 하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그건 정말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에 더 신경 쓰고 싶으니까.
"오늘 온 건 미리 약속한 거였고 오늘 시간이 나니까 온 거면서. 흥이네. 앞으로 잘 하라구."
말을 그렇게 했지만 아스텔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기뻐할 것이다. 그가 직접 비번일 때는 그녀를 우선시 해주겠다고도 했으니. 그리 대단하고 엄청난 걸 바랄 마음은 없다. 차차 관계가 진전되거나 나중이 되면 더 바라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나중의 일이다. 레레시아는 같은 걸로 하겠다는 대답에 그 말대로 주문을 하고 테이블의 안주 접시로 손을 뻗었다. 아까 부탁한 말린 딸기 조각을 집어들려다가 때마침 들린 아스텔의 말에 툭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번엔 침착하게 당황하지 않고 다시 집어서 입으로 가져오다가-
"사귀는 거지 그럼. 뭘 할 지는 이제부터 생각, 어?"
돌아갈 때는 날아서 가자는, 저번마냥 안겨서 가도 괜찮다는 작은 폭탄 같은 제안에 애써 찾은 평정심이 흔들렸다. 애써 집은 안주를 먹지도 못 하고 부들거리며 중얼거렸다.
"너어는 사람을 얼마나 당황하게 해야 만족하려는 거야아..."
와아악. 다시 한 번 그녀의 안에서 내적 비명이 터지는 걸 그는 알까. 그래도 금방 진정하고 겨우 입에 안주를 물면서 마저 말했지만.
"그, 안 떨어뜨린다면 그렇게 갈래. 그게 편하고, 좋으니까... 음. 나도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막 얘기하고 다니진 않을거야. 필요하거나 누가 물으면 얘기하는 쪽으로 할 건데."
그녀와 그의 관계에 대해 숨길 생각은 없으나 숨기고 자시고 이전에 하나 얘기해둘 건 있었다. 그 운을 떼려는 찰나 주문한 술이 진한 커피 내음 풍기며 테이블에 놓였다. 이버엔 그녀가 잔을 아스텔의 앞으로 하나 밀어주고, 뜨거우니 조심하란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잔을 들어 살살 흔들면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당분간 의무실 갈 때는 라라하고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 대놓고 적대하진 않겠지만 싫은 티는 낼 거거든. 사소하게 괴롭히거나 귀찮게 굴 테니 그냥 적당히 피해다녀. 얼마간만 그러면 알아서 잠잠해져."
그것만 조심하라고 하곤 잔을 들어 입에 대려다가, 아스텔을 향해 살짝 기울였다. 건배할까? 하듯이.
평소보다 어깨가 무겁다. 부러진 팔을 감싼 깁스를 받친 삼각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 팔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을 나는 지금 내 등에, 어깨에 지고 있다. 얼마나 더 오래 이것을 지고 살아갈 지 모르겠다. 그리 오래는 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한시도 버거울 수준이다.
살아있는 이상 버텨야만 한다. 하지만 내면의 악마는 그 짐을 벗어버리라며 유혹하고 있다. 일분, 일초도 가만히 놔두지 않고 계속해서 내 머리 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가끔은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것의 말을 들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하지만, 내 낡은 '기념품'은 그 유혹에서 이겨내야 한다고 날 매번 다그쳤다.
"이젠 지쳤어."
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바깥에선 새 소리가 들리고, 아침 햇살은 군데군데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틈으로 새어들어와 날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살아있기에 참 잔혹한 세상이다.
가능한 나는 내 권총을 멀리 두었다. 권총을 베개 밑에 베고 자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미신은 이미 틀려먹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된 후에, 난 다시는 그것을 내 잠자리 곁에 두지 않았다.
진통제를 몇 알 입에 털어넣고 물과 함께 넘긴다. 빈 속에 올라오는 위산과 약품의 냄새는 구역질이 나게 만들지만, 그것 없이는 걸어다니지도 못할 거 같다. 먹을거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다. 마지막으로 먹은 건 깡통이 조금 부풀은 콩 통조림이었다. 아마 박물관에나 가야 할 것을 먹은 것 같다.
약기운이 좀 돌기 시작하니까 내 처량한 꼴을 거울로 보는 듯 뻔하게 들여다 보게 된다. 레이먼드. 어쩌다 이런 꼴이 된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모든 건 내가 나약해서일 뿐이다. 무언가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다. 내가 겁쟁이에 형편없어서 그렇다.
"이렇게 있을 순 없어."
결심하듯 말을 하지만, 결국 내면의 악마에게 주도권을 잠깐 넘긴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떨리는 다리로 녹슨 상자에 다가간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잠궈놓은 자물쇠들을 풀어버리고, 상자를 열었다.
수백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믿음직스러운 45구경 권총이 그 안에 누워,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오물이라도 집어드는 것 처럼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자마자, 난 두뇌가 아닌 척수가 파악한대로 그것을 잡고서 슬라이드를 당겼다. 빈 약실을 약협이 자리하며 긁는 소리가 나고, 공이가 뒤로 젖혀져 단 한번의 움직임이면 모든 게임이 끝나게 되었다.
"어서."
악마가 부추겼다.
"안돼." "빨리." "아니야." "뭘 망설이고 있어?"
눈을 감는다. 딱 한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된다. 레이먼드, 왜 이런 간단한 것 조차 못해? 그냥 그것만 하면 되잖아! 왜 이따위 하나 못하는거냐고!
손을 떨었다. 손가락은 어느새 방아쇠울 안에서 요동치고 있다. 1밀리미터만. 단 1밀리미터만 움직이면...
이럴수가. 난 실패했다. 또 해내지 못했다. 이 한심한 놈 같으니. 지지도 못할 짐을 억지로 져 버린 겁쟁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짐을 져 버린 멍청이. 그게 지금의 나다. 앞으로도 변하진 않을 것이다.
탄창을 빼고, 슬라이드를 당겨 탄약을 빼낸 뒤 다시 탄창에 장전한다. 이번엔 탄창을 다른 데 두도록 해야겠다. 자물쇠도 좀 더 잠궈 놓고.
한때 내 어깨에 달았던 견장을 어루만졌다.
'자넨 분명 잘 해낼 수 있을거야.' "아니오. 전 실패했습니다."
처음부터 내면의 악마 따위는 없었다. 그저 레이먼드 나이벨 상사였던 누군가, 그 혼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 떨어뜨려. 이전에도 떨어뜨린 적 없어. ...아무튼 당황시켰다면 미안. ...하지만 너도 익숙해져. ...난 딱히 돌려서 말하거나 그런 거 못하니까."
돌직구만 날리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괜히 돌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게 좋냐 나쁘냐는 아무래도 판단하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자신은 그런 스타일이니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감안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막 나온 술을 받았다. 확실히 뜨거운 것이 조금 낯설긴 했으나 이건 이거대로 나쁘진 않았다. 이런 칵테일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막 자신에게 기울어진 잔을 바라보며 제 잔을 올린 후 그녀의 잔에 살며시 부딪혓다. 쨍.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그는 그 칵테일을 천천히 마셨다. 커피 향이 나긴 하나 커피는 아닌 맛. 묘하게 커피 맛이 나는 것 같으면서도 술 맛이 더 나는 것 같은 신기한 맛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그 맛을 음미했다.
"...조금 신기한 맛이네. ...진짜로 커피를 안에 넣은거야? 이거. ...아무튼 이런 맛을 좋아하는거야? 뭔가 맛이 좀 깊은 것 같네. 기억해둘게. 아무튼 라라시아? ...그러니까 음. 이거 그거야? 자기 자매를 채가서 느끼는 질투? 분노? 뭐 그런거?"
자신에겐 형, 누나, 동생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파악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허나 자신에게 싫은 티를 내고 괴롭히거나 귀찮게 군다면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 이유밖에 없지 않은가. 그 정도로 둘의 사이가 좋았나? 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스텔의 고개가 절로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의 평소 분위기를 본 적이 없으니 판단은 힘들었기에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그녀를 채갔으니 싫고 짜증이 난다. 라는 결론밖에 낼 수 없었다.
"...괜찮아. 귀찮게 하고 괴롭혀도. ...생애 첫 여자친구를 만든 대가라고 치지 뭐. ...그리고 평소 하는 임무의 위험한 레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 같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아스텔은 다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조금씩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나 아직은 멀쩡했다. 허나 비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면 오늘은 이 정도로 마셔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후, 그는 안주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 맞아. 그... 혹시나 보고 싶다거나 하면 내 방에 찾아와도 괜찮아. 위치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하 1층에 있는 에스티아의 바로 옆방. 대장의 사무실 바로 앞의 방이니까 아마 찾기 어렵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딱히 볼일 없어도.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아스텔은 침묵을 지키다 괜히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그 자신은 마냥 생각 없는 바보까지는 아니어도, 그리 속 깊고 철저한 사람은 못 되니 말이다. 나란히 불에 타서 골골거리는 지금 상황만 해도 충동에 몸 맡겨 일어난 결과이지 않은가. 누군가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지점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팀에 있어서도 좋은 일이다.
"어쨌든 씨* 안 죽었으니까 됐지. …이래서 평소에는 멀리서 때려."
반드시 근접해서 싸워야만 하는 능력도 아니고, 이런 위험부담 탓에 평상시에는 멀리서 거리 잘 재어 가면서 싸운다. 쥬데카의 속생각이 어떤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는 건 순전히 그의 입장일 뿐인데. 자업자득인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졸지에 같이 휘말려 버린 상대의 입장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시작부터 제대로 하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합의한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는 무릎 꿇은 김에 다시 드러눕기로 했다. 회복에 전념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편한 게 좋다. "야, 치사하게 앉아 있지 말고 누워라. 나만 개 처발린 것 같잖아, *." 그리고 드러누운 채로 팔만 들어 쥬데카의 옷자락을 턱 붙잡고는 이런 소리를 하는데, 최근엔 통 나올 기회 없었던 진상 기질이 오랜만에 튀어나온 거다. 말한 그대로의 의미에 더해 쥬데카 역시 쉴 거면 편히 쉬라는 뜻도 있었지만서도. 거의 다 풀어져서는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모아서 한쪽으로 늘어뜨리니 제 안방마냥 안락해 보이는 모습이다. 엉망이 된 주변 풍경─점점 복구되어 곧 깔끔해질 테지만─이나 엉겨붙은 피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거다. 무엇이 우스운지 그는 히죽 웃음 한 번 짓고는 천장의 구조물이나 눈으로 가만히 뜯어보았다.
"진짜 개**. 한 번쯤 자폭하는 것도 연습 해보려고 했거든? 근데 존* 할 만한 게 아니네, 역시 어지간하면 살아야 돼."
상대방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사생활을 궁금해하진 않는것 같으니, 더 놀려도 재미는 없을것 같다. 어째 볼때마다 당신이 당황하는 꼴을 한번씩 본 모양이 된걸 조금 의외란듯 생각하다가,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들리면 아무 반응 없이 싱크대를 톡 톡 두들겼었다.
“추상적인 능력은 참 힘들겠어?”
힘든 것도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나 보다. “근원도 알수 없는 불길함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 그리 묻는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였다. 문제의 근원을 알 수도 없으면 어찌 헤쳐 나갈까, 본인의 사상과 철저히 반대하는 것은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상력이 중요하긴 하지. 그런데 막 썼다가 다른 애 능력에 휘말리면 그대로 물감 잃을지도 모르는지라, 입지가 조금 좁아졌어.”
능력을 쓸 수 있는 물체가 따로 보인다면 모를까, 남색은 자연에서 보기 은근 드물기도 하고 특수한 남색이어야만 해서 더욱 능력의 매게체도 줄어든다. “전투 시 다른 대원들이 표출할 열 에너지도 신경 써야 하고.” 본인도 능력을 사용하려면 운동 에너지나 열 에너지를 응용해야 하는지라, 인지 못 한 순간 열 에너지가 과도히 가해지면 물감은 불에 붙을 것이다.
“남탓 하려는건 아니고, 그냥 내 역량 부족인것도 있겠지만.”
오븐으로 향한 사이 당신이 괜찮다고 말하는걸 들으면 뭐, 좋은게 좋은 거라는 마음가짐이다. “남의 세븐스를 하루 빌릴수 있다면, 마리 걸 빌려서 슈가 글라이더로 변해보고 싶어.” 왠지 논점이 도돌이표 쳐진다. 그러고선 대화가 요상하게도 흘러가, 슈가 글라이더는 한 번도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던가, 언젠가 실물 크로키를 그려보고 싶은 동물이라던가, 책으로 본 모습이나 대중매체에서 치즈같은 벌레를 먹는게 귀여웠다거나, 그런 실 없는 소리만 해대다가 어느 순간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넌?”
그러고선 그도 그 질문이 모호했다는걸 아는지, 잠깐의 텀 후에 이어붙인다. “빌릴수 있다면 누구 세븐스?”
언젠가 맛볼 즐거움으로 놔두는게 나을 것이라는 당신의 답변에 그저 묵묵히 식어가는 파이를 구경할 뿐이다. 끄트머리가 전체보다 더 진한 회색인걸 보면, 노릇하게 구워진것만 같다. 술자리에서 운이 좋았다는 것을 긍정하는 당신의 말을 들이면 자신은 쪼잔한 사람이라고 속 빈 협박을 해온다.
“아니, 거의 맞췄어. 스물 일곱이야.”
눈치를 봐 오는것에 별 감흥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처량하게 나올 줄은 몰라서인지, 조금 당황했다. 때문에 순간 거두어진 장난기. 두어번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면 무시하고선 파이를 버터 칼로 조심히 꺼내, 전부 접시 위로 옮긴다. 다 비운 컵케이크 틀 두개를 들고선 당신에게 오더니, 물과 세제로만 대충 헹구고선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갇혔을때 신경 써준건 고마운데, 다음에 내가 다시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땐 그냥 무시하고 공격하시지.”
레이버와 전투 때를 말하는 것이다. 말 하면서도 너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문장인지라 조금 찝찝해할지 언정, 표정은 아무런 감흥 없는 무표정이다. 그렇게 잠시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이 열린다.
“난 동료보다 대의에 더 관심 있거든.”
반만 거짓말이다. 그리 말하는 표정은 여전히 감흥 없어 보인다. 무언가 말하려던 것을 참듯, 아랫입술을 세게 씹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한다.
“맛있게 먹어.”
파이는 결국 한 개도 안 들고가고선, 당신보고 다 먹으란다. 나중에라도 당신이 파이를 먹는다면 아마 매우 평범한 맛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시피만 따랐으니까. 애플파이의 정석다운 달달함과 옅은 계피향, 그렇지만 특출나게 맛있는 그런 맛은 아닐 거다.
/분량 뭐..? 늘 말하는 거지만 오래 끌린 일상 돌려줘서 고맙고...쥬주 천사고...쥬는 귀엽고....막레 느낌으로 써봤는데 더 이어줘도 오케이야~
왜 이렇게 당황시키냐 했지만, 아스텔의 화법이 직설적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도 따지고 보면 그 쪽에 가깝기도 하고. 그런데 화법이 익숙하다 해서 하는 말들까지 익숙하겠는가. 비유나 에두르는 표현 없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심장에 다트 꽂듯이 하면 당황할 수 밖에 없지 않냐는 거다. 그래도 뭐, 어찌할까.
"못 하는 것도 참 여러가지야. 됐어. 그렇게 말하는 점도... 좋아하니까."
좋아하게 된 이상 거기에 불만을 더 표할 수는 없으니.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두근대는게 오히려 좋고.
라라시아에 대해 얘기하고 건배할까 하듯 잔을 기울이자 그도 잔을 들어 부딪혔다. 잔이 바뀌어도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는 맑고 경쾌하다. 잔잔히 떨리는 술의 표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모금 머금는다. 커피의 씁쓸함과 위스키의 씁쓸함이 어우러져 오묘한 맛이 혀 위를 감돌다가 이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연거푸 찬 술과 찬 물을 마셔 시린 속이 서서히 따뜻해짐을 느끼며 한모금 더 마시고, 술기운이 오른 것 마냥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커피에 술을 넣은 건데. 좋아한다기보다 진정이 필요할 때 마시면 도움이 되더라구. 뭐 나한텐 카페인도 몸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유가 필요할 때 종종 마신다며 덧붙였다가, 그대로 말을 조금 더 이었다.
"라라에 대해선 그런 거야 라는 말 밖에 못 하겠네. 쌍둥이지만 줄곧 내가 언니였고 라라가 동생이었으니까. 여태 나 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한테 뺏기면 화나고 질투 나고 하겠지. 음. 글쎄. 라라가 귀찮게 구는 건 임무 랑은 다르게 힘들지도 모른다? 감당 가능 할려나."
가볍게 여기는 아스텔을 보며 레레시아는 조용히 웃었다. 저렇게 말하니 나중에 어떻게든 해달라고 하나 보자. 조금은 짖궂은 생각도 하며 적당하게 식은 칵테일을 마셨다. 알코올도 카페인도 머금기 무섭게 사라지지만 온기 만은 오래도록 남아 속에서부터 따끈따끈해진다. 더불어 기분도 살짝 풀어져서, 보고 싶으면 방에 와도 좋다는 말에 요란한 반응 대신 식었던 얼굴을 다시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시선은 아스텔에게 두고서 입술 톡 내밀고 조잘대었지.
"그..럼, 나중에 갈 건데. 갔는데 없으면 투덜거릴 거니까. 아니면 네가 와. 내가 너보다는 덜 바쁘니까 방에 더 자주 있을거고."
로벨리아의 사무실 앞을 왔다갔다 하면 어쩐지 민망할 거 같다는 건, 남은 칵테일을 마셔서 삼켜버린다. 어쨌거나 서로 엇갈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남은 견과류 하나 집어서 먹고, 잔을 흔들어 남은 양을 본다. 한모금 이면 마무리 될 거 같다. 그녀는 아스텔의 잔을 흘깃 보곤 고개를 들어 멀찍한 창가 바깥도 보았다. 어둠이 적당하게 내려앉은 바깥은 밤이 제법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오늘은 달이 밝았던가. 나가면 하늘부터 봐야겠다 생각하며 잔을 달칵 기울인다.
"오늘은 이만 마시고 일어날까. 술은 이거면 충분할 거 같네."
아쉬우면 내 방에서 한 잔 더 할까. 아님 네 방이나. 턱을 괴고 가늘게 웃는 얼굴이 아직 붉었지만, 나름 얄밉고도 능청스럽다.
"...내 방에 갑자기 들어와서 칼을 들이미는 것만 아니라면야. ...그렇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수준은 아니겠거니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안일할지도 모르나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제 언니를 다른 이가 채갔다고 한다면, 그래서 질투를 한다면 조금 성질을 부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게 있어선 그런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김에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을 보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혼자 그렇게 납득하면서 다시 칵테일을 천천히 머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봐줬으면 좋겠는데. 너도 하루종일 방에만 있고 그러진 않을 거 아니야. 내가 찾아갔을 때 네가 없을 수도 잇잖아. ...그러니까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태라고 여겨줬으면 좋겠는데."
이내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연락을 할 때 사용하는 단말기를 꺼낸 후에 그 단말기를 톡톡 건드렸다. 이것으로 연락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듯, 그렇게 제스쳐를 취하던 아스텔은 단말기를 자신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슬슬 돌아가자는 식의 말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세븐스를 써서 비행을 하기 위해선 너무 취하면 안되었기에. 무엇보다 깊게 취하기 전에 멈추는 것이 그의 술 습관이기도 했고.
"그럼 돌아가서 잠시 내 방에 있다가 가. 딱히 술을 먹는 것보다는... 그냥... 뭐랄까. 바로 보내기 조금 아쉬워서. ...특별히 뭘 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자잘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싶어.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그냥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너하고."
그렇게 살며시 제안을 하면서 그는 비어있는 잔을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쭈욱 기지개를 켠 후에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내가 계산할게. 술을 선택한 것은 일단 나였으니까. 마음에 걸리면 다음에 네가 사줘."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딱히 금전적 부담은 없었다. 일단 지원비 명목으로 돈은 매달 받고 있었고, 특별히 크게 쓰는 일이 없었기에 꽤 쌓인만큼.
/슬슬 상황적으로 막레를 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은 레레시아주가 좀 더 잇고 싶다면 이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사실 그녀도 라라시아가 뭘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은 안 잡히지만. 설마하니 그럴까. 기껏해야 대놓고 틱틱대거나 모둥이 뒤에서 째려보거나 큰 부상이 아닌 이상 치료를 안 해주려고 하거나 그런 수준일 것이다. 무슨 일이든 선이란 존재하고, 그걸 넘었다간 자매 간의 무언가가 완전히 박살날 지도 모른다는 걸 영리한 라라시아가 모를 리가 없으니.
방에 없으면 투덜댈거라 하니 아스텔은 어쩔수 없지 않느냐며 단말기를 꺼내보였다. 단말기.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직접 보는게 편한 쪽이었다. 저 기계로 보는 메세지는 영 어색하다. 뭔가, 뭔가가 그래. 은근한 불만을 품은 금빛 눈이 그가 단말기를 꺼내 집어넣을 때까지 빤히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리며 알았다구, 라고 수긍할 거면 왜 그렇게 보았나 싶기도 하지만.
"흐응. 됐다 그러면 잡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돌아가서 살짝 실례 좀 할까."
이대로 돌아가기만 하는게 아쉬운 마음은 같았던지 그가 선뜻 방으로 오라길래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서로를 알기 위해 나눌 말은 얼마든지 있다. 조금 순서가 뒤죽박죽이지만 세상사 원래 정해진 흐름대로 가는 법 없다고도 하니. 그녀도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처럼 장갑을 고쳐 당기고 눌렸던 코트 자락을 털어 정리한다. 계산에 대해선,
"그럼 다음은 내가 살게. 그 땐 술 말고 다른 거 먹자."
작은 마을이지만 있을 건 거의 있었으니까. 갔던 곳이라도 둘이 가면 다르지 않겠냐고 말하며 계산을 마치고 아스텔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따스한 조명의 밖은 제법 쌀쌀했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 위로 기울어가는, 혹은 차오르는 달이 동그마니 떠 있었다. 달빛 희미하게 내리는 거리로 타닥 나아가선 가볍게 휙 돌아 아스텔을 바라본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천천히 팔을 들어 뻗으며 얼굴엔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달 참 예쁘게 떴겠다. 가는 길에 달구경이나 할까? 둘만 있는 특등석에서 말야."
그리고 아스텔이 다가오면 조심스레 몸을 맡겼겠지. 어쩌다 안겼던 저번과 달리 목에 팔을 둘러 안겨선 예정에 없던 야간 비행을 남들 몰래 즐겼을 것이다. 밀회 아닌 밀회는 아지트에 도착해서 조금 더 이어졌겠으나, 굳게 닫힌 개인실 문 너머를 누가 알 일은 없었을 테지.
//더 잇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끝이 안 날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끗!!! 캡틴 수고했구~~ 으음 다시금 아스텔과 서사적으로 잘 부탁해..? ㅋㅋㅋㅋㅋㅋㅋ 꺄아악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슬슬 막레 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아무튼 일상 수고했어요! 그리고 제쪽에서도 다시 한 번 잘 부탁할게요!! 아무튼 저 이후의 이야기를 살짝 하자면 아마 아스텔은 제대로 날아서 달 구경을 하면서 공중에 조금 더 떠있었을 것 같네요. 딱히 움직이는 일 없이 상승 기류를 일으켜서 그 상태에서 떠있는 자세로. 당연히 레레시아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든 자세로. 일단 달 구경은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대충 그런 이야기!
>>837 멜피와는 한번도 못 돌려봐서 돌려보고 싶긴 하나 지금 시간이!! 8ㅁ8 오늘이 금요일이라면 가능했겠지만..큭!
>>838 어서 오세요! 메사이아주! 능력에 대해서는 사실 특정한 환경 속에서 '완전 무적'. 뭐 이런 것만 아니면 특별히 칼질을 하진 않아요. 어쨌건... 뭐, 전투할때는 다이스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제가 판정을 하는 식이고 대충 보면서 밸런스를 즉각적으로 맞추기 때문에 어느 능력이 특별이 더 우세하다. 이런 것은 적의 능력과 상성인 능력 이외에는 없기도 하고..아무튼 결론적으로는 밸런스 걱정은 하지 마시고 그냥 능력에 대해선 자유롭게 서술하셔도 괜찮답니다! 일단 읽어봤지만 특별히 문제가 될 건 없을 것 같네요!
>>839 하지만 레레시아에게만 하니까 아무래도 좋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 음. 그 아쉬움은 그냥 다음에 돌릴 때나.. 이 스레가 끝난 후에 좀 더 이야기를 즐기고 싶다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는 것으로! 그러고 보니 레레시아주는 합체 스페셜 스킬 가지고 싶으신가요? 일단 연플이니까 조건에는 해당되긴 하는데..
>>840 보검이 세븐스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곧 그 무장이 더욱 강화된다는 느낌으로 생각해주세요. 그러니까 그렇게 묘사해도 괜찮아요!
1.아이들을 이송해서 어딘가로 향하던 블러디 레드에 잠입한 제 0 특수부대원들은 깽판을 치고 로봇으로 변신한 블러디 레드를 물리치고 아이들을 구출했다. 이 과정 속에서 제 3 세력으로 보이는 레인과 잠시 마주했다.
2.가디언즈의 비밀적인 뭔가가 들어있는 USB를 가지고 있는 가디언즈의 배신자와 접견하기 위해서 제 0 특수부대원들이 출동했다. 그런데 이 가디언즈의 배신자가 진짜 쓰레기였고 자기 살겠다고 자기를 보호해주려는 에델바이스 부대원 하나를 미끼로 썼고 그 때문에 글라키에스와 레이버가 그 대원이 가지고 있던 임무 수첩으로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의 존재를 확인. 이어 배신자 사형이 주 임무인 레이버에 의해서 그 배신자는 죽었고 처음으로 제 0 특수부대와 교전. 허나 글라키에스의 개입으로 인해 일단은 무승부로 끝나고 후퇴.
3.USB의 내용에 있는 고독 의식을 막기 위해서 글라키에스가 담당하고 있는 가디언즈 기지로 출동한 제 0 특수부대. 아이들을 발견하고 글라키에스와도 만나서 교전. 죽을 뻔 했지만 모두의 보검에 깃들어있던 세븐스. '사이버 엔젤'인 루시아가 개입. 그녀의 노래로 모두가 버스트에 각성하고 어떻게든 아이들을 구출해서 후퇴. 한편 다른 곳에서 레인의 목적이 '화합을 원하는 이들의 말살'이라는 것이 알려졌고 이 과정 속에서 에스티아와 로벨리아의 스페셜 스킬을 레인이 카피해감.
자신을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다는 사람에게 매몰찬 대답을 하기는 싫은 법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델바이스의 기술력으로 내 몸에다가 연명치료를 지속하기엔 인적, 물적 자원이 모자라다. 가디언즈 놈들이야 할 수 있으려나? 아니. 놈들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겠지. 어차피 세븐스는 사라져야 하니까.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빙빙 돌려 '아니, 넌 할 수 없어.' 라는 뜻을 전한다. 물론 말 그대로 감사의 마음도 있었지만, 이미 내 상태는 선을 넘었다. 매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난 내 몸뚱아리를 혹사시켜가며 세븐스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습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내 몸만 버렸을 뿐이다.
"그냥 뭐... 나 죽고 나서 '그런 녀석도 있었지' 정도로 기억만 해 줘. 아님 그 전에 내가 걸을수도 없게 되면 한번 휠체어나 밀어주던가. 그, 고기 팔 같은걸로 씽씽 달리게."
어느쪽이나 바라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따위 흉흉한 말을 농담이랍시고 내놓고 있는 걸 봤을때, 난 머리통마저도 망가지고 말았나보다.
>>849 모두의 공격은 다 개별판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적이 방어를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버스트를 사용하면 그 공격만큼은 방어를 부숴서 제대로 데미지를 입힐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적이 방어를 해도 데미지가 2배 다 들어간다는 뭐 대충 그런 이야기에요!
>>850 사실 아스텔이 같이 전투를 하는 일은 앞으로도 정말로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없을 것 같으니... 사실상 레레시아주가 혼자서 사용해야하는 그런 느낌이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아스텔의 에어로를 이용해 바람의 힘으로 적을 한 위치에 고정시켜놓고, 레레시아의 독을 무기 형태로 바꿔서 그대로 관통하듯이 공격을 가하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고.. 투창이라던가? 뭐 일단 지금 당장은 이 정도밖엔 떠오르지 않네요.
덧붙여서 합체 스페셜 스킬은 우플이나 연플일 때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정말로 친한 친구를 하나 만들어서 하나 정도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864 무슨 소리에요. 전투에서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를테면 누군가가 총을 펑펑펑 쏘는 것에 맞춰 그 총알보다 더욱 빨리 달려서 적을 먼저 공격해서 그 자리에 고정시키고 총알이 명중하는 순간과 함께 빠져나온 후에 피식 웃으면서 옆을 바라보면서 폭발하는 총탄 같은 거 쏘면 얼마나 멋진데요!
>>866 어차피 무장은 능력과 상관이 없이 그냥 무기로 쓰는 것이고 위 사진처럼 그냥 말 그대로 갑옷 같은 느낌이 더 크기 때문에! 아스텔만 해도 무장을 풀 착용하면 어깨에 레이저 포가 달려있고 대충 그런 느낌인걸요. 말 그대로 무장은 그냥 무장이에요! 그냥 싸우기 위한 용도인 것이지. 꼭 연계를 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연계를 할 수 있다면 하는 것도 좋지요! 무장의 힘으로 자신의 세븐스를 더욱 활용할 수도 있는 느낌이니까요.
>>873 아마 그쪽이 연출면으로는 더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아스텔은 말했다시피 밸런스 상 전투에 참여를 하는 일은 극히 없기 때문에, 아마 일시적으로 아스텔의 세븐스를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을 따로 레레시아에게 주게 될 것 같네요. 평소에 막 남용은 불가능하고 딱 연계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아이템으로만. (Feat.에스티아) 물론 스토리상으로 아스텔이 참여하게 될 때는 같이 쓸 수도 있을테고요!
>>876 오~~ 일시적이라지만 그런걸 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에스티아 대다내... :ㅇ 그러면 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같이 연출해서 써보는게 가장 로망이네~~
앗 그리고 버스트 말인데! 레시는 공격형으로 갈 거야! 그래서 생각한게 '독액으로 분신을 만들어 타겟에게 밀착시킨 후 폭발, 그 후 독으로 데미지를 준다'라는 건데. 이 타겟을 동시에 여럿 잡을 수 있어도 될까? 한 10명까지? 글구 타겟 수에 따라 위력이 차이난다거나 그래도 되는지? 타겟수가 적어질수록 데미지가 강해지는 거지!
>>926 음~~ 아마 두번째부터? 자각은 없었지만 그 춤췄던 일상 때부터라고 생각해~ 당시에는 분위기가 이랬다 저랬다 서로 쓴소리도 하고 그래서 뭐 이대로면 그냥저냥 우플은 되려나? 했는데 내 안에 호감등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켜져 잇었고? 모르고 있다가 호수 일상 하면서 엣 어라 잠깐 하면서 정면으로 치여버린 흐름~~ 돌직구 화법에 솔직한 모습이랑 그 와중에 어벙한 모습 간간히 보이는게 꽤나 취향저격이었던 거 같아~~ 아 아 일상 중에 치근대도 다 받아주는 점도! 그리고 얼굴! 레시보다 큰 키! 공주님 안기가 되는 체력!!(?)
역시 춤추는 일상때부터였나! 사실 3번째 일상때부터 어라? 혹시?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런저런 요소를 들으니 뭔가 묘한 느낌이네요. 아스텔을 매력적으로 봐주셔서 매우매우 감사하다는 말 다시 한 번 올리며... 그 와중에 멜피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에..
칭찬이라니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뿐,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 떄문에 평소에는 멀리에서 공격한다는 그의 말에 그렇겠네요. 라며 덧붙인다. 그렇게 잠자코 앉아있었더니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살짝 시선을 돌려 본다.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그의 손과 앉아 있는 게 치사하다는 말소리에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결국 옆에 눕긴 했지만.
"자폭...은 목숨을 버리는 걸 전제하죠, 성공한다면 아마... 이렇게 누워 있을 일은 없을 겁니다만."
아마 그대로 사라져 버리거나, 숯덩어리가 되거나 하겠지, 물론 그가 그런 의미로 자폭이라는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폭에는 뒤가 없다는 걸 넌지시 이야기에 담은 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살아남아야죠... 죽어버리면 슬퍼할 사람들도 있을 테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말도 있었기에 너는 말을 마치곤 천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이유 모를 불안에 덜덜 떨면서 꼼짝도 못한 게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지속적인 훈련...이라고 해야 할까, 경험이 쌓여 비교적 부드럽게 상황을 파악하고 넘길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고 합니다. 어느 순간 그런 감각이 지나가 버리도록."
그래도 불길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어쨌든 대비할 시간이 네게는 주어진다는 뜻이기도 했으므로 너는 그렇게 말을 끝내려다가 잊을 뻔 했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이 불길함은 어떤 거겠구나... 싶은 것도 생기니까요, 그럼 그 때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럼 다들 물감을 가지고 다니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서, 언제든 그가 능력을 쓸 수 있도록 남색의 물건이나 물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공격에 활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움직임과 연계해서 흩뿌린다든가 하면 상당히 괜찮지 않을까...라는 감각으로 말을 한다.
"네? 아... 으음, 제이슨 씨의 능력일까요."
멋지잖아요. 물론 그가 계속해서 능력을 쓰지 않는다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기에 그런 감상을 뱉는 거였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술자리의 일을 쭉 기억하는 쪼잔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지칭하는 그의 말에 네 표정에는 또 당황한 기색이 감돈다. 빈말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군요... 원래 나이보다 더 많게 말해버렸네요."
사실 어느 쪽이든 상대가 작정하고 기분 나빠하려면 그렇지 않을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어쨌든 그가 하는 말에 감정이 실린 것 같지는 않았기에 너는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벌써 접시 위에 올라간 파이를 보며 맛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지난번 임무에서 했던 행동에 대한 말을 듣자, 잠시 어떤 부분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참고하겠습니다."
고려하겠다, 참고하겠다, 검토하겠다. 등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너도 안다. 긍정적 검토-라, 그가 말한 상황을 떠올려 보면 확실히 자신의 노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 오히려 레이버를 노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말이지. 동료보다는 대의에 관심이 더 있다는 그의 말에는, 말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가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도 아마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상냥한 사람인 거 아닐까.
"앗, 잠시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으로 나가버린 그의 흔적을 눈으로 쫓던 너는, 네 앞에 놓인 파이들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전부 어떻게 한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로 한 거 아니었냐며 중얼거리던 너는 하는 수 없이 큰 파이는 조각을 내고, 컵케잌 크기로 만들어진 파이는 따로따로 가볍게 포장했다. 와중에 한 조각 정도 맛을 보았는데... 아마 꽤 만족스러워하면서 웃는 낯이었을 터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달고, 강한 계피향(계량이 문제가 아니라 세븐스 때문에)이 잡생각을 싹 지워줬기 때문이려나.
//그러면 이걸로 막레!!!! 수고 많으셨습니다 유루주!! 긴 일상 잇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흐흐 유루 상냥해(?) 나중에 유루 어떻게든 찾아서 파이 조각 정도는 건네줬다는 걸로~
가디언즈의 기지에서 수행한 임무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시설 내에 남아있던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워프와 이동을 통해 아지트로 복귀한 특수부대에게 들린 소식은 별도로 나갔던 로벨리아와 에스티아 측의 승전보였다.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이 큰 손실 없이 그렇게 잘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부상자가 아주 없던 것도 아니라, 복귀 직후 작은 소란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소란 중에는 복귀하기 무섭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레레시아도 있었다.
"라라- 나아 다녀왔ㅇ..." "레레!"
기지에서 미리 소식을 듣고 입구 근처까지 와서 기다리던 라라시아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하는 레레시아에게 다가가다가, 그야말로 끈 떨어진 마리오네뜨처럼 무너지는 레레시아를 보고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그 몸이 바닥에 널브러지기 전에 받아낸 라라시아는 다른 의무실 대원과 함께 레레시아를 옮겼다.
평소 같았으면 다른 부상자들에게도 잔소리 한두마디쯤 하며 의무실로 끌고 갔겠지만, 눈 앞에서 혈육이 쓰러진 탓일까, 다른 부상자는 어영부영 다른 대원들에게 맡긴 채 라라시아는 레레시아에게 매달렸다.
새하얀 머리가 검붉게 물들 정도로 피를 흘리고 전신에서 베이지 않는 곳을 찾는게 더 빠를 정도로 크고 작은 부상투성이의 레레시아의 모습은 2년 전의 그 날이 불안하게 오버랩 되었다. 그 탓에 몇 번이고 처치하는 손이 어긋날 뻔 했으나 라라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움직였다.
"레레..."
그러나 끝내는 울먹이는 소리가 작게 새어나오며 시야가 잠시 흐려진다.
지구가 돌아가던 시대는 끝나고 아침은 영원히 사라졌어
언제까지고 셋이 함께일 것만 같던 세상은, 어느날 갑자기 부서져내렸다. 우리가 갓 스무살의 생일을 겨우 닷새 넘긴 날이었다.
해가 막 저물어 하늘에 밤의 장막이 드리우던 시각.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들의 군화가 자그마한 단칸방 안을 헤집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우리를 짓밟을 것 같은 우악스러운 그들을 보고만 있으니, 그들이 뭔가를 말했다.
비능력자, 병, 세븐스, 죄, 처형.
단락적으로 지나가는 단어들로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엄마가 아니라며 분명 뭔가 잘못된 거라며 외치는 말들로 상황이 이해되어갔다.
누군가 엄마를 가디언즈에 고발했다. 세븐스로 비능력자를 헤쳤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우리의 결백을 들어주는 대신 총을 들었다. 너무나 둔탁하게 들리는 총성 뒤로 선혈이 튀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산란했다. 내 위로 넘어진 몸이 무겁고 뜨거웠다. 나를 붙잡는 손의 떨림이 낯설고, 숨이 새는 목소리가 매일 듣던 목소리가 맞나 싶었다.
'ㄹ라... 라라... 어서...!' '아파, 아파... 라라...'
나는 아무것도 못 했다. 나를 붙잡은 레레가 발작을 일으킬 때도, 엄마가 레레의 독을 뒤집어쓰며 우리를 밀어낼 때에도.
지독한 약 냄새에 눈을 뜬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독약과 지혈제 등등을 들이부었나 싶을 정도로 약향이 독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써도, 이 몸에는 약효가 잘 듣지 않았다. 그 증거로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몸 곳곳을 두른 붕대에서 핏빛이 가시질 않는다. 매시간 거즈를 갈고 붕대를 새로 감는게 무의미하다. 덧나지 않는게 그나마 다행이라지만.
"......"
어찌 어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둑한 실내 속, 익숙한 에델바이스의 의무실 내부가 보인다. 누운 자리의 모포와 시트의 감촉도 참 익숙해서 되려 꿈인가 싶다. 껌딱지마냥 붙어있을 거 같던 이는, 지금은 곁에 없는지 목소리가 조금 멀리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면 정신이 멍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걸지도.
어느 쪽이든 휴식이 더 필요한 상태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야를 차단하기 무섭게 몰려오는 잠결에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으나. 다시 눈을 뜨진 않았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네게는 아침이 찾아오지 않아 그러니 너의 「좋은 아침이야」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이전에도, 나는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 어린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독'한 세븐스 탓이었다. 그것을 감당해줄 수 있는 엄마와 라라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진작에 스스로 질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발작은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아니. 애초에 그건 발작이 아니었다. 일종의 조짐이었다. 한 번, 그렇게 터질 거란 모종의 조짐. 아슬아슬하던 상태가 강렬한 아픔과 충격으로 인해 터지는 건 당연했다.
생전 처음 맞아본 총알의 고통은 의식이 잠깐 끊겼다 다시 이어지게 했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옆구리부터 몸의 말단까지 떨리는 충격에 둑이 터진 것처럼 온 몸에서 독이 튀었다. 비명을 지르려 벌린 입에서조차 넘쳐 흐른 새까만 독은 그들을 뒤덮었으나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나를 진정시켜주려 끌어안은 엄마마저도 집어삼켰다. 짙고 짙은 새까만 색의 독은 무엇보다도 인체에 치명적인 독이었다...
'괜, 찮아. 괜찮아.. 레레. 라라. 내 가장 예쁜 별들.. 자, 어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나가렴. 어서. 어서!'
내 독 때문에 살갗이 녹아내리면서도 엄마는 웃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라라가 나를 잡아끌며 나갈 때에도, 몸으로 우리에게 쏘아지는 총탄을 막으면서도, 엄마는 웃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내 어여쁜 별들. 꼭 살아야 해...'
벽에 부딪히고 계단을 구르며 겨우 건물을 벗어났을 때. 우리가 살았던 층에서 가스로 인한 폭발이 일어났다. 오래된 건물이 충격을 버티지 못 하고 서서히 부서지는 걸 눈물 섞인 시야에 담으며 라라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그러나 빈민가를 벗어나기 무섭게 내 의식은 흐려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때가 돌아오면 이라든가, 생각하며 나는 너를 이런 감옥에 가두고 있어 목이 쉴 때까지 계속 노래한다면 분명 눈치채 주겠지
이 밤이 항상 밝아오지 않으니까 나는 너를 그런 감옥에 가두어두고 있었어 빛은 너의 목소리밖에 없어서 달 대신에 너를 노래하게 하고 있어
레레시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새벽이었다. 정확한 시각을 볼 순 없었지만 사방 어둑한 조명과 입원실까지도 전해지는 고요함이 새벽 임을 알려주었다.
다시 잠들고 얼마나 지난 걸까. 반나절? 하루 이상? 그 사이 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고 잠시간은 정신 차릴 겸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자연스레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하얀 머리가 보이고 지친 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이며 몸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천천히 눈을 굴려 바라보다, 겨우 뜬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 잠든 내내 옆에 있었을 반신- 라라시아가 눈을 크게 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레레...? 일어난 거야? 정신이 들어? 오 세상에. 내 말 들려? 응? 다행이다. 오래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누가 보면 죽었다 살아난 줄 알겠어.."
조금 다쳐서 온 걸 가지고. 부상에 대해 레레시아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자 단박에 라라시아의 눈이 세모꼴 된다. 그 쨍한 눈빛에 아이고 나 죽네, 라며엄살을 떠니 금방 순한 양의 눈 되어 많이 아프냐고 안절부절 했지만.
"괜찮아? 너 피를 너무 흘렸었어. 그런데 수혈을 하기에는 네 체력이 못 받쳐줄 거 같아서. 가뜩이나 너 약도 안 받는데. 일단 깬 다음에 뭐든 하려고 했어." "어... 뭔가 엄청 피곤해졌던 건 기억 나긴 해.. 그런데... 약을 쓸게 아니라, 네 세븐스로 치유했으면 되지 않아...?"
그랬으면 이렇게 약 냄새가 독할 정도로 쓰지 않았어도 되고.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깬 다음에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꼼짝도 못 하진 않았겠지. 뭔가 주절주절 말하는 라라시아에게 그 얘기를 하자, 일순 입원실에 정적이 감돈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정적이다. 레레시아는 잠자코 기다렸다. 아직 나른한 기운이 도는 금안으로 라라시아를 바라보면서. 귀를 기울이면 시간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고, 이윽고 라라시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공기를 흔든다.
"레레. 나 할 말이 있어." "뭔데..?" "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거야." "응..." "그만큼 나도 많이 미안하고." "응..." "레레." "왜...?" "우리, 여기 나가자. 나가서 모든게 끝날 때까지 둘이 살자."
느닷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선을 내려보자 힘없이 늘어진 레레시아의 손을 대신하듯, 라라시아의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시트를 부여잡고 있었다. 얼굴을 바라보니 꼭 깨문 입술이 곧 터지지 않을까 싶다. 참 오래도 생각하고, 많이도 고민했을 것이 고스란히 보이는 모습을 보며, 그런 모습을 내보이며, 서로는 서로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쥬주 긴 일상 너무 수고 많았고 쥬 귀여웠다.. 힐링 씨게 하고 가는데 유루..? 상냥하다니..? 쥬데카의 뒤틀린 가치관이 돋보여서 안쓰럽고 불쌍하네요 () ㅋㅋ유루 파이 조각 받으면 (단거 먹기 싫어서 그냥 간 건데...) 이딴 생각 하면서도 그냥 먹었을 겁니당 악 괄호 치고 세븐스 덮어씌우면서까지 파이 맛있어 해주는 쥬주 귀엽다...(?) 돌려줘서 고마워~~~~~~(팔뜯먹)
레레 독백 쓰겠다고 한 게 이거였어요..? 세상에 매워...눙물나... 레레와 라라는 평생 내 이쁜 별이야.... 앗 이 독백 후엔 쌍둥이가 각자 성장할것 같아서 너무 기대되는 거시에요 성장의 방향성이 독립일지 뭘진 말 모르겠지만...
아스텔은 철저하게 일본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태어나고 살았기 때문에 확실히 아직은 그 의미를 잘 모르지만... 아마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아무런 말 없이 눈만 깜빡이다가 피식 웃으면서 "...그러게. ...달 예쁘네. 너랑 봐서 그런가." 정도의 말로 답변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막 부끄러워하는 느낌은 있겠지만 티가 막 나기보다는 아 얘 좀 부끄러워하긴 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