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부대의 대부분이라. 그녀는 부대가 편성된 이후 말을 나눴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다들 가지각색의 삶이었지만 세븐스기에 고달팠다는 공통점은 있었지. 그 고달픔의 궤도 모두 제각각이겠지만. 그렇기에 한 곳에 모이게 되었을 거란 건 그녀도 생각했다. 진정한 자유를 누렸다면 여기에 올 리가 없으니까.
"지금 최우선이 무언지는 잘 아니까. 가능한 만큼이면 돼. 무리는 하지 말고."
제법 줄어든 푸른 술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짧게 말했다. 당장 내일의 미래조차 보장할 수 없는 시기에 그녀의 요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나중을 기약하는 건 미련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 나중을 보기 위해 앞을 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아니면 그냥, 잊지 않아주는 걸로 족할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새로 꺼낸 말도 앞서 했던 질문의 연장선이다보니, 아무래도 그게 좀 걸렸나보다. 그녀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젓고 술을 마셨다. 뭐, 아니라면 아니고 맞다면 맞을 수도 있는데. 일단은 아니라고 하는게 아무래도- 그렇지. 태연히 반 이상 비운 술잔을 내려놓고 아스텔과 마주보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온 이유를 묻는 말에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며 그 뒷이야기를 들었다.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하자, 인가. 천천히 내리감는 눈커풀 뒤로 씁쓸함이 어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라진다. 그녀는 물에 손을 뻗지 않고 잔을 잠시 달각거렸다.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러는 것도 잠시였다. 이내 잔을 놓고 말한다.
"그냥 마시고 싶었나보다 하고 내가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궁금해한 덕에 네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괜한 질문은 아니었지. 내 이유는, 음- 적당히 대외적인 이유랑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뭘로 들을래?"
특별히 안 고른다는 선택지도 줄게. 라며 그녀는 손가락 셋을 펼쳐보였다가 내려 테이블에 얹었다. 농담 같지만 안 고른다고 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알아서 생각하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그에게는 제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레레시아는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저번에 다같이 모여서 게임했을 때. 그 때 그 마지막 대답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거야? 소거법으로 사람을 고르다니 너무한거 아니냐구. 다른 이유도 아니고 소거법이라니."
마지막이었는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순서보다는 그 내용이 핵심이니까. 그 때 아스텔이 했던 대답을 끄집어내어 잠시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소거법이라는 표현이 꽤나 신경 거슬렸나보다.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에 눈 한번 굴려본다. 여전히 검은 머리. 그리고 살구색. 아마 벗어던진 옷의 뒤로 보인 가죽의 색일 테지. 다시금 시선 돌린다. 움직이는 것이 싫다고 해야겠지, 괜히 자존심 세워 기 빼고 싶은 일도, 쓸데없는 분란 만들 생각도 없다. 이렇게 보여도 제법 평화를 사랑하는 편이라. 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호수를 쳐다봤을 때, 그다지 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도."
곧 낙일 되어 해 온전히 지면 검은색이겠지, 절대 마시고 싶지 않은 색이다. 대신 나무 뒤로 가는 것을 택했다. 허공 느긋하게 걷는 모습 뒤로 제는 흘러내린 어깻죽지를 다시 끌어올린다. 불편하다. 소맷단 때문에 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발을 보니 손도 그럴 것은 자명하다.
"용의 모습이."
제 간단히 답했다. 인간의 모습 보다 용의 모습에서 자신의 힘을 더 조절하기 쉬웠으니 용의 모습이 본모습이겠거니 싶은 것이다. 그럴싸한 이유지 않은가. 제 탄산음료 받아들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맷단 너머로 가려진 손 드러내더니 갈고리 같은 손끝으로 툭 캔을 딴다. 콜라 특유의 달고 향긋한 냄새와 냉기. 다만 아직 마시지는 않았다. 아마 바로 마실 생각은 아니고 잠깐 식혀 마실 것 같다.
누그러지는 표정. 씹는 소리가 느려지고 음료를 삼키는 목 넘김 소리가 자주 들린다. 먹는 속도는 느려졌다. 그럼에도 눈 한번 깜빡이더니 그뿐이다. 어떠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동정도, 안타까움도, 흥미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이곳에 온 이상 더 자명한 사실이고."
제 느릿하게 캔 들어 올린다. 탄산이 코를 찌르는 느낌이다. 혀를 살짝 담가보듯 한 모금만 입에 머금더니 느긋하게 삼킨다. 마셔본 적 없는 것이라 기이하기 짝이 없다. 제는 고개를 들더니 그제야 표정 하나 지어 보인다. 한쪽 입꼬리만 비뚜름히 올린 것이 과연 그렇겠냐는 표정이지만 언사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흥미본위였다. "그렇군. 좋지 못한 이유였겠어. 사과하도록 하지. 마저 먹게나."
대외적인 이유건, 개인적인 이유건 저렇게까지 말을 할 정도면 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있었던 것 같았기에 그는 둘 다를 요구했다. 만약 안된다고 한다면 개인적인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 대외적인 이유는 그냥 말 그대로 적당히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들어도 별 의미도 없는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그는 판단하며 남아있는 잔의 블루 하와이를 모두 입으로 집어넣었다. 이내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입가심을 하며 그는 견과류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응?"
마지막 대답. 뭘 말하는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는지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실게임..그거 말인가. 그때 마지막 대답이... 이내 소거법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그는 이제야 떠올렸는지 아. 소리를 냈다. 하지만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는 이야기했다.
"그때는 가장 적합한 대답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딱히 상대방도 진지한 답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테고. ...질문의 의도가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을테니 내가 누구를 언급해도 난감해질 것 같았기에 가장 적합하게 가능성과 불가능을 토대로 소거해서 답한 것 뿐이다만."
물론 상대의 투덜거림은 그런 이유로 나온 것이 아니겠으나 적어도 아스텔은 그때 자신의 대답은 누가 뭐라고 해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침묵을 잠시 지키는 듯하다가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왼쪽으로 시선을 살며시 돌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실수를 한 모양이네. ...딱히 진지하게 의미를 둬야 할 대답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베스트한 대답을 끌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기분 나빴다면 미안."
진심으로 가능하리라 믿었으나 농담으로 넘기는 걸보니 불가능한 것 같았다. 선우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음료를 마저 삼켰다. 요리는 다 끝났고 땀이 식어 제법 쌀쌀해졌으니 아공간에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우는 순간 어릴 때 그의 모습이 어떠하였는 가 궁금해졌다. 작은 새끼 뱀의 모습이었을까? 지금처럼 위풍당당한 용의 작은 버전이었을까? 어찌되었든 제법 귀여운 모양인지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어릴 땐 훨씬 더 귀여웠으리라 생각했다.
제가 손 끝으로 캔을 따자 손톱이 길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직후 그가 콜라의 김을 빼는 것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아차 싶어 아공간 속에서 수정과를 꺼내어 그에게 던졌다.
"이건 탄산 없어."
자신의 사연을 대충 얼버무린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듯한 제의 말투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 이곳에 온 사람들치고 사연없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그 역시도 무엇인가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고풍스럽고 오만한 컨셉러가 이곳에 올 이유가 어디있을까? 아니, 애초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분명 그의 세븐스를 보면 이미 오래전에 가디언즈에게 토벌되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멀쩡히 살아있다. 멀쩡히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멀쩡히 여기서 놈들과 싸우고 있다. 대체 무슨 수로?
"너도 뭔가 사연이 있구나?"
선우는 제에게 진심으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체 저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것일까? 분명 모든 세븐스들은 어릴 때 한번 쯤은 자신의 능력이 특별한 것이며 자신도 가디언즈처럼 영웅이 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모두가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능력을 저주라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제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10대 중반 전후로 없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있는 것일까? 선우는 그의 성격과 어투가 그의 과거와 관련되어있고 그것이 여기 오게 된 원인이라 생각했다.
아마 네가 앞이 보였던 건 폭발의 찰나 눈을 질끈 감았기 때문이리라. 보통 전투 중 눈을 감는 건 좋은 판단도, 행동도 아니지만 방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눈을 감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온통 화끈거리기는 해도 눈은 그나마 빨리 제대로 된 상을 맺을 수 있었다. 다만 귀는 아니었다, 보통 이상으로 밝은 귀는 폭음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으니, 헬멧 안에서부터 주륵 흐르는 핏줄기는 어느새 네 목을 타고 두 줄기 길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아픔보다도 먹먹한 감각에 너는 고갤 휘젓는다. 충격에 온몸이 쑤셨지만 간신히 서 있을 수준은 되었기에, 너는 벽을 짚은 채로 천천히 일어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나머지 한쪽 손으로 꾹 눌러잡으면서 천천히 고갤 드는 동안에도 화상을 입은 피부로부터 느껴지는 작열통에 너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일어설 수가 없다. 손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너는 다시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다행인 건 점점 나아지고는 있다는 점일까, 훈련장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는 모양이었다.
"......보시다시피."
어느정도 회복된 청력으로 받아들인 작은 파열음,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바닥에 퍼진 승우의 모습과, 살아있냐는 물음. 살아있다. 애초에 서로를 죽이려고(죽일 듯이 하긴 했지만) 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게 정상이겠지. 너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호흡했다. 기도에도 화상을 입었는지 숨쉬는 게 어려워 천천히 조금씩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 뒤편까진 화상이 없어서 앉는 것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는 점. 아무래도 그는 너보다 피해가 큰 모양이다. 유의미한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만약 조금만 더 반응이 늦었거나, 버스트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정신을 차리는 건 한참도 뒤였겠지. 점차 잦아드는 통증에 호흡이 원래 속도를 찾아가자, 너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걸로 끝...이겠죠."
분명 강력했지만 충격에 상대가 나가떨어지는 게 가장 큰 맹점이 아닐까, 만약 터트리는 동안 그 자리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너였다.